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역사인식과
노동자의 삶
노동자의 눈으로 역사보기
- 왜 역사, 노동운동사를 배우나
길을 가다가 길을 잃으면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게 된다. 지금까지 걸어 온 길을 모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어쩌다 사고라도 당하여 기억상실증에 걸리면 잃어버리는 것은 과거의 기억이지만 과거만 잃는 것이 아니다. 오늘은 물론 앞으로 살아갈 내일까지 함께 잃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처럼 우리는 과거 역사와 무관한 듯 바쁘게 살아가지만 누구도 어제 없는 오늘 없고 오늘 없는 내일 없다. 지금 여기는 어디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좀더 보람있고 가치 있는 삶인가?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할 때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할 몫은 무엇인가? 이런 고민의 실마리를 찾으려 할 때 우리는 역사를 다시 들추게 된다.
노동운동사도 마찬가지다. 지금 노동운동의 현실(노동운동의 수준- 조직, 의식, 투쟁, 노동조건, 노동자들의 삶의 질...)은 지금까지 선배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의 결과이며 노동운동 전개 과정의 일부이다. 노동운동의 현실이 어떠하며 앞으로의 가야할 방향을 찾으려면 역사의 거울에 오늘을 비춰보고 역사의 등대가 비춰주는 앞길을 살펴야 한다.
- 누가 쓴 역사인가
우리가 읽고 배우는 쓰여진 역사는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 자체’가 아니다. 누군가가 수많은 과거의 흔적과 기억을 선택하여 재구성하고 해석한 역사이다. 재구성하는 사람들의 목적이나 의도, 이해관계에 따라 관심의 대상과 해석, 평가가 달라진다.
사회의 지배층과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하수인들은 자신들이 독점한 언론과 교육, 홍보 수단을 통하여 역사를 끊임없이 왜곡(비틀기), 과장(더하기), 미화(꾸미기), 은폐(숨기기), 배제(빼기), 비하(낮추기)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누가 쓴 역사인가’,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물음과 함께 잘못된 역사 제대로 보기가 중요하다.
- 노동자의 눈과 몸으로 역사를 보고 만들기
우리가 역사와 현실을 이해하려면 먼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사실대로 인식하는 것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있는 것을 없다 하고 없는 것을 있다하는 것은 거짓이다. 거짓으로는 배울게 없다. 다음은 역사의 변화 발전과 가능성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희망’을 배울 수 있다. 역사를 좀더 길고 크게 보면 때로 정체와 후퇴의 시대도 있었지만 그래도 제 길을 따라 여기까지 변화 발전해 왔으며, 앞으로도 변화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가능성과 희망을 실현하는 힘은 노동을 통한 창조와 투쟁을 통한 파괴라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역사의 주체는 바로 있어야 할 것을 있게 만드는 창조와 없어야 할 것을 없게 만드는 파괴의 담당자였다.
우리는 ‘그때 거기’서 살았던 선배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지금 여기’서 돌아보면서 역사 속의 나를 다시 물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들의 삶과 투쟁은 곧바로 내 자신과 우리 아이들의 역사가 된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을 돌이켜 보며 ‘나는 그때 어디서 무엇을 했지’하고 물었을 때 할 수 있는 대답은 바로 ‘내가 지금 여기서하고 있는 무엇’이다.
1. 조선 후기 - 한말
(1) 조선후기
조선사회는 산업의 중심이 농업이었다. 농사를 지으려면 땅이 있어야 한다. 자기 땅을 가지고 기가 농사짓는 자작농들도 있었다. 하지만 땅 없는 많은 농민들은 땅 많은 소수 지주들에게 땅을 빌어 농사를 지어야만 먹고 살 수 있었다. 땅 빌린 대가로 가을이면 수확물의 반 이상을 지주에게 지대로 바쳐야 했다. 이런 농민들을 '작인'이라고 불렀다. 이 지주와 작인의 관계가 조선사회 경제관계의 기본이었다. 그래서 조선사회를 지주제 사회라 부르기도 한다.
조선사회에서 봄부터 가을까지 농민들이 허리가 휘어지도록, 뼈가 빠지도록 일한 수확물을 반 이상이나 지대로 빼앗아 갈 수 있게 만드는 사회제도이자 질서가신분제다. 신분은 핏줄로 이어지며, 사람과 사람 몸뚱어리 사이에 위아래 넘나들 수 없는 엄격한 수직의 구분이 있다. 조선후기 신분제는 '양반' '상놈'으로 나뉘는 반상제(班常制)로 자리잡게 된다. 신분제를 경제와 관련해서 보면, 대체로 지주가 양반이 되고 작인인 농민은 상놈이 된다.
조선후기,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함께 지주제와 신분제를 두 기둥으로 하던 조선사회의 구조가 흔들리면서 땅 없이도 먹고 살아갈 수 있고, 신분의 굴레에서도 벗어난 '이중의 의미에서 자유로운' 노동자들이 우리 역사의 무대에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한다.
국가에서는 부역노동 대신 고용노동을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필요할 때마다 짧은 기간 동안 인원을 모집하여 고용하는 형태였다. 우리나라에서 자본 임노동 관계가 싹튼 시기는 18세기 후반 무렵이었다. 수공업자나 농민 가운데 스스로의 자본으로 임노동을 고용하여 상품생산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상품화폐 경제의 발달은 농민층 분해를 촉진시켜 토지로부터 이탈하는 층이 발생하였다. 이들은 농번기 또는 일정한 기간 임금을 받고 농업에 고용되거나 광산 또는 수공업장, 도시 여러 분야에 임노동자로 흡수되었다.
18세기 말 무렵, 수안 흘동 금점에서는 장마철이라 태반이 흩어졌는데도 550여 명의 광군이 금을 캐고 있었으며 남아 있는 초막이 700여 개이고 인구도 15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도내의 ‘무뢰배’ 뿐만 아니라 소문을 듣고 사방에서 농사를 폐하고 몰려든 사람들이었다.
19세기에 개발된 갑산 고진동 광산에서는 한 갱에서 40명이 광석을 캐내면 20명 정도가 그것을 운반하고 , 2-4명은 갱을 꾸미고, 6-8명은 물을 퍼내는 등 분업에 기초한 협업으로 작업을 하였다.
놋그릇을 만드는 금속가공업에서도 임노동을 고용한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19세기 중엽의 정주 납청에는 약 50개의 크고 작은 놋그릇 작업장이 모여 있었다. 그 가운데 대야 양푼 바리 같은 큰 그릇을 만드는 양대점 바리점 같은 곳에서는 20명 안팎의 노동자를 고용하여 분업에 기초한 협업으로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숟가락점, 촛대점, 대통점과 같은 작은 규모 작업장에서는 서너 명의 일꾼들이 주인과 같이 일하였다.
토지로부터 이탈한 많은 농민들을 언제나 안정되게 고용할 수 있는 일터가 충분하지는 못했다. 초기 노동자들이 고용주와 맺는 계약관계도 아직 신분적 인신적 구속에서 자유롭지는 못했기 때문에 자유롭고 대등한 계약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봉건사회 해체기에 등장한 초기 임노동자들의 불안정한 고용관계와 반프로적인 성격은 국가 변란이나 농민항쟁에 적극 참여하게 하였다. 1811년 ‘홍경래 난’ 때는 운산광산의 노동자가 반란군의 주력으로 참가하였다. 당시 평안도 지방은 잠채광업이 발달하여 광범위한 광산노동자 층이 존재하였으며 이들은 임금을 받고 생계를 꾸려가던 층이었다.
1862년 농민항쟁 때는 몰락농민인 유민과 계절적 단기 임시 고용농민들이 참가하였다. 이들은 장시를 떠돌며 날품을 팔거나 땔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던 층으로 품을 팔지 않고서는 먹고 살 수 없는 노동력만 소유한 층이었다.
(2) 개항이후 노동자층의 형성과 노동운동
개항이후 조선사회는 미곡 수출의 증대에 따라 지주제가 강화되고 서양 면포가 수입되면서 국내 토포산업이 타격을 받게 되었다. 봉건지배계급의 수탈도 가혹해 졌다. 그에 따라 소작농민의 경제적 조건이 악화되고 빈농이나 농업노동자층의 몰락이 촉진되었다.
개항이후 일부 근대적 공장이 들어서기도 하였으나 아직은 농공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토지에서 유리된 몰락농민들은 공업노동자보다는 농업노동자, 광산노동자, 부두노동자, 철도노동자로 유입되었다. 이들은 개항 후 제국주의가 조선에 진출하고 수탈하려는 자원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노동자 계급의 형성의 특징이었다.
농업 임노동자층은 1894년 농민전쟁 과정의 집강소 기간에 무장농민군의 주력으로서 과격한 행동양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토호 요호 부민층의 재산을 빼았기도 하고, 원한 깊은 양반유생층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농번기가 되어도 돌아갈 땅이 없는 층이었다.
9월의 2차 봉기때 농민군의 주력은 빈농층과 농촌임노동자, 도시의 잡역자, 실업자 층이었다. 이들은 농민전쟁이 실패로 돌아간 뒤에도 민란, 의병과 영학당 활빈당에 편입되어 저항을 계속하였다.
1880년대 이후 광산의 개발은 대규모화하여 1886년 영흥금광에는 광부가 5-6천에서 1만명 정도에 이르렀다. 운산광산 등 외국인의 광산소유가 많아지면서 광산노동자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광업은 경영을 담당하는 덕대가 10-20명 규모의 노동자를 거느리고 자금을 대는 물주에 소속되는 물주 - 덕대 - 임금노동자의 생산조직 형태를 띠었다. 이들 광산임노동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항해 파업, 시위의 형태로 저항하는 경우가 빈발하였다. 1900년에는 영국 자본의 은산 금광에서, 1899년과 1901년에는 독일 자본의 금성 당현 금광에서, 1901년에는 일본 자본의 직산 금광에서 집단 저항을 일으켰다.
개항을 계기로 인천 부산 원산 목포등 개항장에서는 화물을 운반하고 포장하는 부두 노동자들이 증가하였다. 직업적인 부두노동자들의 수는 1897년에 1천여명, 1902년에 2천여명, 1903년에 3천여명, 1906년에 5천여명이었다. 비직업적 부두노동자를 포함하면 이보다도 훨씬 많은 부두노동자가 있었다.
