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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산행일지 : 전남 영암군 월출산(남도여행 일번지)
(해남 땅끝, 강진 다산초당, 월출산)
일시 : 2003년 4월 11일(금) - 12일(토)
날씨 : 11일(금) 저녁 : 다소 비, 흐림
12일(토) 오전 : 흐림, 오후 : 맑음
얼마나 기다렸던 월출산인가? 월출산, 너만 그리며, 너 볼 날만 기다려왔다면 다소 과장된 몸짓일까?
그 오랜 기다림과 만남이 현실로 다가온 날, 우리의 만남을 하늘조차 시샘하는 지 아침부터 종일토록 비가 내린다.
하지만 우린 만나야 했다. 김생곤은 그 기다림이 얼마나 사무쳤는지, 얼마나 마음이 급했는지 오후는 열흘 전 전보발령 난 직장에서 휴가처리하고 약속시간보다 15분이나 일찍 경주로부터 나의 아파트로 왔다.
나는 또 얼마나 설레이는 마음이었던지 당초 예정된 강의 분량에서 한 페이지나 빼먹고 서둘러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와서 짐을 꾸리고 있던 중이었다.
정확히 다섯 시에 차바퀴가 굴렀다. 화원 톨게이트 옆 주차장에서는 민주지산 등반 후 다소 다리에 무리가 있었으나 사실 얼마나 회복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어 다소 우리를 걱정스럽게 한 금도현, 그리고 동반 산행에 오래 전부터 뜻이 있었지만 번번히 사정으로 참석치 못했던 김효동이 함께 우리보다 먼저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일로 바쁘신 두분 사장님께서도 월출산이 그리 기다려졌음은 매한가지였나 보다.
마침 우연히 퇴근길에서 만난 임성애 선생은 한참 의아스런 눈으로 우릴 지켜보았다. "비도 오는데 등산을, 그것도 그렇게 멀리, 1박2일씩이나, 남자들 끼리만" 아마 나에겐 이런 눈빛으로 읽혀졌다.
만차. 네 명 정원이 찼다. 고속도로의 비는 그친 상태였다. 다섯 시 30분, 본격적인 우리의 화려한 여행이 시작된다.
금도현은 2주 전 주문하여 며칠 전 출고되었으나 곧바로 취소한 새차 산타페로 이번 산행을 가지 못한 미안함을 불친절한 영업사원을 성토함으로 대신하고 있었다. 그 영업사원에 대한 성토는 잠깐동안 길을 바꿔 최근의 교회 일에 대한 의견교환으로 화제가 옮겨 붙기도 했다.
이번 산행은 월출산뿐만 아니라 남도의 넉넉함을 함께 답사하고 싶다는 욕심이 오래 전부터 있었기에 1박 산행으로 계획을 잡은 것이다. 해남의 땅끝과 강진의 다산초당 둘 중 한곳(사실은 두 곳 모두 욕심이 있었음)을 둘러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일행들에게 오늘은 우선 밤길을 달려 가장 먼 곳인 땅끝에서 숙박하면 좋겠다고 의견을 내었다.
회장의 독재가 심한 것인지, 눈치를 보는 것인지, 아니면 다들 진심으로 좋은 의견이라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행들은 쉽사리 내 의견에 동의해 주었다. 그래서 이번 산행의 주제는 "월출산과 함께 남도답사 1번지 맛보기"로 해야할 것 같다.
"저 놈의 전승탑만 보면 피가 끓는다"는 유홍준 교수의 절규가 있던 곳, 지리산 휴게소에서 우리는 그러한 안타까움 대신 볼일을 보고 통감자구이를 샀다.
지난 해 9월 장모님께서 돌아가시기 전 몇 번 다녀간 적이 있는 김생곤은 광주에서 영암, 해남에 이르는 길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운전석 옆에 끼워둔 지도책을 펴지 않아도 되니 그만큼 편안하고 시간도 단축될 일이었다.
