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도 저는 1통 3반에 탑승했습니다.
1통 3반. 제가 출근하면서 타고 다니는 지하철의 문 위치 입니다.
그렇지요. 지하철의 1번째 칸 세번째 문입니다. 습관처럼 몸에 배어버린 일들 중의 하나입니다. 뭐 그렇다고 다른 칸에 탄다고 큰일이 나는 것도 아닌데 유독 이 칸만을 타게 됩니다.
뭐 굳이 이유를 대라면 제가 내리는 지하철 역의 올라가는 계단이 제가 내리는 곳에 있다는 것이죠. 그렇다고 제가 그리 게으르다거나 한건 아닙니다. 대개 앉는 자리도 나만의 지정석이 있지만 그 지정석은 다른 사람들에게 빼앗겨 버리기 일쑤입니다. 제가 즐겨 앉는 자리는 1통 3반에 올라 바로 오른쪽 옆자리 이지요. 이 자리에 앉으면 1통 주민들을 한눈에 볼 수 있거든요.
아침 출근나절의 지하철엔 대게 늘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문학서적을 이 아침나절에도 졸지않고 꾸준히 보시며 출근하시는 중년의 아저씨나, 늘 마귀할멈 신발같은 뾰족한 구두를 신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로 꾸벅꾸벅 졸고있을 아가씨. 이크, 여름에 보면 영락없는 전설의 고향 이군요... 하지만 모두다 대화만 나누지 않았지 이웃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녀, 언젠가 부턴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이 아침 출근 전철에 새로운 손님이 되어버린 그녀가 있습니다. 몇일전 부터 우연히 같은 전철을 타게 되면서 나의 눈에 들어와 버렸다고 해야 하는건가요?
대부분 이런 표현을 많이 쓰더군요... 이쁘다는 표현보다는 분위기 있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릴것 같은 그녀입니다.
사실 속직히 말하자면 그녀는 내가 얼마전까지 사랑했던 여자와 무척 닮은 구석이 많아 보이는 여자입니다. 물론 속마음까지는 알 수 없지만 겉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모습은 한동안 나를 시리도록 아프게 했던 여자와 많이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남자는 첫사랑을 못잊는다고 했었나요? 그 말은 맞는 말 같습니다. 저를 시리도록 하프게 했던 그여자는 저의 첫사랑입니다. 26 나이가 들대로 들어 가져본 첫사랑의 감정은 역시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지하철의 그녀와 나 사이에 어떠한 끈이 놓여진다면 좋겠지만 아직은 사양하고 싶네요. 내 마음이 아물기 전까진 말입니다. 떡줄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치국부터 마시지 말라구요? 냅두십시오. 제맘입니다.
이제 저와 그녀는 같은 역에서 내려 각각 다른 출구로 빠져나가겠지요.
오늘은 그것이 끝입니다. 내일은 또다시 같은 장소, 같은 시각부터 똑같은 스로리가 진행되겠지요... 당분간은 말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지하철 안에서의 40여분동안 그녀를 살피는 일입니다. 그나마 그녀와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서 조는 척 눈을 게슴츠레 뜨고 그녀를 훔쳐보는 일입니다. 그녀도 어쩔 수 없군요.
꾸벅꾸벅 조는 모습이 나를 웃음짓게 만듭니다. 그런데 내 눈이 감기는건 왜일까요...
가을도 이제는 거의 다 지나간것 같습니다. 수없이 떨어지는 은행잎을 쓸어담느라 고생하시던 아저씨들의 모습이 별로 보이지 않고 나무도 앙상한 가지만 남아 처량하게만 보입니다.
올 가을도 이렇게 그냥 지나가려나 봅니다.
2.
아침 해가 무척 게을러 졌습니다. 7시가 가까와 오는데도 아직도 도시는 어둑어둑합니다. 그녀가 나의 눈에 들어온지도 꽤 많은 시간이 흐른것 같습니다. 그리고 몇가지 사건도 있었지요. 그녀의 이름을 알아내었지요. 그것도 우연히 말입니다. 그저께의 일입니다.
아직 겨울이라고 생각하기엔 이른때인데 날씨는 무척 쌀쌀했습니다.
올해 처음 입어보는 투툼한 반코트를 걸치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전철역으로 향하는 택시를 탔습니다.
