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질 시대 |
연대(년 전) |
계산된 월, 일 |
지구 탄생 |
46억 |
1월 1일 0시 0분 |
선캄브리아대 시작 |
38억 |
2월 26일 18시 48분 |
고생대 시작 |
5억 7천만 |
11월 15일 18시 24분 |
어류의 출현 |
4억 5천만 |
11월 25일 12시 00분 |
양서류의 출현 |
3억 6천만 |
12월 02일 19시 12분 |
파충류의 출현 |
3억 2천만 |
12월 06일 01시 04분 |
중생대 시작 |
2억 3천만 |
12월 13일 08시 16분 |
포유류의 출현 |
2억 1천만 |
12월 14일 23시 12분 |
공룡 및 시조새의 출현 |
2억 |
12월 15일 18시 40분 |
신생대 시작 |
6천 5백만 |
12월 26일 17시 28분 |
유인원의 출현 |
250만 |
12월 31일 19시 08분 |
인류 출현 |
50만 |
12월 31일 23시 02분 |
1. 선캄브리아 시대
지질시대에서 지금으로부터 약 6억 년 이전의 시대를 선캄브리아대라고 한다. 약 25억 년 전을 경계로 시생대와 원생대로 나뉜다. 이 시기의 암석은 오랜 지질시대를 지나는 동안 여러 차례의 지각변동을 받아 대부분 변성암과 화성암으로 변했고, 그 구조도 일반적으로 복잡하다. 각 대륙에는 선캄브리아대의 암석으로 되어 있는 순상지(楯狀地)가 넓게 발달되어 있다. 이 순상지들은 고생대 이후 급격한 조산운동(造山運動)을 거의 받지 않았고 오랜 침식작용으로 지형적으로 저지(低地)를 이루고 있다.
⑴ 생물계:지구상에 생물이 어떻게 출현했느냐에 대한 문제는 최근 여러 분야에서의 집중적인 연구로 크게 진전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확실한 답을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암모니아 ·메탄 ·수증기 등 원시대기의 구성물질들이 외계에서 온 방사능과 대기 중의 번개의 작용으로 서로 화합하여 복잡한 유기화합물을 이루었고, 이들은 바다 밑에서 더욱 복잡한 유기물질인 단백질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단백질 구조가 좀더 성장하여 코아세르베이트라는 작은 공 모양의 물체가 되었으며, 이것이 외부와의 물질대사를 하게 되면서 생물이 탄생한 것으로 본다. 생물계의 화석으로 보이는 것 중 가장 오랜 것은 남아프리카 픽트리층의 처트층에서 발견한 공 모양의 미세한 조류(藻類) 및 박테리아류의 화석으로, 이 화석이 포함된 지층의 연대는 31∼32억 년 전이다. 그러므로 지구상에는 그보다 훨씬 이전에 생물이 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화석에 나타난 증거에 의하면 시생대(始生代)와 초기 원생대(原生代)에는 청록조류 ·박테리아류 등 원핵세포(prokaryotic cell)의 하등생물이 존재했고, 약 14억 년 전부터는 녹조류(綠藻類) 등 진핵세포(eucaryotic cell) 생물이 나타났다. 최초의 동물화석이 나타난 것은 이보다 2억 년이나 뒤인 약 12억 년 전으로, 하등식물의 출현보다 훨씬 후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원시대기의 성분에 산소가 거의 없어서 동물의 생존에 부적합했기 때문이며, 초기의 각종 조류(藻類)의 번성은 이들의 동화작용(同化作用)으로 대기 중의 산소의 양을 급격히 증대시켰다. 초기의 산소는 지표에 드러난 철분을 산화시키는 데 소모되었지만, 선캄브리아대 말기가 되면 비로소 동물이 호흡을 할 수 있을 정도에 이르게 된다.
⑵ 지각변동:가장 오래된 암석은 38억 5000만 년의 나이를 가진 암석으로 그린란드 남서부에 분포되어 있다. 현재 알려진 가장 오랜 조산운동은 36억 년 전에 일어난 것으로, 북아메리카대륙 ·그린란드 ·아프리카 및 시베리아 등지에서 나타난다. 두번째 조산운동은 약 30억 년 전에 거의 같은 지역에서 광범하게 일어났고, 다시 28억~27억 5000만 년 전에는 염기성현무암의 화산활동이 거의 전대륙에 걸쳐 일어났다. 시생대 말기인 27억~25억 년 전에는 광범위한 화강암류의 관입(貫入)이 있었다. 원생대에 들어와서는 그 초기인 18억 5000만 년 전과 17억 년 전에 2회의 큰 조산운동이 있었고, 중기에도 15억~14억 년 전과 약 12억 년 전에 2회의 광범위한 조산운동이 일어났다. 최초의 지향사는 원생대 초기에 형성되었고, 중기에도 대륙의 주변부를 따라 두꺼운 퇴적층의 지향사들이 발달되었다. 원생대 중기인 약 11억 5000만 년 전에는 모든 대륙이 원시초대륙(原始超大陸:Proto-Pangaea)라고 하는 거대한 하나의 대륙을 이루고 있었다.
⑶ 기후:구성 암석이 변질되었고, 화석산출이 빈약하여 선캄브리아대 초기의 기후를 밝히는 일은 불가능하나, 원생대에 들어서부터는 퇴적암석의 특성과 화석을 통하여 비교적 잘 해명되고 있다. 거의 20억 년 동안 지속된 원생대 기간에는 4회의 대규모 빙하시대가 알려지고 있다. 이는 고생대 이후 약 6억 년간 지속된 현생누대에서 3회의 큰 빙하시대가 있었던 것과 비교해 볼 때 현저한 차이를 보여주며, 당시의 기후가 현생누대에 비하여 온난하였던 것을 암시한다. 특히 22억 5000만~8억 8000만 년 전에는 빙하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기간은 더욱 온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원생대의 빙하시대는 23억 년 전, 8억 7500만 년 전, 7억 4000만 년 전과 6억 1000만 년 전이었다.
