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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고소설계의 중요인물
소설 수입금지령을 내린 정조
영명한 군주, 정조임금.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정조正祖(1752~1800)는 소설을 저잣거리의 불량배들 놀음 정도로만 보는 것에 그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당시에 그렇게나 배척하던 서학(西學:조선 시대에 ‘천주교’를 이르던 말)과 동일하게 소설을 사회적 질병으로 여겼다. 마치 혹심한
정조는 이 ‘문체반정’이란 서슬퍼런 붓으로 소설에 대한 접근금지선을 선명하게 죽 그려놓았다. 중국의 정통고문을 본받자는 ‘고문정전주의’를 신봉한 그의 유일한 기호는 ‘정통고문’이요, 제1의 적은 소설이었다.
정조와 고소설의 관계에 관해서는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언급되기에 이만 줄인다.
문체반정이란, 정조가 당시에 유행한 한문 문장의 체제를 개혁하여 정통고문(正統古文)으로 환원시키려던 사업. 당시에 유행하는 문체는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 일파의 참신한 문장이었는데, 정조는 그것이 의고문체(擬古文體)와 소품소설에서 파생된 잡문체라 하여, 황경원(黃景源)․이복원(李福源) 등 정통고문 대가의 문장을 모범으로 삼게 했다.
<평산냉연>은 전 20회. 평(平)․산(山)․냉(冷)․연(燕)은 모두 작중 주인공의 성(姓)이다. 대학사(大學士) 산현인(山顯仁)의 딸 산대(山黛)의 시가 천자의 칭찬을 받고, 냉강설(冷絳雪)이라는 재녀(才女)가 시녀(侍女)가 되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다. 평여형(平如衡)과 연백함(燕白)이란 두 청년이 두 여인에게 시의 창화(唱和)를 요청하지만, 풍기를 문란케 하였다고 고발된다. 그러나 두 청년은 수석과 차석으로 과거에 합격했기 때문에 천자의 권유로 ‘평’은 ‘산’과, ‘연’은 ‘냉’과 혼인하게 된다는 재자가인(才子佳人)의 이야기이다. 1826년 S.쥘리앵이 번역한 것이 유럽에서는 널리 알려졌다.
“혜성과 흙비가 내리는 것을 자연의 변화로 일어나는 재앙이라 하고, 가뭄과 장마․산사태를 일러 땅의 재앙이라 하고, 패관잡서(소설)는 곧 사람의 재앙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음란한 말과 추한 이야기는 사람의 마음을 흐리게 하고 사특한 뜻과 홀리는 듯한 자취는 사람의 지식을 미혹시키며 황탄하고 괴이한 이야기는 남을 업신여기고 잘난 체하며 뽐내는 태도를 부추기고 극히 아름답게 꾸며 몸이나 마음을 약해지게 하는 문장은 사람의 굳센 기운을 사라지게 한다.
( 정약용, 「문체책」, 증보 여유당전서 1, 경인문화사, 1981, 167쪽.)
첫 머리에 걸어 논 저 글은 우리가 잘 아는 정약용丁若鏞(1762∼1836) 선생의 말씀이다. 이 말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정약용. 조선후기의 대실학자요,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라는 방대한 업적을 남긴 바로 그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들, 초등학생까지도 조선 후기를 앞선 지식인이라 여기는 실학자 정약용 선생조차 소설에 대해서는 저렇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입찬소리를 해대던 시기이다.
정약용 선생은 소설을 ‘곧 사람의 재앙 가운데 가장 큰 것’이라한다.
어이쿠! 그 대단한 분도 소설을 이렇게 보시다니, 공연히 들춘 듯싶다. 정약용 선생이 지적하는 저 위의 말은 사실 저 시절의 소설에 대한 인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찌 선비 무리에 있는 이단과 다르리(何異儒門有異端).”
이것은 이상황의 말이다.
소설을 보는 자. 선비 무리의 ‘이단異端’과 같다는 말이다. 소설을 책잡는 냉소적인 반응이다. 이제 이상황의 이야기를 해보자.
문체반정에 대하여 한문 문장체제를 정통 ‘고문(古文)’으로 환원시키려던 국책사업.
그는 한원(翰苑:‘한림원'과 '예문관'을 예스럽게 이르던 말)에서 김조순金祖淳(1765~1832)과 짝이 되어 숙직하였다. 자타가 공인하는 조선 제일의 장서가요, 소설이라면 늘 손에서 떼지 못하던 그였다. 날이 저물고 적적해진 이상황李相璜(1763~1841)은 여느 때처럼 소설을 펼쳐들었다. 김조순도 슬그머니 다가왔다. 소설은 당송唐宋의 여러 사람이 지은 소설과 <평산냉연平山冷燕>이었다. <평산냉연>은 청나라 초기, 적안산인(荻岸山人)이 지었다는 통속소설이다. 김조순도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이러다 상감이 보시는 날엔 경칠텐데. 아, 오늘 순행하실 지도 모르는데~.”
김조순의 말이다.
김조순은 정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으며 학문도 높아 후일 대제학에 오른 이다. 나이는 이상황보다 두 살이나 어렸다.
“원 참, 사람도 별걱정일세.”
퉁명스럽게 내뱉고 다시 책을 펼쳐든 지, 채 한 시각이 못되었을 즈음 정조임금이 사람을 보내셨다.
이상황의 표정은 안 보아도 그려진다. 정조가 소설을 얼마나 싫어하는 것은 이상황도 잘 아는 터였다. 이때 이상황의 나이 25세, 김조순은 23살 이었다. 유자로서 벼슬길을 걷는 그였다. ‘화전충화’라는 말은 이런 상황에 적합하다. ‘화전충화花田衝火’, 꽃밭에 불을 지른다는 뜻으로, 젊은이의 앞길을 막거나 그르치게 함을 이르는 말이다. 앞길이 창창한 청년문사로서 그는 적잖이 당황했을 터였다.
문체반정을 벼르고 있던 정조의 당조짐 또한 보지 않아도 익히 짐작할 수 있다.
정조는 잔뜩 역정을 냈다.
“두 사람이 읽고 있던 책들을 가져와 모두 불 지르라.”
이쯤 되면 이상황이나 김조순은 ‘햇볕 쬔 이슬 꼴’ 아닌가. 그러나 정조의 문책은 더 이상 없었던 듯하다. 이유는 1787년에 있던 이 일은 정작 조선왕조실록 정조 16년, 1792년 10월 24일조에서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1787년의 일이 있은 후로부터 5년 뒤였다. 아마도 두 사람의 나이가 젊은데다, 국가의 동량이 될 재목들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분명히 정조가 덮어준 1787년의 저 일이 그로부터 5년 뒤에 왜 거론 된 것일까?
까닭은 저 뒤에다 놓겠다.
보바리 부인: 프랑스 소설가 G. 플로베르의 장편소설. 집필에 5년이나 걸린 그의 처녀작인 동시에 대표작으로 1857년 간행되었다. 평범한 시골 의사 샤를 보바리의 아내 에마는 다정다감하고 몽상적인 성격이었으므로 남편에게 만족하지 못하고 독신자인 지주 로돌프, 이어서 공증인사무소의 서기 레옹을 상대로 하여 정사를 거듭하다가, 남편 몰래 많은 빚을 지고 마침내 비소를 먹고 자살한다.
정조의 생각이 여기에 미쳤을까.
상황이 이러한 즉, 이상황은 1787년의 저 일이 있은 뒤 정조와 소설을 배척하는데 환상의 궁합을 과시해야했다. 이상황은 1788년 「힐패詰稗」와 ‘척패시斥稗詩’를 정조에게 적어 올린다. 「힐패」와 ‘척패시’는 다시는 소설을 근접하지 않으리라 일종의 맹세문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여러 문헌 증거로 보건대 정조 임금은 안티 고소설 그룹의 수장이니, 그렇다면 이상황은 확실한 비서실장감이다. 「힐패」는 소설을 힐난하는 글이요, ‘척패시’는 소설을 배척하는 시이기 때문이다. 새삼 느끼는 것은 아니지만 정치와 권력은 이렇게 취미생활까지도 바꾸어 놓는다.
언급하였지만 이상황은 소설광이었다. 그가 어느 정도 소설을 좋아하였는지는 이유원李裕元(1814 ~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동어 이상황은 평소에 패설책을 놓지 않았다. 어떤 종류의 책이라도 새로운 것이면 모두 읽었다. 때에 사역원 (司譯院) 도제조(都提調)를 겸하고 있었기에 통역하려 연경에 가는 자들이 다투어서 구하여 바치니 수천 권에 이르게 되었다(桐漁李公 平日手不釋卷者 卽稗說也 毋論某種 好閱新本 時帶譯院都相 象譯之赴燕者 爭相購納 積至累千卷).”
(이유원, 「춘명일사, 희간패설」, 임하필기, 卷 27.)
이렇듯 소설과의 밀월을 즐겼던 그가 아닌가.
그러던 그가 정조의 꾸지람을 듣고 소설에 대한 배타적 선언이요, 일종의 문학전향서를 쓴 것이다. 소설에 대해 지피지기인 그였기에, 고소설의 쪽에서 상당한 충격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연히 그가 쓴 「힐패」와 ‘척패시’를 소설일반론과 소설작가에 대한 일반적인 유학자의 ‘가치비평價値批評’으로 단순하게 치부할 수 없다. 당시에 소설을 배척하는 유학자들의 소설에 대한 평은 대부분 ‘가치비평’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였다. ‘가치비평’이란, 가치 인식에 따라 일어나는 감정이다. 즉, 미추․선악․쾌불쾌 등을 가치감정이라 하듯이, 소설에 대하여 유학자의 입장에서 무조건 배척하는 태도를 보이는 비평을 말한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소설평 중 상당수가 이 가치비평에 해당된다.
그런데 고소설에 대해서 잘 아는 이상황이 작심하고 칼을 겨눈 것이니 여간치 않을 글임이 명확하다. 이제 그 이상황의 「힐패」와 ‘척패시’라는 소설비평을 보자.
「힐패」는 여섯 번에 걸친, 패자稗者와 힐자詰者사이의 겯거니 틀거니하는 소설논쟁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패자는 소설을 긍정적으로 보는 자요, 힐자는 그 반대에 선다. 결국 힐자의 의견은 전형적으로 소설 배척론자요, 패자의 의견은 전형적인 소설긍정론자임을 알 수 있다.
이 「힐패」는 이상황의 저러한 상황에서 지어진 것이기에 당시 문제가 되던 소설비평을 모두 담고 있다. 구체적으로 소설을 옹호하는 입장의 패자稗者가 드는 문체혁신론文體革新論․소설과 사서史書의 동일성同一性․무소용심론無所用心論․소설을 통한 박학다식론博學多識論․소설의 핍진론逼眞論 등은 당시의 소설 옹호적 측면의 견해들임에 분명하다. 지금 보아도 소설의 장점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내용임이 분명하며 당시까지의 조선시대 소설비평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느낌을 준다.