7시 40분 경 4,400월의 싼 통행료를 지불하고 동광주 IC를 나와 목포방면의 1번 국도로 직진하자 어두워져서 보이지는 않지만 광주 월드컵 경기장을 지난다.
다들 배가 고파왔지만 나주까지만 참기로 하였다.
이윽고 나주시, 전라도는 전주와 나주의 두 곳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하였다는 나주에 도착하니 8시30분 경이었다.
식당이 있을 법한 곳 길가에 주차하니 그곳이 중앙로 네거리 부근으로 나주시의 중심부였다.
육감적으로 중앙로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몇몇 곳을 기웃거리다가 아저씨 한 분에게 이 부근에서 잘하는 밥집이 어디냐고 묻자 20여 미터 앞의 '백반 잘하는 집' 간판이 걸려있는 곳을 추천하여 주었다.
식당 입구를 들어서자 모두들 분위기에 매료된 듯 하다. 한옥집의 정감 넘치는 전통미와 편안함이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 바로 이 집이야.' 일단은 합격이다. 방으로 안내된 지 10여분의 시간이 경과하였는데도 주문을 받지 않자 나가보려니 밥상이 들어왔다. 주문이 별도로 없으면 백반으로 주는 모양이었다.
반찬으로는 된장, 생선구이, 돼지구이, 채소, 젓갈류 3종, 나물무침 3종, 침치, 물김치 등 15종 가량이었고 여기에 운좋게도 갓 지어 낸 따끈한 밥 한 그릇씩을 받아들고는 허겁지겁 헤치운다.
이럴 때 맛은 두 말하면 잔소리고 세 말하면 입 아프다고 하지 않나? 식사를 마칠 무렵 아주머니 두 분이 옆 식탁을 치우려고 들어오셨다. 맛이 있다고 칭찬을 하니 얼마 전에도 대구에서 오셨는데 두 번 놀랐다고 하더란다. 그 첫째는 반찬이고 둘째는 가격이라고 하시며 몰려오는 손님 탓에 엉덩이를 붙일 여유도 없다면서 그래도 돈은 싫지 않다고 했다.
우리는 립서비스 절반 그리고 진심 절반으로 아주머니의 친절에도 놀랐다며 예의 그 놀람 항목에 하나를 더 추가해 주었다.
이 식당을 인터넷에도 올리겠다고 약속하며 5,000원씩 20,000원을 지불하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식당을 나섰다.
이 산행기가 인터넷에 오르면 분명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일 게다. 좀 더 확실히 추천하자면, 정식당(나주시, 063-333-1005)이다.
약간씩 부슬비가 내리는 1번 국도를 빠져나와 13번 국도를 만났다. 이 길도 중앙분리대가 설치된 4차선 국도로 제한속도가 80km이다.
간간이 무섭게 몰려오는 구름과 부슬비 탓이기도 하였으나 외눈박이 헤드라이터에다 낯선 길인 나로서는 이 길을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그리고 적색신호까지 무시하고 도망가는 다른 차량들을 따라잡을 수가 없었다.
4차선 국도가 끝나고 해남읍을 만나면 좌회전 신호를 받으면 땅끝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서 땅끝까지는 또다시 40여km. 이제는 2차선 국도이다.
전남 해남군 송지면 송호 해수욕장 근처의 콘도에 들렀다. 주차장도, 방도 만원이었다. 다시 바닷가의 갈두리 땅끝마을까지 오다. 이 곳은 여관, 식당 등으로 밤 11시인 시각에도 화려한 불빛에 둘려져 있어 마치 도심에 온 듯하다.
7년 혹은 그전에 다녀간 적이 있다는 금도현과 김생곤은 달라진 마을 모습에 적잖이 놀라는 눈치이다. 그때에는 작은 여관 하나만 있었다는데... 황토방 민박집에 들었다. 비교적 큰 방이었지만 40,000원을 부르며 금요일이어서 늦게라도 손님이 오기에 깍아줄 수 없다고 하는데도 금집사의 훌륭한 외교능력으로 30,000원만 지불하고 방문을 닫았다.
