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12.28(목)-12.31(일)(3박4일) 포항고등학교 친목여행으로 중국 황산을 다녀 온 후 국어과 권형하 선생님의 여행 일기를 올립니다.
제목 : 물은 거꾸로도 흐른다
- 권형하 -
2006년 12월 28일에서 31일까지 3박 4일의 중국 친목여행.
여행은 언제나 그렇듯이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과 추체험으로, 인간들의 삶을 유추하게 하여 나의 생을 풍요롭고 윤택하게 할 것이다. 여행객은 포항고 교직원 44명이었고, 여정(旅程)은 포항에서 출발, 김해공항을 출항하여 중국 상해, 항주, 서호 관람, 황산 등정, 상해, 김해로 회항하게 되어 있었다. 12월 28일 포항에서 05시에 출발하여 도착한 김해국제공항은 한국인들의 해외 여행객으로 붐비고 있었다. 일축한다면 국민 1인당 GNP 2만 불이 근접하게 되면 해외여행을 선호하게 된다던가. 밥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면 삶의 질을 운위하게 되는 때문일 것이다.
700년 전 이탈리아 베니스의 한 젊은 상인 마르코 폴로는 24년의 기나긴 역정을 거쳐 가장 머나먼 이국인 중국 여행기인 <동방견문록>을 남긴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그리고, 230년 전.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박지원(朴趾源:1737~1805)은 44세 때인 1780년(정조 5)에 삼종형 명원(明源)이 청나라 고종 건륭제의 칠순 잔치 진하사로 베이징[北京]에 가게 되자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수행하면서 30여 일간의 여정 속에 곳곳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연행기(燕行記)인〈열하일기〉를 남겼다. 또한 140년 전, 1866년(고종 3년), 가례주청사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홍순학이 지은 장편 기행가사인 <연행가>는 고종이 왕비를 맞이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유후조(柳厚祚)를 상사(上使)로 한 사행의 일원이 된 작자는 서울 출발에서 북경 체류 후 다시 돌아오기까지 130여 일간의 여정에서 보고들은 바를 기술한 여행기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700년 전에 마르코 폴로가 상인으로, 230년 전 박지원이 수행원으로, 140년 전 홍순학이 서장관으로 중국 여행기였다면, 오늘의 나는 3박 4일의 짧은 일정 속에 관광을 목적으로 한 중국 항주의 서호 유람과 안휘성의 황산 탐방기나 관람기이라고나 할까.
12월 28일 08시 40분에 김해공항을 이륙한 중국 상해 발 대한항공기는 비행시간이 1시간 여 되며, 중국에 9시30분에 도착한다고 하고, 한국과 중국의 시차는 1시간이라고 한다. 김해 공항을 이륙한 비행기는 유리창 밖으로 김해와 부산 일대의 오밀조밀한 집들과 남해 바다의 섬을 보여주다가, 금새 꿈을 꾸게 하듯이 넓은 구름 위를 날고 있었다. 어쩜 구름 위에서 나는 느리게 걸어가는 우마차를 탄 듯이 어린 날의 평화로움과 함께 광활한 하늘 속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비가시적인 온갖 사물들에게 부러운 눈길을 주었다. 나와 같이 동석한 김혜란 선생님은 미루나무처럼 키가 커서 늘 싱그러운 느낌을 주는 분이었다. 여행에 대한 이런저런 담론 끝에 도달한 목표치는 다음과 같았다. 즉 삶의 가치 기준을 자본주의론에서 보면, 삶도 잘 사는(구매)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옷을 사는 것도 그렇거니와 여행도 또한 어디를 어떻게 탐방하는 것이 효율도가 높으며 행복 지수가 높은가 일 것이다. 이런저런 얘기 중에 기내식 아침이 나왔다. 아침 식사 차림은 참치알 센드위치였다. 야채와 과일을 곁들인 조촐한 식사는 여행 첫날의 기분을 싱그럽게 하는 것만 같았다. 늘 먹던 된장찌개 속의 내가 아니라, 양식(洋食)이라는 점에서 어제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미답지 세계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게 했다.
