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문벌 중 월사 가문은 5개 가문[청풍김씨 김극함 가문,
반남박씨 박소 가문, 경주이씨 이항복 가문, 전주이씨 이경여 가문,
남양홍씨 홍춘경 가문]과 함께 똑같이 상신 6명을 배출하였다.
월사 가문은 약봉 가문 9명보다는 적고 백강 이경여 가문과는 6명 동수이며
사계 가문 3명의 곱을 했다는 것만으로 그 의미가 대단히 크다.
대제학 부문 순위에서는 어떨까? 이 영광스런 대제학 부문에서는
광산김씨 김장생 가문이 7명으로 1위, 신안동김씨 김생해 가문과
연안이씨 좌의정 이정구 가문이 똑같이 6명으로 공동 2위, 대구서씨 형조판서
서성 가문이 5명으로 3위이다.
대제학 분야에서는 월사 가문이 사계 가문 다음으로 제2위이다.
또한 사계 가문은 문묘 배향공신 2인이 있다. 이것으로 사계 가문은
월사 가문을 보기 좋게 압도해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김과 연리 중
과연 어느 쪽이 더 명문이냐?” 하는 논란이 지금껏 계속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 관건은 문묘배향 공신을 어느 정도 비중을 두느냐에 달려있다.
문묘배향공신은 일반 공신이나 종묘배향공신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명예가 치솟아 태산북두와 같은 존재가 되고 있다. 심지어 대제학 수십 명
낸 것보다 더 영광스럽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반면에 문묘배향에 대해 칭송이 너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며
노론 집권층 전유물이나 진배없다고 깎아 내리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시각에다가 월사 이정구와 그 가문의 좋은 점을 열거하며
연리가 당연히 사계 가문보다 명문이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월사 이정구는 조선 4대 문장가의 일인이다. 결코 가볍게 볼 수 없는
큰 인물이다. 이 월사를 대적할만한 대문장가가 사계 가문에는 없다.
그래서 월사 이정구가 조선조 문장가들 중에 네 손가락 안에 드는 것은
그 영광이 지극하다는 주장이다.
더구나 월사 가문은 월사가 문장으로 명성을 휘날리고 월사 손자 8공과
삼소의 칭을 듣는 문장가 들이 흘러넘친다. 이것만으로도 사계 가문을
능가한다는 이야기이다. 거기다가 유상(儒相)의 칭이 있는 좌의정 이복원,
경사에 정통한 이조판서 이직보와 이조참판 이면우, 경학이 뛰어난 이문수
이건우 이연익, 장소노불에까지 연구 가 깊은 이영보 등의
학문이 빛나고 있다.
영의정 이천보의 시문은 당대에 명성이 높았으며 대제학 이만수의 사륙문과
이조판서 이약우의 상소문은 명문으로 유명하다. 대제학 이정보는 시조의
대가이며 부제학과 전라 감사를 지낸 이해조의 시문은 김창흡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다. 호조참판 이우신도 시인 묵객으로 명성이 있고
직제학 부제학을 지내고 좌의정에 이른 이존수는 시문에 능했다.
특히 경학이 밝은 이단상은 김창협 김창흡 이희조 임영 등 쟁쟁한
학자들을 배출했다.
월사 가문의 문장은 한양 경사(卿士)의 수풀 속에 표목(標木)이 되어
천고에 그 이름을 드러나게 하였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글을 남기면
불후하게 되고 자손이 있으면 죽지 않게 된다.” 하였다. 월사 가문은
화국지문(華國之文)을 남겨 불후하고 시ㆍ예(詩禮)에 열중하는 자손들이
가득하니 그 말이 맞다.
월사 가문의 세거지 한양 관동에는 관학계의 맹주들, 시문과 사장의 대가들,
경학에 밝은 석학 들이 가득하다. 관동은 한양 유자의 왕도이고 문단 영주들의
본영이며 문사의 부고 노릇을 했다.
월사 가문의 문(文)은 백가서를 두루 섭렵하고 육경에 그 근본을 두어 정신을
오로지하고 천고를 오르내리며 깊이 연구하여 일가의 학설을 이루었으며
사화(詞華))로 영풍(英風)을 드날려 성예(聲譽)가 자자했고 나아가
시(詩)ㆍ소(騷)의 여러 가지 체(體)로 그 지취(志趣)를 십분 발휘하여
정악(正樂)의 경지에 들었다.
