지음!
봄도 겨울도 아닌 환절기의 계절입니다. 늘상 그렇듯이 이때 즈음에는 사람은 물론 여타 동식물도 탈이 많은 계절이지요. 겨우내 미루어 두었던 감기도 찾아오고, 새봄을 저만치 두고도 추위에 지친 고목은 움을 내지 못하는 경우도 흔한 일이니까요. 천지자연의 기운이 바뀌는 환절기란 그래서 반갑지 않은 낱말이기도 합니다.
겨울도 봄도 아닌 3월 13일에 호남의 명소인 변산반도 국립공원의 안자락인 내변산을 찾았습니다. 고향 가는 길과는 다른 방향이어서 언제고 한번은 꼭 들려본다 하면서도 막상 찾아가지 못한 변산반도. 변산은 그렇게 외딴 지방에 저 홀로 솟아 유유자적한 모습이었습니다.
서해안 고속도로를 내려 달린 산행버스가 부안에 이르자 차창밖으로 너른 평야가 나타났습니다. 평야에는 이제 막 미명에서 깨어난 보리밭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습니다. 보리는 아직 배냇저고리를 벗지 못한 유아의 모습으로 누런 떡잎을 머리에 이고 있었습니다.
산행의 출발지인 우슬재에서 산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옥녀봉을 지나 비룡상천봉에 이르니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멀리 서쪽해안으로 변산반도 해수욕장과 갯벌이 희뿌옇게 바라다 보였습니다.
와우봉을 오르는 산길에 푸른 잎이 가끔 눈에 띄었습니다. 중부지방의 겨울 산길에서 자주 보이는 맥문동인가 하였더니 아니었습니다. 이 지방에 자생하는 춘란의 모습이었습니다. 춘란은 벌써 그 파란 잎줄기를 바닷바람에 흔들어 대며 밀물처럼 다가오는 봄을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3월이 가지 전에 춘란은 꽃망울을 밀어 올리겠지요.
능선은 와우봉에서 쇠뿔바위봉의 중간에서 외변산과 내변산으로 나누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른쪽으로 들면 바닷가에 면한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이르는 길인바, 의상봉과 원효굴, 채석강과 적벽강에 다다르는 외변산이고, 직진하여 능선을 따라가면 지장봉과 서운봉에 닿는 내변산의 산길이었습니다.
와우봉을 지나 동쇠뿔위봉에 이르자 벚꽃같은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분명 눈발인데도 벚꽃같은 눈발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웬일일까요? 산이 아름다운 까닭인가요? 아니면 봄이 가깝다는 생각 탓일까요? 쇠뿔바위봉으로 흩어지는 눈발은 고향마을 초가집 외양간의 풍경을 그대로 생각나게 하기에 충분한 장면이었습니다. 문득 허연 입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쇠죽솥의 무연속으로 소죽냄새, 할아버지 베잠방이에서 나는 땀냄새가 풍겨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쇠뿔바위에 내리는 눈은 땅에 떨어지자마자 녹았습니다. 분명 지금은 겨울이 아니다라는 강한 부정을 가리키는 환절기의 모습이었습니다. 서해 바닷가에서 날려 온 눈은 꽃샘 추위에 다름아니었습니다. 동쇠불바위와 서쇠뿔바위가 인상적인 능선을 지나 안부로 내려서니 돌바위로 이루어진 웅장한 지장봉이 그 위용을 자랑하였습니다. 산행에 나선 사람들의 일부는 지장봉에 올라 산아래의 전망을 조망하기도 하였습니다. 지장봉 아래에는 명당이 많은 듯 주인모를 무덤이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었는데 일행은 무덤가에 모여 앉아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아늑하고 바람이 없어 바람을 등지고 식사하기에 좋았습니다. 산행에 나선 몇몇 사람들의 도시락을 보니 맛있는 반찬을 꽤나 준비하여 왔습니다. 상추 족발보쌈, 구수한 담북장에 소주 등을 주섬주섬 꺼내 놓았습니다. 지난 주에 연타로 마신 주독이 아직 남아 있기에 외돌아 앉아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몇 번인가 잔을 권하는 산행 친구들이 있어 잔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투구봉, 시루봉을 오르는 길에 속도를 내어 보았습니다. 발길을 재게 놀려 선두를 추격하여 나섰습니다. 한 시간 쯤을 그렇게 밟아 나가니 시루봉에 이르러서 선두를 바짝 뒤?i을 수 있었습니다. 시루봉에 올라 섯을 때에 나를 따라 급한 걸음을 한 일행 한 분이 가쁜 숨을 고르면서 내변산의 풍경을 말하였습니다. 내변산은 소나무와 바위로 이루어져 풍경이 뛰어나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나는 지난 주에 다녀온 단양 금수산의 풍경과 지난 봄에 다녀온 해남 덕룡산을 예로 들어 겨울산행과 봄철산행의 특징을 비교하여 응답하였습니다. 겨울산행은 솔숲과 바위와 눈꽃과 바람이 어우러져야 제 맛이 나고, 봄철산행은 진달래와 바위능선과 유채꽃밭이 어우러져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다고 말입니다. 지금은 환절기이기에 그 어느 맛도 우러나지 않는 까닭에 조금은 아쉬운 때라고 말입니다.
