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 6. 29일 김포지구.
1950. 6. 29일 오전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예하부대.
제 22보병연대 3대대.
기갑연대 제 3도보대대. (8, 9중대)
제 12보병연대 2대대. (대대본부, 2중대의 중대규모)
보병학교 후보생 대대. (중대규모)
기갑연대 제 2장갑차 중대의 일부
김포지구 전투사령부의 김포비행장 전투.
6. 29일 오전 김포지구 전투사령부는 김포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김포지구 전투사령관 우병옥 중령은
사령부를 소사에 위치하고, 참모장 최복수 중령을 현지 공격부대 지휘관으로 하여 오전 0600시에 소사
읍을 출발, 0900시경 김포비행장 인근에 도착하여 전열을 점검하였다.
이때 미군의 B-29폭격기가 김포비행장에 폭격을 가하여, 공격부대는 폭격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가
남산학교 S-1 안영작 대위를 정찰 내보냈는데, 비행장 남부 1Km 안오쇠 부근에서 적의 저격을 받아
전사하였다.
아군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적군이 계속 비행장을 확보 중임을 확인한 최복수 중령은
기갑연대 도보대대를 장갑차와 함께 비행장의 동남부로 진입도록하고,
22연대 3대대와 보병학교대대는 안오쇠 부근의 적을 섬멸하고 비행장 남부로 진입하도록 하였다.
12연대 2대대는 비행장 서북쪽으로 우회하여 장산을 점령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최복수 중령은 직접 Jeep을 타고 안오쇠 부근에서 부대를 독려하였다.
■ 기갑연대 제 3도보대대의 전투.
적은 비행장 남부 1Km지점 안오쇠와 그 부근에 전초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기갑연대 도보대
대가 비행장을 향해 진행하는 도중 안오쇠 동북쪽 배수로에 잠복 중이던 분대규모의 적의 저항을 받아
이에 응전하던 중 대대장 강문헌 대위가 전사하였다. 이에 2장갑차중대 1소대가 적을 제압하고, 장갑차
중대는 북상하여 행주에서 도하하여 시흥으로 철수하는 1사단을 엄호하였다. 이 후 장갑차 중대는 영등
포 방면으로 전환된다.
공격부대는 비행장으로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비행장 건물에 숨어 사격하는 적과 야지에 노출된 아군사
이에 전투에서 아군의 손실이 늘어가는 가운데 빈 드럼통을 엄폐물 삼아 드럼통을 굴려가며 비행장으로
진입을 시도하기도 하였으나 공격이 여의치 않았다.
난항이 계속되자 대대장 대리 김일록 중위는 과감한 돌격만이 생사를 가늠할 뿐이라고 판단한 나머지
일본도를 뽑아들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면서 돌격을 감행하려 하였으나 적탄이 집중되어 쓰러지고 말
았다. 그는 부상당한 다리를 이끌고 적진으로 돌입하여 적들을 베어 쓰러뜨리다가 적탄이 집중되어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로서 공격기세가 꺾인 대대는 비행장 밖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 최복수 중령의 전사와 우병옥 중령의 자살.
다른 방향으로 진입을 시도한 부대도 대동소이하였는데 이를 지켜본 최복수 중령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기관총을 장착한 Jeep을 몰아 활주로로 돌입하여 좌충우돌 기관총을 난사하다가 적탄이 집중되어 스물
여덟의 나이로 비통하게 전사하였다.
이날 비행장 공격은 최복수 중령의 전사로 중단되어, 부대는 철수 1600시경 소사에 집결하였는데, 공격
부대 지휘관들의 비극적 소식을 접한 김포지구 전투사령관 우병옥 중령은 지휘관으로 책임을 통감하고
1700시경 소사 동북쪽 원미산에 올라, 멀리 불길에 쌓인 비행장을 바라보며 권총 자살하였다.
18연대의 김포비행장 전투.