월사 가문의 원정에는 유선(儒仙)의 풍악 소리 은은하고 백과(百果)
만화(滿花)가 흐드러져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조선조에 정겹고 아름답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월사 가문은 명망 높은 순유[醇儒; 순정(純正)하고 잡박(雜駁)하지 아니한
유학자]가 가득하여 순수정일(純粹 精一)하다는 평을 듣고 세상사에 초연하고
덕이 있어 세인들이 길인(吉人;복스럽고 팔짜 좋은 사람)이 많다고 칭송했다.
정암 조광조가 그토록 염원하던 도학정치의 이상향이 한양 관동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대제학에 버금가는 양관제학 등이 월사가에 많다. 양관제학은 경서나 사적의
관리, 문한의 처리, 왕의 자문에 응하는 제반 업무를 처리했다. 제학은 경학에
밝고 문장에 뛰어난 사람이 앉는 자리이다.
월사 이정구를 비롯하여 형조판서 이은상, 이조판서 이익상, 이조판서 이시원,
좌의정 이복원, 이조판서 이조원, 이조판서 이종우, 이조판서 이학수.
대제학 이만수...등은 제학을 지냈다. 거기다가 월사 가문은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지낸 이가 여럿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월사가에는 문단의 맹주나 관각의 수장이 많다고
입을 모아 칭송하고 있다. 영의정 경산 정원용이 말하기를
“조선조는 학문으로서 세상을 지탱하였다. 조정에서 경재가 된 사람들
중에서 문예가 남보다 뛰어나 명성을 떨치고, 삼관(홍문관.예문관. 성균관)에서
서로 필적하여 문단의 맹주로 골라 뽑힌 사람을 여러 대에 걸쳐 그 숫자를
헤아려 보면 연안이씨가 제일 많다.[本朝以文持世, 朝廷推卿宰中長文藝者
圈其名, 提衡三館, 主盟詞壇, 膺是選者, 歷屢世可數也, 惟延 李最爲多.]”고
하였다. [정원용의 이약우 신도비문]
월사가에 빛나는 것이 어찌 이뿐이랴! 시호에 글월문(文)이 들어가면
대단한 광영으로 생각했다. 월사 이정구 가문에서 시호를 받은 이가 30명
가까이 된다. 그 중 문자 시호를 받은 이가 20명이 넘는다. 반남박씨 박소가문
약18명, 대구서씨 서해 가문 약15명이다.
월사 가문은 경연관으로 이희조, 이직보가 배출 되었다.
사계 가문은 경연관으로 김장생, 김집이 배출되었다. 대제학 4대 가문에
경연관이 4명만 배출 되었을 뿐이다. 약봉 가문이나 백강 가문은 경연관을
한 명도 내지 못했다.
대제학 4대 가문에 학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수많은
학자들 중에 겨우 4인이 경연관을 했을 정도이다. 그 요란스럽게 많던
대학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고 김장생과 김집, 이희조, 이직보 만이
보인다.
김장생과 김집의 학문과 인품은 이미 문묘 배향으로 현창이 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이희조, 이직보의 경학을 칭송할만하지 않는가? 이러한 것을 종합해
볼 때 연리와 광김이 국반의 으뜸이라 칭송을 받은 것이 터무니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만하다.
그리고 월사 가문은 호당에 든 사람이 5인이 있다. 이 호당 기록은 3대 대제학
4대 가문에서 제일 많은 숫자이다. 한양 유력 문벌도 이만 못하다. 반남박씨
박소 가문이 4명이며, 김생해 가문이 2명, 여흥민씨 민사용 가문이 2명이다.
지방 명문들도 이만 못하다. 장흥고씨 제봉 고경명 가문이 2명, 행주기씨
고봉 기대승 가문이 2명, 풍선류씨 서애 가문이 1명, 진성이씨 이황 가문이 1명,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가문이 1명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월사 가문의
호당 기록은 빛나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월사 이정구의 가문은 문벌의 꽃인 문과급제 분야에서 발휘한
실력이 다채롭다. 월사 가문은 6대 문과급제 1집, 4대 문과급제 3집,
3대 문과급제 12 집, 4형제 문과급제 1집, 3형제 문과급제 3 집을 냈다.
