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란 통상 한 집안에서 정치인·관료·학자·기업인 등이 다수 배출된 경우을 말한다. 천안·아산에서 명문가로 일컬을 만한 집안을 소개해 본다.
퇴계, 비범함 알아보고 한마디, 임란 때 ‘이몽학의 난’ 평정
손자 홍우정 · 홍우원 형제, 절의 처사 · 남인 거목으로
아산 염치읍 대동리에 217㎡(66평) 규모의 한옥 형태 기념관이 섰다. 10월 개관식을 앞두고 주위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다.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홍가신(洪可臣,1541~1615)의 묘와 영당(영정을 모시는 곳)이 있는 이 곳에 2년 간 공사를 거쳐 기념관이 들어서게 된 것.
홍사헌(77·아산 권곡동) 남양홍씨 문장공파 종회장은 “늦게나마 홍가신 어른의 기념관을 지어 관련 유품을 후세들이 볼 수 있게 해 너무 기쁘다”며 감회에 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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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당 뒤편에 핀 목백일홍. 항상 홍가신의 제삿날 (음력 7월 17일, 올해 9월 5일) 을 전후해 활짝 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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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에는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1604년 ‘청난(淸難)공신’ 1등에 책록된 것을 알리는 교서 및 난을 제압하는 장면이 영상(디오라마)으로 소개되고 있다. 손자인 홍우정(洪宇定, 1595~1656)·홍우원(洪宇遠, 1605~1687)형제 관련 유물 등이 전시되는 등 남양 홍씨의 역사적 인물들을 한눈에 확인할 수 있도록 잘 정리돼 있다. 기념관은 탕정LCD사업장의 삼성정밀유리 공장 바로 뒤쪽에 있다.
홍씨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시기 천안·아산에 역사적 인물이 많았던 것 큰 우연이었다”며 “같은 염치읍으로 산 너머 이순신(李舜臣, 1545~1598)장군의 현충사가 있고 진주대첩의 영웅 김시민(金時敏, 1554~1592)장군 생가도 천안 병천에 있다”고 말했다. 이들의 나이는 4, 13세 차이였다. 홍씨에 따르면 이순신 장군의 딸이 홍가신의 넷째 며느리가 돼 서로 사돈 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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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신 묘와 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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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가신=호는 만전당(晩全堂)이고 시호는 문장(文莊). 호와 관련해 홍씨는 “늦을 만, 온전 전자를 썼는데 홍가신 어른께서 60세가 넘어 직접 지은 호”라며 “늦게 이룸의 경지에 올랐다는 겸손의 뜻으로 지은 것 같다”고 말했다.
홍가신은 고문 경서에 해박하고 시문 짓기와 글씨가 뛰어났다. 퇴계 이황에게서 “검은 옷을 입은 저 아이 누구인가. 어질게 생겼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그의 문인적 소양은 후일 손자대까지 이어진다. 1567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형조의 좌랑(정6품) ·지평(정5품)을 지낸다. 1584년 안산군수로 나갔고 1588년 수원부사가 된다. 그러나 이듬해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파직된다. 이와 관련 홍씨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여립과 홍가신은 ‘진사시험 동기’였다고 한다. 그리 친한 편은 아니었다. 한 번은 정여립이 “주자가 경서에는 해박하나 셈(수학)은 그렇치 못한 것 같다”고 주자를 평하자 홍가신이 “주자를 평가하는 건 학자로서 할 바가 아니다”며 멀리했다고 한다. 정여립이 아랫 지방으로 내려가면서 수원부사가 된 홍가신을 찾아 인사를 나눈 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그 후 임진왜란 때인 1593년 파주목사에 복직됐고 이듬해 홍주(洪州,홍성)목사가 돼 1596년 이몽학의 반란을 평정하게 된다.
이몽학은 왕족 서얼 출신으로 충청·전라도 지방을 돌아다니다 임란으로 혼란스런 틈을 타 반란 계획을 세운다. 의병을 모은다는 명목으로 동갑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장정들을 모집, 충청도 홍산에서 난을 일으켜 청양·예산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홍성까지 진입한다. 홍가신의 공격에 전세가 불리해지자 반란군 중 관군에 투항하는 자가 많아졌다. 그러자 부하가 그의 목을 베고 투항했다.
