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수초 : 2~4월 높은 산악지역 눈 속에서 노랑꽃을 피우고 6월에 열매를 맺음. 눈 속에서 꽃을 피우기 때문에 ‘얼음색꽃’ 또는 ‘눈새기꽃’이라고 한다.
꽃바람
이세연
봄날 꽃들은
꿈에서 깨어나
눈부신 이름 휘날리더니
가녀린 손짓으로
햇살 불러들여
몸짓마다 향기 퍼뜨린다.
그 향기 종일토록
바람과 함께 맴돌다가 피어오르고
꽃의 웃음소리에 돌아 앉아
눈을 감아 본다.
어 탁(魚拓)
김기덕
밤새 보석 같은 별들이 쏟아져도
파동일지 않는
無念無想의 연못 속에서
한세상 유유자적 노닐다가
운명의 손이 줄을 던져 목숨 건져 올리면
허공 중에 팽팽히 튀어 올라
이승의 차가운 물기를 털고
조상 대대로 꿈을 그리던
묵향 속에 다시 태어나
生老病死, 喜悲의 감정도 없이
純白의 세상을 끝없이 헤엄치는
월척이 되리라.
염전(鹽田)에서
김기덕
하나가 무한이 되고
무한이 하나 되는
사유(思惟)의 바다를 끌어들여
맹물은 버렸다.
욕망은 파도를 타고
흔들리던 바람,
미움도 사랑도
다 침잠(沈潛)시켰다.
가마솥에 엿 고듯
태양 볕에 졸아드는
묵은 생각들
서슬 퍼런 사금파리에
눈물 말라 맺히는
고매(高邁)한 결정(結晶),
오욕(五慾)도
사심(邪心)도 증발시켜
눈꽃을 피웠다.
봄에 기대어
최창일
푸른빛들이 자라고 있다
갖가지 형상의 푸른빛들,
무수히 바람에 부대끼며
결코 내려앉지 않는 생각들 까지도
시간의 덫, 철조망에 기댄 풀들도
모두 벗어나
그의 날개들 높이 더 높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곳까지 팔을 벌려
가볍게 장대 높이를 뽑낸다
신경통 연골까지 통증이 왔던 무릎도
환희에 몸을 털면
어느새 가벼운 나비처럼
누군가 부르는
아득한 심연으로 날아가 버린다
수런거리는 말소리와 웃음들
겨우내 숨죽였던 풀꽃들도 우짖고
골목이 왁자지껄하다
이렇게 눈부신 것은.
빛의 여자
최창일
빛을 만지며 영혼의 집을 짓는다
옹송 옹송 솔잎 사이로
밀려드는 빛을 맞으며
새 하얀 한지에
붓끝을 대면
빛은 아름답다고
자연은 일러 준다.
정밀한 실상의 세계
빛의 떨림이 진동하는 자리
안으로 걸어가
작은 입자들 속속 까지
뚫고 들어가면 빛의 궁궐이 열린다
침묵의 빛으로 들어가
어린 아이처럼
마음의 눈 밝아지는 길
허물을 벗어 던지고
정결한 소리 가득한
빛의 눈과 숨결을 모아서
우주를 만든다
그곳은 키 작은 색색의 잔디와 잡목,
풀들이 자라 나오고 있는 초원,
미생물들과 그 보다 더 큰, 조금 더 큰
생명의 사슬이 이어져 오고,
별들 혜성들이 명멸하고
순환하는 우주의 공간이
붓의 삽으로 떠내면
대기층 안쪽의 토양과
빛의 공간이 활짝 열린다
방혜자가 붓을 던져도
빛이 화면 속으로 수직(手織)되어 들어오고
평화의 마음이 빛과 내통하여
하얀 한지엔 빛의 미감(美感)으로 숨 쉰다.
방혜자 : 빛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며 빛이 옹알거리는 시간에만 붓을 들며 빛이 저믈면 작업은 쫑. 재료를 자연에서 얻어내고 자연의 승인을 받아야 예술을 펼치는 자연 친화적 화가.
나의 자가용 선재동자
지창영
굽은 길을 더 좋아하는
나의 자가용 차는 스펙트라
무엇이 그리워 끝도 없이 헤매는지
S로 시작되는 그 이름 대신
선재동자라 부른다.
햇살 곧은 고속도로를
정신없이 내달릴 때면
바람도 씽씽 울며 따라온다.