2. 고생대
선캄브리아대에 비하면, 고생대 이후 지구의 역사는 아주 잘 알려져 있다. 고생대 이후의 퇴적암류는 대부분 변성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화석이 다량으로 산출되기 때문이다. 고생대는 약 6억 년 전에서 2억 2500만 년 전까지 3억 7500만 년간 지속되었으며, 오래된 순서부터 캄브리아기(紀) ·오르도비스기 ·실루리아기 ·데본기 ·석탄기 및 페름기의 6기로 나뉜다. 북아메리카대륙에 대해서는 석탄기를 둘로 나누어 하부를 미시시피기, 상부를 펜실베이니아기라고 한다.
⑴ 생물계:선캄브리아대의 지층이 대부분 편마암 ·편암 등의 변성암인 데 비하여 고생대의 지층은 주로 퇴적암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캄브리아기의 지층을 비롯한 하부 고생대층은 선캄브리아대의 순상지 주변을 따라 발달하였다. 캄브리아기에는 초기부터 여러 종류의 무척추동물 화석이 다량으로 산출되어 선캄브리아대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대부분의 동물은 그 조직과 구조가 아직 원시적이며, 겉껍질은 각질(角質) 또는 키틴질로 되어 있고, 석회질 껍질을 가진 것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 시기에는 특히 삼엽충(三葉蟲)과 완족류가 전체의 90%를 차지하고 있었다.
오르도비스기에 이르면 나우틸로이드 ·판상산호 ·사방산호 등 무척추동물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특히 필석류(筆石類)는 오르도비스기와 실루리아기에 걸쳐 번성하였으므로 이 두 시기를 필석류의 시대라고 한다. 오르도비스기에는 최초의 척추동물로서 무악류(無顎類)라는 원시어류가 출현하고, 실루리아기 후기에는 식물들이 육지로 상륙하기 시작하였다.
고생대 후기에 이르면 척추동물이 현저하게 발전하여 데본기에는 무악류, 연골어류 및 경골어류 등 그 종류가 다양해지며 크게 번성했기 때문에 이 시기를 어류의 시대라고 한다. 또한 데본기 말기에는 양서류가 최초로 출현하여 육지에서 살게 되어 척추동물이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서 석탄기에는 파충류가 새로이 출현하였다. 파충류의 알은 딱딱한 골질(骨質)의 껍데기로 보호되어 있었기 때문에 물에서도 양분과 수분을 보존할 수 있었다. 파충류의 출현은 동물이 마침내 완전히 육지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식물계는 고생대 후기, 특히 석탄기에 이르러 양치식물 ·석송류 ·속씨류 등이 크게 번성하여 도처에서 큰 삼림을 이루었다. 현재 유럽 ·북아메리카대륙 등지의 두꺼운 석탄층은 석탄기에 이들이 매몰되어 이루어진 것이고, 한국 ·중국 ·오스트레일리아에 형성된 석탄층은 석탄기 다음 시기인 페름기에 형성된 것이다. 그 밖에 바다의 무척추동물계에는 석탄기 중엽부터 방추충(紡錘蟲)이 출현하여 고생대 말기까지 번성하였고, 이와 함께 완족류 ·사방산호 ·판상산호 ·바다나리 등도 중요한 위치를 유지하였으나 고생대 말기에 삼엽충과 함께 절멸하거나 크게 쇠퇴하였다.
⑵ 지각변동:고생대 초기는 비교적 조용한 시기였으나, 오르도비스기부터 비교적 활발하게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실루리아기 후기와 데본기에는 대규모 칼레도니아조산운동이 일어나 노르웨이와 영국, 북아메리카의 애팔래치아 지역에 큰 산맥을 만들었다. 고생대 후기에는 유럽과 북아메리카 동부에서 조산운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유럽에서는 석탄기와 페름기에 걸쳐 바리스칸조산운동이 일어나 유럽 중부의 산맥과 우랄산맥 등이 형성되었으며, 북아메리카의 애팔래치아산맥에서는 페름기 말에 앨러게이니조산운동이 일어났다.
이 밖에 중국의 톈산[天山]산맥에서 조산운동이 있었고, 일본열도의 중추부를 따라 부분적인 조산운동이 일어나 해저의 일부가 육화(陸化)되었다. 이와 같은 조산운동은 원생대 후기에 서로 떨어져 있던 고(古)유럽 ·고북아메리카대륙 ·고시베리아대륙 및 곤드와나대륙이 서로 접근하여 충돌했기 때문인데, 이에 의하여 고생대 말기에는 모든 대륙이 하나로 결합되었다. 이를 초대륙(Pangaea)이라고 한다.
⑶ 기후:고생대 초기인 캄브리아기에는 당시에 고위도(高緯度) 지역이던 중국과 모로코 등지까지 비교적 두꺼운 탄산염암층이 발달한 것으로 미루어 현재보다 온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르도비스기 후기에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남위 50 ° 범위 내에 넓은 빙성층(氷成層)이 형성되어 당시 남반구의 기온이 현재보다 낮은 상태였음을 보여준다. 실루리아기와 데본기는 퇴적층의 분포로 보아 현재의 기후와 비슷했을 것 같다.
석탄기 초기부터 페름기까지는 남극 주변부에 기온이 급격히 떨어져 당시 남극권 주위에 모여 있던 아프리카 남부 ·남아메리카 ·남극대륙 ·호주 및 인도대륙에 두꺼운 빙성층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적도 부근에 위치한 유럽대륙과 북아메리카대륙의 대부분은 열대 및 아열대 지역이었고, 고위도지역인 일본에는 탄산염암이 형성된 것으로 보아 북극권 주변은 남극권보다 온난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페름기 초기에는 다소 기온이 떨어졌으나 중기 이후 회복되었고, 북아메리카와 러시아 및 유럽 지역은 당시 위도로 북위 15∼30 °의 범위로, 탄산암염 등이 두껍게 발달되었다.
3. 중생대
중생대는 2억 2500만 년 전부터 6500만 년 전까지의 시기로, 약 1억 6000만 년간 지속되었다. 이 시기는 초기의 트라이아스기, 중기의 쥐라기, 후기의 백악기로 나뉜다. 파충류와 겉씨식물이 크게 번성하여 파충류의 시대 또는 식물의 시대라고도 한다.
