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김현희 KAL기 사건”은 재조사되어야 한다.”
1.KAL기 사건의 해결은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민족 화해의 초석이다.
북이 테러 지원국으로 지목된 것은 바로 KAL858기 사건에 의한 것이다. 그러나 KAL858기가 폭파된 증거나 김현희가 테러리스트라는 증거가 어디에도 없듯, 북의 지령에 의한 사건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UN안보이사회 역시 증거 불충분으로 대북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한 채 지금껏 살아왔다. 그저 수구 언론과 안기부의 발표에만 모든 판단을 의존하여 북이 88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해 저지른 테러라고만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안기부는 수사 결과에서 북한이 완전범죄를 노려 이 사건의 본질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들려 시도했다고 발표한바 있다. 북한이 전 세계에 실질적인 위협을 주어 88올림픽에 참가하려는 사람들을 위협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면 당연히 여타의 테러 사건처럼 자신들이 했음을 주장하고 자신의 의도나 정치적 주장을 홍보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완전범죄를 노렸다는 것은 모순된 논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은 이 사건을 계기로 북을 테러 지원국으로 낙인찍고 오늘까지도 경제 봉쇄 및 군사적 압력을 가하고 있어 KAL기 실종 사건은 북한에 대한 테러 지원 해제와 북미 및 북일 관계 개선, 남북 관계 개선 등 한반도 평화 및 통일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사안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남한 내 극우 보수 세력은 이 문제를 계속 제기하면서 김정일 국방 위원장이 방문하면 당장 구속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현실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은 KAL기 실종 사건의 진실 규명은 해당 유가족들만의 문제가 아닌 바로 한반도의 평화 정착과 민족 화해의 초석을 다지는 일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2.국가 권력기관의 수많은 사건 은폐 조작과 풀리지 않은 의문사들
당시 안기부의 조사 결과는 많은 이들의 의구심을 자아냈고. 수많은 반론과 문제 제기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기부는 계속 확인 중이라거나, 밝힐 수 없다, 김현희의 자백만을 강조하는 등 과학적, 합리적 수사와는 애초부터 거리가 먼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지금도 당시 수사 결과의 정보 공개를 거부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를 얼마전 경악하게 만들었던 수지김 사건도 858기와 같은 해인 1987년에 발생하였다. 살인을 한 남편 윤씨가 범행 사실을 안기부 직원에게 알렸음에도 윤씨에 대한 조사와 처벌은 하지 않고 오히려 북한 관련 간첩 사건으로 둔갑하고 피살자는 유명한 벤처사업가로 행세해 온 이 사실을 우리는 잊지 않고 있다. 어디 이뿐인가? 아직도 우리를 분노케하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은 수 차례 국가권력기관에 의해 은폐되었다가 후에 밝혀지지 않았는가? 1980년대 암울한 군사정권 시절 안기부와 경찰, 군 등 국가권력에 의해 자행된 수많은 고문과 살인, 의문사는 풀리지 않은 것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이른바 녹화사업, 삼청교육대, 수많은 의문사들은 아직도 속시원히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힘에 의해 탄생된 참여정부는 위와 같은 수 많은 의혹적 사건들에 대해 책임감을 갖고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3.유가족들의 고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유가족인 김호순씨는 당시에는 정부 발표를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아닌걸 자꾸 느끼게 된다고 말한다. 그 한 예로 지난 83년 소련 미사일을 맞아 격추된 KAL007기에서는 잔해가 많이 나왔는데, 폭약이 터져 추락했다는 KAL858기는 코코섬 부근에서 구명정 하나만 발견되었다는 것이 말이 안된다고 설명했다. 김현희 자백하고 구명정 하나만 갖다놓고 진행한 재판이 세상에 어디 있냐는 것이다. 사고기 승객 115명은 주로 중동에서 일하고 귀국하는 힘없는 노동자 가족들이 대부분이었다. 항공기 추락사고에서 시신을 발견하지 못한 사건은 역사상 KAL858기가 유일무이한 것이지만 사회경험이 많지 않았던 이들이 당시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리 없었다. 정부가 하라는 대로 도장을 찍어주었고 희생자들은 사건 3개월만에 일괄 사망처리되었다. 김호순씨도 당시에는 누구든 도장 찍으면 가만 안둔다고 했지만 마지막에는 찍을 수 밖에 없었다. 아이들도 혼자 키워야 하는 입장에서 합의금 7천9백만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차옥정씨나 김호순씨는 한 목소리로 당시 정부가 수색작업에 소홀했으며 진상규명에는 관심이 없었고 서둘러 사망신고 처리한 것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한다. 차옥정씨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청와대에 공문을 보냈지만 접수증 하나만 써주고 끝이었다. 87년에는 김영삼 전 대통령과 독대시 보상이야기를 하길래 보상이 아니라 비행기를 찾아달라고 요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을 자신이 대통령되면 해결해주겠다고 약속했고 94년에는 가족들이 보관하고 있던 자료를 다 보내주기로 했다. 또한 차옥정씨는 김대중 대통령도 선거운동 기간에는 해결을 약속했고, 민주당 한나라당 모두 말로는 다 약속했지만 말뿐이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정부는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KAL858 사건 발생 후 실종 유예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일괄적으로 실종자들을 사망 처리했다. 이에 희생자 가족 중 일부는 실종신고 심판 청구 재판을 제기하여 97년 7월 21일 서울 가정법원으로부터 정식 실종신고를 받아 냈다. 현재 이들은 유품 하나라도 발견되면 ꡐ사망ꡑ 처리에 동의하겠다고 울면서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대통령에게 전달할 탄원서를 손에 든 김호순씨는 자신있게 말한다. 진상규명이 되면 모든 것이 풀릴 것이라고. 지난 14년동안 번번이 좌절당하고 번번이 외면당해왔지만, 가족들의 소박한 소망은 아직도 갈 길이 멀기만 하다.
4.정부는 왜 시종일관 무성의한 태도와 졸속 수사를 벌여 왔는가?