자, 이제 공은 힐자에게 넘어갔다. ‘소설 손봐주는 측의 대표’이니 여북하겠는가. 앞의 소설을 옹호하는 입장의 패자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할 것임은 독자들도 이미 짐작했으리라. 그러나 이에 대한 힐자의 반응은 패자에 비하여 정치하지 못하다. 패자의 논리를 조목조목 반박하지도 못하였다. 대체적으로 유자들이 입버릇처럼 외던 반소설관을 강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저 패자의 논리를 코대답으로 넘기거나 조악한 논리로 중얼중얼 변죽만 올리다 싱겁게 끝나고야 만다.
그렇다면 「힐패」에 붙인 ‘척패시’는 어떠한가? 이 ‘척패시’는 「힐패」에서 보여주지 못한 반소설비평을 논리적으로 풀어낼 듯도 싶다. ‘척패시’는 30수의 장시로 된 반소설적인 제소설시임에는 틀림없다. 문제는 이 시들 또한 두 주먹 발끈 쥐고 바르르 떨며 소설가들을 흠씬 두들겨 패주겠다는 엄포만 보이는데 그칠 뿐이다. 힐자의 발언처럼 ‘마음먹고 소설을 배척한 시’로서는 차분한 조리를 전연 찾을 수 없다.
도대체 어떠하기에 그런지 살펴보자.
김성탄은 원굉도의 지류가 되니
가도와 맹교의 무리가 아니네.
음란함은 문의 최대의 적이되니
어찌 유문(儒門)에 있는 이단과 다르리오.
(이상황, ‘척패시’, 동어유집, 고려대도서관소장본. 이하 모두 같음 )
이상황은 정조임금을 의식하고 이 ‘척패시’를 지었다. 위 시를 보면, 그 비평의 전제는 철저한 유교적인 잣대로 고소설을 몹시 나무라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소설에 적의를 가득 실은 글이니 소설측에서는 참 난감하게 읽어야할 것이라 강다짐을 해대도 영 맥이 없고 밍밍한 이유가 무엇일까?
차분히 살펴보니 대상이 김성탄 등 대표적인 중국의 작가들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이상황은 김성탄金聖嘆(1608~1661)과 원굉도袁宏道(1568~1610)를 동일한 부류로 이해하고 가도賈島(779~843)와 맹교孟郊(751~814)를 끌어들여 비평하고 있다. 당시 김성탄은 소설가의 대명사격이었는데 원굉도의 지류라고 하였다. 이상황이 지칭하는 원씨袁氏는 공안인公安人 원종도袁宗道․원굉도袁宏道․원중도袁中道 형제의 무리들을 지칭한다.
원굉도는 명대의 사상가이며 소설비평가인 이탁오李卓吾(1527 ~1602)의 제자이기도 하다. 이들은 만력萬曆 연간에 공안파라 지칭되었고 문체를 공안체公安體라 하였다. 이 공안체는 시작풍이 청신淸新하였으며 때로는 희언戱言과 조소嘲笑․항담속어巷談俗語 등이 글 속에 두루 섞여 있었다. 따라서 고루한 문사들이 광언狂言․골계지담滑稽之談 등이라 하여 혹평하기도 하였다. 이상황 역시 이 시에서 원씨들의 글을 음란하다고 하며, ‘유교의 이단(儒門有異端)’이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설적인 상황은 굳이 중국의 인사를 거론할 필요가 없었다. 국내에도 이 정도의 비판을 받을만한 소설가들, 즉 연암 박지원과 같은 이들이 있음에도 이상황은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아, 시비를 붙으려면 보이지도 않는 저 중국 쪽이 아닌 이쪽이어야 하지 않는가?
문제는 또 있다. 이상황은 김성탄이나 원씨 무리들과 상대적으로 내세우는 인물로 가도와 맹교를 들었다. 맹교는 평생을 심각한 빈한 속에서 보내었기에 곤궁한 생활이 그의 시에 들어 있고, 가도의 시에도 역시 매서운 고통이 들어 있어, 이 둘을 ‘교한도수郊寒島瘦’라고 세상에서 불리는 이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문체는 격식을 엄격히 추구하여 당시 일부 유학자들의 모범이 되기도 하였지만, 이백이나 두보에 비할 바가 못 되는 문사들이다.
이상황이 이러한 비평을 하는 것은 당시에 지탄을 받는 중국의 문필가들을 소설가와 동일하게 비평함으로써 더욱 소설가를 비하하려는 의도 아닌가? 내로라하는 중국의 문인들을 들어, 그렇지 못한 소설가류인 김성탄이나 원씨 무리들을 공격해야 되거늘, 희고 곰팡 쓸고 고리타분한 그렇고 그런 ‘교한도수’ 문사들과 견줄게 무어란 말인가.
이런 적절치 않은 비유는 소설을 유가의 묵자墨子에 비견하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아래 「힐패」의 서두를 보자.
“옛날에 공부갑은 묵자가 성인을 헐뜯는 것을 분하게 여겨 묵자를 힐난하는 글을 지어 논변하여 배척하였는데, ‘문에 패설이 있는 것은 마치 유문(儒門)에 묵자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였다(昔孔駙甲 憤黑子之詆聖也 作詰墨之文 而辨斥之 文之有稗 猶儒之有墨也).”
패설(소설)을 묵자와 똑같은 부류로 여긴다는 말이다.
묵자墨子(B.C. 480~B.C. 390)가 누구인가. 묵자는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였다. 유가의 인(仁)이 똑같이 사랑을 중심 뜻으로 삼으면서도 존비尊卑와 친소親疎의 구별이 있음을 전제로 하고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는 데 반하여, 묵자는 겸애주의를 펼치며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하였다. 공자일 말로는 묵자가 영 마뜩치 않은 인물이라는 뜻이다.
이상황은 이 글에서 이러한 묵자를 소설에 비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 소설이 품행 불량한 것이라고 몰아붙이는 하나마나한 선소리일 뿐이다.
조선시대의 유교, 즉 성리학적 질서는 유학자들에게는 고소설비평의 기준이었다.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이 성리학적 질서에서 정신적인 자유로움을 얻으려 하였기에 소외된 자들의 소설적 도피를 결코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유학자들도 소외된 자들의 대리적 욕망표현이 소설이었다는 점도 인지하고 있었다. 더구나 이상황은 다량의 소설을 읽었기에 논리적으로 이에 대한 해법을 고민할 수도 있었다.
다음은 소설의 한 속성인 허구성 문제를 지적하는 ‘척패시’이다.
나씨 집안의 아이인 관중은
얕은 재능 자랑하여 잔재주 풀어놓네.
여러 종류의 패관을 지었지만
이 이야기 모두 가공과 허구일세.
羅氏家兒宇貫中 自矜薄技解雕蟲
刱爲畿種稗官說 說是架虛與鑿空
이상황은 소설을 “얕은 재능 자랑하여 잔재주 풀어 놓는다(自矜薄技解雕蟲).”라고 하여 벌레나 조각하는 잔재주(雕蟲小技)로 폄하하고 <삼국지연의>를 ‘가허착공’이라 하였다. 이상황의 독서경험 등으로 미루어 그는 당시의 소설이란 장르를 정확히 인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소설 독서 경험이 일천한 유학자의 소설 배척시로 밖에는 볼 수 없다. 그저 싱겁기 짝이 없는 주례사적인 의례적 비평일 뿐이니, 소설에 대한 배척치고는 지나치게 점잖다.
더구나 ‘가공허구’라는 이미 일반화된 비평어와 소설 저술을 벌레나 조각하는 것과 같은 잔재주의 소치로 여기는 이 감정적 발언으로 자신의 소설배척논리를 폈다는 것은 썩 수긍하기 어렵다. 누구보다도 소설에 대한 해박함을 지녔을 이상황의 발언으로는 치졸함을 면치 못하겠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황의 소설 배척시에서는 이 외에 별다른 소설배척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저 ‘소설이 나쁘다’고 강다짐하는 말만 반복할 뿐이다. 싸울 때도 말이 많으면 감잡히는 법이다. 조리가 없는 말은 더욱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혹, 이상황이 쓴 「힐패」와 ‘척패시’정조임금과 시대의 강요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래 짐짓 과장된 몸짓을 보이는 위의 저 문장들을 소설에 대해서 행티를 부린다고 생각하기보다, 차라리 그의 고심참담한 심경으로 읽어보자. 이상하게도 이상황은 그의 ‘척패시’에 문체론적 비평에 의한 독서자들의 즐거움을 이렇게 적어 놓았다. 앞의 내용과는 낙차落差가 크니 행간行間 읽기가 필요할 터이다.
기문으로 이야기 다투니 이것이 서상기
소품제가의 조상은 동해원(董解元)과 왕실보(王實甫).
겉만 화려한 이야기를 얻어 보는 경박한 아이들
모두 방탕한 데로 들어가 놀아들 나네.
奇文競說是西廂 小品諸家祖董王
引得浮華輕薄子 盡歸波蕩冶遊場
<서상기西廂記>는 중국 원나라 잡극雜劇(元曲)의 명작이요, 동해원董解元과 왕실보王實甫는 소설가들이다.
시에서 이상황은 소설식 문체와 소설성의 하나인 재미에 대해 언급한다. 이미 소설의 재미라는 내밀한 경험을 한 이의 발언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는 소설은 ‘기이한 글奇文’로 ‘화려함浮華’이 있는 문체를 운용한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문체의 폐단이 사회에 영향을 미치고 세도를 타락시킨다고 한다.
「힐패」의 네 번째 문답에서도 이상황은 패자의 입을 빌어 “패관소설을 읽으면 기묘한 문자와 심오한 말을 취할 수 있다(稗者曰 讀稗官盖取奇字奧語也).”라고 하였다. 이 말로 미루어 짐작컨대, 이상황은 소설식 문체가 기묘한 문자와 심오한 말(奇字奧語)이라고 인식하였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이런 문체로 씌어진 소설이기에 모두 방탕한 데로 들어가 놀아들 날 수밖에는 없다는 이치다. 소설의 대척점에 선 발언이라기 보다는 긍정적 진술이 아닌가. 어떻든 이상황의 이 시구 속에서 우리는 충분히 소설의 재미, 즉 심미적 쾌감을 그대로 엿볼 수 있으니 말이다.
이상황은 「힐패」의 말미에서도 자신이 소설 읽기에 침중한 사실을 부끄럽게 여긴다면서 “비유하자면 꽃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새소리에 미혹되었을 뿐, 점점 그 속에 들어가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譬若花卉之媚眼 禽鳥之誤耳 駸駸入其中 而不自知).”고도 하였다. 그의 제소설시를 소연히 따라 잡을 수는 없지만 이상황에게 소설 읽기의 즐거움이 얼마나 컸던가는 역으로 짐작할 수 있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 그의 ‘척패시’에 나타난 소설과 소설가는 모두 중국이었다. 당시에 유행하였던 소설 중에는 상당수의 우리 소설가들의 작품들이 있는데 유독 중국의 소설가와 소설만을 지적하여 배척하는 논리를 폈으며, 그나마 힐자의 견해도 정치하지 못한 점 등은 마음먹고 쓴 최고위 문사의 척패시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결국 이러한 여러 엇박자를 빚는 상황들을 종합해 보건대, 이상황의 제소설시에 나타난 버성긴 분위기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의 마음을 온전히 건너짚을 수는 없지만, 오히려 이상황의 소설본색은 애정이 아니었을까?