⑴ 생물계:파충류는 트라이아스기부터 급속히 분화 ·발전하여 그 종류가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어룡(魚龍)과 같은 일부는 다시 바다로 돌아가 생활환경도 크게 확대되었다. 특히 공룡류는 트라이아스기 후기에 출현하여 중생대 전반에 걸쳐 육지를 지배하였다. 초기의 공룡류는 크기가 작고 비교적 날렵하게 움직였으나, 쥐라기 이후에는 덩치가 매우 커졌다.
공룡류는 다른 대부분의 파충류가 몸을 땅에 대고 기어다니는 데 반하여 포유류와 같이 땅에서 몸을 떼고 네 발 또는 뒷발과 꼬리를 움직여 보행하였다. 공룡류는 분류학상으로 용반목(龍盤目)과 조반목(鳥盤目)으로 나뉘는데, 이는 그들의 골격 특히 골반구조의 차이에 의한 것이다. 용반목은 다시 수각류(獸脚類)와 용각류(龍脚類)의 두 아목(亞目)으로, 조반목은 조각류(鳥脚類) ·검룡류(劍龍類) ·각룡류(角龍類) ·곡룡류(曲龍類)의 네 아목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수각류는 육식성 공룡으로 뒷발과 꼬리를 움직여서 걸었고, 용각류와 조반목의 4종류는 초식성 공룡으로 대부분 사지를 사용하여 걸었다.
용각류 중 브론토사우루스와 디플로도쿠스는 몸길이 30m, 몸무게 40t에 달하는 거대한 공룡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거대한 덩치는 운동에 부적당하였으므로 이들은 얕은 연못이나 늪지 부근에 서식하였을 것이다. 쥐라기에는 날개를 가진 익룡(翼龍)이 출현하여 파충류의 생활환경이 공중으로 확대되었다. 백악기의 프테라노돈은 그 펼친 날개의 너비가 9m에 달하였다.
한편, 쥐라기 후기에는 아르카이옵테리스(Archaeopteris)라는 시조새(始祖鳥)가 출현하였다. 비록 주둥이에 이빨과, 날개 앞부분에 발가락 흔적이 있고, 오늘날 조류에서 볼 수 있는 흉골(胸骨)의 발달이 미숙한 점 등 그 골격구조가 공룡류와 흡사하나, 꼬리와 날개의 깃털은 이것이 조류에 속하는 것임을 확인해준다. 크기는 비둘기 정도였으며, 짧은 거리를 미끄러져 갈 정도밖에는 날지 못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트라이아스기 말기에는 포유류가 출현하였으나 그 후 중생대 동안에는 미미한 발달을 보였다.
식물계에서는 트라이아스기와 쥐라기에는 은행나무류 ·소철류 ·송백류 등 겉씨식물이 우세하였으며, 백악기 중기 이후에는 앞서 쥐라기에 출현한 속씨식물이 크게 번성하였다. 무척추동물로는 바다에 사는 연체동물인 암모나이트류와 벨렘나이트류가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암모나이트류는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 모양이 변했기 때문에 시대를 결정해 주는 훌륭한 표준화석으로 이용되고 있다. 그 밖에 고생대에서와는 달리 육사산호와 팔사산호가 트라이아스기 중기부터 번성하였고, 이매패류 및 복족류와, 미생물인 유공충 ·규조 ·편모충 등이 중생대 후기에 현저하게 발전하였다. 어류는 현생종과 비슷한 것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⑵ 지각변동:고생대 말기에 형성된 하나의 초대륙은 중생대 트라이아스기 후기부터 다시 여러 대륙으로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북아메리카대륙과 유럽대륙이 곤드와나대륙에서 분리되고, 곤드와나대륙도 아프리카 ·호주 ·남아메리카 및 남극 대륙으로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쥐라기 후기에는 인도와 마다가스카르가 아프리카에서, 그린란드가 북아메리카대륙에서 떨어져 나왔다. 이와 같은 대륙의 분열과 이동은 도처에서 지향사(地向斜)를 만들고 조산운동을 일으켰다.
특히 환태평양지역에서는 쥐라기 후기에 이르러 북아메리카 서부의 네바다조산운동, 일본의 오가[大賀]조산운동, 한국의 대보(大寶)조산운동, 중국의 옌산[燕山]조산운동 등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백악기 말기에도 계속 지각변동과 화성활동이 일어났다. 북아메리카 서부에서는 라라미드조산운동이 일어나 고생대 이후 북아메리카 서부지역에 발달된 코딜레라지향사를 습곡산맥(褶曲山脈)으로 변형시켜 현재의 로키산맥의 골격을 이루어 놓았다.
⑶ 기후:전체적으로 보아 고생대와 신생대보다 온난하였다. 트라이아스기에는 사구사암(砂丘砂岩)이 당시의 고위도 지역까지 넓게 발달된 반면 빙성층이 알려져 있지 않은 점으로 보아 전세계적으로 건조하고 온난한 기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쥐라기와 백악기 초기에는 아열대성 식물들이 위도 70°의 고위도 지방까지 번성하였던 것으로 보아 매우 온난하고 습윤한 기후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악기 후기에는 서늘한 기후로 변하였는데, 이는 백악기 후기에 있었던 대륙의 융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4. 신생대
신생대는 6500만 년 전부터 현세에 이르는 지질시대의 마지막 시기이다. 크게 제3기와 제4기로 나뉘고, 제3기는 차례로 팔레오세 ·에오세 ·올리고세 ·마이오세 ·플라이오세로 세분되며, 제4기는 홍적세와 충적세로 구분된다. 제3기의 팔레오세 ·에오세 ·올리고세를 묶어 고제3기(古第三紀)라 하고, 마이오세와 이 대체적인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여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습을 플라이오세를 합쳐 신제3기(新第三紀)라고도 한다. 신생대 초기에는 현재 지구상의 대륙과 해양갖추었다. 생물계에서는 포유류와 속씨식물이 급격히 번성하여 현재의 동 ·식물계를 이루게 되었고, 제4기에는 인류가 출현하여 현대인으로 진화하였다.
⑴ 생물계:포유류는 중생대 트라이아스기에 이미 출현하였으나 이들 원시포유류는 덩치가 극히 작았을 뿐 아니라 그 수도 적었고, 대부분 중생대 말기에 전멸하였다. 현재의 포유류는 백악기 말기에 판토테리아(Pantotheria)에서 진화한 유대류(有袋類)와 유태반류(有胎盤類)가 신생대로 넘어와 크게 번성한 것이다. 중생대의 육지와 바다 및 공중을 지배한 공룡 ·어룡 ·익룡은 백악기 말에 절멸되어 신생대 초기에는 생태계에 큰 공백이 생겼고, 포유류는 이를 이용하여 매우 빠른 속도로 진화하였다.
