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소개
깊은금(지풍금, 깊은금이, 심구미리)
깊은금, 지푼금이, 심구미. 치도리의 옆마을 치도리에서 서쪽으로 1.5km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깊을 심을 쓴 것처럼 마을이 매우 깊은 지형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큰 부자가 나온다는 속설이 생기게 된 것은 위도의 지형이 고슴도치를 닮았는데 깊은금이 고슴도치의 자궁에 해당되어서 나온 말인 것 같다. 이곳엔 자갈로 된 해수욕장이어서 물이 너무도 맑아 호수 같아 가족들이나 단체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관계로 완전 통나무로 만들어진 위도 유일의 펜션 과 최신의 민박집들이 있고 그리고 횟집이 있어 위도의 먹거리 문화의 산실이기도 하다. 또한 그 유명한 내원암 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창건 당시에는 큰 종이 있어 저녁에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가 10km떨어진 멀리 식도까지 들렸다 한다.
파장금
파장금이, 파장구미. 시루금이 북쪽 후미의 마을. 위도여객선 선착장이 여기에 있다. 1970년대 초까지 파시가 형성되었었다. 진리에서 동북간으로 2km떨어진 곳으로 격포에서 여객선이 출발해서 제일먼저 닿는 곳이기도 하다. 파장금 이라는 이름은 칠산어장을 끼고 있어 많은 어선들이 왕래하고 폭풍이 몰아치면 어선들이 대피하는 마을이며 물결이 길면 어선이 모이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혹은 파도가 길게 치면 금(金) 즉 돈이 몰려온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도 한다.
시루금이(시름)
시름금, 시루금, 시루구미. 진말의 동북쪽 후미의 마을. 떡시루 모양의 구미형 지형마을이다. 진리에서 파장금으로 가다보면 파장금 못미쳐 작은마을이 바로 시름이다. 시름이라는 지명은 지형이 떡시루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시루"로 불리워 오다가 지금은 "시름"이라고 불린다고 전해진다. 시름은 위도 내연 발전소가 위치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벌금이(벌금)
벌끔, 벌그미, 벌구미. 진말의 북쪽마을. 진리에서 서북간 1km지점 떨어진 곳으로, 조선조 말엽 창녕 조(曹)씨와 평산 신(申)씨가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해오는데 지금은 다수의 성씨가 살고 있다. 이곳은 원래 지대가 낮은 지역으로 소금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이 좋아서 옛부터 소금을 생산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금을 생산하는 소금벌이라서 "벌금"이라 칭하게 되었다 하는데 이 마을에는 천혜자원의 위도 해수욕장을 끼고 있어 위도 관광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의 당집 근처 야산 정상에는 수백년 된 후박나무 숲이 있다. 당집은 진리마을에서도 명절 때 제(祭)에 사용한다.
도장금이(해수욕장)
벌금의 서쪽당대 너머 해수욕장이 있는 마을. 현재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다.
정금 (井金)
진리에서 동북쪽으로 1km떨어진 곳으로 최초의 인동 장(張)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하여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원래 지형상으로 볼 때 형체가 솥뚜껑과 같다하여 솥 정(鼎)자를 붙이고 이곳에 금이 나왔다 하여 금자를 붙여 정금이라 칭하였다고 하나 시간이 흐르면서 이 마을에 물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우물 정(井)자로 바뀌었다. 만조시에는 위도와 떨어진 섬마을 이지만 간조시에는 다리 위를 걸어서 섬을 내왕할 수 있다. 그 옛날 이 정금 마을에 살던 장씨는 한때 엄청난 부를 이룬 적이 있는데, 엽전으로 본 섬과의 다리를 가설하려고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살막금이(전막리)
살막금, 살막구미, 전막리. 대돌목 서남쪽 후미에 있는마을. 고기잡이 어살을 만들었던 곳이다. 대리에서 서쪽으로 약 0.5km떨어진 마을로 본래는 행정구역상 대리에 속해 있었다. 처음에는 농업을 생업 수단으로 했으나 점차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게 되었는데 당시의 원시적인 방법으로 마을 앞 해역 갯벌에 대를 쪼개어 발을 엮어서 살을 만들어 바다에 말둑을 박아 살을 쳐놓고 밀물 때 물을 따라 들어왔던 고기들이 썰물 때 나가다 이 살에 걸리게 되어 많은 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살을쳐서 고기를 잡는다하여 "살막금"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일제 강점기에 살 전(前)자에 막 막(幕)을 써서 전막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논끔이(논금)
논끔, 논구미, 답구미. 전막리에서 서쪽으로 도로를 따라 가다보면 나오는 곳으로 본 마을에서 유일하게 벼를 경작한다 하여 논금이라 하였다. 논금은 몇가구 되지 않지만 조약돌 해변이 넓게 펼쳐져 있어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곳이기도 하다. 원래는 대리에서 논금으로 직접 넘어가는 산길이 있었으나 지금은 전막리를 거쳐 논금으로 가는 순환도로가 넓게 나있다.