황토벽에는 온통 언제 누구가 누구랑 다녀가다는 식으로 새겨 놓은 낙서가 빽빽하다. 그들에겐 참으로 중요한 역사의 일부인가 보다.
오랜만에 마셔보는 서니텐 맛이 짜릿하였다. 다른 우리 셋은 씻고 누워 TV를 보고있었지만 김생곤은 금도현이 내어준 휴대폰 게임을 푸느라 정신없다. 한 시간쯤 지나더니 지쳤는지 포기하고 스르르 일어서 씻으러 나간다.
새벽 한 시경, 옆에 누운 김생곤의 숨소리가 커질 때 쯤부터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던 옆방 남녀의 떠드는 소리, 문 닿는 소리, 벽을 쿵쿵거리는 소리들이 긴 운전에 피곤한 나의 귀에서도 점차 멀어져 갔다.
잠결에 정말 깜짝 놀랐다. 정확히 여섯 시 30분, 새벽 닭 우는소리에 잠이 깨었다.
마치 수십 년 만에 듣는 원시의 소리 같았다. 우리가 예전의 우리 모습들로부터 너무 멀리 와있는 듯 하였다. 새벽 닭 소리가 이리도 낯설고 나를 놀라게 하는 지...
비는 걷히고 있었으나 아침안개가 자욱하다. 아직도 잠들어 있을 옆방 사람들이 미운지 공연히 금도현은 TV볼륨을 올리기도, 문을 쾅 닿기도 하면서 어제 밤의 복수를 은근히 하곤 했다.
7시 40분경, 전망대 입구에 주차하고 안개 쌓인 전망대엘 올랐다.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에 위치한 두륜산의 막내둥이 사자봉 정상. 돌탑같은 갈두산 봉수대 옆으로 얼마 전까지 5층 높이였었는데 최근 현대식의 웅장한 대리석 9층 건물로 개축된 한반도 최남단 땅끝 전망대가 입장료를 받고서야 내부를 허락하는 고자세로 위풍당당히 서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충 동양최대, 세계최대의 크기가 아니면 직성들이 풀리지 않으니... 지리산 휴게소의 전승탑처럼 우울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제 방금 출근한 직원인 듯한 분에게 날씨가 궂어서 입장료를 내고 전망대를 구경할 손님이 적겠다고 인사를 건네니 오히려 비를 피해서 안으로 들어와 더욱 어지럽힐 것을 생각하니 오늘 하루 걱정이 앞선다고 한다.
땅끝이라는데 바다는커녕 지척도 잘 보이질 않는다. 웅장한 전망대보다는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는 친근한 느낌의 봉수대가 더욱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여기까지 와서 진정한 땅끝을 정녕 밟아보지 않을 수 없다. 땅끝탑을 향하는 길은 500여 미터로 비교적 먼길이고 경사도 또한 매우 급하다.
막 피어난 들꽃들 사이로 새로 난 내리막 길이 통나무모양의 시멘트로 계단화되어 넓혀져 있고 지금도 공사 중으로 보여 지나치게 손을 댄 것 같아 마음이 그리 유쾌하지 못하다.
그저 산모퉁이의 정감 넘치는 그러한 길이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 한참을 내려가니 바다가 눈에 들어오고 곧이어 땅끝탑에 적힌 글처럼 '수 천년 지켜온, 그리고 수 만년 지켜갈' 땅끝(북위 34도 17분 38초, 동경 126도 6분 01초)에 위치하여 바다 쪽으로 예각을 이룬 높이 10m의 땅끝 탑(토말비)에 닿았다.
이곳 목포가 고향인 김지하님의 시처럼 '더는 갈 곳 없는 땅 끝에 서서' '마음에 묻힌 생각 하늘에 바람에 띄워 보내 듯' 바다 쪽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고깃 배 두 척이 안개 가득한 바다의 섬들과 양식장 사이로 재빠르게 아침 물쌀을 가르며 지나갔다.
