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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화가 일랑 이종상(70)은 화단에서 특별한 존재다. 국전 최연소 작가로 화단에 혜성처럼 등장한 이력이 그렇고, 개인전 때마다 작품경향을 둘러싸고 화제도 만발했다. 전통 소재주위를 탈피한 독도 진경은 ‘한국화를 버렸다’는 비난을, 고구려 벽화기법을 재현했을 때는 ‘좌경화가’로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열정적인 실험정신은 자생미학이란 이론무장과 함께 한국화단의 담론이 됐다. 연작 원형상은 창작곡과 시로 거듭나 음악과 문학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란 별칭이 썩 어울리는 것도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전통의 탐색과 시대를 앞서가는 직관력이 작품마다 녹아 있어 그의 연작은 파노라마처럼 웅대하다.
고희의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과 작품 구상에 열정을 불태우는 ‘만년 청년화가’ 일랑. 대전일보 창간 57주년 맞아 고교시절부터 대전일보와 특별한 인연을 맺어온 일랑을 만나 작품세계와 예술관을 들어 봤다.
▲대전고 재학시절 ‘루브르 동인회’를 결성하고 석판화집을 만들었다는데 그때 주인공들은 누구입니까.
-루브르 동인회는 대전지역 고등학교 미술반이 중심이 되어 만든 대전 최초의 미술 동인그룹 입니다. 석판화집은 동인집으로 출판을 한 것입니다. 김인중신부, 이철주 전 중앙대 교수, 유희영 서울시립미술관장(예술원 회원) 등이 주요 멤버였습니다. 당시 남녀 학생들이 야외 스케치 한다고 몰려 다녀 곱지 않은 시선도 받았지만 모두 한국화단을 대표하는 훌륭한 화가로 성장했습니다. 고등학생 미술그룹에서 예술원 회원을 두명이나 배출하는 전무후무한 기록도 세웠습니다.
▲화가로 성장하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준 스승은 누구를 꼽을수 있나요.
-첫째는 아버지였고 두번째는 고등학교 때 박관수 교장선생님을 꼽을 수 있습니다. 화가가 꿈이였던 아버지는 집안의 반대로 화가가 되지 못했지요. 하지만 늘 그림을 그렸고 다섯 살인 나에게도 그림을 가르치면서 칭찬과 격려로 용기를 북돋워 줬어요. 솔거와 이응노 등 유명 화가 얘기를 들려주기도 했고요. 아버지는 나의 첫 그림 선생인 셈입니다.
박교장선생님은 고등학교 2학년때 ‘앞으로 취미가 직업이 되고, 국가사회의 능률을 높이는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며 미술대학 진학을 권유했던 선각자였습니다. 그말에 감동을 받아 이과이면서 김신부와 함께 미술대학 진학을 결심했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함께 배우는 자세로 학생들을 지도했던 고교 2학년때 미술교사였던 김철호선생님 입니다.
▲ 서울대 서양화과에 입학해 동양화과로 전과를 한 이유가 있습니까.
- 당시 대전지역에 미술대학 졸업생은 커녕 미술교사도 드물어 진학지도를 받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미술시간에 한국화에 대해 배운적도 없었고요. 입학후 장우성화백을 통해 우리 그림을 접하고 매력을 느껴 전과를 했습니다.
▲작품마다 역사의식이 이입돼 있는데 늘 그런 생각을 갖고 작업을 하십니까.
-예술가도 시공(時空)을 통시적으로 생각하는 역사의식이 필요합니다. 작품이 좋아도 작가가 지향하는 역사의식, 시대를 보는 눈이 옳지 못하면 작품으로서 시대적 역할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대가 변한만큼 시대에 맞는 역사의식을 가져야 하고 과거의 틀에 얽매인 소재주의는 털어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를들어 초가집, 호롱불 등 과거의 소재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입니다. 털어내것은 털어내는 과감성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전통주위나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진경, 원형상 등 작품세계에 대해 설명을 해주십시요.
-진경은 현실의식과 일맥 상통합니다. 60년대 국전에 출품할 때 노동자와 농민등을 많이 그렸습니다. 한국화를 과거 조선시대 풍경, 관념속 풍경을 지양하고 소재를 현실화하자는 의도였습니다. 과거속 진경이 아니라 현대화된 진경을 추구한 것이지요.
