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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의령의 한우산(寒雨山·764m)~산성산(山城山·741.4m) 능선은 봄꽃이 화려한 곳이다. 특히 철쭉의 빛깔이 곱고 선명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5월 초 철쭉이 만개하는 시기에 맞춰 축제도 열려 많은 사람이 찾는다. 하지만 철쭉이 한우산의 전부는 아니다. 이 산은 벚꽃, 개나리, 진달래, 철쭉, 초원, 억새 등 언제 찾아도 멋진 볼거리를 제공하는 멋진 산이다. 4월에는 철쭉에 앞서 진달래가 산 전체를 진홍빛으로 물들인다. 사실 진달래는 우리나라 어느 산에서나 볼 수 있는 꽃이다. 하지만 꽃밭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규모의 군락을 이룬 곳은 손에 꼽을 정도. 그런데 이곳 한우산과 산성산의 진달래 군락은 충분히 꽃밭 호칭을 받을 만한 규모를 지녔다. 특히 산성산 정상부의 군락은 전국 어느 곳의 진달래 산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군락지가 등산로에서 조금 떨어져 있어 세세한 곳까지 둘러보기 쉽지 않다는 점. 꽃밭 사이로 탐승로를 개설하면 훌륭한 진달래 탐승지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우산 진달래를 보기 위해 4월15일 의령을 찾았다. 이곳은 진달래 명산인 창원 천주산이나 마산 무학산보다 약간 북쪽이긴 하지만 개화시기는 거의 일치했다. 고도에 따라 하루 이틀 정도의 차이는 나겠지만, 경남 지역의 산들이 진달래로 불타는 시기는 거의 엇비슷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번 산행에는 예솔스포츠 8848팀의 주용규, 이근수, 김혜성, 장영숙씨 등이 함께했다. 서울, 대구, 부산 등지에 떨어져 살면서도 매달 합동산행으로 우의를 다지고 있는 대원들로, 취재팀을 위해 특별히 시간을 냈다. 산길 안내는 의령에서 시인으로 활동하는 궁유면 사무소의 윤제환씨가 맡아주었다. 산성산 정상부는 온통 붉은 물결 며칠째 오락가락하는 황사가 조금 잦아드나 싶더니 의외로 날씨가 쌀쌀해졌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 바람까지 간간히 불어대니 이제 막 움을 틔우던 봄기운이 오그라들었다.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산속에서 노곤한 봄볕을 맞을 기회는 다음으로 미뤄야할 모양이다. 궁유면 사무소에서 모인 일행은 승용차를 이용해 산행기점으로 이동했다. 산행은 찰비골 입구의 벽계 마을 상단에서 시작하기로 했다. 면사무소에서 의령 방면으로 1km쯤 떨어진 삼거리에서 오른쪽 벽계저수지 방면으로 접어들었다. 포장공사가 한창인 도로를 따라 5km 가량 진행하니 정면에 거대한 제방이 눈에 들어온다. 벽계저수지는 경남지역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큰 규모라는데, 이름 그대로 푸른 물이 가득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저수지 상류 다리를 건너 언덕을 1.5km 정도 오르면 오른쪽에 민가로 이어지는 샛길이 보인다. 이 갈림길 한 쪽에 화기임시보관소가 서 있다. 여기서 오른쪽 마을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산으로 들어가는 오솔길이 시작된다. 이 산길은 산성산 북쪽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완만한 경사를 따라 30분이면 크게 힘들이지 않고 능선 안부에 오를 수 있다.
능선에 올라선 뒤 남쪽으로 보이는 높은 봉우리가 첫 번째 목표인 산성산이다. 산성산은 정상과 그 남쪽 봉우리 동쪽 사면에 반원형 토성이 구축되어 있다.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로 흙을 이용해 7~8m 높이로 쌓아올린 것이다. 산 이름도 이 토성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진다. 산성산 정상으로 향하는 좁은 산길 주변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군락으로 보기에는 너무 적은 규모지만, 연분홍 꽃잎은 잿빛 산자락 속에서 보석처럼 빛났다. 하지만 계속된 짙은 숲이 시야를 가리는 탓에 제대로 된 진달래 구경은 어려웠다. 일단 정상까지 오르는 것이 급선무라 생각하고 급히 발길을 옮겼다. 영화에서 나왔던 구불구불한 임도 진로를 막는 잡목 가득한 산길을 따라 30분쯤 오르니 하늘이 터지며 넓은 헬기장이 나타났다. 가파른 산길은 이곳에서 끝난다. 천천히 주변을 돌아보며 잠시 숨을 돌렸다. 건너편으로 한우산으로 오르는 임도가 정면으로 보인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독특한 모습의 산길이 눈길을 끈다. 영화 아름다운 시절의 마지막 장면인 길 떠나는 가족을 촬영한 바로 그 장소다. 윤제환씨는 군청 공보실에서 근무할 때 이곳으로 영화제작팀을 안내했다고 한다. “인생사의 구불구불한 역정과 한 가정의 몰락을 표현하기에 딱 좋은 곳이지요. 이광모 감독이 구상했던 영상과 딱 맞아 떨어지는 장소였습니다. 새벽에 길을 떠나는 신이었지만, 촬영은 저녁 무렵에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의령군은 벽계저수지 일대와 찰비골을 거슬러오르는 이 산길을 연계해 관광명소로 개발하고 있다. 하지만 기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산성산 정상부를 수놓은 진달래가 먼저였다. 