부두노동자들은 미곡을 계량하고 포장하는 두량군, 화물 운송에 종사하는 칠통군 지게군 하륙군으로 노동하였으며, 운반 거리 무게에 따라 임금에 차이가 있었다. 일본인 상인 자본가에 고용된 조선인 부두 노동자들은 날이 밝아서 어두워질 때까지 고된 일을 하고도 점심은 굶고 물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할 정도로 열악한 조건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1898년에서 1903년 사이 목포 부두의 노동자들은 일본 자본가의 착취에 저항하여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임금인하에 반대하는 임금투쟁, 중간착취자인 십장에 대한 반십장운동, 거류지에서 일본패 착용에 반대하는 반일본패 운동을 전개하였다.
제국주의의 조선 침탈을 위한 수단인 철도 건설에도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1897년부터 1903년까지 경인선 경부선 일부 구간 공사에 경인지방과 부산지방의 도시노동자들과 영세 농민들이 철도 건설 노동자로 참여하였다. 경부 철도 공사에 고용된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은 단순 노동자가 최고 40-50전, 전문기술자가 60전까지 받았는데 이는 일본인 노동자의 1\2~1\3 수준이었다. 1904년 러일전쟁기에는 철도건설에 노동력을 강제 징발하였다. 노동력 강제 징발에 반발하는 저항의식은 반일반철도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04년 9월에는 경기도 시흥군에서 수천 명의 군중이 폭동을 일으켜 강제 동원에 앞장선 친일 군수와 일본인 2명을 죽였다. 같은 무렵 황해도 곡산에서도 경의선 철도 공사를 맡고 있던 일본인 청부업자 8명이 주민들의 손에 죽었다.
개항기의 임노동자층은 대부분 광산, 부두, 철도건설, 농업 노동자로 존재하였으며 근대적 공업의 임금 노동자와는 차이가 있었다. 이들의 생활은 극히 불안정했으며 임금은 성과급 제도에 따라 일정치 않았으며, 한 달에 15일 정도 노동하는 것이 보통이었고 주거도 일정치 않아 노숙하는 노동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부두노동자나 광업노동자의 투쟁은 근대적 노동운동의 출발이었다.
2. 일제 식민지 시기
(1) 1910년대 노동자의 존재와 노동운동
1910년대 일제 식민지 무단통치기 전체 산업에서 공업과 공업인구의 비중은 여전히 낮았다. 일제는 1910년 12월 ‘회사령’을 공포하여 조선의 상공업을 철저히 억제하였다. 조선에서 회사를 세우려면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하며, 총독은 명령 하나로 회사를 해산 또는 폐쇄시킬 수도 있었다. 1919년 조선 안의 민족별 자본 구성을 보면 조선인 기업이 11.6%, 일본인 기업이 78.4%, 조일 합동 기업이 8.9%였다. 조선인 회사도 대부분 일제의 수탈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엇기 때문에 일본 경제의 재생산권에 예속되오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노동자수는 1911년 1만 4천여 명에서 1919년 4만 8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일제 강점기 전 기간에 걸쳐 조선인 노동자들은 일본인 노동자에 비해 민족 차별에 기초한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다. 조선인 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 노동자의 1\2~1\3 정도였고 노동시간은 12~16시간에 이르렀다.
1910년대 노동자들은 아직 양적`질적으로 전체 운동을 이끌어갈 주체세력으로 성장하지는 못했으나 공장 노동자수가 늘어나고 초보적인 노동자 단체를 만들어 임금인상을 요구하고 민족적 차별에 반대하는 파업투쟁을 벌였다. 이 시기 노동자 단체는 80% 이상이 자유노동자 조직이었고, 1905년부터 1919년 사이에 조직된 노동단체 수는 32개에 이르렀다. 당시 노동단체들은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직업을 알선하고 소개하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노동자 권익 보호보다 노동력 공급 기구의 성격을 띠었다.
노동자 파업투쟁은 1917년까지는 연간 10건을 넘지 않았고 참가인원도 100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1918년에는 연간 50회에 4400여 명이, 1919년에는 연간 84건에 8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파업투쟁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등 노동조건에 반대하는 생존권 투쟁이 주였으며 대상은 주로 일본 자본이었다.
(2) 1919년 3.1운동과 노동자 투쟁
1919년 3.1운동은 일제 식민지 강점기 1910년대와 1920년대를 가르는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일제는 헌병의 총검을 앞세운 무단통치에서 고등경찰을 앞세운 문화정치로 바꾸었다. 지배방식을 교활하게 바꾼 것이긴 하지만 이러한 양보와 후퇴는 조선민중이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었다. 또한 3.1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의 방향과 주체가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3월 1일에서 4월 말까지 2개월여애 걸쳐 200만명이 넘는 민중이 3.운동에 참가하였다. 전국 232개 부군가운데 229개 부.군에서 1491건의 시위가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169여 개의 주재소, 면사무소 등이 파괴되었다. 격렬한 반일항쟁 뒤에는 엄청난 희생이 뒤따랐다. 일제가 만든 통계에 따르더라도 전국에서 학살된 사람이 8천여 명, 부상자가 1만 5천여 명, 검거된 사람이 4만 7천명에 이를 정도였다.
ㅇ 노동자 만세 시위 운동
3.1운동 당시 노동자 계급은 전체 인구가운데 수적으로 많지도 않았고, 독자적인 요구를 제기하자 못했으나 초기단계부터 독자적으로 또는 대중과 결합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거나 동맹파업을 전개함으로서 투쟁의 분위기를 지속시켰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본다.
3월 2일 0시 20분 종로 네거리에서 약 400명의 노동자집단이 만세를 부르면서 종로경찰서 앞까지 시위하였는데 주모자 20명이 체포되었다. 일인측 기록에 나타난 최초의 노동자 시위이다.
3월 8일 오후 7시 40분경 용산에 있는 조선총독부 총무국신쇄소에서 야간 작업을 하던 노동자 200명은 식당에서 시위를 결의하고 사옥앞에서 실행하자 다른 노동자도 이에 가담하여 만세를 고창하여 기세를 올리는데 급거 출동한 일본군 용산헌병분대에 의해 시위지도자 19명이 검거되고 진압되었다. 이를 계기로 경성전기주식회사의 전차차장과 운전수 및 수선공들이 잇따라 파업에 들어갔다.
3월 9일 오전 10시 30분 출근교대해야 할 차장, 운전수가 속속 퇴사하고 종언원이던 운전수, 수선공들도 3시경부터 차례로 전차를 차고에 넣고는 퇴사, 모두 120명이 파업에 참가하므로서 이후 3월 29일까지 20일 가까이나 서울의 전차교통은 마비상태에 빠졌다. 이에 당황한 전기회사 당국은 내근일본인사원으로 하여금 전차를 임시 운행케 하였으나 마포선, 청량리선, 왕십리선, 의원선의 운행은 쉴 수 밖에 없었다. 회사측과 일본경무당국은 한국인 노동자들의 시위파업행동에 회유 협박 등 방법으로 분열작용을 가하여 일부 노동자로 하여금 동맹파업에서 이탈시켜 시내중심부의 전차운전을 시켰는데 배신자에 대한 제제가 가해졌다. 3월 10일 종로 4가에서 파업에서 배신 이탈하여 전차를 운전하고 있던 한국인 운전수에게 약 300명의 시위대가 폭행을 가한 것을 시초로 도처에서 전차에 투석 또는 파괴행위로 나타났다.
3월 22일 철도기관수 차금봉은 잡역노동자와 부근의 전차차장, 공장직공 등 700-800여 명을 이끌고 만리동에서 독립문까지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는 27일에도 만철경성관리국 조선인 노동자의 시위를 조직하고, 서울역 앞에서 조선노동대회, 조선독립 등의 구호가 적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파업시위를 이끌었다.
이 시위행진은 그동안 잠잠하였던 시위운동에 불을 붙였다. 23일은 새벽부터 훈련원, 동소문, 미생동, 원효로, 창덕궁 등 시내 각지에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차금봉은 27일에도 만철경성관리국 조선인 노동자의 시위를 조직하였다. 노동자 800여 명이 서울역 부에서 앞에서 ‘조선노동자대회’ ‘조선독립’ 등의 구호가 적힌 프래카드를 내걸고 파업시위를 벌였다. 삼엄한 경계 속에서도 철도국 전한국인 노동자 900명 가운데 불과 85명의 탈락자를 제외한 거의 전원인 800여명이 시위에 참가하고 3월 31일까지 5일간의 파업을 감행하였다.
ㅇ 노동자 파업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노동자 파업은 84건에 9011명이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조선인 노동자들이 92%인 8,283명이었다. 전체 파업의 75%가 공장 공업이 발전하고 있던 경기도 경상남도 평안남도에서 일어났다. 파업기간은 1-3일이 대분이었으나 6 곳에서는 8일 이상 파업을 지속하였다.
파업건수로는 인쇄공 13, 제화공 12, 정미소노동자 9, 담배공장노동자 8, 운수노동자와 부두노동자가 각 4, 철공소직공 4, 전기관계 노동자 3, 토건노동자와 광산노동자 각 3건이었다.
발생건수로나 참가인원으로나 압도적인 다수가 임금인상 요구로써 전체 쟁의건수의 83%를 차지한다. 이것은 1차 대전 이래의 물가등귀로 인한 실질임금의 현저한 저하와 세계에서도 기아임금으로 유명했던 당시 일본인 노동자임금의 4-6할 밖에 안되는 민족차별적 저임금으로 말미암아 빈궁의 구렁텅이에 떨어진 한국노동자의 정당한 요구였다. .
쟁의형태는 공정기계시설등이 파괴, 일본인에 대한 폭력행사, 항의 연설회, 시가행진, 동맹파업, 태업, 진정등의 형태였다.
노동자들은 운동의 시초부터 학생, 시민과 함께 시위에 과감하게 참가하고 운동이 진압된 뒤에도 끝까지 조직적인 투쟁을 전개하였다. 3.1운동의 진행과 함께 한국노동자는 참가인원과 활동역량을 증대하여 항일투쟁의 중추적인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는 무엇보다도 운동과정에서 민중의 민족적 계급적 각성과 자각이 촉진되어 민족해방운동의 저변을 확대한 데 있었다. 1920년대 들어 민족해방운동이 발전한 것은 이러한 기반 위에서 가능한 것이다.
(3) 1920년대 노동조직과 노동운동의 성장
ㅇ 노동조직
투쟁을 통하여 민족적, 계급적으로 자각한 노동자들은 1920년에 일제가 소위 문화정책이라는 회유책으로 약간의 언론의 자유와 집회를 허락하자 한국최초의 합법적 노동단체인 조선노동공제회를 만들었고, 시위와 파업의 최선봉에 섰던 인쇄직공, 전차차장, 운전수, 수선공, 연초제조공들이 각기 인쇄직공조합, 전차종원원조합, 연초제공조합을 조직한 것을 비롯하여 이발직공조합, 양복직공조합 등 직종별 노동조합이 속속 조직 결성되었다. 이리하여 조선노동공제회는 1922년에 조선노동연맹으로 개편되었다가 더욱 증가하는 노동쟁의와 소작쟁의를 계속해야 한다는 취지아래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성립되었다.