1987년 11월 29일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115명의 탑승객을 태운 KAL858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당시 안기부는 이 사건을 폭파로 규정했으며, 이에 따라 115명의 탑승객을 일괄적으로 사망 처리했다. 그러나 14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KAL858기 사건에 대해 근본적인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시체 한 구, 유품 하나, 블랙박스조차도 발견되지 못한 사건은 세계 여객기 사고 사상 유례없는 일이라며 이는 분명 ꡐ폭파ꡑ가 아니라 실종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안기부는 사건 발생 2년 반만에 안다만 해역에서 비행기 잔해를 발견했다고 보고하면서 이 잔해에 남아 있는 88올림픽 표기 및 태극 마크 표시로 보아 폭파된 KAL기 잔해가 틀림없다고 발표했다. 발견된 잔해는 OFFICIAL이라는 단어가 나뉘어 씌어진 동강난 두 조각인데 해상에 떠도는 수만 개의 파편 중 꼭 맞는 두 조각을 찾을 가능성은 1/40000에 불과하다고한다. 그렇게 확률이 낮은 비행기 잔해는 2년반만에 발견되는데 왜 오늘날까지도 115명이나 되는 탑승객의 유해 또는 유품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안기부의 대답이 걸작이다. KAL기 사고 직후 탑승객 가족들은 유해가 발견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안기부에 질의를 했는데 이에 대해 안기부는 안다만 해역에 식인 상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또한 당시 정부는 기체나 탑승객의 유품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고 발생 단 10일만에 현지 조사단을 철수시키고 수색 작업을 중단했다. 115명의 탑승객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음에도 정부는 KAL858기 탑승객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하지 않았다. 또한 정부는 어디스에 최종 교신 후 사라진 KAL858기의 추락 예상 지역에서 인명 구조 및 기체 수색 작업에 만전을 기했다고 발표했으나 87년 12월 5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은 최종 교신 지점이 어디스에서 서쪽으로 403km떨어진 토리스 상공이라고 발표했다. KAL858기가 추락되기 하루 전인 87년 11월 28일 인도양의 모리셔스 해역에서 추락한 남아공의 점보기는 수심 4,000M에서 잔해가 발견되었고, 소련의 미사일에 요격된 KAL007기의 경우도 1년여가 지나도 계속 부유물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는 단 10일만에 수색 작업을 중단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정부는 가장 중요한 블랙박스를 찾을 노력도 하지 않았다. 블랙박스 발신음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수중공명위치 탐지기'가 필요하다. 정부는 보잉사에 이 기계를 요청해야 했지만 정작 필요한 장비는 갖추지 않고 엉뚱한 장소에서 그것도 단기간에 장비도 없이 수박 겉핥기 식 수색을 하다 10일 만에 무엇에 쫓기듯이 수색을 마치고 만 것이다. 이는 정부가 KAL858기의 수색 작업을 의도적으로 소홀히 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다음과 같은 수많은 의혹과 문제점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1.김현희와 관련된 의혹
1)사진과 관련된 의혹
①사진1(3장의 사진 필요)
당시 안기부에서는 마유미가 `72년 11월 2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조절위 2차 회담에 참석한 장기영 대표에게 꽃다발을 증정했던 장본인`이라고 발표하면서 사진 1장을 공개하였다. 또한 안기부는 기자 회견의 질의응답에서 `김현희가 자동차에서 두 번째로 내린 사람에게 꽃다발을 주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는 완전 허위이다. ` 귀 모양은 평생 변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문처럼 사람마다 다르다. 특히 김현희의 귀는 칼귀에다 귓바퀴에 돌기가 없는 특이한 귀(수만 명에 1명밖에 나오지 않는 희귀한 귀라고 함)로 김현희라고 지칭된 소녀의 귀와는 전혀 다르다. 또한 당시 안기부 수사 발표와 달리 남북조절위 대표로 참석한 장기영은 자동차에서 내린 것이 아니라 헬리콥터를 타고 개성에 내렸다. 기자 회견이 있은 후 안기부는 일본 잡지 붕게이슌쥬 88년 3월호와의 인터뷰를 통해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에게 주었다`고 함으로써 공식 수사 발표를 뒤엎었고 88년 3월 5일에는 `헬리콥터에서 내린 사람에게 주었다`고 다시 수정 발표하였다.
②사진2
당시 KBS와 주요 일간지에서는 꽃다발을 들고 손을 들어 인사하는 소녀의 사진이 공개되었다. 이는 지난 군사 독재 시절 북한과 관련한 보도 통제가 심각하였던 상황에 비추어 보아 안기부가 제공한 사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도 허위임이 드러났다. 당시 주요 일간지를 통해 공개된 사진은 남북조절위 2차공동위원회 당시의 사진으로 알려졌으나 확인 결과 1972년 8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적십자 회담 당시의 것이다. 이는 72년 8월 29일자 동아 일보에 같은 사진이 공개됨으로써 확인된다. 또한 당시 개성시 유치원에 근무하던 왕영숙이라는 여성이 사진 속의 소녀는 김현희가 아닌 당시 개성시 만월 여자 중학교 학생시절의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자 회견을 통해 발표하였다.
③사진3
하기와라는 자신이 72년 평양주재시 찍은 사진을 일본 잡지에 게재하면서 그 사진에 나타난 소녀를 김현희라고 99% 확신한다고 발표 한데 대하여, 안기부는 김현희 자신이 "16년 전 내 모습이 확실하다"며 이 사진을 어떻게 구했냐고 반문하면서 긍정했다고 하여 이를 언론에 공개하였다. 그러나 역시 귀모양을 중심으로 의혹이 일자 나중에 하기와라 기자는 그 소녀를 김현희로 본다는 자신의 발표를 부인했고, 그 소녀는 북한의 정희선이라는 여성으로 밝혀졌다.
※ 이상을 종합해 보았을 때 사진 속의 인물이 김현희라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으며, 오히려 해부학 전문가, 동일인 분석 전문가, 얼굴 분석 전문가에게 감정 의뢰한 결과, 3장의 사진은 모두 김현희가 아니며, 첫째, 셋째 사진은 오히려 북한측 주장대로 정희선과 가깝다는 결론이 나왔다. 전문가들은 성장해도 변하지 않는 연골 부분(특히 귀)과 눈썹 윗부분을 비교해 볼 때 김현희와 소녀들은 거의 일치하지 않고 있으며, 얼굴 형태 구분에서도 소녀들은 북방형, 김현희는 남방형 얼굴로 분석 결과를 내놓고 있다.
