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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길
전 미카엘 신부 귀천 20년 기념 특집
예수님의 보물, 청년 노동자들의 친구
전 미카엘 신부
한국 현대교회사에서 제가 그리는 두 선구자가 있습니다. 한 분은 지학순 다니엘 주교이고, 다른 한 분은 전 미카엘 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입니다. 오늘은 전 미카엘 신부님의 귀천 20년을 맞으면서, 그분이 가톨릭노동청년회JOC 지도신부로 활동하며 가톨릭노동청년들에게 해주셨던 말씀들을 모아서 전해 드립니다.
전 신부님의 미국명은 마이클 브랜스필스Michael Bransfield입니다. 1929년 8월에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나셨고, 1959년에 메리놀 외방전교회 사제가 되셨습니다. 그분이 메리놀에 입회하게 된 동기는 이렇습니다.
메리놀 성직자들이 중국 공산당에게 매맞고 고문당하는 사진을 보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메리놀회를 알게 되었다. 그 사진은 나의 삶과 그 목적에 관해 생각하도록 해주었다. 며칠 안 지나 그 수도회를 소개하는 내용이 실린 메리놀 회보를 보았고 호기심이 발동하여 더 자세한 안내문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보내온 책자를 받아 읽은 후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하느님께서 내가 입회하길 원하시는 곳은 바로 메리놀 가족이라는 것을(미카엘모임 편, 우리들의 친구 전 미카엘 신부, 23).
그분의 외할아버지 아돌프 밀러는 미국의 유명한 “밀러 맥주회사”의 창립자였습니다. 1948년에 예수회가 운영하는 이냐시오 대학에 입학했다가 노틀담 대학으로 편입하여 1951년에 이 대학의 상경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1953년에 돌연 메리놀회에 입회하였던 것입니다.
1959년에 사제가 된 전 신부는 곧바로 우리나라로 파견되셔서 김포본당과 화수동본당에서 사목하신 후에 강화본당에서 1965년 9월부터 69년 5월까지 사목하셨습니다. 강화 본당에서 사목하시는 동안 1967년 5월에 가노청을 발족시키면서 노동자들과 함께하였습니다. 이해 5월 14일, 가노청 회원을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한 사건, “섬유조합 강화 직할분회”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1968년 1월에 한국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환점을 열었다고 평가받는 강화도 심도직물 노동조합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전신부님은 이때 정부와 회사 관계자들에게 공산주의자로 비판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노동자들과 함께하면서 이들의 고난과 희망을 동반하게 됩니다. 상경대학을 졸업하였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노동법을 잘 알고 있던 그로서 당대의 노동 착취에 복음적으로 응답하는 과정에서 많은 가노청 회원과 노동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의 원천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그분은 1974년부터 1983년기에 가노청 전국지도신부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 시기의 활동을 통하여 가노청이 전국에서 활성화되면서 이땅의 노조의 민주화를 이루어 가는 과정에서 가노청 회원들이 자기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가십니다.
전 신부님은 그후 연안부두 성당 주임으로 사목하면서 신자들과 함께 매일을 순교자처럼 살아갔습니다. 전 신부님은 1989년에 회갑을 맞게 되는데, 잔치를 끝내고 몇 달이 지난 11월 14일에 간암으로 하느님의 영원한 잔치상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전 신부님이 귀천한 지 20년이 되는 해이니 20주기를 맞으면서 그분을 기억하는 조촐한 나눔 자리라도 마련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래 글을 보시면 전 신부님이 당시 “공돌이 공순이”라고 불리며 천대받던 노동청년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예수님의 영으로 그들이 스스로 서는 데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갖고 계셨는지 공감하실 것이라 확신합니다. 전 신부님께서 우리 주님의 품에서 영원한 평화를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전 신부님이 남기신 작품들을 아래에 소개합니다. 이외에 전신부님과 관련된 자료집으로 <전 미카엘 신부 추모집: 우리들의 친구 전(미카엘) 신부>가 있는데, 이것은 전 신부님을 기리는 미카엘모임이 준비하여 1997년에 발간하였습니다.
전 미카엘, 홍준오·방경복 그림, <구원의 빛> (서울: 가톨릭 출판사, 1975)
전 미카엘, 홍준오·방경복 그림, <광명에로 가는 길> 상, 하 (서울: 가톨 릭 출판사, 1976)
전 미카엘·방경복 그림, <노동자의 길잡이> (서울: 가톨릭 출판사, 1977)
전 미카엘, 임정남·임강희 그림, <한 아이와 두 어른이 만든 세상이야기> (서울: 새벽, 1979)
전 미카엘, 임정남·방경복 그림, <미사> (서울: 새벽, 1980)
전 미카엘, 전표열·방경복 그림, <기상 나팔 - 참세상 만들기> (서울: 성 바오로 출판사, 1990)
전 미카엘 신부 글모음
“내 사랑, 가톨릭노동청년들에게”
활동 52호 (1967.5)
「사마리아」인 1
전 미카엘 신부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우리 교재에 착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가 있습니다(루까 10장 25절-37절). 그런데 여러분이 이 비유를 직장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그 뒤에 숨어 있는 암시를 이해하는 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자료를 제공하여 드리고자 합니다.
그 학자가 예수님의 질문 즉 네 율법에 무어라고 기록되어 있느냐는 말에 “네 주 천주를 온전한 마음과 온전한 힘과 뜻으로 사랑하고 네게 가까운 자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라고 적혀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되받아서 예수님은 “네 말이 옳다. 그대로 실행하면 곧 살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했드라면 얼마나 좋았으련만 그 학자는 쓸데없는 토론으로 예수님을 함정으로 빠트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실행하는 것보다 계속해서 이론을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학자가 「내게 가까운 자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전지하신 예수님은 벌써 그 학자의 마음을 꿰뚫고, 도리어 학자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동문서답을 했습니다. 즉 이 비유를 설명한 다음 학자의 질문에 대답 대신 다시 질문으로 응수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학자나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웃이 누구인가 묻지 않고 강도맞은 사람의 이웃이 누구인가 물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예수님이 왜 얼토당토하지 않는 이 질문을 했는지 느낄 수 있다면 예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선생님이신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나에게 가까운 자가 누구인가? 아는 것보다 무엇을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에게 가까운 자가 되도록 노력했는지 안했는지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학자는 자기 이웃에 대해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매맞은 사람에 대해서 생각하셨습니다.
유대인이나 우리가 우리에게 가까운 자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 비유를 통해서 내게 가까운 자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지만 예수님께서 강조한 것은 딴곳에 있습니다.
학자처럼 어떤 사람이 내게 가까운 자인가? 아닌가?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보다도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누구를 막론하고 상대방의 가까운 사람처럼 상대방에게 착한 행동을 했는가? 안했는가? 가 문제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강조한 것은 따지는 것이 아니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상대방의 이웃이 되는 길은 내가 상대방을 행동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JOC의 신조는 관찰, 판단, 실천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가 만일 관찰, 판단에 그친다면 그 학자와 다른 점이 어디 있겠습니까? 모름지기 우리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실행해야 합니다. 이론을 따지는 사람들이 서울 대학교의 박사가 될 자격이 있을는지 모르지만 착한 사마리아인의 학교를 졸업할려고 한다면 실천에 중점을 두어야 합니다. 즉 아름다운 말보다 아름다운 행동을 오늘날 우리 교회나 사회에서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백 마디의 말보다도 한 가지라도 실천할 수 있는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것은 첫째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애들이 선생님의 총애를 받고 사회에서는 지위가 높고 돈이 많은 사람들이 존경을 받지만 우리 교회에서는 학자와 같이 학식이 없고 제관장처럼 지위가 높지 않을지라도 예수님의 총애를 받은 사마리아인처럼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 즉 강도 맞은 가까운 자가 되기 위해서 수고와 헌신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우리 JOC에서 예수님에게 제일 가까운 자는 누구입니까? 지도신부입니까? 혹은 임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평회원입니까? 숙고해봅시다.
둘째, 불쌍한 사람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것은 우리 인간의 상정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예수님이 바라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될 수 있습니까? 혹은 기구하는 것으로 충분합니까? 제관장과 시종이 이와같이 기구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매맞고 넘어져 있던 사람이 자기 아들이거나 아버지였더라면 과연 그렇게 외면하고 지나갈 수 있었을까?
활동 53호 (1967.6)
성경연구
「사마리아」인 2
전 미카엘 신부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는 곳마다 자기 가족의 한사람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일 사마리아인이 “이 생각하는 것”에서 그쳤드라면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없었을 건데 한걸음 더 나아가서 맹목적으로 이 생각을 실천에 옮겨서 돌봐주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이 착한 사마리아인인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을려고 한다면 우리가 불쌍한 사람을 보았을 때 나의 사랑과 힘을 받을만한 사람인가 아닌가 따져본다면 과연 예수님의 뜻을 채워 드리는 것이 됩니까? 숙고해봅시다.