오히려 이 시는, 당시에 소설을 배척할 수밖에 없는 지식인의 고뇌와 소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 시들은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어쩔 수 없이 지은 이른바 ‘불긍저의不肯底意의 척패시’로 보아도 될 듯하다.
이렇게 보는 까닭을 아래에서 밝히보겠다.
독자들은 앞에서 이상황이 소설을 읽다 들켰다는, 그래서 정조가 소설을 모두 불태웠지만 젊은 인재들이라 용서했다는, ‘1787년 어느 날의 기록이’ 그로부터 5년 뒤인 1792년에야 보였다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상황이 「힐패」와 ‘척패시’를 지은 것은 1788년이라고도 했다.
1792년 10월 24일의 기록은 이상황이 파면되었다가 복직한 날의 기록이다. 파면되었던 이유는 5년 전과 동일하다. ‘소설을 읽어서’였다. 정조는 이상황을 같은 일로 파면 시켰다가 이날 복직을 허용하니, 자연스럽게 전의 사건이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상황은 1788년 「힐패」와 ‘척패시를 지어 올린 뒤에도 계속 소설을 보았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정리해보자.
이상황은 서울에서 대대로 거주한 경화세족(京華世族)으로 효녕대군(孝寧大君)의 후손 승지 이득일(李得一)의 아들이다. 그는 정조 10년(1786) 소과에 합격하고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에 임명되었으며, 1789년 정언, 1795년 대사간 등을 거쳐, 1824년 좌의정, 1833년 영의정에 올랐다. 따라서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이상황은 표면적으로는 소설에 대한 배척이 필요했으리라 본다.
그러나 그는 또 1830년 주청정사(奏請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오는 등 진보적 지식인으로서의 면모도 있었고 소설을 수천 권이나 모은 대단한 장서가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당시의 주변적 정황으로 보아 이상황의 척패시를 단순하게 소설을 배척한 시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소설과 반소설 사이에서 엉거주춤 고의춤을 잡고 서 있는 이상황의 모습이 안쓰럽다. ‘「숙향전」이 고담이다’라는 속담도 널리 퍼졌을 시기이다. 이미 우리의 고소설은 고수들의 협공에도 내상을 입고 신음을 토할 만큼 여리지 않았음을 저 이상황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소설을 세 가지 헷갈림이라 질타한 이덕무
추위와 가난에 찌든 한미한 가문, 서얼이기에 태어나면서부터 삶의 배경이 어둠인 사내, 그래도 한겨울 추위를 『한서』한 질로 이불삼고 『논어』로 병풍삼아 막았다는 꼬장한 기개의 남산아래 딸깍발이, 조선 최고의 소설가 연암 박지원의 벗이며 제자로 새로운 문명을 그리워한 사내, 그리고 무엇보다 책을 너무 사랑하여 자신의 호를 ‘책만 보는 바보’라는 뜻의 ‘간서치(看書痴)’라 지은 전주 이(李)씨, 덕 덕(德)․힘쓸 무(懋)를 쓰는 청장관(靑莊館) 이덕무. 그래 읽은 책이 수만 권이요, 베낀 책만 수백 권인 이 사내의 소설에 대한 독설은 독하기 짝이 없었다. 조선조 유학자의 9할이 소설을 배척했다지만, 그중 제일은 이덕무(李德懋, 1741 ~1793)에게 내주어야 한다.
이덕무는 ‘소설최괴인심술(小說最壞人心術)’이라하였다. ‘소설최괴인심술’이란, ‘소설이 가장 사람의 마음을 파괴한다’라는 뜻이다.
이덕무는 “소설은 사람의 마음을 파괴함이 가장 심하다”고 극언을 퍼부었다. 일종의 소설의 쾌락적 기능에 대한 비평으로 볼 수도 있는 이 말은 이덕무의 「영처잡고」에 보인다. 그런데 이 말을 조금만 짚어보면 이덕무는 소설의 폐해를 사회적 시각이 아닌 독자의 내면세계에서 찾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소설의 폐단을 지적한 것이지만 역으로 소설의 효용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다. 정조임금의『홍재전서』 권165‧7, 「일득록」에 보이는 ‘소설은 사람의 마음에 독이 된다’는 ‘소설고인심술(小說蠱人心術)’도 유사한 비평어이다. 일단 이덕무의 글을 보고 이야기를 전개해보자.
소설은 가장 사람의 마음을 파괴하는 것이므로 자제들로 하여금 책을 펴 보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이덕무, 「영처잡고」 1, 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청장관전서』 2, 솔출판사(영인), 1978, 5쪽)
그러면서도 이덕무(李德懋, 1741 ~1793)는 『수호전』을 한껏 끌어 올리는 발언도 한다.
“내가 일찍이 『수호전』을 보니 인정물태를 묘사함에 문장 짓는 원리가 교묘하니 소설의 으뜸이라고 이를 만하다. (이덕무, 「영처잡고」 1, 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청장관전서』 2, 솔출판사(영인), 1978, 5쪽)
이덕무의 말을 그대로 따라잡으면 ‘인정물태(人情物態)’를 들어 『수호전』을 ‘소설지괴小說之魁’라하여 소설 가운데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는 발언 아닌가.
그렇다면 이덕무가 소설을 배척하는 논리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이유를 ‘소설에는 세 가지 의혹이 있다(小說有三惑)’라고 한다.
이덕무가 소설을 배척하며 근거로 든 세 가지는 이렇다.
즉, 작자는 거짓과 공론空論을 꾸민다는 점에서, 평자는 이를 조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독자는 시간을 허비하고 경전經典을 등한시한다는 점에서 소설의 폐해를 지적하고 있다. 이 비평어에서 작자․평자․독자를 뚜렷하게 인식하였다는 점과 모두 비평의 대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소설비평의 발전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특히 ‘평자’의 발견은 우리 고소설비평이 당시에 적지 않았음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다.
실상 이덕무는 ‘소설무용론’을 주장하였지마는 내용적인 면을 중심으로 부정한 것일 뿐, 소설의 표현면은 긍정하는 이중적 비평태도를 보였다. 따라서 우리 고소설비평사에서 이덕무는 극단적 소설 배격론자의 한 사람이지만, 그의 반소설적 비평은 소설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세 가지 의혹’에 관한 전문은 아래와같다.
소설에는 세 가지 의혹이 있으니 헛 것을 내세우고 빈 것을 천착하며 귀신을 논하고 꿈을 말하여 짓는 자가 한 가지 의혹이요, 허황된 것을 부추기고 비루한 것을 고취시킨 것을 평한 자가 두 번째 의혹이요,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경전을 등한시하여 본 자가 세 번째 의혹이다 (이덕무, 「영처잡고」 1, 민족문화추진회 편, 『국역 청장관전서』 2, 솔출판사(영인), 1978, 5쪽)
하지만 이것으로 이덕무와 소설의 관계가 서먹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덕무는 10여 편의 전을 지었는데 그 중, <관자허전(管子虛傳)>을 요즈음 학자들이 소설로 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관자허전>은 대나무를 의인화한 가전(假傳)으로『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중, 「영처문고 叛處文稿」에 실려 있다.
<관자허전>의 줄거리를 대략 보자면 이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관씨(管氏)’이다. 그의 본성은 죽씨(竹氏)이니 대나무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선조가 황제에게 발탁되어 황종의 음률을 만들게 되었다. 후손 고죽군(孤竹君)이 자허(子虛)를 낳았다. 그는 속이 비고 외모는 고결하였다. 마침 황제가 인재를 구하는 명을 내리자 생성옹(生成翁)은 자허를 천거한다. 이에 황제는 상림원(上林苑)에서 그를 손님으로 맞이한다. 그러나 자허는 오히려 인사도 없이 뻣뻣하고 거만하였다. 하지만 황제는 오히려 그의 오만한 절개를 높이 사서 “가슴속 서 말이나 되는 가시를 없앨 만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자허는 그 뒤에 아들 여덟과 딸 하나를 두었다. 곧 붓(筆)·화살(箭)·퉁소(簫)·제기(頭)·죽간(竹簡)·낚싯대(竿)·지팡이(莖)·발(簾) 그리고 기춘현부인(菫春縣夫人)이다. 관자허는 그 뒤 60세에 두심병(蠹心病)으로 세상을 떠났다. ‘두심병’이란 해충이 갉아 먹는 병이다. 그 후손들은 대대로 위천에 봉해져서 뭇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독자들이 읽었다시피 대나무를 의인화하여 현실적인 삶의 정도를 제시해 주려는 소설로 보아 크게 무리가 없는 작품이다.
가끔씩 세상을 살다보면 이러한 이치가 닿지 않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소설을 싫어하였던 이덕무가 아닌가.
그런데 세상 일 모르는 것이 더 있다. 이 이덕무의 손자인 이규경(李圭景,1788~1856)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권7에 「소설변증설(小說辨證說)」을 적어 놓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는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고증한 ‘변증설’ 1416편의 모음집이다. 이 책은 조선후기 학계가 상상할 수 있는 지식의 극한까지 도달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예컨대 우리나라 안경의 기원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애체변증설’을, 춘화의 유래에 대해 알고 싶다면 ‘화동춘화변증설’을 보면 된다. 「소설변증설」은 우리 고소설의 기원을 나름대로 정리한 소중한 자료이다.
소설을 시로 사랑한 왕족 이건
지금부터 400여 년 전이다.
숨 한 번 고르고 넘어가자.
이 글은 이건李健(1614~1662)이란 왕족의 규창유고葵窓遺稿 권3에서 찾아 쓴다.
이건은 왕족으로 부친은 선조임금의 일곱째 아들인 인성군 공仁城君 珙,1588~1628)이며 모친은 좌참찬으로 후에 영의정에 추증된 윤승길尹承吉(1540~1616)의 딸 해평 윤씨이다. 가히 왕족의 피붙이임에 틀림없는 인물이다.
당연, 저 시절 ‘들어가지 마라.’란 팻말도 내붙었으니 소설비평은 ‘금단’의 영역이었다. 소설은 그렇게 방외인들의 문학의 변방이었기에 결코 근사한 한문학을 하는 양반네가, 더욱이 왕족이 기웃거릴 곳이 아니다. 현학적 취미놀음을 일삼는 양반네들은 소설에 관한한 입이 험했다. 여하한 그들은 문이재도(文以載道)라는 박제된 중세의 지성知性을 지성至誠으로 섬겼다. ‘문’의 기능은 훈육이었고, 단속이요, 각인이었다.
더구나 이건 같은 왕족임에랴.
그런데 이건은 <상사동기相思洞記>․<교홍기嬌紅記>․<배항전裵航傳>․<운화전雲華傳>․<서상기西廂記>․<주생전周生傳>등 7편의 작품을 7언 절구 형식으로 곱다시 매만져 놓았다. 시로 다듬었기에 이러한 시를 ‘제소설시라’한다. 부르주아 버전으로 순치된 한문전기소설에 대한 평이었기에 상당히 놀랍다. 모두 연정을 다룬 애정소설이니만치 독서취향도 자못 흥미롭다. 더구나 그는 어찌된 일인지 신변을 숨기지도 않고 그대로 자기를 드러냈다.
