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끝에서 - 창원 소답시장
정 윤
도시가 주는 온갖 소음과 일직선으로 된 도로와 자동차는 걷는 즐거움을 빼앗아 버렸다. 사람들은 차가 다닐 수 없는 길을 다니려 하지 않는다. 실속보다는 화려함을 쫓는다. 현대식 대형건물에 주차장이 완비된 대형할인점을 즐겨 찾는다. 시장 상인들의 질퍽한 삶과 흥정, 갖가지 신기한 상품들은 더 이상 구경거리가 되지 못한다.
골목이 주는 아늑한 삶의 즐거움이 사라져 가고 있다.
골목에 서다
저녁 무렵이지만 한여름 따가운 햇살이 아직 머리 위에서 비춘다. 저녁 장을 볼 시간인데다 장날이라 사람들이 붐벼야 하건만,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솟는 여름 햇살 때문인가 사람들은 많지 않다.
의창동 사회교육센터 옆으로 농협 하나로마트가 자리 잡고 있다. 그 옆으로 좁은 골목을 따라 난전이 펼쳐졌다. 수박, 포도, 복숭아, 말끔한 여름 과일이 제 생긴 것을 자랑하며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다. 형제유통 맞은편에는 고등어, 꼴뚜기, 갈치 같은 어물이 늘씬한 몸매를 뽐내며 어서 팔려가길 기다리고 있다.
좁은 골목길이 끝나고 큰 골목을 만나는 곳, 여기가 본격적인 소답시장이다. 소답동에 있어 소답시장이라 부른다. 어떤 이는 북동시장이라고도 부른다. 오일장은 따로 창원장이라 한다.
흰 색 붉은 색 차양이 해를 가리고는 있지만, 걷는 것만으로도 땀이 쏟아진다.
장 보러 온 손님이 없으니 시장은 상인들 차지다. 상인들은 저희끼리 큰 소리로 이야기를 주고받는다.
“커피 아지매는 오늘도 안 보이네.”
“해외여행 갔다 아이요. 언 년은 팔자가 좋아서 여행 다이고, 언 년은 뼈골이 빠지고……”
삼화상회 아저씨의 궁금함에 맞은 편 돼지국밥집 아주머니가 샘 난 듯 대꾸한다.
“우리도 오늘 노래방 한번 가자.”
“만 원씩 거둬라.”
“아이고, 내사 마 안 갈라요.”
정육점 아주머니까지 거들고 나섰지만, 돼지국밥집 아주머니는 샘을 거둘 줄 모른다.
이방인
가끔 들러보는 시장이지만, 시장 안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낯설고 흥미롭다. 골목골목, 삶이고 뿌리인 이곳에 이방인의 잣대로 시장 사람들을 훔쳐보기란 언제나 실수투성이다.
요기나 할 겸 식당을 찾았다. 40년 전통의 할머니국밥집. 대를 이어 하고 있단다. 모 방송국 TV프로그램에도 소개가 되었다니, 여러 국밥집 중에 단연 눈에 띈다. 진짜려니 싶도록 가게 앞은 그렇게 현란하게 광고질되어 있다.
“40년 되었다고예?”
“예.”
이 골목의 역사 한 자락이라도 들을 수 있을까 싶어 말을 붙였다. 그러나 바로 옆 테이블에 앉아 마늘을 까는 아주머니가 돌아보지도 않고 퉁명스레 답한다. 손님에게 이렇게 막 대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주인 아주머니가 틀림없다. 하지만 40년 국밥집 하기엔 너무 젊다.
“40년 전부터 쭈욱 여기에 있었습니까?”
“그런데예.”
금새 국밥이 나왔다.
“그때도 여기 국밥집이 많았나요?”
“와 그랍니까? 식사나 하이소!”
마늘을 싸들고 쌩하니 가버린다. 손님을 거의 치한 정도로 취급하고 피해버린다. 국밥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내 마음에서도 붉은 선지피가 뚝뚝 떨어져 굳어버렸다.
시장에 인적이 드물다.