1920년 4월 설립된 조선노동공제회는 최초의 근대적 노동단체인 공제회로서 노동자를 비롯하여 실업가, 의사, 변호사 같은 부르주아 지식인들이 함께 참가하였다. 노동공제회는 기관지 <<공제>>를 발행하고 노동야학, 노동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친목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계몽단체였다.
노동공제회의 이런 성격을 못마땅하게 여긴 노동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은 1922년 10월 ‘신사회건설’, ‘계급적 단결’을 강령으로 내건 조선노동연맹회를 만들었다. 경성전차종업원회 등 직업별 노조와 일부 소작단체 등 13개 단체와 2만여 회원을 한데 묶은 노동연맹회는, 1923년 5월 1일 최초로 전국규모의 메이데이 행사를 여는 한편 경성여자고무직공조합과 경성양말직공조합을 조직하고 이들의 파업투쟁을 지원 지도하였다.
노동조직이 발달하면서 1924년 4월 전국 260여 노농단체와 5만 3천여 회원을 거느린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노농총동맹은 “우리는 노동계급을 해방하여 완전한 신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철저하게 자본가계급과 투쟁”한다는 강령을 내걸었다. 그러나 노동자 농민의 계급의식이 높아지고, 식민지 사회에서 노동자 농민의 계급 기반과 하는 일이 달랐기 때문에 노동총동맹은 조선공산당의 노력으로 1927년 9월 조선노동총동맹과 조선노농총동맹으로 나뉘었다.
이 무렵 일본 독점자본의 진출이 늘어나고 많은 노동자를 필요로 하는 근대적 공장이 들어서면서 각지의 노동조직도 바뀌어 나갔다. 같은 지역에 같은 직업을 가진 노동자들이 형성됨에 따라 지역합동노조는 점차 직업별 노조로 분화하였고, 같은 지역의 지역별 노조들은 상급단체로서 지역연맹체를 결성하였다. 영흥노동연맹, 원산노동연합회 같은 지역연맹체들은 높은 단결력을 바탕으로 서로 파업을 지원하고 함께 메이데이 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소작쟁의 여성운동을 연대 지원하는 등 20년대 지역민중운동의 주요한 거점이 되었다.
ㅇ 노동쟁의
이러한 노동조직의 발달과 함께, 1920년대 노동운동도 발전하였다. 1921년 9월 부산 부두노동자들이 최초로 대규모 연대파업을 일으킨 것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파업투쟁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1921년에서 1925년 사이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당시 공업이 치중되었던 경기도, 경상남도, 전라북도에서 주로 일어났다.
1920-22년까지의 파업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조건이 임금인하 반대와 임금인상 요구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1923년 뒤부터는 파업참가 인원도 많아졌을 뿐 아니라 노동자의 요구조건도 단체계약권의 확립, 8시간 노동제의 실시, 일본인 악질 감독의 추방, 대우개선 등과 같이 그 폭을 넓혀갔다.
1920년대 전반기 노동자 파업은 ① 주로 남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것은 공장과 부두 운수노동자들이 이곳에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② 20년대 이전부터 얼마간 훈련되어온 운수와 부두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의 선두에 섰고 정미 제분노동자들이 그 뒤를 이었다. ③ 많은 투쟁이 자연발생적 투쟁으로서 주로 임금인상 요구, 임금 인하 반대 등 경제적 요구에 집중되었다. ④ 23-25년의 파업투쟁에서는 노동단체들의 역할이 커지기 시작하였다.
192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노동자 조직의 발달과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에 힘입어 파업투쟁은 전반기보다 참가 인원도 늘었고 그 동안 거의 파업이 없었던 북부지방의 공장 광사느로 이어져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1926년 목포제유노동자파업과 1927년 영흥흑연광산노동자 파업은 50-70일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이때 노동자들은 규찰대를 만들어 일본경찰과 자본가의 탄압에 맞서기도 하였다. 20년대 후반 투쟁을 통해 조직과 계급의식을 높여간 노동운동은 1929년 원산총파업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1920년대 후반기 파업투쟁은 ① 노동단체들의 지도를 받아 연대파업을 완강하게 벌였다. ② 20년대 전반기와는 달리 전국으로 파업이 확산되었다. ③ 광산노동자 토목건축노동자들의 파업이 활발해졌다. ④ 노동자 파업을 지키려는 투쟁단 같은 조직을 만들었다. ⑤ 파업투쟁이 경제투쟁을 넘어 점차 정치투쟁의 성격을 띄기 시작하였다.
■ <자세히 보기> 원산 총파업 투쟁 (1929년 1월 - 4월)
1929년 1월부터 4월까지 2천 여명의 노동자가 80여일 동안이나 파업을 계속하여 우리 나라 노동운동사에서 큰 봉우리를 이룬 원산총파업이 일어났다. 원산총파업은 20년대 노동운동을 결산하면서 30년대 노동운동이 새롭게 시작함을 알리는 투쟁이었다.
1928년 9월 영국인이 경영하던 라이징 선 석유회사에서 악질 일본인 현장 감독 고다마가 조선인 노동자 박준업을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9월 8일 120여명의 노동자가 회사에 항의하기 시작하였고, 9월 18일 원산노련이 지도하여 감독파면과 최저임금제, 해고수당제를 실시하라며 파업을 벌였다. 회사에서는 마지못해 3개월 뒤에 요구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다. 석 달 뒤인 12월 28일 원산노련이 단체협약안을 만든 뒤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하자, 회사 쪽은 “모든 노동단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직공과 직접 해결한다”는 구실로 요구를 거절하였다.
회사측에 비열한 태도에 격분한 300여 명의 문평 석유공장 노동자들은 1929년 1월 14일 최저임금제의 확립, 8시간 노동제의 실시, 단체계역권의 확립, 지배인의파면, 대우개선 등을 요구조건으로 내걸고 재차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들은 가두 시위를 벌이면서 기세를 올리고 수천장의 삐라를 원산시민과 각 노동조합에 배포했다.
상급단체로서 단체교섭권을 가진 원산노동연합회(원산노련)는 즉시 산하의 노동조합들에 대해서 이들에 호응하여 파업을 단행하라는 지시를 내리는 한편, 조선 각지의 사회단체와 노동대중에게 파업을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한 공장에서 시작한 파업은 대규모 총파업으로 발전되었다. 공장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자유노동자들까지도 합류하여 파업노동자의 수는 약 3천여명에 달했다. 마침내 원산 일대는 파업의 분위기에 휘말리고 산업, 운수, 교통기관은 일체 정지되어 버렸다.
다음은 원산총파업의 시작과 파업 분위기를 보여주는 글들이다.
"1월 23일의 원산은 바람도 몹시 불거니와 일기도 매우 쌀쌀한데 시가의 골목골목에서는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는 파업노동자 떼와 이들의 뒤를 따라 다니는 순사 떼가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자못 험악한 분위기 속에 빠져 언제 어디서 어떠한 일이 돌발할지 모른다." (동아일보 1929.1. 26.).
"25일의 원산 일대는 이 골목 저 골목에서 노동자의 규찰대와 경계하는 경관 사이에 때때로 충돌이 일어났다."(동아일보 1929.1.27.)
"갈매기 떼 날아 설레는 원산항의 바람 쌀쌀한 부두는 산비가 오려고 누각에 바람이 가득한 것과도 같은 긴박한 공기에 휩싸였었다. 파업노동자들은 자본가측의 인원들이 화물선이나 창고들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사람사슬로 피케트라인, 즉 감시선을 늘이고
비겁한 자야 갈라면 가라
우리는 붉은기를 지킨다.
우렁차게 '적기가'를 부르며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를 누비듯이 노조일꾼들이 분주히 오가고 또 규찰대들이 감시하는 눈으로 사방을 두리 번 거리며 슬슬 돌아다녔다. 자본가들의 앞잡이들과 파업방해분자들은 담장같이 둘러선 무장경찰의 힘을 배경으로 담력을 북돋우고 들이덤빌 기회를 노리며 서성거리고 있었다...... 일본화물선의 선원들은 모두 다 갑판 위에 올라와 뱃전난간에 기대서서 서로 무어라고 수군거리며 관전을 하고 있었다."(김학철 [격정시대])
노동자들은 파업지도부의 지도에 따라 식량과 자금의 모금활동, 저축활동을 전개하였다. 파업 자금의 비축을 위해 한잔의 술 한 개피의 담배, 한 푼의 낭비도 반동”이라며 1일 2식과 금연 금주운동을 벌여 파업기금 1만2천 원 마련하였다. (쌀 한가마에 5원)
일제 경찰과 깡패 조직에 맞서 파업을 지키기 위한 ‘규찰대’도 조직하였다. .
원산 노동자들의 파업에 나라 안팎에서 광범한 지지와 연대를 보였다. 다수의 노동조합, 농민조합, 기타 사회단체들이 파업 중의 노동자들에게 격려문과 투쟁자금을 보내주었다. 원산 부근의 농민들은 식량과 땔감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중국, 프랑스,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동자들이 격려 전문을 보내왔다.
외국 노동자들의 지지와 성원의 모습도 보인다. 원산총파업을 직접 본 김학철은 자전 소설 <<격정시대>>에서 국경을 넘어 연대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을 다음과 갈이 그리고 있다.
원산부두노동자들이 일제경찰과 파업깨기꾼에 맞서 싸우는 모습을 지켜보던 화물선 ‘쯔루마루’선원들은 별안간 고함을 지르며 발을 굴렀다. 그들은 스또반자이 !(파업만세 !) 교오다이찌 감바레 !(형제들, 버텨라 !)라는 소리를 크게 외쳤다. 그러자 다른 일본 배에 있던 선원들도 응원시위를 했으며 여러 배들이 일제히 우렁찬 뱃고동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파업 깨기 꾼과 일본경찰은 너무나 뜻밖의 일이라 한순간 모두 멍청하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유분수지, 내지인(일본인)이 불령선인의 편을 들다니 ! 이와는 반대로 파업자들은 그 뜻하지 않은 성원에 크게 고무되었다.