3대(代) 대제학 4대 가문의 대구서씨 약봉 가문은 7대 문과 2집, 4대 문과 1집,
3대 문과 2집을 냈다. 전주이씨 백강 이경여 가문은 5대 문과 1집,
3대 문과 2집에 그쳤다. 신안동김씨 김생해 가문도 3대 문과급제는 7집,
4대 문과급제 2집에 불과했다. 월사 가문은 문과급제 총 인원이 월사 가문의
세 배가 넘는 한국 문벌의 제왕 격인 김생해 가문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막강한 문벌 반남박씨 좌의정 박세채 고조 박소 가문도 3대 문과급제 5집,
4대 문과급제 2집에 불과하다. 여흥민씨는 9대 문과 한집이 있어 돋보이는 면이
있지만 3대 문과 1집, 5대 문과 1집에 그치므로 종합 전적에서는 역시
월사 가문을 능가할 수 없다. 한국 최강의 문벌들을 능가하는 월사 가문의
문과 급제 기록은 월사 가문의 우수성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다.
월사가는 문과에 장원급제한 이가 6명(심원, 재수, 상우, 진익, 정익, 철재)이나
나왔으며 그 중 이상우와 이진익은 부자가 장원급제하였다. 장원급제하면
임금이 주과(酒果)와 함께 어사화를 내렸다. 그리고 3일 유가(游街)를
하게 하였다. 일종의 시가행진으로 요즘의 카퍼레이드의 성격을 갖고 있다.
월사 가문이 3대 문과 12집에 4대 문과 3집. 6대 문과 한 집으로 외연을
넓힌데다가 3형제 문과급제 3 집, 4형제 문과급제 1집을 추가하므로
상하좌우 모두가 고루고루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왕실과 혼인 하지 않고도 조선조에서 과환과 벌력이 이처럼 화려한 집은
3대 대제학 4대 가문에서 이 한 집뿐이다. 정조가 “앞으로 간택이 있어도
연안이씨는 단자도 내지 말고 그대로 전통을 이어가라.”고 하였으니
이 가문의 아름다운 전통을 짐작할 만하다. 이 가문은 왕실과 혼인을
하지 않았기에 국구가 나지 않았으며 따라서 외척의 세도 정치가가
나올 수 없었다. 이 점이 이 가문의 특장(特長)이다.
월사 가문은 유독 무반의 꽃이라 할 장신(將臣)이 한 사람도 없다.
실질적인 군권을 쥐고 있는 어영대장, 훈련대장, 금위대장, 총융사 등을
비롯한 무반직 고위 관료인 장신을 지낸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따라서 월사가는 역적도 없고 매국노도 없다. 세도정치를 할 만큼의
권력욕도 없으며 2-30만의 대군을 호령하는 장군도 없고
왜적을 물리친 독립군 사령관도 없다. 조선 정치판을 둘러 엎어버리던
3일 천하의 혁명가도 없으며 크게 넘치지도 않고 크게 모자라지도 않는다.
중용지도를 지향하는 유가의 모범생이 많을 뿐이다.
그러나 현실에 있어 왕후를 낸 가문과 못낸 가문 그리고 문묘 배향공신을
둘이나 낸 집과 하나도 못낸 집은 문벌의 고저가 천지의 차다. 그래서 연리가
광김의 상대가 아니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반면에 연리를 제일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은 왕후를 낸 가문을 치마양반이라 일컫고 문묘배향은 집권세력의
후원의 덕이기 때문에 두 가지가 다 명문의 자랑이라고 보지 않고 있다.
연리를 사랑하는 쪽 사람들은 오히려 왕후 없는 것을 더 큰 자랑으로 여긴다.
사계 가문과 월사 가문은 그 특성이 가장 비슷한 면이 있으면서도 아주 다른
면이 있다. 두 집이 경학을 잘하는 것은 비슷한 면이다. 그러나 사계 가문은
태산처럼 높고 바위처럼 무거우며 바다처럼 깊다. 월사 가문은 옥처럼 귀하고
샘처럼 맑고 장미꽃처럼 아름답고 향기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