초기의 포유류는 대체로 작은 몸과 작은 두개골에 짧은 사지와 다섯 개의 발가락, 44개의 치아를 가졌으나, 점차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몸과 두개골이 커지고, 사지의 구조도 생활습성에 따라 세분화하고 치아의 수도 감소하였다. 이와 같은 현상은 말 ·낙타 ·코끼리 등의 조상를 통해 잘 나타난다. 유대류는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조건을 갖춘 유태반류에 압도되어 대부분 지역에서 소멸되었으나 호주대륙에서는 아직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신생대 초기에 호주대륙이 다른 대륙에서 격리되어, 다른 동물의 침입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식물계는 백악기 중기 이후 번성한 속씨식물이 신생대에 들어와 그 종류가 더욱 다양화하고 현대화하였다.
신생대 초기의 팔레오세와 에오세의 온대산림에는 포플러 ·자작나무 ·오리나무 등이, 올리고세의 온대삼림에는 참나무 ·너도밤나무 ·밤나무 등이 나타났고, 마이오세에는 초원이 넓게 발달하였다. 마이오세 이후에는 기온이 점차 낮아져 열대 ·아열대 식물은 적도지역으로 축소되고 대신에 한대성 식물이 남쪽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바다에서는 이매패류와 복족류 등 연체동물이 계속 발전하였고 유공충도 크게 번성하였다. 특히 고제3기에는 화폐석(貨幣石)이라는 대형 유공충이 번성하여 이 시대를 화폐석의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⑵ 인류의 출현:신생대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은 인류의 출현이다. 인류는 분류학적으로 영장목(靈長目)에 속하는데, 영장목의 선조는 신생대 초기의 여우원숭이와 안경원숭이에서 시작되어 신생대 중기의 원숭이류를 거쳐 신생대 말기에 인류의 선조가 되는 원인(猿人)으로 발전한다. 최초의 원인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 africanus)로, 이 원인은 두개골의 크기가 현대인의 반 정도밖에 안 되었고 아직 턱과 이마의 구조가 원숭이류와 유사하였다.
이후에 출현한 직립원인(直立猿人)은 두개골의 크기가 현대인의 2/3에 가까웠고 치아구조도 현대인에 가까운 모습을 하였으며, 불을 사용할 줄 알았다. 직립원인 이후에는 두개골의 크기와 치아구조가 현대인과 흡사한 네안데르탈인이 출현하였다. 현대인보다 체구가 작고 조금 굽은 네안데르탈인은 약 30만 년 전에 출현하여 7만 년 전까지 생존하였으며, 종교의식을 행한 흔적이 있다. 그 후 약 3만 5000년 전에는 현대인과 같은 종에 속하는 크로마뇽인이 출현하여 현대인(Homo sapiens)의 선조가 되었다.
⑶ 지각변동:신생대에는 대륙의 분리와 이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신생대 초기에 호주대륙과 남극대륙이 갈라져 나갔고, 인도가 세이셸군도에서 떨어져 나와 북쪽으로 이동하여 유라시아대륙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고생대 이래 남반구와 북반구에 가로놓인 테티스해가 사라지고, 이 지역을 따라 알프스-히말라야조산운동이 일어나 알프스산맥과 히말라야산맥이 형성되었다.
마이오세에는 아프리카로부터 아라비아반도가 분리되어 현재의 홍해와 아덴만이 이루어졌고, 미국의 캘리포니아만도 이 때에 생겼다. 대륙판들의 이동으로 중생대 이래 대서양과 인도양이 점차 확장되어, 대서양 북부에서는 홍적세 이래 그 너비가 약 48km가 넓어졌다. 한편, 제4기 동안에는 유럽의 스칸디나비아반도와 북아메리카의 허드슨만 지역이 그 동안 두터운 얼음으로 덮여 있다가 최후의 빙하기가 지난 후 점차 얼음이 녹자 크게 융기하였으며, 세계적으로 해수면(海水面)도 100m 정도 상승하였다.
⑷ 기후:신생대 초기인 팔레오세와 에오세는 일반적으로 온난하여 열대 ·아열대성기후가 폭넓게 발달하였다. 그러나 올리고세 초기부터는 기온이 점차 떨어졌고, 제4기 홍적세에 이르러서는 빙하시대가 내습하였다. 이러한 한랭한 기후가 발달한 시기를 대빙하시대(大氷河時代)라고 한다. 대빙하기에는 사이사이에 기온이 상승하여 온난한 기후를 유지하던 때들이 있었는데, 이 시기를 간빙기(間氷期)라 한다.
대빙하 동안에는 지금까지 모두 3회의 간빙기가 있었음이 밝혀졌고, 이 간빙기를 경계로 4개의 기간으로 구분된다. 또한 열대와 온대지역의 온도가 현재보다 5∼10℃ 낮았고, 유럽 북부와 시베리아의 대부분이 두꺼운 얼음에 덮여 있었다. 따라서 대양의 해수면이 현재보다 100m 정도 낮아, 러시아의 시베리아 동부와 북아메리카의 알래스카가 연결되었고, 영국이 유럽에, 동남아 근해의 섬들이 대륙에 육지로 연결되어 동식물의 이동이 가능했다. 현재는 네번째 빙하기가 지난 후의 간빙기에 해당되는 시기라고도 한다.
* 암석의 순환
1. 암석의 순환
암석은 생성 과정에 따라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으로 분류된다. 이들은 한 번 생성된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암석이 놓인 환경에 따라 오랜 기간에 걸쳐 다른 종류의 암석으로 계속 변화한다. 이러한 암석의 연관 관계를 암석의 순환이라고 한다.
2. 암석의 순환 과정
(1) 지표 근처의 암석이 풍화, 침식, 운반 작용으로 바다에 쌓여 퇴적암이 만들어진다.
(2) 두껍게 쌓인 퇴적암과 바다 밑의 화성암이 지하 깊은 곳으로 들어가 높은 열과 압력을 받으면 변성암이 된다.