셋째, 학자와 착한 사마리아인의 마음과 그들의 이웃에 대한 태도를 견주어 봅시다. 학자는 법규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최소한의 자기의 노력과 희생을 바치려고 했습니다. 이렇게 의무적으로 대죄를 범치 않기 위해서 남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은 그런 사랑을 받고 싶습니까? 예컨데 천주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미사 시작 때부터 오지 않고 일부러 늦게 오고 또 일찍 가는 사람들은 미사참례 했기 때문에 대죄를 범하지 않았는지 몰라도 천주님을 사랑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누구나 알다싶이 최소한의 노력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보려는 장사꾼의 마음태도가 바로 학자의 태도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은 넘어진 사람이 자기들을 적대시했던 유대인이라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이는 마치 공장 공원 한 사람이 서울 가는 길에서 공장의 착취와 학대로 못살게 굴던 사장이 길가에 넘어져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착한 사마리아인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장보러가는 길이었기 때문에 굉장히 바뻤습니다만 서슴지 않고 넘어진 사람들을 돌봐주었습니다. 이것은 그때 누가 보기 때문에 눈이 무서워서 돌봐준 것이 아니고 넘어져 있던 사람이 돌봐 달라고 애원해서 돌봐준 것도 아닙니다. 그때 넘어져 있던 사람은 실신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돌봐달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착한 사마리아인도 본당 신부나 회장이나 순경한테 그 사람을 인계하지 않고 자기가 직접 자기 주머니 돈을 털어가면서 완쾌될 때까지 끝까지 돌봐 주었습니다. 더군다나 감사하다는 말씀 하나 기대하지 않고 아무 보수도 없이 자기의 하루 계획을 다 깨트려 가면서까지 봐주었습니다. 내가 남을 사랑할 때는 무슨 태도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학자처럼! 혹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넷째,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시기를 「너도 가서 이와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너」는 누구입니까? 물론 영세를 받은 우리들입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봐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꼭 사마리아인처럼 해야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님과 마리아 외에는 천당에 있는 분이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이구! 그럼 천당이란 쓸쓸한 사막이란 말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계속)
활동 54호 (1967.7)
성경연구
「사마리아」인 <끝>
전 미카엘 신부
길가에 넘어져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입니다. 그 사람은 강도한테 맞고 쓸어져 있었지만 우리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사랑을 베풀어 주지 못했기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서 넘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착한 사마리아인이 길에 쓸어져 있는 사람을 동정하여 상처에 기름을 바르고 포도주를 먹여 준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상처투성인 우리 마음을 성유로 발라 주시고 사랑이 없는 우리 마음을 북돋아 주기 위해서 성체를 먹여주고 있습니다. 마치 어린 애들이 엄마한테서 걸음마를 배울 때처럼 수백번 넘어질 지라도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고 따뜻한 손길을 느끼면서 절망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서 조금씩 조금씩 어머님의 도움 밑에서 익숙하게 걸어갈 수 있듯이 우리도 자모이신 성교회의 칠 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고 그 밑에서 용기와 힘을 얻음으로써 수백 번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조금씩 조금씩 착한 사마리아인을 따라가도록 낙심하지 않고 노력함으로써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이 자비가 없었더라면 도적한테서 얻어맞고 쓰러져 있던 사람이 일어나서 걸어갈 수 없듯이 우리들도 예수님으로부터 자비를 얻지 못한다면 어떻게 일어나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에 걸어 갈 수 있습니까? 자기가 지금 절망과 실망으로 포기상태에 있는가 혹은 사마리아인을 향하여 조금 조금씩 걸어가고 있는가 관찰해 봅시다.
흑인들의 기구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여, 우리가 마땅히 되어야 할 사람이 되지 못하고 우리가 능히 될 수 잇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더구나 당신이 바라는 사람이 되지도 못함을 알았지만 주님의 은혜로 어제보다 더 나은 당신의 자녀가 되어 가는데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도 위의 기구를 하는 흑인들처럼 실망하지 않고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어 가도록 거기에 필요한 힘과 위로의 자모이신 성교회에 칠 성사를 특히 성체성사를 통하여 흡족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미사와 기구를 착한 사마리아인이 선행과 어떻게 결부시킬 수 있을까?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대할 때 착한 사마리아인이 따뜻하게 대해 준다면 쓸어져 있는 사람의 이웃이 되고 반면에 제관장처럼 외면한다면 쓸어져 있는 사람에게 낯선 사람이 됩니다. 문제는 아무리 과학문명이 발달될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서로 낯선 사람이 된다면 그 결과로 오는 것은 고독과 허탈감뿐이며 이 세상이 어름 덩어리로 싸늘해질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완전히 이해하려고 한다면 앞으로 더 깊은 연구를 해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은 모든 인간들이 제일 갈망하는 문제 즉,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는 선생님이시고 학자는 참다운 진리와 영생을 찾아 헤매는 인간들의 대표자입니다. 그 비유에서 나오는 매맞은 사람은 물심양면으로 도움이 필요한 인간을 상징하고 강도들은 불쌍한 인간들이 일어나서 걷지 못하게 하는 개인적 내지는 사회적인 악을 상징합니다. 개인적인 악은 미색, 질투, 시기 같은 것이고 사회적인 악은 무지, 질병, 가난함, 착취 등입니다. 쓰러져있는 사람이 강도한테서 매맞은 것처럼 우리들은 앞서 말한 악한테서 매를 맞고 있습니다. 제관장과 시종은 그릇된 교회로 상징한다. 그 사람들이 불쌍한 사람들을 외면하듯이 우리들도 사회 나가서 개인악과 사회악한테서 매맞고 있는 불쌍한 인류를 외면한다면 제관장이나 시종과 똑같습니다. 교회에서 인간에게 무관심한다면 예수님에게 충성하는 교회라 볼 수 있습니까? 착한 사마리아인은 첫째, 예수님이시고 제2의 그리스도인 우리입니다. 혹은 영생을 얻고 싶어하는 모든 사람들입니다. 셋째, 불쌍한 인류에게 용기와 함께 위로를 주는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입니다. 여인숙은 천당을 주인은 천주님을 상징하고 당나귀는 예수님에 뜻에 맞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불쌍한 인간들을 데리고 천당인 여인숙까지 데려다 주는 책임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나귀는 길에서 떨어지지 않게 도와주고 있는 사람은 우리입니다. 끝으로, “너도 가서 이와같이 하라”에서 너는 누구입니까? 다름 아닌 영생을 얻고 싶어하는 신자를 상징합니다.
(강화본당주임)
활동 58 (1967.11)
急變하는 社會에 있어서 敎會의 態度
- 꼬리가 개를 흔든다 -
田 미카엘 神父
이 글은 지난 7월 강화도에서 개최된 전국 지도 신부 연구회 때 이 제목에 대한 주제 강연을 한 바 있는데
이 강연 중에서 초한 것임을 밝혀둔다.(편집자)
내가 한국에 오기 전에 한국은 하느님을 모르는 나라라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딴판이라는 것을 나온 뒤에 알았다. 단군 신화나 애국가에까지 天國思想이 많이 들어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게 不足한 것은 하느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천주의 아들들인 인간의 고통과 비참한 생활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특히 노동자들의 생활에 무관심하다. 하느님은 병신도 아니요 앉은뱅이도 아닌데, 왜 이처럼 비참한 우리를 돌보아 주지 않느냐는 불평이 일반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있다는 것은 신자들은 알아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한 책임은 교회에 있다.
主의 뜨거운 사랑을 교회의 사업과 행동을 통해서 그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는 있는 것이다. 질병 무지 빈곤에 외면하지 말라. 생활에 시달이고 있는 사람들에게 책 포스터 강론 등만으로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千9백 년 전에 강생하신 예수님이 그때 무엇을 했는가는 문제도 되지 않는다. 그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행동으로 알려 주라.
사회는 지나간 역사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 타개의 방법인 것이다.
오늘날 세계는 기계가 지배하고 있다. 기계의 혜택은 발명가가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발명할 수 있는 지혜는 天主님한테서 받은 것이므로 기계의 惠澤은 결국 天主께서 우리에게 준 것이다. 천주님이 준 惠澤을 소수인만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전 인류가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오늘날 기업주들은 기계의 惠澤을 인간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기계를 위하여 인간을 사용하고 있으며 여기서 나오는 이익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고 있다. 개가 꼬리를 흔드는 것은 당연한데 꼬리가 개를 흔들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사회에 대해서 무관심하다. 교회는 비신자들에게 희망보다 실망을 더 주고 있다. 교회가 현실에 무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회가 북한의 침묵 교회와 무엇이 다른가? 工人들은 매일 기계 앞에 서 있다. 그들의 목적은 좋은 상품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호구지책을 위해서인 것이다.
그들에게 돌아간 것은 실망과 모멸과 학대뿐이다. 술과 방탕으로 그들은 이러한 피해의식을 탈피하려 한다. 이들에게 天主님이 그들을 사랑한다는 복음은 농담이나 모순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기업주의 사고 방식과 노동 조건을 바꾸어 놓기 전에는 어떤 말로도 그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줄 방법이 없다.
옛날 서구 사회에 교회 하나를 짓는데 5백 년 걸린 성당이 있다. 그러나 지금 그곳에는 교인들이 없다. 만일 교회의 건물을 지을 돈과 정열을 사람을 구하는데 썼던들 오늘날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었으므로 모두가 예수님인 것이다. 우선 헐벗고 굶주리고 학대받은 예수님을 도와야 한다. 감실 안에 계시는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도 들어 있다.
그런데 감실 속의 예수님은 흠숭하면서 인간의 가슴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은 학대하는가? 노동자들 속에 들어 있는 예수님도 같은 예수님인데 그를 착취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하고 인권을 유린해도 왜 방관하는가?
성경에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온다. 강도가 상인을 상하게 하고 도망쳤다. 그 길을 지나가던 사람들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도 그대로 무관심하게 지나쳤다. 그들 역시 결과적으로 강도와 공범자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겠다.
옆집에 미친 자가 있어 집에 불을 질렀다고 하자. 그 옆집 사람은 마침 소화기 10개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불난 집에 소화기 하나 빌려주지 않았다고 생각해 보라. 불을 끌 수 있는 힘이 있으나 그 힘을 발휘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불을 지른 자와 공범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성경에 이런 얘기가 있다. 어느 날 어떤 나환자가 예수를 찾아가 빌기를 '예수님이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해 줄 수 있나이다.'라고 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예수님을 지금까지 성경에는 이에 예수 '민망히 여기사' 그를 깨끗케 해 주었다라고 번역되어 왔으나 성격 원본에는 예수께서 '물론 그렇게 해 주겠다.'고 하면서 화를 내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은 당시 나환자라 해서 사회에서 유리시키고 같은 학대를 다한 당시 인간들에게 화를 내신 것이다. 예수님은 화를 내면서 마귀(당시의 병에 대한 개념)인 나병을 내쫓은 것이다. 즉 악을 증오했기 때문에 화를 내신 것이다. 악을 볼 때는 악을 쳐부수라. 예수님이 행한 대로 되풀이해서 행동하라.
