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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8 십자가 상의 일곱마디 말씀(요19:23~30)[930221]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일곱마디 말씀, 흔히들 신학자들이 가상칠언이라.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일곱마디 말씀이라 하는 그런 제목으로 설교를 더러 듣고 은혜를 받으신 줄 믿습니다.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제가 제 노트를 참고해 보니까 과거에 약 3번 정도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강해 계속해서 오늘 한 번 더 말씀을 드립니다. 은혜를 받으신 분은 새로 은혜가 되고, 처음 말씀을 받는 분들에게는 신앙으로 큰 교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 날 오전 9시, 우리 시간으로 9시. 성경에는 3시라 그랬습니다. 오전 9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그러니까 9시에서 오후 3시, 6시간동안 십자가상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것은 건장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독생자를 그런 비극적인 죽음을 죽게 하셨는가?
그 십자가에 달려서 그렇게 고난을 받게 하셨는가?
메추헴이라는 학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심은 임종의 말씀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 자신의 신앙에 유익하게 하는데 있다. 한문에 논어에 인지장사에 그 언약 선하고 조지장사에 그 선약 예하도다. 사람이 죽으려 하면 그 마음이 착해진답니다. 참 잘못됐다고 참회도 하고 그리고 새도 죽으려 하면 그 소리가 슬퍼진다. 그러면 도덕적인 면에 있어 인간의 죽음에 대한 마지막 참회의 길, 선한 말을 하고 간다는 게 되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순히 인비장사에 그 언약선 하고 단순히 예수님이 죽으시면서 평소에 아! 그거 참 잘못됐구나. 그래서 참회해서 선한 말을 하신 것이 아니고 죄 없으신 분이 십자가에서 마지막 돌아갈 때에 우리에게 남겨주는 중요한 말씀을 띄엄띄엄 하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진리와 신앙의 길에 길잡이가 된다는 것입니다. 영어에 십자가라는 말은 크로스라 그럽니다. 크로스. 이 말은 라틴어에 크러치어라는 말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 뜻은 십자가라는 본뜻은 고문한다는 뜻이래요. 고문, 고문이라는 뜻인데, 고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죄수의 육체와 정신을 여러 가지로 고통을 주어 범죄의 행위를 자백하는데 있다. 어떤 학자는 말하기를 고문이라는 것은 삶과 죽음, 삶과 죽음에 중간선을 중간에 나타내는 것이다. 죽을 정도로 고통을 주었다가 정작 죽을 것 같으면 다시 살려서 한숨을 돌리게 하고, 또 죽을 정도로 고통을 주는데 죽이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평안도 주지 않는 것이 고문이다. 목적은 죄를 자백해 내는데 있다. 그러면 그런 심한 고통을 당하는 그때에 예수님의 입에서 무슨 말씀이 나왔느냐? 예수님의 마지막 고문대 또 사형대에서 하신 말씀은 너무나 중요한 그래서 피의 설교, 단순한 설교가 아니고 피를 흘리시면서 하신, 이 말씀에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깊은 진리를 계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간단간단하게 순서를 정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학자별로 쪼끔 다른 것이 있습니다마는 예수님이 오전 9시 십자가에 달려서 얼마나 고통이 되겠습니까?
그 고통 중에 첫마디가 예수님의 기도가 나옵니다. 사유에 대한 기도, 아버지여 그 고통 중에서 아버지여 저희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이 하는거 저희들이 모릅니다. 그것이 첫마디 말씀이에요. 이 기도의 충격을 받아서 기도의 충격으로 중생하면서 회개하는 강도, 우리는 우리의 죄 값으로 당연히 받아야 하겠는데 하고 자기 동료, 예수님을 비방하는 동료를 비방하면서, 주여 당신의 나라 갈 때에 나를 생각해주소서.
두 번째 말씀. 오늘 너와 내가 낙원에 가리라.