‘건너다보니 절터’라고 이건이란 이의 삶을 굳이 들추지 않아도 성품을 요량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은 중세 지식인과 소설비평 사이의 내밀한 소통이요, 고소설을 공부하는 이에겐 매혹적인 정보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이건이 읽은 작품은 대부분 남녀의 애정을 다룬 소설들이었다. 독서 감상물로 이러한 소설들을 택하였고, 더구나 제소설시까지 남긴 것이다. 이모저모로 미루어보건대, 이건은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인 듯하다. 우리 소설비평사에서 예사로 넘길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각 편의 구성상 긴요한 부분을 찾아 주제비평主題批評을 보이는 것 또한, 이건의 제소설시에만 집중적으로 보여 이채롭다.
우리 고소설비평의 확장된 세계와 소설비평의 변주임에 틀림없다. 대개의 고소설에 대한 한시비평은 비유적인 감상을 적거나 전반적인 인상을 추상적으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건은 제소설시에서 주제비평, 특히 가장 핵심에 속하는 구성(만남)을 비평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만큼 소설 읽기가 치밀하고 꼼꼼하였다는 반증이다.
대부분 유사한 형식의 비평이기에, 이 글에서는 「제상사동기」와 <교홍기>시평만을 살핀다.
아울러 이건 시의 이해를 돕기 위해 권전權佃(1583~1651)의 제소설시도 예로 들어보겠다.
위는 권전의 시이고 아래는 이건의 제상사동기이다.
제상사동기란 <상사동기>라는 소설을 보고 쓴 한시이다.
슬프게도 영이(榮伊)를 오래 보지 못해
궁문은 깊이 잠겨 비단 휘장 적막하구나.
동쪽엔 복숭아와 자두꽃, 서쪽엔 버드나무
어느 날 옮겨 심어 한 곳에서 볼까나.
惆愴伊人久未見 宮門深鎖錦帳寒
東邊桃李西邊柳 何日移栽一處看
길에서 서로 만나 곧 이별하였으니
깊고 은밀한 약속 귀신만이 알겠네.
손님 전송하는 노복 계책 없었다면
견우와 직녀 같은 만남도 없었을걸.
路上相逢卽相離 深盟密約鬼神知
若無餞客蒼頭計 不有天中一日期
(이건, 규창유고 권3, 한국문집총간 122.)
<상사동기>는 17세기 초, 작자 미상의 애정을 소재로 한 한문전기소설이다. <운영전>과 비슷한 서사적 얼개를 갖추었으나 결말은 정 반대인 중편 소설이다. 내용을 대충 보자면 이러하다.
김생이 상사동에서 회산군의 시녀인 영영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노비 특의 도움으로 영영과 사랑의 물꼬를 트고 궁중에 들어가 하룻밤을 지낸다. 이 노비 특이 꾀를 내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 뒤, 3 년 동안 만나지 못하였다. 김생은 과거에 급제하여 유가하다 영영을 보고는 상사병으로 앓아눕고, 문병 온 친구의 주선으로 다시 만나 백년해로하였다.
<상사동기> 속, 두 연인 김생과 영영은 사랑에 관한한 보통내기들이 아니다. 깍쟁이들의 애정놀음에서 도회적 내음이 물씬 피어오르는 소설이다. 그렇다고 ‘하늘에 해가 뜨는 한 너만 사랑할께’라고 달콤히 속삭여 놓고 배신을 세끼 밥 먹듯 무상의 일로 여기는 그러한 인스턴트식 사랑놀음이 아니다.
이건이 이 ‘제소설시’를 쓴 시절, 소설을 불온시하여 언급조차 삼가던 시대가 아니던가. 그런데도 두 사람은 부드러운 터치로 ‘제소설시비평’을 하고 있다. 애정소설을 탐독하여 맛보았을 즐거움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그 맛의 당도도 꽤 높았을 것임도.
구체적으로 보자.
권전의 시에 보이는 영이(榮伊:영영)는 <상사동기>의 여 주인공이다. 권전의 시는 남주인공인 김생과 영이가 이별하는 대목에 집중하여 슬픈 심경을 옮겼다. 그런데 독자의 1차적인 정서적 반응을 작시한 것일 뿐이다. 바짝 다가들자면 소설의 인물에 대한 비평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건의 시는 정서적 반응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다. 소설의 내용을 따라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의 통사적 문맥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기․승 구에서 지적하는 것은 김생과 영영의 만남이다. 만약 노복 막동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하는 계책을 일러주지 않았다면, 두 사람의 인연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찔러 말해 준다. 실상 노복 막동의 역할은 이 소설을 발단에서 전개로 잇게 하는 가장 중요한 동인이 되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소설 속으로 돌려 보자.
영영을 본 김생은 상사병으로 눕지만 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 다음 <상사동기> 원문을 읽어 보자.
생이 이 말을 듣고 처연히 깨달은 바가 있어 곧 막동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막동이 속으로 한참 생각한 뒤에 말했다.
“제가 도련님을 위하여 마륵지계磨勒之計를 하나 생각했으니, 낭군께서는 애태우지 마세요.”
김생이 말했다.
“그러면 장차 어떻게 하려고?”
막동이 말했다.
“도련님은 급히 좋은 술과 안주를 구하셔서 그것을 매우 사치스럽게 꾸며 곧바로 미인의 집으로 가서 마치 손님을 전송하려는 사람처럼 행세하십시오. 방 한 칸을 빌리신 다음 상을 벌려 놓고 저를 불러 손님을 청하시면, 제가 명을 받들어 갔다가 조금 뒤에 돌아와, ‘곧 오신답니다! 오신대요!’라고 대답할게요. 도련님이 또 저에게 명령하시어 다시 손님을 청하시면, 제가 또 명을 받들고 갔다가 날이 저문 뒤에 돌아와 ‘오늘은 전송하는 사람이 많아서 술에 취해 오실 수 없답니다. 내일은 꼭 오시겠답니다.’라고 말하겠습니다. 이 때 도련님이 주인을 불러 앉히신 다음 준비해 간 술과 안주로 취하도록 마시게 하고는 기색氣色을 보이지 말고 물러 나오세요. 다음 날도 또 그렇게 하시고 그 다음 날도 그와 같이 하세요. 그러면 처음에는 주인이 고맙게 여기다가 두 번째는 은혜에 감격할 것이며, 세 번째는 필히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고맙게 여기면 보답할 것을 생각하고 은혜에 감격하면 죽어서라도 그 은혜를 갚을 것을 생각하며, 의심을 품으면 반드시 그 까닭을 물을 것이지요. 이 때 도련님이 흉금을 털어놓아 정성을 다해 말씀하신다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김생이 충분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여 기쁜 마음에 흐뭇이 웃으면서 말했다.
“내 일이 잘 될 것 같은데.”
막동 녀석이 말한 ‘마륵지계’는 ‘흑인 노예인 마륵(磨勒)의 꾀’라는 재미있는 말이니 이것부터 설명해보자.
‘마륵’은 태평광기(太平廣記) 권194편, ‘검협전(劍俠傳)’에 보이는 <곤륜노>에 나오는 흑인노예이다. 이 고사는 배형(裵鉶)의 전기(傳奇)에도 포함되어 있으며, 후세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여 원나라에서 명나라의 희곡 작가들이 이 고사를 작품의 제재로 삼았다. 내용은 마륵이라는 곤륜노가 지혜와 무예로써 주인인 최생(崔生)이 사모하는 여인을 만나게 도와준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막동이 저 이야기를 어찌 아는지, 이 마륵지계를 끌어다 쓴다. 물론 막동의 ‘마륵지계’는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건은 이곳을 놓치지 않았다. 소설을 읽어 내는 이건의 눈썰미가 예사롭지 않다. 이렇듯 소설의 핵심 줄거리를 파악하여 소설 구성의 문제를 비평하는 것은 이건 소설비평의 독특성이다. 소설을 읽은 독자의 정서적 감흥에서 머무르지 않고, 작품을 이해하려는 적극적인 비평안, 이건의 제소설시들 이전과 이후의 작품들을 보아도 이러한 비평은 쉽게 찾기는 어렵다. 이건의 이러한 비평은 작품의 연결, 그러니까 소설의 줄거리를 따라잡은 비평이다.
아래 시 역시 이건 시에 나타난 소설비평을 잘 볼 수 있다.
봄을 찾다 남은 한은 고금이 같지만
바다와 산을 두고 맹서한 인연은 펴지 못했네.
종내 죽어서 한 몸이 되었으니
아! 하늘은 사람을 헤아리지 않는구나.
尋春遺恨古今均 海誓山盟結未伸
終使化爲連理樹 堪嗟天只不量人
이 시는 「제교홍기題嬌紅記」이다.
아쉽게도 이 <교홍기>라는 소설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 소설의 명칭은, 연산군 12년 4월 13일(임술)의 실록에 “위생(魏生)이 항상 내실에 있으면서 시희 난초(蘭苕)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교홍기> 한 권을 보았다 하였으므로 <교홍기>가 있는 줄 알았는데, 지금 내린 책이 바로 그 책이다. 앞서 하교에 ‘으슥한 집 죽창이 아직도 예와 같네.(竹窓幽戶尙如初)’란 글귀도 역시 여기에 실려 있는데, 다만 한어(漢語)가 있어 해석할 수 없는 데가 많으므로 문자로 주를 달아 간행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 소설은 본래 원나라 송매동(宋梅洞)이 지은 <교홍기>를, 유동생(劉東生)이 사곡화(詞曲化) 한 것으로 명칭은 <신편금동옥녀교홍기>이다. 현재 발견되지 않아 내용을 알 수 없지만, 이건의 시로 미루어 볼 때 애정전기소설류임을 짐작케 한다.
이건 이전의 제소설시비평은 괴이․변환․풍류화병 등의 용어와 작가론적 비평․기문 등의 문체론에 대한 비평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이건은 소설의 구성에 큰 관심을 보였다. 이것은 소설의 서사적 구성을 정확하게 파악하여 집중적으로 비평하는 독서체험을 시를 통하여 제시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이건 시의 도두뵌 점은, 위처럼 기․승․전구가 모두 작품의 구성과 관련된 언급이라는 점이다. 그동안 몇 보인 절구 형식의 ‘제소설시’에서는 전․결구가 대부분 작가의 감상평이었기에, 이건이 소설의 내용에 집중하여 비평하는 것을 자별히 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무리를 짓자. 이건의 ‘제소설시’가 모두 비평의 수준이 높다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문’과 ‘소설’의 차이가 왕청스러웠던 시절임을 고려해 본다면, 저 제소설시들에서 찾을 수 있는 공력은 그의 소설에 대한 적공이 예사롭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임에 틀림없다.
소설의 장적을 정리한 유만주
유만주의『흠영』은 그 자체가 소설에 대한 애모이다.
소설에 대한 단순한 적바림으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문집에는 소설의 출생비밀과 가족관계가 세세히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흠영(欽英)』은 통원通園 유만주兪晩柱(1755 ~1788)의 일기로 영조 51년(1775)에 시작하여 정조 11년(1787)에 끝나고 있다. 이 책에는 저자의 굉박한 독서 편력을 바탕으로 한 학문과 사상이 들어 있다. 우리 고소설사에서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지만 아직 그에 대해 알려진 바 없다. 그의 가계를 조금만 살피자.