홍가신은 그후 강화부사·형조참판 ·강원도관찰사 ·형조판서 등 을 거쳐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초 의금부 지사(정2품)를 지내고 개성유수 때인 1610년 관직에서 물러난다.
‘치사(致仕)’는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스스로 옷(관직)을 벗는 것을 말한다. 우의정 추증 교서 그의 이름 앞에 ‘치사’ 란 글귀가 명확히 쓰여있다. 홍씨는 “60대 중반때 부터 계속 관직을 그만둘 뜻을 밝히다 70세를 목전에 두고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유종의 미를 보여줬다”며 “이는 당시 예를 중시한 선비의 전형적 모습”이라고 평가했다. 홍가신은 생전 “선인들 명정(장례 때 죽은 이 신분을 나타내는 깃발)에 치사 글귀가 들어간 예가 적다”며 개탄했다고 한다.
◆홍우정=홍가신의 손자다. 그의 부친 홍영(洪榮,1567~1624)은 한성부 서윤(庶尹,종4품)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됐다. 두곡(杜谷) 홍우정은 인조의 삼전도 굴욕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절의를 지키려 경북 봉화에 은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함께 은둔한 네 선비와 함께 ‘태백 오현’으로 불렸다. 그 다섯은 영의정 홍섬의 증손 홍석, 송강 정철의 손자 정양, 심의겸의 손자 심장세, 참판 강징의 현손 강흡과 홍우정이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천명(天命)이다. 내 차라리 죽을지언정 불의와 타협해서 살고 싶지 않다”는 신념을 보였다. 1748년 후세 사림들이 두곡을 기리는 유허비를 그 마을에 세웠다. 비에 ‘대명천하무가객(大明天下無家客) 태백산중유발승(太白山中有髮僧)’이라는 두곡의 시 구절을 새겼다. ‘명나라 천하에 집이 없는 나그네가 돼 태백 산중에서 스님처럼 살았다’는 내용이다.
영조가 이 시를 보고 감복, 이조참의에 추증하고 직접 ‘숭정처사’라는 칭호를 내렸다. 순조 때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이듬해 개절공(介節公)이란 시호를 받는다. 기념관에 전시된 봉화에 있는 옥류암의 현판 글씨는 강경파 남인인 ‘청남(淸南)’의 영수인 허목(1595~1682)이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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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개관을 앞둔 홍가신 기념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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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우원=홍우정의 열살 아래 동생인 남파(南坡)홍우원은 형과 달리 벼슬길에 나서 공조·예조·이조판서까지 지낸다. 정치가이자 문인으로 이름을 높였다. 서인과 남인이 복제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송시열 일파와 예론(禮論)으로 맞서던 고산 윤선도(1587~1671)·허목 등과 함께 ‘남인(南人) 네 선생’으로 불리웠다. 1663년 1차 예송(禮訟)때 윤선도의 석방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 당한다. 후일 윤선도의 시장(諡狀)을 지어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기술하기도 했다.예안현감·공주목사·대사헌·대사성 등을 지냈다.
남인이 몰락하는 1680년 경신대출척 때 강원도 문천에서 유배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는다. 『남파집』(1782년 발간)에 실린 시와 상소문을 통해 그의 시 세계 및 당시 정치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영의정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서문을 썼다. 이 문집에 실린 우화소설 같은‘노마설(老馬說, 늙은 말의 항변)’이 흥미를 끈다. 자기 위주로만 모든 것을 이해하려는 세태를 꼬집고 있다.