09시 30분. 기내 방송에서는 중국 상해에 도착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상해공항에서 입국은 까탈스럽기까지 했다. 입국에서부터 여행 가방을 찾기, 그리고 긴 출국장을 빠져나오는 데, 박완서의 기행 수필집 <잃어버린 여행 가방>중에 한 편의 내용이 불쑥 떠오르기도 하여, 긴장된 흥겨움을 주기도 하였다.
상해 공항을 빠져나오자 중국 관광 여행사 안내원인 조선족 3세인 장미영(30세)씨 가 미리 나와 접견하고 있었다. 부모님 고향이 함경도이며 연변대학 조선어문학부를 졸업한 장미영은 결혼은 했지만 아이는 아직 없으며, 신랑도 조선족 3세로 중국 소주에서 식당을 경영한다고 말하는 아주 소탈한 성품의 예쁘장한 여인이었다. 우리 일행들은 두 대의 버스에 편승해서 첫 여정지인 항주의 서호(西湖)를 보기 위해서 고속도로를 달렸다. 상해에서 항주까지는 4시간이 소요된다고 하던가. 중국의 동쪽 북경에서 티벳족이 사는 서쪽까지 열차여행 시간은 무려 76시간이 걸린다고 하니, 광활한 대륙의 중화사상(中和思想)을 넌지시 알려주는 것 같았다.
중국은 행정구역 명칭이 23성, 5자치구, 1자치주(연변주-조선족이 사는 곳), 4특별구로 되어 있고, 56종족이 사는데, 한족이 92%이며, 조선족 인구는 200만 정도이며, 그 외 니그로족, 회족, 묘족, 이족, 허저족 등이 어울러 산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치안이 아주 심하며 치안은 안정된 곳이라 한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1949년 모택동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었으며 모택동 공산당 약진운동과 강철운동 등을 전개했지만 다 같이 못 사는 사회가 되었다면, 1979년 모택동의 죽음과 더불어 1980년대 당 주석이 된 등소평은 한국의 현대화된 모습을 보고 자본주의와 자유경제 체재 도입했다고 하던가. 그리고 등소평이 1997년에 죽자 등소평의 사위인 장쩌민이 주석에 오르고, 2000년에 와서는 후진타오의 시대가 되었다고 한다. 경제적으로는 중국 전체 1인당 GNP가 2.000 불 정도이고, 정치 도시인 북경과 경제특구로 상업 도시인 상해는 1인당 GNP가 10,000 불이고, 조선족이 사는 연변주는 4〜5.000불이 되어 소수민족 중에서는 조선족이 제일 잘 산다고 하고, 황산이 있는 안휘성은 낙후된 곳이어서 1.000 불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면적으로는 중국 전체 면적이 남한의 150배, 상해가 서울의 10배, 북경은 상해의 3배이며, 인구는 15억 정도라 하는데, 통계가 안 나오는 나라라고 한다. 그 이유로 태어나고 죽음을 통계화하기가 곤란함이라 하던가. 그러나 광활한 국토, 많은 인력 자원, 천혜의 자연관광 자원, 지하에 매장된 무한한 자원 등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한 국가적 정책 수립만 바르게 된다면 거대한 땅덩이의 중국은 미래의 세계 경제 대국으로 도약될 날도 머지않으리라 본다.
상해에서 항주까지 이동하던 여행버스는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두 번이나 휴게소에 쉬면서 항주에 당도하였다. 항주에서 전단강이 보이는 곳에서 우리 일행은 현지식(現地食)으로 점심을 먹었다. 중국 음식이 입에 식상할까봐 미리 가져온 고추장이나 저린 깻잎, 멸치를 몇몇 일행은 반찬으로 먹기도 하였으나, 중국 식당에서 미리 한국인의 식성을 고려한 탓인지 먹을 만한 반찬들이었다. 어쨌거나 현지식(現地食)으로 식사를 하는 것도 해외 관광의 하나의 과정이 아닐까.