헬기장에서 정상으로 이어진 산길 주변은 물론이요, 남동쪽 사면의 토성 내부가 완전히 꽃밭으로 변해 있었다. 이 지역에 사는 윤제환씨도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며 놀라워했다. “이렇게 큰 진달래 군락이 있는지 몰랐네요. 한우산 하면 철쭉으로 알려져 있는데, 앞으로는 진달래가 더 유명한 산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진달래 군락 전체를 조망할 만한 전망장소가 부족하다는 점은 아쉬웠다. 진달래나무의 키가 워낙 커 군락 속으로 들어가면 눈앞의 꽃밖에 안보였다. 게다가 주능선 외에는 길이 전혀 없어 꽃을 보기 위해 가시덩굴 수풀을 헤치고 다녀야 했다. 산성을 따라 탐방할 수 있다면 훨씬 좋을 것 같다. 특이하게도 이곳 진달래은 철쭉과 거의 1대 1 비율로 섞여 자라고 있었다. 진달래가 지면 그 자리에 거의 비슷한 규모의 철쭉 군락이 꽃을 피우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4월부터 5월까지 늘 붉은 꽃을 볼 수 있다. 정상에는 ‘산성산 741.1m'이라고 쓴 주먹만한 돌과 삼각점 외에든 별다른 특징은 없다. 산길은 남쪽을 향해 잠시 몸을 낮춘 뒤 다시 일어난다. 숲길에 이어 억새밭이 펼쳐진다. 서쪽으로는 간간이 기암절벽이 쏟아져 내리고, 그 밑 외초리 일대의 너른 들판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멀리 지리산의 웅장한 산줄기도 하늘금을 그린다. 조망이 멋진 산이다. 활공장 주변이 한우산 최고의 철쭉밭 825m봉을 오르다보면 동쪽 지능선 위에 널찍한 주차장과 화장실을 갖춘 전망대가 보인다. 승용차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잘 정비된 임도가 이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산속까지 파고든 도로는 아쉽지만, 멋진 경관을 여러 사람이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리고 나름대로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것 또한 다행이라 하겠다. 평평하고 전망이 좋은 825m봉을 거쳐 잠시 내려서니 임도와 만났다. 널찍한 공터가 형성된 이 장소에서 한우산 철쭉제의 주요행사가 열린다. 이미 여러 대의 차량이 공터에 서 있다. 여기서 점심 식사를 한 뒤 한우산으로 향했다. 산길은 비교적 평탄한 능선을 따라 이어진다. 임도에서 15분이면 자굴산으로 능선이 갈려나가는 한우산 정상에 설 수 있다. 나무들이 많이 자라고 있어 조망은 그다지 좋지 않다. 남쪽 가까운 곳에 의젓하게 솟은 봉우리는 자굴산이다. 자굴산은 91년 본지에 소개된 이후 이 지역을 대표하는 산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의령을 찾는 등산객들 대다수가 자굴산을 오른다고 보면 틀림없다. 반면 한우산~산성산 능선길은 휴일에도 비교적 한적한 편이다. 호젓한 산행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산이다. 정상에서 내리막길을 타고 조금 내려서니 안부의 활공장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북쪽 사면에 진달래가 만발해 있다. 이곳도 군락지의 규모가 제법 컸는데, 산성산 정상부와 마찬가지로 철쭉과 진달래가 공생하고 있다. 활공장 일대는 한우산에서 철쭉이 가장 화려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철쭉제가 열리는 5월7일에는 이곳에 활짝 핀 철쭉꽃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활공장에서 계속해 주능선을 타면 북쪽 초원지대로 산행을 이어갈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영화 촬영지였던 찰비골의 굽이 길을 통해 하산하기로 했다. 찰비골은 한우산의 옛 이름인 찰비산에서 유래한 명칭으로, 찰 한(寒) 자 비 우(雨) 자를 써서 말 그대로 찬 비가 내린다는 의미를 지녔다. 이 계곡은 한 여름에도 이불 없이는 잠을 청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해 피서지로 인기 있다. 가끔씩 승합차가 지나다니긴 했지만 워낙 커브가 심한 곳이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노면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지만 사면에서 떨어진 굵은 자갈이 제법 많았기 때문이다. 걸어가는 것보다는 빨라도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도로를 걷는 일은 쉽게 지루해진다. 찰비골 속에는 성큼 봄이 다가와 있었다. 계곡가 풀이 제법 길어졌고, 싹을 틔운 나뭇잎도 성큼 자라났다. 구름이 걷히기 시작하며 물소리에서도 온기가 느껴진다. 나들이 나온 아낙네들은 풀밭에 앉아 나물을 뜯느라 여념이 없다. 높은 산 깊은 골에도 어쩔 수 없는 봄은 찾아들고 있었다. 임도를 통해 출발지점까지 돌아오는데 1시간쯤 걸렸다. 처음에는 임도의 굽이가 심했지만 하류로 내려가며 거의 직선으로 뻗어 예상외로 시간이 단축됐다. 독자들이 책을 받아볼 즈음 한우산 진달래는 모두 지고 새로운 모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봄의 전령 철쭉꽃이 피어나기 때문이다. 한우산 철쭉은 어린이날 즈음이 가장 좋다고 한다. 철쭉제를 전후해 아이들과 함께 한우산에서 봄을 맞는 것도 좋은 추억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