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VIP 룸
참으로 버릴 것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야말로.
정리가 안되는 건 아버지로 부터 받은 훈습의 덕분입니다.
젓가락 한짝이라도 갖고 들어오는 사람은 잘 살게 되는 거란다.
아버지는 중국집 나무 젓가락으로 내가 뜰 뜨개바늘을 만들어 주셨고
불에다 묘하게 살짝 구워 귀 후비개도 예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북극크루즈 여행 때 일식 레스토랑에서 먹던 나무 젓가락을 객실로 가져와
뜨개바늘을 수없이 만들던 새로 사귄 친구도 제게 배운 짓을 하다가
남편에게 된통 혼났습니다.
놀러 왔으면 잘 놀기나 하라고...
그녀도 여행지의 놀웨이에서 고운 색실을 사서
모자 하나를 거뜬히 떠서 예쁘게 쓰고 나왔더랬습니다.
북인도에서 산 강황가루, 헤나가루는
천연염색을 하려고...
바느질하는 친구집에 가면 조각 천을 모아 보따리 보따리 쌓아두었고,
모처럼 벼르고 별러 산 옷은 작아도 버리지 못합니다.
아들이 입다가 아비 입으라고 준 옷
외삼촌이 입다가 남편 입으라고 준 오래된 옷도
천이 좋아서 버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 생긴 겁니다.
새로 아라클럽의 홈페이지가 만들어지면서 VIP 룸,VVIP 룸이 있다는 정보가 나가고
때를 맞추어 어떤 분이 이용후기까지 올렸습니다.
그러니 관심이 그 방들에 쏠려 예약을 했는데
제가 실수로 이중으로 VIP 룸 예약을 받은 사건이 난 겁니다.
그러니 부랴사랴 마흔 평 짜리 집을 치워 VVIP 룸으로 업그레이드 시켜
기분좋은 서비스를 해야 했습니다.
VVIP 룸
편백나무로 만든 바다가 한꺼번에 달려드는 공연장 같은 너른 데크.
무대같은 테라스에서 호젓이 둘만의 시간을 가진 예비 신혼부부는
행복한 느낌으로 64인치 티브이를 보고
운보선생의 한국화를 감상하고
북인도 여인이 만든 진짜 실크 카펫 위에 앉아보고
바다 위에 떠 있는 듯한 욕실에서 피로한 육체와 정신을 이완시키고
한 남자가 평생을 고생하여 50년 만에 아내에게 선물한 언덕 위의 하얀집
아라비치 바닷가 별장 한 채, VIP 룸을 예약했다가
VVIP 룸으로 업그레이드 받아서 사용한 겁니다.
어제 저녁에 남해로 여행왔던 목회자 분들은
VIP 룸과 101호를 쓰셨습니다.
그분들 중 아내가 편찮으시다는
목사님 한 분은 아내를 위해 한달간만
VVIP 룸을 사용하면 안되겠냐고 조심스레 말합니다.
저는 그분들을 위해 오늘 아침
계란찜에 야채 샐러드를 서비스 해 드렸습니다.
마침 손님이 없었으므로 그분들은 행운을 잡은 겁니다.
죽방렴 강사장과 연결해서 햇멸치를 사 드리기도 했습니다.
어디가서 진짜 죽방멸치를 구경할 수 있겠습니까?
그분들은 참으로 행복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방을 꾸미기 위해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도
늦게 유학대학원에 다니며 모은 책들, 성균관 한림원에서 읽었던 책들,
성천 아카데미를 들락거리며 모은 책들은 버리지 못했습니다.
끙끙대면서 아라클럽의 가장 꼭대기에 책은 모아 두었습니다,
비밀스런 서재방, 바다가 내려다 보이는 너른 창가에
보료 하나 깔아두고 누워 있으니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선물받은 언덕위의 하얀집은 어느 분이 행복한 느낌으로 쓰거나 말거나...
VVIP 룸은 아직도 버리지 못한 내 책들이 빼곡히 있는
진정한 나의 VVIP 룸, 꼭대기 서재방
나의 스위트룸에서도 버리기는 계속해야 합니다.
여행지에서 끄적거린 노트조각들,
문인화라도 배울 거라고 모은 종이들, 좀먹은 붓들
그리고 법첩들....
독서 백편 이자현이라고 사서삼경 백번을 성독해 보리라
어쩌자고 이행할 수도 없는 작정을 했었든지..
'경원기미 동선생 문공 작서 집전 선생 몰후 십년 시극 성편. 총 약간 만언...
우리 아버지의 서경 서문 읽으시던 소리가 들려 오는 추억에 젖으면
당장 시작해야지 하면서도 시도도 하지 못하고 있는 독서백편 이자현.
백번만 읽으면 무엇이든 다 헤아려 낼 수 있다고..
그러나
정말로 인생은 버리기의 연속동작을 끊임없이 해야만 할거라고..
절대로 버리지 못한 책들을 읽어 내지 못할 거라고....
<소리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