주체할 수 없는 빗줄기를
연신 닦아내면서도
멈추지 않는 길
꿈 속에서도 길 찾아 떠날까
달빛 푸른 전설의 골짜기
S자로 굽은 길 따라…
안개가 무리지어 달려와
부딪치는 새벽
산길 헤매던
간밤의 꿈은 떨쳐 버리고
한 바탕 발을 구른다.
오늘도 천 리를 내달려야지
불씨를 담으며
김혜경
그녀에게 다가가면
청솔가지 타는 냄새가 났다.
불꽃 사르지 못하여 매운 연기만 피어올랐다.
주체스런 육신 활활태워
나비보다 가벼워지고 싶다며
어디에서 불어올지 모르는
바람을 고대하였다.
자신의 이름을 붙인
간이역의 개찰구에 서서
끝간데 없는 주단을 깔아 놓고
누군가 그길로 걸어 들어오기를
작정 없이 기다렸다.
아주 오랫만에
까페 '푸른장미' 에서
소식이 막혔던 그녀를 다시 만났다.
얼굴에서 불꽃 그림자가 춤추며 일렁였고
저만치서도 불땀 좋은 장작 타는 소리가 들렸다.
이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바람 기둥 하나를 끌어안았다며 하얗게 웃는 모습
어깨너머 푸른 장미와 견주어도 아름다웠다.
재가 된 그녀에게서
나는 불씨 한줌을 담아 왔다.
떠나는 아이들
김혜경
육십년이 된 평곡마을 초등학교
올해 졸업생은 열두 명 신입생 일곱
파도도 오지 않는 섬이 되어간다.
아이들 집으로 돌아가면
운동장엔 고요새가 찾아와
머물다 가는 시간이 점점 길어진다.
줄다리기 함성에 들썩이며
만국기 줄 거머쥐던 나뭇가지가
새봄의 기척에도 늘어져있다.
색색고운 정글짐 시나브로 녹슬고
씨름판의 모래밭
한바탕 뒤집어줄 아이가 없다.
축구골대 그물에 거미 한마리
날마다 제집 넓혀가는데
수천수만번 하늘 차오르던 그네 옆에
어디선가 까치 떼 날아와서
층층의 철봉대를 오르락거리며 점령군 행세를 한다.
별을 불러내던 아이들
하나 둘 떠나고
밤이 되면 평곡리 별들은
학교 지붕위에 내려앉아
어둠속 , 태극기 펄럭이는 소리
지새워 듣는다.
흙 모래집 지어놓고
-임진강 나포나루터께-
이오장
저 건너 송악 마을에 무슨 꽃 피었을까
산마루 휘감은 구름자락
장승백이 고갯길 덮어버렸고
우물가 측백나무 멀리 보이네.
개나리꽃 울타리 뒤덮고
텃밭머리 장다리꽃 어우러지면
고샅에 나비바람 너울대는 동네.
설깨인 얼음조각 떠내려가고
엉켰던 갈대 하늘거리는 봄날
훤히 바라다뵈는 언덕에
귀 밝은 초병의 눈초리 노려보네.
나룻배 보이지 않는 강을 어떻게 건너나
메말라 가는 갯둑에
줄줄이 찍힌 새 발자국 따라
건너오라건너오라 손짓하지만
한 발짝 나설 수 없고
오늘도 강변을 서성거리다
싯누런 흙모래 긁어모아
두꺼비집 서너 채 지어놓고
땅거미 밟으며 돌아오네.
바다에 지는 눈송이
이오장
스며들 자리 보이지 않아
곧장 내려오지 못하고
허공을 맴돌기만 하네요.
선뜻 안기려 해도
그대 품이 너무 넓어 망설였어요.
하늘 가득 담은 거울이거나
구름 가는 길 비춰줄 때도
멀리 떨어져 바라봤지요.
가까이 곁을 떠돌다가
환하게 보려고 눈을 감지요.
언제나 마주하여
무엇이나 받아들이는 그대
눈물 흘리게 하는 햇살까지 감싸주네요.
바위자락 달래주는 손길 거두고
멀리 떠나가며 떠나가며 남기는 말
여지껏 알아채지 못하여
돌아오길 기다리다가 바람 따라 나섰지요.
파도에 내려 떠도는 나를
그대 무어라 불러줄래요.
산수유
유회숙
누군가 심어 놓은
산수유는 그리웠던 것입니다, 산이
봄이 오기 이전부터 못내 그리워도
아주 작은 투정으로 서 있습니다
낮이고 밤이고 막무가내 노란 등燈 밝히고
유년의 동산을 그립니다.