시장 안 골목
시장 길은 가게 앞마다 난전을 여는 바람에 두 사람이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다. 약간 경사진 길을 따라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다. 건물들 앞에는 파라솔과 차양을 쳐 놓고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갖가지 물건을 진열해 놓고 있다. 사람살이에서 없어서는 안 될 물건들을 만나는 곳, 그곳이 시장이다. 그래서 시장에는 있는 사람 없는 사람 구분 없이 몰려든다.
‘편리함’ 보다는 ‘꼭’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흥정은 자연스레 일어나기 마련이다. 콩나물 값 10원을 깎을 수 있는 곳, 그곳이 시장이니까.
장터건강원을 끼고 오른쪽은 주택과 연결된 골목이다. 현대식 건물 사이로 낡은 기와집과 슬레이트집이 오래된 시장의 흔적으로 군데군데 남아 있다. 반대편에는 제일식육점이 있고, 어물전이 두 곳 나란히 붙어 있다. 북면쌀상회를 지나면 창원개소주, 초원보신원 같은 건강원들이 모여 있다. 마산, 창원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건강원 골목이다.
정육할인마트 옆 골목에서 아이들이 뛰어 나온다. 장이 서지 않는 평일 시장길은 어느새 아이들의 놀이터다. 아이들은 시장에서 자라고 배우고 어른이 된다.
벌써 시장이 끝났다. 찻길에서 한 백보나 올라왔을까. 현대식 공설시장이 양쪽에 버티고 서서, 여기는 재래시장이 아니고 상설시장이라고 강변한다. 2층이지만 엄청 높은 건물이 주위 건물들을 압도한다. 마치 점령군의 위용을 보는 듯하다. 오른쪽엔 C동이, 왼쪽엔 B동이 있다.
B동과 A동은 기역자로 연결되어 있다. B동과 C동 앞으로는 도로가 나 있고, 도로가에 조그만 공터가 있다. 사각으로 벤치를 고정해 놓고 나무로 지붕을 만들어 놓아, 이곳은 시장에서 그나마 잠시 쉬어갈 수 있는 곳이다.
공터 앞에는 식당들이 자리 잡았다. 미정식당, 장터추어탕, 할머니국밥……
5일장, 창원장날
창원에 대규모 공단이 들어서고 계획도시로 현대화되기 전까지, 소답은 창원의 중심이었다. 마산에서 창원을 오가는 버스 종점이 소답이었다. 소답시장 안 일방통행도로에 버스가 들어 왔다 빠져 나갔다. 장날이면 버스가 다니질 못 할 정도로 도로를 따라 길게 장이 형성됐다.
인근에서 농사짓는 할머니들이 갖가지 푸성귀를 들고 나와 현금으로 바꾸기도 하고, 짚투리며, 강아지, 달걀,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은 모두 들고 나왔다.
창원장이 언제 생겼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마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서 생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창원장은 오래 됐다.
소답은 옛 창원부의 중심이었다. 일제 땐 인근에 기차역이 들어서 교통과 물류의 중심이었다. 해방 이후엔 39사단이 바로 밑에 생기면서 시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다.
문헌에 따르면 1919년 4월 2일, 창원장날에 5천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것으로 나와 있다. 당시 5천여 명이 시장에서 시위를 벌였을 정도라면 그 규모가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다.
고향의 봄
1. 내가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2. 꽃 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이원수 선생이 초등 6학년 때 지은 시에 홍난파 선생이 1926년 곡을 붙였다.