그리고 항주는 아열대 기후를 나타내는 곳으로 인구가 660만 명인데 비해 유동 인구인 관광객이 연중 600만 명이 찾아온다고 한다. 이런 항주에는 중국의 36개 호수 중 제일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서호(西湖)와 전단강이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5대 큰 강이라면 <양자강 전단강 해하 황하 회하>라고 한다. 그 중에서 항주의 전단강이 한자(漢字)로 갈 지(之)자 형상으로 흐른다던가.
14시 15분. 점심을 먹은 후, 일행은 전단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바지 위에 우뚝 선 서기 971년에 축조된 13층 육화탑(六和塔)을 구경도 하고, 계단을 통해 올라 정상에서 전단강을 내려다보는 것도 또한 장대함이 아닐까. 어쩜 바다와 같다고 하면 어떨까 싶다.
그리고 이 전단강은 음력 8월 18일이면 조수 간만의 차이로 해와 달이 일직선에 놓일 때, 즉 넓은 데서 좁은 데로 물이 역류되다보니 강물이 전단강까지 올라오지 못해 파도가 친다고 하던가. 그리고 강물에 파도가 치는 곳으로는 나이지리아의 아마존 강이라 한다.
우리 일행은 버스로 중국 항주의 서호(西湖)에서 생산되는 진주조개 체험과 함께 진주조개 가공 전시장을 관람 후, 서호(西湖) 유람선을 타기 위해 발길을 재촉하였다. 서호(西湖)는 넓이에 있어서 둘레가 15km이고, 직경이 3.3km로, 한국 경주의 보문호의 2배가 된다고 한다. 그리고 서호는 절반은 자연이고, 절반은 인공이라던가. 지금도 서호(西湖)를 관광 자원으로 확장해 가고 있다니, 거대 중국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가늠하게 해볼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항주는 현재 절강성의 수도이다. 그러니까 한국의 경주(慶州)처럼 관광도시이자 고도(古都)로, 2500년 전에는 월나라 수도이기도 하고, 1000년 전에는 송나라 수도이기도 하다. 그리고 항주는 평야지방이라 수나라 때에는 수양제가 운하를 파게 하여 홍수(洪水)에도 대비하고, 농업용수와 물자 수송과 유람용으로 배를 만들고 물을 다스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 운하 가에 나무를 심었는데 나뭇가지가 하늘거려서 수양버들이라고 불렀다고 한다나. 어쨌거나 항주에서는 5층 이상의 집을 짓지 못하도록 하는 것도 환경오염과 경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차(茶) 문화를 즐기며, 운하와 서호(西湖)를 잘 보이게 하고자 하는 항주 사람들의 속내라고 생각해보니, 아름다운 자연은 자연적이라기보다는 인위적인 것이라 느껴졌다. 그래서 러셀은 <인간이 도시를 만들고, 도시는 인간의 환경을 만든다>고 말 했던가.