오늘 너와 내가 낙원에 가리라는 말씀을 두 번째로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정황 속에서 고통 속에서 한 영혼을 구원하시고 그리고 나서는 세 번째로 예수님 밑으로 보니까 예수님의 모친 어머니 마리아, 아마도 마리아를 부축하고 있는 요한, 막달라 마리아, 또 예수님의 이모, 그런 여성들이 밑에서 낙루하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어머니를 불렀어요. 어머니 그러지 않고 “여인이여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예수님이 손을 움직이질 못해가지고 눈짓으로 말씀하셨겠지.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제자를 보고 하시는 말씀이 네 어머니다. 네 어머니다 하시면서 모시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세 번째로 하신 것은 예수님이 그 육신으로 오신 인성이 예수님이 어머니에 대한 효를 나타내는 겁니다. 그러자마자 12시가 된 것 같습니다. 성경을 가만 읽어보면 12시가 된 겁니다. 그 세 마디 말씀을 하시고 나서 온 천지가 일식이 왔어요. 캄캄하게 어두워지고 지진이 일어나고 바람이 비바람이 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3시간 동안 그 십자가상에서 그 세 사람이 고통 하는 신음소리만 들려왔겠지. 3시간이 지내고 오후 3시가 될 때 큰 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1편 22편에 있는 말씀을 예수님이 낭송하신 것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리고 나서 곧 이어 예수님이 “목마르다” 물을 만드신 분이 “목마르다” 나를 믿는 자는 저의 뱃속에 생수가 강같이 흐르리라.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목이 마르지마는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물을 주시겠다고 하신 분, 물을 만드신 분이 “목마르다” 그 여섯 번째로 말씀을 이어가면서 또한 “다 이루었다” 미완성품이 아니고 “다 이루었다.” 일곱째는 예수님이 큰소리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이 성경을 연구하는 주석가들이 이 가상칠언을 도저히 황송해서 인간의 말로 더붙이고 빼고 해석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저 이 말씀을 읽으면 왜 그런지 감상에 젖고 눈물이 쏟아지고, 설교 준비하는 노트에 눈물이 어리어져서 제대로 준비가 되지 못한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희들 하는 것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오늘 너와 내가 낙원에 가리라.” “여인이여 당신 아들이니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아버지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 목마르다.” “다 이루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받아 주옵소서.” 뭐 해석 붙힐것도 없어요. 이 말씀이 성령으로 가르치는 이 진리에 대한 믿음과 교훈이 여러분의 삶 깊이 영혼 깊이 아로 새겨져서 여러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그 십자가상에서 말씀하신 진리의 뜻이 여러분의 생명 여러분의 신앙 여러분의 삶에 실존이 될 수 있도록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이 되어서 설명을 듣습니다.
첫째 말씀 “아버지여 아버지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저희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 예수님의 기도. 십자가상에서 드리는 그 기도입니다. 그 십자가상에서 드리는 일곱마디 기도,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하수인들, 그 로마의 하수인들, 빌라도, 유대인의 종교가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하고 군중들이 민중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선동하고 저들이 지금 누구를 죽이고 있는지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예수를 죽이고 있는 원수들을 향해서 “아버지여 아버지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하소서. 저희들이 알지 못하고 그랬습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 주석이 옳게 지적하는 줄 알고 인용해봅니다.
이사야서 53장 12절에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고 범죄자를 위해서 기도하였느니라.” 한번 다같이 받아합시다.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고 범죄자를 위해서 기도하였느니라.” 이 말씀에 대한 해석으로 이사야가 예언한 그 예언한 성취로써 드린 기도이면서 이 기도문은 깨닫지 못하고 죄를 지은 자가 회개하면은 용서를 받는 사죄의 기도이다. 이 기도는 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반대하고 아들을 반대할지라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는 뜻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깨닫고 회개할 때까지 하나님의 진노를 잠깐 멈추어 주옵소서! 끝까지 하나님을 끝까지 거역하고 무신론을 주장하고 예수 핍박하는 자를 무조건 용서해 달라는 게 아니고, 모르고 하나님의 아들인줄 모르고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아라”고 그렇게 부르짖던 그들이 “아차 큰 죄를 지었군. 큰 죄를 지었군. 형제들이여 어떻게 할꼬.” 회개하세요. 여러분 여러분이 십자가에 못 박은 분을 구주로 믿으며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면 약속하신 성령을 부어 주시리이다. 그래서 칼빈은 이 기도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한기도. 이는 회개하고 돌아올 택한 백성들이 지금 몰라서 죄를 짓고 세상으로 나가는 그들을 보고 주여 아버지여 저희들이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올 날까지 주여 진노를 잠깐 멈추어 주옵소서. 그 기도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고전1:18절에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한번 받아합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할렐루야.
