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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을도(太乙道) : 태을궁 용봉서신(太乙宮 龍鳳書信)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
증산상제님의 법을 용사하시는 고수부님께서는, 용화동의 이정립과 관련하여 증산상제님께 다음과 같이 간절히 호소하셨습니다.
@ 계유(1933)년 화천절 치성날 석양에, 천후 영정앞에 배례하시고 앉으사 목침으로 마룻장을 치시며 가라사대 "모든 일을 둘둘 뭉쳐서 저 어린 것에게 짐지워 내세우시면서 풀어주지 아니하시면 장차 어찌하려 하시나이까. 집이 있나이까 처자가 있나이까." 라 하시니라. (천후신정기 pp86-87)
또한 고수부님께서는 오성산의 고민환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 병인(1926)년 삼월 이십팔일 선도신정공사를 행하실새, 고후비님이 입으신 의복을 벗어서 고민환에게 입혀 여장을 시킨 후 "내실에 들어있으라." 명하시더니, 고후비께서 상제님의 의장을 갖추어 남장하신 후에 도중에게 가라사대 "내 나이 마흔일곱에다 일곱을 떼어내면 내가 성포(고민환의 호)가 되고, 마흔에다 일곱을 붙이면 성포가 나 되니라." 하시며 공사를 보시다가, 또 가라사대 "내가 증산이니라." 하시며 "청년 일곱을 선발하여 드리라." 하시거늘 청년 일곱을 선발하여 모으니, 새옷을 지어 그들에게 입히시고 그들에게 일곱칠성 도수를 정하시어 공사를 보신 후 가라사대 "이 공사는 칠성용정도수(七星用政度數)를 정함이니라." 하시더라. (선도신정경 p131)
용화동의 이정립과 오성산의 고민환은, 고수부님의 뜻을 충실히 받들어 증산상제님의 법이 성사재인될 수 있는 터전을 닦은 참으로 고마운 분들입니다. 그분들이 천지부모이신 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과의 인연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전생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정립 선생의 전생은 진표율사입니다. 고민환 선생의 전생은 율곡 이이입니다. 진표율사는 통일신라시대의 고승으로서 미륵불 신앙의 터전을 닦은 분이고, 율곡 이이는 조선 중기시대를 살면서 유불선을 종합하여 조선 성리학을 꽃피운 성리학의 거두입니다. 진표율사는 미륵불을 모시고 용화낙원을 건설하기를 원했고, 율곡 이이는 요임금같은 성군을 모시고 태평천하한 대동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따라서 진표율사는 금산사 미륵불을 조성하고 미륵신앙을 뿌리내렸고, 율곡 이이는 천도책(天道策)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성학집요(聖學輯要) 등을 써서 철인군주 만들기에 힘썼습니다.
1) 진표율사는 부안 변산에 있는 부사의방장에서 수행중 미륵불을 친견하고, 미륵불이 강세하기를 염원하며 모악산 금산사에 미륵불을 세웠습니다. 진표율사는 모악산 금산사 외에 속리산 법주사 금강산 발연사에도 미륵불 도량을 만들어 미륵불 신앙의 기초를 닦았습니다. 용화세계의 미륵불이신 증산상제님께서는 신계의 주벽인 이마두를 데리고 삼계를 대순하시다가, 진표율사의 염원을 받아들여 금산사 미륵불에 성령으로 하감하여 삼십년을 지내시면서 최수운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상제의 강세소식을 전하신 후, 1871년 고부 객망리 강씨 문중에 잉태하여 인간세상에 오셨습니다.