한편, 전날 밤부터 29일 0500시 사이 아군 18연대(2, 3대대)와 1보병사단(11연대와 13연대 1, 2대대 및
22연대 1, 2대대)이 행주에서 한강을 건너 29일 아침 김포지역 전호리로 상륙하였는데, 0500시 18연대
12중대가 마지막으로 도하하려는 시기에 적의 박격포 사격으로 도하하지 못하고, 연대는 굴포천을
따라 부평을 목표로 남진하였다.
남진하는 도중 한강 남안 옥녀봉에서 쏘아대는 적의 박격포 사격으로 연대는 5중대의 1개 소대로 이를
견제하고, 퇴로를 영등포쪽으로 전환하여 김포비행장-소사로 목표를 바꾸었다. 연대는 동진하다가 개화
산 서측에서 수로를 따라 비행장 쪽으로 남향하였는데, 비행장에서 적의 기관총 사격을 받았다. 이에 5
중대로 견제하고 주력은 비행장 동쪽으로 우회하여 철수를 계속하였다.
5중대는 비행장 북단에서 철조망을 넘어 비행장에 진입하였고, 주력은 비행장 입구 쪽에서 다시 기관총
사격을 받게 되는데, 이들이 아군의 복장을 하고 있어서 8중대장이 단신으로 확인차 접근하다가 적탄에
전사하였다. 이에 대대는 즉시 강행돌파를 시도하여 비행장에 돌입하였는데, 이때 B-29의 폭격이 시작
되어 적진이 혼란한 틈을 타서 적을 제압하였다.
18연대는 1100시경 김포비행장에서 눌언리 방향으로 적진을 돌파하여 1400시에 소사에 도착하였다.
한편 1사단병력은 시흥방면으로 철수하여 이날 오후 시흥에 집결하였다. 김포지역의 북한군이 연대 규
모였는데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 들어온 사단 규모의 아군이 김포지역의 적과 교전없이 시흥으로 철수
한 것은 김포보다 서울의 한강방어가 더 위급했기 때문이다. 북한군은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하다가 이
날(29일) 저녁 대규모로 한강을 도하하기 시작하였다.
공군 헌병대.
그밖에 소대규모의 공군헌병대가 당일 2차에 걸쳐 김포비행장에 대한 공격을 수행하였는데, 아마도
김포사 병력과 함께 공격에 참여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현재 이에 관한 정확한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재 편 성.
시흥전투사령부는 우병옥 중령의 자살로 공석이 된 김포지구 전투사령관에 18연대장 임충식 중령을 임
명하여 해당지역 부대를 통합 지휘토록 긴급 조치하였다.
임충식 중령은 적의 침로가 소사 방향이 될 것을 예상하여 사령부를 소사에서 소사 남쪽 4Km 지점인
소래산 인근으로 이동하고, 18연대 2, 3대대로 하여금 김포비행장-소사간 도로를 동남쪽에서 감제하는
원미산을 중심으로 배치하여 적의 남진을 막는 한편 김포사의 병력을 재정비하였다.
김포사 병력은 아래와 같이 줄어 있었는데, 저녁 무렵까지 정비를 마치고, 보병학교, 기갑연대, 12연대
순으로 김포비행장-소사간 도로를 서북쪽에서 감제하는 ▲107에 배치하여, 18연대와 연계하였다.
22연대 3대대는 소사 부근에서 경인가도의 확보와 후방경계에 임하였다.
1950. 6. 29일 저녁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예하부대.
제 18보병연대 2, 3대대.
제 22보병연대 3대대. (중대규모)
기갑연대 제 3도보대대. (중대규모 6개 소대)
제 12보병연대 2대대. (소대규모)
보병학교 후보생 대대. (중대규모)
기갑연대 제 2장갑차 중대. (영등포 방면으로 전환)
참고자료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제 1권 개정판), 국방부전편위, 1977.
참고자료 : 전쟁기념사업회, 《한국전쟁사》(제 3권), 행림출판, 1992.
기타자료 : 금성천, "6.25
당시 전선 임의 이탈 혐의 고위 지휘관들 1. 계인주 대령", 디펜스코리아 한국전쟁사 게시판.
기타자료 : 금성천,
"전선
이탈에 관한 계인주의 상황 설명", 디펜스코리아 한국전쟁사 게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