중국에서 4대 미인을 꼽는다면, 춘추전국시대 말기의 월나라의 여인으로 침어(浸魚-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잊어먹게 했었다는) 서시(西施)와, 한(漢)나라 때, 재주와 용모를 갖춘 미인으로 낙안(落雁-기러기가 날개 움직이는 것을 잃고 땅으로 떨어졌다는) -왕소군(王昭君)과, 삼국지에 나오는 인물로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능했다는 폐월(閉月-달이 부끄러워 얼굴을 가렸다는) 초선(貂蟬)과, 당(唐)나라 때 절대가인(絶對佳人)으로, 수화(羞花-꽃을 부끄럽게 하는 아름다움이라고 찬탄한)-양귀비(楊貴妃)이다 소동파는 서호(西湖)의 아름다움을 서시의 아름다움에 빗댔다고 하던가. 서호(西湖)는 봄에는 복숭아 꽃, 여름에는 연꽃, 가을에는 추석 달, 겨울에는 눈경치가 절경이라던가. 그리고 당나라 때 시인 백낙청이 만든 제방이라서 백제, 소동파가 놀던 제방이라서 소제라던가. 그리고 장개석 별장이 있고, 모택동의 별장과 식사했던 곳을 유람선으로 1시간 정도 뱃놀이를 하면서 돌아보았다. 서호는 이처럼 유명한 사람이 많이 찾아와서 더 유명해졌다던가. 그리하여 서호(西湖)를 중국의 10대 명승지에 꼽는 것도, 이곳 항주 사람들이 운하를 만들고 배를 만들어낸 그 옛날 항주 사람들의 자연관이 아닐까. 즉 자연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사람과 교유(交遊)하고 시(詩)를 나눌 줄 아는 항주 사람들의 풍류의 소산물이 바로 서호(西湖)일 것이다. 저 우주적 세계관으로 본다면, 부귀공명도 잠깐이요, 광활한 우주적 질서 속에서 는 쉽게 사라지는 것도 우리 인생이라고 보면, 오늘 밤만 아니라 석 삼년쯤 서호(西湖)를 유람하는 배 위에서 앉아, 격이 맞는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는 좋은 사람을 만나, 술잔 속의 달을 보고 마음의 달도 서로 비춰 보면서 몸도 마음도 내려놓고 뱃놀이나 하면서 그저 계절이 오고가는 것에 대해 기쁨을 나누고, 때로는 섧게 느끼며 여생을 보낼 수 있다면야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하는 생각이 들 즈음, 함께 동행한 김장원 선생이 사진을 찍고 난 뒤 다음 여정으로 옮기자고 말한다.
15시20분. 또 다시 여정은 용정차(龍井茶)를 시음을 하는 곳으로 가고 있었다. 중국은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먹어야 한다던가. 그래서 차 문화가 발달되었다 한다나. 차(茶) 문화라야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 같이 즐겨하지 않던가. 중국이 찐차라면, 한국은 덖음 차요, 일본은 마차(磨茶)라던가. 어쨌거나 물 한 그릇 먹는데도 풍토가 다르고, 습관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 각각의 문화 속의 풍토의 차이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다음 여정은 송성 가무쇼를 관람하였다. 의자에 앉자마자 종일 차 속에서 시달리다 보니 나른함이 이내 몰려왔다. 거지반 눈을 뜬 듯 감은 듯 혼미함 속에서도 바라본 것은 마지막 장면인데, 한국의 아리랑이 울려 퍼질 쯤 인 것 같다. 아마 장사 잇속으로 한국 관광객의 구미에 맞추려는 느낌이 들었다.
송성 가무 쇼를 마치고 식당에서 한정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호텔로 향하는 발길 앞에 레온불빛 속에 유난히 크게 눈에 띄는 글! 급아일천(給我一天), 의역한다면 <모든 하늘을 너에게 주겠노라!> 라는 뜻이 아닌가. 항주는 한국의 제주도나 경주와 같은 관광 도시로서, 어쩌면 여행객들에게 마음껏 보고 듣고 느끼고 즐겨도 좋다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관광도시인 항주 사람들의 자부심을 가지겠다는 속내를 내심 내비치는 것이 아닌가. 23시, 항주 소산 호텔에서 중국의 첫날밤을 길게 눕혀놓고 잠이 들었다.
12월 29일 07시 30분 아침 식사를 하고 난 뒤, 물의 도시이자 호반(湖畔)의 도시인 항주를 떠나게 되었다. 아름다운 서호(西湖)가 있어서, 항주의 역사가 더 위대하게 느껴지고, 많은 시인이 찾아와서 시와 인생과 사랑을 이야기했기에 더 융숭하게 느껴지는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항주 서호(西湖)에 와서 사랑을 나눈 커플은 쉽게 깨어지지 않는다 하던가. 내심 평생에 잊지 못할 사랑의 흔적도 남기지 못한 체 떠나게 됐다는 어눌한 감이 드는 것은 나만의 노파심일까.