@ 증산상제께서는 대법국천계탑에 계시다가 서양에서 실패한 마테오리치(이마두)를 데리시고 천하를 대순하시다가 금사사 삼층전 금미륵상에 임어하사 삼십년을 경한 후에 최제우에게 제세대도를 계시하셨더니 제우가 능히 유가전헌을 초월하야 대도의 진취를 천명치 못함으로 드디어 천명을 거두고 갑자로부터 팔괘를 경한 후에 신미에 친히 탄강하시니, 동경대전 및 가사 중에 상제는 곧 천사를 이름일진저. (증산천사공사기 p11 차경석 구술)
@ 서양사람 이마두(마테오리치)가 동양에 와서 천국을 건설하려고 여러가지 계획을 내었으나, 쉽게 모든 적폐를 고치고 이상을 실현하기 어려우므로, 마침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만 하늘과 땅의 경계를 틔워 예로부터 각기 지경을 지켜 서로 넘나들지 못하던 신명들로 하여금 서로 거침없이 넘나들게 하고, 그 죽은 뒤에 동양의 문명신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돌아가서 다시 천국을 건설하려 하였나니, 이로부터 지하신이 천상에 올라가 모든 기묘한 법을 받아내려 사람에게 알음귀를 열어주어 세상의 모든 학술과 정묘한 기계를 발명케하여 천국의 모형을 본떴으니 이것이 현대의 문명이라.
그러나 이 문명은 다만 물질과 사리에 정통하였을 뿐이요, 도리어 인류의 교만과 잔포를 길러내어 천지를 흔들며 자연을 정복하려는 기세로써 모든 죄악을 꺼림없이 범행하니, 신도의 권위가 떨어지고 삼계가 혼란하여 천도와 인사가 도수를 어기는 지라. 이에 이마두는 모든 신성과 불타와 보살들로 더불어 인류와 신명계의 큰 겁액을 구천에 하소연하므로, 내가 (이마두를 데리고) 서천서역대법국천계탑에 내려와서 삼계를 둘러보고 천하를 대순하다가 이 동토에 그쳐 (석가모니의 당래불 찬탄설게를 의거하야 승(僧) 진표가 당래의 비음을 감통하고 건립하여 지심기원해 오던)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상에 임하여, 삼십년을 지내면서, 최수운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대도를 세우게 하였더니, 수운이 능히 유교의 테밖에 벗어나 진법을 들쳐내어 신도와 인문의 푯대를 지으며 대도의 참빛을 열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년(1864)에 천명과 신교를 걷우고 신미년(1871)에 스스로 세상에 내려왔노라. (대순전경 pp303-305)
미륵불이신 증산상제님께서는 진표율사와 각별한 인연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밝혀주셨습니다.
@ 제자가 증산상제님께 고하기를
"금산사 미륵전은 진표율사가 창건하였는 바,
진표율사는 원래 만경의 이름없는 관리로 있었는데
하루는 천상선녀가 죄를 얻어 잉어로 변한 것을 잡아서 살려주니,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선녀가 진표의 처가 되어
10년을 같이 살다 선녀의 죄가 풀려
장차 하늘로 올라감에 아들 셋을 진표에게 남겼거늘,
진표가 잘못하여 만경땅에 아들 셋을 모두 묻고
진표가 몹시 슬퍼하여 그 곁을 떠나지 않으므로
선녀가 그에게 길을 가르쳐주어 드디어 삭발하고 중이 되어
모악산 용안대로 들어가 천일기도를 드리는 데,
그 소원이 천여 년이 흐른 후에
미륵존불이 인간의 몸으로 오실 때 그 제자가 되어
용화세상에서 다시금 선녀와 인연을 계속 잇는 것이라.
그 정성에 미륵불이 감동하여 친히 몸을 굽혀 진표를 찾으시니
모악산중에 비장곡이란 곳에서
진표가 마침내 도를 통하여 미륵불의 출세를 바라는 첫 기도에
미륵존불께서 모악산과 회문산을 딛고 서시니 크게 나투신 몸이 하늘에 이르고,
재차 기도하니 모악산 양 기슭을 딛고 서시니 중간크기로 나투신 몸이 허공에 우뚝 치솟고,
세 번째 기도에 미륵존불께서 금산사 연못가에 서시니
가장 작게 나투신 몸이 지금까지 금산사 연못가에 서 계신 미륵불의 모습이라.