통원 유만주는 경화 노론계의 인물로 명문거족인 기계(杞溪) 유(兪)씨이다. 유만주는 유한준(兪漢雋:1732 ~1811)과 순흥(順興) 안씨(安氏)부부 사이에 외아들로 태어났는데, 5대조는 척화파로 유명한 충간공(忠簡公) 유황(兪榥)이고, 4대조는 송시열의 문하생인 유명뢰(兪命賚), 증조(曾祖)는 현감을 지낸 유광기(兪廣基), 조부는 학문과 문학으로 이름 난 유언일(兪彦鎰)이다. 부친 유한준은 1768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문장으로 명성이 있었으나 벼슬 운이 없었던지 겨우 음직으로 김포․부평 등지의 고을 원을 거쳐 형조참의를 지냈다. 유한준은 16세에 부친을 잃고 17세에는 형마저 잃었기에 아들 유만주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였다. 유만주 또한 아들 구환(久煥:1773~1787)을 깊이 사랑했는데 아들이 14살에 요절하고 만다. 그는 깊은 상심으로 인하여, 아들이 죽은 다음 해 34세로 이승을 하직하고 아들을 따라간다.
이제 『흠영』으로 말머리를 돌려 본다.
유만주는 『흠영』에서 중국의 문학사에 대하여 깊이 있는 이해를 바탕으로 우리의 고소설비평에 진지한 관심을 보인다. 통원의 중국 문학사에 대한 인식은 해박하였다. 통원은 “당우(唐虞) 삼대는 경(經)의 시대요, 주말(周末)은 제자백가의 시대요, 한나라 위나라는 고문의 시대요, 당나라 송나라는 시문의 시대요, 원나라 명나라는 소설의 시대이다.”라고 아예 통시적으로 중국문학사를 꿰뚫어 시대구분까지 해놓을 정도였다.
책상물림치고는 소설에 대한 탄탄한 지식으로 무장하였기에, 그의 소설비평 또한 진수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내가 아는 한 이 『흠영』에서 ‘우리 고소설비평사는 긴 숨고르기와 함께 소설인식의 물꼬를 완연히 텃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통원의 이러한 해박한 소설에 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저술된 『흠영』은 두 가지의 큰 의미가 있다. 첫째로 우리 고소설비평의 폭을 일기문학으로까지 확장시켰으며, 둘째로 우리 고소설 최초의 소설비평 이론서라는 점이다. 물론 『흠영』속의 소설비평들은 18세기의 전후를 이어주는 소설비평어들의 가교 역할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흠영』의 의의 두 번째를 집중적으로 살펴보자. 통원의 『흠영』이란 일기에 보이는 고소설비평 중 특이 한 것은 소설에 대한 기원설과 소설의 정의, 그리고 소설비평 용어 등이 허다히 보인다는 점이다. 소설에 대한 생각을 모람모람 모아 분석적으로 접근했다는 것이 놀랍다.
유만주는 『흠영』에서 소설의 기원으로 불전佛典․장자莊子․우초虞初 등 세 가지로 고증하고 있다. 모두 현재의 연구자들이 밝히는 중국 소설 기원설과 부합한다. 실상 당시에 소설에 대한 기원을 이렇게 정확하게 지적한 것은 우리의 소설비평에서 찾기 어렵다. 소설의 기원을 ‘야사野史’정도로 보는 것이 고작이었으니 말이다. 이로 미루어 유만주의 소설에 대한 식견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세 가지 설 중 ‘불전기원설佛典起源說(內典說)’만을 살핀다.
유만주의 글을 보면 소설의 기원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이 내전설內典說이다.
“소설은 한 글자나 한 격식이라도 내전(內典)에서 나오지 아니한 것이 없다. 내전이 아니면 소설이 이루어지지 아니하니, 소설가는 마땅히 내전을 신주와 제문처럼 하여야 한다(小說 無一字無一格 不出於內典 非內典不成爲小說 小說家當尸祝內典).” (유만주, 흠영 5)
여기서 내전內典은 불교 서적을 말한다. 소설과 불교의 서적을 이렇게 연결지어 평한 것은 유만주의 견해가 처음이다. 하지만 그가 본 불경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그는 또 불경과 <서상기(西廂記)>를 연결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비로소 『서상기』 일부가 내전체임을 알았다. 내전은 게송 사이에 긴 글이 있고 『서상기』는 말에 잡박하게 글을 기록하였다. 그러니 서상기독법(西廂記讀法)과 내전의 설경(說經:경전을 해설하는 일)은 같고 표면에 이름을 세운 것과 그 뜻을 펴 부연한 것이 또한 『금병매』 등 여러 책의 연원을 열었으니 내전과 소설은 실상 표리관계다(余 始知西廂是一部內典體格 內典以偈間長行 西廂以詞雜記文 而西廂讀法與內典說經同 而其表立名號 演其意趣 又開金甁諸書之淵源 內典小說實相表裏).”
<서상기>중국 원나라 때의 희곡이다. 당나라 때 원진(元稹)이 지은 <회진기(會眞記)>에서 취재한 <동서상>을 희곡화한 소설로 장군서라는 청년이 최앵앵이라는 미인을 사모하여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한다.
“내전의 문장은 비록 간략하나 그 말이 자세하고 섬세하여 다시 남음이 없다. 이것이 흘러 후세에 소설의 조종(祖宗:시조가 되는 조상)이 된 것이 아닌가(內典文 雖簡而其辭 則委曲纖細 更無餘有 此所以流而爲後世小說之祖宗也歟).”
다음을 보면 그가 소설의 근원을 불경으로 잡고 있는 더욱 구체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내전은 ‘무슨 인연 때문인가’와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라는 두 마디의 말을 표지로 하며 그 아래에 섬세한 것을 기술하는 것이 많다. 소설가는 이 뜻을 꿰뚫어 왕왕 일을 서술하다가 간관청설(看官聽說)이라는 한 마디를 삽입하니 분명히 이것은 내전으로부터 훔친 것이다(內典多標 以何因緣 所以者何 兩串語 而其下敷演纖細 小說家透見此義 故往往於敍事中 揷入看官聽說一語 明是從內典偸來者.)”
통원 유만주가 내전을 소설의 조종祖宗으로 여기는 이유는 “무슨 인연 때문인가(以何因緣).”와 “이렇게 된 원인은 무엇인가(所以者何).”라는 두 구절이 때문이다.
이 구절은 불교의 인연설因緣說과 관련이 있다. 원인인 소종래를 밝히다보니 하나의 이야기가 꾸며지고 이를 자세히 기술하다보니 소설의 문체와 유사하다고 보는 것이다.
소설의 곡진한 글맛이 불경의 서사성(敍事性)과 연관된다고 이해한 통원의 식견이 놀랍잖은가.
실례를 들자면, 『석가여래십지수행기釋迦如來十地修行記』같은 것은 고려 대에 형성․집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조선조에 유전되면서 <금우태자전金牛太子傳>․<선우태자전善友太子傳>․<실달태자전悉達太子傳>등 10여 편의 소설을 유통시켰다. 또 세종과 세조 조에 불경 언해가 주목된 이래, 부처를 『석보상절釋譜詳節』이라는 책을 통해서 장편소설로 입전入傳하기도 하였으며, 각훈覺訓의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이나 『동사열전東師列傳』에는 전기소설 등이 들어 있음이 이왕의 연구를 통해서 이미 확인되었다.
이러한 저간의 연구 결과물들로 미루어 볼 때, 통원의 견해는 소설의 기원설로 의미 있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유만주가 우리 고소설비평사에서 발견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러나 그는 현재 우리 고소설 연구의 고수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가 이 『흠영』을 지은 것은 20 ~30대 초반이었지만 그는 이미 애송이가 아니었다. 소설을 선회하며 좌충우돌 소설의 정의, 문체, 비평어들을 날린다.
현재의 소설계와 학계의 무림강호라 뽐내는 이들, 모두 유만주에게 십여 수의 초식을 배워야하거늘 영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소설을 팔아 신선이 된 조선 제일의 책장수 조신선
정약용(1762~1836), 조수삼(趙秀三·1762~1849),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공통점은? 모두 조신선이라는 일개 책쾌(冊儈:책거간꾼, 책주름)에 대한 전기를 지었다는 점이다. 조선후기에는 수많은 책쾌가 있었다. 조신선 이외에도 배경도(裵景度), 홍윤수(洪胤琇)같은 책쾌의 이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홍윤수 같은 책쾌는 몰락했으나마 양반출신이었다. 그런데 책쾌로서 전기에 등장한 이는 조신선 이외에는 없다. 조신선이 책쾌 중, 단연 돋보인다는 의미이다.
아래는 정약용에 의해 입전된 내용인데, 일개 책거간꾼이 신선으로 설정되었다는 것이 흥미롭다. 정약용의 전집에는 모두 5편의 전이 있는데 <조신선전>도 그 중 하나다.
조신선(曺神仙)이라는 자는 책을 파는 아쾌(牙儈 중간 상인)로 붉은 수염에 우스갯소리를 잘 하였는데, 눈에는 번쩍번쩍 신광(神光)이 있었다. 모든 구류(九流)ㆍ백가(百家)의 서책에 대해 문목(門目)과 의례(義例)를 모르는 것이 없어, 술술 이야기하는 품이 마치 박아(博雅)한 군자(君子)와 같았다. 그러나 욕심이 많아, 고아(孤兒)나 과부의 집에 소장되어 있는 서책을 싼 값에 사들여 팔 때는 배(倍)로 받았다. 그러므로 책을 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언짢게 생각하였다. 또 그는 주거를 숨겨서 어디에 사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그가 남산(南山) 옆 석가산동(石假山洞)에 산다고 하나, 이 역시 분명치 않다.
건륭(乾隆 청 고종(淸高宗)의 연호) 병신년(정조 즉위년, 1776) 무렵 내가 서울에 와서 있을 때 처음 조신선을 보았는데, 얼굴과 머리가 사오십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가경(嘉慶) 경신년(순조 즉위년, 1800)에도 그 모습은 조금도 늙지 않고 한결같이 병신년과 같았다. 근자에 어떤 사람이, 도광(道光 청 선종(淸宣宗)의 연호) 경진년(순조 20, 1820) 무렵에도 역시 그랬다고 하였으나, 그때는 내가 직접 보지 못했다. 옛날에 소릉(少陵)이 이공(李公)이 말하기를, "건륭 병자년(영조 32, 1756) 무렵에 내가 처음 보았는데, 또한 사오십쯤 되어 보였다." 하였다. 앞뒤를 모두 계산해 보면 1백 살이 넘은 지 이미 오래이니, 그 붉은 수염이 혹 무슨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외사씨는 논한다.
도가(道家)에서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갖는 것을 신선이 되는 근본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조 신선은 욕심이 많으면서도 오히려 이처럼 늙지 않았으니, 혹 말세가 되어 신선도 시속(時俗)을 면할 수 없어서인가?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7권)
위 전을 보면 조수삼이나 조희룡의 <조신선전>과 별다른 차이점이 없다. 그런데 왜 일개 책장수에게 신선이란 칭호를 붙였을까?