12월 29일 아침 08시 20분. 항주에서 5km에 떨어진 곳에 위치한, 중국이 자랑하는 고대 사찰 영은사(靈隱寺)는 서기 459년 동진(東晋) 시대에 인도의 혜리스님이 창건했다고 하며 중국 선종의 십찰(十刹)의 하나라던가. 그리고 소림사보다 창건이 170년이 앞선다고 하던가. 그리고 이 사찰의 대웅보전(大雄寶殿)은 높이가 33.6m에 웅장한 건물이라서 참배객들을 가위 눌리게 하는 듯하였다. 어쩌면 한국의 구산 선종의 하나인 신라의 고찰 문경(聞慶)의 봉암사(鳳岩寺) 사찰이 하늘을 살짝 뒤로 밀쳐놓고 산자락을 끌어내려 친근감을 준다면, 중국의 영은사(靈隱寺) 대웅보전은 산을 밀쳐내고 하늘을 다 가린 중생을 위압하는 형상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송대(宋代)에 건축된 500 나한상(羅漢像)중에는, 전생에 나와 인연이 있는 나한(羅漢)이 오늘의 나로 태어나게 하여, 오늘에서야 만나게 됨을 크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지난 해 일본 기행 중에 남장원(南藏院) 사찰의 나한상(羅漢像) 중에서도 나를 닮은 나한상(羅漢像)이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있었는데 말이다. 어쩜 삶은 윤회되고, 연(緣)이 있어 이승에서의 인연(因緣)이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닐까. 업보로다! 업보로다!
12월 29일 09시 50분. 영은사를 관람하고 나와, 중국여행의 백미(白眉)인 황산(黃山)으로 향하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골이 패인 길바닥에는 물이 고이고 얼음이 얼어 있었다. 지난밤의 추위를 말해 주는 듯하였다. 이내 잡상인들이 조잡한 물건들을 들고 와서 처음에는, <한 개 만원>하고 외치더니, 버스가 떠나려고 하자, <세 개 천원! 세 개 천원!>하고 외치고 있었다. 일행은 그 <세 개 천원!> 하는 소리를, 영은사 사찰 하늘에다 웃음으로 커다랗게 쏟아놓고 떠났다. 아마도 부처님이 듣고 계셨다면, <한 개 천원! 한 개 천원!>이라고 말하지 않으셨을까! 대자대비(大慈大悲)한 부처님이시니까.
여행 버스는 항주 시내를 빠져나와 중국 안휘성에 있는 황산(黃山)으로 가기 위해 속력을 내고 있었다. 여기서 황산까지는 3시간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번 중국 해외여행을 주선한 친목회 이용호 회장은 중국탐방이 세 번째라서 한결 중국 여행에 대한 선행 체험을 바탕으로 황산 등정이 순조로운 진행이 되도록 배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행한 몇몇은 지난 밤 항주에서의 음주가무(飮酒歌舞)가 좀 과했는지 깊은 잠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 술은 잘하지 못하지만 주연(酒宴)에 익숙했던 김 선생도 잠을 청하고 있었다.