(필자 강화 본당)
노동청년 0004 (19??.4)
믿음과 사랑과 희망인
전국지도신부 전 미카엘
자기 현실 속에서 그 현실이 요구하는 정당한 행동을 행하지 않는다면 성실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어떤 수사가 수단만을 입고 있다고 해서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니며, 시멘트와 벽돌만으로 교회가 지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수사의 정신과 교회를 짓는 마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리고 그 정신과 마음을 자기 환경 속에서 어떻게 행동으로 표현하느냐가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뺏지를 달고 있다고 해서 전부 지오쎄 회원이 되는 것도 아니다. 이 사회는 훌륭한 수사나 교회, 지오쎄 회원도 많지만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사람들도 많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빛좋은 개살구를 구별해내는 방법은 아무리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 생각을 행동으로 표현하느냐 아니면 침묵을 지키고 있느냐에 있다. 필자는 최근 미국에 가서 3개월을 지내다가 돌아왔다. 그동안 내가 느낀 점은 미국사람이나 한국사람이나 한결같이 진실한 크리스챤은 미사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라고만 믿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크리스챤 가정의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미사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참예하도록 권하고, 만약 미사에 하루라도 빠지면 무슨 큰 죄인이나 된 듯이 취급하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였다. 물론 미사도 중요하지만 미사에 앞선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필자는 이 기회에 강조하고 싶다. 미사는 일종의 믿음의 표현이며 형식에 불과하다. 믿음이 없는 형식만의 미사는 이가 아플 때 우리가 치과에 찾아가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진실한 크리스챤으로서의 지오쎄 회원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과 사랑과 희망의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다만 정신속에 들어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현실적 가치가 없다. 이 믿음과 사랑과 희망은 냉장고에 생선을 보관하듯이 머리속에 보관만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와 나의 이웃, 그리고 우리의 사회 속에서 구체적으로 행동하라고 있는 것이다. 믿음으로 확신하고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행동지침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은 행동의 확신이다. 우리는 이 행동의 확신을 예수님으로부터 구체적으로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인류에 대해서 두터운 사랑을 갖고 있다고 누구나 믿고 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추상적인 믿음이다. 참다운 믿음은 예수님이 인류 가운데 바로 나 자신에게 두터운 사랑을 갖고 있다는 믿음이 진짜 믿음이다. 우리 인간은 우리 육체를 덮고 있는 피부 밑에 질투와 시기, 욕심과 성욕, 이기와 게으름이 끓고 있는 죄인 들이다. 우리 스스로를 성찰해 볼 때 자기 자신에 대해서 혐오감을 느낄 정도로 우리는 더러운 욕망에 사로잡혀 살고 있다. 이 더러운 욕망의 노예가 된 우리, 그 중에서도 바로 나 자신을 예수님은 깊이 사랑하고 계신다. 그리고 수많은 죄인들의 개개인을 위해서 예수님은 기꺼이 희생을 바쳤다. 이 희생의 정신을 우리는 깊은 믿음으로써 자기 자신 속에서 확신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들의 행동은 예수님의 희생에 배은망덕하지 않고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듯이, 나도 나의 이웃을 두텁게 사랑할 수 있으며 어떠한 고통이 따르더라도 믿음으로써 예수님의 원하는 정의평화의 인간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 이와같은 행동의 실천이 바로 예수님의 가장 친한 동무가 되는 길이다. 미국 노동자의 어머니이신 마더 존스는 죽은 사람을 위해선 기도하되 산 사람을 위해선 행동하자고 강조했다. 여기에서 죽은 사람은 다만 공동묘지에 묻혀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해서 무관심한 방관자, 이기주의자, 기회주의자, 자만과 욕망에 눈이 어두운 사람들을 모두 포함한다. 우리는 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행동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다면 우리 또한 죽은 자가 된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준 믿음의 실천력을 통해서 나의 착한 이웃들을 위해 행동해야 한다. 우리가 미사에 참여하는 것은 아무 죄도 없이 남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고 그 행동을 배우려는 정신에서이다. 불고기를 먹으면 개인에게 힘이 생기듯이 미사를 통해서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헌신할 수 있는 힘을 얻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을 따르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에서 반드시 고통과 억압이 뒤따른다. 이 고통과 억압 속에서 예수님은 승리자이며, 그를 따르는 우리도 또한 승리자라는 희망을 항상 잃지 않고 있어야 한다. 예수님은 착한 분이셨다. 그분은 아무 과오 없이 현실적으로 인간세상에서 처형당했다. 오늘날까지도 인간세상에선 예수님의 희생과 같이 착한 사람은 낙오자가 되기 마련이라는 패배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승리자가 되려면 거짓말 잘하고 남을 이용하고 사악해야 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런 믿음은 아무 가치 없는 자기 합리화 내지는 자기 위선에 불과하다. 예수님은 숨김이 없었고 자기 자신을 전부 내보였다. 그리고 인간세상의 사악함으로 인해 처형됐지만 그 분은 영원한 승리자가 되었다. 우리는 이 비극적인 승리를 통해서 나 자신은 물론 우리 이웃이 해방될 수 있다는 튼튼한 희망을 가져야 한다. 현실적으로는 패배했다 하더라도 인간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떳떳하게 살았다는 확신이 살아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믿음과 사랑과 희망을 버리지 않고 행동한다면 어떤 고난속에서도 기쁨과 환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기쁨과 환희는 바로 우리 인간들의 궁극적인 삶의 보람이며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들이 받는 영원한 보답이다. 끝으로 필자는 성인 이스턴의 말을 인용하므로써 우리가 오늘날 무엇을 위해 행동해야 할 것인가를 다같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행동하라. 그리고 아직까지 행동할 수 없었던 것을 행동할 수 있도록 기도하라.”
노동청년 7504 (75호, 1975.4)
종교의 적이 바로 종교다
전국지도신부 전 미카엘
루까복음은 가난한 이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이다. 그외 다른 복음 및 신구약 모두가 마찬가지로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구약의 모든 위대한 예언자들은 사회정의의 문제 및 가난한 이들의 권리 보호에 깊은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성서적 메시지는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에 있어 충분히 이해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케네스 케니스톤(Kenneth Keniston)은 '개혁은 새로운 사상이 급작스럽게 발전하는 때문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가 옛 사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하게 됨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나는 많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보다 잘 이해하고 또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정신과 그리스도의 가치관 그리고 그의 소명을 반영하는 기관을 세우기 위해 교회가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야 하지 않겠느냐 하고 기대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의 리더쉽은 그리스도의 가치관이 무엇이며 또 이러한 가치관들이 교회의 기관 및 본당 그리고 신자들의 개인생활에 반영되고 있는지 여부를 냉정하고 비감정적인 언어로서 논의하는 동시에 신자들 간에 대화를 증진시킬 수 있어야 한다.
교회의 리더쉽은 그 자체는 그리스도의 가치관에 복종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일반신자들의 평범한 복종관념을 초월하는 것이기도 하다.
가톨릭신자들은 반드시 신부나 주교에 복종하여야 할 것이지만 먼저 그리스도께 복종하여야 하며 이는 인간이 100% 그리스도를 위해 존재하며 50% 교회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의 생각(옳던 그르던)이기도하다.
어떻게 보면 크리스챤으로서 지녀야 할 또는 자기 자신을 신자로 부르기를 그만 두어야 할 일련의 필연적인 가치관에 입각한 핵심적인 서약(Committment)이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핵심적 서약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대화를 필요로 하며 또 일단 그러한 대화가 확립되면 그 가치관에 따를 수 없는 자는 그 구조를 떠나야 하거나 또 그렇게 하도록 요청을 받게 되는 것이다.
조직이 어떻게 그 구성원의 생활에 대한 고려의 책임감이 없이 존재할 수 있으며 또 그리스도의 복음의 가치관이 신자들의 생활에 반영되고 있는지 여부 및 책임성을 논함에 있어 신부나 성직자 그리고 주교보다 책임이 더한 사람이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침에 있어서 성문제 및 알콜중독문제 그리고 개인적 재정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설명이 있으나 시장이나 공장 재산의 운용에 관해서는 설명이 부족한 듯하다.
목자는 반드시 그의 장상은 물론 그의 양떼들에게 자신의 목자직에 대한 전말서를 제출하여야 할 것이며 또 이것은 공심판 때가 아니라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포기해야 하듯 교회도 본당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톨릭신자들은 이것이 복음의 가치관이라는 점에 동의하는가? 그렇다면 가톨릭 신자들은 교회가 이와 같이 행하고 있다고 느끼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에 대해 교회의 리더쉽이 행하고 있는 바는 무엇인가?
세상은 귀머거리에게 녹음기를 팔 수 있을 정도로 똑똑하고 지성적인 말장사꾼으로 꽉 차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언행일치의 행동 장사꾼은 북극지방에 야자수가 있을 리 없듯이 희귀한 것이다.
예수께서 루까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세 사람을 칭찬하셨다.
가) 형제애의 의미를 논하지 않는 착한 사마리아인은 설교집을 남겨 준 것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형제로서 행동한 것이다.
나) 마르타와는 달리 앉아 예수님의 말씀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마리아는 세상의 온갖 근심이나 걱정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아니하였다.
다) 자케오는 모든 소유물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었으며 그때 예수께서 그의 집에 오셔서 그와 함께 평화의 빵을 나누셨다.
라)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의 마지막 푼전을 다 주었던 과부.
또한 예수께서는 몇몇 사람들을 물리치셨다.
가) 오직 나의 곡식, 나의 창고, 나의 재물, 나의 위안만에 관심을 가진 어리석은 부자.
나) 나자로 형제를 배척한 부자
다) 자기의 재산을 포기해야 할 생각으로 인해 슬픔에 차 있는 부자청년.