이 기도가 이 기도의 음성은 바로 우리에게 제시하는 삼일장입니다. 이 기도를 받으면 우리 죄가 용서받고 구원의 길이 열리지만은 그 기도를 끝까지 멸시하는 사람은 불행합니다.
두 번째로 이 기도를 들으시고 이 기도. 우리 교회 안에서도 어떤 성도가 은혜로운 성도가 기도를 하면 눈물이 쏟아집니다. 회개가 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기도가 중생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아버지여 저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는 십자가의 기도를 십자가의 강도 한사람이 듣고 첫 케이스로 깨닫고 “아차!” 그 강도가 철저히 죄를 자백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주여! 당신의 나라 갈 때에 나를 생각 생각해주소서” 예수님. 두 번째로 “오늘 너와 내가 낙원에 가리라”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번 받아합시다. “오늘 너와 내가 낙원에 가리라”
어떤 얘기 하나 참고를 합니다. 어떤 부인이 왔어요. 무슨 허물과 죄가 있어서 얼굴을 못 들겠다고 왔습니다. 그러나 견디다 못해서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나 같은 여인도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을 수 있습니까? 그래서 그 목사님은 이사야 1장 18절을 인용했어요. 따라하세요. “너희는 내게 나와서 의논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지라도 흰 양털같이 사하여 주시리라.” 이 말씀을 들려주면서 권면했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한마디로 “안 믿어지는데요.” 안 믿어지는데요 그랬어요. 집에 돌아갔습니다. 일주일 뒤에 또 찾아왔습니다. 아주 밝은 표정으로. 어제 밤에 이상하게도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예수님 나 같은 사람도 구원 받겠느냐고 물으니, 이사야 1장 18절 목사님이 인용하신 성구를 예수님이 읽어 드리면서 중심으로 따라 회개하면 용서의 길이 있고 용서를 받느니라. 목사님! 하고 와서 자기의 죄를 자백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듣고 회개하는 강도. 오늘 너와 내가 낙원에 가리라. 받아하세요. 오늘 너와 내가 낙원에 가리라. 그 음성 한번 듣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고전13:5절 말씀 가운데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시험하고 스스로 확정해 보라.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지 아니하면 너희는 버리운 바라. 그렇게 하셨는데 이 십자가 강도는 지금 죽어예. 죽는 임종, 죽는 시간을 시간으로 말하면 12시라 하겠지. 그래서 어쨌든 성경학자는 말하기를 이 십자가의 강도가 예수님의 기도를 듣고 순간적으로 중생에서 영생의 길을 들어서는 것을 The elenen’s hour converson? 11시 되게 한 사람. 11시. 바로 바로 천국 문 앞에서 회개하고 그래 천국에 들어갔는 겁니다.
오늘 사랑하는 성도들의 여러분의 가정에 예수 안 믿고 끝까지 반대하고 불행의 길을 걷는 사람에게 희망을 저버리지 말고, 숨 붙어 있는 날 동안에는 elenen’s hour converson? 11시에 회심하는 사람이 있는 줄을 믿습니다.
세 번째 예수께서 하신 말씀. 예수의 효성. 예수님이 임종하실 눈빛으로 마리아를 보았겠지요. 여인이여. 왜 어머니라 안하고, 성경 해석분들이 대단히 당황케 하지요. 여인이여. 요한에게 눈짓을 하고 “당신 아들이오니이다.” 요한을 보고 하는 말씀이 “요한이여 너희 어머니다.” 그래서 일생동안 세상 떠나기 전까지 마리아를 모시고 부양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여인이라 그랬을까? 왜 어머니라고 친절하게 존경어를 쓰지 않고 그 예수님 같은 거룩하신 어른이 마리아를 보고 그 여인이라고 했을까?