12시 30분. 황산 가는 길목의 있는 황산시 풍경구에 위치한 <한국 아리랑 식당>에서 한정식으로 밥과 돼지 불고기를 중식으로 먹었다. 식당 앞으로는 황산에서 발원하여 흘러가는 신안강 상류가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상류라지만 강폭이 넓은 것으로 보아 강우량을 대충 짐작해 낼 따름이다. 그리고 중국은 광활한 탓인지, 지역마다 여행 수칙이 다르기 때문인지, 여행지가 달라질 때마다 그 지방 안내원이 새로이 오르고 내렸다. 황산을 안내할 현지 여행 가이드는 조선족 3세로 인동 장씨 장덕성(39세)이였다. 목소리가 텁텁한 것으로 보아, 꽤나 술과 담배를 좋아할 것 같았다. 잠시 짬을 내어 술과 담배를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퍽 좋아한다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투가 마음씨 너그러운 이웃 늙은 총각처럼 보였다. 버스는 달리고 산을 빠져나오던 차는 다시 산으로 들어가고, 계곡을 끼고 달리던 버스는 산 속을 달리다가 싱거운 듯, 깎아지른 좌우의 산등성이마다 차(茶) 재배하는 밭을 한 자락씩 보여주다가 이내 지친 듯, 여러 산자락에서 재배하는 차밭을 한꺼번에 보여주고는 했다. 중국의 4악(岳)은 태산(4200m), 화산(4000m), 구화산(3200m), 황산(1864m)이라고 하던가. 그 중에서도 황산은 연중 200일은 구름이 끼고 기후가 습해서 일출과 일몰을 못 본다고 한다. 하지만 현지 안내인은 오늘은 날씨가 매우 좋아 황산에서의 일몰과 일출을 아름답게 볼 수 있다고 한다. 행정구역상 중국 안휘성 황산시는 낙후된 산골로 인구는 150만이 산다고 하고, 7개의 방언이 통하고, 1인당 GNP가 1000불 정도라고 하던가. 특산물로는 약초, 보석, 녹차, 벼루, 먹이라고 한다. 기후로는 겨울은 매우 춥고 여름에는 40도 씩 온도가 올라가는 더운 날씨라고 한다. 황산은 1979년에 등소평의 지시로 관광지로 개발이 되었다고 하던가. 그리고 황산 여행객이 연중 60만 명인데, 지난 해 중반부터 한국인이 50만이 다녀갔다던가.
14시 50분. 황산시 풍경구에 도착하자 대형 숙박시설 공사가 한창이다. 천혜의 관광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거대 중국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듯하다. 일행은 다시 황산 등정을 위하여 타고 온 버스에서 내려, 황산시에서 운행하는 관광버스에 올랐다. 아마 광활한 땅덩어리인 중국이다 보니, 행정구역마다 버스 운행지침이 다른가 보다. 이제 황산 등반에 필요한 물건과, 이번 친목여행의 퍼포먼스로 꾸며진 교환할 선물을 챙겨야 했다. 황산 등정을 위하여, 황산시에서 캐이블카 타는 곳까지 버스로 20분 이동하였다. 가파른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오를 적마다 황산의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이미 우뚝 막아서는 천혜의 절벽은 우리나라 설악산 금강굴이나 공룡능선을 몇 개씩이나 보태놓은 듯하여, 그 웅자와 위용에 감탄했다. 황산 주봉들은 연화봉(1864m), 광명정(1840m), 천도봉(1810m), 오어봉(1610m)이라던가. 버스에서 내려 캐이블카를 타는 곳으로 갔다. 거대한 황산 지형도가 세워진 곳이 바로 운곡산장(雲谷山莊)이다. 이제 운곡산장에서 1100m는 캐이블카로 이동하여 백아령으로 가게 된다. 캐이블카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운곡산장! 모든 것을 훌훌 벗어버린 듯, 씻어버린 듯, 나의 지난날은 아득히 지워지고 먼 미래로 새로움만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백아령! 백아령 캐이블카 종착점에 내려서 이제 7km를 3 시간 정도로 등정해야 한다. 도착지점은 오늘의 숙박지인 북해호텔이다. 가이드의 안내는 계속되었다. 노정이 험난하고 계단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걸으면서 보지 말고 깃발 보며 따라가기를 종용하던가. 잠시 숨도 돌릴 겸, 백아령에서 내려다 본 수많은 봉들은 낮게 조잘거리는 듯, 업(業)하는 듯도 하고, 쳐다본 봉우리들은 무엇을 그리 서둘러 이 척박한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났느냐고 달래는 듯, 위로하는 듯, 비웃는 듯도 하다. 어쩌면 이 세상에 다시없을 새로운 종교관이나 학설이나 이념을 계시하는 것 같기도 하다. 예수가 골고다 언덕을 고행으로 올라 헐벗고 가난한 이들을 구원하듯이, 석가가 설산에 올라 대자대비를 설파하였듯이, 나도 이 황산을 아홉 해 정도쯤 오르내리며 정진 수행한다면 또 다른 진리의 세계에 넘나듦에 가 닿지 않을까 하는 치기(稚氣)에 휩싸이기도 했다. 성철 스님의 선문답인,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에서 선승(禪僧)의 그 높은 뜻을 어찌 내 짧은 식견으로 다 헤아리겠는가마는, 사물이나 대상을 보는 단순한 관점인 긍정론과 부정론으로 보면 어떨까 싶다. 먼저 긍정론으로는, 산 속에서 오래 무념 정진하다보면 산이 곧 부처요 물이 곧 설법이라는 진리가 아닐까. 그렇다면 부정론으로는, 산과 물과 나와의 물아일체가 되지 않은 상태를 이름이 아닐까.