추운 날씨여서 그랬는지 사람들이 다른때 보다 유독 많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두텁게 무장을 하고 공룡처럼 입가에선 허연 불을 뿜으면서 들어오는 전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녀도 늘 지하철을 타는 위치가 정해져 있습니다. 1통 2반이지요. 지하철 안에도 사람은 많았습니다. 모두들 앉아야 겠다는 신념 하나로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자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저와 그녀는 조금 늦게 지하철에 올랐기 때문에 자리는 거의 다 차고 빈자리는 없어보였습니다.
매일 좋은 일만 일어나는것은 아니지만 가끔씩은 일어나는가 봅니다.
지하철에는 자리가 딱 두개가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도 두자리가 붙어서 말입니다. 먼저 그녀가 가서 자리에 앉고 나는 더 자리를 찾는 척하다가 뒤늦게 자리를 찾은 척 그녀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습니다.
긴 그녀의 생머리에서 좋은 향기가 배어나왔습니다. 같은 생머리인데도 맞은편의 마귀할멈 신발을 신은 아가씨는 이 추운 겨울에도 열심히 전설의 고향을 찍습니다. 머리는 열심히 방아를 찧고 있고 마귀할멈 신발 앞에는 쇳조가리가 붙어 있습니다. 조심해야 할것 같습니다.
추운 날씨에 지하철에서 틀어주는 히터때문에 저는 곧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래요, 졸았습니다.
얼마쯤을 지났을까 조용한 지하철 안에 제가 내릴 역 안내방송 소리가 꿈결에 들려와 잠을 깨고보니 그녀가 어디엔가 전화를 걸고 있었습니다. 조용한 전철 안이라 그녀도 목소리를 줄여가며 전화를 조심스럽게 했지만 원래 소근소근하는 소리는 더 잘들리는 법입니다.
여보세요? 언니? 나야, 수아. 여보세요?
응 그래 수아라니깐.
전화를 받는 사람도 이른 아침에 전화를 받아 정신이 없었는지 여러번 물어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그녀의 이름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언니 오늘 바뻐? ... 아니 그냥... 그냥 만나고 싶어서...
... 아니 그저 그렇지 뭐... 오늘 퇴근하고 시간 어때?
8시쯤 지난번 거기... 그래 3층에 있잖아...
... 만나서 얘기해 줄께... 그냥 끝내야 할까봐...
여보세요?... 여보세요?...
뭘 끝낸다는 얘긴지 통화가 끊어져 더이상 듣지는 못했습니다.
아뿔사 지하철 문이 닫히려고 했습니다. 그녀는 서둘러 내리기 위해 꺼내어 놓았던 다이어리를 가방에 챙겨넣으며 닫히려는 문쪽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저요? 물론 저도 여기서 내립니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잠시 깜빡 했네요.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 문쪽으로 나오려는데 뭔가가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그녀의 까만색 핸드폰이었습니다. 저는 서둘러 그 핸드폰을 집어들고 내리려 했지만 이미 문은 닫힌 다음이었습니다.
참 일이 난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핸드폰은 앙증맞을 정도로 작았습니다. 아마 구입한지 몇일 안된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아느냐구요?
핸드폰에는 그 흔한 스티커 사진 하나 없었고 메모리에 저장된 번호도 하나도 없고 결정적인것은 전체통화시간이 3분 20초 였거든요... 액정 화면에는 적어도 "*^^* 이쁜이" 정도는 있을 줄 알았는데 썰렁하게도 그녀의 핸드폰 번호만 적혀 있었습니다.
아마 그녀는 기계와 별로 친하지 않은 모양입니다.
하지만 핸드폰 번호는 저의 핸드폰에 기억시켜 놓았습니다. 제일 마지막 번호인 99번에 "수아"라는 이름으로...
제 핸드폰을 열어 99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눌렀습니다. 수아씨의 핸드폰이 어디 아픈가 봅니다. 부들부들 떠네요.
내일 아침 만나면 돌려줘야 겠지요? 제 핸드폰 번호를 저장해서 돌려 줄까요? 제 번호를 꾹꾹 놀러 수아씨의 핸드폰 99번에 기억시켜 놓았습니다. "걸지마 다쳐"란 이름과 함께...
3.