땅끝 탑을 뒤로하고 다시 전망대로 오르는 길은 거의 등산이다.
전망대를 들리지 않을 것이라면 산허리를 돌아 땅끝 마을로 가는 길이 있는데, 주차해둔 차에 닿으려면 10여분 이상 숨을 몰아쉬어야 한다. 아침운동 치고는 좀 과한지 모두들 말이 없다.
다시 사자봉 정상에 닿자 구름인지 안갠지 신속히 걷히고 있다. 언젠가는 가보고 싶은 곳 보길도에서 관광객을 위한 취수용 댐건설 계획에 1인 반대시위를 펼치고 있는 한 사람의 얘기를 나누며 차를 타고 강진군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간혹 펼쳐지는 유채 꽃, 정겨운 해변과 섬들, 간혹 내비치는 비온 뒤의 아침 햇살, 모든 것이 정겹고 고마운 전경들이다.
완도 입구인 남창리에서 김가네 기사식당으로 들어가 아침을 주문하고 백반을 받다. 가격은 5,000원으로 같으나 어제 그 집보다는 못하다는 한결같은 의견이다.
관광버스 기사들 서너 명이 공짜로 먹길래 나도 기사인데 공짜냐며 농을 건네며 숭늉과 커피까지 한잔 들었다.
두 번 째 목적지인 다산초당은 두륜산을 왼쪽으로 두고 20분여 거리에 있었다.
길가의 이정표대로 따랐는데 이곳은 다산유물관 입구인데도 일부러 찾아와 달라고 다산초당이라 쓰여진 이정표를 덧붙여 세워놓았나 보다.
이곳을 다섯 번이나 다녀갔다는 금도현, 이번이 두 번째라는 김생곤 둘은 입을 모아 다산초당으로 가는 길이 바뀌었다고 한다.
나와 김효동은 그런가보다 하고 질퍽거리기도 하며 가끔씩은 포크레인으로 깍여진 산의 높은 곳에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뿌리를 드러낸 채 근근이 붙어있는 소나무들을 안스럽게 바라보며 주어진 길을 따를 뿐이었다.
정작 다산초당으로 향하는 입구에 도착하니 두 사람이 말하던 길은 다른 곳이고 우리가 온 길은 다산유물관을 지으며 그쪽으로 새롭게 만든 길인 것으로 여겨졌다.
어째 새로 하는 것은 전망대던, 길이던, 복원이던 그곳이 어떠한 역사성과 주변환경을 가지고 있던 모두 그 모양이라니 나오느니 한숨뿐이다. 다산초당 입구엔 기념품과 찻집이 있었고 두 할머니께서 산채가지를 길가에 내어놓고 앉아 계셨다.
다산초당을 안내하는 입간판을 지나 두 그루의 큰 은행나무를 지나면 여기서부터 다산초당을 향하는 길은 참으로 고급스럽다.
그리 급하지 않은 언덕과 대나무, 단풍나무, 동백나무, 그리고 소나무와 스퀘이어 종류의 나무들이 어두울 정도로 빽빽이 들어찬 정겨운 오솔길을 5분여 오르면 내가 마치 200여 년 전의 다산 그분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비록 1958년, 원래의 주춧돌 위에 새로 지어진 건물이지만 단아한 모습, 익히 눈에 익은 추사와 다산의 현판 글씨, 손바닥에 닿는 감기는 듯한 기둥의 질감, 천일각에서 바라보는 조망, 떨어져서 더욱 서럽도록 붉은 동백꽃 등 모든 것이 감동으로 밀려와 다산이 머물던 1800년 초의 시절로 이끌린다.
왁짜하게 단체로 올라온 초등학생들에 의해 곧 나의 생각과 느낌은 다시 200년을 재빨리 지나왔지만 말이다.
백련사는 여기서 산길로 다시 800미터에 있다. 욕심 같아선 한걸음에 달려가고 싶으나 우리는 '등고선 산악회'가 아닌가.
월출산을 가려면 이쯤에서 다산과 헤어져 해남 땅을 향하여야 했다.