일제는 ‘치안’과 ‘사회안정’을 핑계삼아 경찰과 소방대, 인근 일본군 제19사단 함흥연대의 일본군 400여 명을 보내 파업 노동자를 위협하였다. 자본가들은 깡패집단인 국수회, 일본 청년당 등을 투입하여 위력단이라는 폭력조직을 결성하였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를 해고하고 실업노동자를 모집하고 인천 등지에서 노동자를 데려와 파업을 무력하게 만들려고 하였다. 또 일제는 김경식을 비롯한 원산노련의 핵심간부 42명을 구속하였다.
1929년 2월 7일 김경식 위원장을 포함하여 20명이 잡혀 들어간 뒤 원산노련은 2월 9일 원산총파업의 진상을 조사하려고 내려온 변호사 김태영을 직무대행으로 선출하였다. 직무대행 김태영은 총독부에 진정하고 원산경찰서에 조정을 청원하는 등 타협적인 방법에 매달렸다. 일제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조건을 달지 말고 작업장으로 돌아갈 것을 강요하면서 파업 배후에 ‘공산주의자가 관련된 혐의가 있다’고 몰아부쳐 일제의 위협에 굴복하여 파업 대열에서 떨어져 나갔다.
일제와 자본가들은 3.1운동 10주년을 전후하여 파업이 전국으로 번질 것을 우려하여, 3월 함남노동회라는 어용노조를 만들어 원산노련을 불법화하고 마침내 무력으로 탄압하였다. 4월 1일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은 함남노동회를 습격하는 가두투쟁을 벌였지만, 파업을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4개월에 걸친 투쟁을 마감하였다.
원산총파업은 가혹한 착취와 탄압을 일삼는 일제와 자본가의 본모습을 인식하고 노동자들의 계급 의식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노동자 대중이 밑으로부터 노동운동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였고(규찰대는 지도부와 달리 비타협 투쟁 정신을 보여줌), 노동운동이 한 공장, 한 지역을 넘어 지원, 연대투쟁을 벌였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사정에 따라 흔들리기는 하지만 끝내 자본가 편에 설뿐이지 결코 노동자 계급 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원산총파업을 계기로 ‘혁명적’ 노조가 온 나라에 번지게 되었다.
(4)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노동자들의 삶은 더 어려워지고 날이 갈수록 일제가 탄압은 더 심해졌다. 무엇보다 자신의 생존권을 지키려고 노동자들의 투쟁은 높아갔다.
사회주의자들은 원산총파업 뒤 노동자들의 투쟁이 격화되고 있지만 조선노동총동맹의 지도부가 ‘개량주의’에 빠져 대중투쟁을 올바르게 이끌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들은 혁명적으로 진출하는 노동자투쟁을 바탕으로 개량주의 노동조합에 맞서는 혁명적이고 정치적인 비합법 노동조합을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혁명적 노동조합을 이끈 사람들은 20년대 사회주의자 또는 코민테른과 손을 잡고 국내에 들어온 사람들, 공황을 앞뒤로 사회운동의 방향을 전환하는 것에 영향을 받은 지방의 토박이 공산주의자들, 합법적 노조운동을 했던 사람들, 그리고 광주학생운동 뒤에 직접 생산현장으로 들어가 활동했던 학생운동 출신들이었다. 또 20년대 말부터 30년대 전반에 걸쳐 운동과정에서 성장한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미 있던 ‘개량주의 노동조합’을 계급에 뿌리를 둔 혁명적 노동조합으로 바꾸거나, 조합이 없는 곳에서는 새로운 혁명적 노동조합을 통해 미조직 노동자를 조직하려고 하였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가들은 옛 공업 중심지와 30년대부터 진행된 ‘병참기지화정책’에 따라 새로 발달한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활동을 벌였다. 반(班)이나 공장그룹 등의 세포조직을 기초로 분회를 두고 그 위에 공장위원회 또 그 위에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든 뒤 전국 산업별 노동조합을 만드는 방향으로 조직을 세우려 하였다.
1929년부터 1931년 무렵까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은 크게 보아 전국을 포괄하는 당을 세운다는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성과는 실제 그다지 크기 않았으며, 공장 안의 많은 노동자 대중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학생이나 인텔리를 중심으로 한 반제동맹 같은 모습이 더 많았다.
1931년 이후 사회주의자들은 먼저 튼튼한 혁명적 노동조합을 만들어 토대를 닦은 뒤 전국을 포괄하는 당을 만든다는 새로운 조직 노선을 실천에 옮겼다.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운동가들은 파업투쟁을 조직, 지도하며 대중과 결합하여 그들의 계급의식을 높이는 활동을 했다. 이때 벌어진 혁명적 노동조합운동 가운데 함남의 흥남 일대를 중심으로 4차에 걸쳐 추진된 ‘태평양노동조합사건’(1930-35)이 두드러졌다. 또 1933-36년 서울을 중심으로 벌어진 이재유 그룹의 운동은 “각 공장에서 노동자를 획득하여 공산주의적으로 훈련하고 화학.섬유.금속 등 산업별로 부문을 나누어 적색노동조합을 조직해야 한다”면서 많은 공장과 사업장에서 공장반을 조직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또한 이들은 여주 양평 지역에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지도하였으며 서울에 있는 학교와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학생을 조직하였다.
1936-38년 이주하 등이 앞장서서 벌인 원산지역 노동조합운동은 적색노조 원산좌익위원회를 결성하려고 원산 시내의 철도 금속공업 화학공업 부문에 산업별 위원회를 조직하기도 하고, 그 하부 조직으로 적로반을 결성하였다. 원산지역 운동가들은 지역운동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국의 운동세력을 통일하려했지만, 이 운동을 충분히 벌이기 앞서 일제의 탄압을 받아 성공하지 못했다.
이 밖에도 평양, 신의주, 겸이포, 여수, 마산, 부산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 일어났다. 일제가 만든 통계로도 1931년부터 1935년까지 혁명적 노조관련 사건이 70여 건이 일어나 1,759명이 연루된 사실에 비추어 보아 이 운동이 1930년대 전반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투적이고 혁명적인 노동자로 만든 조직’인 혁명적 노동조합은 노동자 정치조직과 노동자 대중조직이 뒤섞여 있었다. 의도는 혁명적 대중조직을 만들려고 했지만 실제로는 선진 노동자들이 주축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혁명적 노조가 비합법 형태를 띤 것은 정치적이고 혁명적인 임무를 떠맡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일제가 운동을 극심하게 탄압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노동조합이라는 대중조직을 통하여 지나치게 비합법투쟁과 정치투쟁을 벌인 한계도 있었다.
(5) 1930년대 후반 -해방
1937년부터 40년까지 430건의 노동쟁의가 일어나 약 2만5천명 노동자가 참가하였다. 더구나 이 시기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주로 군수산업부문을 중심으로 벌어져 일제에 적잖은 타격을 주었다. 또한 노동자들은 자주 태업과 집단 탈주 등의 수단을 써 투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일제의 ‘생산력확충 정책’에 맞서는 ‘군수 생산력 저하와 파괴운동’이었다.
1940년대 들어 1945년까지 일제가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고 민족말살정책을 펴는 혹독한 탄압 속에서 노동운동은 활발하게 전개되지 못하였지만 그때까지 쌓아온 투쟁의 흐름이 단절된 것은 아니다. 운동은 침체됐지만 조직운동은 쉼없이 계속되었다. 잠복해 있던 투쟁 역량은 해방이 되면서 곧바로 숱한 노동자 조직을 만들고 몇 달만에 전국 조직을 건설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 <읽기 자료> 최초의 고공농성 - 을밀대 위의 강주룡
노동운동사에서 ‘고공 농성’하면 먼저 1990년 4·5월에 있었던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투쟁이 떠오를 것이다. 그 보다 60여 년 전 1931년 5월 29일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 지도자 강주룡이 평양 을밀대 지붕 위에서 고공 농성을 벌였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는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고공농성을 벌인 사건이었다. 신문에서는 강주룡의 을밀대 농성을 ‘아직 조선 노동운동선상에서 보지 못하던 새 전술’을 편 ‘체공녀(滯空女)’라고 크게 다루었다. 그때도 이미 한 여성 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싸운 일을 신문이 흥미본위로 다룬다고 비판하는 글이 있었다. 하지만 강주룡의 을밀대 고공농성은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던 사건이라 죽을 때까지도 이름과 함께 을밀대가 붙어 다녔다.
나도 ‘슬라이드로 보는 노동운동사’ 강의를 할 때 을밀대 지붕 위에 오두마니 앉아 있는 강주룡 사진을 보여주면서 그의 삶과 투쟁을 소개한다.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은 을밀대 현판 위쪽만 찍었기 때문에 높이가 드러나지 않는다. 을밀대를 가까이서 멀리서 찍은 다른 사진을 옆에 놓고 보면 “저 높은 곳에서......!”하는 반응이 먼저 나온다.
1931년 5월 평양에 있는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투쟁 전까지 강주룡의 삶은 그해 6월 7일 <<동광>> 잡지의 ‘무호정인’과 인터뷰하면서 밝힌 것 말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말을 바탕으로 간단하게 이력을 짚어 보자. 을밀대 올라갔을 때 신문에 실린 강주룡의 나이는 30이었다. 우리 나이로 31살이었다고 미뤄 보면 그가 태어난 해는 1901년으로 짐작된다. 평북 강계에서 태어나 열네살 때까지 고향에서 살다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서간도로 이사갔다. 20살 때 통화현에 있는 최전빈에게 시집갔다. 남편은 그보다 나이가 5살이나 아래였다. 21살 때 남편과 같이 백광운(白狂雲)의 독립군부대에서 편입되어 6,7개월 활동하다가 ‘거치장 거려 귀찮으니 집에가 있으라’는 남편의 말에 따라 본가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온지 5,6개월 지난 어느날 남편이 위독하다는 기별을 받았다. 남편이 누워있는 곳으로 달려갔으나 그날밤 숨이 끊어졌다. 시집에서는 ‘남편 죽인년’이라고 중국 경찰에 고발하였다. 경찰서에 잡혀간 강주룡은 일주일 동안 꼬박 굶었다.
1924년 서간도에서 귀국해서 사리원에서 일년쯤 지나다가 1926년 평양으로 와서 고무공장에 들어가 직공으로 일하기 시작하였다. 부모를 모시고 어린 동생을 보살피고 집안을 꾸려나가는 일은 그의 몫이었다. 1930년 노동조합에 들어가 평양 고무공장들의 파업투쟁에 적극 참가했다고 하나 활동 내용은 알기 힘들다.