이틀이 지났지만 그녀의 전화기는 아직 저에게 있습니다. 예, 아직 돌려주지 못했습니다. 아침에 그녀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죠. 무슨일인지 그녀는 이틀동안 늘 타던 그 지하철을 타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그녀에게서 핸드폰으로 전화라도 올줄 알았는데 이틀이 지나고 나니 핸드폰 밧데리가 밥안주면 일 안한다고 벌렁 드러눕는 바람에 이젠 켜지지도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더 가지고 있어봐야 될까요 아니면 분실센터에라도 맏겨야 할까요... 참 난감합니다.
한성재씨 힘들텐데 다음주에 교육이나 다녀오지그래...
회사에 출근했더니 과장님이 대뜸 교육이나 다녀오라십니다. 그런데 한성재가 누구냐구요? 접니다. 바로 저... 제가 한성재입니다.
그런데 이상하네요. 나를 들들볶지 못해서 안달인 과장님이 나한테 교육이나 다녀오라니 뭔가 수상한데? 아니나 다를까 과장님이 휴가와 겹쳐져서 저를 대신 보내시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과장님, 저도 할일 무지 많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과장님의 다음 말이 저를 절망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일은 뭐 돌아와서 열심히 하면 되쥐~~~~~안그래 한성재씨?
하지말란 말은 절대로 안합니다. 그럼 저는 교육 나녀와서 거의 날밤을 새야합니다. 차라리 절 죽여주십시오... 흑흑흑...
옛말 하나 그런거 없습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저는 용기를 내서 과장님께 대들었습니다. 어떻게 했냐구요? 한번 깊게 째려보아주었습니다.
그나저나 큰일입니다. 내일은 토요일, 내일 그녀를 보지 못하면 다음 일주일동안 그녀를 볼 기회가 없어집니다. 주인잃고 배고픈 이 핸드폰이 큰일입니다. 내일은 조금 늦더라도 그녀를 기다려 봐야 할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음날도 그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해서 30분 정도를 더 기다려 보았지만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애꿏게 전철에는 앉을 자리도 없어서 40여분간을 서서 졸면서 출근해야 했습니다. 당연히 회사도 늦었지요.
한성재씨 요즘 힘든일 있어?
그렇다구 이렇게 자주 늦으면 안되쥐~~~~~
우쒸, 입사하고 처음 늦은거란 말입니다. 절대로 고운 소리 해주지 않는 과장님께 저는 다시한번 용기를 내서 대들었습니다. 째려보았단 소리죠... 옆자리의 여자후배가 혀를 낼름거리며 과장님은 안된다는 투로 저를 응원해줍니다. 그래도 후배 하나는 잘 키운것 같습니다. 다음 일주일동안 과장님을 보지 않아도 되니 마음은 가볍지만 자꾸만 손에 만지작 거리는 핸드폰이 마음에 걸립니다. 아예 처음부터 지하철 분실센터에 맡겨놓을걸 그랬나 봅니다.
퇴근하는 길에 분실센터를 찾았습니다.
이거 지하철에서 주은건데 주인좀 찾아주시라구요...
네. 언제 습득하셨죠?
습득? 어투가 좀 이상합니다. 무슨 장물도 아닌데 그냥 엉겁결에 주은건데...
수요일 아침 4호선에서요...
수요일이요?
접수하는 아가씬지 아줌만지 고개는 들지도 않고 안경넘어로 눈만 빼끔 내민채 물어봅니다.
수요일 습득하셨다면서 왜 이제 가져오시죠?
아... 녜... 좀 사정이 있어서...
따지긴 많이도 따집니다. 내가 뭐 주은 핸드폰으로 그동안 국제전화라고 걸었을까봐 그럽니까? 쩝...
여러가지 복잡한 난관을 극복하고 분실물 접수를 마쳤습니다. 이젠 제법 제 손에도 익은 저 핸드폰이 자꾸 걱정됩니다. 그녀가 찾아가야 할텐데...
네, 됐습니다. 여기 싸인해주시면 됩니다.
멋진 제 싸인을 남기고 매트릭스의 키아누 리브스처럼 바바리를 흩날리며 분실물 센터를 나왔습니다.
첫댓글 계속 퍼와주세여!~
이소설은 남자의 입장에서 썼네요...새로워요..^^잼있을 것도 같아요.,.
조금 재미있었어여...이해 안가는 점도 많이 있었고... 그런데 이 소설은 옛날껀가 봐요?? 검은 폰이 나오면... 아닌가?? 아니면 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