시루봉을 지나 전망 바위에 다달았을 때에 갑자기 눈앞이 시원하여졌습니다. 변산반도를 휘돌아 감도는 부안호가 한눈에 들어왔던 것입니다. 쪽빛 푸른 물결이 일렁이는 부안호의 모습은 오늘 산행의 백미였던 것입니다. 솔바위 숲속 계곡에 위치한 부안호는 그야말로 옥색의 물빛이었습니다. 그런대로 호남의 색다른 장면이었습니다. 오염되지 않은 백천에서 흘러든 계곡물이 이룬 부안호는 오염되지 않은 호수라는 데 그 의미를 둘 수 있었습니다. 청정계곡이라는 강원도 동강마져도 래프팅과 관광개발로 몸살이 난 지금, 이만큼 순수한 호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었던 것입니다. 산행에 나섰다가 호수에 반하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었는데 이곳이 바로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보니 조선시대의 실학자 이중환이 지은 택리지에 등장하는 말이 저절로 떠올랐습니다. 이중환(李重煥,1690-1750)이 지은 인문지리서인 택리지는 변산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노령산맥의 한 줄기가 북쪽으로 부안에 이르러 서해 바다 가운데로 뻗어 들었다. 서남북쪽은 모두 큰 바다이고 내륙으로는 많은 산봉우리와 골짜기가 변산을 이루고 있다. 높은 산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산능선이 평지와 비탈길을 막론하고 모두 낙낙장송이 하늘에 솟아 해를 가리었다. 마을 밖에는 소금을 굽거나 고기를 잡는 사람들의 집이 있고, 산중에는 기름지고 좋은 밭이 많다. 주민들이 산에 올라 산나물을 채취하고 산에서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업(業)으로 하며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주고 사지 않을 만큼 풍족하다. 다만 샘물에 풍토병 기운이 있는 것이 유감이다. 위에 말한 여러 큰 산은 큰 도시가 될만하고 작은 것은 고인(高人)과 은사(隱士)가 살 만하다.(蘆領一枝北至扶安斗入西海中西南北皆大海內有千峰萬壑是爲邊山無論高峯絶嶺平地則崖皆落落長松參天예日洞外皆鹽戶漁夫山中多良田沃疇居民上山採蔬菜下山就魚鹽薪炭瀛蛤不待價而足只恨水泉帶장上所謂諸山大則爲都邑小可爲高人隱士栖遯之地而至.)
또한 삼국유사에'백제 땅에 변산(卞山)이라는 산이 있어 변한(卞韓)이라고 하였다.'(百濟地有卞山 故云卞韓)고 하였으니 부안의 변산(邊山)은 본래 변산(卞山)이라 했습니다. 삼한(三韓) 중의 하나인 변한(卞韓)의 이름은 이 변산으로 말미암아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그래서인지 동국여지승람에는 전라도를 변한에 속한 땅이라 적고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 고인돌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도 한 눈에 역사가 오래된 고장임을 알겠습니다.
이 고장을 빛낸 인물로는 실학자 유형원을 들 수 있습니다. 유형원은 본래 이곳 태생이 아닙니다. 유형원이 15세가 되던 해인 1636년 인조 14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가족들과 함께 강원도 원주로 피란을 갔었고, 다음 해에는 경기도 양평읍 지평면 화곡리로 이사하였다가 그 다음해에 다시 여주 백양동으로 자리를 옮기기도 하였습니다. 1644년 23세 때에는 할머니의 상, 1648년 27세 되던 해에는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으며, 탈상되면서 두 차례에 걸쳐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모두 낙방하였습니다. 그 뒤 30세 때인 1651년 효종 2년에는 할아버지의 상을 당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년 뒤 유형원은 32세의 젊은 나이로 이곳 전라도 부안군 보안면 우반동에 은거하기 시작하여 20년간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습니다. 이곳에 은거하면서 오랜 세월을 걸려서 쓴 반계수록(磻溪隨錄) 26권을 남겼습니다.
반계수록 나타난 그의 사상적 특징은 부민(富民)·부국(富國)을 위하여 제도적인 개혁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나라를 부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토지제도를 개혁하여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농민들에게는 최소한의 경작지를 분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형원의 최대목표는 자영농민(自營農民)을 육성하여 민생의 안정과 국가경제를 바로잡자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실학사상은 이익, 홍대용, 정약용 등에게 계승, 발전되었고 그는 ‘실학의 비조(鼻祖’로 받들어졌습니다. 비록 그의 개혁안이 정책적으로 반영되지는 못했으나 학문적으로 인정되어 1770년(영조 46) 왕명으로 ‘반계수록’이 간행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실학사상을 최초로 체계화한 그는 후에 호조참의·찬선(贊善)에 추증되었고 부안의 동림서원(東林書院)에 제향되었습니다. 백천을 따라 난 길을 따라 돌아오는 길에 내변산을 다시 돌아보니 산아래 마을이 아주 평화로왔습니다. 병풍처럼 아름다운 산자락아래 솔향기 그윽한 마을은 부안이라는 지명에 맞에 매우 풍요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지음!
생각보다 짧은 4시간의 산행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부안호의 쪽빛 계곡에 취해 머뭇거리는 사이, 계획된 산행은 오후 2시 30분에 벌써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가는 길에 3시간 오는 길에 4시간을 허비하였으니 어찌 짧은 산행시간이 아깝지 않겠습니까만 계획이 그러하였으니 다른 방도가 없었습니다. 산행에도 환절기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차라리 선운산행을 계획하여 선운사, 내소사의 아름다운 사찰 풍경을 만났더라면 덜 아쉬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자꾸 되뇌어지는군요.
신록을 보는 여름 산행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고 눈꽃을 보는 겨울산행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고 진달래와 유채꽃을 보는 봄철산행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고 붉은 단풍과 계곡을 보는 가을 산행인가하면 또한 그렇지도 않은 환절기의 색깔없는 산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에서도 부안호의 오염되지 않은 쪽빛 물빛과 풋풋한 서해 바닷바람에 날리던 눈발의 향취와 메마른 겨울을 파랗게 건뎌내는 춘란을 만난 일이 그런대로 색다른 장면으로 남는 산행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