핸리라는 성경학자는 어머니라고 부르면 그러지 않아도 칼로 가슴을 찌르는 듯 아들의 고통으로 실신 상태에 있는데 어머니라고 부르면 더욱 충격을 주어서 고통을 더할 것을 생각하셔서 일정한 거리감을 두기 위해서 “여인이여” 그렇게 불러서 그 상심을 진정 시키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여인이라고 했다. 그러나 프로마이크라는 사람은 좀 더 깊이. 예수님이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기보다 하나님의 아들임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그것은 당신의 아들이라기보다는 당신의 구주임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 “내 어머니여 이제부터 당신은 내 딸같이 나는 당신의 주가 되게 하세요. 당신이 나를 믿으면 복 받을 것입니다. 당신은 나를 찬미하세요. 그러면 나는 당신의 제사장과 왕이 되겠나이다.” 마리아가 어머니지만 그러나 그 아들이 누굽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여인이여” 하는 말은 어머니라는 말 대신 나를 구주로 모시세요. 당신의 아들로써가 아닌 구주로 모시세요. 내 딸같이 나를 대제사장과 왕으로 모시는 어머니에게 구원의 축복이 있습니다. 이것을 일러 ‘성 가족의 탄생’ 십자가상에서 성 가족의 탄생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한번은 어느 곳에서 말씀을 증거하실 때에 많은 사람이 모여 왔습니다. 그럴 때에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와서 그 예수를 알고 예수의 어머니를 아는 한 사람이 “선생님.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이 밖에서 기웃거리며 당신을 만나고져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를 보고 하는 말씀이 “내 어머니가 누구며 내 동생과 누이가 누군고? 하나님의 말씀의 뜻대로 사는 자가 내 어머니요 내 형제요 내 아들이요 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노니 이는 혈통으로 난 것도 아니요. 정욕으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의 뜻으로 난 것도 아니요 하나님께로 났나니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가장 중요한 것은 성 가족을 탄생시키고, 성가족을 이루기 위해서 십자가상에서 세 번째로 어머니란 말을 하지 않고 “여인이여 당신의 아들이니이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까지 믿지 않는 동생들에게 어머니를 맡길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 단순히 육신의 부양만을 맡기는 게 아니에요. 그 영혼을 맡기는 거예요. 그 영혼을 맡기고 그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그 영혼을 보살피고 따라서 육신도 부양해 주기를.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를 공경해야 됩니다. 만고불변의 진리지요. 남의 자식이 되어가지고 부모에게 불효를 한 것도 황송한데 부모가 죽으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미국의 잡지에 전하는 말에 미국의 사람들이 어머니 아버지를 모신답니다. 그런데 대개 모시는 사람들이 아버지 어머니에게 먹을 것을 잘 안주고 굶어 죽인답니다. 왜 굶겨 죽이냐고 하면은 빨리 죽어야 재산을 상속받기 때문에, 재산을 상속받으려고 굶겨 죽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차라리 아들에게 딸에게 가기 보다는 양로원에 간답니다. 양로원, 아들이 멀쩡하게 있는데도 양로원에 간다. 이 세상은 부모에게 대한 불효에 대해서 말할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그 고통에서 “여인이여 아들이니이다.” 제자들을 보고 어머니라고 하며 모셔달라고 하고 믿지 않는 동생들에게 부탁하지 않고 믿음의 사람 요한에게 부탁한 것은 영과 육을 아울러서 부양해주기를 원하던 이 예수의 세 번째 십자가의 세 번째 부탁과 간구는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인줄을 믿습니다.
네 번째 말씀을 드리기 전에 찬송하나 합시다.
“큰 영화로신주 .......” 한 번 더 반복합니다.
첫째 말씀. 한번 받아합시다. “아버지여 저희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희들이 하는 거 알지 못하나이다.” 믿음으로 받아쓰기를 축원합니다.
두 번째 말씀 받아하세요. “오늘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아멘.