2)김현희 경력
당시 안기부의 수사 발표에서는 마유미의 신원 사항에 대해 `평양의 하신 초등학교와 중신 중학교를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예과 1년을 수료하고, 평양 외국어 대학 일어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80년 2월 공작원으로 선발`되었다고 하였으나 북한에서는 이에 즉각적인 성명을 통해 그런 경력을 가진 여성이 없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안기부의 수사 발표에 의하면 김현희가 노동당 조사부에 들어간 지 2년 뒤 조선 노동당에 입당하였다고 하였으나 북에서는 당원이 아닌 사람을 당중앙기관 직원으로 채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한 안기부는 김현희가 85년 8월 15일 조국 해방 40주년 `기념 공로 메달`을 받고, 87년 4월 15일 `국기 훈장 3급`을 수상하였다는데, 그 때 북에서는 그러한 메달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발행된 것은 `기념 훈장`과 `기념 메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판결문에는 이것을 그대로 받아서 `기념 메달`로 수정 기재하였다.
3)김현희 아버지의 신원
안기부는 김현희의 아버지 김원석이 현재 앙골라주재 북한 무역 대표부 수산 대표로 근무하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앙골라 대사관을 겸하고 있는 짐바브에의 일본 대사관에서 한 조사에 의하면 앙골라 정부가 발표한 명단에 김원석이라는 이름이 없으며 수산 대표란 직책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자 안기부는 88년 3월 일본 문예 춘추와의 인터뷰에서 그러한 지적을 받자 확인 중이라고 입장을 바꿨다. 그러면 미확인 사항을 발표한 이유는 무엇이며 확인 결과는 무엇인지 왜 밝히지 않는가?
4)이은혜와 김현희의 관계
당시 안기부는 수사발표를 통해 `김현희는 1981년 4월부터 83년 3월까지 2년간, 평양 동북리에서 일본인 여자 공작원과 함께 생활을 하면서, 일본어 일본 풍습 생활 예의 등 일본인으로 위장키 위한 일본인화 교육을 받았다`고 발표하였다. 김현희는 일본측 수사에 그의 이름이 이은혜라고 밝혔으며, 1991년 일본 경찰은 그가 1978년 일본에서 행방불명된 술집종원업 출신의 다구치 야에코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2002년 10월 1일 북일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일본측에 행방불명자 조사 결과를 확인해 준 다쿠치 야에코가 김현희가 언급한 이은혜와 동일 인물인지는 일본측에서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당시 최성홍 외교부 장관은 밝힌바 있다. 즉 지금까지 이은혜와 김현희의 관계는 철저히 김현희의 진술에 의한 것일 뿐 그녀가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였다는 뚜렷한 증거는 아직 아무데도 없다. 정부 당국은 최대한의 외교적 노력을 통해 이은혜의 북한에서의 행적, 특히 김현희의 일본어 교사 여부를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5)김현희의 음독 여부
당시 안기부는 수사 발표에서 김현희가 체포 당시 독약앰플을 깨물어 음독 자살을 기도했다고 밝히며 이러한 수법이 종전 북한 간첩들이 사용했던 행동 수법과 동일하다고 하여 북한 범행임을 간접 입증한 바 있다. 그러나 72연초에 북한에 밀사로 간 이후락 정보 부장도 음독 자살용 극약 앰플을 소지한 사실이 있다고 후에 토로하였는데 그러면 이후락도 동일 수법으로 보아 북한의 간첩이었단 말인가? 더욱 황당한 사실은 그녀를 진단했던, 바레인의 야코비안 박사는 기자 회견을 통해 위세척을 하였지만 `음독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고 밝힌 것이다. 또한 바레인 정보성에 의하면 음독을 했다는 마유미는 3일 후에는 완전히 의식을 회복했다(아사히저널 1988. 2. 26)고 하는데 안기부는 서울에 도착한 1987. 12. 15 까지도 음독 후유증으로 건강이 악화돼 있었다고 상반된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왜 이처럼 바레인 정보성의 발표와 안기부의 발표에 왜 차이가 발생하는가?
6)철저히 학습 받고 교육된 공산주의자가 서울에 온지 8일만에 심경 변화
당시 안기부는 김현희가 한국에 온 지 단 8일만에 자백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서울 시내 거리 여행과 TV시청 등을 통해 그 동안 북한에서 받은 교육이 허구였다는 것을 느꼈으며, 여 수사관들의 인간적인 정에 감동하여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인간의 사상과 신념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다. 또한 김현희는 84년 8월 15일부터 1개월간 빈-코펜하겐-프랑크푸르트-제네바-파리 등에서 자본주의 훈련을 받아 한국의 사정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며, 체포 직전에는 자살까지 시도할 정도로 철저한 공작원이었다는 점에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2.당시의 기자 회견과 관련되어
1)목소리의 톤
기자 회견 당시의 김현희의 목소리를 분석한 일본 성문 분석 전문가인 스즈끼마스미 소장에 따르면 `감정의 기복이 없이 목소리 톤이 차분한 것으로 미뤄 준비된 시나리오를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스즈끼마스미 소장은 `인간의 감정이 격앙했을 땐, 반드시 음성 주파수에 반영되어 기복을 보이지만, 김현희의 기자 회견 시의 주파수는 200Hz 전후, 울먹거리는 장면에서도 변치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그 기자 회견이라는 것이 안기부의 연출에 의한 연습된 기자 회견임을 입증하는 것은 아닐까?.
2)허술한 자술서와 용어들
당시 안기부의 기자 회견에서 공개된 김현희의 자술서에는 김현희의 서명이 없으며, 자술서 내용에서도 언뜻 보기에는 북에서 사용하는 용어 같지만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가 100여군 데에 이른다. 과연 북한 사람인 김현희가 북한 말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조사가 됐는가?(예를 들어 자술서에서 `녀안내원` `오뻬라`라는 단어가 나오지만 실제로 북한에서는 사용하는 단어는 `녀성 접대원` `오페라` 혹은 `가극`이라고 함)
3)쉽게 배운 서울 표준어
안기부는 기자 회견 당시 김현희가 심한 평양 사투리를 썼다고 주장하나 88년 1월 18일 조선 일보의 `만물상` 기사에 의하면 김현희는 기자 회견 내내 또박또박 서울 표준어를 썼다고 적고 있어 서로 상반된다. 북에서 그리 오래 살았던 사람이 단 몇 달만에 정확한 어투로 서울 표준어를 쓰는 것이 과연 가능하단 말인가?