진표율사가 미륵불 조성을 위해 간절한 정성을 드린 후에 금강을 건너려 할 때 배가 없더니,
온 강의 물고기들이 스스로 모여들어 다리를 만들어 드리므로,
이 기이한 소문이 세상에 널리 퍼져
신라의 국왕이 친히 진표를 맞아들이거늘,
진표가 국왕을 깨우치매 천여 년이 흐른 후에
미륵불의 제자가 되기를 왕이 소원하여
많은 금은과 곡식 비단을 시주하여 올리니,
율사가 연못속의 용을 변산으로 옮기고 연못을 숯으로 메우고
대중의 정성어린 힘을 모아 미륵전을 세우니
그 규모가 참으로 크고 장려한 것이 오늘날의 삼층 미륵전이라.
미륵금불이 입상의 크기가 천하에서 가장 크므로
'모악산 미륵금불이 장차 인간으로 출세하여 말을 할 것'이라는 토정의 비결이 전해오는 바
많은 사람들이 미륵금불이 인간으로 출세하여 말하기를 바라나이다."
증산께서 말씀하시길
"나에 관한 말이 더 없더냐.
진표는 나와 큰 인연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중성의 천지개벽경 pp180-181)
증산상제님께서는 금산사 미륵불을 조성하고 미륵불을 모시기를 간절히 염원한 진표율사의 뜻을 받아들여, 진표율사를 이정립 선생으로 태어나게 하여, 금산사 밑 용화도장에 터를 잡고 대순전경과 대순철학을 짓게 하고 의통인패를 만들게 하여, 증산상제님 신앙의 기초를 닦고 의통성업을 준비케 하셨습니다.
이정립 선생은 1895년 음력 2월 19일 전남 해남군 삼산면 구성리에서 태어나, 1914년 증산상제님을 모신 고수부님의 문하로 들어갔습니다. 21세되는 1915년부터 1919년까지 일본 동경사범학교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여 수학하다가 귀국하여, 보천교의 60방주의 하나인 동지방주가 되어 포교와 교리정립에 심혈을 경주하였습니다. 차경석 선생이 신로를 유교쪽으로 변경하고 증산상제님을 배반하자, 형 이상호 선생과 더불어 1928년 동지에 금산사 밑 용화도장에서 동화교를 창건하고, 1931년 고수부님을 모셔와 증산상제님 신앙의 터전을 닦고 1968년 사망하였습니다.
고수부님께서는 1931년 증산상제님의 영정을 모시고 용화동에 오시어 도무를 주재하시면서 이정립에게 용화동에 집을 짓고 용화도장을 잘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1933년 오성산으로 떠나시면서 이정립에게 중요한 부탁을 하셨습니다.
@ 이날 오후에 천후께서 성영(정립)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곳에 집을 짓고 살라. 이는 물을 먼저 쓰려 하노니" 하시니라. (천후신정기 p84)
@ 계유(1933)년 가을에 고영(고민환)이 옥구지방 신도들과 협의하여 옥구 오성산(五聖山)에 수양소를 건축하려 할새, 문명수가 그 가부를 묻기 위하여 부인께 와 뵈이니 부인이 건축을 재촉하며 동지후에 이거할 뜻을 표시하거늘, 명수가 돌아가서 신도들에게 부인의 말씀을 전하여 공사를 급속히 진행케 하였다.
동지치성 후에 부인이 오성산으로 이주할새, 임발에 이성영(이정립)을 불러들여 영정앞에 꿇어 엎드리게 하고, 영정개사와 저술과 도장건축과 단주수명 등 후사에 대하여 낱낱이 세 번씩 다짐을 받은 뒤에 영정을 잘 받들라고 부탁하고 용화동으로 떠나서 오성산 수양소로 이주하셨다.