다산 선생은 이글에서는 조신선의 극단적인 양면, 즉 신선과 장사치를 그리고 있다.
우선 신선으로서의 면모부터 보자. ‘붉은 수염에 우스갯소리를 잘하고, 눈에는 번쩍이는 광채가 있는가하면, 모든 책이란 책은 샅샅이 모르는 것이 없고, 여기에 술술 이야기하는 품이 군자와 같다고 한다. 더욱이 여기에 1백 살이 넘은 지 이미 오래라고 한다. 지금도 평균 연령이 80을 넘기기가 어려운 판이다. 조희룡은 한 술 더 뜬다. 조신선은 늘 나이를 60세라고 한다면서, 70이 된 어떤 노인이 자기가 아이 때 조신선을 보았는데 그때도 60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어 다산 선생은 어림셈 쳐 조신선의 나이를 ‘백삼사십’ 쯤으로 잡고는, 그런데도 얼굴 모습은 사십이 못 되어 보인다고 적어 놓았으니 저 말을 믿어야할 지 생각이 안 선다. 조신선을 신선으로 등극시키려니 그러하겠지만 서도 조신선이란 인물의 특이함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다산은 조신선이 장사치답게 욕심이 많았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하필이면 고아나 과부의 집에 소장되어 있는 서책을 싼 값에 사들였고, 팔 때는 배나 이윤을 챙겼다. 지금도 우리는 서점을 운영한다면 일반 장사꾼과는 다르게 보는 데, 책을 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언짢게 생각’할 정도로 이윤을 챙긴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가족을 위하여 썼다는 기록도 그 자신이 부유하다는 기록도 없다. 조수삼이나 조희룡의 <조신선전>에서도 그 대답은 알 수가 없으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곰곰이 생각해 보시라.
다만 조희룡의 <조신선전>에 그가 신선이 된 연유를 한 자락 놓고 있다. 그것은 “책 파는 것을 스스로 즐겼다”는 ‘육서자오(鬻書自娛)’ 넉 자이다.
책 파는 것을 스스로 즐겼다.
신선이 되는 한 방법이란다.
책 쓰는 것을 스스로 즐겼다.
책 보는 것을 스스로 즐겼다.
그런데 신선이 될까?
<조신선전>∥조희룡전집, 호산외기, 한길아트, 1998(영인), pp.47~48
고소설을 최초로 정리한 비극적인 천재 김태준
현재 모든 고소설 연구는 조선소설사(朝鮮小說史)의 각주에 불과하다!
각주(脚註)란, ‘논문 따위의 글을 쓸 때, 본문의 한 부분의 뜻을 보충하거나 풀이한 글’ 정도의 의미이다. 조선소설사를 이렇게 잔뜩 추켜세우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하다. 조선소설사 이 다섯 글자를 우리가 처음 본 것은 엄혹한 일제치하인 소화(昭和) 8년, 1933년이다. 집필을 시작한 지 3년 만이었다.
조선소설사는 1편에서 소설의 정의 및 개관을 하고 2편에서는 설화시대의 소설, 3편 전기소설(傳奇小說)과 한글 발생기, 4편 임진병자양란 사이에 발흥된 신문학, 5편 일반화한 연문학의 난숙기, 6편 근대소설일반, 7편 문예운동후 사십년 간의 소설관까지로 되어 있다. 우리 문학사 최초로 설화시대부터 일제치하까지 중요한 소설사를 통시적으로 정확히 짚은 셈이다. 조선소설사 이후, 여러 선각들에 의해 지어진 우리 고소설사는 사실 조선소설사 를 참조하지 않은 서적은 단 한권도 없을 것이다.
1933년 청진서관에서 출간된 조선소설사는 이후 1939년 학예사에서 조선문고 2~6으로 나왔다. 이것이 증보판이다. 1935년엔 춘원 이광수가 「조선신문예강좌청강기초(朝鮮新文藝講座聽講記抄)-조선소설사」를 사해공론(사해공론사, 1935) 창간호에, 조윤제가 『문장(文章)』 2권 7호에「조선소설사개요(朝鮮小說史槪要)」(문장사, 1935)라는 장편논문을 실었지만 내용이나 쪽수로나 김태준의 조선소설사에 미치지 못했다.
이 조선소설사를 지은 이가 바로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김○준’으로 배웠던 김태준이다. 호를 천태산인(天台山人)이라 한 김태준(金台俊,1905 ~1949)은 공산주의자였다. 그는 남로당 문화부장 겸 특수정보 책임자로 지리산 빨치산들을 대상으로 특수문화 공작을 하다가 국군토벌대에 체포되어 서울 수색 형장에서 총살되었다. 그날이 1949년 11월 7일이었다. 민족의 비극은 이렇게 또 한 사람의 천재를, 국문학계의 큰 별을 비운에 보내야만 하였다. 그 날 이후 ‘김태준’의 이름은 ‘김○준’으로 불리었다. 그의 이름 석 자는 남한에서 부르는 것 자체가 금기였다. 그렇게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을 거친, 1987년에야 비로소 우리에게 김태준으로 돌아왔다. 그가 수색에서 처형된 지, 40년에서 두 해 모자란다.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문학에까지 이토록 잔인하게 대했다.
김태준은 1905년 평북 운산(雲山)에서 태어났다. 그는 유교적인 집안에서 태어나 서당교육을 받았고 특이하게 전라도에 있는 이리농림학교를 나와 조선 천재들만이 모인다는 경성제국대학에 들어간다. 경성제국대학은 지금의 서울대학교 전신이지만, 입학 조건으로 보자면 지금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의 95%는 들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내로라하는 수재만 손꼽아가며 입학시켰기 때문이다. 김태준은 1928년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졸업한 후, 1931년 같은 대학 법문학부 중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중국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하면서 ‘경제연구회’에 들어가 사회주의 철학을 공부하였다. 재학 중이던 26살(1930년) 때 ‘조선소설사’를 <동아일보>에 68회에 걸쳐 연재할 정도로 우리 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이 ‘조선소설사’가 1933년 청진서관에서 출간된 조선소설사의 모태가 된 셈이다.
김태준은 1931년에 이희승(李熙昇) ·조윤제(趙潤濟) 등과 조선어문학회(朝鮮語文學會)를 결성하였다. ‘조선어문학회’는 경성제국대학 조선어학 및 문학과 출신과 재학생들이 조직한 학회로 우리말을 통한 조선 지식인 애국청년들의 모임이었다. 그해 김태준은 조선소설사의 전신격인 191쪽의 조선한문학사(朝鮮漢文學史)(조선어문학회 간행, 1931년)를 발간하였다. ‘조선어문학총서 제1권’으로 출간된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학사(漢文學史)였다. 한문 전래(傳來)로부터 한문 쇠퇴기인 조선말까지의 한문학을 결산해 본 저서이다.
조선한문학사는 서론ㆍ상대편ㆍ고려편ㆍ이조편ㆍ결론의 4편으로 분류, 다시 각 편을 도합 26장으로 나누어 체계 있게 서술되었다. 우리나라 학자들의 학풍과 작품을 오로지 문학적 입장에서 비평ㆍ기술함과 동시에 우리나라 한문학의 사조의 흐름과 변함, 중국문학이 우리나라 한문학에 끼친 영향 등을 규명했으며, 특히 이조편에서는 유학으로부터 문학을 설득력있게 분리했다. 또한 방랑시인 김립(金笠)ㆍ황오(黃五)와 같이 여항의 우스갯소리로만 치부되던 이들의 자료를 기록하고 배척하던 소설을 고취하여 김만중(金萬重)ㆍ김춘택(金春澤)ㆍ박지원(朴趾源) 등의 업적과 재능을 짚어 냈다. 그는 유학과 문학을 엄연히 구별하여 한문학의 범주를 확정지었다. 그러나 한문학을 중국문학의 방계로 보아 시에만 치우쳤고, 소설 등은 완전히 빼버렸다. 여기에 극히 제한된 자료수집, 단시일의 저술에 기인한 여러 오류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조선조 말기까지의 우리 한문학 유산을 통시적으로 체계를 세워 서술하여 한문학연구에 선구자적인 구실을 한 점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소중한 의의이다.
우리나라의 한문학과 국문학은 이렇게 김태준의 이 조선한문학사와 앞의 조선소설사가 발간됨으로 비로소 ‘한국문학사’를 정립시키게 된 것이다.
김태준의 우리 문학에 대한 행보는 이후도 조선가요집성(1934) 청구영언(1939) 고려가사(1939)로 이어진다.
김태준은 1936년 명륜학원 강사를 거쳐, 1939년에는 경성제국대학 강사를 역임한다. 1941년 경성 콤그룹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루었고, 1944년에는 옌안(延安)으로 가서 항일전선에 참가하였다. 8 ·15해방 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에서 핵심이 되는 전국인민위원 55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힐 정도로 위력이 막강하였다. 그리고 그해 12월 경성제국대학이 문패만 바꿔 단 경성대학에 복직된다. 복직 후에는 3명의 총장 후보 가운데 한 명으로 뽑힐 만큼 경성대학 교수·학생·졸업생 60명으로 짜여진 전학대의원회 지지는 절대적이었다. 이후 그는 재건된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중앙위원과 문화부장이 되었다.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상임위원 겸 문화부 차장이 되었는데, ‘국대안 반대 사건’으로 교수직에서 쫓겨났다. 김태준의 성향은 분명하였다. 그의 말을 경청해보자.
“조선은 지난해 8·15까지 일본제국주의, 식민지, 반봉건사회였다. 8·15 이후도 침략자 일본놈은 패퇴했으나 일제팟쇼 잔재가 많이 남아 있어서 반식민지, 반봉건사회의 행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운동은 반제, 반봉건 민족혁명인 것이고 우리 정치노선도 근로대중, 소시민, 지식분자, 진보적인 민족부르조아들을 무산계급 영도 밑에 집결해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을 구성해 일제 잔재 반동팟쇼분자와 봉건 잔재를 숙청하고 민주정치를 실시하는 데 있다. 따라서 우리 문화노선도 이에 배합하여 무산계급의 영도 밑에 일제적인 것, 반동적인 것, 봉건적인 것을 배제하면서 민주문화를 건설하는 데 있다.”
“민주정치를 실시하는 데 있다.”라고 하였지만,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와는 다른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은 <민주주의 12강>에서 따온 김태준의 목소리인데, 해방 1주년 기념으로 ‘문우인서관’에서 펴낸 책에 실려 있다. 김태준은 또 이렇게 말한적도 있다.