라) 지식과 말로는 풍요로우면서도 실제 행동이 없는 법관들과 바리새인. 이러한 모든 종류의 사람들이 아직도 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으며 오직 그들 중의 몇몇이 그리스도의 가치관에 충실한 것이다.
교회의 리더쉽은 어떻게 하면 그리고 어떤 종류의 교회생활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건설할 것이며 또 어떤 형태의 교회생활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파괴할 것인가를 지적해 주어야 한다.
종교인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몰고 있으며 그들은 십자가 사형 2,00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그와 같은 짓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의 가장 큰 적은 정확히 말해서 냉담하고 설익은 종교란 그 자체인 것이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의 적으로써 죽음을 당하셨던 것이다.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어떻게 하면 종교를 향상시킬 수 있겠는가는 물론 또 하느님 그 자신에 대해서까지도 그들에게 말하여 주지 못하게 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악한 태도의 악한 신앙의 포로들이었다. 그들은 율법과 규범이 그들의 선입견 및 편견과 일치되는 한 형식적 도덕에 충실한 이들이요. 율법에의 추종자들이었다.
그들은 아주 영리하고 지식 있는 이들이어서 하느님 당신 자신까지도 그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 사회에도 이의 유사한 오만한 태도가 반영되고 있다. 정부 지도자들은 그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리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한때 한목수의 마음과 행동을 통해 말씀하셨던 바와 똑같이 서로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여 본다면 그들은 결코 하느님편의 오만을 결코 용서치 아니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권위가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된 것임을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권위를 발휘할 것인가 독자적으로 결정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이들의 오만에 대해 교회는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교회는 싸워야 되는가? 또는 타조처럼 제 머리를 모래 속에 파묻어야 하는가?
이러한 것들이 가난한 이들이 그들의 지도자에게 묻는 질문이다. 그들은 교회가 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하여 싸우는 것을 보고 용기를 찾고 있다.
가난한 이들은 말이나 생각을 능란하게 구사하지는 못할망정 실제 행동에 있어서는 결코 어리석지 아니하다. 그들은 누가 그들의 반대편에 서 있으며 또 하느님께서 그들의 편에서 계시다는 점을 알고 있다.
현대의 당면과제는 교회가 그들 안에 존재하고 있는가? 또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교회의 존재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뜻한다.
노동청년 7604 (81호, 1976.4)
상호간의 이해와 협조
전 미카엘 (전국지도신부)
회원 여러분! 어느덧 만물이 약동하는 봄을 맞이하였습니다. 아울러 투사 여러분들도 새해에 계획한 것을 실천에 옮길 일들이 많으리라 믿습니다. 얼마 전에 지방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흐뭇하게 느낀 일들이 있었습니다. 모든 나무 가지에 새싹이 돋아나고 자연이 소생하듯이, 그곳 지방 투사들의 모습과 일상생활에서 JOC 사명감에 불타고 있음을 직접 보고 느끼게 되어서 무엇보다도 기뻤습니다. “삶이 지루한 겨울동안 죽음과 맞싸워 이제사 이겼구나. 보라! 자연이 약동함은 삶이 죽음보다 더 보람이 큼을 의식케 하지 않는가. 이와 같이 우리 JOC 투사들도 만난을 이겨내고 돋아난 새싹같이 온갖 저해요소를 제거하고 보다 나은 JOC의 발전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구나!” 문득 이 같은 생각을 하면서 연륜이 거듭할수록 JOC가 거목(巨木)으로 성장해 갈 것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나 멋대로 자란 거목보다 잘 가꾸어진 거목일수록 값어치가 더 나가듯이, 우리 JOC도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시정하면서 앞으로 매진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알찬 JOC를 이룩하는데 있어서 제가 느끼는 아쉬운 점이 있다면 회원 상호간의 이해와 협조의 결여인 것 같습니다. 초창기 가톨릭 교회의 교우들을 보고 외교인들이 “그들은 우리 외교인과 달리 교인들끼리 서로 상대방을 아껴주고 두터운 사랑을 베풀어주는 명수꾼들이구나”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현재의 외교인들이 우리 JOC의 형제애를 보고 뭐라고 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을 돌이켜보고 반성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특히 JOC 회원들은 한데 뭉쳐서 사회의 악과 부조리에 저항하면서 개인과 사회를 정화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그러함에도 본연의 자세를 소홀히 하고 회원 간의 시시비비에만 급급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에 이바지해야 할 JOC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때로는 자기 의견을 주장하고 참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대결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일수록 상호간의 형제애에 금이 가지 않도록 감정을 규제하고 어디까지나 이성에 호소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서로 서로 사랑함으로써 나의 제자임을 알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활동에 임할 때는 감정·남녀구별·연령차이·지방색 등을 모두 초월하여 냉정한 이성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잘 해결한다면 설상 견해차이로 격론이 있었다 하더라도 남이 보기에 크리스챤 행동에 허물이 없는 것입니다. 한 예화를 들겠습니다. 분도회 창시자 분도 성인께서는 다음과 같이 수도회를 운영하셨다고 합니다. 수도회에 어떤 문제가 야기되었을 때 해결책으로 반드시 말째 수도자와 제일 낮은 일을 맡은 수도자를 찾아가서 그들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였다고 합니다. 간혹 나이 많고 지위가 높은 수도자들이 항의하면, 분도 성인께서는 “여러분, 하느님은 절대적인 자유를 가기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의견을 우리에게 발표하실 때 어느 누구를 통하여 전달해 주시는지 우리는 전연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전달받기 위해서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수도자의 의견을 신중하게 듣고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는다면 하느님의 의견을 무시하고 그의 뜻에 위배될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갈파하신 적이 있습니다. 재삼 음미해볼 명언이라 생각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영세받은 신자들은 모두가 성신의 영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 영세받은 모든 신자들이 성신이 거쳐하는 하느님의 궁전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JOC에서 회합을 할 때에도 모두가 같은 하느님의 시민이므로 서로가 상대방을 존중하면서 회의를 진행해야 할 것입니다. 성당에 들어가면 하느님의 집이기 때문에 경건한 자세를 가지듯이 영세받은 신자들도 하느님이 거처하고 계신 집이기 때문에 성당 감실 앞에서 조배들일 때와 같이 회의를 할 때 정중한 마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여야 합니다.
물론 인간의 힘으로 힘겨운 일이겠으나 가급적이면 크리스찬 행동에 어긋나지 않을 때 회원간의 형제애는 더욱 두터워질 것이요 JOC는 나날이 균형잡힌 거목으로 성장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JOC 회원들이여!
회원 상호간에 이해와 협조로 단결합시다.
“당신들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합하여 청하면 무슨 일이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들어주실 것입니다. 단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마태오 18,19-20).
노동청년 7805 (1978.5)
JOC 회원으로서의 사명
전 미카엘 신부
(마태오 복음 25장 14-30절을 봅시다)
그 다음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와서 “주인님, 두 달란트를 저에게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두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그에게도 “잘 하였다. 너는 과연 착하고 충성스런 종이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을 다 하였으니 이제 내가 큰일을 너에게 맡기겠다. 자,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하고 말하였다.
그런데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와서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는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는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그 돈이 그대로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주인은 그 종에게 호통을 쳤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은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을 알고 있었다면, 내 돈을 돈 쓸 사람에게 꾸어 주었다가 내가 돌아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 여봐라, 저 자에게서 한 달란트마저 빼앗아 다른 사람에게 주어라.”
우리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이 세상의 창조사업과 인류의 사업에 하느님과 더불어 동반자가 될 자격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명을 지닌 우리들이 주어진 그 사업에 동반자로서 참여치 않고 방관한다면 그 까닭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성경 말씀의 내용과 같이 주인에게 두 달란트를 맡겨 받은 종은 그 돈을 잘 활용하여 두 배로 늘려서 돈을 주었고, 한 달란트를 맡겨 받은 종은 그 돈을 그대로 돌려주었습니다. 먼저 종은 자기의 재능을 활용하고 노력하였으나, 나중 종은 주인을 무서워하고, 두려운 나머지 열등의식에 사로 잡혀서 땅속에 그냥 묻어두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무서워서 주위의 사람들을 도와주거나 격려하지 않고 그대로 방관한다면 성경 말씀과 같이 자신의 재능을 숨겨두게 됩니다.
그럴 경우 우유부단한 행동으로 나약한 자가 되고 현재의 직장에서 그 지위에 머무르게 될 것입니다.
양봉, 양육, 양계, 양식, 양성 등의 단어들을 음미해 보더라도 자기 자신을 위한 생계의 길이기도 하며 아울러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지오쎄의 목적은 자신뿐 아니라 남을 양성시켜 주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왜 남을 양성시켜야만 하느냐? 고 반문할 소극적인 회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자신에게만 부여된 특권인 양 하느님의 동반자가 되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위배되는 이기적인 행위입니다.
여기에서 우리 지오쎄 회원들이 잘못된 인식으로 오해를 갖고 있다면 시정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본의 아니게 부정과 부조리 속에서 불우한 나날을 허덕이며 살고 있는 불쌍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와 같은 폐악을 시정하는 데는 혼자의 힘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하느님께서 다시 재림하셔야만 시정될 일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고 성화키 위해 묵주신공, 기도만 열심히 드리고, 각 액션 단체에 입회하거나, 사회를 등지고 사회의 도피처로 교회를 선택했다면 그릇된 사고 방식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 사회를 정화시키기는커녕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사회악이 만연되어 인간들을 잘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단체나 폐습들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업을 저해시키고 우리들로 하여금 하느님과 더불어 동반자로서의 가능성을 발휘치 못하게 하는 여러 가지 장애요소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장애요소를 제거시키는 일은 무엇보다도 사회악을 일소시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지오쎄 회원의 사명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신은 물론 남을 도와주는데 협력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회악과 인간의 참된 삶을 저해하는 장애를 물리칠 가능성을 받았으므로 그 의무를 이행할 사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실현을 못한다면 되겠습니까?
