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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터키지기
터키 이스탄불에 있는 성소피아 교회입니다.
성 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HAGHIA SOPHIA)사원은 비잔틴 시대에 도시에서 가장 위대하고 신성한 곳으로 여겼으며, 오늘날 건축물 중에서 최대 걸작으로써 몇몇 역사 학자들이 세계 7대 불가사이에 하나를 덧붙여 8번째 불가사이로 간주 하는데, 당시의 건축 기술로 볼 때 그처럼 거대한 건물이 그토록 오랜 기간 동안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세계 불가사이 하나로 친다고 해도 별 손색이없을 정도로 관광객들에게 칭송을 받고 있는 박물관이다.
성 소피아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로마식 기념비이며, 교회가 건축된 이래로 제국의 멸망까지 약 천년 동안 새로운 많은 건축 기술이 도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성 소피아를 능가할 수 있는 어떤 건물도 건축되지 못했다.
537년에 건설되어 이스탄불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정복되기까지 916년 간 카톨릭 성당으로 사용되었으며, 그 후 1453년부터 1935년까지 482년 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터키 공화국의 창시자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의 명령으로 대규모의 복구 사업을 거친 후에 회칠이 되어 사라졌던 비잔틴 모자이크들이 빛을 보게 되었으며, 1935년 2월에 박물관으로써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그 이래로 터키에서 3번째로 많은 방문객들이 찾는 박물관이 되었다.
성 소피아 (하기아 소피아)란 이름은 기독교에서 신에게 봉헌된 3개의 부가 물 중의 하나이다. 이 세 개의 부가물은 하기아 소피아(성스런 지혜), 하기아 이레인(성스런 평화),
그리고 하기아 디나마스(성스런 힘)이다.
성 소피아 사원의 역사
360년에 비잔틴 황제 콘스탄틴 대제는 현재 성 소피아가 있는 도시 중심에 메갈로 에클레시아(거대한 교회)라는 목조 건물을 세웠다.
그러나 404년 6월 20일에 발생한 화재로 교회는 완전히 불탔고, 두 번째 건물은 아루카디우스 황제의 아들 데오도시우스 2세 황제의 명령에 따라 루피노스라는 건축가에 의해 404-416년에 첫 번째 교회의 토대 위에 더 크고 튼튼한 교회가 세워져 416년 10월 10일 제막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건물도 116년 만에 반란에 의해 불타고 말았다. 이 두 번째 교회의 토대와 계단, 그리고 양이 부조되어 있는 부서진 조각들은 현재의 성 소피아 박물관 바로 앞에서 볼 수 있다.
이 교회는 황제에 대항하여 532년 1월 13일에 시작된 소위 “니카반란(승리)” 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전차 경주가 열리던 중 히포드롬 경기장에서 시작되었다.
유스티니안 황제는 원래 비잔틴 제국의 합법적인 계승자가 아니었으며, 더욱이 그는 천민 출신의 곡예사 데오도라(Theodora)를 왕비로 삼았고, 그의 주변에는 항상 부패한 간신들이 들 끌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불만을 품고 있던 청색당이 녹색당과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시위와 폭동이 거의 모든 공공건물을 휩쓸어 버린 이 반란 중 화제에서 소피아사원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분에 의해 청색당과 녹색당은 갈라서게 되고, 질서가 다소 회복이 되자 유스티니안 황제의 장군인 벨리사리우스가 고트족 용병들을 이끌고 히포드롬에 들어가 약 4만 명의 반란군을 학살함으로서 진압되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한 유스티니안 황제는 이 건물이 불탄지 39일 만인 532년 2월 23일에 “아담이 태어난 이후 지금까지 볼 수 없었고 앞으로도 볼 수 없을 전후무후한 성당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이때 지어진 세 번째 건물이 오늘날까지 남아있게 된 것이다.
황제는 당시의 가장 유명한 건축가인 트랄레스(Aydin:아이든) 출신의 안데미우스와 밀레투스(Miletos:밀레도) 출신의 기하학자 이시도루스 임명하고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제공해 주었다.