다음은 아동문학가 고 이원수(李元壽) 선생(1911-1981)이 지난 1980년 소년지에 `고향의 봄'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자전회고록 중 일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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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란 고향은 경남 창원읍이다. 나는 그 조그마한 읍에서 아홉 살까지 살았다.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리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동문 밖에 있는 미나리 논, 개울을 따라 내려가면 피라미가 노는 곳이 있어 나는 그 피라미로 미끼를 삼아 물가에 날아오는 파랑새를 잡으려고 애쓰던 일이 생각난다. 봄이 되면 남쪽 들판에 물결치는 푸르고 윤기 나는 보리밭, 봄바람에 흐느적이며 춤추는 길가의 수양버들, 나는 그런 그림 같은 경치 속에서도 그것들이 아름답다는 생각은 해 보지 못하고 이웃에 사는 동무 아이와 같이 즐겁게 놀며 자랐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아홉 살 되던 해 가을, 아버지의 벌이가 잘 안되어 생활이 너무 궁했으므로 한 40리 거리가 되는 진영이란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여태까지의 나의 세계였던 조그마한 우리 집, 그 이웃의 동무아이, 정든 동문 밖 개울들을 버리고 떠나는 마음은 슬픈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우리 집은 진영을 떠나 마산으로 옮겨 온 것이다. 나는 열 살의 소년으로 마산서 비로소 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마산에 비해서는 작고 초라한 창원의 성문 밖 개울이며 서당 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그래서 쓴 동요가 <고향의 봄>이었다. |
창원공설시장
5일장을 대체한 것이 창원공설시장이다. 경상남도에서는 2001년부터 계속 사업으로 재래시장을 현대화하겠다고 계획하고 있다. 그 일환으로 소답시장에 80여억 원을 들여 현대식 2층 건물 3개 동을 만들었다. 그때가 4년 전이다.
창원 5일장은 예전의 영화를 찾을 길 없다.
5일장으로 인근 함안, 동대산, 칠북, 마산, 진해, 진영 물류의 중심을 이루었던 창원장도 도시 외관과 자본의 집중, 관의 안전한 관리만을 내세우는 시대의 대세 앞에 사라져 가고 있다.
10여 년 전, 일방통행 도로를 정비해 2차선으로 확장한 뒤, 노점을 단속하면서 장은 규모가 크게 줄었다. 큰 도로가는 노점을 단속하는 바람에 공무원들과 숨바꼭질하기 일쑤다. 공설시장 쪽으로는 사람들이 올라가지 않으니 장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그나마 상설시장 안이나 골목골목으로 쫓겨나 앉은 할머니들이 전부다. 찬바람 부는 가을에 접어들어 그나마 한여름보다는 사람들이 붐빈다. 하지만 5알장 때문에 상설시장은 영 신통찮다.
10년 째 시장 입구에서 어물전을 하는 김성대(37세) 씨는 차라리 5일장이 없는 것이 낫다고 하소연한다.
“근처에 대형마트만 세 개나 들어섰지, 5일장 때문에 장날에만 반짝하고 사람이 없어요.”
시에서는 시장 발전을 위해 시장 위쪽에 2층 건물 공설시장 3개 동을 만들었다. 하지만 공사비에 비해 공설시장의 쓰임새가 많지 않다는 것이 시장 사람들의 이야기다.
운영이 문제야
“처음엔 90% 이상 들어찼다고. 근데 관리를 해야 말이제. 관리를 안 하는데 다 떠나가고 말았제. 석 달 만에 7, 8백씩 해먹고 다 나갔는데 뭐. 옷 장사 하던 사람은 천만 원 해묵고 빚 갚으러 일본까지 갔다케.”
그 말 해놓고는 장터국밥 김씨 아주머니는 숨 넘어가듯 웃어제낀다. 남 얘기라 웃으며 말하지만, 공설시장 만들자마자 입주해서 지금까지 있는 입장이니 남 얘기랄 수만은 없다. 다시 한숨을 내쉰다.
“우리는 전세 걸 돈도 없어 달세기 때문에 여 있는 기라. 오도 갈 데 없는 영세민인데 어데 가겠습니까. 고생한 게 아까바서 몬 나간다 아입니까.”
공설시장 바닥엔 2평 남짓한 공간마다 노란 선을 그어 경계를 만들었다. 한 두 칸씩 세를 내어 입점하면 입점자들이 가게에 맞게 시설을 하였다. B동은 그나마 조금 찼지만, 그 넓은 A동 1층엔 두 집만이 입점해 있다.
“상인들이 번영회도 만들고 조직이 활성화되면 잘 될 건데, 지금 담당자라고 있는데 직책이 뭔가도 모르겠고, 관리소장이다 번영회 회장이다 다 해먹고 있으면서 관리를 안 하는데 뭐.”