이로부터 성영이 영정을 받들더니, 이듬 갑술(1934)년 정월 보름에, 부인이 용화동으로 사람을 보내어 일러가로대 "내가 오성산에 온 뒤 몸이 불편한데, 생각하여 본 즉 영정을 모셔오지 아니한 까닭이라. 너희들은 반드시 영정을 개사하여 받들지니, 이 영정은 내가 다시 받들겠노라." 하고 영정을 모셔갔었다. (증산교사 p218)
2) 율곡 이이는 조선중기인 중종 1536년 음력 12월 26일, 강릉시에서 아버지 이원수와 어머니 사임당 신씨를 부모로 하여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이원수는 불교적 세계관에 의거한 수용적이고 방관적인 성격을 지녔고, 어머니 신씨는 유교적 세계관에 근거한 적극적이고 참여적인 성격을 가졌습니다. 율곡은 아버지의 불교관과 어머니의 유교관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면서 청운의 꿈을 간직한 채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율곡은 어려서부터 비범한 천재성으로 재기가 번득였습니다. 10세 때에 이미 "아, 인생은 바람 앞의 짧은 100년이요, 몸은 넓은 바다 가운데 한 개의 좁쌀이다."(율곡전서)라고 할 정도로, 사유의 폭이 참으로 깊고도 넓었습니다. 13세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나 16세에 어머니 신사임당이 죽자 3년상을 마치고 홀연히 금강산으로 입산수도의 길을 떠납니다. 어려서부터 그의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불교에 낯설지 않았고 어머니의 죽음앞에 삶의 외로움과 고독함 그리고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절감하였을 것입니다.
율곡은 금강산을 향하면서 어머니를 잃은 조롱박같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시 한 편을 남겼습니다.
@ 하늘과 땅은 누가 열었으며
해와 달은 누가 갈고 씻었는가
산과 냇물은 얽혀 있고
추위와 더위는 서로 교차하는구나
우리 인간은 만물 가운데 처하여
지식이 가장 많도다
어찌 조롱박 같은 신세가 되어
쓸쓸하게 한 곳에만 매여 있겠는가
온 나라와 지방 사이에
어디가 막혀 마음껏 놀지 못할까
봄 빛 무르익은 산 천리 밖으로
지팡이 짚고 떠나가리
나를 따를 자 그 누구일까
저녁나절을 부질없이 서서 기다리네 (율곡전서 권1)
19살의 율곡 이이는 금강산에 들어가 스님들과 접하며 불교진리를 공부하고 참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의 비범한 천재성은 그가 지은 선시(禪詩)에도 잘 나타나있습니다.
@ 도를 배우니 곧 집착이 없구나
인연을 따라 어디든지 유람하네
잠시 청학(靑鶴)의 골짜기를 이별하고
백구(白鷗)의 땅에 와서 구경하노라
이내 몸 신세는 구름 천 리이고
하늘과 땅은 바다 한 구석일세
초당에서 하룻밤 묵어가는 데
매화에 비친 달 이것이 풍류로구나 (율곡전서 권1)
율곡 이이는 1년여의 금강산생활을 마감하고 20살에 환속하여 22살에 결혼합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23세 때에 58세인 퇴계선생을 찾아가 다음과 같이 시를 주고받습니다.
@ 시냇물은 수사에서 나뉘었고
봉우리는 무이산처럼 빼어났네
살아가는 살림은 천 권쯤 되는 경전이고
거처하는 방편은 두어 칸 집뿐일세
마음은 비가 갠 후의 밝은 달과 같고
말씀과 웃음은 거친 물결을 멈추게 하오
저로서는 도를 듣도자 온 것이며
반 나절의 한가한 시간을 보내려는 것이 아니지요 - 이이(율곡전서 권33)
@ 병든 나는 문닫고 누워 봄이 온 줄을 몰랐는데
그대가 와서 이야기하자 마음이 상쾌해지네
이름난 선비 헛소문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지만
전부터 나의 몸가짐도 제대로 못한 것이 부끄럽소
좋은 곡식에는 강아지풀 용납할 수 없고
티끌은 갈고 닦은 거울에 쌓일 수 없네
정에 겨워서 표현한 말은 모두 버리고
노력하고 공부하여 날로 새로워집시다 - 이황(율곡전서 권33)
율곡 이이는 13세에 진사과 초시에 합격하여 문장이 날리기 시작하여, 1564년 그의 나이 29세에 대과에 장원급제하였습니다. 율곡은 진사과부터 대과에 이르기까지 연달아 9번 수석으로 급제하여,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아홉 번이나 장원한 분)이라고 높여 불렀을 정도로 온 세상에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선조를 철인군주로 만들기 위해 만언봉사와 성학집요를 올리는 등 혼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특히 병조판서로 재직하면서 선조에게 왜의 침략에 대비하여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습니다.