교회의 건축을 위해 가장 좋은 건축자재와 돌들이 나라 전역에서 운반되어 왔으며, 5년 간 100명의 기술자와 10,000명의 노동자들이 투입되었으며, 교회 내부에 사용된 대리석들은 지중해에 있는 국가들 및 소아시아의 대리석 석광에서 가져왔다.
본당의 양쪽에 있는 4개의 녹색 화강석 기둥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달의여신) 신전에서 에베소의 항구 체육관에서 가져온 것이며, 코너에 있는 한 쌍의 반암 대리석 기둥은 바알벡(현지의 레바논)에 있는 헬리오스 신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가벼운 자재로 거대한 돔을 만들기 위하여 로도스의 섬에서 특별한 타일과 벽돌이 운반되어졌으며, 이 건물에는 전체 107개의 기둥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 40개가 본당에, 나머지 67개는 위층 갤러리에 있다.
이 역사적인 건물은 전형적인 로마풍의 건축양식으로 537년 12월 26일 유스티니안 황제에 의해 제막되었다.
소피아 성당의 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마차를 타고 건물로 들어오던 유스티니안 황제는 하나님께 그와 같은 훌륭한 위업을 달성할 수 있게 해 준데 대해 감사했으며 하늘을 향해 두손을 벌리고 “솔로몬 왕이여 내가 당신보다 더 훌륭한 성전을 지었오” 하고 흥분되어 외쳤을 정도로 그 당시의 위대하고 거대한 건물이며 교회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던가 553년, 557년, 559년 연속된 지진으로 동쪽의 아아치, 세미돔, 중앙돔에 손상을 입어 황제는 그것을 2.65미터나 더 높여 563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시 한번 제막식의 행사를 주도했다.
726년에 시작된 우상타파시대에 성 소피아를 비롯된 제국 내 모든 교회의 성화 모자이크들이 파괴되면서 대신에 단순한 십자가 형상이 그려졌다. 843년에 우상타파 시대가 끝나고 종교적인 성화들이 다시 그려지게 되었고, 성 소피아는 황제의 명령에 의해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로 다시 장식되기 시작했다.
1204년 엔리쿠스 단달로(Henricus dandalo)가 이끈 제4차 십자군 원정대의 콘스탄티노풀의 점령으로 이 곳의 보물들은 십자군들에 의해 모두 약탈당했으며, 금 바탕으로 된 모자이크들도 대단히 많이 파괴되었다. 라틴 점령기간동안 성 소피아는 카톨릭 교회로 이용되었고, 1261년 이 도시를 비잔틴 왕족이 재탈환했을 때 교회는 다시 그리스정교 교회로 사용되었다. 13-14세기의 고대 문예 부흥시에 비잔틴 제국의 국력은 기울어졌고 소피아 성당은 버려진 상태에 있었다. 그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다녀간 여행객들은 소피아 성당이 한심스러울 만큼 소홀히 취급되어 폐허로 변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직전 왕이 로마와 병합하려 하는데 항의하여 시민들이 교회에 모이지 않아 더욱 그러했다. 오스만 투르크에 의한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 마지막 날에 시민들이 성전에 모여 마지막 집회를 철야를 하면서 모여 터키군의 선봉이 교회 안에 도달한 다음날 동틀 무렵에 끝났다.
정복자 술탄 메흐멧은 그가 입성한 1453년 5월 29일 오후 소피아 성전으로 말을 몰았고 교회의 정문에서 말을 내려 한줌의 흙을 집어서 신 앞에서 겸손의 행동으로 그의 머리에 뿌렸다.
