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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드리아노플 전투, AD378년
군대 경험이 없는 역사가들이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거의 50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던 로마 제국이 도나우 강 도강 이후 2년 동안, 상대적으로 소수인 고트족, 훈족, 알라니 족을 격파하기 위한 충분한 수의 군대를 모으지 못했느냐는 점이다.
당시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던 두 개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는 당장 배치 가능한 정예부대의 숫자가 제한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이것과 비교할 수 있는 현대의 예가 있다. 그중 하나로 1990년대에 수백만의 부대를 보유하고 있는 나토국가들이 발칸반도에 배치할 단 5만 명의 부대를 구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은 바 있었다. 그리고 그나마도 절반은 나토 비회원국들에게 의존해야 했다. 로마의 야전군은 아마도 기동군이었으며 신속하게 배치될 수 있는 부대였겠지만 새로운 지역으로의 이동 명령이 떨어지자 대규모의 탈영이 일어났다. 두 번째는 모둔 부대들은 각각의 전방기지에 배치되어 있었고, 많은 수를 이동시키면 당장 실제적인 위험이 일어날 수 있었다. 잠재적인 적들이 이 틈을 타서 공격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태가 378년 초에 일어났다.
알라마니 족 출신의 로마군 경비병 한 명이 377~378년의 겨울에 라인 강을 건너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경솔하게 그라티아누스의, 동쪽으로 부대를 이동시켜 고트족과 교전할 계획을 발설했고, 이것은 그의 동포들을 부추겨 2월에 상당한 수의 정찰대를 결빙된 라인 강을 건너 파견시키게 되었다. 비록 이 정찰대는 로마군 아욱실리아 팔라티나에 의해 격퇴되었지만 그들은 서방 야전군의 상당수가 이미 고트족과 맞서기 위해 일리리쿰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렌티엔세스 족이 이 기회를 잡아서 공격해 들어왔다. 그라티아누스는 동쪽으로 보낸 부대를 소환하고 갈리아의 남은 병력들을 동원하는 한편 프랑크 족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렌티엔세스 족은 그라티아누스의 용기와 지혜를 증명한 이 단기간에 벌어진 전쟁에서 패했지만 그들의 예상치 못한 공격은 삼촌을 돕기 위한 서방 황제의 계획을 몇 달간 지연시켰다. 또한 이것은 그가 동쪽으로 보낼 병력이 크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동시에, 발렌스가 페르시아 제국과의 협상에 성공해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고 해도 동방 전선에 배치된 제국의 최정예 병력을 모두 빼낼 수는 없었다. 378년의 봄, 그는 직접 안티오키아(대 페르시아 작전의 사령부)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동했다. 그는 그곳에서 불만에 찬 대중들의 반발을 처리해야 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가톨릭이 대부분인 군중들이 아리우스 파 신앙을 가진 발렌스를 반대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고트족의 접근과 지금까지의 참담한 전쟁 상황 때문이기도 했다.
발렌스는 수도에 오래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수도에서 20 킬로미터쯤 떨어진 멜란티아스의 황실 사유지로 본부를 옮겼다. 여기서 그는 부대를 모으고 새로이 도착한 서로마의 장군세바스티아누스를 트라야누스를 대신하여 군사 고문으로 임명했다. 세바스티아누스는 엄선된 부대를 이끌고 고트족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이것은 황제가 모든 부대를 집결시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아미아누스에 따르면 세바스티아누스는 기용 가능한 각 부대에서 300명의 병사를 뽑았다고 되어있다. 반면에 조시무스는 그의 전 병력은 2천 명이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이러한 종류의 작전에는 그것이 더 합리적인 숫자로 보인다.