초당 아래 윤단이란 사람의 무덤 가에 작고 귀여운 모습의 석인상을 카메라에 담고 돌아오는 길은 두 사람이 말하던 그 길로 왔다. 대나무 하나씩을 주워들고 밭둑을 지나 할미꽃, 금낭화, 패랭이 등등 봄꽃이 마당 가득한 찻집 '들꽃이야기'에 들러 차 한잔의 여유를 가지기엔 시간적 여유도 그르려니와 도대체 무뚝뚝해 보이기 그지없는 주인장 아저씨의 모습에서 차 맛이 달아나고 말았다.
강진읍으로 들어오는 길, 영랑생가 4km라는 이정표를 애써 못 본 채 하기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늘은 이미 계획에도 없던 많은 호사를 누렸으니 영랑과 백련사는 훗날을 위해 남겨 놓아야지.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자/ 영랑이 살았던 강진'. 내가 대학 시절 대학가요제에서 듣고 좋아하던 그러나 이십 수년이 지나가 버린 세월 속에서 다 잊혀지고 그 곡과 노랫말의 일부만이 남아서 나도 모르게 기억의 저편에서 바람처럼 일어나 입가으로 번진다.
'영랑과 가-앙-진'. 멀리 부산에서부터 반도의 남쪽마을들을 차례로 들렀다가 강진읍에서 해남을 거쳐 목포로 이어지는 2번 국도에 올랐다.
역시 4차선의 고속도로 같은 좋은 길이다. 2차선으로 진입하자마자 뒷차에서 크략송이 울린다. 내가 무리를 해서 진입한 것도 아니고 뒷차는 일차선으로 오고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곧 그 이유가 밝혀졌다. 크략숑을 누르며 나를 앞서 지난 차량은 프레지오 대구차량이었다. 이렇게 남도 끝자락에서 동향의 차량을 만났으니 아마 무척이나 반가왔나 보다. 나도 곧바로 상향등을 반짝이며 인사를 주었더니 알아들었는지 비상등을 깜빡거린다. 싫지 않은 기분을 차안의 네 명은 느끼고 맹렬히 따라가 보았더니 대구70마 9582 차량이었다.
우리는 성전을 우측으로 13번 국도로 갈아타고 월출산 천황사 쪽으로 향하였다. 그 동안 구름에 가렸던 월출산이 우리가 도착하자 구름을 쫓아내고 그녀의 황홀한 자태를 우리에게 서서이 드러내고 있었다.
국립공원 입장료 1,300원씩, 주차료 4,000원 합계 9,200원을 지불하고 주차하였다. 짐을 메고 신발 끈을 조이고 국립공원 월출산이라 새겨진 돌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는 11시 40분 등반을 시작하다.
미리 말해두지만 국립공원 월출산은 이정표 표시가 거의 완벽하기 때문에 거리와 시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필요없을 것으로 보인다. 단지 4종류 정도의 등산로가 있는데 코스에 따라 4시간에서 6시간 정도 소요되는 정도만 알고 있다면 시간 형편대로 코스를 선택하면 그만인 것이다.
우리는 바람폭포, 광암터를 거쳐 정상인 천황봉에 이른 후 구름다리를 지나 천황사지로 하산할 계획이었다. 6.6km의 거리로 약 다섯 시간을 예상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오늘의 월출산은 완연한 봄산이다. 바람폭포를 향하는 계곡 길은 계곡을 흐르는 시원한 물, 물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자주괴불주머니를 비롯한 야생초, 산 중턱 부근까지 올라온 붉은 동백, 산벚, 진달래 등 갖가지 꽃나무들과 연두색 어린 잎들을 앞다투어 피워내는 이 땅의 수많은 종류의 나무들이 어우러진 멋진 조화의 봄산 그것이었다.
조금 전까지 흐렸던 구름도 햇살에 밀려가고 비온 뒤 쏟아지는 햇살에 모든 것이 아름답고 신기하여 어디에 카메라를 들이대어야할지를 어렵게 하고 있다.