등정 길옆은 천애(天涯)요 단애(斷崖)이니 비켜설 곳도 마당찮다. 일행 모두들 산승(山僧)이 되어 큰 깨달음을 얻고자 오르고 오르니 쉴 겨를이 없다. 그저 팍팍한 다리를 두드리며 오를 수밖에 없었다. 일행들이 모여 있는 관망하기 좋은 곳은 광명정(표고 1840m)이라던가. 날씨가 쾌청한 탓으로 엷은 운해(雲海) 속으로 저 멀리 먼 산봉우리들이 키를 재듯 발돋움하는 것 같다. 또 그 옆의 봉우리가 오어봉이고, 광명정에서 서북쪽은 비래석이 있는데,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형상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16시 10분.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고 내리며 잠시 쉬는 동안에, 저녁 해는 저 먼 바다와 같은 운해 속으로 붉은 빛을 띠며 일몰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참 넋을 놓고 바라본 그 장엄한 일몰의 장관을 무엇에 비하랴. 하루의 해가 다 소진되는 소멸의 아쉬움보다는, 하루를 완성해가는 성숙한 모습이었다.
그때 이용호 친목회장이 가파른 돌계단을 올라오고 있었다. '행자무강'(行者無疆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이라던가. 어느덧 어둠이 조금씩 짙어지면서, 지는 해는 저 운해 속으로 완성된 적멸(寂滅)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둠이 완전히 짙어짐과 동시에 중국에서의 이틀 째 여정을 풀어야 할 <북해 호텔>에 도착했다.
북해 호텔에서 현지식(現地食)으로 저녁을 먹었다. 황산은 표고(1840m)가 높기 때문에 물 사정이 좋지 못할 뿐 아니라 밤 기온이 떨어진다는 사연에, 여행 파트너인 엄기복 교무부장과 함께 세면도 대충하고서 옷을 그냥 입은 채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 해맞이를 보기 위해서 모닝콜이 06시라던가.
12월 30일 06시. 모닝콜은 어김없이 울렸다. 추운 북해 호텔 탓으로, 황산을 등정하느라 녹녹한 몸이래도, 어느 세월에 다시 이곳에 오랴 싶어 어둠을 젖히고 일출과 운해를 보기 좋은 전망대인 시심봉으로 갔다. 호텔에서 10분 거리에 놓인 시심봉가는 산길은 또 다른 산행의 묘미를 느끼게 했다. 싸늘한 공기를 가르며 잰 걸음으로 발걸음을 놓을 때마다 산의 숨소리가 자박자박 들려오는 것 같았다.
07시. 일행들은 어둠이 서서히 걷히는 시심봉에서 멀고도 깊은 운해 속으로 한 점 불씨를 지피는 해를 바라보았다. 길게 그은 운해선(雲海線), 그 위로 불씨처럼 돋는 해를 바라보며 자연의 장엄함을 만끽하였다. 어쩜 세밑의 모든 허물은 다 태워내고 정(淨)한 불빛 속으로 희망만이 활활 타올랐다. 08시 00분 북해 호텔의 현지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여장을 챙기고 20분 거리의 걸어 내려와 청량대(표고 1640m 일출과 운해를 보기 좋은 곳)에서 캐이불카를 타고 운곡산장까지 내려가기 위해서 잠시 청량대에서 천하를 관람하였다.