강주룡의 활동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31년 5월에 일어난 평양 평원고무공장 노동자 파업 투쟁부터이다.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에서는 5월 16일 회사측에서 제멋대로 임금을 깎겠다고 발표하였다. 여성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들어갔고 이 때 강주룡이 앞장섰다. 평원고무공장은 회사들의 연합체인 평양고무공업동업회에도 들어가지 않았으나 제일 먼저 임금을 깎겠다고 나섰다. 동업회에 속한 다른 12개 고무공장에서도 평원고무공장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임금을 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원고무공장의 싸움 결과는 다른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2300여 명 노동자들의 임금에도 영향을 미칠 문제였다.
5월 28일, 싸움을 시작한지 12일이 지났다. 회사에서는 노동자들의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평원 노동자들은 싸움의 강도를 높이려 굶어 죽기로 싸우겠다는 아사동맹을 선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회사측은 노동자 49명 전원을 해고하겠다고 선언하고 한 밤중에 경찰을 끌어들여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쫒아냈다.
강주룡은 일본 광목 한 필을 사가지고 캄캄한 밤 을밀대를 찾아 올라갔다. 처음 올라갈 때 생각은 자살을 할 작정이었다. 죽음으로서 평원공장의 횡포와 자신들의 싸움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리겠다고 비장한 결의였다. 자살하려고 벚나무 가지에 광목을 걸어놓았다. 살아온 30여년 세월이 떠올랐다. 죽기로 작정했는지라 미련은 없었으나 이대로 죽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저 여자가 왜 죽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젊은 과부년이 또 무슨 짓을 하다가 세상이 부끄러워 죽었나’하는 오해를 받을 것같기도 하였다. 죽더라도 우리의 싸움을 알리고 죽어야 할텐데... 캄캄한 밤중 어둠 속에 을밀대가 어슴프레 눈에 들어왔다. 옳다 죽더라도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가 아침에 사람이 많이 모였을 때 우리 싸움의 뜻과 평원공장의 횡포를 마음껏 외치고 죽자고 마음을 바꿨다.
사다리도 없는 지붕 위로 어떻게 올라갈 것인가. 이리저리 궁리를 하다가 광목 한 끝에 묵직한 돌을 묶어서 지붕 건너편으로 던져 넘겼다. 나머지 한쪽을 기둥에 꽁꽁 묶었 힘주어 당겨보았다. 늘어진 광목을 밧줄처럼 타고 지붕위로 올라갔다. 5월 말, 봄이라지만 아직도 대동강에서 불어오는 밤바람은 추웠고, 누가 밧줄을 타고 쫓아 올라올 염려도 있었다. 늘어진 광목을 걷어 올려 몸을 감쌌다. 계속 싸움을 하느라 피곤이 몰려와 을밀대 지붕 위에서 깜박 잠이 들었다. 얼마쯤 지났는지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려와 눈을 떴다. 새벽 동이 트고 있었다. 5시 10분 무렵이었을 것이다. 을밀대 앞 마당에 산책 나왔던 사람들이 몰려와 쳐다보고 있었다. 웬 여자가 무슨 사연이 있길래 저 지붕까지 올라가 앉아 있을까 궁금한 표정으로 웅성거렸다.
강주룡은 사람들을 내려다보며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는 않겠다고 마음을 다졌다. 모여든 사람들에게 빼앗긴 나라의 노동자들의 처지를 설명하고,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와 각오를 밝히고 외쳤다. 연설을 듣던 한 예수교 장로는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뒤에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강주룡은 자기가 외쳤던 내용을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백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천 3백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둥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자본가의(중략)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서(지붕)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뿐 입니다.”(ꡔ동광ꡕ 1931년 7월호, 중략은 원자료에도 빠진 것임 )
강주룡은 을밀대 꼭대기에서 온 몸으로 자본의 착취와 식민지 권력의 폭력을 폭로하였으며, 평원고무공장의 노동자 파업투쟁이 평양 2천 3백명 고무노동자들의 생존권을 가장 앞장서서 지키는 싸움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신고를 받고 경찰이 달려오고 뒤쪽에서 소방대원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왔다. 완강히 버티는 강주룡을 밑으로 밀어 떨어트렸다. 그물 위로 떨어지면서 기절했다 깨어난 강주룡은 평양서로 끌려갔다. 29일 저녁부터 6월 1일 새벽 2시 풀려날 때까지 밥 한술 먹지 않고 쟁의가 해결될 때까지는 굶어 죽더라도 먹지 않겠다며 완강히 버텼다. 검속기간이 끝나 풀려난 강주룡은 쉴 틈도 없이 바로 선교리 파업 본부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회사측에서는 직공을 새로 모집하여 공장을 돌리려고 하였다. 강주룡의 석방으로 힘을 얻은 노동자들이 공장 담을 넘어 점거투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안병식(23), 오양도(27), 고도실(18), 최용덕(28)이 체포되었다. 이들도 58시간 단식 투쟁으로 버티다 6월 3일 저녁에 풀려났다.
이 날 저녁 신직공들을 막으려고 싸우던 싸우던 강주룡과 간부 네명이 기절하여 쓰러졌다. 며칠 계속한 단식으로 몸이 쇠약해질대로 쇠약해져 있었는데 전차와 자동차를 가로막고 세차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오랜 시간 진흙탕 속에서 뒹굴었기 때문이다.
6월 6일 파업단 대표로 공장측과 만난 강주룡은 “임금 감하를 반대하고 맹파하였던 우리 직공들도 환원해야 한다. 고주측에서는 명예를 위해서라도 파업 직공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다고 하지만 명예와 일가족의 생사 문제는 전연 판이한 문제가 아닌가”하고 따졌다.
6월 8일 1개월에 걸친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임금감하를 철회하고 종전대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성과를 얻고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파업한 노동자 49명 모두를 채용하라는 요구는 얻어내지 못하였다. 파업공 27명과 신모집공 20명을 배분하여 채용한다는 조건으로 타결되었다.
6월 9일, 아래로부터 성장한 순수 노동자 출신 강주룡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체포되었다. 연희전문학교를 나오고 모스크바 공산대학까지 나온 최고 수준의 엘리트이며 활동가인 정달헌, 평양의 활동가, 노동조합 간부들과 함께 1930년대 새로운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조직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1년 동안 감옥에서 비타협의 옥중 투쟁을 벌이던 강주룡은 극심한 신경 쇠약과 소화불량 증세에 시달리다 1932년 6월 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아픈 몸이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병은 시름시름 깊어만 갔다. 어려운 형편에 병원조차 제대로 갈 수 없었다. 동료들의 처지도 어렵고 가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두달 동안 앓아 누웠던 강주룡은 1932년 8월 13일 오후 3시반,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한 많은 세상, 그러나 치열하게 살았던 31년 삶을 마감하고 설흔 두 살 한창 나이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65세 된 노모, 61세 부친, 33세 오빠, 15세 동생을 뒤에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틀 뒤 8월 15일 남녀 동지 1백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평양 서성대 묘지에 묻었다. (그가 죽은 때는 지금까지 소개한 책마다 다르고 확실하지가 않은데 이날이 맞다.)
강주룡의 삶과 투쟁은 대중에 앞장서서 죽기로 싸우겠다는 지도자의 꿋꿋한 모습과 함께 명예롭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돌아보게 한다. 그의 외침은 지금도 파업 투쟁을 벌이다 이런 저런 사정을 들먹이며 떠나는 노동자들, 연대 파업을 하다 단위 사업장 문제가 타결됐다고 손 흔들며 떠나는 노동조합, 대중의 동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며 타협하다 주저앉는 간부들을 꾸짖고 있는 듯하다.
3. ‘해방공간’의 노동운동
일제가 망하고 총독부 억압기구가 무너지자 한국사회는 ‘권력의 진공상태’ 또는 ‘혁명적 정세’를 맞이했다. 이때 밑으로부터 엄청난 혁명역량이 솟아올랐다. 식민지시대부터 활동해오던 변혁운동진영이 빠르게 다시 조직되어 건국준비위원회(1945.8.15)와 인민공화국을 세웠다.(1945 9 6). 그러나 미국은 ‘점령군’으로 이 땅에 상륙하여(1945 9. 8), 남한에서 오로지 자기들만이 합법정부라고 내세운 미군정은 남한을 세계자본주의 체제 안으로 끌어들여 동아시아에서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는 정책을 발빠르게 펴나갔다. 미군정은 친일파가 꽉 들어찬 경찰 관료 군대를 동원하여 변혁운동 진영의 ‘통일 민족국가’ 수립 운동을 가로막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1) 노동자 자주관리운동
해방후 노동자 농민들의 가장 당면한 과제는 김순남의 ‘해방의 나라’ 2절 가사에도 표현하였듯이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여 놈들에게 빼았겼던 토지와 공장 정의의 힘으로 탈환”하는 것이었다.
일본인들이 차지했던 재산은 조선사람들을 착취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조선 사람이 접수하고 운영해야 할 것으로 여겼다. 이 재산을 손에 넣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밑거름으로 삼으려는 것은 당연했다.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은 해방과 함께 시작되어 1946년 8월 무렵까지 1년여간 노동자들의 생활권 보장과 함께 스스로 공장을 접수하여 관리하려는 투쟁이었다.
해방 뒤 노동자들이 ‘굶어 죽지 않으려고’ 공장 문을 스스로 열거나 ‘그동안 땀흘려 일한 공장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차지해야 한다’면서 공장을 접수하고 관리했다. 생산하지 않으면 자신이 굶는다는 의미에서 절박한 생존권 투쟁이었으며, 혁명적 분위기를 틈타 노동자 스스로 공장을 접수하여 운영하면서 일제와 친일 자본가를 몰아내고 생산수단을 노동자 손에 넣으려는 투쟁이기도 했다.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은 노동자들이 땀흘렸던 공장은 노동자의 것이라는 인식과 함께 해방이 되면서 일본인들이 기계를 부수고 원료를 팔거나 불지르는 행위를 막고 계속 공장을 운영하여 스스로 생활을 지키려는 뜻이 있었다. 해방되자 일본인 자본가는 공장문을 닿고 시설을 처분해서 일본으로 도망갈 궁리 뿐이었고, 한국 자본가들도 생산을 멈추었다. 공장이 닫혀 일터를 일흔 노동자는 퇴직금을 요구하는 싸움과 함께 자주관리운동을 벌였다.
해방이 되자 자주관리운동이 빠르게 퍼질 수 있었던 것은 해방이 될 때까지 명맥을 지켰던 비합법 조직이 해방 뒤에 대중조직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형무소에 갇혔던 노동운동가들이 풀려나오면서 노동운동에 힘이 붙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한 뒤 공장관리위원회를 조직하고 공장을 운영하였다. 자주관리운동은 큰 공장에서 많이 일어났으나 운수업 상업 분야, 나아가 어장, 극장 학교까지 번진 운동이었다. 일본인 기업에서 많이 일어났으나 조선인 사업체에서도 벌어졌다. 김연수가 주인이었던 경성방직, 방흥식의 조선비행기 회사가 대표적이었다.