지오쎄 회원들에도 많은 불만이 있을 것입니다. 학력의 부족, 가난함, 비정상적인 노조, 여러 가지 억눌림 등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면서 마치 책임은 하느님께 있다고 그 탓을 전가시킨다면 되겠습니까?
그럴수록 자신에게 주어진 그 가능성을 십분 발휘하여 그 타개책을 강구해야 할 것입니다.
“언 땅에는 아무리 좋은 씨앗을 뿌려도 잘 성장할 수 없다.”는 자연법에 대한 격언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 씨앗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속에 아무리 좋은 씨앗을 뿌렸다 하더라도 자신도 중요하지만 이웃의 따뜻한 온정과 격려가 있어야만 자신을 개발하는 데 용이한 것입니다. 주인에게 두 달란트를 맡겨 받았던 종은 남의 온정을 받아서 두 배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우리 지오쎄 회원들도 그 가능성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도 남의 온정을 못 받은 성경의 낙오자처럼 현 직장 위치에 급급하면서 자신을 저해시키고 있다면 되겠습니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창조력, 상상력, 재능을 개발하지 않고 보관한다면 지상 천국은 어떻게 이룩할 수 있으며 근로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어떻게 개발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악인들이 이기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그것은 의인들이 서로 간에 양성을 시키지 않고 무관심한 마음 자세를 갖기만 하다면 대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오쎄 회원들은 젊은이들이 때문에 서로 양성할 길이 힘겹더라도 거듭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자칫하면 경쟁심, 공명심, 입신영달에 강한 나머지 자아도취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25년의 신탁 예금을 들고 25년이 지난 후에 그 은행으로 돈을 찾으러 갔을 때 그 곳 은행장이 이자 없이 원금만 그대로 보관했다가 준다면 얼마나 분노하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지오쎄 회원들도 하느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창조력, 상상력, 재능을 하느님께로 상환할 때 신탁 예금과 같이 많은 이자를 덧붙여서 바칩시다.
만약에 죽는 순간 사심판을 받을 때 그 주어진 것을 그대로 보관하였다가 그대로 반환한다면 체면이 서겠습니까?
지오쎄 회원 여러분,
하느님의 사도로서, 동반자로서 우리의 의무를 잘 이행합시다.
노동청년 7807 (1978.7)
죄의식과 부끄러움의 노예
전국 지도신부 전 미카엘
죄를 범한 한 여인을 두고 예수님은 “당신들 중에 죄없는 사람이 있으면 이 여인을 돌로 치시오.” 하고 말씀했다. 누구 한사람 그 여인에게 벌 주려는 사람이 나설 수 없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잘 아는 성경의 가르침이다. 이 세상에 죄가 전혀 없는 사람은 있지 않다. 조금씩이라도 죄를 짓게 마련이다. 인간은 본래 원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모든 이들의 죄를 대신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했다. 그러한 예수님은 여기저기에 살아 계시면서 마음을 잘못 쓰는 사람과 위선자, 이중 인간들이 죄를 거듭해서 범해도 따뜻한 정과 사랑을 베풀고 있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문제는 종교가 엄격한 의무요 벅찬 사명이라는 그릇된 생각에서 벗어나는데 있다. 보다 훌륭한 인간, 뜻있는 인간,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 종교다. 교회, 계율, 법령, 습관에만 얽매여 마음속 귀양살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오늘날 그것이 참된 종교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부끄러움, 죄의식, 그리고 양심의 가책에 완전히 사로잡힌 그러한 쇠사슬에 묶인 상태의 신앙인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 가노청 회원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예컨데 6계명 지키는 데에만 정신이 쏠려 가령 정결을 상실할 때 “어떻게 교회에 나갈 수 있느냐?” 하는 부끄러움과 “어떻게 미사에 참례할 수 있느냐?” 하는 자책감으로 체념 상태에 빠진 나머지, “계속해서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차라리 교회에 나가지 않는 편이 낫다.”고 하는 생각을 품고, 결국 하느님과 멀어지고 만다. 이런 예는 얼마든지 있다. 유교적인 전통 사상의 지나친 책임감만 앞세워 영적인 열등감에 사로잡히기 일쑤다. 그것은 그릇된 생각이다. 하느님은 심판만 하시는 엄숙한 분으로 왕림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벗”으로 이 땅에 사랑과 용서를 베풀고자 오신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지나친 경외감으로 너무 높은 자리에만 계신 것이라 강조하다 보면 그런 잘못이 저질러진다. 사회에 봉사하고, 남을 사랑하는 일보다 법과 규칙, 교리와 예절 등을 더욱 중요시하기 때문에 작은 죄의식으로써 큰 일을 그르치고는 한다. 물론, 자신의 몸가짐도 중요하지만, 이웃을 사랑하고 사회봉사에 앞장서는 일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느날, 은행에서 큰 사건이 벌어졌다. 어떤 사람이 거래처인 은행에 갔는데 갑자기 무장한 깡패들이 몰려왔다. 경찰에 신고하여 경찰관들이 은행을 포위하자 깡패들은 그를 인질로 데려 가려고 위협한다. 데려가면 죽음을 면치 못할 그런 위급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때 마침 누가 나타나서 “이 사람 대신 나를 데려 가시오. 이 사람을 살려 주시오.” 하고 자기가 대신 희생을 하겠다고 자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누구인가? 자기 회사의 사장이 아닌가! 참으로 아연실색할 노릇이었다. 일을 많이 하기보다 게으름이나 피우던 말썽꾸러기 직원인데도 그 사장이 자기가 대신 죽음의 인질로 잡혀 가기를 희망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장은 그에게 살 길을 열어 해방감을 안겨 준다는 점에서나, 궁극적으로 목숨을 바치려는 점에서 곧 하느님과 같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마음을 지닌 훌륭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위기일발의 고비에서 나를 살리는 사람이 있다면 하느님 역할을 하는 셈이다. 결과적으로 하느님이란 다른데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여러분들의 죄를 계산하는 계리사가 아니다. 잘못을 찾아 호적에 줄을 그으며 언제인가 죄인들을 처벌할 준비를 하는 심판관이나 집행관도 아니다. 그 분의 첫째 일은 언제나 사랑을 베푸는 데 있으며, 우리가 아무리 죄를 범해도 너그럽게 살핀다. 지옥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시는 진리의 실천자, 사랑의 샘터이시다. 우리 인간들이 아무리 죄를 많이 범해도 회개하도록 사랑을 베푸신다. 미사 때 항상 하느님의 사랑을 강조하나, 너무 믿고 있다는 표시로 사랑을 외면하는 일이 많은데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가 괴로움 속에 있거나 죽음 직전에 있다 하더라도 항상 마음속이 흐뭇할 수 있는 해방의 즐거움을 실감하고 하느님의 바다와 같은 은혜에 보답하도록 쉬지 않고 기도하며 노력해야 할 것이다. 작은 죄 때문에 교회에 발을 끊고 미사에 참례하지도 못한다 하면 오히려 더 큰 죄를 범하게 된다. 설혹 잘못이 저질러졌을 경우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는 흐뭇한 마음으로 용감하게 미사에 참례해서 용서받도록 하자. 우리는 의인 아닌 죄인이기에, 너무 지나치게 죄를 의식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너무 가볍게 생각해도 안 된다. 악을 통해서도 참된 길을 걷도록 경험을 살려 죄를 곧 용서받아 큰 사랑의 혜택을 하느님으로부터 받도록 해야 한다. 남을 사랑하고, 원수를 용서하자. 사람들을 대할 때 항상 의좋게 지내며, 서로 존경하고 앞을 다투어 호의를 베풀도록 노력합시다. 죄의식과 부끄러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하느님이 누구신지 아십니까? 하느님은 당신이 누구신지 알려 주시고자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체성사를 세우신 다음 당신의 지상에서의 마지막 시간에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성부여 당신 이름을 모든 이에게 드러내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했사오니 당신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그들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6).
노동청년 7902
위대한 힘을 창조하자
전 미카엘 신부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는 목자들에 화가 있을 것이니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찐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구나.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고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고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힘으로 그들을 다스렸다(에스겔 34:2-4).
한 개인의 육체 속에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이 있듯이 사회도 마찬가지다. 강자와 약자가 있다. 강자는 권력, 재산,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약자는 그 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를 흔히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로 분류하는데, 이 두 계층의 관계는 인간역사의 최대의 갈등관계를 이루어 왔다.
가진 자는 대체로 한 사회의 지도자 군(群)을 형성시켜 왔고 못 가진 자는 피지배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이 두 계층의 갈등은 어떤 방법으로든 해결되지 않으면 안 된다. 두 계층이 완충 지역 없이 벌거벗은 상태로 대치될 때 폭발할 위험성이 있고 그것은 곧 파멸을 초래하기 쉽다. 이를 가리켜 벌거벗은 사회라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사회건 그 사회가 벌거벗은 사회라면 옷을 입혀야 한다.
이 벌거벗은 인간사회에 옷을 입혀주기 위해서 2천 년 전 이스라엘 땅에 예수가 왔다. 예수는 이 인간사회의 벌거벗은 충돌을 해소시키기 위해 사랑의 혁명을 이스라엘 땅에 심었다. 예수가 온 당시의 이스라엘은 비인간화된 사회였다. 욕심과 이기와 착취만이 성행했으며 사랑과 용서와 평화는 눈을 씻고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었다. 통치자나 종교 지도자들, 그리고 지식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할 줄 몰랐으며, 백성들은 백성들대로 지배자들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만 기르고 있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스라엘 곳곳에서는 폭력이 난무했으며 날이 갈수록 사회불안은 증가되었다.
예수는 죄로 가득찬 이스라엘 땅에 와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곧 올 것이니 하느님이 원하는 세상을 건설하려면 우선 인간들이 하느님이 원하는 인간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교하였다. 그럼 하느님이 원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원죄의식이 있는 인간을 말한다. 인간은 원래 에덴동산에서 추방될 때 죄를 저지른 인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죄를 짓고 있다. 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사회는 어쩔 수 없이 서로 뜯어 먹으려는 이리의 욕심이 가득찬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서로 용서해 줄줄 모르고 사랑할 줄 모르고 남을 위해 봉사할 줄 모르는 사회가 곧 그런 사회다. 자기만 잘 먹고 잘 살면 남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그런 사회는 인간의 세상이 아니다.