선조가 율곡 이이를 특별히 총애하였습니다. 그러나, 율곡 이이는 선조와 자주 견해차이가 발생하여 은거하고자 하였으나, 선조가 그를 놓아주지 않아 결국 이조판서직을 마지막으로 1584년 운명을 하였습니다. 때로는 속세에 은거한 처사로서 때로는 강직한 선비로서 때로는 유지라는 기생과 애틋한 사랑을 불태웠던 풍류객으로서 유명세를 치르며 살다 갔습니다. 왜적의 침입에 대비한 십만양병설을 주장하였으나 결실을 맺지 못한 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8년전에 하늘은 그를 불러들였던 것입니다. 평생 은거하며 유유자적하는 처사의 길을 걷고 싶었으나, 어려서는 어머니의 훈육에 과거를 치렀고 커서는 선조의 간곡한 청에 못이겨 조정에 나가 그의 세계관을 펼쳐 보였던 것입니다.
고수부님께서는 고민환 선생이 율곡 이이의 후신임을 밝혀주시면서, 고민환과 통정신 공사를 보셨습니다.
@ 어느날 전선필은 우연히 생각나기를, '돈도 없고 무식하고 하니 돈 많고 유식한 도우들에게 괄시를 받는다' 하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자기의 신세가 하도 처량하게 느껴지거늘, 그 즉시 고후비님을 찾아 뵈옵고 여쭙기를 "저는 돈도 없고 글도 무식하여, 유식하고 돈 많은 도우들에게 괄시를 받고 있으니, 차라리 어머님 슬하를 떠나서 이 서러움을 면할까 하나이다." 하며 아뢰니, 고후비께서 가라사대 "성포(고민환)는 율곡의 후신이요, 수제 너는 이태백의 후신이니라. 만약에 너에게 글과 재산을 주면 네가 내 일을 못하느니라. 일에 처하여 익히 보고 잘 들어두어라." 하신 후로부터 공사를 보실 때면 꼭 수제(고후비님이 지어주신 전선필의 호)로 하여금 증인이라 하시며 반드시 증인을 정하여 세우시니더라. (선도신정경 p58)
@ 고후비께서 어느날 고민환을 부르시더니 가라사대 "오늘은 통정신 공사를 베풀려고 하니 너는 그 앞에 엎드리라." 하시거늘, 명을 들은 고민환이 부복하니 가라사대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에게 적선한 일과 적악한 일이며 모든 선악을 불구하여 나에게 고하라." 하시거늘, 그리하여 고민환이 생각해 보니 자기는 별반 선악(善惡)을 지은 바 없는 듯하여 고하기를 "저는 평생동안 도문에 있었으니 특별한 선(善) 불선(不善)이 없아옵니다." 하고 아뢰었더라.