1945년 11월 4일 현재 16개의 산별노조에 728개가 넘는 공장관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8만 8천여명의 노동자들이 참여하였다. 대부분 노동자가 공장을 접수하여 관리하였지만 노동자와 자본가가 함께 공장을 운영하는 경우, 인민위원회가 직접 접수 관리하거나 감독하기도 하였다. 공장을 접수한 경우에도 조선인 간부나 직원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한 것과 일반 노동자들이 운영한 것으로 나뉜다. 일반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도 자본주의 틀 안에서 기업 시설을 지키고 생산을 계속하겠다는 낮은 차원의 운동도 있었다. 주인없는 생산시설을 보호한다는 생각에서 벌인 운동이 많았으며 무너진 공장운영체제를 자본주의에 맞게 다시 세운 운동도 많았다. 자본주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혁명적 자주관리운동’도 있었다. 혁명적 자주관리운동의 영향을 어떻게 전체 자주관리운동에 미치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공장을 관리하고 운영하면서, 일제 시기보다 나은 노동 조건을 얻었고 생산 능률도 높였다. 경성방직 영등포 공장의 경우,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야근을 철폐했는데도 12시간의 노동에 시달렸던 일제 시기보다 생산액이 훨씬 증대되었다. 조선피혁 영등포공장의 경우에도 노동자들이 구성한 관리운영위원회가 주1일 휴가와 8시간 노동제를 실시하고 병원, 이발소, 소비 조합 등 후생 시설을 정비했다. 그리고 고장난 기계를 고쳐 사용하면서, 해방 전에 비해 2-3배의 능률을 올릴 수 있었다.
자주관리운동은 노동자들이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출발했으나 투쟁과정에서 산업 민주화와 노동자 정치 참여를 요구했으며 이를 거부한 미군정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은 노동자들이 일본인 재산과 친일 부역자들의 재산을 접수하려하자 이를 가로막고 나섰다. 미군정 스스로 일본인 주요 시설을 접수하면서 1945년 10월 30일 군정법령 19호를 발표하여 노동자들의 파업을 가로막고 나섰다.
한편 1945년 11월 5일과 6일에 걸쳐 결성된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는 자주관리운동이 인민위원회의 지도로 추진하여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인민위원회의 감독과 지도를 받지 않는 자생적 자주관리운동은 ‘조합주의적 경제주의적 오류’ 또는 ‘극좌적 편향’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전평은 11월 30일 미군정의 정책에 협력하며, 노동자가 양심적 민족 자본에 대해서는 파업을 자제하고 생산에 협조하여 ‘정당한 자본에 정당한 이윤을 보장’하며 노동자도 ‘정당한 노력에 정당한 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산업건설노선을 내세웠다. 실업과 물자 부족이 심각하기 때문에 공장들을 정상조업하여 실업자를 구제하고 이들이 노동계급으로 조직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한다는 뜻이었다. 마찰을 빚고 있는 미군정과의 관계를 변화시켜보려는 뜻도 있었다.
전평이 공장관리운동에 대하여 확실한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있던 12월 6일 미군정은 일제의 국.공유재산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까지 접수하겠다는 군정법령 33호를 발표하여 자주관리운동을 불법화하였다. 12월 8일에는 노동쟁의를 강제 조정하려는 ‘노동조정위원회’를 설치하고, 12월 14일에는 관리인 제도를 실시하였다. 이때부터 군정관을 파견하거나 관리인을 임명하여 자주관리운동을 가로막았다. 46년 2월까지 미군정은 375명의 경영자를 임명했고, 자주관리운동을 가로막던 이들은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뒤 그 회사의 소유주가 되었다.
1946년 들어 전평의 산업걸설운동 과정에도 노동자 공장 관리운동의 흐름이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 기업 관리권 참여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공장 내 노동자의 발언권 확보 운동, 미군정이 보낸 관리인의 불법행위에 맞서는 악덕관리인 배척운동은 계속되었다.
1년여에 걸쳐 노동자가 생산을 통제하고 사회의 주인으로 서려했던 ‘혁명적 자주관리운동’은 1946년 9월 총파업이후 극심한 탄압으로 싹을 끝까지 틔우지 못하고 말았다.
(2) 전평의 조직과 활동
ㅇ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 결성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자, 노동운동은 ‘해방’이라는 조건에서 새롭게 전개되었다. 노동운동은 ‘해방’이라는 ‘열려진 공간’에서 다양한 형태로 조직되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해방과 함께 노동조건 개선을 비롯하여 공장관리운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노동자 전국조직을 결성하는 움직임으로 모아져 갔고, 마침내 1945년 11월 4-5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16개 산업별 단일노조 밑에 1945년 말 남북한을 합쳐 50-60만 여명의 조합원을 포괄하였다. 남한의 조합원은 25만 여명 정도였고, 46년 5월 무렵에는 남한만의 조합원이 46만 7천 명에 이르렀다.
해방공간의 전평은 단순히 노동자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조직이 아니라 사회변혁운동의 중심조직이었다. 전평은 전위조직인 조선공산당(조공)과 함께 노동자 대중운동의 중심으로서 자리하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전평은 결성과정부터 좌익정당인 조선공산당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전평의 결성이 물론 해방직후 노동운동의 발전을 기초로 하고 있지만, 결성의 주도권은 아래로부터 노동운동가가 아닌 조공에 있었다. 전평 간부들은 대부분 30년대이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들로서 조공 당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공이 노동운동의 역량을 당과 결합시킨다는 차원에서 전평의 결성을 진행시켰다는 점과 함께 당시 전평 노동운동의 정치적 지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전평은 한편 동일한 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를 동일한 조합에 포괄하는 산업별 단일노동조합을 기본으로 하고, 지방의 특수한 사정을 고려하여 산업지대에 지방평의회를 조직하였다. 전평은 이러한 기본적인 조직체계를 바탕으로 노동운동의 당면 요구에 부응하여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비상설 조직을 구성하였다. 전평의 산업별 조직체계는 해방직후 조선 산업발전의 미숙성을 고려한 조공의 부르조아 민주주의 혁명론을 일정하게 반영하고 있다. 곧 전국적인 수준에서 산업별 조직체계로 일원화하지 못하고, 산업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지방에는 평의회를 두는 과도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럼에도 일제시기 이래 노동운동의 조직적 과제였던 산업별 노동조합을 전망하였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ㅇ 전평의 운동노선의 변화
전평의 운동노선은 인민정권 수립을 지향하는 조공의 노선에 근거하고 있었다. 조공은 미소가 협력하는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한 인민정권 수립을 전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노선은 미소와의 협력, 특히 남한에서는 미군정과의 협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조공은 미군정과 협조전술을 채택하였다.
전평은 결성 당시 ‘노동자 공장관리운동’노선을 채택했다. 노동자 공장관리운동은 8 · 15뒤에 노동자들이 ‘굶어 죽지 않으려고’ 공장 문을 스스로 열거나 ‘그 동안 땀흘려 일한 공장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차지해야’한다면서 공장을 접수하고 관리했다. 혁명적 분위기를 틈타 노동자 스스로 공장을 접수하여 운영하면서 일제와 친일 자본가를 몰아내고 생산시설을 노동자 손에 넣으려는 투쟁이기도 했다. 미군정과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벌인 이 운동은 앞으로 세워질 사회에서 노동자가 주인이 될 것인지 아니면 자본가가 주인이 될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싸움이었다. 또한 노동자가 지도자에게 일을 맡기지 않고 스스로 해내면서 자신감을 키운 것이 무엇보다 소중했던 그런 싸움이었다.
그러나 공장에 대한 좌파의 지배를 우려한 미군정은 일인의 국공유 재산뿐만 아니라 일인 사유 재산까지 접수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선정한 관리인들에게 공장의 관리를 맡겼다. 따라서 전평의 노동자 공장관리운동 노선은 미군정의 공장접수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평은 1945년 11월 30일, ‘산업건설 협력 방침’을 천명하고, 1946년 초에는 ‘산업 건설 노선’을 채택하였다. 당장 물자가 부족한 현실을 감안하여 양심적인 민족자본가에게는 협조하는 한편 악덕 관리인에게는 투쟁하는 전술이었다.
전평의 온건노선에도 불구하고 1946년 5월 초 미군정의 탄압이 강화되고 우파의 테러 반격이 본격화되었다. 이 즈음 현장에서는 노동자들의 생활이 급속히 악화되고 자연발생적 투쟁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한편 46년 7월 말경 조선공산당은 정당방위의 역공세 ‘신전술’이 채택되었고, 이 영향으로 전평 내부에서 ‘총파업 전술’이 채택되었다.
■ <읽기 자료> 105일 단식투쟁 끝에 옥사 - 이한빈
전평 위원장 허성택이 1946년 5월 1일 메이데이 기념행사에서 연설할 ‘메-데-에 제하야 노동자 동무들에게’라는 기념사를 앞당겨 실은 4월 26일자 기사 (한자를 섞어 쓴 글인데 요즘 말투로 고쳤음)
우리들은 60주년 메이데이를 오늘 처음으로 전국적으로 맞게 된 것은 연합국의 덕택과 반일 민족 혁명가들의 거룩한 희생의 선물에서 얻은 것이라는 것을 한 사람이라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함남북에서 노동운동하든 혁명자들이 망명을 하면서 또는 땅굴 생활과 삼림 생활을 하면서 일제 경찰의 총칼을 방어하기 위하여 몽둥이와 칼을 유일한 무기로 하고 용감하게 싸운 것입니다.
특히 여러분에게 소개하려는 것은 함남 신흥 출생 이한빈(李翰彬) 동지는 1929년 신흥 탄광 습격 사건으로 망명하다가 1936년 검거되어 5년형을 마치고 강도 일제가 만들어 놓은 정치 예방 구금소에 구금됨으로부터 ‘정치 운동자를 내놓아라’ ‘예방구금소를 철폐하라’ ‘야만적 박해와 비인간적 취급을 하지 말라’는 등 7개 요구를 들고 두 번 단식 투쟁에 적지 않은 승리를 하였으나 놈들은 제일로 미운 그를 죽이기로 결정하고 그에게 온갖 모략, 위협, 00 무고와 테러를 하였기 때문에 분을 이기지 못하여 1943년 3월 1일에 단식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놈들은 단식한지 20여일 후에도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국 일본에 반역자임으로 죽이라고 말로서 다할 수 없는 능욕을 가하였습니다. 그는 단식한지 백 오일 만인 6월 13일에 39세를 최기(最期)로 영원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뼈만 남았던 그는 죽기 삼일 전에 나에게 부탁하기를, 나는 더 살 수 없으니 나의 뒷일을 동무들이 계승하여 조선 독립을 완성하기를 바라며 만일 동무가 살아 나가거든 동무들에게 일제가 이같이 나를 죽인 것을 전하여 달라고 하는 부탁을 받고 기회를 얻지 못하여 여러분에게 알려 드리지 못하고 오늘 이 기회에 소개합니다.