귀 기울이지 않으면 그만 울어버릴 듯이...
그런 그녀를
손잡아 걷고 싶었던 것은
정작 나였는지 모릅니다
도랑물 흐르는 그 곳에서
도란도란 옛이야기 들려주고 싶은 것은
정말 나인지도...
눈물 지으며 자잘한 웃음 웃는 그녀를
지금 말입니다.
난간 위의 팽이
유회숙
엄마가 그러셨죠
사막에 갖다 놔도 돌아올 거라고
산꼭대기에 갖다 놔도 거뜬히 살아낼 거라고
그런데 말이죠.
사계절 편편한 도심의 한복판
살기 좋은 이 땅에서
수백 번도 더 엄마 딸은
제자리를 돌다 작아질 뿐
어지러워요
거대한 수족관의 유리벽
거리를 유영하는 자동차
우수한 두뇌로 넘치는 실직失職
일 년 내내 거룩한 행사
날개 돋친 난지도
짱짱한 대낮에 온갖 거 다 보고
무엇을 회임했기에
속이 울렁거리는 건가요
중심 깊이 쇠를 박고 흔들리는
눈 앞이 아찔한 건가요.
엄마는 언제나 알고 계시죠
어릴 적 그때처럼 묻고 싶어요.
연변에서 온 여인
오정수
진눈깨비 날리는 새벽에 시골길 달리는 완행버스
외진 정류소에 멈추자
얼마나 서서 떨었는지 창백해진 여인이
내 옆자리에 주저앉는다.
어디까지 가느냐는 물음에
원주까지 가는데 오늘은 좀 늦었다며
방값이 싸서 이곳에서 일 다닌다고 한다.
여기 올 때 진 빚만 갚으면
돌아가고 싶다는 조선족 여인,
벌써 몇 달째 임금도 못 받고
공장 사람들이 너무나 무섭다며
이렇게 매정한 동포 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하다가 움짓 말문을 닫는다.
그 시절 공출에 시달리다 못해
만주땅으로 유랑했던 조선백성,
이제 그 후손이 조국에서 동포에게 학대 받아
또 다시 만주땅으로 떠나야 하는지
어느새 진눈깨비 그치고 거센 바람 불어와
가로수 가지 몹시 흔들리고
톨게이트 지날 무렵,
잠든 여인의 파리한 얼굴 바라보다
저맨 무명치에 눈길이 머물었다.
전철 안의 눈먼 부부
오정수
구파발로 향하는 지하철
한강철교를 지날 무렵
동전바구니를 들고
앞 칸을 향해 가는 뒷모습
찬송가 소리도 함께 멀어지고
빈 바구니로 지나는 길목에
사람들은 멀쑥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다.
전철문이 수없이 열고 닫힌 후
한참만에 되돌아온 눈먼 부부
두 손으로 받쳐든 바구니에
담겨있는 동전 몇 닢
열차벽에는 화려한 광고물들이
눈에 어지럽다.
까치소리
송선애
저녘까치가 울면
북망 (北邙)이 보인다고
노인은 새를 쫓고 있다
전장(戰場)에 간 아들은
돌아올 줄 모르고
액자 곳에서만 살아있다.
삭풍에 문풍지가 울면
방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까치를 불러들인다
언제부터인가
혈육이 돌아올 날 손꼽던
달력의 붉은 색연필 자국이
태엽 풀린 시계처럼 멈추고
기침소리 잠든 노인의
머리카락을 빗긴 노을이
사랍문을 빠져나갈 때
저녁 까치가 울고 있다.
메주를 쑤면서
송선애
어머니처럼,
불은 콩을 가마솥에 넣고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콩이 삶길 때는
나무의 수액이 오르듯
오르던 훈김이 흘렀다.
푹 무른 콩을 절구에 찧으면
으깨어지는 속살에
비릿한 체온……
"내년엔 메주를 다시
쑤게 될지 모르겠구나."
왜소해진 어머니의 목소리에
단 솥보다도 뜨거운 눈물이
대 물린 절구에 떨어졌다.
묘 비
김재석
해질 녘 그림자 밟으며
강 뚝 거닐던 소년이
어느 날
숲을 노래하고
숲에서 살다가
숲에서 잠들었다.
바다가 보이는 작은 언덕에
무덤이 생기고
무덤에는 아무 것도 쓰여있지 않은
묘비 하나 세워졌다.