원영상은 변화하는 형상을 쫓아가며 그릴것이 아니라 형상 근원에 접근하자는 의도입니다. 서구 예술은 선형상에 뿌리를 두고 있고, 동양은 근원형상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물질은 시시각각 변하는데 서구식으로 접근하면 껍데기만 그리는 꼴이 됩니다. 형상이전의 근원에 접근, 영원성을 추구하자는 것이 원형상의 본질입니다. 원형상 이론이 공감을 받으면서 화론으로 정립되고 음악으로 승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독도 진경 시리즈에 깊은 애정을 보이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독도 진경은 화가로서 그림을 통해 독도를 국민들에게 각인시켜주기 위한 의도가 담겨있습니다. 독도는 우리땅에서 가장 먼저 동이 트는 상징적인 땅입니다. 그러나 일본과 영유권 논란이 일어나면 정치가, 사학자만 나서서 목소리를 높이다가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사그러 들지요. 이런 현실이 안타까워 화가로서의 역할을 고민하다 독도 진경에 심취하게 됐고, 독도문화 심기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입니다.
▲자생미학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요.
-자주, 자립적인 미술문화 형성론입니다. 결코 외부의 압력이나 모방에 의해 형성된 것이 아니고 전통을 뿌리삼아 자생적으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자생성이 있기 때문에 한국미술의 미래는 밝습니다. 자생성은 보이지 않는 한국미술문화의 로드맵인 셈이지요.
▲작품 경향만큼이나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는데 특별한 연구를 하는지요.
-화가의 그림재료는 아이디어(사의)를 담아내는 그릇입니다. 재료가 단순하면 담을 그릇이 부족해 작품 경향도 단순해지기 마련이지요. 그릇을 많이 갖기 위해 재료에 대한 연구를 꾸준히 하고 있으며, 어떻게 하면 철학과 재료가 잘 어울리도록 할 것인지 늘 고민에 빠져 지냅니다. 장판지, 닥지, 동유화 등이 그릇만들기 이환였던 것입니다.
▲다양한 작품세계의 원동력은 무엇입니까.
-연구의 결과물 입니다. 고등학교때 이과를 택해 수학과 자연과학에 눈을 떠 그림을 그리면서 재료를 연구하는데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대학때에는 공간감각 훈련을 위해 건축을 배웠으며, 여초선생으로부터 전각과 서예도 배웠습니다. 원효대사 영정을 그리기 위해 시작한 철학공부가 박사학위까지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어요.
▲요즘 문화예술계에 가짜학위 논란이 일고 있는데 화단 원로로서 이를 바라보는 마음은 어떻신지요.
-옥석을 가리지 않고 파헤치고 폭로한다면 부작용이 더 클 것입니다. 가짜학위를 가지고 진짜 행세를 한 것은 분명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더 큰 것을 잃지 않기 위해선 다른 한 쪽도 볼줄 알아야 합니다.
비유가 될지 모르지만 저도 6.25전쟁통에 초등학교 졸업장이 없이 중·고교, 대학, 대학원까지 다녔고 교수로 정년퇴직을 했습니다. 옥석을 가리지 않고 문제를 삼는다면 이것도 논란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고교시절 대전일보에 작품이 게재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어떤 그림인지요.
-대전일보에 감사할 점이 많습니다. 재학시절 대전일보 삽화를 부탁받아 그리면서 화가의 꿈을 키웠어요. 당시 대전일보 어느분의 결정인지 모르지만 어린마음에 그림에 대해 자신감을 불어 넣어준 큰 사건 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자신감이 의대나 공대를 과감하게 포기하고 미대로 진로를 결정하는 동기부여가 됐던 것 같습니다. 뿐만아니라 미술대학 시절 방학을 맞아 대전에 오면 지역분들이 보잘것 없는 고학생의 그림을 사주셔서 등록금에 보태기도 했습니다.
▲ 대전의 문화 예술발전을 위한 조언을 하신다면.
-예향의 명예를 지켜가야 합니다. 미술만으로 본다면 대전은 광주를 능가하는 예향입니다. 예술원 회원 4명을 배출한 곳은 대전 말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대전은 대덕연구단지가 입지하고 있는 만큼 대전만의 특성과 환경을 잘 살려나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과학을 미술에 접목을 시켜, 상호작용을 하도록 한다면 대전 상표의 미술인 ‘제 3의 예술’이 반드시 탄생할 것입니다. 대전은 새로운 지구촌 미술의 진앙지가 되고도 남을 충분한 잠재력을 갖고 있다고 학신합니다.
▲끝으로 후학들에게 하고 싶은 충고의 말이 있다면.
-젊은이들은 우선 우리 역사와 전통에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버릴것과 취할 것을 구별한 후 버릴것은 과함하게 버리고 남은 토양 위에 새로운 예술의 씨앗을 뿌리는 농부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것이든 애정과 관심이 전제된 의문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관용이 있어야 합니다. 미래 문명의 키워드는 소통인데, 애정과 관용이 없이는 소통이 될수 없어 우물안 개구리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글=변상섭,사진=신호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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