미영금
미영금이. 논끔의 동쪽 후미에 있는 마을. 전막리에서 서쪽 해안가로 난 해안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논금을 지나 넓은 모래사장과 조약돌 해변이 있는 조용한 미영금 해변이 보인다. 멋들어진 해안 절벽과 바위사이에 조심스럽게 들어앉아 있는 이곳은 섬의 정취를 느끼며 조용히 휴가를 즐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장소이다. 미영금 해변 뒤로난 해안도로를 따라 드라이브를 하거나 조용히 해수욕을 즐겨도 좋고 낚시를 즐길 수 있다. 또한 미영금엔 민박집과 횟집이 다수 있다.
진말 (진리)
위도면의 면소재지. 위도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정착하여 살았다고 전해지나 아직 사실 확인 작업은 이뤄진 적 없다. 진리엔 위도 관아가 있는데 수군 진영이 있다하여 "진말"(진마을)로 불리어 오다가 일제 때 진리라 칭했다고 한다. 현재 진리엔 위도 중학교와 위도 고등학교 및 우체국, 농협 등과 같은 행정기관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진리엔 한국전쟁당시 자체 방위대를 조직하여 향토방위를 하던 중 전사한 故 김길환, 김용만 이들 두 분의 넋을 기리는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진리는 보통 섬마을들이 세찬 바람에 노출되어 있는데 비해 온화한 바람과 조용한 파도를 끼고 있는 마을이고 다른 지역에 비해 평야지대를 가지고 있어 논농사도 짓고 있다.
치도
면 소재지인 진리에서 남쪽으로 1km떨어진 곳으로 고려조 이래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른다고 한다. 마을의 이름을 치도라 부르는 것은 마을 형태가 마치 꿩모양 같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현재 치도리엔 여러 성씨가 함께 살고 있으나 특히, 송씨와 서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다. 원래 치도리의 생업은 농업 위주였으나 일제시대 어업이 발달하기 시작하여 칠산어장의 중심지로 파시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초등학교가 있으며 마을에서 바다를 거쳐 1km 떨어진 곳에 딴치도가 있다. 이 딴치도엔 지난 1931년 한 해동안 3번의 태풍으로 인해 조업중이던 500여척의 배가 참화를 입어 6백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참사가 있었다고 전해오는데 딴치도엔 그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조령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왜정 때는 이곳에도 유곽이 들어설 정도로 번창했었다 한다.
대돌목(대리)
대저목, 대리, 대장마을. 면 소재지인 진리에서 치도를 거쳐 서쪽으로 약 6km지점에 위치한 마을이다.마을 형태가 큰 돼지의 목 형국이라 해서 "대저항"이라고 불리어 왔는데, 그후 대저항이 "대장"이라고 불려오다 큰 대(大)자에 마을 리(里)를 붙여 "대리"라 불렀다 한다. 대리는 일찍이 풍부한 어족 자원의 형성으로 많은 어선들이 어장을 형성하면서 큰 마을로 형성되어 왔다. 이곳은 대리 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폐교가 되었는데 이 대리마을이 바로 중요무형문화재 제82-다호인 위도 띠뱃놀이가 전해오는 마을이다.
소돌목(소리)
치도에서 대리를 넘어가기 전에 작은 마을이 있는데 이 작은 마을이 바로 소리다. 대리를 큰돼지 목이라 불렀던 것에 비해 소리는 소돌목으로 작은 돼지목이란 지명의 유래를 가지고 있다.
왕등도
왕등도는 위도에 딸린섬으로 상왕등도와 하왕등도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절해의 고도다. 왕등도는 한말의 큰 유학자 간재 전우 선생이 국운의 기울어짐을 크게 탄식하며 도해지의에 의하여 1908년에 처음 이곳에 숨어살았던 곳이기도 하여 그 유적비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