‘3·8 이북서 찾아온 친구 하나가 백만장자의 아들로 몸집이 뚱뚱하고 큰소리 너털웃음하고 이 세상에 ‘불가능’한 일 없다고 하더니 토지개혁 이후 수일 전에 그를 만나보니 얼굴이 몰라보게 야위고 약간 가지고 온 돈냥은 모두 소비하고 가여운 ‘거지’가 되어 도로에 방황하는 것을 볼 때에 이 걸인이 작일까지 호걸웃음 하던 밑천은 전혀 인민의 피땀을 긁어모은 토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막살이에 사는 가난뱅이와 한길가의 거지들은 늘 저열한 것 같고 배뚱뚱이 모리배 팟쇼분자 관료 자본가 등 외래 반동세력의 주구들은 언제든지 자기네가 선천적으로 잘나서 그런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8·15 이후 해방은 되었다고 하나 이 남조선은 ‘친일 팟쇼분자 모리배의 낙원’이라는 말을 들을 적에 비상한 불쾌를 느낄 뿐 아니라 친일파 팟쇼분자 모리배의 도량(跳粱:어떤 부정적인 사람이나 세력이 거리낌 없이 함부로 날뛴다는 뜻 )으로 인해서 혼란을 결과한 남조선의 대비극에 대하여 해방의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독립신보> 1947년 1월 8일치에 실린 글이다. 김태준이 이 땅을 떠난 지도 반백년을 넘어섰다. 공산주위는 이 땅에서 더 이상 레드콤플렉스를 자아내지 않는다. 하지만 김태준의 저 말이 왜 가슴 아프게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1936년 명륜학원 강사 시절의 김태준. |
김용직 『김태준 평전』(일지사, 1970)에서
김용직, 『김태준 평전』, 일지사, 2007 참조.
소설을 최초로 세계에 알린 벽안의 이방인들
푸른 눈의 의료인 알렌부터 소개한다.
그는 우리 고소설 <춘향전>․<심청전>․<흥부전>을 최초로 번역하여 서양에 알린 이다. 알렌은 외국인 중에서는 가장 먼저 고소설과 근접했으며, 가장 먼저 외국에 우리 고소설을 알린 푸른 눈의 이방인이었다. 알렌(H.N.Allen) 박사에 의해 1889년 뉴욕에서 출간된 『Korean Tales(한국 소설)』(New York:G.P.Putnam's Sone, 1889)에는 <춘향전>을 <Chun Yang>으로, <흥부전>을 <Hyung Bo and Nahl Bo>으로, <심청전>을 <Sim Chung>으로, <홍길동전>을 <Hong Kil Tong>으로 번역해 놓았다. <심청전>은 완역이 아닌 초역이었지만 조선의 고소설이 태평양을 건넌 첫 걸음치고는 꽤 큰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알렌이 아니었다면 우리 고소설이 세계에 알려지는 시기가 언제가 되었을는지 모를 일이었다.
알렌은 개화기 대한제국의 왕실에서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왕실의 주치의이기도 했고, 조선 선교의 기틀도 마련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은 알렌이 세웠다. 이 병원은 제중원이라는 개명을 거쳐, 지금의 세브란스 병원의 모체가 되었다. 또 그는 아관파천(1896) 때는 미국 공사관으로서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도 일조를 하였으며, 그가 의전용 어차(御車)로 들여온 자동차는 우리나라 최초라고 한다.
하지만, 알렌은 근대 조선의 역사에서 어두운 면 또한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주한 미공사관과 선교사로 활약하면서 조선의 각종 이권을 챙겼다. 알렌은 미국과의 관계 발전을 열망하는 고종의 각별한 대우를 받아 금광채굴, 철도와 전기부설 등 이권을 따냈다. 특히 조선 최대 금광으로 ‘노다지(No~touch)’라는 유행어를 남긴 운산금광 채광권에서 벌어들인 수익은 상상을 초월정도였다고 한다. 이밖에도 알렌은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J. Morse)에게 넘겨 수익을 챙겼고, 이후 모스는 이 부설권을 일본에게 170만여 원에 팔아 넘겨 일본의 조선침략과 수탈의 발판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쯤 해 두자.
고소설이 고소설에 끝나지 않음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1892년, 우리 고소설사에 하나의 이정표가 세워진다. 프랑스에서 <춘향전>이 <향기로운 봄(Printemps Parfume)>(Paris, 1892)으로 번역 된 것이다. 이 번역서는 보엑스(Boex)형제 중에 형(두 사람은 J.H.Rosny라는 필명을 같이 썼다.)과 홍종우(洪鍾宇(1854?~1913)라는 후일 김옥균을 암살한 이에 의해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동방의 이방인 홍종우가 프랑스에 도착한 것은 1890년 12월 24일이었다. 그는 1893년까지 프랑스 파리에서 2년간을 체류하며 보엑스(Boex)형제 중, 형인 Joseph Henri Honoe를 만나 <춘향전>을 번역하게 된 것이다.
보엑스(Boex)형제는 프랑스의 소설가로 형제가 함께 책을 쓰고는 J.H.로니라는 필명을 썼다. 그들 형제는 프랑스 최초의 아카데미 공쿠르 회원이 된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하다. 그들의 첫 공저는 자연주의 소설 <넬 혼>(1886)이며, <산 제물>(1887) <흰개미>(1890) <다니엘 발그레이브>(1905) <무거운 짐>(1906) 등 시적이고 모험적인 것을 가미한 과학소설 ·사회소설을 썼다. 1906년 이후 각각 단독으로 저술을 했는데, <춘향전>을 번역한 형은 <붉은 물결>(1912), <다른 생명과 다른 세계>(1923) 등 소설과, 평전 <발자크의 연애생활>(1930)과 <불가지론(不可知論)의 철학 다원론(多元論)─현상의 이질성과 불연속성에 관한 시론>(1919)이란 논문을 발표하는 등 극히 다방면에 걸쳐 활약하였다.
다음으로 독일인인 아르노우스(H.G. Arnous)를 들어야 한다. 아르노우스는 한말의 독일인 외교고문이었던 묄렌도르프(v. Moellendorff)의 수하에 있었던 사람이다. 아르노우스는 『Korea: Maerchen und Legenden; nebst einer Einleitung ueber Land und Leute, Sitten und Gebraeuche Koreas(한국의 민화와 전설. 그 나라와 백성 및 관습에 관하여 덧붙임』(H.G. Arnous, Leipzig: Friedrich 1893)을 지었는데, 이 책에는 <춘향전>을 <Chun Yang Ye>으로, <흥부전>을 <Hyung Bo und Nahl Bo>로, <심청전>을 <Sim Chung>으로, <홍길동전>을 <Hong Kil Tong> 번역하여 독일에 소개하였다. 이 해가 1893년이다. 아르노스의 이 책은 한국의 민담과 전설을 독일어로 번역하고, 덧붙여서 한국의 지리, 국민 그리고 풍토에 대하여 약간의 해설을 부록으로 실은 책자이다. 189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출간되었는데 146쪽의 분량이다.
1898년에는 <임진록>이 세계 문학 속으로 나아간다.
<임진록>을 번역한 이는 인천해관의 촉탁의사 및 총세무사로 활동하면서 입국 여행자 검역업무를 수행했던 미국인 의료선교사 랜디스(Eli Barr Landis,1865~1898)이다. 그는 <임경업전>을 <A Pioneer of Korean Independence>으로 번역하여『The Imperial & Asiatic Quarterly review』Ⅵ October에 실어 놓았다. 이 해가 1898년이다. 이 번역을 마치고 그는 이승을 달리했다. 랜디스는 펜실베니아 출신으로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영국 성공회 소속 선교회를 따라 조선에 온 이방인이다. 랜디스는 이 외에도 우리나라의 불교, 민속, 유교, 과학, 역사 등에 걸쳐 22종의 논저를 남겼는데 <임경업전> 번역은 역사에 넣었다. 랜디스는 8년 동안 머물며 우리의 고아들을 돌보며 선교활동을 하다가 장티프스에 걸려 요절하였다. 그의 나이 34세, 1898년 4월 16일이었다. <임경업전>이 이해 10월 출간되었으니 그의 유고인 셈이다. 그는 그가 사랑했던 조선의 인천에 묻혔다. 언제든 인천광역시 연수구 청학동 인천 외국인 묘지에 가면 고이 잠든 그를 만날 수 있다.
우리 고소설에 관심을 갖은 이로는 모리스 쿠랑(M.courant,1865~1935)을 빼 놓을 수 없다. 쿠랑은 우리 소설을 번역하진 않았지만 고소설의 유통과 환경을 잘 짚어 놓았으니, 그 책이 한국서지(韓國書誌)이다. 쿠랑이 도쿄의 프랑스 공사관에서 서기관 겸 통역관으로 있었던 1894년에서 1895년 사이에 한국서지 제1권, 제2권이 발행되었고, 이듬해인 1896년, 그가 천진(天津) 영사관에 재임하고 있을 때 제3권이 발행되었다. 쿠랑은 그 뒤에도 연구를 계속하여 본국에 귀환 후인 1901년 보유판(補遺版: Supplemant a la Bibliographie Coreenne)이 나오게 됨으로써 한국서지 전 4권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이 책에는 “중류계급의 사람일지라도 그가 이야기책을 들고 있는 것을 남에게 보이기를 부끄럽게 여겼다.”는 등 고소설에 관한 많은 기록을 산견할 수 있다.
1922년 우리 고소설사에서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기록이 만들어졌다. 비로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이 <구운몽>을 <The Cloud Dream of Nine>(London: O'Conner, 1922)으로 영국에서 간행한 것이다. 게일(James Scarth Gale, 1863~1937) 선생의 한국명은 기일(奇一)이다. 벽안의 게일, 아니 기일은 캐나다 선교토론토대학교의 학생기독청년회의 파송선교사로서 1891년에는 부산을 중심으로 전도 사업에 전력한 이다.
이 글을 쓰며 안쓰러운 우리 고소설과, 고소설이 몸담고 있는 국문학의 현재를 생각해 본다. 한 때는 대학에서 국문학이 만학의 제왕으로도 군림하던 시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는 ‘국어국문학’이라는 문패도 지키지를 못하는 현실이다. 저 푸른 눈의 이방인들에게 참 미안하고도 부끄럽다는 생각이다.
판소리계 소설을 정리한 신재효
고심이 많았다.
신재효, 그가 정리한 판소리계 소설만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끼 타령>․<적벽가>․<가루지기타령> 등 여섯 편이나 된다. 판소리 여섯마당의 사설은 그의 손에서 정리되어 오늘에 이른다. 당연히 고소설 이본으로 보면, 그는 2)장 ‘작가론’에 들어 가야할 인물임에 틀림없다. 신재효가 판소리의 이론가요, 개작자요, 후원자라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도 없다. 그런데도 미리 당겨 고소설계의 중요 인물에서 신재효를 먼저 보는 이유는, 그가 고소설 작가로 보기에는 무언가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다. 사실 고소설을 연구하는 자들에게 신재효라는 이름은 반가우면서도 떨떠름한 이름이다.
신재효에 대해 살피면서 그 이유를 설명해보겠다.
신재효(申在孝,1812~1884)는 순조시대에서 고종시대를 산 전북 고창 출신의 판소리 대가이다. 본관은 평산(平山)이요, 자는 백원(百源), 호는 동리(桐里)이다. 그의 집안은 본래 경기도 고양이었으나, 서울에서 경주인(京主人)을 지내던 아버지 광흡(光洽)이 고창에 내려와 관약방(官藥房)을 경영하면서부터 아예 눌러 살게 되었다. 아버지 직업인 경주인이 여간 흥미로운 직업이 아니다. 물론 아버지의 이 직업이 있었기에 신재효가 판소리에 일생을 바칠 수도 있었다. 신재효는 양반도 그렇다고 농토를 가진 자가 아니었다. 그가 고창현감이던 이익상(李益相) 밑에서 이방이나 호장이라는 향리직에 있으면서도 평생을 판소리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아버지의 경제적 도움 때문이었다.