바람폭포다. 20여 미터의 높이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부챗살처럼 바람에 날리는 것처럼 보여서 붙여진 이름인가 보다. 시간은 12시 20분 여를 가르키고 있다.
점심용 식수를 준비하고 물을 들이켰다. 김효동은 스텐 물그릇으로 세 그릇을 마신 모양이다.
좌측 위로 펼쳐지는 구름다리와 곧 쏟아질 듯 보이는 바위들을 바라보며 간식으로 양갱을 나누어 먹었다.
서울서 혼자 이곳에 왔다는 중년의 아주머니는 간식을 권했지만 결코 사양하신다. 배가 부르면 못간다며 들고있던 플라스틱 물병을 비우고 새로이 물을 준비하였다.
다시 400여 미터를 오르니 이번엔 우측으로 거북바위, 남근바위 등 여러 형상의 바위들이 능선을 따라 줄을 잇고 있었다.
천황봉 900m를 앞둔 능선에 닿자 우리는 반대편 능선으로 조망을 좀 하겠다는 핑계를 대고는 그 서울 아주머니와 헤어졌다.
50m 정도를 우측으로 이동하여 전망 좋은 능선에서 짐을 풀었다. 점심이다. 김효동이 준비해 온 김치를 한 젓가락 맛본 금도현이 환성을 지르며 오늘의 식은 밥 없음을 한탄스러워 한다.
현장메모중인 나에게도 한 젓가락을 건넨다. 오늘 김치는 두 사람이나 준비해와 남아도 많이 남는다. 넷이서 둘러앉아 황홀한 식사와 후식까지 마치고 남은 900m를 향하여 일어섰다.
다시 시작하는 길은 예사롭지가 않다. 계단 길이다. 비록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그래도 산행길에서 계단은 힘들다. 능선 길을 잠시 맞나 싶더니만 다시 계단이다.
비록 얼레지가 소담스럽게 나무들 아래서 고개를 내밀고 우릴 반기고 있었지만 그리 큰 힘이 되질 못한다.
통천문을 향하는 막바지 계단 길에서는 다들 거의 한계를 맞이하는 듯 하였다.
이제 통천문, 한사람이 겨울 지날만한 바위 틈새에서 기념촬영, 그리고 곧바로 천황봉 정상(809m)에 닿았다.
월출산, 어떻게 산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넓은 농토와 평화스러울 정도로 나즈막한 산등성으로만 이어지던 이곳 호남 땅 끝자락에서 이토록 장엄한 바위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김생곤에게 산악회원이라면서 아직도 월출산을 보지 않았다고 면박을 주었다는 그 사람의 주장이 결코 헛것이 아니었구나.
나 역시 실체도 모른 채 마음으로만 그려왔단 말인가.
안개인지 약한 황사인지 다소 흐려 강진과 목포 앞바다를 볼 수 없음이 옥의 티였지만 향로봉, 구정봉 방면의 능선, 우리가 올라온 장군봉 방향 그리고 다시 내려갈 사자봉, 구름다리 방면의 모습도, 그리고 바위들과 넓게 펼쳐지는 땅들과 영암읍의 모습도 빠뜨릴 수 없는 빼어난 모습들이다.
약 20여분을 쉬었다가 주변에 버려진 맥주캔과 비닐봉지를 주워담고는 2시 30분 하산 길로 들었다.
내리막길의 경사가 숫제 장난이 아니다. 급한 경사와 수많은 철계단들로 이어지는 길을 1km 정도 내려오니 거대한 바위가 앞을 막는다. 사자봉이다.
이 사자봉을 뒤로 내려오니 이제는 다시 급경사의 오르막길로 방향을 바꾼다. 오르막길 2/3정도의 지점에서 휴식이다.
이 곳은 거대한 두 바위 사이의 협곡인 셈이다. 건너편 바위봉우리들의 모습 역시 장관이다.
여기서부터 천황봉은 약 1.4km 그것도 앞서 말하였거니와 급경사의 난코스다.