숲은 벌레들의 울음소리로 술렁이었으나
시간이 지나자
아무 일 없는 듯
바람이 스쳐가고
밤에는 별들이 나무 끝에 매달렸다.
한여름 무성한 풀들이 무덤을 몇 번인가 덮어 주고
겨울이 몇 번인가 지나간 봄날
햇빛에 빤작이는 하얀 묘비 앞에
할미꽃 한 송이 피여 났다.
꽃샘바람
김재석
봄날에는 바람이 불었다
머언 산골짜기 눈이 녹을 때
나무들이 어린 꽃눈 밀어낼 때
바람은 옷깃을 파고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개구리
햇살 눈부시어 어슬렁거릴 때
봄을 고대하던 사람들 남쪽 어느 섬 동백꽃 찾아갈 때
바람은 곧잘 철 지난 눈꽃을 길섶에 뿌렸다.
바람이 매서워도 눈발 차가워도
고로쇠나무는 뿌리의 물을 가지 끝으로 끌어올리고
섬진강 재첩은 서투른 몸짓으로 물살을 거슬러간다.
유난히 바람 불던 봄날
어떤 이는 바람맞고 강물에 뛰어들고
어떤 이는 섰다 판에서 땅판 돈 모두 날리고
밤차로 어디론가 떠나간다.
봄날에는, 봄날에는
먹자집 즐비한 재래시장 골목에도
쌍둥이 뛰어오르는 질펀한 갯벌에도
외로울 때면 따스한 할머니 등 생각나는
성황당 고개마루 고향길에도
바람은 늘 불었다.
도 배
이병훈
빛 바랜
꽃무늬 벽지를 뜯어내고
황토색 벽지로 도배를 하였다.
가을걷이를 끝마치고
곱게 쟁기질한 황토밭을
안방으로 들여놓았다.
흐릿하던 시력이
새 안경처럼 환해지자
누워서도, 눈을 감고도
이랑 사이를 오가며
미래의 씨앗을 뿌린다.
마음 가득
푸른 싹이 돋아나길 바라며
굽은 허리를 펼 줄 모르던
어머니-,
늘,
황토밭에서 살고 지고.
먹 통
이병훈
목수의 연장통 속에는
암유(暗喩)의 먹통이 들어있다
톱날보다 날카로운
먹줄을 줄줄이 감아 숨긴 채
눈을 감으면
무수히 떠오르는 공간
밤낮을 가리지 않는
고딕 도시의 그림자
밋밋한 널빤지에
비틀어진 나무둥치에
직선으로 그어지는
정확한 본심의 선...
목수는
함부로 먹줄을 놓지 않는다
마음속의 먹통이 흔들림 없이
여백을 겨냥하고 있으므로,
바람에 보낸 편지
김명숙
목련이 피어나는 봄날에
꽃향기 머금은 편지를 쓰네.
꽃이파리마다 안부를 적고
그대에게 보내네.
움터 오를 푸른 잎새
하늘 멀리 무지개가 걸쳤으리.
떨리는 눈빛으로
그대 있는 곳 바라보네.
바람따라
꽃 물 젖은 편지 전해주면
그대, 창가에 서서 내 모습 그려보려나.
명시 감상
깃 발
유치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 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그리움
유치환
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셈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드메 꽃같이 숨었느뇨
학(鶴)
유치환
나는 학이로다
박모(薄暮)의 수묵색 거리를 가량이면
슬픔은 멍인 양 목줄기에 맺히어
소리도 소리도 낼 수 없누나
저마다 저마다 마음 속 적은 고향을 안고
창창(蒼蒼)한 담채화(淡彩畵) 속으로 흘러가건만
나는 향수할 가나안의 복된 길도 모르고
꿈 푸르는 솔바람 소리만
아득한 풍랑인 양 머리에 설레노니
깃은 남루하여 올빼미처럼 춥고
자랑은 호올로 높으고 슬프기만 하여
내 타고남이 차라리 욕되도다
어둑한 저잣가에 지향없이 서량이면
우러러 밤 서리와 별빛을 이고
나는 한 오래기 갈대인 양
-마르는 학이로다
바 위
유치환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에 물들지 않고
희노(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非情)의 함묵(緘黙)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산ㆍⅢ
유치환
나는 산입니다.
이렇게 커다란 검정 구름더미가
나의 머리 위를 핑핑 지내가는 걸 보니
오늘밤은 비가 오겠습니다.
게다가 동남풍이 불어옵니다.