여기에 가정도 그가 판소리에 전념하도록 한 몫을 하였다. 그의 가정은 불우하였다. 첫부인과는 그의 나이 26세 때 아이 하나 없이 사별하였고, 둘째 부인은 외딸만 남기고 역시 사별했으며, 연령차이가 20년이나 나는 세 번째 부인 또한 1남 2녀를 낳고 젊은 나이로 사망한다. 이때 신재효의 나이는 56세였고 이후 그는 만년을 홀로 살아간다.
“저 아까운 모 다 밟힌다.”
신재효의 재기와 함께 소리에 대한 관심을 알 수 있는 말이다. 신재효는 많은 광대를 길러냈는데 이런 일화가 있다.
한 번은 광대가 단가를 소리하는데, “백구야 훨훨 날지마라”는 첫머리를 벼락같이 질러대었다. 그러자 신재효가 “나는 백구가 멈추기는커녕 자든 백구도 놀라 달아나겠다.”라고 호통을 쳤다한다. 백구가 날지 않게 하려면 작은 소리를 내야할 것 아닌가. 그런데 소리를 벼락같이 질렀으니, 노래 가사와 행동의 엇박자를 지적하는 말이다.
“저 아까운 모 다 밟힌다.” 역시 이와 같은 경우이다. 광대가 <농부가>를 부르는데, 아마 모를 들고 꽂는 시늉을 하며 앞으로 나오기에 호통을 친 것이라 한다. 모를 내면 뒤로 물러서야지 앞으로 나오면 그 모가 다 밟히지 않겠는가.
작은 일화라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신재효의 소리에 대한 애정을 어림할 수 있는 일화인 듯하다. 이 일화는 가람 이병기 선생의 <토별가와 신오위장>(『문장』 2권5호, 문장사, 1939)에서 발췌하였다.
차설, 신재효는 그의 경제적인 부를 아낌없이 판소리에 쏟았다.
많은 판소리꾼들이 그에게 후원을 입었다. 이날치(李捺致)·박만순(朴萬順)·전해종(全海宗)·정창업(丁昌業)·김창록(金昌祿) 같은 명창들이 그의 지원을 받았으며, 진채선(陣彩仙)·허금파(許錦波)와 같은 최초의 여류 명창은 그가 길러낸 인물들이다.
그는 한 편으로는 판소리의 이론을 정립했다. 장단에 충실하고 박자의 변화를 엄격하게 제한하는 동편제와, 잔가락이 많고 박자의 변화가 많은 서편제에서 각기 장점을 취해 판소리 이론을 정립했다. 그가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 짧은 노래로 지은 <광대가(廣大歌)>는 판소리 사설과 창곡, 창자의 인물됨과 연기능력이 어우러져야 한다는 판소리 4대 법례를 제시한 판소리 이론화를 꾀한 단가(短歌)이다. 이 단가는 현재 불리지 않는데, 사설 내용은 광대노릇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설명하고, 광대로 성공하는 데 인물·사설·득음(목청)·너름새(극적인 재질) 등 4조건을 들었다.
또 역대의 명창·광대들의 노래솜씨를 중국의 대문장가들과 비교 설명하고 있는데, 송흥록(宋興祿)은 이태백(李太白)에, 모흥갑(牟興甲)은 두자미(杜子美)에, 권사인(權士人)은 한퇴지(韓退之)에, 신만엽(申萬葉)은 두목지(杜牧之) 등에 각각 비유하고 있으니, 그의 판소리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그쳤으면 연구자들이 신재효의 이름 앞에서 고의춤을 쥐고 엉거주춤할 이유가 전연 없다.
신재효는 만년에 향리직에서 물러나 판소리 12마당 가운데 〈춘향가〉·〈심청가〉·〈박타령〉·〈토별가〉·〈적벽가〉·〈변강쇠가〉의 6마당을 골라 그 사설을 직접 개작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입으로 구비 전승되던 판소리를 문자로 정착시켜 후대에 전승을 매개했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의의가 있지만, 그것은 의의로 그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판소리는 조선 후기 하층민의 삶의 비애를 아비로 삼고, 구수한 토속적 어휘를 어미로 삼아 태어난 서민의 애환을 담은 노래이다. 따라서 서민층의 애환과 양반에 대한 비판, 풍자가 날실과 씨실로 잘 엮여진 것이 판소리다. 당연히 이것이 판소리의 매력임에 틀림없다. 신재효는 이러한 판소리를 해체하여, 양반층의 구미에 맞는 유가적 세계관으로 개작하여 버렸다. 만약 신재효가 이를 양반성이 강한 한문투의 어휘로 정리하지 않았더라면, 생생하게 살아있는 입말의 입체적인 판소리사설이 입과 입으로 전승되어 풍부하게 남아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구체적으로 그 예를 한 번 보자.
아래 예문은 이고본(李古本)<춘향전>과 신재효가 개작한 <남창춘향가>이다. 이고본(李古本)<춘향전>이 신재효가 개작한 <남창춘향가>보다 약간 후대의 것이 아닌가 한다. ‘이고본’이란, ‘이명선 선생 소장의 고본’이란 뜻으로 흔히 학계에서 부르는데 『문장』 2권 10호(1940. 12월호)에 실려 있다. 구수한 입심이 제 맛이기에 원문 표기를 그대로 따랐다.
(방자가) 진허리 참나무 뚝 꺽거 것구로 짚고 출님풍종 맹호갓치 밧비 뛰며 건너가서 눈 우의다 손을 언고 벽역갓치 소래을 질너,
“이애 춘향아 말듯거라 야단낫다 야단낫다.”
춘향이가 깜짝 놀나 추천줄의 둑여날여와 눈 흘기며 욕을 하되,
“애고 망칙해라 제미X 개X으로 열두다섯 번 나온 년석 누깔은 어름의 잣바진 경풍한 쇠누깔갓치, 최생원의 호패 구역갓치, 또 뚜러진 년석이 대갈이는 어러동산의 문달래 따먹든 덩덕새 대갈리 갓튼 년석이, 소리는 생고자 색기 갓치 몹시 질너 하마트면 애보가 떠러질 번 하였다.”
방자놈 한참 듯다가 어니업서, “이 애 이 지집년나, 입살리 부드러워 욕은 잘 한다만는 내 말을 들어 보와라.”
춘향이 입담이 참으로 걸쭉하면서도 살아있는 듯하다. '제미X 개X으로 열두다섯 번 나온 년석'이라고 욕하는 것하며, 방자의 눈을 쇠눈깔과 호패구멍으로, 방자의 머리부스럼을 앓고 난 상처를 덩덕새로, 목소리를 생고자로 비유한 표현이 잡성스러운 수작인 듯하면서도 민중의 입성의 묘미를 제대로 살렸다. 수위를 넘나드는 저 표현에서 새치름하면서도 앙칼진 살아있는 춘향이의 성격을 그대로 엿볼 수 있다.
이제 이 부분에 해당하는 신재효가 개작한 <남창춘향가>를 보자.
방자(房子)가 썩 들어서며,
“이 애 춘향(春香)아 너 본지 오래구나 노모(老母) 시하(侍下)에 잘 있었느냐?” 춘향(春香)이 돌아보니 전에 보던 방자(房子)여든, “너 어찌 나왔느냐?” “사또 자제 도령님이 광한루(廣寒樓) 구경왔다 추천하는 네 거동을 보고 대혹(大惑)하여 불러오라 하셨으니 나를 따라 어서 가자.”
춘향(春香)이 천연정색(天然正色)하여 방자(房子)를 꾸짓는다.
“서울 계신 도령님이 내 이름을 어찌 알며 설령 알고 부른단들 네가 나를 누구로 알고 부르면 썩 갈줄로 당돌히 건너온다. 천만불당(千萬不當) 못될 일을 잔말 말고 건너가라.”
방자가 어이 업셔 한참 셧다 하난 말이,
춘향의 말이 점잖기 그지없다. 마치 제가 무슨 선비라도 된 양 ‘에헴’ 한 자락 뽑는 꼬락서니가 영판 민중의 딸 춘향이가 아니다.
물론 신재효가 개작한 또 다른 본인 <동창춘향가>는 이 <남창춘향가>보다 낫지마는 이도령의 오리정 이별 대목에서 끝나 <춘향전>으로서는 완결성이 없다. 무엇보다도 <동창춘향가>는 연구에 따르면 약간의 부분적 손질만 가해졌기에 신재효가 덧붙인 것이 없다는 결과를 도출한 논문도 있다. 결국 <동창춘향가>는 신재효가 전승되던 판소리에 별로 덧붙인 것이 없고, 그가 적극적인 의지를 갖고 개작한 <남창춘향가>에서는 오히려 전승되던 판소리가 양반적 취미에 의해 변색되었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러한 연구는 신재효의 다른 다섯 마당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신재효는 수많은 삽입가요를 제거했고, 해학적인 표현과 외설적인 내용을 없앴으며, 한문투의 문장을 많이 들여 썼고, 전체적으로 내용을 많이 축약하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없는 것은 아니다. 신재효가 ‘판소리의 천하고 상스러움을 순화하여 세련된 문학으로 만들었다’는 것이 그러한 경우이다. 그래 연구자에 따라 ‘판소리의 예술성을 완성한 인물’, ‘우리 민족 문학을 뚜렷이 창시한 거인’, ‘신묘한 필치’, ‘셰익스피어에 해당하는 귀중한 존재’ 등으로 그를 보기도 한다. 하지만 판소리는 근본적으로 서민의 소산이기에 ‘천하고 상스러움, 양반에 대한 풍자와 해학, 구수한 외설’ 속에 진정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본래의 순수한 가치, 속성을 잃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백성의 판소리라 부를 수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이다.
이만 정리하자.
신재효가 윤색, 개작, 첨삭한 판소리 여섯마당 정리는 판소리의 집성이요, 후세에 전승을 매개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고소설사에서 오롯하나, 판소리사나 고소설사의 흐름을 발전적으로 이끌었다는 점은 찾을 수 없다. 연구자들이 신재효 앞에만 서면 여러 생각을 갖게 하는 이유요, 또 이 글에서도 신재효에게 고소설의 작가로서 적극적인 의미부여를 하지 못한 이유이다.
물론 이 글을 평가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래 내 말을 귀양 보내고, 신재효를 2)장 고소설 5대 작가론에 넣은들 어쩔 도리는 없다.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 하거리(下巨里)에 그를 기리는 유애비(遺愛碑)가 남아 있으며, 묘소는 고창읍 성두리(星斗里)에 있다. 1876년, 고종 13년에 나라에 흉년이 들어 구휼미를 내어 이듬해 통정대부 품계를 받기도 하였다.
참고: 김흥규, 「신재효 개작 춘향가의 판소리 사적 위치」, 『한국고전소설연구』, 새문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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