청량대에서 바라본 아침 해는 어쩜 활짝 핀 꽃떨기의 황제라면, 푸른 솔잎으로 치장한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은 아침 문안을 드리는 신하이거니, 그리고 멀리 혹은 가깝게 다가와 무수히 엎드리는 작은 봉우리들은 백성들일 것 같고, 백성들이 아뢰는 말들을 황산은 다 듣고 있는 것만 같았다.
10시 10분. 청량대에서 운곡산장으로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였다. 천혜의 황산이여! 신의 품 같은 황산이여. 잘 있거라. 누대(累代)의 또 여행객이 있어 찾아오거든 그대의 용기와 패기를 마음껏 하늘로 불태워라! 10시 20분. 일행들은 황산 예거리와 노점에서 특산품을 사고 쇼핑도 한다. 나는 잠시 깊은 상념에 빠진 사이에 차가 오고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이용호 친목회장이었다. 황산을 두 번이나 등정(登頂)한 패기일까. 만면에 웃음을 띠고 오늘 일정을 대충 일러주고 있다.
13시 10분 황산시 서울관에서 중식을 먹었다. 식단으로는 돼지불고기와 배추쌈과 된장찌개였다. 그런데 서울관 식당 주인이 한국 사람인데, 그것도 내 고향인 상주 사람이라지 않는가. 먼 이국땅에까지 와서 고향 까마귀를 만나다니 놀랍고 반가울 뿐이다. 식사를 다 마친 후, 악수를 하고 족보를 따지는데, 아니 글쎄, 상주의 중·고등학교 2년 후배가 아닌가. 식당 일이 바쁜 탓으로 길게 얘기도 못 나누고 아쉽게 헤어져야만 했다. 중국에서 하는 사업이 잘 되기를 빌 뿐이다.
이제 중국 황산에서 관광할 곳은, 비취계곡 관람과 실크공장 관람, 화산 미굴 탐방, 발 맛사지 등이었다. 그 중에서도 불가사의한 화산 미굴에 대한 관심이 동하였다. 화산 미굴은 어느 시대에 누가 팠는지 어떤 목적으로 팠는지가 불가사의하다고 하던가.
18시 30분 황산에서 현지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앞으로의 여정(旅程)은 황산에서 상해까지 7시간을 버스로 이동하여, 상해 신장강 주점에서 유숙하고, 아침에 출국하게 된다.
12월 31일 02시10분. 신장강 주점에서 유숙하였다. 중국은 호텔을 주점이라 하던가. 아침 06시 기상하여 호텔식으로 아침을 07시에 먹었다. 상해의 아침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 친목 여행단이 중국 관광을 끝낸 뒤라 날씨도 아쉬움이 남아 변덕을 부리는가! 어쩌면 친목여행을 주선한 모든 분들이 아마 마음씨가 고와서 날씨도 한몫으로 도와주고 있는지 모른다. 상해 발 10시 45분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거대한 중국! 많은 인구와 지하자원과 관광자원과 그 넓은 대륙을 함께 융합하는 중화사상! 그런데 오늘날은 한국의 80년대 수준의 나라! 우리나라 자동차를 수입해가는 나라! 230년 전, 박지원이 중국 청나라의 문물을 숭배했고, 140년 전, 홍순학이 청나라의 문화를 동경했지 않은가. 그리고 오늘의 우리들이 한창 현대화하는 중국을 보고 왔다. 우리의 기술보다는 현재는 뒤쳐져 있어도 언젠가는 세계의 경제 강국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나라이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던가. 과거의 중국의 물은 높았지만, 오늘의 물은 우리나라 물이 중국으로 흐르지 않는가. 영원히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중국 여행! 항주와 황산의 여행 모든 기억과 추억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나의 삶에 또 다른 희망을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