이 도시를 점령한 3일 후에 교회는 모스크로 바뀌어 1453년 6월 1일 최초로 AYA SOPIA CAMII로서 이슬람식 금요 기도회를 가졌다. 그는 이 건물을 복구, 사원으로 전환하면서 미흐랍(성지인 메카의 방향을 가리키는 움푹 들어간 곳)을 성지인 카바의 방향으로 설치했으며, 부속 건물로써 첨탑과 12개의 방이 있는 회교신학교를 세웠다. 내부 정원과 우물, 그리고 성직자들이 사용하던 방들은 건물 앞 외부에 세워졌다. 모자이크들은 얇은 석회로 덮여졌으며 벽 위의 십자가 형상들은 제거되었으며, 문에 있는 십자가들은 수직으로 된 부분이 제거되었다. 이런 식으로 하여 건물을 많이 파손시키지 않으면서 교회는 이슬람 사원으로 전환되었다. 오스만 시대에 성 소피아에 행해졌던 가장 큰 복구 공사는 1847년과 1849년에 스웨덴인 가스페어와 스위스의 형제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오스만 정부의 요구에 따라 성 소피아의 돔을 보강시켰고, 12개의 기울어진 기둥을 조정했으며, 1479년에 파괴되었던 회교 신학교를 수리했고, 정원에 화장실을 만들었다. 본당 안에 있는 술탄의 좌석도 바로 이들의 작품이다.
성 소피아 사원의 디자인과 규모
3개의 돔이 예배당인 성 소피아는 이런 형식으로 만들어진 첫 번째 건축물이다.
14세기에 처음으로 건축물에 사용되기 시작한 체루빔 천사(기독교 9천사 중 두 번째로써 지식을 맡은 천사)의 그림으로 단대공을 장식한 건축물이다. 높이 55.60미터의 돔은 이스탄불과 터키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가장 높은 다섯 개의 돔들 중 하나이다. 553년 지진으로 파괴된 후 558-562년에 돔은 6.5미터가 더 높게 만들어졌다.
이 때 돔은 타원형으로 만들어져서 돔의 직경이 동서로 31미터, 남북으로 33미터가 되었다.
전체 길이는 100미터이고 7,570평방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건물은 길이가 75x70미터이다.
입구에 있는 복도는 길이가 60미터에 넓이가 11미터이다. 성 소피아 대성당은 완공 후 천년 동안은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으나 지금은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런던의 성 바울로 대성당, 세비야의 대성당, 밀라노의 두오모 대성당 다음으로 다섯번째 큰 성당이다.
복도(외랑과 내랑)
기도를 준비하는 장소인 이 외부복도의 벽과 천장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다.
여러 개의 건물에서 가져온 몇 개의 모자이크 패널과 제이렉에서 가져온 석관, 그리고 12세기에 열렸던 집정관 회의에서 있었던 결정 사항을 적어 놓은 패널 등이 벽을 따라 진열되어 있다. 천장에 있는 9개의 십자가 형태의 아케이드는 습기 때문에 보존 상태가 대단히 나쁘다.
외랑에서 내랑으로 들어가는 통로인 문의 내부 장식에는 MDCCXLVll라는 글이 씌여져 있는데, 이것은 로마 숫자로 1847년을 의미한다. 더욱이 오스만 시대에 수직선이 제거된 십자가들도 문이 서로 겹치는 부분에서 보인다. 외랑과는 달리 내랑에서는 건물이 놀랍도록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다.
벽 위에 균형 있게 배치해 붙여 놓은 화려한 대리석 패널들과 이 패널들의 무늬는 신비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이 곳의 천장은 완전히 금색 모자이크로 덮여 있다.
16,000평방 미터에 달하는 내랑의 벽들은 모두 테세레라고 불리는 대리석 패널과 아름다운 돌 조각들로 장식되었다. 이렇게 장식된 면적은 교회 전체 면적의 두 배가 넘는다.
내랑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9개가 있다. 이들 중 좌우로 맨 끝에 있는 3개씩 6개의 문은 일반인들이 사용했으며, 한 가운데의 가장 큰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었고, 양옆의 황제의 문보다 조금 낮은 2개의 문은 고위 관직자들과 사제들, 그리고 황제를 보필하는 대신들이 사용했다. 황제의 문에 있던 금관과 황제의 문 양 옆의 2개의 문에 붙어 있던 은판은 라틴의 십자군들에 의해 도난 당했다. 황제의 문 위의 머리에는 886-912년 사이에 그려진 현군 레오왕에 의해 그려진 모자이크가 있다.