4)제한된 질문과 응답
안기부의 기자 회견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자유로운 질의, 응답을 허용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사정을 생략한 채 일체의 질문 기회를 허용하지 않고, 김현희가 일방적으로 말하고 특정한 한국 기자들 몇몇이 질문하고 회견을 종결지었다. 외신기자들에게 질문기회 조차 주지않은 것은 안기부의 수사 발표와 달리 김현희가 외국어에 능통하지 않다는 반증은 아닌가?
3.김승일에 대한 의혹
1)4개국어에 능통?
당시 안기부는 김승일은 조선 노동당 조사부의 특수 공작원으로써 일본어,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특히 전자기술부문의 전문가로서 장기간 해외에서 공작 활동을 해 온 정예 공작원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사건 후 11월 30일 그들의 호텔 방을 찾았던 바레인 한국 대사관의 김정기 대리대사는 `신이치와는 한자로 필담했다.`고 증언하고 있으며, KAL 교체 승무원의 도 기자 회견에서 영어와 한국어로서는 잘 알아듣지 못한 표정이었으며 일본어를 했을 때 반응했다고 증언함으로써 수사 발표와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2)살아 있는 시체가 정예 공작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서 김승일을 부검한 결과 키 1m 71, 몸무게 45.95Kg에 위수술과 담낭 수술을 받은 흔적이 있었다. 특히 위 대부분이 수술로 절제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김승일의 이러한 건강 상태는 바그다드에서 KAL기 탑승시 목격한 승무원의 진술에서도 확인되며 1991년 출간된 김현희의 수기 내용을 종합해 보면 `김승일은 곧 죽을 것 같은 환자`였다. 이런 자가 과연 정예 공작원일 수 있는가.
3)부검 검정서의 젋은 시절의 사진은 무엇인가?
지난 2002년 5월 13일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가 인터넷 신문 통일 뉴스(www.tongilnews.com)의 행정정보공개 신청을 받아들여 공개한 `국가안전기획부에서 의뢰한 하찌야 신이치(본명 김승일, 69세)의 부검 감정서 (87.12.28)`에는 신원과 출처, 그리고 사유를 알 수 없는 한 장의 사진이 첨부돼 있어 관심이 쏠리고 있다. 문제의 사진은 분명히 김승일의 부검 감정서 일괄 문서 중의 한 쪽으로 첨부되어 있었고 국과수 관계자들도 이번 부검 감정서 공개 이전부터 이 사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다. 문제의 사진은 김승일과 연관됐거나, 아마도 김승일 본인의 사진임에 틀림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승일의 부검 감정서에 남의 사진을 실을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이 사진이 김승일의 사진이라면 그 다음 문제는 69세, 우리 나라 나이로 70세에 사망한 북한 공작원 김승일의 훨씬 젊은 사진(대체로 50대 이하로 추정)이 어떻게 안기부가 의뢰하고 국과수가 작성한 공문서에 들어 있는가 하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판단해 보더라도 70세에 사체로 인도된 당시 신원 미상의 북한 공작원을 부검하는데 그의 젊은 사진이 참고 자료로 첨부되어 있다면 그의 소지품에서 발견된 사진이라고 밖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다. 예를 들어 그의 여권 사진이라든지 그의 유품 중의 한 점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KAL 858기 사건을 추적해 온 현준희(49, 전 감사원 직원)씨는 "여권 사진도 늙은 모습이며, 이미 공개됐으나 이 사진과 다르고 소지품 목록 역시 공개됐으나 사진은 없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즉 김승일의 소지품에서 발견된 사진일 것이라는 상식적 판단이 설 자리가 없는 것이다. 당시 부검 감정서를 직접 작성한 교수나 담임 검사도 전화 통화 및 직접 면담에서 문제의 사진을 본적이 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들은 "당시 그 사건 담당 직후 다른 부서로 옮겨서 끝마무리를 보지 못했고 아마 안기부 쪽에 알아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부검 담당 의사와 담임 검사가 모르는 한 장의 사진이, 그것도 신원 미상 북한 공작원의 훨씬 젊었을 때의 사진이 어떻게 부검 감정서에 첨부될 수 있었을까? 더구나 이 사진만이 유일하게 부검 감정서 전문에 걸쳐 단 한차례도 언급되지 않았고 사진 번호와 설명도 기재되지 않았다. 이 사건에 한 장의 사진이 의혹 하나를 더 보태고 있는 셈이다. 한편 `김현희 KAL기 사건 진상 규명 시민대책위(준)`는 지난 3월 21일 김현희 KAL기 사건 관련 수사 기록과 재판 기록에 대한 행정정보공개청구를 서울 지방검찰청에 접수했으나 4월 22일자로 비공개 결정을 통보 받은 바 있다.
4)위조 여권 기술자는 사건 2년 전에 죽었다.
당시 안기부 수사 발표에 의하면 김승일에게 위조 여권을 만들어 준 인물은 미야모토 아키라(본명 이경우)라는 북한 간첩이라고 발표하였으며, 일본 경시청 공안부는 85년 북한의 스파이망을 적발(니시아라이 사건)했을 때 미야모토라는 인물을 즉각 감시했으나 조금 있다가 잠적하였다는 정보를 흘렸다. 그러나 이경우가 북한 스파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니시아라이 사건 자체가 실체가 없는 사건일 뿐 아니라 그 당시 미야모토라는 이름 자체도 거론되지 않았다. 또한 일본 경시청은 미야모토가 KAL기 사건 발생 2년전 간암으로 죽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확인했다. 결국 그가 북한 공작원이며, 위조 여권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입증할 방법은 사라진 것이다. 그러면 안기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전에 죽은 사람의 활동을 파악하고 있었단 해괴한 말이란 소리 아닌가?
4.김현희, 김승일 행적과 관련된 의혹
1)제3의 인물이 촬영
당시 안기부 수사 발표에서 제시된 김승일, 김현희 일행의 사진을 보면 가로 사진이 세로 사진으로 바뀌는 등 사진의 일부가 잘리고 편집됐으며, 그중 김현희를 찍은 사람의 위치를 유추했을 때 누군가 주변 건물에서 몰래 찍은 것이다. 이는 이들 일행 외에 제3자가 몰래 찍은 사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승일과 김현희의 행적을 다년간 추적한 일본인 저널리스트들에 의하면 여행자는 둘이 아니라 셋이라고 밝히고 있다.
