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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天 無比 큰스님 염화실 인터넷 법문]
[如天 無比 큰스님]
信心銘-제5강 (遣有沒有 從空背空~) 2006년 2월 8일
반갑습니다. 2월8일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 하겠습니다. 모두들 갑자기 날씨가 좀 추워져서 여러 가지 생활에 불편 하실 텐데 어떠신지요? 범어사는 그 어제 그저께부터 온 눈이 녹지를 않고 그대로 있습니다. 날씨도 매우 쌀쌀하고 요.
오늘은 신심명 遣有沒有(견유몰유)요. 從空背空(종공배공)이라 라고 하는 부분부터 할 차례입니다. 有(유)와 空(공)의 문제는 앞에서도 나왔는데, 여기서도 또 나옵니다. 왜 이렇게 유와 공의 문제가 자주 등장 하는가 하면, 이 세상에 존재와 비존재. 이 둘로 세상을 나눌 수가 있지요. 있음과 없음. 둘로 크게 나누면 그렇게 나누어집니다.
그런데 이제 있음과 없음이 우리가 일견 우리들 마음으로 파악되는 그런 그 있음과 없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있음과 없음을 좀더 정확하게 있음의 실상대로, 또 없음의 실상대로, 정확하게 우리가 파악을 하며는 그 외에 다른 여타 것은, 다 그것이 열쇠가 되어서 풀린다는 것이지요. 이 세상에 건립되어 있는 모든 것들은 그 밑바탕에 뭡니까? 있음과 없음이 있어서, 그 위에 건립 되어 있다고 이렇게 보면 됩니다.
우리가 희로애락의 감정이라든지, 또 우리가 근거하고 살아가는 모든 생활의 기반. 이것이 뭐 그 의식주 문제에서부터, 사람관계 이 모든 것들이 전부 있음과 없음의 상대적인 것이 기본이 돼서, 또 역시 상대적인 것은 상대적인 것을 낳아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전부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그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그 실상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고, 또 수용함으로 해서 모든 문제가 다 해결 된다는 것이지요.
첫째, 뭐 儒敎式(유교식)으로 이야기 하며는, 처음에 뭐 중도라고 할까요? 거기에서 太極(태극)은 無極(무극)이고, 무극에서 陰(음)과 陽(양)이 나눠지기 시작하고, 그 다음에 음과 양이 있음으로 해서 사상이 나눠지고, 사상에서 팔괘. 팔괘에서 삼십육괘로 이렇게 나눠져서 세상이 벌어졌다. 주역을 우리가 좀 공부 해보면 그런 식으로 세상이 펼쳐졌다. 라고 하거든요.
사실 현상을 파악하는 데는, 그런 연역 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 상대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그 상대적인 모든 것들의 기본이 되는 것이 있음과 없음. 여기서 말하는 有(유)와 空(공)이다 하는 것입니다. 뭐 남자와 여자가 그렇고, 좌와 우가 그렇고, 음과 양이 그렇고, 뭐 전부 승과 속이 그렇고, 일체가 전부 그렇게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그래서 그 상대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현상의 그 기본이 있음과 없음. 유와 공을 우리가 제대로 파악했을 때, 다른 여타의 문제는 잘 풀려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좀더 우리가 살펴보게 되는데, 여기에 아주 좋은 말이 있어요.
遣有沒有(견유몰유)요. 從空背空(종공배공)이라. 우리가 불교적인 그런 안목에서 볼 때, 어떤 있음에 모든 것이 걸리니까, 있다고 하는 것을 좀 거부하는 터부시 하는 그런 경향이 사실 불교에는 없지가 않습니다.
어제 이야기했듯이, 뭐 空 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예요. 그러나 有 보다는 훨씬 다른 차원의 경지이기 때문에, 일단 우리가 유에 걸려있는 사람으로서는, 유를 초월해야 됩니다. 유를 초월하려면 어쩔 수없이 만나게 되는 것이 공의 경지이지요.
그래 어제 이야기가 공도 유를 대처하는데, 유의 病(병)을 치료 하는 데는 공이라는 약이 좋지만, 그 약은 마치 소금을, 맛을 내는데 필요한 것이라고 해서 많이 먹는 것과 같아서, 결국은 공도 하나의 병이된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유도 쫓지 말고, 공에도 머물지 말라 그랬어요. 그래서 여기서는 유외 공을 어떻게 우리가해야 할 것인가?
유라고 해서 거부하는 그런 경향이 있는데, 그렇다고 遣有沒有(견유몰유)라 그랬어요. 유를 보내려면 거기에 또 유에 보내려고 하는 그 마음이 있어서, 거기에 빠지게 된다는 것 이지요.