레오왕은 자식이 없어 당시 교회법으로 금지되어 있는 재혼을 하면서 자신의 용서를 빔과 동시에 세 번째 부인에게 자식을 얻기를 구하는 기도의 모습을 하고 있고, 예수께선 왕에게 축복을 내리는 제스처로 오른손을 들고 있으며, 그의 왼손에는 한 권의 책을 펴 들고 있는데 그 책에는 희랍어로 “너희에게 평화가 있을 지어다. 나는 이 세상의 빛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가운데는 예수가, 왼쪽 원안에는 성모 마리아가 오른쪽 원에는 대 천사 가브리엘의 모습이 있고, 앞에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였던 레오 6세가 무릎을 꿇고 있다.
황제의 문을 지나 본당으로 들어서면 유스티니안과 그의 건축기사 이시도루스가 선택한 훌륭한 건축에 대해 연구할 기회를 갖게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먼저 시선을 끄는 것이 교회와는 전혀 관련이 없이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거대한 돔이다.
40개의 창문은 중앙 도움을 띠 모양으로 두르고 있어 실내의 조명을 밝게 해주는 동시에 도움 자체의 무게도 경감시켜준다. 중앙 도움 천장에 원래 비잔틴 시대 때 만들어진 예수의 그림이 있었는데 오스만 투르크의 정복 후 이 그림은 아랍어로 된 코란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성당이 모스크로 개조된 후 19세기경에 쓰여진 것이다.
중앙 본당의 양쪽 편에 있는 녹색 기둥은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인 에베소의
아르테미스(달의여신)신전에서, 4귀퉁이에 2개씩 서 있는 8개의 붉은 기둥은 바알백(Baalbek-레바논)의 헬리오스(Helios-태양신)신전에서 가져왔다. 이 기둥들의 꼭대기 머리는 코린트 양식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데 중앙에는 유스티니안 대제와 그의 아내 데오도라 칭호인 "바실레우스"와 "아우구스타"의 인장이 각각 모노그램 되어 있어 코린트 양식의 진수를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가벼운 자재로 거대한 돔을 만들기 위하여 로도스의 섬에서 특별한 타일과 벽돌이 운반되어졌으며, 이 건물에는 전체 107개의 기둥이 사용되었는데, 그 중 40개가 본당에, 나머지 67개는 위층 갤러리에 있다.
중앙 바닥의 오른쪽으로 녹색, 붉은색의 대리석 석판들이 모자이크되어 있는데, 소위 오푸스 알렉산드리움(Opus Alexandriim)라고 불리는 이 중앙 원은 당시 "우주의 배꼽"이라 간주했는데 이곳에서 비잔틴 황제들의 대관식이 거행되었다.
돔을 받쳐 주면서 네 코너에 있는 아치 사이에 위치한 삼각형의 단대공에는 3개의 날개가 달린 체루빔 천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전체 길이가 11미터인 이 천사는 얼굴이 각각 사자, 황소, 독수리, 그리고 천사의 모습이었으나 현재는 다각형의 별 모양으로 덮여 버렸다.
입구 왼쪽의 창문 아래 벽에는 9세기 때 콘스탄티노플의 주교였던 3명의 성 이그나티우스, 4세기 때의 주교인 요한 크리스톰, 그리고 2세기 때 안티오키아(현재는 안타키야)의 주교였던 아그나티우스 데오포러스의 초상화가 보인다. 입구의 오른쪽과 왼쪽에 놓여 있는 1,250리터의 거대한 대리석 항아리는 16세기에 페르가몬의 고대도시에서 가져온 것이다.
왼쪽 복도의 앞부분에 있는 직사각형의 대리석 기둥은 일명 “눈물 기둥” 또는 “땀 흘리는 기둥”이라고 불리며, 이 기둥에 있는 내부가 약간 젖어 있는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집어넣고 완전히 한 바퀴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벽과 코너에 있는 8개의 거대한 원판들은 이슬람 지도자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미흐랍의 오른쪽에 있는 판은 알라(신), 왼쪽에는 모하메드, 그리고 양옆의 벽에 있는 4개의 판에는 이슬람의 초기 4대 칼리프들의 이름인 에부 베키르, 외메르, 오스만, 알리의 이름이, 입구의 양 옆에 있는 판에는 선지자 모하메드의 손자들이자 칼리프였던 하산과 후세인의 이름이 쓰여져 있다.