2)모순 투성이인 그들의 경로
① 김현희가 모스크바를 경유했다는 것은 김현희의 진술만 있을 뿐 증거, 증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김현희는 자신의 진술서에서 일행이 묵은 곳이 `모스크바 북한 대사관 초대소`라고 하였지만 이후 수기에서는 `대사관 행사 과장 사무실을 겨우 빌려 쉬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② 김현희는 자신의 수기에서 모스크바 주재 지도원이 알선해 준 자정에 출발하는 부다페스트행 비행기를 타고 1시간 반쯤 지나(11월 13일) 새벽 4시경에(시차 때문에) 부다페스트에 도착했고, 진술서에는 밤 12시가 좀 지나 소련 비행기를 타고 새벽 4시쯤 도착하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87년 11월 12일~13일 모스크바발 부다페스트행 비행기는 13일 오전 2시35분에 출발하는 에어프로트 432편 밖에 없었다. 또한 김현희는 자신의 진술서에서 `모스크바에서 연락이 있었으므로 주재지도원이 마중 나와 그의 자동차를 타고 조사부초대소에 가서 휴식`하였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수기에는 `마중 나온 사람이 없어 최과장이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 차를 부르고, 새벽길을 몇시간동안 고생고생하며 헤맨 끝에 대사관 직원 집에 도착했다`고 서로 엇갈린 진술을 하고 있다.
③ 김현희는 당시 진술서에서 부다페스트에서 빈에 도착한 곳은 빈의 남역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 프리랜서 작가인 노다 미네오씨의 끈질긴 현장 조사를 통해 이들이 도착한 곳은 빈의 남역이 아닌 서역이라고 밝혀졌다. 그러자 김현희는 이후 수기에서 남역을 서역으로 슬며시 바꾸어 놓았다. 또한 안기부의 수사 보고서에 의하면 이들이 빈에서 묵은 호텔은 빈의 암파크링호텔 603호라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이 역시 일본인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밝혀진 바에 의하면 그 호텔에서 603호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후에 김현희의 수기에는 이 또한 슬며시 322호로 수정되었다.
④ 김현희 수기에 의하면 김현희 일행은 빈에 체류할 때 항공사에서 항공권을 구입하여 메트로폴리탄 호텔을 예약하였으며, 호실은 811호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당시 호텔 리셉션 매니져 쟈릿츠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예약 없이 갑자기 왔으며 묵었던 호실은 806호라고 한다. 당시 안기부 발표에서는 김현희 일행이 1987년 11월 12일 평양을 출발, 모스크바,->부다페스트->빈->베오그라드->바그다드->아부다비->바레인을 여행했고, 빈 입국 이후 기존의 북한 여권을 넘겨주고, 위조 여권을 사용했다고 발표했는데, 두 사람의 위조 여권에는 베오그라드(유고) 출국 스탬프가 찍혀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안기부 수사관은 당시 일문일답에서 `북한의 여권을 사용해서 그렇다`고 얼버무렸다. 이는 빈 입국시 북한 여권을 돌려주었다는 발표와 완전 모순되는 것이다.
3)여권의 허술함
당시 안기부 수사 발표에서는 김승일과 김현희가 소유한 `위조 여권은 개인이나 테러 단체는 제작할 수 없고 고도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정부 기관에서 만든 것`이라 하여 은연중에 북한과의 연계를 드러내고 있으나 김현희의 경우에는 여성이 아닌 남성 고유 번호의 여권을 사용하는 등 위조 여권임이 쉽게 확인될 정도로 조악한 것이어서 `현지 일본 대사관의 긴급 확인 과정에서 위조 여권임이 드러나 체포했다`는 같은 안기부 발표와 모순을 보이고 있다. 또 김승일은 그 이름이 이미 간첩과 연루됐다고 알려진 `신이치`라는 이름을 그대로 여권에 사용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임무를 띤 전문적 공작원이 이미 알려진, 일본 공안 당국 등의 기관에 의해 체크되고 있는 위조 여권을 갖고 활동하였다는 것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4)이해되지 않는 행적들
①암호 표기법의 의문
김현희의 수기에 의하면 김현희는 84년에 김승일이 가르쳐 준 암호 방식을 그대로 썼으며 이는 일본 경시청의 수사 발표에 의하여 85년에 검거된 신광수가 사용하던 암호 방식으로 밝혀졌다. 공작원들의 암호 표기법은 수시로 바뀌며, 특히 사고가 발생하였을 경우 이의 사용을 금하는 것이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2년전에 이미 적발된 암호 방식을 그대로 사용한 사실은 김현희가 정말 7년 8개월의 훈련 과정을 거친 정예 공작원인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②도주하지도 않고 증거인멸도 안한다?.
김현희의 진술서에 의하면 범행 다음날인 11월 30일 저녁 호텔 방으로 일본 대사관에서 여권에 대해 질문하는 전화가 걸려 오고, 김정기 주바레인 대리대사가 호텔 방을 방문하는 등 자신들이 용의선상에 올랐음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아침에야 호텔 방을 나섰다. 또한 증거를 인멸할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음에도 문서나 암호, 사진, 행적을 알려주는 항공권들 등 증거를 파기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애초에는 아부다비에서 바레인을 거쳐 로마로 탈출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김현희는 수기에서 그들이 바레인에 도착한 11월 29일은 항공사가 휴무여서 로마행 비행기 갈아타는 일은 포기하고 3일간 통과 비자를 발급 받아 머무르면서 요르단 암만 경유 로마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2박3일간 호텔에 체류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현희의 주장이 말이 안된다는 사실은 첫째) 바레인에는 로마로 가는 직항 노선이 하루에 4편이나 있었고 둘째) 이슬람 국가인 바레인의 휴일은 금요일로 일요일에는 모든 곳이 정상 업무를 한다. 또 체류 도중 이들은 시내를 활보하면서 사진을 찍는 등 여러 흔적을 남겼다. 한마디로 '나 잡아가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이것이 과연 정예 공작원들의 모습인가?
③유류품이 무려 495종?