처음엔 상인들이 번영회를 만들었다. 그런데 사무실에서는 번영회를 못 만들도록 회의도 못하게 방해하였다. 번영회를 만들자 이번엔 회장의 약점을 잡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이층에는 방을 못 넣게 되가 있다 카데. 근데 장사를 할라쿠모 방이 필요한 기라. 회장이라는 사람이 방을 한 개 넣었는데 그 사람(관리자)한테 잡혀가지고 꼼짝을 못하는 기라. 그라모 이 사람 치 내고 회장을 다시 뽑고 우리 할란다 이라모, 있는데 뭐 할라꼬, 못 한다, 너거 하지 마라, 이래가지고 못 이기는 기라.”
재래시장 활성화사업 추진
경상남도에서는 재래시장을 경제활동의 주요 영역으로 보고 재래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개발하고 있다. 2001년부터 ‘재래시장의 환경을 개선하는 사업’, ‘상거래를 현대화하는 사업’을 중요하게 추진하고 있다.
2005년에도 도내 194개 시장 중 50개 시장을 대상으로 환경개선사업에 243억 원을 투입하여 진입도로 개설, 주차장 조성, 아케이드와 장옥을 설치하고 있다.
상거래 현대화 사업으로 온라인 쇼핑몰 및 홈페이지 구축 사업에 1억1천4백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
창원시에서도 재래시장을 활성화하기 위해 경제기업국 산하 경제통상과에 재래시장지원담당 직원을 4명 배치하여, 재래시장의 경영을 전문화?특화하고, 환경을 개선하며, 재건축?재개발을 추진하고, 공설시장을 관리하고 있다. 창원시에 등록된 5일장인 대산장과 북면장에 대해서도 장옥과 주차장 시설을 지원하고 있다. |
관리소장이 어떻게 임명되었는지 상인들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상인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절박한 실정이다.
“저희들이 왜 이리 흥분을 하고 이야기를 하냐 하면요, 기타수입이라든지 모든 것 절약 절약해서 상가를 위해 쓴다면 말을 안 합니다. 지금 상인들이 죽고, 장사가 안돼 세도 안나가고 하는데, 그런 돈을 가지고 자기네들 마음대로 보너스 주고 회식하고,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요. 아닌 말로 10원도 있을 수 없지요. 받아갈 만하다 생각하는 상인들은 한 명도 없습니다. 커피 값이니 녹차 값이니 1원도 사무실에 주기 싫습니다. 잘하면 천 원이 아깝겠어요, 만 원이 아깝겠어요. 고생한다면서 커피라도 타다 갖다 주지.”
손님이 와서 잠시 말을 끊더니, 이내 거침없이 울분을 토해낸다. 준비된 원고처럼 아주머니의 말에는 막힘이 없다. 그만큼 속 깊이 쌓이고 쌓였으리라.
“창원시장님께서 재래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통상경제과에 재래시장 담당부서를 하나 만들었거든요, 만들면 뭐합니까, 만드나 안 만드나 발전이 하나도 없는데. 똑 같은데.”
창원중탕 아주머니까지 흥분해서 거들고 나선다.
“북동시장에서 오랫동안 장사하신 분들만큼 소박하고 착한 사람들은 없습디다. 만약에 상남시장이나 다른 시장이 이 조건 그대로였다면 공무원들 골머리 아파 못삽니다. 그냥 내버려 두겠습니까? 아닌 말로 내 같은 사람 둘이만 더 있어도 택도 없습니다.”
상인들은 시장이 안 되는 이유를 하나같이 관리 탓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제 지칠 대로 지쳤다. 지난 4년 동안 떠들어도 귀 하나 기울이지 않았다. 지난 4년 동안 하루 종일 있어봤자 손님 하나 안 왔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남은 사람은 그간의 노력이 아까워서 버티고 있다. 단지 ‘더러워서 말은 안 할’ 뿐이다.
시장은 갈수록 현대화되고 있다. 규모도 커지고 깨끗해졌다. 하지만 시장이 현대화되는 만큼 시장 사람들의 삶도 현대화되었을까? 그들의 살림도 늘어나고 깨끗해졌을까!
없으면 출세해라
시장 사람들은 나름대로 대안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만큼 절실한 생존의 문제니까.