그러는 동안 고트족은 주로 발칸 산악지대 남부, 디발툼, 카빌레, 베로아 시 부근의 강이 흐르는 계곡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부대들은 멀리 넓게 시골 지역에 분산되어 있었다. 발렌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이동할 때 적어도 한 개 이상의 고트족 소부대가 아드리아노플 주위에서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제국군의 접근 소식을 듣자 그들은 마릿사 강을 따라 베로아를 향해 전리품을 가득 싣고 철수했다. 다른 집단들은 아직 발칸반도 북쪽에 남아있었다. 그 근거는 아미아누스가 요새화된 고트족의 근거지가 베로아에서 정북으로 90킬로미터 떨어진 니코폴리스에 있었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바스티아누스의 작전
엄선된 정예부대를 이끈 세바스티아누스는 분명 히트앤드런 작전을 통해 그의 전임자들보다 훨씬 큰 성공을 거두었다. 아미아누스는 몇 달에 걸친 작전을 며칠로 압축하여 묘사하고 있지만 세바스티아누스는 분명히 378년의 봄과 여름 전체에 걸쳐서 활발하게 고트족 소집단들을 찾아내고 그들을 아드리아노플 주변에서 소탕했다. 그러는 동안 발렌스와 그라티아누스는 부대를 모을 수 있었다. 그의 전략은 고트족을 한정된 지역에서 바짝 접근하여 견제하는 동시에 한 번에 한 집단씩 각개 격파하는 것이었다. 고트족이 북서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프리게리두스의 서방 부대는 수치 고개를 요새화했다.
378년 초에 벌어졌던 이러한 종류의 작전에 대해서는 아미아누스가 좋은 서술을 제공하고 있다. 그는 세바스티아누스가 아드리아노플 북서쪽에서 고트족 소집단과 교전했던 전투를 이렇게 묘사한다. ‘저녁 무렵, 그는 갑자기 고트족 약탈부대가 마릿사 강 부근에 있는 것을 찾아냈다. 그는 도랑과 덤불을 이용해 부대를 숨겼다. 그리고 밤의 어둠 속에서 포복으로 다가가 잠을 자고 있는 그들을 공격했다. 그의 성공은 너무나도 완벽하여 적병들은 일부 재빨리 도망친 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었다.’
이것과 다른 비슷한 작전들을 통해서 프리티게른은 계속해서 부대를 소집단들로 나누어 작전을 수행하면 약탈 도중에 각개 격파당할 위험이 크다는 것을 통감했다. 그는 두 황제가 곧 그를 상대로 움직일 것이며, 따라서 이제는 병참적인 문제로 부대를 나누기보다는 그들과 맞서기 위해 부대를 집중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그가 먼저 움직인다면 그는 전투의 시기와 위치를 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다린다면 그는 협공에 걸려 격파당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그는 그의 부족민들을 소환하여 카빌레 근처에서 집결하고 부근을 철저히 소탕하도록 명령했다.
그 사이 렌티엔세스 족을 격퇴한 그라티아누스는 동쪽으로 진군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방을 무방비한 상태로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는 단지 소규모의 부대만을 거느리고 출발했다. 아미아누스는 그들은 경무장한 부대였으며 도나우 강을 배로 건널 만큼 적은 규모였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는 시르미움에서 며칠을 고열에 시달린 후에 다시 도나우 강을 따라 ‘마르스 숙영지’까지 진군을 재개했다. 그리고 그는 거기서 몇 명의 병사를 매복한 알라니 족의 공격으로 잃었다.
로마군 전진하다
이 시점에서 발렌스의 군대는 멜란티아스에 집결해있었다. 기록에 남아있는 부대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 군대의 구성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상당한 규모의 동방 황제 직속군과 친위대scholae를 포함하고 있었을 것이다. 비록 일부 부대는 동방에 그대로 남았지만. 몇 년간 발칸반도의 전투에 참가했던 다른 몇몇 부대들은 이미 심각하게 전력이 고갈되어 있었다. 발렌스의 군대는 아드 살리세스 전투에 참가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군단들과 디발툼에서 교전했던 코르누티 부대, 그리고 몇몇 친위대와 세바스티아누스가 고른 300명의 병사와 그 외에 이름이 확인되지 않은 부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마도 발렌스는 대략 15,000명에서 20,000명 정도의 병사를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다. 아미아누스는 그것을 잡다한 부대였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분명히 고참병들의 비율이 높은 혼합군이었을 것이다.