직경이 7.5미터인 이 둥근 판들은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달필로 여겨진다. 후진의 2층 왼쪽에 있는 곳은 술탄의 자리이다. 오른쪽에 계단이 있는 것은 설교단으로 이슬람의 지도자인 이맘이 이 곳에서 매주 금요일에 설교를 했었고, 설교단 바로 앞 사회자의 자리에서 사회자가 코란을 읽었다. 오른쪽 복도에는 18세기 술탄 마흐무트 1세 때 세워진 성 소피아 도서관이 있다.
교회에서 가장 잘 보존된 모자이크는 비잔틴 시대에는 황제의 출입문이자 현재 출구로써 사용되는 내랑 오른쪽 끝에 있는 것이다. 이 모자이크에는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앉아 있고 오른쪽에는 큰스탄틴 대제가 큰스탄티노플을 상징하는 도시의 모형을, 왼쪽에는 유스티니안 황제가 성 소피아를 상징하는 교회의 모형을 들고 있다. 이들은 성모마리아와 예수에게 그들의 걸작품을 자랑스럽게 봉헌하고 있다.
2층 갤러리는 여성들이 예배를 보는 장소이자 종교회의 때 사용되던 곳이다.
이 곳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왕의 명령에 의해서 계단 대신에 비탈길로 만들어졌는데, 그 이유는 다른 여성들이 가마를 타고 올 때 기도하고 있는 여왕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갤러리 중앙의 아치 사이에 있으며 미흐랍의 정 반대에 있는 십자가 형태의 나무 장식물은 손으로 만들어진 훌륭한 유물이며, 이것과 비슷한 것은 단지 시나 사막에 있는 카테리나 수도원에서나 볼 수 있다. 입구 오른쪽의 남쪽 갤러리는 2층 갤러리에서 가장 관심을 끄는 곳이다. 왼쪽의 대리석 패널에는 이스탄불에 왔던 바이킹들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 쓰여져 있다. 갤러리 오른쪽의 입구에 있는 조각된 대리석 문은 “천국의 문”으로 불린다. 이 문의 뒤에는 두 개의 십자가가 새겨져 있다.
천국의 문을 통해 들어가서 오른쪽으로 가면 성 소피아에서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모자이크가 있다. 대단히 정교하고 화려한 이 모자이크에는 예수와, 성모 마리아, 그리고 세례 요한의 모습이 있으며, 라틴 점령당시에 상당히 파손되었지만, 아직까지 대단히 높은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디시스”라고 불리는 이 모자이크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죄인들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이다.
갤러리 끝에는 두 개의 또 다른 모자이크가 있다. 오른 쪽에 있는 것은 가운데 성모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앉고 있고 양옆에는 황제 콤네노스와 그의 부인인 이레인, 그리고 아들인 알렉시우스가 있다.
왼쪽에 있는 모자이크에는 예수가 성좌에 앉아 있고 양옆에는 죠 여왕과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인 콘스탄틴 모노마쿠스의 모습이 있다. 이 모자이크에서 여왕은 11세기에 그의 첫 남편인 로마노스 3세와 함께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이 죽고 새로 결혼을 하면서 황제의 얼굴과 황제 머리 위에 씌여진 문구가 바뀌었다. 현재의 모습은 그녀의 세 번째 남편의 얼굴이다.
갤러리에서 본당 쪽으로 후진의 윗 부분을 보면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앉고 있는 모습과 거대한 천사장 미카엘이 오른손에 지팡이를 왼손에 크리스탈 지구의를 들고 있으며 그의 거대한 날개는 초록, 흰색, 푸른색으로 그의 발까지 뻗치고 있다.
반대편에는 천사장 가브리엘의 날개 부분만이 약간 보일 뿐이다.
그때 당시 얼마나 화려했는지 짐작이 간다....^^ 다음카페-터키 길라잡이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