“요즘 사회복지가 얼매나 잘돼 있습니까. 한 사람이 하건, 두 사람이 하건 상인들한테 뭔가 혜택을 줘야지, 지금은 장사가 안 되도 세가 싸면, 누가 들어와도 들어와서, 들락날락하다 보면 5년이란 세월 속에 벌써 누가 들어와도 들어왔단 말입니다.”
상인들은 생계가 급하다 보니 단합이 어렵다. 그렇다고 일년에 370만 원이나 내고도 장사는 되지 않고, 답이 보이는데 주저앉아 있을 수도 없어, 창원중탕 김씨 아주머니 혼자 시청을 몇 번 찾아갔다. 그러나 보기 좋게 묵살 당하고 말았다. 그의 말대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인 셈이다.
“이 층에 비어 있는데, 아름다운 가게라든가, 공공기관이나 민원상담소 유치하면 되잖아예. 공공기관이나 민원상담소는 쪼끄만 데 있어도 찾아온다 말입니다. 비싼 세금 들여가 비워 놓으면 뭐합니까. 밑에 할머니들 잘 도닥거려서 올라오시게 하란 말입니다. 저렴하게 세를 주고 하다가, 활성화 되면 세를 제대로 받을 방법이 있단 말입니다.”
손과 눈은 두충을 박스에 담느라 열중이지만, 그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가 열변을 토해낸다. 그에게 사무실은 필요 없어 보인다. 상인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입 다물고 장사나 하라’는 관리자, 5년 동안 세 번이나 올라가 봤을까 하는 사무실, 책임회피에 바쁜 공무원, ‘이렇게 간 큰 공무원’들 때문에 상인들의 허리는 더욱 휘어진다.
“힘없는 서민들은 죽으라는 거지. 돈 많고 잘난 사람들만 살아야 되는 사회라. 우리는 고마 없으면 출세해라, 출세해라 노래나 하면서 입 다물고 장사나 해야지 우짜겠습니까.”
그런대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소답시장, 서민들 삶의 중심이었고, 밥이었고, 휴식이 되어 주었던 창원장이 이렇게 사라져 가는 것이 너무도 안타깝다고 김씨 아주머니는 내내 혀를 찬다.
골목 끝에서 만난 사람들
용석상회
- 최용두, 70세, 용석상회
거푸짚으로 지은 창고들이 나란히 줄지어 섰다. 보리와 쌀, 조, 콩, 깨, 갖가지 알곡이 가마니에, 또는 자루에 담겨 팔려 나가길 기다리고 있다. 까뒤집어 놓은 자루 위엔 됫박 가득 알곡을 담아 놓고, 그 뒤에 종이박스를 찢어 가격을 써 붙여 놓았다.
맞은편엔 생선 장수들이 슬레이트 지붕 밑으로 나무대를 만들어 그 위에 도마를 놓고 열심히 생선을 다듬는다. 생물이라 오늘 팔지 못하면 상할세라, 미곡상들보다 한결 바쁘고 부지런해 보인다.
그 옆으로 야채전이 들어 서 있다. 배추며 무, 양파가 더미로 쌓여 있고, 바닥은 시들어 솎아낸 겉잎들로 덮여 있다. 솎아낸 겉잎은 아이들 몫이다. 자루에 담아 가면 성한 것들을 골라 시락국을 끓여 먹기도 하고, 닭이나 토끼를 먹인다.
“그때는 마, 사람들이 걸어 다니질 못했어. 얼매나 사람들이 많은지 장날에는 밀려다녔지. 동대산, 북면 사람들 채소고 머시고 집결장소였거든. 물아래(지금의 죽전, 사하)에서도 오고, 마산에서도 와서 사가 가고, 진해에서도 와서 사가 가고. 물물교환이 참 잘 됐었어.”
50년 가까이 쌀가게를 하고 있는 용석상회 최용두 씨는 옛날이 그리운 듯 허공을 쳐다본다. 그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린다.
