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의 댄서>의 주인공 셀마의 표정은 잊을 수가 없다. 대중가수 비욕이 연기하는 이 여주인공은 절망, 갈망, 환희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불가사의한 표정을 지녔다. 웃고 울고 비탄에 잠겼다가 희열에 떠는 것이다. 그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비욕의 연기 못지않게 감독 라스 폰 트리에의 연출도 경이적이다. 그가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테크니션이라는 건 분명하다. 감상적인 멜로드라마에 뮤지컬 양식을 끼워넣고 비극을 자연스럽게 위로로 바꾸는 것이다. 두려움에 떨며 혼자 힘으로 걸음도 떼지 못한 채 사형대에 오른 여인이 교수형 당하기 직전에 갑자기 뮤지컬을 즐긴다. 물론 상상 속에서. 그리고는 덜컹 목매달려진 채 저 세상으로 떠난다. 이걸 숭고하다고 할까, 불쾌하다고 할까.
감독 폰 트리에는 예고된 불행의 함정에 갇히는 여주인공 셀마의 운명을 억지로 꾸미고 스크린에서 자기 연민을 구하고 싶은 관객의 나르시시즘을 교활하게 꼬드긴다. 전작 <브레이킹 더 웨이브>가 그랬듯이 등장인물을 막다른 구석에 몰아넣고 학대하며 관객을 사디스트로 만들지만 그걸 일종의 종교적인 희열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셀마의 운명이 비극으로 치달을수록 그녀가 상상하는 뮤지컬 장면의 매혹도 커진다. 아마추어 공연 '사운드 오브 뮤직'을 연습하는 초반 장면 이후로 공장 노동 장면의 막간이나 심지어 사형대 위에서 펼쳐지는 뮤지컬 장면은 가장 처절한 현실이 가장 아름다운 매혹적 환상의 공간으로 바뀌는 영화의 마술을 보여준다.
현실 속의 셀마나 상상 속의 뮤지컬 무대 위의 셀마나 너무 처연하고 아름다워 눈부시다. 그녀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잡아낸 카메라도 현대적인 기법의 절정을 보여준다. 디지털 카메라의 이점을 충분히 살려 현장을 포착하는 듯한 실감을 끌어내며 인물과 상황에서 느끼는 다양한 정서적 질감을 만끽하게 해준다. 그것이 <어둠 속의 댄서>가 드러내는 가증스러운 일면이다. 가장 인공적인 감동을 보여주기 위해 가장 자연스러운 체하는 위선을 감추고 있다. 감독의 상상력은 비극과 판타지의 절묘한 조화를 강제했지만 관객은 여주인공의 불행한 운명과 그녀가 꿈꾸는 행복한 판타지의 세계에 갇힌 채 거의 강박적으로 신경을 조종당하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리 도그마 선언이 농담이고 시늉이었다고 해도 폰 트리에가 추구했던 순수한 영화형식의 정체가 고작 이것이었을까. <어둠 속의 댄서>는 할리우드 뮤지컬의 정수를 노동자의 삶의 환경으로 옮겨놓은 현대판이지만 전제는 얄팍하다. 가족에 대한 무조건적인 헌신이라는 단순한 도덕적 우화를 던져놓고 그것이 인간 경험의 축약판인 것처럼 설득하고 감동을 부추긴다. 디지털 영화의 여명기에 폰 트리에는 가장 솔직한 감정의 매개일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의 잠재력을 가장 인위적인 감동을 꾸며내는 도구로 끌어내린다. 허구의 주인공을 억지로 순교적인 인물로 만들고 그걸 자연스러운 듯이 치장한 다음 모두 함께 울자고 선동하면서. <어둠 속의 댄서>는 영화기술에 통달한 위대한 사기꾼이 가르치는,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감정교육이다. 관객의 감정을 도둑질하고 있다.
진정한 어머니의 사랑에 대한 영화 -ph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