발렌스는 멜란티아스에서 아드리아노플로 진군했다. 그는 고트족이 베로아와 카빌레 주변에 집결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세바스티아누스에게 격파당한 뒤 마릿사 강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서 베로아로 퇴각하는 고트족을 추격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의 의도는 아드리아노플을 지나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마릿사 계곡을 통과하여 필리포폴리스로 향하면서 북쪽을 차단하려고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고트족과의 교전을 계획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그라티아누스는 수치 고개를 지나 필리포폴리스로 진군한 다음 마릿사 강을 따라 반대방향에서 그와 합류할 터였다.
로마인들에게는 불행히도, 프리티게른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남쪽으로부터 카빌레를 공격하면서 아드리아노플로 나아갔다. 그의 목적은 발렌스의 군대 후방에서 그의 콘스탄티노플에서 이어지는 보급선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1차 목표는 아드리아노플에서 15마일 떨어진 니케의 중계지점이었다. 아미아누스는 로마군 정찰대가 ‘적군이 아군 보급선을 강한 병력으로 차단하려고 움직이는 것을 발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혼란스럽다. 발렌스는 분명히 일부 보병 궁수들과 기병부대를 보내어 인접한 길목을 방어하고 고트족의 의도를 방해하려고 했다. 이 부대는 그러나 가만히 적을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심지어 그가 파견한 기병부대는 단지 30명뿐이었다! 또한 이런 소규모 부대로 그들이 어느 길목을 방어하려 했는지도 불분명하다. 아마도 그들은 툰드자로 파견되어 거기서 남쪽으로 이동하는 고트족과 충돌했던 것 같다.
발렌스, 전투를 벌이기로 결정하다
고트족이 카빌레에서 툰드자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가 전해졌을 무렵, 발렌스는 이미 아드리아노플을 나와 마릿사 계곡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 그는 단지 소규모 약탈부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곧 그보다는 훨씬 큰 부대라는 것을 깨닫고 아드리아노플로 방향을 되돌려 도시 밖에 강력하게 요새화된 숙영지를 설치했다. 이제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고트족과 교전할 것인가, 아니면 그라티아누스가 합류할 때까지 기다릴 것인가?
많은 요소들이 그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 먼저 그의 정찰대는 고트족 부대가 단지 10,000 명의 전투원을 포함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고했다. 만일 발렌스가 단지 15,000명의 병사만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해도 충분히 전투를 시도해볼 만하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발렌스의 정치적 위치는 매우 약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그가 진정시켜야 했던 불온사태가 이것을 증명하고 있다. 만일 그가 대규모 고트족 군대가 그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의 지점을 차지하도록 내버려둔다면 시민들은 황제에게 버림받았다고 느낄 것이 분명했다. 마지막으로, 발렌스가, 단지 소규모 병력만을 데리고 올 것이 분명한 그라티아누스를 기다린다면, 그는 그 얼마 안 되는 군사적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승리의 영광을 그와 나누어야 했다. 후대 사람들이 발렌스의 공격 결정을 비난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을 그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그가 받았던 정보들을 고려한다면 왜 그가 그런 선택을 했는가는 분명해진다.
아미아누스는 고트족이 3일에 걸쳐서 천천히 움직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짐수레들과 수많은 비전투원들로 인해 행군을 방해받았으며, 툰드자 강 동편에서 아드리아노플 북부의 개활지로 나아가는 20킬로미터 가량의 험한 지형을 빠져나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레우퉁기 족과 알라니 족은 다른 길을 통해 집결지로 진군하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툰드자 강의 서안의 얕은 여울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고트족은 아드리아노플을 북쪽에서 지나쳐서 니케로 나아가려는 목적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남동쪽 길을 봉쇄할 계획이었다. 이것은 발렌스가 아드리아노플 바로 근처를 요새화하고 머무르고 있기보다는 더 서쪽에 있다는 가정 하에 세워진 계획이었다. 고트족은 더 이상 발렌스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들의 길게 늘어진 짐수레와 비전투원은 공격에 매우 취약했다. 프리티게른은 이제 싸우기에 좋으면서도 북쪽으로 철수하기에도 알맞은 위치를 찾아야 했다. 만일 그가 너무 오래 지체한다면 발렌스는 지원을 받아서 더 이상 전투에서 패배시키기가 불가능하도록 증강될 것이다.