안기부의 수사 발표에 의하면 김현희의 검거 당시 유류품은 무려 495종에 이른다. 공작원이 공작지에서 자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공작원의 철칙이라고 했는데 7년 8개월간의 훈련을 받은 김현희가 공작지에서 사진을 찍고, 결정적 증거가 될 맹세문마저 지니고 다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또한 1988년 1월 15일자 중앙 일보에 발표된 김현희 자필 맹세문과 다음날인 1월 16일 조선 일보에 발표된 맹세문은 종이에서도 백지와 편지지로 다를 뿐 아니라 `규율`이 `규률`로 바뀌는 등 단어도 다르게 보도되었다. 또한 맹세문에는 북에서 사용하지 않는 문구가 발견된다. 문장의 적후(敵後)는 북한에서는 적구(敵區)가 보편적이며, `3대혁명규률`도 그 당시 거의 사문화된 표현이다. 그런데 그나마 김현희가 작성했다는 '충성 맹세문'에 대해서도 유가족 회장이 안기부 관계자를 만난 결과 그런 것은 없다'고 확인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 두 신문사는 도대체 존재하지도 않는 맹세문을 어디서 입수했단 말인가? 또한 김정일의 친필 지령이 있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정부의 명확한 입장은 무엇인가?
5.폭파 사실과 관련된 의혹
1)폭파에 사용되었다던 탑승시 비닐 백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당시 안기부의 수사 발표에 의하면 김승일이 비닐 백에 폭발물을 들고 기내에 들어가 좌석 윗간에 올려놓았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나 박길영 858기 사무장과 858기 스튜어디스 박은미는 당시 바그다드에서 탑승하던 김승일은 짐이 없었고, 김현희는 초승달 모양의 숄더백만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2)폭탄을 들고 베오그라드, 바그다드 검열을 두 번씩이나 통과할 수 있을까?
김현희의 진술서에 의하면 그들은 27일 베오그라드에서 최과장으로부터 폭발물을 인수받았으며, 베오그라드 공항과 바그다드 공항의 검열을 통과하여 폭발물을 기내에 설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베오그라드 공항 당국은 안기부의 수사 발표 후 1월 16일 즉각 성명을 내어 공항 당국의 완전한 검사를 뚫고 폭발물을 반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항공 회사 사원은 `갈아타는 여객의 짐은 특히 주의하라`는 것이 항공 테러 방지 대책의 요체라며 안기부의 수사 발표를 전면 부정하는 증언을 하고 있다.
3)조그만 라디오에 c4 350g과 배터리를 같이 집어넣을 수는 없다.
김현희의 진술서에는 바그다드 공항에서 라디오 배터리가 문제가 되자 김승일이 라디오를 켜며 항의해서 이를 돌려 받았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실제 C4 350g의 양은 라디오의 부품을 모두 빼내어야만 들어갈 수 있는 양으로서 그 상태에서 라디오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4)쇼핑 백을 두고 내렸다?
당시 안기부의 수사 발표는 `김현희가 쇼핑 백에 넣어 소지하고 있던 시한 장치 폭발물을 좌석 선반에 올려 놓은 채 휴대품만 들고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렸다`고 적시하고 있다. 그러나 `도중에 내리는 승객이 있으면 테러 방지를 위해서도 그냥 두고 간 짐이 없는가 확인하기 위해 선반을 열어 보는 것이 항공 회사의 철칙`이라며 `여객의 짐에 대한 체크가 엄격한 KAL기에서 체크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일본 항공 회사 직원의 증언은 안기부의 수사 발표를 전면 부인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 당시의 KAL858기 선반은 요즘과 달리 덧문이 없는 개방식 선반으로 기차나 지하철에 있는 선반과 비슷한 구조다. 그러므로 한눈에 봐도 임자 없는 물건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수 있다. 또 당시 교대 승무원으로 아부다비 공항에서 내린 승무원의 증언에 의하면 선반 위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5)소량의 폭탄으로 비행기를 순간 폭파시킬 수는 없다.
안기부는 이들이 범행에 사용했다고 밝힌 폭탄은 파나소닉 RF-082형 라디오를 개조한 것에 넣은 C4 350g과 술로 위장한 `PLX` 액체 폭탄 700cc로 발표하였으나 일본 군사 평론가인 오가와 가주히사씨가 진술한 바에 의하면 이 정도의 폭약으로는 고도 1만m를 나는 비행기를 폭발에서 공중분해시키기 까지는 약 5분의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또한 83년 사할린 상공에서 영공 침범으로 소련에 의해 격추된 KAL기의 경우, 공대공 미사일을 발사하여 명중되었어도 긴급 발신을 했던 경험에 비추어 순간 폭파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6)비행기 잔해에서 그 폭탄 성분은 발견되지 않았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이정필 총기분석실장(당시 잔해분석담당)에 따르면 858기 잔해에서 콤포지션-4(C4)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으며, 유일하게 김승일의 복띠에서 콤포지션-4가 아닌 TNT성분이 나왔다고 한다.
6.정부 수사와 관련된 의혹
1)테러에 대한 조기 감지
유가족 협회 회장 차옥정씨에 의하면 KAL기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녀의 남편이 대한 항공 조종사인 관계로 외신 기자들이 그녀의 집에 많이 왔었다고 한다. 그런데 실종 소식이 언론에 보도된 지 두시간만에 테러라는 소식을 접한 모든 외신 기자들이 '이상한 일이다'고 말했다. 어떻게 실종 발표 두시간 만에 테러라는 소식이 나올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과연 정부는 어떤 정보와 근거로 테러라는 정보를 2시간에 파악하고 언론에 이를 공개한 것인가? 또한 1987. 11. 30. 아랍에미레이트 주재 한국대사관측은 하치야 마유미는 한국에 입국 금지된 요주의 인물이라고 발표했는데 당시까지 하치야 마유미의 신원에 대해서는 언급되지도 않고 있음에도 이처럼 마유미가 범인인 듯한 암시를 주는 이러한 발표를 한 이유는 무엇이며 특히 하치야 마유미가 한국에 입국 금지된 요주의의 인물이라는 증거와 사유는 무엇인가?
2)왜 수색 작업을 유례없이 조기에 중단하였는가?
사건 직후 정부는 사건 진상 규명의 첫걸음인 수색을 매우 형식적으로 하다가 아무런 성과도 내지 않은 상태에서 수색 시작 10일 만인 87년 12월 9일 수색조사단을 철수시켰다. 인도양의 모리셔스해에서 추락한 남아프리카의 점보기는 1년에 걸쳐 항공기 잔해와 승객의 유품이 발견됐고, 소련의 미사일에 요격된 KAL 007기의 경우도 1년여가 지나도 계속 부유물이 발견 됐는데, 사고 발생 단 10일만에 현지 조사단을 철수시키고 기체 잔해, 탑승객의 유체, 유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색 작업을 중단한 이유는 무엇인가?.