용석상회는 창원공설시장 C동 맞은편에 컨테이너 박스에서 잡곡을 파는 가게다. 겉모습으로 보아 공설시장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하지만 이곳은 시장 사람들이 말하는 가장 오래된 가게다. 위풍당당한 현대식 공설시장 맞은편에 초라하기 그지없는 몰골로, 기나긴 시장의 역사를 지키고 있지만 말이다.
저무는 골목길, 콘테이너 앞 평상에 앉아 최용두 씨는 파를 다듬고 있다. 그러면 건너편 공터 쪽에 아내가 파를 놓고 판다.
“딱 고기값 나와. 우리 식구가 여덟인데 이거 다듬어 팔면 고기값 하면 딱 맞아.”
콘테이너 앞에는 평상을 만들어 대야에 잡곡들을 담아 진열해 놓았다. 콘테이너 안에는 파레뜨가 놓여 있고, 그 위에 종이 포장된 쌀과 잡곡이 여나무 포대 쌓여 있다.
부친의 가업을 물려받아 쌀가게를 할 당시만 해도, 창원장은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규모가 컸다. 시장 아래가 39사단이고, 인근에는 그 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또, 가까이에 창원역이 있어 항상 인파가 몰리는 위치였다.
“옛날엔 지금과 비교도 안됐제. 그땐 도매를 했거든. 전라도에서 쌀 200포 씩 차로다 실어와.”
그 쌀을 마산, 진해에 다시 배달해 주었다. 인근에서는 동대산에서 경운기에 쌀을 싣고 와 팔았다.
“그때는 너나 없이 밥 먹고 다 살았어. 왜냐하면 장사가 잘 되이께네. 이거 해가꼬 아들 대학 공부 시켰는데, 우째 시키는지 그것도 모르고 넘어갔어. 돈에 대해서는 구애를 안 받았으니까.”
“나야 돈 많이 벌었제. 자식들 장가 보내고, 아파트 사주고.”
아들 셋을 두었는데 모두 출가하고 도에 과장으로 근무하는 둘째 아들 내외와 노모가 함께 살고 있다. 집은 가게 바로 옆에 있다. 나서 자란 이곳에 70년 째 살고 있는 셈이다.
“내가 가게가 열 개가 있었어. 그 가게 세내서 받는 세만 해도 컸거든.”
그런 가게를 시에서 모두 철거했다. 그 위에 공설시장을 지었다.
“나는 죽어도 못 나간다고 뻐팅겼다 아이가. 그래서 요거라도 받은 거야.”
세 든 사람들은 모두 쫓겨 났다. 최용두 씨는 끝까지 시와 싸워서 컨테이너 박스 하나를 얻었다. 특혜를 받았다. 하지만 싸전과 야채전이 있던 자리에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사람들 발길이 끊기고 말았다. 말 그대로 반찬값 벌고 있는 셈이다.
골목 위, 골목 아래
시장 맨 윗 골목에는 행거에 옷을 진열해 놓고 파는 김점분(34세) 아주머니가 있다.
손님이 왔는데도 아주머니는 딴일 보느라 정신이 없다. 손님이 크게 부르자 그제서야 쫓아온다. 그러나 손님은 옷을 사지는 않았다.
“다른 장에도 갑니까?”
“다 가지예. 경화장에도 가고, 상남장도 가고……”
“다른 데보다 어때요?”
“요즘 어데나 마찬가지지 뭐.”
“요 위에다 전을 펴 놓으면 사람들이 여까지 옵니까?”
“그러니 장사가 더 안 되죠. 그렇다고 딴 데 자리도 없고. 밑에는 안 된다고 위에 가서 하라는데 뭐.”
시에서 노점상을 단속하는 바람에 위로 쫓겨 올라왔다. 하지만 예까지 장보러 올라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노점상이래야 창원공설시장 B동 C동 앞으로 난 도로 가장자리와, 큰길가 온누리약국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에 할머니 열댓 분이 마늘이며 콩이며, 야채를 놓고 파는 게 전부다. 도로가에 짬짬히 전을 폈다가 시 단속반과 숨박꼭질을 하기도 한다.