그리하여 예수는 “양을 돌보지 않고 양을 뜯어먹고 사는 목자들에 대해서 신랄한 공격을 퍼부었다. 목자란 한 사회의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그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기 배만 불리고 백성이야 죽든 살든 아랑곳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엄청난 비극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원죄적 죄인이므로 회개와 견제를 받지 않으면 모두 이리로 변해 버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지도자가 자기 소속 사회 구성원들을 위해 사랑과 용서, 그리고 희생정신으로 일하려면 그 구성원들과 지도자들 사이에 견제와 평화적 관계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견제와 평화적 관계의 조화가 깨질 때 우리는 불행한 사회를 초래하게 된다. 이것은 정부와 국민, 노조와 조합원, 성직자와 평신도들의 관계에서 더욱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두 상대적인 관계의 인격적인 완성을 성취시키는 것이 바로 예수가 말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다. 그러나 그런 사회는 한 사람의 힘만으로 되지 않는다. 사회 각 계층의 소지도자들이 예수의 정신적인 바탕 위에서 자기 사회를 인간화된 사회로 발전시키려는 노력과 의지가 있어야 한다. 특히 노조와 조합원들의 관계는 이 인간적인 사회건설의 전위적인 집단이 되어야 한다. 조합원들은 노조 지도자를 신뢰하고 또 노조 지도자들은 조합원을 위해 일할 줄 알아야 한다. 서로 견제받고 견제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뢰와 사랑의 정신이 싹터야 한다. 증오와 불신의 관계에서는 견제나 책임추궁도 없다. 너는 너 갈 데로 가고 나는 나 갈 데로 가면 그만이라는 비극적인 단절이 있을 뿐이다. 노조지도자나 조합원들은 어쩔 수 없이 노조라는 한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배를 탄 두 주인이 서로 불신과 증오로 가득 차 있다면 그 배는 산으로 올라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배는 비극적인 결말을 낳게 된다.
노동청년 8104
권두언
마침내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다
전국 지도신부 전 미카엘
스페인의 에스파냐 황제는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기까지 아메리카 대륙을 거의 다 점령하고 총독들을 거느리며 지배하고 있었다. 황제로서의 권한을 행사하고 점령한 나라들을 마음대로 다스리기 위하여 특별히 창설된 군대와 해안을 보호하기 위한 군함 등등에 소요되는 군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금과 은광을 많이 개발하여 그런 소중한 많은 자원을 에스파냐로 가지고 갔다. 또한 에스파냐는 100% 천주교 국가이었기 때문에 새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굴한 거액의 자원을 교회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교회에서는 기증받은 거액의 돈을 들여 대도시에 바로크 형태의 최신 성당을 건축하였다. 바로크 형 성당의 특징은 상상할 수도 없는 천당의 아름다움을 다소나마 반영하기 위하여 각종 장식과 정성을 다하여 호화 찬란하고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었다. 그후 많은 세월이 흘러 20세기에 달할 무렵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노동자들은 사회 속에서 당하는 소외감과 뼈에 사무치는 교회의 냉대로 말미암아 신자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열이 식어져 갔다 세상에 태어날 때 세례를 받고 죽음 직전에 병자성사를 받을 줄은 알았지만 일상생활동안 근로대중과 서민층은 교회의 필요성을 도무지 느끼지 못했다. 예컨데 어느 JOC 소그룹의 한 보고내용을 보면 근로자 한 사람이 어느 주일 작업복 차림으로 미사에 참례하려고 화려하게 꾸며진 바로크 성당에 갔더니 안내자가 말하기를, “야! 근로자들이 가는 교회에 가지 않고 왜 여기 왔어? 여기는 너희 근로자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어.” 하고 꾸짖었다. 그래서 화가 난 JOC 회원은 정숙해야 하는 교회 안이었지만 큰소리로 “교회를 세운 분이 누구인데 그래? 귀족이야? 아니면 지주야? 정말 근로자인 목수의 아들이 세운 교회가 아니야? 그리스도 교회라면 원리에 입각해서 보더라도 내내 곳곳 어디를 가더라도 근로자들이 우선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아?” 하고 이치에 맞는 말을 했지만 그는 성당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진실로 우리 근로자들은 교회에서 보석보다 더 소중한 포부를 갖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즉, 복음의 기쁨과 예수 그리스도의 가치관을 그리나 교회는 중산계급의 손에 의해 인질이 되어 예수님의 복음과 가치관은 납치당했고 부자집의 다락방 교회로 전락되고 말았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사회와 그리스도가 원하는 교회, 그리스도가 원하는 나, 혹은 우리로 개선하는데 대해서 복음과 가치관은 불가결의 것인데 문제는 상류와 중류계급이 휘어잡은 교회를 어떻게 해방시켜 캐캐묵고, 봉건적인 사고방식의 쇠사슬에 묶인 예수님을 다시 노동계 속에서 움직일 수 있는 자유를 되찾게 해줄 수 있을까 하는 문제를 생각하는 동안 1935~6년경 갑자기 내란이 일어났다. 정말 가진 자와 못가진 자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치열하며 비참한 전쟁이 일어나 못가진 자들은 증오감에 불타 신부, 수녀들을 4,000명 이상이나 잡아 마구 죽였다. 그리고 거액의 돈과 정성을 들여 화려하게 건축했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보룩크 성당도 하루 아침에 먼지와 재로 파괴되고 말았다. 새로 건설한 아메리카는 온갖 금으로 건설했었으나 못 가진 자들의 증오감으로 말미암아 파괴되고 말았다. 그러나 파괴자들 마음에도 일말의 경건한 잔재는 남아 있어서 닥치는 대로 파괴하였으나 바로 제대앞의 커다란 십자가는 원상대로 보존되었고 고상 앞면에다 기가 막힌 명언을 새겨 놓았다. 즉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것이다”라고 그러나 소외당한 근로자나 못가진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먼지와 재로 가득 찬 폐허 가운데서 찾았다고 기뻐하고만 있는 것보다 그 성당 담당자들과 신자들이 못 가진 자 편에 들게 하며 또한 강한 인간으로 양성시키도록 노력했다면 얼마나 보람된 일이 있겠는가? 교회를 파괴하는 것보다 근로자들을 천대하는 경향과, 동지애가 결핍된 마음, 서민들을 억압하는 마음 등을 일소시키는 일이 얼마나 가치있는 일이 있겠는가? 마찬가지로 교회는 오랫동안 간직했던 복음과 그리스도의 가치관은 노동계의 발전과 개인향상을 가져오는데 대하여 둘째가 될 수 없는 중요한 도구이기 때문에 파괴한다면 쌍방이 모두 손해이므로 서로 서로 진정한 그리스도 사랑과 진리 속에서 서로를 존중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았을까 한다. 서로 서로 필요함을 느끼는 이유는 교회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사업을 계승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없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손발이 되어 인간으로서의 문제, 서민으로서의 본분, 근로자로서의 사명 등을 그리스도를 떠나서 어디에 해결책이 있겠는가? 그러나 서로 서로 이해하고 서로 서로의 포부를 성취시킬 수 있도록 양보하고 아낌없는 사랑과 용서할 줄 아는 아량과 이해할 줄 아는 이성을 가져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에스파냐의 유명한 철학가 사다니아가 폐허화된 교회를 보고 한 말로 본 원고를 끝맺으려 한다. “누구든지 인류역사를 연구할 때 과거에 범한 과오를 배우지 않는다면 장래에 그와 같은 과오를 틀림없이 되풀이 하는 것은 불가결한 것이다.”