(3) 암석이 변성 작용을 받을 때보다 더 큰 열을 받게 되면 녹아서 마그마가 된다.
(4) 마그마가 지표로 분출되거나 지하에서 식어 굳으면 화성암이 된다.
(5) 화성암, 퇴적암, 변성암은 주위 환경에 따라 다른 종류의 암석으로 계속 변하면서 순환한다.
3. 암석의 순환과 주위 환경
(1) 물이 온도에 따라 고체, 액체, 기체 상태로 변하는 것과 같이 암석도 주어진 조건에 따라 안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하여 계속 변하고 있다.
(2) 암석이 생성되는 과정에는 보통 높은 온도와 압력이 작용하는데, 가장 높은 온도와 압력을 받은 것은 화성암이 생길 때이고, 퇴적암은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생긴다.
4. 화강암화 작용
(1) 화강암은 보통 용융 상태의 마그마가 냉각되어 생성되지만, 고온 고압에 의한 변성 작용으로 암석이 고체 상태에서 화강암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다.
(2) 장석이나 운모를 가지고 있지 않던 암석도 화강암화 작용을 받는 과정에서 장석과 운모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화강암은 화성암이기도 하지만 전혀 다른 암석으로부터 생긴 변성암이기도 하다.
5. 암석순환
마그마가 식어서 화성암, 쌓이고 굳어서 퇴적암. 열 받고 압력 받아 변성암
화성암
땅위에서 만들어진 화산암, 가스 빠져 구멍 뚫린 현무암, 땅속에서 만들어진 심성암, 광물 입자 큰 화강암
퇴적암
점토가 굳어서 이암, 모래가 쌓여 굳어 사암, 자갈 사이 모래 섞어 굳은 역암, 탄산칼슘 주성분 석회암
변성암
압력과 열로 인한 변성암, 화강암이 압력 받아 편마암, 석회암이 열 받아 대리암, 사암이 열을 받아 규암
* 구석기시대
각 지역에 따라서 상이한 특색을 가지고 있고 연대적으로도 차이가 있어 그 전반적 개관은 불가능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유라프리카의 온대지역·아열대지역에서의 문화 발전을 하나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 현대에도 같은 정도의 문화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정체적(停滯的) 문화로 해석되고 있다.
처음으로 구석기 존재가 알려지게 된 것은 1846년 부셰드 페르테가 북(北)프랑스의 아브빌 부근 솜 하곡의 플라이오층에서 절멸된 종류의 동물 유골과 함께 플린트의 인공물을 발견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구석기시대라는 용어는 1865년 영국의 J.러벅(1834∼1913)에 의해 명명되었는데, 뜻은 간석기시대와 반대되는 뗀석기시대라는 것이다.
구석기시대의 편년(編年)은 유럽에서 먼저 제정되었는데, 특히 선사 유적이 많은 프랑스 선사 유적의 발굴결과에 따라서 결정되었다. 63년 E.라르테(1801∼71)는 구석기시대의 편년을 3시기로 구분하였다. 제1시기는 아브빌문화·아문화·무스티에문화의 순이고, 제2시기는 오리냐크문화와 샤텔페롱문화, 제3시기는 로제리 오트와 마들렌문화로 모두 석기 유형에 따라 특징지워진다.
라르테가 주장한 3시기의 분류는 여러 번 수정되었고, 72년 G.모르티예(1821∼98)는 구석기시대를 아문화·무스티에문화·솔뤼트레문화·마들렌문화 등의 4시기로 주장함으로써 모르티에 편년이 설정되었다. 83년 그는 셸레안의 연속물에 대한 기준을 소개하였고, H.브뢰유는 이 문제에 관하여 중요한 수정을 가하였다.
1906년 브뢰유는 무스티에문화와 솔뤼트레문화 사이에 오리냐크문화가 반드시 개재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셸레안이라는 명칭을 아브빌문화로 대치하였다. 32년경 그는 한 이론을 내세웠는데, 거기에 따르면 구석기시대의 시작은 클랙턴문화·르발루아문화·타야크문화·무스티에문화 등의 격지석기문화와 아브빌문화 ·아문화 등의 주먹도끼문화가 나란히 발전된 것으로 보았다.
이후부터 세계 각처에서 많은 구석기시대 유적을 발굴하여 오늘날에는 구석기시대를 크게 3시기로 나누고 있으며, 타지방의 구석기 편년도 이 프랑스 편년을 기준으로 하여 시도되었다. 그 뒤 영국·독일·벨기에 등에서도 연구가 진전되었으며, 특히 전기구석기문화에서는 종래의 주먹도끼[握斧]를 중심으로 한 문화와는 다른 계통의 것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H.오버마이어는 서방의 몸돌석기문화권에 대하여 동방의 격지석기문화권이 병존하였음을 주장하고, 양 문화가 서로 관련되면서 변화하였다고 지적하였다. 또 아프리카·아시아 지역의 연구가 진전됨에 따라 더욱 복잡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특히 동남아시아에는 외날찍개문화권이 별도로 설정되어, 3대 문화권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구석기시대는 약 60만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하며, 인류의 전역사 중 최후의 1∼2만 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대에 걸쳐 있었고 자연환경의 변화도 극심하였다. 각지의 생활내용은 단조로웠으며, 변화도 적어 수렵·채집의 경제단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구석기시대 전기는 아브빌문화·아문화·르발루아문화와 클랙턴문화, 구석기시대 중기는 무스티에문화, 구석기시대 후기는 페리고드문화·오리냐크문화·솔뤼트레문화·마들렌문화 등으로 구분된다
모두 뗀석기[打製石器]이며, 자연적인 암석에다 약간의 손재주로 변형시켜 사용한 석기부터, 꽤 정교한 형태를 한 석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가 있다. 장구한 세월의 경험에 의해서 석재의 선택·제작방법에도 전통이 생겼고, 형태도 일정한 형(型)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기형상(器型上)으로 볼 때 몸돌[石核]석기와 격지[剝片]석기의 2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 몸돌석기:덩어리로 된 큰 돌의 일부를 때려서 잘라 내거나, 조약돌 같은 작은 돌의 둘레를 때려서 껍질을 벗기듯이 떼어 내서 만든 석기. 소재가 된 돌은 주로 플린트(flint), 즉 수석(燧石:부싯돌)으로 규석(硅石)의 일종이다. 특히 아프리카·유럽의 구석기시대 전기·중기에 많았기 때문에 가장 적당한 석기 원료로서 오랫동안 사용되었다. 이 부싯돌은 백악층(白堊層) 속에 판상(板狀)의 층을 이루어 존재한다. 또한 그 질이 단단하여 비바람에도 잘 견디어 내고 떼어내기도 비교적 쉬웠으며, 잘라낸 파편이 면도날처럼 끝이 날카로웠다. 그 장소도 하안(河岸)과 하상(河床)·절벽면 및 해안 등에 노출되어 있어 많이 사용되었다.