세 번째로는 “여인이여 아들이니이다.” 예수의 효성 지극한 예수. 영적 가족의 탄생 그 진리를 우리는 교훈을 받습니다.
네 번째 마태복음 27:46절에 제 9시쯤 하여 오후 3시입니다. 임종쯤 하여 임종 직전입니다. 온 천지가 일식이 들었는지 캄캄하고 어두워 지진과 바람이 이는 그때에 예수님이 큰 소리로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히브리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성경을 주석하는 분들이 이 성경을 해석하는데 당황한다. 이 말입니다. 제가 얘기를 이 말씀으로 한 두어나 드립니다.
우리나라 시인 이은상씨가 이런 평을 했습니다. 이분은 이순신 장군을 아주 존경하죠. 그는 이순신 장군과 예수님의 죽음을 이렇게 비유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죽음에 있어서 이순신 장군보다 훌륭하지 못하다. 이순신 장군은 적탄에 맞아 치명상을 입고도 전혀 고통스런 기색 없이 끝까지 진두에 서서 독전하다가 영웅적인 최후를 가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최후의 죽음에 있어서 이 단말마에 그 부르짖음이야말로 유약하고 초라한 죽음이 아니었던가? 그분이 예수의 신앙의 사람이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그 죽음 이 말씀의 내면적인 세계를 몰라서 그래요. 제가 하나 더 예화를 들어서 말씀해보고 싶습니다. 어디까지나 우리 인간의 말로써 표현해보고 깨닫는 것은 성령이 하시는 줄을 믿습니다.
카터 대통령의 얘깁니다. 440일 동안 이란의 인질로 잡혀있었던 52명의 미국사람 인질 얘기 우리 많이 들었습니다. 그때에 이란의 나라에다가 “미국이 52명의 인질을 모두 석방해라” 여러 가지 위협을 하고 그래가지고 하는 말이 “팔래스 왕이 미국의 이곳저곳의 은행에다 예금한 금은보화를 이란에다 넘겨라. 그리고 당신의 나라에서 피신을 하고 있는 팔레비 왕을 축출해라.” 그리고 은행에 있는 돈 금은보화를 몽땅 우리에게 돌릴 때에 직접 주지 말고 알제리아를 통해서 보내라. 이 52명의 인질을 살리기 위해서 어떻게 합니까? 할 수 없이 팔레비 왕을 보고 미국을 떠나라고 했어요. 국제 고아가 되가지고 다행히 애굽에서 받아주겠다 해서 거기서 여생을 마쳤어요. 미국에 있는 팔레비 왕의 돈을 몽땅 이란에 돌림으로 해서 52명의 인질이 석방된 얘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말씀을 들으면 믿을는지 안 믿을는지 여러분 가운데는 그런 사람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기를 바랍니다.
죄를 범하는 사람은 죄의 종이요. 우리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우리 믿지 않던 사람들 속에 택한 백성이 있어요. 죄 지으면 범죄한 영혼은 죽으리라. 죽음의 올무에 잡히고 죄 값은 사망이라 해서 사망 형을 받고 범죄한 영은 죄를 범하면 죄의 범하는 자의 죄의 종이라. 우리가 마귀와 죄악과 죽음의 올무에 잡혀있어요. 진씨왕도 죽고 누구도 죽고 이세상은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은 불행한 인간들. 택한 백성이 올무에 잡혀 있어요. 그 뭐가 건져 냅니까?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사고팔다가 가놓고 보니 지옥가가 있는 마귀의 종이 되어서 영원히 불행을 당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어떻게 석방이 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와서 마귀에게 올무가 되는 거예요. 그렇기 위해서 하나님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루터가 말하기를 “God forsaken of God” 하나님께 버림받은 하나님.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고로 하나님과 예수님은 나누어지지 못하는 3위 일체의 하나님이신데 나를 본 사람은 하나님을 보았고 나는 하나님 안에 하나님은 내안에 있는데 당신이 우리 죄를 위하여 볼모 잡히시고 그 죄 값으로 죽음을 당하는 순간에 택한 백성이 석방을 당하는 그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옳소이다 나를 버리시고 당신의 택한 백성을 구원하시는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집에 가서 시편22편을 읽어 보세요. 그렇게 나옵니다. 예수님이 3시간동안 아니 3일간동안 올무에 잡혀서 죽을 수 없는 하나님이 죽음을 당하고 버림을 당할 수 없는 하나님이 버림을 당하고 ‘God forsaken of God’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 하나님이 되실 때 그 고통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옳소이다. 나를 버리시고 올무에 잡혀있는 당신의 택한 백성에게 자유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죄를 범한 자는 죄의 종이나 인자가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자유를 받으리라.” 믿으시길 바랍니다.