노동청년 8110
권두언
크리스찬의 가치관과 사회 재건
전 미카엘 신부
2차 대전 이래 사회와 노동계에 대한 천주교의 태도가 점진적으로 변화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교회가 정신적으로 이해타산에 밝은 기업주처럼 교회의 목적과 영광을 넓히는 것과 능률적으로 추구하는 면에서 누구보다 앞지르고 있었으므로 모든 이의 칭찬의 대상이었다. 다시 말하면 영혼을 구하는 테두리 안에서 성실하고 철두철미하게 일하는 것으로 세상의 눈을 뜨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능률보다 그 테두리 자체에 대한 의문을 많이 갖게 되었다. 교회를 인류에게 물심양면으로 하느님의 두텁고 사랑하는 틀로 삼아서 생각했다. 그러나, 교회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교회가 하느님의 사랑을 전달하지만 육신과 영혼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구별하여 오직 영혼만을 구하는데 혼신의 힘을 바쳤을 뿐 인간의 육체, 사회 노동계,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한 하느님의 비젼과 사랑은 도외시하는 유감에 빠져 있었다. 어느 배고픈 거지가 찾아와서 빵을 사기 위해 ₩500를 청했는데 ₩250을 주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그 거지는 배 불리 먹지 못하지만 허기는 면하는 요기 정도는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하느님의 사랑은 요한 복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생명을 주기 위해서, 더 풍요한 삶을 주기 위해 오셨다는 예수님의 뜻에 미흡한 행위이다. 특히 교회가 시작할 당시 신자들의 대부분이 생각하는 것은 바루시아에 대한 요망을 갖고 있었다. 바루시아의 뜻은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에 먼저 오셨을 때의 세상보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서 재림하는 예수를 오직 환영하는 사회와 백성을 건설해야 한다. 처음에 강생하셨을 때는 환영은커녕 임신한 마리아를 여인숙에서 쫓아냈고 어렸을 때는 암살하려 했으며 나중에는 예루살렘의 쓰레기 더미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이런 세상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우선적으로 새로운 사회와 마음의 인간 상태를 개선하는 데 앞장서지 않는다면 누가 하겠는가. 약속한 새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인내심을 갖고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보다 능동적인 인간을 만들도록 노력하는 것은 바로 크리스챤의 사명이며 아울러 그 업적에 이바지함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다운 긍지와 존엄성을 실감할 수 있다. 바루시아를 기다리는 것 보다 이룩하는데 기여하는 것이 바로 크리스챤의 사명이다. 교회의 역할은 구령사업보다 그런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활력소와 용기와 힘과 가치관을 심어 주어야 한다. 옛날의 교회는 배가 침몰하면 배에 탄 승객과 승무원을 구출하기 위해서 밧줄을 던져 주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의 쇄신하는 교회는 사람은 물론 배까지도 구조해야 할 사명의 절감함은 교황님의 이번 회칙에서 강조되고 있다. 개인 구원은 물론 우주를 상징하는 배까지도 구조하지 않는다면 바루시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교황님의 생각이다. 간척사업으로 이룩된 소금기가 많은 논은 소금기를 제거하는 것만이 해결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고 현명한 처사이기도 하다. 마찬가지로 사회의 비리와 부정과 욕심과 이기심을 뽑아 버리면 사회의 체제와 구조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을 뿐 아니라 나 개인의 생각으로는 내부, 외부의 악을 소멸하는데 급급할 것이 아니라 밑바닥에 깔려 있는 문제부터 해결되어야 한다고 본다. 즉 교회에서 철학적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분석평가하기보다는 변혁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뿐 아니라 그런 기능을 행사할 수 있는 백성 즉 능동적인 인간으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세상을 이해하기 보다는 변혁해야 할 때가 마침내 왔다고 본다. 그러므로 노동조합과 인권운동을 하는 것은 불가결의 수단이라고 본다. 물론 교황님이 노동조합에 대해서 말할 때 경고하는 사항도 있었다. 법, 사회, 교회 그리고 노동조합 모두 백성을 위한 것이지 백성이 그것을 위해 존재하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여기 있는 문제는 힘의 철학에 입각해서 분석해야 한다. 19세기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 리치가 말하기를 “인간은 쾌락의 충족보다는 힘. 즉, 돈과 명예의 위력을 위주로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 개인의 외로움과 허탈감 없이 나의 존재를 확신하는 것은 힘이 많으면 많을수록 실감할 수 있는 것. 그렇기 때문에 힘을 상실하는 것은 신념과 존재를 깎아버리는 것이며 일종의 자살행위가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를 관찰하면 그는 평생동안 남에게 군림하기보다 봉사하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모여와 왕으로 추대하려고 할 때 도망 가버렸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예수님은 우리의 인간 경험을 모두 하였으나 다만 감투를 쓰고자 하는 경험은 피했다. 그러나 보편적으로 크리스찬들은 정의와 평화와 기쁨으로 가득 찬 사회를 만들려면 세력을 가져야 한다. 착한 모든 사람들이 힘을 피한다면 악랄한 사람들만 득세할 것이다. 예수님을 계승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간단하다. 세력을 자신이 군림하기 보다는 하느님이 원하는 사회와 백성을 건설하는 수단으로 이용하여 그리스도의 사고방식에 일치시키는 것이다. 정치세력. 노동조합의 세력, 재능․ 인격의 세력 등을 그리스도의 가치관에 동조하여 행사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비젼에 입각해서 볼 때 예수님이 항상 누렸던 통쾌한 평화와 보람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남을 짓밟고 출세하는 사람은 하루에 미사 5번, 봉헌을 많이 한다고 해도 그리스도와 멀어진다. 이런 사람은 바루시아를 건설하기는커녕 파괴하는 사람이기에 어떻게 재림하는 그리스도와 가까워질 수 있겠는가. 자신이 갖고 있는 힘을 개인이나 가까운 이웃만을 위해서 사는 것보다는 시야를 넓혀 모든 인류와 사회를 위해 분수에 맞게 쏟아 놓는다면 참다운 크리스찬의 보람을 풍요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명심할 것은 마테오 복음 25장의 공심판 내용은 “아는 것보다 실천이 더 중요함”을 말하는 것이다. 오직 빵과, 자유와 집과 옷, 그리고 외로운 사람들을 도와주는지의 여부에 좌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세상을 변혁시키는데 얼마나 공헌을 하였는가 하는 것은 우리 생애의 제일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요한 계시록 21장 1~3).
- 전국본부 지도신부
노동청년 8302
새해를 맞으면서
전 미카엘(전국본부 지도신부)
새해의 아침이 금년에도 예외없이 또 밝았습니다. 우리는 매년 이때가 되면 묵은 해를 반성하고 새해의 알찬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법석들입니다. 그 계획이 한 달도 가지 못해 백지화되는 것을 되풀이 하면서도 말입니다. 망년회니 신년회니 하면서 먹고 마시고 떠들어대는 파티에는 마음을 쓰면서 새해가 왜 시작되는지? 나의 생명이 왜 또 연장되는가? 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드문 것 같습니다. 새해를 맞으면서 어떻게 하면 지난 해보다 더 봉사하고 맡은 바 임무를 더 잘 완수하기 위해 추진력을 보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총회, 집행위원회에서 새로운 계획을 설계하고 검토하고 추진하는 저력은 기도 생활과 신심 생활에서 기초한다고 봅니다. 그 힘의 원천을 보강하기 위해서 묵상, 기도, 신심 생활을 등한히 해서는 안 됩니다. 자동차의 바퀴가 구르는 힘은 바퀴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엔진에서 나오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신심 생활의 활성화만이 사랑의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뚱뚱보 사장이 목욕탕에 들어갈 때 테이블 위에 모든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열쇠꾸러미와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두툼한 돈 지갑과 권력을 뜻하는 명함철을 자랑스럽게 진열해놓고 들어갔지만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세상을 구원하는 전능한 구세주이었으나 이 세상에 오셔서 뚱뚱보 사장과는 반대로 비천하고 힘 없는 사람과 같이 처한 일을 통해서 정신적인 발가숭이처럼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묵상해야 하겠습니다. 대개의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은 왜 뚱뚱보 사장이 갖고 있는 부귀영화, 권력 등을 빼앗아 우리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 곤궁에 빠져 있는 우리를 왜 관망하고만 있는가? 우리의 어려움은 못 본체하고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는가? 진정으로 우리를 사랑한다면 그와 같은 복락을 나누어 주어야 참다운 사랑의 아버지라고 하지 않겠는가? 하고 불평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에서 묵상해야 할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하였을 때는 아무런 고통이나 불편이 없는 낙원에서 살게 하였는데도 만족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느님과 동등하게 되고자 하는 교만과 불복종으로 배은망덕하는 큰 죄를 범한 것이 바로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아무런 불편이 없는 낙원에서 살았으나 자신의 처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급기야는 월권행위로 낙원에서 쫓겨나는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기 때문에 배은망덕한 우리 인간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천사로 하여금 불칼을 들고 낙원으로 들어가는 문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해서 마련하신 낙원으로 다시 들어가기 위해서는 불타는 사랑과 열렬한 헌신과 사심 없는 봉사를 경주하는 것만이 낙원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명예, 공명심, 부귀영화, 권력만을 추구하기 보다는 봉사를 생활의 지침으로 하는 사람을 양성하는 것만이 낙원다운 생활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 성탄의 참뜻은 불가능한 것을 도와서 가능하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심이 없다면 이 모든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자가 갖고 있는 열쇠꾸러미와 돈지갑은 줄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에게 더 큰 선물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교황님 말씀대로 항상 하느님을 누리는 평화와 하느님이 원하는 인간이 되도록 부단한 노력을 하는 인간에게는 참 기쁨이 함께 하는 것입니다. 1983년도에도 그런 평화를 누릴 수 있도록 성숙한 투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은 성숙한 투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지오쎄의 미래는 희망이 샘솟고 밝은 사랑이 비치게 될 것입니다. 새해에도 모든 회원과 가정에 하느님의 강복이 충만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노동청년 8309
이임사
JOC를 떠나면서
전 미카엘 신부