대표적 석기로는 부싯돌로 만든 손잡이도끼인데, 일반적으로 편도(扁桃) 모양을 하고, 한쪽 끝은 덜 뾰족하며, 밑부분은 둥글면서 약간 두께가 있고, 측면 가장자리 부분은 날이 서게 날카로운 형태로 만들었다. 인류는 이것을 나무를 베거나 땅을 파는 도구로 이용하였던 것이다. 구석기시대 전기에 아프리카에서 사용한 냇돌석기는 조약돌의 일부를 크게 양면에서 깨내고 뾰족한 날이 서게 만든 석기였으며, 동남아시아에서 사용한 외날찍개·쌍날찍개는 석영(石英)의 핵석을 양면에서 깨내어 끝부분을 날카롭게 만든 석기였다.
② 격지석기:큰 덩어리의 돌로부터 떼어낸 얇은 격지의 둘레를 다듬어서 만든 석기. 일반적으로 박리면(剝離面)은 그대로 남겨 두고 본래의 돌표면 부분에다 다시 가공하면 편면석기(片面石器)가 된다. 구석기시대 전기에는 부정형(不定形)의 것이 많았으나, 선단(先端)이 뾰족한 찌르개[尖頭器:포인트]는 창날로 사용하였다.
이 시대 석기 형태에는 삼각형의 위가 뾰족한 형, 폭이 넓은 형, 가늘고 긴 형 등이 있다. 중기부터는 타격하는 힘을 이용하는 석기보다는 예리한 칼날로 베는 힘을 이용하는 석기, 즉 동물의 가죽이나 살을 처리하는 데 편리한 날석기[刃器]를 만들어, 깎고 밀고 긁는 데 사용했다. 즉, 자르개·긁개 등의 석기가 유행하였다. 후기에는 더욱 날을 이용하는 작은 형태의 날석기로 바뀌어 손칼처럼 쓰인 각종 돌날[石刃]이 사용되었다. 즉, 구석기시대 격지석기에는 긁개·자르개·새기개·등의 부정형 석기가 있었다.
* 전곡리 구석기유적 [全谷里舊石器遺蹟]
경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의 한탄강변에 있는 중부 홍적세 후기에 형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전기구석기 유적.
사적 제268호 / 시대 : 전기구석기 / 소재지 : 경기 연천군 전곡읍 전곡리
사적 제268호. 1978년 미군 병사 보웬이 처음 확인한 이후 10차례 발굴 조사된 이 유적은 전곡읍 남쪽 일대의, 한탄강이 U자 모양으로 감싸고 도는 대지상(臺地狀)의 지형에 분포하며, 지도상의 위치는 동경 127°3', 북위 38°1'이다. 이 일대에는 ‘전곡현무암(全谷玄武岩)’이라 부르는 철원-평강 지역에서 흘러온 현무암이 고기하천(古期河川) 퇴적을 덮고 있는데, 하부(下部)의 연대가 약 60만년 전, 상부의 현무암이 약 30만년 전후로 알려졌다. 현무암 대지 위에 두께 3~8m의 퇴적물은 한탄강이 현무암 대지 위를 흐르는 동안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 퇴적물 속에서 석기가 발견되었다.
퇴적층은 하부에 우각호(牛角湖)에 의해 퇴적된 호소성(湖沼性) 퇴적물 또는 강에 의해서 퇴적된 모래층으로 구성되었고, 이 위를 적색 또는 황갈색 점토가 덮고 있다. 이 퇴적물은 현무암이 절리(節理)현상으로 인하여 빠른 속도로 침식되는 과정을 고려한다면, 현무암 상부의 30만년에서 많이 떨어지는 시기가 아닌 대략 중부홍적세의 후반 20만년 전후가 될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아직 신뢰도에 문제가 있지만 퇴적물의 발열형광법(thermoluminiscence dating method)에 의하여 얻은 4만 5천년 전이라는 연대를 주장하는 견해도 있으며, 상부홍적세에 들어서 급격히 침식되어 현재의 지형을 형성하였다는 견해도 있다.
지금까지 발굴에서 채집된 석기는 4천여 점이 넘으며, 지표에서 채집된 석기도 많다. 석기는 석영암(石英岩)과 규암(硅岩)을 이용한 것이 대부분이며, 현무암과 편마암도 약간 섞여 있다. 재료는 거의 강바닥에서 채집된 것이다. 가장 특징적인 석기로는 아슐리안형의 주먹도끼류이고, 평면이 첨두형인 것과 타원형으로 만들어진 주먹도끼류와 한 면 가공된 주먹도끼(handaxe) ·가로날도끼(cleaver) ·뾰족끝찍개(pick)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찍개 ·긁개 ·다각면원구 ·소형찌르개 등이 발견되고 있으며, 이 외에 많은 수의 몸돌[石核] ·격지[剝片] 및 부스러기돌 등이 발견되었다.
석기는 대부분 직접타격법 또는 모루떼기법으로 제작된 것이며, 기본형이 만들어진 뒤에 2차 가공을 시도한 것은 극히 적다. 2차 가공이 있다 하더라도 최소한의 가공에 그치고 있어서 동아시아의 전기구석기의 일반적 양상인 석기의 비정형성이 나타난다. 전곡리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의 석기는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된 것으로, 세계 전기구석기문화가 유럽 ·아프리카의 아슐리안문화전통과 동아시아 지역의 찍개문화전통으로 나누어진다는 기존의 H.모비우스 학설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증거가 되었다. (두산세계대백과)
발굴 이야기
우리나라 구석기 시대를 논함에 있어서 뭐니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곳은 임진강과 한탄강변에 산재한 일련의 구석기지점들이다. 임진강 유역에서는 현재까지 15군데 정도의 구석기 유적이 확인됐다. 그 중 대표격인 전곡리 유적은 1978년 발견되어 다음해 사적으로 지정됐고, 88년 발견된 파주 주월리-가월리 유적은 작년(94년)말 사적으로 지정됐다.