저 대해(大海)같은 검푸른 하늘에
오늘밤은 적은 별애기들을 볼 수가 없겠지요.
산새들은 날래 날개를 푸드득거리고
숲 속으로 깃을 찾어 숨으시오
저렇게 청개구리놈들은 골짜구니에서
목청 높이 울어 야단들이 아닙니까.
나는 산입니다.
밤새도록 나는 혼자서
촉촉이 비를 맞고 서 있지요.
풍 일(風日)
유치환
바람이 바다소리를 하고 부는 날을
보오얀 사진(沙塵)에 하늘도 산도 안 보이고
슬픈 햇빛은 마음의 한 편만을 비치고
어디를 가도 바다소리만 들리어
나는 창망한 변두리의 한 가 외로운 바위!
❃ 작가 약력 ❃
유치환 호는 청마(靑馬)
1908년 경상남도 충무시 출생
1927년 연희 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1년 시 <정적>을 『문예월간』에 발표하면서 등단
1957년 한국 시인 협회 초대 회장
1967년 별세
시집 : 『청마시초』(39), 『생명의 서』(47), 『울릉도』(48), 『청령 일기(日記)』(49), 『보병과 더불어』(51), 『예루살렘의 닭』(53), 『청마 시집』(54), 『제9시집』(1957), 『유치환 시초』(58), 『유치환 시선』(58),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60), 『미루나무와 남풍』(64)
■ 다시 찾아 읽는 글(수필)
너무 일찍 나왔군
법 정(法頂)
서울이 몇 해 전부터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것은, 밖에서 온 친선사절들의 입을 빌릴 것 없이 우리들 손으로도 만져볼 수 있다. 지방과는 달리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힘이 집중 투하되기 때문에 특별시(特別市)로는 모자라 서울공화국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빌어먹더라도 서울로 가야 살 수 있다는 집념으로 인해 서울은 날로 비대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이라고 해서 다 살기 좋고 편리하게만 되어 있지는 않은 것 같다. 넓혀지고 치솟은 중심가의 근대화(近代化)와는 상관없이 구태의연한 소외지대(疏外地帶)가 얼마든지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나룻배가 오락가락하다면 백마강(白馬江) 쯤으로 상상할 사람이 많겠지만 그곳은 부여(扶餘)가 아니라 대(大)서울의 뚝섬나루. 강 건너에는 수백 가구의 주민들이 납세를 비롯한 시민의 의무를 다하면서 살고 있다.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성동구 무슨무슨 동임에는 틀림없는데, 거기는 전기도 전화도 수도시설도 없는 태고의 성역이다. 교통 수단이라고는 오로지 나룻배가 있을 뿐.
그런데 그 나룻배라는 게 참 재미가 있다. 그 배는 지극히 서민적이어서 편식을 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먹는다. 승용차뿐 아니라 소가 끄는 수레며 분뇨를 실은 트럭이며 그 바퀴 아래 신사와 숙녀들도 함께 태워준다. 그리고 그 나룻배는 도무지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아침 여섯시에서 밤 열한 시까진가 하는 사이에 적재량이 차야 움직인다. 아무리 바빠서 발을 동동 구른댔자 시간부재(時間不在)의 배는 떠나지 않는다. 그거나마 장마철과 결빙기(結氷期)에는 며칠씩 거르게 되고.
같은 서울이면서 강을 하나 사이에 두고 이렇듯 문명의 혜택은 고르지 않다. 처음으로 그 나루를 이용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억울하고 안타까운 일을 많이 당하게 된다. 시간을 예측할 수 없어 허겁지겁 강변에 다다르면 한걸음 앞서 배가 떠나고 있거나 저쪽 기슭에 매달린 채 부동자세다.
그래서 얼마 전부터는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조금 늦을 때마다 너무 일찍 나왔군 하고 스스로 달래는 것이다. 다음 배편이 내 차례인데 미리 나왔다고 생각하면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때문이다. 시간을 빼앗긴 데다 마음까지 빼앗긴다면 손해가 너무 많을 것 같아서다.
똑같은 조건 아래서라도 희로애락(喜怒哀樂)의 감도(感度)가 저마다 다른 걸 보면, 우리들이 겪는 어떤 종류의 고(苦)와 낙(樂)은 객관적인 대상에보다도 주관적인 인식 여하에 달린 모양이다. 아름다운 장미꽃에 하필이면 가시가 돋쳤을까 생각하면 짜증이 난다. 하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시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