그는 적과 가장 선두에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비참하게도 장렬한 전사를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선배들은 생명을 아끼지 않고 이와 같이 싸웠습니다. 우리들은 선배들의 위대하고 장렬한 투쟁을 본받아 이 기념을 통하여 더욱 굳게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1929년부터 1936년까지 7년 동안 망명생활, 5년 동안 감옥생활, 그 뒤의 예방 구금소 생활,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단식. 그를 이렇게 버텨나갈 수 있게 한 힘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허성택이 소개한 것을 보면 조선 독립이 이루어진다는 희망이었으리라. 그러면 왜 조선의 독립을 그토록 희망했나? 주위의 고통받는 피압박 민중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까? 역사가 변화 발전하는 가능성을 과학적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인가?
(3) 1946년 9월 총파업
조공의 협조전술이 대중운동을 지배하면서 당과 노동운동은 분리되고 있었다. 조공이 대중운동에게 강요하던 협조전술은 미군정의 탄압때문에 현실적인 방안이 되지 못하였고, 효용성을 상실하고 있었다. 조공은 이러한 상황에서 미군정과의 협조전술을 철회하고 미군정을 공격하는 새로운 전술을 채택하였다. 이는 그 동안 협조전술로 억제되어 왔던 대중운동을 열어놓는 계기가 되었는데, 9월 총파업도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전개되었다.
9월 총파업은 1929년 원산 총파업 이후,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규모가 큰 노동자 투쟁이었다. 9월 총파업은 미군정이 그것을 ‘전쟁 상황’으로 인식하고 대응할 정도로 정치적 영향력이 강력했던 파업이었다.
9월 총파업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해방공간에 그토록 강력하고 역동적인 노동운동의 힘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며, 3.1운동이래 최대의 민중봉기였던 ‘10월 민중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1946년 미군정의 민중탄압과 미곡정책에 항의하는 민중의 불만과 시위가 잇달아 일어났다. 이러한 남한 민중과 미군정의 대립은 조공의 신전술의 영향을 받아 9월 총파업으로 발전하였다.
미군정은 강력한 조직적 주체 역량을 가진 전평을 무력화하기 위한 시도의 하나로 전평 내에서 가장 강력한 공공부문 단위 노조인 「철도노조」를 파괴하려 하였다. 미군정청 운수부는 9월 초 ‘적자타개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라는 산업합리화 정책을 운수부 종업원의 25% 감원과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꾸려고 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철도국 서울 공장 노동자들 3천7백 여명은 1946년 9월 13일 ‘노동자대회’를 열어 가족수당과 물가수당 인상, 일급제 반대, 식량배급 증대, 해고 절대 반대, 임금인상 등의 경제적 요구를 제시하고, 21일까지 회답이 없으면 파업에 돌입할 것이라고 통보하고 태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청 운수부장 코넬슨은 “인도 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를 먹으니 행복하다”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무시하고 거절하였다. 이에 분노한 부산 철도 노동자 약 7천여 명이 23일 오후 1시부터 가장 먼저 파업투쟁에 들어갔다.
같은 날 전평은 철도 총파업을 전국의 모든 공장과 사업체의 총파업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남조선총파업투쟁위원회’를 결성하여 파업을 지도하였다. 전평이 총파업선언서에 제기한 요구사항은 이렇다.
쌀을 달라. 노동자와 사무원, 모든 시민에게 3홉 이상 배급하라!
물가등귀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전재민, 실업자에게 일과 집과 쌀을 달라!
공장 폐쇄,해고 절대 반대!
노동운동의 절대 자유!
일체 반동테러 배격!
북조선과 같은 민주주의적 노동법령을 즉시 실시하라!
민주주의운동의 지도자에 대한 지명수배와 체포를 즉시 철회하라!
검거 투옥중의 민주주의 운동자를 즉시 석방하라!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시위 파업의 자유를 보장하라!
학원의 자유를 무시하는 국립대학교안을 즉시 철회하라!
해방일보, 인민보, 현대일보, 기타 정간중의 신문을 즉시 복간시키고 그 사원 을 석방하라!
25일에는 출판노조가 파업에 돌입했고, 같은 날 대구 우편국 종업원 4백여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23일 철도노조에서 시작한 파업은 10월 초까지 출판, 금속, 체신, 섬유, 전기, 해원 등 각 산별노조 조합원들이 참가하여 전국적인 총파업으로 확대되어 25만여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가하였다.
9월 총파업은 이렇게 대규모 총파업으로 발전했지만 철도 노조를 제외한 다른 산별 노조들의 행동은 그다지 조직적이지 못했다. 출판노조는 다른 산별 노조의 파업을 충분히 보도 선전하고 가장 나중에 파업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두번째로 파업함으로써 선전을 스스로 포기하는 혼선을 빚기도 했다. 또한 부산지역에서는 파업을 가장 먼저 시작하였지만 이를 적극 밀고 나가지 않았다.
미군정은 이 파업을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조선이 자치할 능력이 없다고 믿도록 할 것”이라고 비난하면서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곧바로 탄압하였다.
미군정은 9월 30일 새벽 2시부터 장택상 수도청장으로 하여금 기관총으로 중무장한 3천여 명의 경찰, ‘대한노총’ ‘대한민청’ ‘대한독청’ 등의 노조원과 서북청년회, 대동청년회를 비롯한 극우 청년테러단을 동원해서 용산 철도공장에 농성 중인 철도노동자 총파업단 본부를 공격했다. 그 결과 파업단 간부 16명과 1200명 이상이 검거되었고 2명 이상이 사살되었다.
■ <읽기 자료> ‘장군의 아들’ 대한민청 감찰부장 김두환의 ‘영웅담’
나는 일본도를 빼어들고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 여러 곳에 숨어 있던 전평원을 색출, 창고에 몰아 넣고 점검해보니 2천여 명이나 되었다. ····· “너희들 중에 이번 파업 간부를 뽑아 내어라. 안 그러면 할 수 없다. 개솔린을 뿌리고 불을 지르겠다.” 그리고 개솔린을 그들이 수용되어 있는 창고 주변에 부었다. “자, 5분간의 시간을 준다. 내가 새솔린에 실탄만 쏘면 그만이다. 튀어나오는 놈은 모조리 쏴 죽인다.” 나는 기관청 2대를 그들 앞에 정조준 시켰다. 시계를 내어놓고 시간을 쟀다. 4분이 경과하니 그들 중에서 “나가겠습니다.”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전평 간부 8명이 내 앞으로 뛰어나왔다. ····· 그리고서 화부와 기관사를 뽑아내고, 기관차를 수리시켰다. 모든 철도 종업원들에게 즉각 취업하라고 지시했다. 만일 직장에 복귀 안하면 그들의 가족까지도 몰살해 버리겠다고 말한 후 서약시켰다.
미군정의 강력한 탄압으로 철도노조의 파업은 해산되었지만 지방으로 확산되어 간 노동자들의 파업투쟁은 민족독립에 대한 절망, 특히 식량난에 의해 극한적인 생활상태에 몰려 있던 농민들의 투쟁과 결합하면서 10월 인민항쟁으로 이어졌다.
■ 대한노총(1946.3.10)
산업별 노동조합을 전평에게 빼앗긴 우익계의 노동운동은 반공청년운동을 모체로 하여 출발하였다. 불교청년회, 기독교청년회, 국민당청년부 등 우익계 청년단체의 연합회로 조직된 대한독립촉성전국청년총연맹(1945.11.21)은 노동부를 두고 일부 공장에 조직을 침투시켰다. 이후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펴나가는 과정에서 독립된 우익 노동운동단체의 필요성이 있다 하여 마침내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대한노총)을 결성했다.
“민주주의와 신민족주의의 원칙으로 건국을 기함” “혈한불석(血汗不惜)으로 노자간의 친선을 기함” “전국 노동전선의 통일을 기함” 등을 강령으로 내세운 대한노총은 애초 노동자나 노동단체가 아닌 반공 청년단체를 모체로 하여 결성되어 그 산하 노동자는 매우 적었다. 그러나 우익 청년단체의 강력한 후원을 받고 전평 산하의 노동조합에 침투하여 그것에 맞서는 ‘노총분회’를 만들어 갔다.
미군정시기의 노동운동 조직은 좌익계의 전평과 우익계의 노총으로 크게 양분되어 1946년의 메이데이 기념행사부터 따로 개최했다. 이후의 노동운동 과정에서도 그 대립이 점점 격화되다가 전평은 결국 불법화되고 대한노총이 합법노총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4) 1947-1948년 총파업 투쟁
ㅇ 1947년 3월 총파업
변혁운동진영은 몰아닥치는 미군정의 탄압에 위기를 느껴 3.22총파업을 벌였지만 24시간 동안 파업으로 자신들의 요구조건이 이루어질 전망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런데도 아무런 사후 대책없이 총파업을 벌여 많은 노동자가 희생되었다. 물론 노동자들이 현실을 변화하려는 열망이 크게 작용하였기 때문에 총파업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계획된 전술’ 없이 미군정의 탄압에 어떻게든 반응해야 한다는 실용적 판단에서 3월 총파업을 벌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때는 투쟁 국면을 잘 헤아린 뒤, 노동자계급 전체를 동원하여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분명히 하고 풍부한 정치선동과 아울러 투쟁을 통해 조직을 확대 강화해야 했다. 또 어떤 중대한 정치 국면에서도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요구조건들을 함께 내걸어 여러 노동자들이 투쟁으로 나서게끔 하는 일이 필요한 것임을 떠올릴 때, 3 22총파업이 실제 투쟁과정에서 정치파업으로 기울어버린 것은 잘못이었다.