이거는 뭐 언론의 자유도 아니고 긍휼의 자유도 아니고 무슨 채집의 자유도 아니고 이는 영원한 지옥에서 죄악에서 죽음에서 멸망에서 자유함을 얻는 이 놀라움의 영생의 길로 걸어갈 수 있는 그 일을 위해서 죽음을 당하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 그 순간을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옳소이다 나를 버리시고 나를 마귀에게 내어 주시고 죽음에 내어 주시고 올무에 잡혀있는 택한 백성을 놓이게 하소서. 영생의 길을 열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 찬양의 노래예요.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이 큰소리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기도가 끝나는 순간에 성전에 있는 휘장이 위에서부터 밑에까지 촥 찢어져 내려오는 깁니다. 지성소와 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이 있어요. 휘장은요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말하기를 이 어른 뼘 두께가 2배나 된대요. 보통 칼로 찌를 수 없는 칼, 이 두꺼운 그야말로 철의 장막 같은 장막이 드리워지는데 지성소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고 성소는 우리가 있는 곳 아닙니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죄를 말하는 거예요. 죄 그러나 “엘리 엘리 라마 사막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고 예수님이 그 죄를 담당하고 죽음을 맛보는 순간에 죄가가 지불되면서 위에서부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 놓였던 죄가 끊어지면서 하나님과 통행할 수 있는 길이 새 영생의 길이 놓인 줄 믿습니다. 받아하세요.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도다.”
두 번째로 희귀한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그거는 예루살렘에 많은 사람이 죽었던 사람이 부활해가지고 그때 예루살렘에 내왕하더라. 그거는 도저히 성경 난해 구절 중 가장 어려운 난해 구절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땝니다. 교장 목사님이 조직 신학을 가르칩니다. 학생 하나가 “목사님요. 예수님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고 기도가 끝날 때에 무덤이 열려서 많은 성인들이 살아서 예루살렘에 왕래하더라고 하는데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교장인들 잘 알겠어요? 그 교장이 이렇게 말합디다. “나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믿소. 그렇지만은 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는 순간에 부활하신 전후에 많은 사람이 무덤을 열고 나왔다하는 그 얘기는 너무 신비스럽소. 나는 그게 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사람의 말로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죄 값으로 죽음이 왔는데 부활했다는 말씀은 이제 죄가 용서를 받고 사망의 권세가 파괴된 증거로써 죽은 사람이 부활하고 성도들이 부활하고 장차 예수님이 영광가운데 재림하실 가운데 큰 위대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택한 백성이 죽었던 무덤에서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으로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으로 욕된 것이 존귀한 것으로 육의 몸이 신령한 것으로 부활하는 이 놀라운 새벽의 영광의 새아침이 다가온다.”고 그렇게 설명한 것이 기억납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우리의 죄를 지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God forsaken of God”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는 하나님이 당신의 피를 지불하는 순간에 마귀의 올무에 잡혀있던 죽음과 사망의 올무에 잡혀있던 그들이 자유를 얻고 순간적으로 죽었던 마귀의 올무에 잡혔던 죽음과 사망의 올무에 잡혀있던 그들이 자유를 얻고 순간적으로 영생의 길이 열리면서 순간적으로 죽었던 성도들이 부활하는 이 놀라운 위대한 기도 이은상씨가 알았으면 좋겠더라. 슬퍼만 할 죽음이 아니에요.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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