고후비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나서 선악간에 아무 일이 없었다 하니 어찌 그럴 수 있으랴. 증산과 같으신 위로서도 나에게 소시부터 모든 일을 숨김없이 낱낱이 말씀하시고 선 불선을 물으시어 그릇된 점은 일일이 용서하시라 하시며 사과하였노라. 그런데 하물며 네가 그와 같을 수 있으랴." 하시나, 불의했던 일을 스스로 말할 수 없어 고하지 못하였더니,
고민환의 상투에서 산호동곳을 빼어 놓으시며 꾸짖어 가라사대 "네 이것을 모르느냐." 하시거늘, 그리하여 생각해 보니, 과연 군산에서 사귀던 여자의 이름이 산옥이요, 또 한 여인은 선옥이며 그 사건으로 군산경찰서에 출입하였고, 또 춘자란 여인이 내외 불화하여 별거하던 바 그 여인을 유인하여 소실로 드린 사건이 있더라. 그런데 고후비께서 "춘자는?" 하고 물으심으로 생각났으며,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불의한 일을 힐난하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모든 허물을 들어 말하며 나에게 사죄를 받으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네가 지은 죄를 사(赦)받을 곳이 없으리니, 네가 지은 죄가 장차 네게로 돌아가니라." 하시니라. (정영규의 천지개벽경 pp93-94)
고민환 선생은 제주 고씨로서 1888년 전라도 옥구구 성산면 성덕리에서 출생했습니다. 고민환은 젊어서부터 승려생활을 했으며, 성품이 온순하고 말수가 적었습니다. 도를 닦는 학자로 처신하였으며 욕심이 적고 성격이 담백했습니다. 1919년 고수부님의 문하에 들어왔고, 1926년 부터는 본격적으로 고수부님의 수제자가 되어 신정공사에 수종을 들다 1966년 사망하였습니다.
고민환 선생은 1931년 용화동에 고수부님을 모시고 들어갔다가, 1933년 동지에 오성산으로 모시고 나와서 고수부님의 마지막을 지켜보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일본이 증산종단을 해체하여 오성산 도장이 헐릴 것을 아신 고수부님께서는, 고민환에게 집을 새로 지어 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의 영정을 잘 모시고, 판밖에서 성도하여 들어오는 사람맞이를 잘 하라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 고민환이 자기 사가(私家)를 짓는 데 돈이 없어서 짓다 말고 중지하였던 바, 하루는 지고후비님께서 명하시기를 "오늘은 내 집을 구경하리라." 하시며 출발하시니, 모든 도인들이 따라 나오더라. 한봉산(옥녀봉)에 이르렀을 때 고민환이 여쭙기를 "어머님! 여기서 보입니다." 하고 아뢰니, 산넘어 짓다만 집을 한참동안 건너다 보시고 돌아오시며 가라사대 "너희들은 나태하지 말라. 시간이 촉박하니라. 그런 고로 속히 내 집을 수찬하도록 하라." 하시니, 이로부터 도인들이 합심협력하여 고민환의 사가가 지어지니라. 그후에 선화하시니 오성산 도장은 헐리고 고민환의 사가(私家)로 원황상제님 천진과 지고후비님 진영을 모시어 오늘에 이르니, 과연 지고후비님의 집이 되였음이 확실하게 되었더라. (선도신정경 pp228-229)
@ 지고후비님께서 늘 가라사대 "판밖에서 성도하여 들어오리라." 하시니 당시의 문도들이 들을 때에 너무나 억장이 무너지는 말씀이나 감히 누구도 그 이유를 캐묻지 못하더니, 어느날은 고민환이 후비님 말씀 끝에 묻기를 "늘 그와 같으신 말씀을 하시오나 감히 묻지 못하였습니다. 황송하오나 오늘은 그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않되는 사유를 소상히 가르쳐 주시옵소서. 어찌하여 저희들은 성도하지 못하나이까." 하고 물으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흥!" 하실 뿐이더라 하니라. (선도신정경 pp226-227)
3) 증산상제님의 법을 용사하시어 결실을 맺으시는 분이 천하의 어머니 고수부님이십니다. 고수부님께서는 진표율사와 율곡 이이의 후신인 이정립과 고민환을 거느리고, 증산상제님의 법을 펴셨습니다. 이정립에게는 상제님의 기지인 용화동을 맡겼고, 고민환에게는 고수부님의 기지인 오성산을 맡겼습니다.
이제 증산상제님 신앙 100년을 맞아, 금산사를 중심으로 용화동과 오성산이 하나로 연결되어 신앙의 결실을 맺을 때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이정립 선생과 고민환 선생은 고수부님의 뜻을 받들어, 증산상제님과 고수부님이 말씀하신 단주수명자를 맞아들여, 후천 미륵불의 용화낙원 세상이요 후천 요임금의 태평천하 세상을 건설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