ㅇ 1948년 2· 7총파업, 5 ·8총파업
교통 통신의 주요 산업부문노동자 파업을 앞세워 모든 산업부문과 모든 지역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파업으로 각 생산기관을 마비시킴과 아울러 교통 수송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고 다리를 폭파하였으며 철도에서는 기관차까지 부수었다. 농민, 사무원, 학생, 시민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전국 도시에서 노동자들이 총파업과 대중시위 그리고 학원에서는 맹휴를 벌였다. 농촌에서는 농민 시위대가 미군정 경찰 기구와 극우파 테러 단체 사무소 따위를 습격하는 투쟁을 벌였다. 좌익쪽 발표에 따르면 2월 7일부터 9일까지 3일동안 벌어진 2.7구국투쟁에 참가한 사람들은 148만 정도였다. 미군정과 경찰의 탄압으로 3일 동안 사망 57명 부상 146명에 검거된 사람이 1만이 넘었다. 2월 7일부터 며칠 사이에 벌어진 치열한 싸움들이 조금 사그라진 뒤에도 이곳 저곳에서 투쟁이 일어났으며 무장을 한 작은 집단이 일종의 게릴라 전술을 써 투쟁을 계속했다.
2월과 3월에 걸쳐 일어난 ‘구국투쟁’은 조직적인 폭력투쟁이었다. 2. 7 구국투쟁을 계기로 남로당은 이제까지 해왔던 대중 시위와 봉기에서 벗어나 야산대 등 무장조직을 만들어 경찰서 극우파 단체와 사무소, 극우파 사람을 습격하는 무장 투쟁 형태로 나아갔다. 2.7 구국투쟁은 제주도 4.3항쟁과 5.10 선거반대투쟁으로 이어지는 무장투쟁의 계기가 되었다. 2.7 구국투쟁은 분단과 남한 단정을 이루려는 미군정에 정면으로 도전한 것이다. 그 뒤에 벌어진 무장투쟁은 공장을 중심무대로 삼는 노동운동에서 벗어나 주로 농촌에 뿌리를 둔 투쟁으로 바뀌었으며 대중의 토대를 빠르게 무너지게 만든 하나의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4. 이승만 정권의 노동정책과 노동운동
ㅇ 1953년 노동관계법의 제정
- 노동조합법 : 근로자의 자유로운 단결권, 단체교섭권과 단체행동권을 보장하며, 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유지함으로써 그 사회경제적 지위 향상과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함
- 노동쟁의 조정법 : 노동자의 단체행동 자유권을 보장하고 노동쟁의를 공정히 조정하여 산업의 평화가 유지되도록 함
- 노동위원회법 : 국민경제의 발전과 근로행정의 민주화를 기하기 위하여
- 근로기준법 : 근로조건의 기준을 정함으로써 근로자의 기본적 생활을 보장시키며,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발전을 기하기 위하여
ㅇ 대한노총
-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이승만은 정치적 반대파를 대한노총에서 몰아내고 자유당의 기간단체로 만듦
- 1954년 대한노총 제7차 전국대의원대회는 결의문에서 “이대통령 각하의 외교정책을 절대 지지한다”는 항목을 넣음
- 1956년 ‘4사5입’ 개헌을 강행한 후 선거 불출마설을 흘렸을 때 우마차를 동원하여 시가행진을 하면서 그의 재출마를 염원
■ <자세히 보기> 빼앗긴 메이데이, 다시찾은 메이데이
1957년 5월 22일 이승만은 “메이데이는 공산 괴뢰 도당들이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으니 만치 반공하는 우리 대한의 노동자들이 경축할 수 있는 참된 명절이 되도록 제정되도록 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 노총은 1958년 11차 전국대의원 대회에서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의 결성일인 3월 10일 노동절로 정하고 보사부의 인준을 받았다. 1959년 3월 10일 제1회 노동절 기념대회가 열렸다.
5.16군사쿠테타로 권력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껍데기만 남은 노동절도 그 이름이 마땅치 않아 1963년 4월 17일, ‘근로자의 날 제정에 관한 법률’을 만들어 이름을 ‘근로자의 날’로 만들었다. 1987년 7.8.9투쟁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1989년 메이데이 100회를 앞두고, “노동절은 세계 노동자의 연대와 해방의 날인만큼......일천만 노동 형제들의 강력한 연대와 전투적 투쟁으로 쟁취해야 할 것‘임을 선언하고, 전국에서 동맹파업, 총회투쟁, 거리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투쟁의 결과 1993년 5월 1일 탄압 받지 않고 노동절 집회를 열었으며, 1994년 정부는 3월 10일이 아닌 5월 1일을 노동자의 날로 개정하여 ’합법성‘을 쟁취하였다. 공식적인 이름은 여전히 ’근로자의 날‘이다.
ㅇ전국노동조합협의회 설립준비위원회(1959.8.11)
- 전국 37개 노동조합연합체 중 24개 연합회 대표 32명이 대한노총 상층부의 부패와 어용화, 파벌투쟁을 비판하면서 노동조합 전국 연합체 준비
ㅇ 노동쟁의
- 대한노총 철도연맹을 존속시키기 위한 운동, 조선전업 노동조합 결성운동
- 부산조선방직회사 파업(1951) - 이승만 정권이 강권으로 임명한 사장의 파면, 자유노동운동의 보장, 노동자의 인권 옹호등을 요구하며 1천여 명의 여공들이 피난지 부산 국회 앞에서 농성하며 3개월 동안 계속. 노동자 1천 여명이 해고되고 약 500명이 자퇴한 채 끝남
- 부두노동자 파업(1952.7.17) - 전국 부도노동조합 연맹체인 대한노총 자유연맹이 임금 280%를 요구. 군수물자 하역작업. 미군측이 일고노동임금 200%, 청부노임 100%를 인상하며 파업 종결.
- 석탄공사 산하 노동자 파업(1954.12) - 체불임금 청산 요구, 7천여 명.
- 부산 미군부대 한국인 종업원 파업(1954.8) - 임금인상과 한국 근로기준법 적용 요구, 1만 2천 명이 파업.
- 수입비료 하역 노동자 파업(1954.8) - 임금인상 요구, 1만 7천여 명
- 서울 자동차노동조합 파업(1954.9) - 8시간 노동제 확립과 단체협약 체결, 성공
- 대구 대한방직 노동자 쟁의(1956) - 부당해고 항의, 단체협약 체결
- 석탄광노동조합연합회 쟁의(1956) - 임금인상
- 삼척시멘트 노동자들의 쟁의(1956) - 체임 지불 요구
- 남성전기회사 노동자 쟁의(1958) - 4천여 명, 보상금 지불 요구
- 대한조선공사 노동자 쟁의(1958) - 6천여 명체불임금 청산,
- 전국섬유노조연맹 3만 6500명의 노동시간 단축 쟁의(1959)
5. 4월 혁명 공간
ㅇ 대한노총 민주화 운동 - 집행부 개편
ㅇ 전국노동조합협의회 - 기아임금과 임금체불 규탄, 대한노총 간부의 사퇴, 기업주와 야합한 노조간부의 사퇴, 노동조합의 민주적 개편, 경찰의 노동운동 간섭 반대, 노동행정 책임자의 사퇴. 4.19 후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그 조직을 확대해서 170개 단위노동조합을 개편 포섭하고 16만 명의 조합원을 흡수.
ㅇ 한국노동조합총연맹(한국노련)(1960.11.25) - 대한노총과 노동조합협의회의 통합운동, 두 단체와 무소속 노동조합의 대의원 723명이 결성 - 5.16 군사쿠테타의 발발로 해산.
ㅇ 노동쟁의 - 1957년에 45건 발생한 노동쟁의가 4.19가 일어난 1960년에 227건으로 증가, 참가 인원도 9천명에서 6만 4천 명으로 증가. 4.19 후 1년간의 쟁의 발생건수가 282건.
ㅇ 공무원노조(철도.전매.체신)의 활동 강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결성, 전국은행노동조합연합회 결성(1960.7.23)
ㅇ 실업자 운동
전태일에서 민주노총 건설까지! 그리고 현재.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 역사에 대하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돌아본다는 것은 나에게 어떤 의미인가?
○ 우리는 박정희로부터 시작하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정권으로 이어지는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이다. 그러나 같은 시대를 살고, 똑같은 사건을 경험하면서도 역사에 대한 기억과 해석은 각양각색이다.
○ 6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는 독재정권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자유주의 정권으로 이어지는 과정이었으며 이에 맞선 노동자, 민중의 투쟁이 함께 한 역사였다.
○ 노동자, 민중을 향한 정권의 총칼이 있었는가 하면, 경제개발을 향한 장밋빛 환상이 있었고, 무수한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그 속에서 노동자, 민중은 때로는 짓눌리고, 때로는 체념하기도 했지만 불굴의 저항으로 노동자, 민중의 역사를 도도하게 써내려 왔다.
○ 이 시간을 통해 나는 내가 경험한 시대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며 살아 왔는가 생각해 보자. 만일 달리 이해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왜 그런 것인지 새겨보며 내가 살아왔고 살아 갈 이 시대 속에서 노동자의 올바른 역사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자.
1. 70년대 정치, 사회, 경제상황과 노동자들의 삶
1) 박정희 정권의 폭압적인 등장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를 필두로 서울을 점령한 군사쿠테타 세력에 의해 4.19 혁명의 변혁 열기는 단숨에 식어 버렸다. 박정희는 ‘반공’과 ‘재건’을 내세워 모든 노동조합과 정당, 사회단체를 해체하고 폭압적인 독재체제를 완성시켜 나갔다. 군복을 민간복으로 갈아 입고 장기집권에 나선 박정희는 굴욕적인 한일협정, 미국 주도 경제체계로 편입, 각종악법을 내세워 민주세력을 탄압함과 동시에 자시의 정치 기반을 다져갔다.
군사정부는 일체의 쟁의를 금지시키고 5월 23일부로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강제해산 시켰다. 이 과정에서 한국노련, 교원노조 등 노동단체가 해체 당한다. 그리고 군사정부에 의해 노동조합이 재조직되기 시작했다. 군사정권은 신고제였던 노조 설립을 허가제로 바꾸고 9명으로 구성 된 재건조직위원회를 만들어 노조를 만들어 갔다. 노조는 중앙집권적 산별노조체계였는데 군부는 산별노조에 노동자 통제권을 부여하고 이를 통해 노동조합을 일사불란하게 장악하겠다는 음모를 드러냈다. 재건조직위는 1961년 8월 30일, 12개 산별을 일사천리로 결성하고 한국노총을 출범시켰다.
한국노총은 “군사혁명의 성스러운 봉화를 선두로 국가재건에 전력을 다한다“는 선언을 채택하고 정치적 중립을 표방함으로 노동조합의 정치활동을 스스로 포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