김점분 씨는 언제나 시가 불만이다. 진해 경화장은 진해시에서 장려하고 있다. 장날이면 좋은 목을 잡고 있어 그나마 재미가 좋은 편이다. 하지만 이곳 창원장은 창원시에서 오히려 죽이고 있다. 노점을 단속하는 바람에 5일장이 죽었다. 5일장 때문에 상설시장도 안된다. 공설시장도 형편없다.
“노점을 단속하려면 제대로 단속해서 여 위로 사람들을 보내던가.”
시 말만 믿고 위에까지 쫓겨 올라온 아주머니의 화장한 고운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여도 도론데 여는 와 단속을 안하냐고!”
두 아이 공부도 겨우 시키고 있다.
온누리약국 앞 골목에서 노점을 하는 황일분(71세) 할머니는 장날에만 나온다.
살이 오른 큰 얼굴은 장사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인도 한 켠에 전을 펴고 생선 두 가지, 채소 세 가지를 팔고 있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장사는 생각지도 않았다. 사채놀이를 하다가 IMF외환위기 때 돈을 떼이고 말았다.
“내가 돈쟁이인 건 이 동니 사람 다 안다. 이제 돈 없으니까 장사해야지.”
창원이 개발되면서 땅값이 올랐다. 벼락부자가 되었다.
“여 밑으로 전부 논이었어. 미나리깡이었고. 논 한 평에 2천5백 원씩 했는데.”
할머니는 24살부터 이곳 소답에서 살았다. 47년 전, 집들 사이로 장이 서다가, 건물이 늘고 장도 커지면서, 장의 역사를 지켜왔다.
‘전에는 고마 살림을 살다’가 말년에 시장에 자리를 깔았다. 마침 이 날은 쫓기지 않아도 되었다. 장날이 일요일이라 공무원들도 쉬는 날이다. 하루 종일 편한 마음으로 장사를 할 수 있었으리라.
쫓기면서 불안해 하는 것보다는 위로 올라가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에 할머니는 단호하게 대답한다.
“위에? 장사가 돼야 올라가제. 올라가도 사람이 없는데.”
김점분 아주머니와 황일분 할머니의 삶은 위 아래로 얽혀 있다. 골목 위, 골목 아래처럼 얽히고 섥혀 있다.
골목엔 삶이 있다.
캐나다 쪽으로 빠질라꼬
- 봉화중탕 통영댁(59세)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답니다. 옛날 사람들은 식당이고 어디고 열심히, 그릇을 씻어도 열심히 하는데, 할 데가 없다 아입니까. 안 돼서 문 닫는 데 천지고.”
봉화중탕 통영댁은 3년 째 공설시장 B동 1층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이 가게는 봉화서 장사하던 사람에게 물려받았다. 약초 이름도 봉화에서 약초를 받기 때문에 봉화약초라 이름을 붙였다.
B동은 A동보다 많이 찼다. 하지만 빈자리가 더 많다. 끝에 자리 잡은 봉화약초는 중탕기를 놓고 나니 자리가 꽉 찼다. 그래서 통영댁도 노란선 바깥에 냉장고를 놓았다.
“하루 두 솥, 한 솥, 그제는 없어가꼬 놀아 묵꼬. 8월은 더 그렇지예. 대목까진 사람 없어예. 그래도 장사하는데, 세나 인건비라도 좀 빠지고 묵을 게 있어야 되는데, 안그렇습니까?”
약초 건강원은 마산 창원에서 소답시장이 제일 많다. 역사도 오래 되었다. 그러나 시장에 사람이 와야 장사를 할텐데 단골손님 아니면 찾는 사람도 없다.
“돈을 만장같이 들이가 지하주차장을 해놔 놓고, 관리하기가 귀찮다꼬 닫아 놨다 아입니까. 약초 같은 거 사러 와가 차댈 데가 없어가 딱지 붙일 기라꼬 빨리 마 난리고, 길에 대나 노모 차가 또 지나가면서 비끼라고 난리고. 그래도 옛날에 컸기 때문에 찾아 오는 사람이 있거든예. 주차장 문을 열어 노모, 소문이 나가 한 사람 두 사람 찾을 낀데.”
통영댁은 답답한 마음에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한 번은 아들 이름으로 시 홈페이지에, 또 한 번은 자기 이름으로 시장 앞으로 올렸다. 그러자 시에서 난리가 났다.