홍우원의 ‘노마설(老馬說)’- 『남파집』권10 수록
어느날 주인이 종을 시켜 늙은 말을 끌어내게 해 말에게 말하기를,
“아, 이제 네가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고, 근력도 이제는 쇠할 대로 쇠하였다. 장차 너를 달리게 하고 쏜살같이 몰아 보려한들 네가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며, 너에게 도약을 시키고 뛰어넘게 하려해도 네가 그렇게 할 수 없음을 내가 안다. 내가 너를 수레에 매어 험한 길을 넘으려 한다면 너는 넘어지고 자빠져서 일어나지도 못할 것이고, 내가 너에게 무거운 짐을 실어 먼 길을 가고자하면 짐에 깔려 죽고 말 것이다. 너를 장차 무엇에 쓰겠는가. 푸줏간 백정에게 넘겨주어 너의 고기와 뼈를 가르게 하자니 내가 차마 너에게 그렇게는 못하겠고, 장차 시장에 내어다가 팔려 해도 누가 너를 사겠는가. 내가 이제 너에게 물린 재갈을 벗겨주고 너를 얽어맨 굴레를 풀어 줄테니 가고픈 대로 가겠느냐? 그래, 떠나도록 해라. ” (중략)
이때에 말이 알아듣기라도 하는 듯이 귀를 늘이고, 마치 무슨 하소연하듯 가슴 속에 있는 말을 끄집어냈다.
“아, 진실로 주인의 말이 맞소이다. 그러나 주인께서도 역시 어질지 못한 분이십니다. 예전에 내 나이가 한창 젊었던 시절에는 하루에 백여 리는 치달렸으니 나의 걸음걸이가 굳세지 않은 것이 아니었으며, 한번 짊어지면 곡식 몇 섬은 실을 수 있었으니 나의 힘이 강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소.
주인께서 가난했던 형편에 대해서는 오직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온 집안은 쑥대가 무성하여 처량하기 그지없고 텅 빈 살림살이는 쓸쓸하기까지 하였소. 쌀단지는 바닥이 나고 고리짝에는 비단조각 조차 없질 않았소. (중략) 그 당시에 내가 실로 있는 힘을 다해 동분서주하기를 오직 주인의 명령대로 하였고, 남으로 가라면 남으로 가고 북으로 가자면 북으로 가기를 오직 주인께서 시키는 대로 하였소. 멀리는 기천 리 가깝게는 수십, 백 리를 지고 나르며 달리고 치닫느라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었으니 나의 노고가 실로 컸다고 할 것이오. 주인집의 여러 식구들이 목숨을 온전히 부지해 온 것은 모두 나의 덕이며, 길가에 쓰러져 굶어죽거나 곤궁하게 떠돌다가 도랑이나 골짜기에 처박혀 죽지 않은 것도 모두 나의 덕이 아니겠소. (중략) 대개 나라의 임금이 신하를 부릴 때 노고가 많은 자에게 반드시 많은 녹봉을 주는 법이니,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권장시키는 방법이기도 하거니와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스스로 모든 것을 바치게 되는 까닭인 것이오.
그러나 지금 주인께서는 그렇지 않소. 나의 노고가 이와 같이 큰데도 나에게 먹여주는 것은 전혀 변변치 못하였고 나의 공이 이와 같이 높은데도 나를 길러주는 것은 푸대접뿐이었오. 짚 썰은 한 방구리의 여물과 한 사발의 물로 나의 배를 채우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이것은 결코 헛말이 아니잖소. 게다가 재갈과 굴레를 씌워서 속박하고 채찍으로 치고 때리는가 하면, 굶주리고 기갈 들게 하고 치달리고 달음박질시키느라 나를 쉬지 못하게 한 것이 이제까지 여러 해가 되었소.(중략)
그러므로 나의 기력이 지치고 나의 힘이 쇠하여 쓸모가 없게 된 것이 주인의 잘못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소.
대저 젊었을 때 그의 기력을 다 부려먹고 나서 늙었다고 하여 내버리는 짓은 실로 어진 사람이나 군자라면 하지 않는 법인데, 주인께서는 그렇게 하시려드니, 너무도 어질지 못하십니다.“
주인이 멍하니 맥을 놓고 듣더니 말하길 “나의 잘못이다. 말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관자(管子)야말로 늙은 말도 버리지 않고 거두어 쓸 줄 아는 이였기에, 능히 임금을 보필해 천하의 패왕이 되도록 했다”며 하인에게 “말을 잘 먹여주도록 하라. 그리고 말이 더이상 욕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