이 일대가 중요한 것은 유적이 많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기에서 발견된 석기들이 인도 동쪽의 아시아에서는 거의 발견된 사례가 없는 특별한 형태의 도구들이기 때문이다. 1944년 미국의 모비우스라는 사람이 ‘주먹도끼’라 불리는 석기의 유무는 구석기 시대 문화권 설정의 지표가 된다는 주장을 제기했는데, 세계 구석기 고고학에서 통설로 통용되던 이 생각은 전곡리 유적의 발견과 더불어 무너지고 말았다. 임진강 유역은 이제 세계 구석기 지도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지역이다.
이 유적을 처음 발견한 이는 그렉 보웬이라고 하는 미 공군하사관이었다. 그는 인디애나대학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다 학비를 벌기 위해 군에 입대, 동두천 미군 2사단 헬리콥터장 기상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우연히도 그는 석기에 관심이 많았고, 자케타 보르다즈라는 석기 전공교수로부터 많은 지식을 쌓은 처지였다.
1977년 한국에 온 그는 미군 영내클럽에서 노래를 부르던 한 젊은 여성과 사귀었는데, 결혼을 약속한 이들은 78년 1월 20일 한탄강유원지로 같이 놀러갔다. 지금은 한탄강 유원지가 공장폐수와 음식점으로 엉망이 됐지만, 그 당시만 해도 이곳은 한적하고 깨끗하며 조용히 데이트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었다. 아무튼 강변을 산책하던 그는 우연히도 강가의 모래둔덕이 길을 내느라 잘려나간 곳에서 토기편과 숯이 된 목재가 노출된 것을 발견하게 됐다. 1년여 만에 고고학 유적을 접하게 된 그는 매우 흥분하여 그 일대를 좀더 조사해보고자 영문도 모르는 애인을 무조건 뒤를 따라오게만 하고 주변을 찾기 시작했다.
한시간이 넘도록 별 소득도 없고 추운 날씨에 짜증을 내기 시작한 애인도 있고 해서, 요기나 하자고 생각한 그는 애인과 함께 앉을 만한 곳을 찾았는데, 마침 조금 떨어진 곳에 잔디가 잘 깔린 묘역이 있어 거기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배낭을 내려놓고 물끓일 차비를 하던 그에게 갑자기 주먹도끼 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얼어버릴 것만 같은 충격에 그는 들고 있던 것을 내팽개치고 그것을 집어들고는 어리둥절한 애인에게 “봐! 봐! 내가 뭘 찾았는지 좀 보라구!” 하는 소리를 정신없이 외치며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주위를 계속 찾던 그는 주먹도끼 3점, 가로날도끼 2점과 긁개 1점을 발견했다. 전곡리 유적이 드디어 길고도 긴잠에서 깨어난 순간이었다.
심장이 터질 듯한 흥분에 그는 바로 귀대해 사진기를 빌리고 군용작전지도를 한부 구한 다음, 다시 현장으로 뛰어왔다. 정확한 발견지점을 지도에 표시하고 현장과 유물 사진을 찍은 그는 1주일여에 걸쳐 막사에서 자세한 보고문을 작성했다. 그런데 흥분 속에서 자료는 정리했지만, 이 중요한 발견을 누구에게 알려야 할지 몰라 막막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 고고학자가 있는지, 또 있다면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를 애인과 부대에 근무하는 한국인들에게 물어봤으나 시원한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궁리 끝에 그는 프랑스 보르도대학의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인 프랑소아 보르드 교수에게 무조건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받은 보르드 교수는 발견의 중요성을 즉각 인지하고 바로 다음과 같은 답장을 냈다. 즉 “만약 이것들이 유럽이나 아프리카에서 발견됐다면 나는 이것을 의심없는 아슐리안 문화(☻ 유럽,아프리카,중동,인도에 걸쳐 발견된 전기 구석기 시대의 한 시기 이름이자 문화 이름. 특히 주먹도끼와 가로날도끼라 불리는 독특한 형태의 양면가공석기가 중요한 지표유물이다. 가장 오래된 아슐리안 유적은 아프리카에서 발견된 1백4,50만년전의 유적이고, 대체로 8-10만년전 사이에 다른 문화로 대체됐다.) 의 석기라고 부르겠습니다. 내 자신 직접 현장을 보고 싶은 중요한 발견입니다. 그러나 여건상 그럴 수 없으니, 한국에 있는 학자들을 접촉하십시오. 여러해 전 서울대학교에서 유학생을 보낸 적이 있으니, 서울대학교에 연락해 보십시오”라고 써 보냈던 것이다.
보웬이 보낸 편지가 서울대 고고학과 사무실에 도착한 것은 3월 중순이었다. 4월15일 휴가를 받은 그는 서울대로 찾아왔고, 필자의 길안내로 당시 서울대가 발굴하고 있던 여주 흔암리 청동기 시대 집자리 유적에서 김원룡 교수를 만나게 됐다. 한국사람으로 전곡리 유물을 처음 본 셈인 필자는 당시 4학년 휴학생이었는데, 어린 눈에는 그가 주섬주섬 배낭에서 꺼낸 돌덩이들이 책에서 그림으로 보던 것과 비슷해 신기하다는 생각만이 들었을 뿐, 큰 감흥은 없었다. 그러나 김교수께서는 매우 흥분하셨고, 이 유적을 바로 보고 싶다는 욕심에 허겁지겁 서울로 올라가셨다. 필자는 보웬과 현장에서 더듬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사흘을 같이 지내는 동안 가까운 사이가 됐는데, 유적 발견에 얽힌 얘기를 장황히 쓸 수 있는 것도 바로 이때 그에게서 자세한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전곡리에서 발굴이 시작된 것은 그해 11월 발견자가 자기 나라로 돌아간 지 넉달이 지난 79년 3월이었다. 귀국후 보웬은 아리조나 대학에서 고고학으로 석사학위를 받고 발굴전문회사에 취직해 한국인 아내와 자식들과 같이 잘 살고 있다.