국내에서 가장 높다고 알려진 저 유명한 구름다리를 먼저 볼 욕심으로, 그리고 그의 강력한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구름다리를 거쳐 이쪽 코스로 천황봉을 향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은 셈이다.
지금 쉬고 있는 우리 곁을 지나는 많은 사람들은 아직은 다소 여유있는 모습이나 이 협곡의 내리막길을 투덜거리며 등산을 하고 있다.
이렇게 오르내림이 많은 길은 많은 체력과 시간을 요구한다. 우리 등고선은 속리산 능선에서 이러한 경험을 한 바 있으나 이 코스는 속리산 능선에 비할 바 아니다.
월출산을 등반하는 분들은 부디 구름다리는 아껴두었다가 하산하면서 보라고 추천하고 싶다. 우리가 택한 코스처럼 바람폭포-천황봉-구름다리-천황사지 코스를 강력히 추천한다는 말이다.
바위틈으로, 혹은 그 위로 이어지는 철계단을 오르내리니 멀리 아래로는 까마득한 낭떠러지와 바람폭포가 보이고 바로 아래에는 그 구름다리가 놓여있다.
구름다리다. MT온 것으로 보이는 이십 여명의 대학생들이 단체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120여 미터 높이, 바위사이의 짜릿한 구름다리 위에서 우리도 촌놈처럼 독사진을 한 장씩. 네 명 모두 돈을 받고도 싫다는 번지점프 얘기를 나누며 성악전공자들로 보이는 시끄러운 노래 소리를 피해 능선 길로 다시 1km를 내려오니 오후 4시, 천황사지에 닿는다.
그리 근 규모의 사찰은 아닌 것으로 보이는 천황사는 어지러이 흩어진 초석들과 재건불사 플랭카드와 함께 금빛 옷 입은 부처님은 비닐하우스 같은 천막 안에 모셔져 있다.
샘물을 들려하자 나이 지긋하고 이가 다 빠진 스님 한 분이 나에게 다가와 신장, 심장 그리고 건강과 관련한 이것 저것을 물어온다. 이런 좋은 환경에서 사시면서도 스트레스가 있는 모양이다. 하기야 삶 자체가 스트레스니까.
드디어 탁족 시간, 아직도 물은 고통스러울 만치 차갑다. 물에 담구었던 배즙을 한 팩씩 들이키고는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구름다리에서 만났던 대학생들은 선배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돌바닥 위에서 좌로 굴러와 PT를 연발하고 있었다. 아,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나?
이제부터 운전대는 김생곤이 잡았다. 다시 역순으로 13번, 1번 국도로 나주를 거쳐 동광주를 지나는 동안 뒷좌석의 손님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나도 차례로 잠에 빠져들었다.
10여분 잠들었을까, 깨니 동광주 IC 입구이다. 다들 잠에서 깨어 차안이 다시 활기 넘치게 되자 곧 순창이다. IC를 빠져나오며 황씨 성을 가진 근무자에게 식당을 물었더니 두 번째 신호 건너 바로 우측에 있다는 민속집(순창읍, 063-653-8880)을 소개해 주었다. 마당엔 덩치 큰 잣나무와 자목련 두 그루가 떨어뜨린 고급스런 꽃잎이 가득한 전통 한옥집이다. 손님이 어찌나 많은지 사장 아저씬 정신이 하나도 없는 듯 하다.
방으로 안내되어 받은 정식에는 25개의 반찬그릇이 놓여 있다. 짜증날 정도로 배를 불린 후 8,000원씩 32,000원을 지불하고는 여덟 시 다시 차에 올랐다.
순창IC 근무자에게 밥을 잘먹었다고 인사를 건네고는 조용한 밤 고속도로를 좇아 대구로 향하다.
5월 산행은 24일 충북 단양 도락산으로 일단 정하다.
당신/ 당신만 생각하면/ 그냥 당신이 그립고/ 한없이 세상이 좋아집니다/(김용택, 산하나)
등고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