시에서는 그냥 올리지 왜 시장 앞으로 올렸느냐, 해줄 건데 왜 올렸느냐며 들볶아 댔다. 시민을 따라가지 못하는 시 행정이 시장을 죽이고, 서민을 죽이고 있다.
공설시장이 생기면서 시장이 죽었다. 시장 가득 난전을 열던 할머니들도 시장 밑, 주택가 골목에서 전을 펴고 있다. 그러니 공설시장 까지 사람들이 올라 오지 않는다.
“요 앞에도 할매들이 장을 서긴 서는데 사람들이 안 와예. 안 되께네 안 오는 사람은 안 오고 빈 자리가 많아예. 한 삼만 원, 오만 원 팔아가지고, 차 대절해가꼬 여까지 오는데 그 비나 나오겠어예? 여름엔 안 팔리모 생물은 다 버려야제. 시장이 오면은 할매들이 주 ??어삘라 합니다. 몬 들어옵니다, 시장 안에. 시장 배리 놨다꼬.”
지난 선거 때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왔을 때 시장 상인들은 공설시장을 왜 지어 놨냐고 따지고 들었다. 그러나 무슨 소용 있으랴. 대형할인점으로 사람들은 몰리고, 도시 미관과 안전한 관리만을 내세우는 시 행정이 재래시장의 전통과 풍물과 사람 사는 멋을 죽이고 있는 것을. 그것이 시대의 주류인 것을.
“이 정도로 간다 쿠모 여 살아서는 안 되지예. 지금 우리도 중국 쪽으로 빠질라고. 여게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안 보인다 아입니까. 중국에 가가 벌어가꼬 캐나다나 이런 데로 빠질라꼬.”
작은 아들(31세)이 중국에서 중의학을 공부하고 7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그 아들이 한국에서 번 돈으로 중국 양주에 가게를 계약했다. 샤브샤브와 한국식, 일본식, 중국식을 하는 식당을 열 계획이다. 10월 1일에 맞춰 가게를 열 예정이라 통영댁은 조금 들떠 있는 듯하다.
“여기는 투자할 데가 없어. 거기 투자해가 벌어가지고, 이리 안 오고 캐나다로 빠질라고. 하나는 캐나다로 빠지고, 큰 아들(35세)은 영국으로 빠지고 이리 할라고. 여기는 앞날이 안보입니다, 앞날이.”
그나마 통영댁은 희망이 있다. 멀리 세계를 시장으로 장사하는 아들이 있고, 안목이 있다. 게다가 노후는 복지가 잘 돼 있다는 캐나다로 잡았다. 그의 희망이 잘 된 일일까? 모두가 통 큰 안목으로 세계로 나간다면 이 나라엔 누가 남을 것인가. 그래도 하루하루 살아갈 날이 막막한 이들에게 그런 희망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빛 바랜 사진으로……
언제나 한가로운 길모퉁이 찻집, 쌀가게 앞에 서 있는 낡은 짐자전거, 온종일 문가에 나앉아 안경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건너다 보는 담배가게 할아버지, ‘소변금지’라고 쓰여 있는 담벼락, 드문드문 서 있는 외등……(심재상 ‘골목길’ 중에서)
골목길은 도시 안에서 자유와 고독과 머무름과 쉼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아무런 계획도 목적지도 없이 발길이 닿는 대로, 쉬고 싶으면 쉬고 머무르고 싶으면 머무르고, 속도는 스스로 조절하며 자유를 찾는 곳이었다. 골목은 공간 속에서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 속으로 난 길을 찾아가게 한다.
그러나 이제는 골목 끝에서 길을 묻는다.
이제 더 이상 한가롭고 느긋한 골목길을 꿈꿀 수 없다.
시장 사람들에게 삶은 언제나 팍팍하다. 그들의 속 깊은 정을 전쟁 같은 삶이 앗아가 버렸다.
큰 길 안쪽, 사람의 얼굴을 하고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골목길은 이제 빛바랜 사진처럼 역사의 유물이 되어 우리 곁에서 사라진 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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