전곡리 주먹도끼
2000년 11월초 일본 마이니치 신문이 보도한 ‘구석기 유적 조작’ 사건은 세계적인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 신문은 미야기현 기마다카모리 유적발굴 현장에서 고고학자 후지무라 신이치가 가짜 석기를 파묻는 장면을 찍은, 이른바 몰래카메라를 폭로한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후지무라가 발굴한 구석기 유적이 몽땅 조작이었음이 들통나고 말았다. 이로써 잇단 발굴을 통해 70만년전까지 올라갔던 일본의 구석기 연대는 모두 가짜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후 일본 고고학계는 구석기 유적 노이로제에 걸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후지무라가 자작극을 연출한 이면에 한국의 구석기 유적 발굴이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7만년전의 구석기 유적이 한반도에 있었음을 보여준 경기 연천 전곡리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한반도에는 있는데 일본에 없을 리 없다”고 초조감을 드러낸 일본학자들이 구석기 유적 찾기에 혈안이 된 것이다. 이런 일본 학계의 좌절감에서 비롯된 게 바로 후지무라의 자작극이었던 것이다.
사실 일제강점기 일부 일본 학자들은 한반도에서 구석기의 존재를 발견했지만 묵살되고 말았다. 한마디로 연천의 전기 구석기 유적 발굴은 우리나라에 고고학이란 학문이 도입되고 난 이후 가장 큰 학문적인 업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미군이 발견한 주먹도끼
1978년 4월. 동두천에 주둔중인 미공군 기후 예보대에 군무하던 그렉 보웬 병사는 평소에 사귀던 한국여성과 연천 전곡리 한탄강변 유원지를 찾았다. “이게 뭐지?”. 여인은 이상하게 생긴 차돌 하나를 주워 보웬에게 흔들어보았다. 자연석 같기도 하고, 누군가 인공적으로 깎은 흔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차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보웬 병사의 눈이 갑자기 빛났다.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에서 고고학을 전공한 보웬은 그것이 심상치 않은 차돌임을 직감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당시 서울대 박물관장이던 김원룡 교수에게 이 주먹도끼를 보냈다. 돌멩이 하나에 담겨진 한반도 27만년전의 역사가 한 외국인 병사에 의해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차돌을 쥔 김원룡 교수는 즉각 프랑스에서 구석기를 전공한 영남대 정영화 교수와 함께 현장을 답사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채집되는 구석기 유물인 주먹도끼 즉, 양면핵석기(兩面核石器)의 형태가 프랑스 전기 구석기시대 가운데 중기 아슐리안 주먹도끼와 유사함을 확인한 뒤 현지조사 결과를 학계에 발표했다. 이 아슐리안(Acheulean) 주먹도끼(찍고 자르는 기능을 겸비한 도끼)는 프랑스의 생 아슐(St. Acheul) 유적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붙여진 이름. 약 1백50만년전 아프리카 직립원인에 의해 처음 사용되어 장구한 전기 구석기 기간동안 지속적으로 사용된 것이다. 구석기시대란 인류가 도구를 처음 사용한 2백50만년전부터 마지막 간빙기가 시작되는 1만년전까지를 일컫는 기간을 말한다. 석기를 다듬는 수법에 따라 전기(2백50만년~10만년전)·중기(10만년~4만년전)·후기(4만년~1만년전)로 나눈다.
그런데 그때까지 동아시아 구석기 문화에서는 유럽·아프리카와는 달리 주먹도끼 문화가 없다는 것이 세계 고고학계에 정설로 굳어져 있었으니 전곡리 전기 구석기 유적의 확인은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불꽃 튀는 연대논쟁 : 27만 년 전 전기 구석기 유적 유력
난리가 난 학계는 김원룡 교수를 발굴단장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국립중앙박물관 등 6개 기관 합동으로 학술발굴조사를 벌였다. 하지만 연대를 비정하는 것이 큰 문제였다. 이 유적의 연대가 전기 구석기에 해당되는 20만~30만년전이라는 걸 신빙할 수 있느냐는 백가쟁명의 논쟁이 쉴사이 없이 이뤄졌다. 공동발굴 참가 대학박물관의 교수들은 외국에서 학위를 받고 귀국해서 고고학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같은 유적을 공동으로 조사하면서 각자 주장이 엇갈려 전공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헷갈리게 했다.
한마디로 열악했던 우리나라 구석기 고고학의 현주소를 말해주는 발굴이었던 것이다. 결판이 나지 않자 하는 수 없이 세계적인 구석기 연구의 권위자를 초빙해 ‘판정’을 내려달라는 부탁을 하기로 결정했다. 지리한 논쟁 4년만인 82년 8월 국립문화재연구소는 김원룡 교수의 추천을 받아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고고학을 강의하고 있는 세계적인 구석기 권위자인 존 데스몬드 클라크(J.D Clark) 교수를 초빙하게 되었다. 전곡리 유적을 방문한 클라크 교수는 주먹도끼 등을 관찰한 후 아프리카 전기 구석기시대인 아슐리안기인 생고안 구석기 형태와 유사성이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클라크 교수는 “아프리카 생고안 구석기는 전기 구석기에 해당되지만 전곡의 구석기 유물은 전기 구석기시대 가운데서도 후기에 속하는 27만~26만년전일 가능성이 많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 후에도 전곡리 구석기의 연대문제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가장 핵심은 전기냐 후기냐로 압축됐는데, 말하자면 20만~30만년전과 4만~5만년전의 주장으로 엇갈렸던 것이다. 이것은 실로 수십만년이 왔다갔다 하는 연대관의 천양지차라 자칫 국제적인 망신을 당할 소지가 다분했다. 최초 발견으로부터 25년이 경과한 오늘에 이르는 동안 11차에 걸친 지속적인 발굴조사와 아울러 심층적인 연구를 통해 세계적으로 이 전곡 구석기 유적은 전기 구석기 유적으로 자리매김되었고 영국에서 발간되고 있는 세계 고고학지도에 남북한을 통틀어 제일 먼저 등재되었다. 지난 기간 이 전곡 구석기 유적의 구석기 연대 논의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우리나라 구석기 고고학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평가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