이것은 프리티게른이 얼마 정도의 전투원을 보유하고 있었느냐의 문제로 이어진다. 발렌스의 정찰대는 적군이 1만 명의 전투원을 보유하고 있었다고 보고했다. 아미아누스는 이것이 잘못된 보고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불행히도 얼마가 정확한 숫자였는지는 기록하지 않았다. 일부 역사가들은 고트족 병력을 20만 가까이 추정하기도 하지만 아무리 무능한 정찰병이라도 20만 명을 만 명으로 착각했을 리는 없다. 프리티게른은 아마도 1만 명 내외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몇 천 명 정도가 더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알라테우스와 사프락스의 그레우퉁기 족과 알라니 족과 같은 다른 부대들은 아직 집결지 근처에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고, 따라서 로마군 정찰대는 이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만일 고트족이 로마군을 크게 수적으로 압도했다면, 병력을 전개시키는 과정에서 그것이 분명하게 드러났을 것이고 그렇다면 일부 로마군 장교들은 철수를 주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이 벌어졌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발렌스는 그의 성급한 공격 결정으로 인해 동시대인들에게 비난받았지만 고트족이 수적으로 로마군을 압도했다는 주장은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이것은 로마군의 패배를 변명하는 좋은 핑계로 바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고트족이 있었든지, 발렌스는 그들이 1만 명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는 다음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세바스티아누스와 그에 동의하는 많은 장교들은 즉각 공격할 것을 주장했다. 분명히 그들은 최근에 그들이 거두었던 성공에 고무되었을 것이고, 승리가 눈앞에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미아누스가 ‘사르마티아인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신중하고 침착했다’고 묘사한 기병 고문 빅토르가 이끄는 다른 장교들은 그라티아누스의 지원군을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방 지원군에 앞서서 서방 황제의 친서를 들고 아드리아노플에 도착한 리코메레스 역시 같은 의견이었다. 그는 발렌스에게 ‘섣불리 단독으로 위험을 가져올 수 있는 중대한 전투를 시작하지 말고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위험을 함께 나누기 위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설득했다.
여기서 한 가지 논쟁거리가 되었던 문제를 확인할 수 있다. 발렌스가 고트족이 1만 명이라고 믿었다고 해도 그의 군대 역시 고트족을 압도할 만큼 충분히 많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일 15,000~20,000인 추정치가 사실이라면, 분명히 15,000명이었을 것이다. 만일 발렌스가 자신이 2:1로 우세하다고 생각했다면 이렇게 망설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고트족 10,000 명에 대해서 15,000명이라면 그는 그라티아누스의 지원군을 기다려서 얻을 이익과 불이익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결국, ‘황제의 치명적인 고집과 몇몇 궁정인들의 아부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들은 황제에게 즉시 행동을 취하여 그들의 의견대로라면 이미 이긴 거나 다름없는 승리를 그라티아누스와 나누지 말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회의가 결론이 나자 로마군은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프리티게른은 기독교 사제(고트족도 기독교로 개종한 뒤임-역자) 한 명을 로마군 진지로 보내어 협상을 제안했다. 그는 고트족이 2년 전 도나우 강을 건너올 때 처음 맺었던 협정을 회복시킬 것을 요구했다. 그들의 요구는 트라키아에 정착할 땅이었고 그 보답은 영구적인 평화였다. 프리티게른은 발렌스에게도 개인적인 편지를 보내어 자신은 진심으로 평화를 원하며 발렌스에게 필요한 것은 고트족에게 겁을 주어 자신이 평화 협상을 제안하도록 하는 무력시위일 뿐이지 않느냐고 넌지시 말했다. 아마 프리티게른은 자신이 로마군을 패배시킬 수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편지의 의도는 발렌스를 평지로 끌어내서 싸우게 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만일 발렌스가 요새화된 숙영지에 틀어박힌다면 공격하는 도중 식량부족과 질병으로 고트족이 더 타격을 입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다음번에는 아드리아노플 전투 최종회가 올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