3)블랙박스 회수 의지 박약
또한 정부는 초동 수사에 기초적인 블랙박스 회수 작업에도 소홀하였다. 비행기의 블랙박스는 바다 속에서 1천도의 온도와 중력의 1백 배를 견디면서 30일 동안 반경 2마일에 계속해서 발신음을 보낸다고 하는데 블랙박스 회수에 필수적인 `수중공명위치탐지기`조차 갖추지 않은 채 고작 3일 동안 해양 수색 작업을 진행하였다. 그 결과 항공기 사고 역사상 블랙박스를 회수하지 못한 최초의 사고가 되고 말았다.
4)실종자의 조속한 사망 처리
정부는 가족들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KAL858 사건 발생 후 실종 유예 기간이 끝나기도 전에 일괄적으로 실종자들을 사망 처리했다. 이에 희생자 가족 중 일부는 실종신고 심판 청구 재판을 제기하여 97년 7월 21일 서울 가정법원으로부터 정식 실종신고를 받아 냈다. 현재 이들은 유품 하나라도 발견되면 ꡐ사망ꡑ 처리에 동의하겠다고 울면서 호소하고 있다. 왜 그토록 유가족의 동의조차 구하지 않고 서둘러 일괄 사망 처리한 이유는 무엇인가?
5)유가족에 대한 조기 보상금 지급
세계 항공사고 사상 최단 시간인 단 9일만에 사고 수습을 마무리한 기록을 세운 게 바로 KAL858기 사건이다. 보상금 수령도 보통 6개월~1년이 걸리는데 이상하게도 이 경우는 한달 만에 끝내 버렸다. 항공사고가 나면 항공사는 당연히 보험회사에 보험금 청구를 한다. 그러나 확인을 해봐야 되겠지만, 대한 항공은 담당 보험사인 영국 로이드사에 보험금 청구를 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보험금 청구를 못했다면 이 사건 수사 결과가 엉터리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왜냐면 보험회사에서 실사를 나왔을 때 모든 것이 밝혀지는 걸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유가족들에게 지급된 보상금은 어디서 재원을 충당하였으며 KAL기는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하였는가? 유가족들에게 지급된 보상금은 어디서 재원을 충당하였으며 KAL기는 보험사에 보험금을 청구하였는가?
6)김현희 외 중간에 내린 11명의 신원은?
858기를 통해 아부다비 공항에 내린 15명 가운데 김현희 일행을 제외한 11명의 신원은 발표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충분한 조사가 이루어졌는가? 그들중 혹시 국제 테러 단체와 관련된 인물은 없었는지 그들의 신원에 대한 공개는 왜 안하고 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가?
7)왜 하필 대선 전에 압송해 왔나?
중앙 일보 96년 4월 7일자에 의하면 당시 압송 책임자로 바레인에 파견되었던 정부 관리는 바레인 수사 당국을 상대로 김현희 신병 인도를 요청하였지만 계속 증거 부족과 수사 중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13일날 보트가 발견되었고 그것을 증거 삼아 바레인 당국에 떼를 쓰다시피 노력한 끝에 가까스로 압송 시간을 대선 전날인 87년 12월15일 한국으로 압송됐다. 국제적인 범죄의 경우 범인을 체포한 국가에서 최우선적으로 범인에 대한 수사권이 있음에도 범인을 체포 한지 불과 15일만에 수사권을 포기하고 범죄인 인도 협정도 맺지 않은 한국에게 마유미의 신병을 인도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압송할 수 있었던 결정적 증거로 확인된 보트는 왜 하필 그때 발견되었으며, 왜 정부 관계자는 무슨 이유로 대선 전날에 김현희를 압송해 올려구 그 노력을 기울였을까? 또한 UN 속기록에 기록된 UN주재 바레인 대사의 발언을 보면 '한국이 마유미(김현희)의 신병 인도를 요청한 날은 12월16일'이라고 밝히고 있다. 바레인 정부에 정식 요청하기도 전에 한국 정부는 김현희를 대선 하루 전인 15일에 데려온 것이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7.사고 지점
1)불투명한 최종교신지점.
KAL실종 사건은 수색에 있어 가장 중요한 최종교신지점조차 불분명한 사건이다. 당시 정부에선 최종교신지점을 어디스로 파악했으며, 이를 근거로 태국과 미얀마 국경 지대에 대한 수색 작업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87년 12월 5일자 일본 아사히신문 등에는 어디스보다 훨씬 서쪽인 토리스라고 보도하고 있다. 당시 수색 보고서에서는 이에 대한 `확인 작업 중`이라는 언급만 있을 뿐 이후 이에 대한 확인보고는 발견할 수 없다.
2)엇갈리는 시한폭탄 작동 시간
정확한 시한폭탄 작동 시간은 사고 지점 파악을 위해 필수적이다. 그러나 안기부의 수사 발표와 김현희의 수기는 이 부분에서 엇갈리고 있다. 안기부의 수사 발표에서는 김승일이 바그다드 공항에서 KAL기에 탑승하기 전 11월 28일 23시 05분 경에 작동시켰다고 적시하고 있으나 김현희의 수기에서는 탑승 20분전인 22시 40분쯤에 작동시켰다고 되어 있어 무려 25분이나 차이를 보인다. 안기부의 수사발표대로라면 사고기는 보잉707 평균순항속도, 최종교신지점 등으로 미루어 사고 지점은 태국, 버마국경 산악 지대의 동부 상공으로 되나 김현희의 수기대로라면 사고 지점은 이보다 서쪽인 미얀마 남쪽 안다만 해역 중앙 상공으로 어디스 상공 부근이 된다.
8.발견된 기체에 대한 의혹
1)탑승객의 유류품은 없고 비행기 잔해만 있다?