성경의 등장 인물 중에서 우리의 눈길을 끌게 하고 깊은 감명을 주는 인물은 그리스도임에는 물론이고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면 여러분은 누구를 뽑겠습니까? 또 선택한 그 사람의 역할이 왜 중요하다고 보며 종교사에 기록된 이유가 무엇이고 무슨 위치에 있었는가를 연구함은 매우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정말 그와 같은 사람의 면전에서 가끔 대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지금까지 암흑 상태의 나의 내형적인 생활에 광명으로 인도되는 서광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를 따르려는데 점점 식어가는 마음을 부축일 수 있는 힘을 불어넣는 친구로 삼는다면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겠는가? 나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고 천국을 이룩하는데 동반자의 대상을 추천하라면 나는 서슴없이 착한 사마리아인을 천거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리스도의 생애와 가장 많이 닮았고 역사에 나타난 모범적인 첫 번째 JOC 투사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나 현대 교회나 많은 신자들이 교회법과 십계명 따위나 거론하고 내 이웃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이론적으로만 따지고 정의하기가 일쑤이다. 이러한 방석빈대들은 자기의 직장이나 본당과 사회에서 처우개선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을 하기보다는 그러한 사회구조와 환경에 대해서 아무런 실속없는 연구와 탁상공론으로만 끝나곤 한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보다 더 나은 세상을 구축하는데 이바지해야 하는 사명을 외면하고 오히려 각종 불의로 정착된 사회를 이해하려는 데만 급급할 뿐 아니라 저명한 인사의 명성을 얻으려는 야망뿐인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기 전 3000년 전에 히브리 철학자 중에서 제일 유명한 프리또는 말하기를 “선생은 실지로 행할 수 없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가르칠 뿐이다”고 하였다. 그 옛날 모든 이가 지금처럼 각성되지 못했을 때도 패기 있고 능동적인 활동가가 이론가보다 우위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 세상에서 지금까지 구태의연하고 고리타분한 이론에만 도취해서 자기 본위의 아집에만 사로잡혀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이와는 반대로 성경에서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에 매맞아 중상을 입은 환자를 만났을 때 자기와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니고 같은 겨레, 계급이나 같은 종교를 가진 교우가 아닌데도 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 관찰했고 내가 이 사람을 도와주지 않으면 누가 도와주겠느냐고 판단하였다. 히브리 사제나 교회지도자와 같이 얼마든지 못 본체하고 또는 기도시간에 늦는다는 핑계를 하고 지나쳐도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니까 체면에 손상되는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남의 눈치나 말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양심의 가책 때문에 또 하느님의 눈치와 꾸중 때문에 최선을 다해서 돌봐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그의 생각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주인이란, 왕이나 회사의 사장이 아니라 그리고 부인이나 나와 이해관계에 있는 사람은 더욱 아니라고 생각되어 오로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나의 주인이라고 느껴졌기에 나의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고 시중을 바치고 시중을 들어주는 것보다 더 이상 통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바로 이와같은 이유로 그는 환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약을 발라주고 완쾌될 때까지 전반적인 책임을 마다않고 기쁜 마음을 지녔던 것이다. 우리가 주목할 점은 착한 사마리아인 쪽에서 원하는 대로가 아니고 환자 쪽에서 원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즉 성경을 주면서 복음을 읽어보라고 한다든가 또는 위로의 빈 말이 아닌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완쾌의 치료를 주었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그 생각의 심오하고 깊은 것을 보여 주었다. JOC의 근본적인 교육방법 즉 관찰, 판단, 실천에 대해서 배운 바는 없었지만 JOC의 사상이 투철한 투사와 같이 생각만을 중요시하는 것보다 투사다운 활동의 실천 여부가 제일 중요하고 바람직한 활동이 되는 것이다. 또 성경 학자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이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고 또 이 비유가 제일 으뜸가는 비유라고 이구동성으로 부르짖었다. 왜냐하면 이웃이란 누구인가? 그리스도의 편에서 보는 진정한 이웃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어떠한 철학이나 규칙 또는 법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하느님의 자녀들이 동지애로 부풀어 가족, 직장, 계급, 연령, 겨레를 초월해서 서로 서로가 짐을 덜어줄 수 있는 마음가짐으로 상부상조하는 자녀가 되도록 예수는 교회를 세우신 것이다. 줄여서 말한다면 하느님의 안목으로 볼 때 이웃이 누구인가를 정의하기 보다는 궁핍하고 어려운 처지에 처한 사람들의 사이에 살면서 가엾은 사람들을 볼 때마다 이웃답게 그에게 응하는지 않는지에 하느님 자녀로서의 자격이 좌우되는 것이다. 내 이웃이 나의 힘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며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이단자일망정 하느님의 마음에 자리하는 요한 사도와 같이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다. 오! 하느님 어떻게 그와 같이 관대한 사랑과 용서를 베푸시는 분인가를 생각하면서 고루하고 옹졸한 마음의 자녀들을 보면서도 또 습관적으로 죄를 되풀이 하는 우리를 보고도 어떻게 참으십니까? 우리에게 모범적인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단자를 선택했는데 우리는 당신을 믿는다고 자처하는 신자인데도 이단자를 보고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자가 얼마나 되는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를 보고 지적하고 꾸짖기를 “베드로야 너는 인간적으로만 생각하고 왜 하느님의 생각으로는 하지 않느냐?”고 하셨다. 이는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현대의 교회와 우리에게도 지적하는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JOC 투사들도 인간적으로만 생각하는가? 또한 그리스도적으로도 생각하는가? 본당, 연합회, 국제적인 넓은 시야로 생각하는가? 만약 인간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자신은 무능하고 보잘 것 없으며 미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하고 변명이나 하면 족하겠는가? 또는 본당 신부님이나 주교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면 되겠는가? 또 JOC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본당이나 본부 또는 국제 본부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투사들 자신이라고 생각하는가? 또 JOC에서 전국이나 국제 본부에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확고부동한 신념과 두터운 가치관을 갖고 있는 투사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현재에 직면해 있는 많은 시급한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는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인류의 원조인 아담과 에와 시대부터 지금까지 완성된 인간의 양상이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내형적인 자신감이 부족하기 때문에 모든 잘못을 남에게 씌우려고 한다. 즉 아담은 에와에게 에와는 뱀에게 뱀은 누구에게 전가할 수 있겠는가? 이는 주관이 없는 탓이며 자기가 잘못을 하고도 남을 힐책하려는 인간, 권력이나 부귀, 그리고 건강한 육체를 가졌다 하더라도 정말 비겁한 것이 우리들 인간인 것 같다. 둘째는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다가 왔을 때 자기의 윗사람에게 미룬다든가 그렇지 않으면 못 본체 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는 것뿐 아니라 영성적인 생명의 살인자가 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기를 우리는 성령의 궁전이라고 하였고 영세 때부터 모든 신자 마음에서 보다 나은 생활을 하자는 속삭임을 듣는데 그 속삭임을 묵살하고 질식시킨다면 그 성령이 베풀어 주려고 하는 정신적인 환희의 기회도 놓치게 됨은 물론이다. 성령은 결백의 신이며 환희의 신일 뿐 아니라 삶의 가치의 신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속에서 그의 충동으로 전하려는 것을 외면하는 것은 그 고귀하고 보배로운 선물을 놓치게 되는 것은 두말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임산부는 아침에 깨어날 때부터 잠자리에 들 때까지 두 사람의 생명의 몫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듯이 세례를 받음으로 신앙생활과 육신생활의 영양분 섭취에 신경을 써야 한다. 애기 엄마는 영양의 과다 섭취로 뚱보가 되고 태아는 영양실조가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찬가지로 JOC 투사들의 외관상 활동은 활발한 데 반해 정직과 충실성이 결여되고 이웃의 불쌍한 처지를 보고도 못 본 체한다면 빛좋은 개살구가 아니겠는가? 완벽한 인간은 고상한 이상에 도달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더라도 최선을 다해서 선용하도록 노력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컨대 항해하는 선장이 하늘의 반짝이는 별에 도달할 수는 없지만 항해하는데 목표로 삼아서 안전하게 항구에 도달하도록 별을 보면서 항해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같이 죄가 많더라도 고결한 이상만 갖고 있다면 재활해서 다시 출발할 수 있는 힘을 섭취할 수 있으며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훌륭한 투사가 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리스도께로부터 선택받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교훈을 부분적으로 지금까지 모른 체하는 데는 정말 화가 치민다. 객관적으로 볼 때 강도에게 죽게 된 자를 보살펴 주는 착한 사마리아인과 속박과 가난, 부려먹는 시달림을 당하는 곤란한 근로자와 서민들을 보살펴주는 회원과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 가정이나 사회 그리고 교회에서마저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이 어떤 때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께서 선택한 모범적인 자녀의 모습이 어떤 것인가? 미사보를 단정하게 쓰고 무릎을 꿇고 묵주신공이나 열심히 하면 되는가? 또는 매일 영성체나 하고 헌금이나 많이 하면 되는가? 교리 시험에 100점 받는 학생?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학자나 또는 히브리 교회의 최상의 통치권을 가진 사제들인가? 자기 민족의 적이며 원수인 환자를 치료하느라고 무릎을 꿇고 비지땀을 흘리는 이단자인가? 정답은 간단하다. 그래서 거기서 주는 교훈이 왜곡되지 않도록 심사숙고해야 하며 어떻게 마음을 바꾸어야 하는가는 그리스도적인 양심과 여러분의 재량에 맡겨야 한다. 끝으로 민주적인 사회로 발전되도록 노력함은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 보건데 당연하다. 민주주의를 나무라도 한다면 영국에서 심었던 나무가 제일 뿌리가 깊은 나무라고 생각된다. 그와같이 울창하게 자랐던 이유는 그 뿌리를 관찰한 결과 오랜 옛날부터 영국을 다스렸던 왕족들이 아래와 같은 가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디외 엘 몽 드르와(DIEU ET MON DROIT) 인권은 하느님의 권리이며 또한 나의 권리이다. 이 권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이며 우리의 사심판 때까지 잘 보존하여야 한다. 이 권리는 저 밑바닥의 서민들에 이르기까지 나도 주권을 가진 사람이고 자부할 수 있어야 하며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즉 결혼, 직업선택, 생각과 말은 내가 주도권을 갖고 있으며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한 반대를 드러내는 의견을 보장해야 한다. 이 권리는 으리으리한 궁전이나 외양간에서 태어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세상에 태어날 때 누구나 똑같이 하느님으로부터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에서는 왕에게 충성을 바치는 야당의 개념이 널리 보급되어 나라를 사랑하면서 통치자를 반대하는 의견을 보장하는 체제가 불가피했다. 또 아무리 비가 새고 누추한 오막살이라 해도 본인의 허락 없이는 권세가 당당한 왕이라 할지라도 들어가지 못하는 제도가 이미 200년 전부터 있었다. 그러므로 왕만이 아니라 모든 국민들에 이르기까지 이와 같은 신조로 사회를 구축하였다. 후에 많은 영국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같은 사상으로 살았고 미국의 3대 대통령인 제퍼슨도 자기의 일기에다 마지막 유언으로 후손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독재에게 저항하는 것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행위이며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분수에 맞게 이바지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죽은 뒤 묘비에다 이와 같은 비명을 새겨 놓았다. “나는 평생동안 사회나 교회 그리고 정부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도록 부단한 노력을 했기에 하느님을 만나서 떳떳하게 얼굴을 들고 쳐다볼 수 있다.” JOC 회원은 가족이나 직장 교회나 어디에서든지 착한 사마리아인을 본받아서 생활의 기준으로 삼는다면 직면한 내외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확신한다. 또한 교회와 사회에서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마지막 당부하신 것과 같이 나의 양을 치라고 했는데 인간의 원죄 때문에 돌보기보다는 오히려 해치는 일 따위를 적극적으로 개선한다면 모두가 갈망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그러한 내형적인 개선만이 양을 치라는 당부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