당시 수색 작업을 통해 발견된 잔해들 중에는 승객과 승무원들의 유류품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고 모두가 비행기의 유류품들뿐이다. 그 수많은 승객과 승무원들의 유류품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 채 오로지 항공기 잔해들만 발견되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2)구명보트의 발견 지점과 시기, 파손 상태의 의문점들
12월 13일 어디스에서 100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25인승 구명보트가 발견되었다. 구명보트 안에서는 13종 50여 가지의 물품이 나왔으나 이중 공기압축펌프의 파손을 이유로 이를 KAL기 잔해라고 주장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비행기의 사고 지점을 안다만 해역으로 확정지었다. 그러나 당시 미 해군이 작성한 안다만 해역의 해류도와 풍향도를 참고하면 하루 22Km씩 서쪽 대양으로 해류가 흘러간다. 안기부의 발표대로 사고 지점이 안다만 해역이라면 사고 15일만에 발견된 잔해는 육지 근처가 아닌 서쪽 바다 쪽이어야 이치에 맞는다. 또한 이 구명보트는 말려 있는 상태에서 50종의 물품 중 공기압축펌프만 파손된 채 발견되었다. 공중 폭파되었다면 어째서 구명보트 안의 13종 50여가지의 물품은 훼손되지 않은 채 공기압축펌프만 파손되었는가. 또 왜 하필이면 12월 13일에 발견되어서 김현희를 데려올 수 있었을까?
3)카렌 족의 시신 보유 여부와 흥정들
중앙 일보 88년 1월 15일 보도에 의하면 당시 이성언 태국 대사관 공보관은 858기 추락 지점으로 추정되는 지역을 점유하고 있던 카렌족 게릴라들이 858추락으로 인한 시신 15구와 실종자들의 사진을 갖고 있으며, 이를 대한 항공 직원에게 전했으며 현장 안내 대가로 20만 달러를 요구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 대한항공측이나 정부측의 확인은 없었다.
4)수많은 잔해중 태극 마크와 official만 3년만에 발견되었다?
1990년 3월 안다만 해역에서 태국 어부에 의해 건져진 사고기 잔해가 1990년 5월 KAL김포 공항에 도착하였다. 한국에 도착한 기체잔해부분은 "태극 마크와 88올림픽 공식 항공사라는 의미의 Official이라는 문자가 두 조각으로 쪼개져 있어 그 조각을 맞췄을 때 Official이라는 단어로 되어 있다. 이것이 정부 발표대로 사고기의 잔해라면 공중 폭파된 잔해 조각이 2년 반 동안 해류를 따라 흘러갔거나 바닥에 박혔을 텐데 두 부분이 어떻게 함께 발견될 수 있었을까? 그 수많은 잔해들 중에 꼭 맞는 두 조각만이 발견될 확률은 0.0025%에 불과하다고 한다.
“사건일지”
▲87. 11. 29 - 탑승객 115명을 싣고 바그다드에서 출발, 아부다비와 방콕을 경유해 20시 40분 서울 도착 예정이던 KAL858기가 11시 01분경 방콕과 최후 교신 뒤 인도양 상공에서 실종.
▲87. 11. 30 - 정부, 현지조사반 파견. 바레인 당국 태국과 미얀마 국경 지대 수색했으나 진전 없음. 관계 당국 및 KAL858기측은 인도양과 벵골만 상공에서 공중 폭파하다 가능성 시사. 홍콩 측은 기체 내부 문제로 추락설 제기.
▲87. 12. 1 - 바레인측, KAL858기 실종 사건을 폭파 사건으로 단정. 단 이틀만에 범인 체포. 하치야 마유미(김현희)․하치야 신이치(김승일) 검거. 조사 중 음독 자살 기도했다고 발표. 수색팀 밀림 수색 진전 없음.
▲87. 12. 2 - 청와대, 사건 배후로 북한 지목. 대북안보체제 강화와 선거 방해 엄단 지시. 국제 관례상 극히 예외적으로 바레인 당국에 재판 관할권과 신병 인도 요청.
▲87. 12. 7 - 한국 정부, 북의 '88올림픽 방해 책동'으로 분석. 바레인측 수사는 사실상 종결.
▲87. 12. 9 - 사고 발생 10일만에 블랙박스 수색 중단, 현지 조사단 철수, 비행기는 실종 처리. 유족들 정부 조치에 반발하여 진상 규명 요구하며 침묵 시위.
▲87. 12. 11 - 정부, KAL858기 잔해 추정 물체 발표. 방콕측은 신빙성 희박하다며 강한 의구심 표현.
▲87. 12. 15 - 대선 하루 앞두고 바레인 측으로부터 마유미(김현희) 신병 인도. 일본측 음성 조사 결과 마유미는 북경어권 출신(조선족) 가능성 시사. 미국방성, 발견 물체는 KAL858기 잔해가 아니라고 보고.
▲87. 12. 16 - 대통령 선거 실시. 노태우 당선. 안기부, 북한 테러 공작임을 확증적으로 표현.
▲87. 12. 19 - 김승일 사체 부검.
▲87. 12. 23 - 안기부, 김현희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입건.
▲88. 1. 15 - 안기부, 김현희 자백을 유일한 증거로 'KAL858 사건은 88올림픽 방해, 선거 분위기 혼란 야기, 남한내 계급투쟁 촉발을 목적으로 김정일이 김승일과 김현희 두 북한 공작원에게 친필 공작 지령을 내려 대한 항공기를 폭파한 사건'이라고 공식 발표.
▲88. 1. 21 - 미국, 대북제재조치로 테러국으로 지정.
▲88. 2. 4 - 일본 조총련, 김현희 자필 선서문은 안기부 조작이라고 기자 회견.
▲88. 2. 11 - 한․일 정부 UN안전 보장 이사회 소집 요구, KAL858기 폭파 사건 북한 규탄 논의.
▲88. 2. 17 - 미국, UN안보리에 대북규탄결의문 상정. 증거 불충분으로 불채택.
▲88. 11. 25. - 김현희 서울 지검 송치.
▲89. 2. 3 - 서울 지검, 김현희에 대해 6차례 조사 결과 발표. 살인․항공기 폭파 치사죄와 국가보안법 적용하여 불구속 기소.
▲90. 3. 27 - 대법원 사형 선고.
▲90. 4. 12 - 김현희 특별사면 조치.
▲91. 6. 2 - 수기 '이제 여자가 되고 싶어요' 발간. 사건 당시 진술과 80여곳 엇갈리는 내용.
▲97. 12. 28 - 김현희 전직 안기부 요원과 결혼. 개명. 행방 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