그래 유에 빠진다. 이 말입니다. 유를 보내려고 하면 유에 빠진다. 보내려고 하는 그 마음이 벌써 유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 이지요. 누구를 미워한다. 라고 하는 말은 그 만치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다는 말 하고 똑 같습니다.
관심이 없으면 좋아할 마음도 없지만, 미워할 마음도 또 없는 것 이지요. 미워한다는 것은 그만치 관심이 있다는 뜻이 돼버리지요.
그럼 관심이 있다고 하는 것은 좋아하든 미워하든 그만치, 그 대상에게 빠져 있다. 이렇게 표현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심리가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遣有沒有(견유몰유)요. 從空背空(종공배공)이라. 유를 보내려고 하면 보내는 그 마음이 벌써 유 이지요. 그래서 유에 오히려 더 빠지게 되는 것이고, 그대로 내버려 둬야지요.
자연스럽게 우리가 수용하고 받아들이고, 그것은 그 나름의 가치로 인정해야 된다. 그 음과 양을 두고 이야기 하더라도, 음과 양이 뭐 어느 것이 더 가치 있고, 더 못하고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똑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功能(공능)을, 각자 가지고 있는 그런 뛰어난 공능을 우리가 잘 이해하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지요.
어느 것을 더 낫다고 추켜세울 것도 또한 없습니다. 유도 공도 역시 그런 원리이지요.
그래서 從空背空(종공배공)이라. 공은 어떻습니까? 空이 有에, 있음에 따르는 病(병)을 대치하는데, 치료하는 데는 空이라는 것이 참 좋아요.
그렇다고 공만 자꾸 쫓아가면 어떻게 됩니까? 사실은 공은 그렇게 쫓아갈 꺼리가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공을 쫓아가면 공과 등지게 된다. 공의 이치하고는 등지게 된다. 그것이지요. 공은 그 뭐 있는 것이 아니니까, 굳이 알고 보면 쫓아갈 것도 아니지요.
쫓아갈 것도 아닌데, 쫓아가면 그것은 오히려 공의 이치하고는 거리가 멀어진다. 그래서 공의 이치와 등지게 된다.
참 묘한 말입니다. 遣有沒有(견유몰유)요. 從空背空(종공배공)이라. 유를 보내려고 하면 오히려 빠지게 되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괜찮지요.
從空背空(종공배공)이라. 공을 쫓아가면 공과 등지게 된다.쫓아가는 일 그 자체는 이미 有 거든요. 그래서 空을 등지게 되는 그런 일이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空과 有를 다 받아들이고 수용하는, 그런 입장. 그것이 중도적인 입장이다. 또 圓融無碍(원융무애) 해서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바람직한 그런 어떤 受用法(수용법)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이쯤 해놓고...
승찬 대사께서 아주, 多言多慮(다언다려)는 轉不相應(전불상응)이다.
이것 참, 말은 간단한데, 그래도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 말(言) 이라는 것이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 이런 간단명료한 표현을 하시면서도, 이런 말까지도 오히려 필요치가 않다. 그랬어요.
多言多慮(다언다려)면 轉不相應(전불상응)이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하지 못한다.
더욱 더 상응하지 못한다. 相應 은 至道(지도)와 상응하지 못한다. 지극한 도!
그 뭐 사실 말 많으면 어떻습니까? 그 진실하고 거리가 멀어지지요. 진실하고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하더라도 진실에 맞추려고 뭐 변명을 늘어놓고, 설명을 늘어놓고, 구차한 소리 막 그렇게 하지 않습니까?
우리 일상사에도 그렇지요. 일상사에도 말이 많으면 그 어딘가 진실성이 없지요. 그 뭐 진실은 굳이 말로 그렇게 설명할 것이 아니지요.
그래 지극한 도에 우리가 가까워지는 것도, 어찌 보면 이런 말을 통해서 더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多言多慮(다언다려)는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 더 상응하지 못한다. 지극한 도하고 바람직한 인생하고, 오히려 상응하지 못한다.
絶言絶慮(절언절려)라야 無處不通(무처불통)이다. 그랬습니다. 말을 끊고 생각을 끊어 버리면, 어느 곳이든지 통하지 아니함이 없다. 통하지 아니한 곳이 없다. 쉽게 해석하면 그렇지요. 통하지 아니한 곳이 없다.
그러니까 묵묵히, 말없이 또 생각마저 끊어져서 가만히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세월이 해결해 주고, 진실이 드러나게 돼있고 그렇지요.
예를 들어서 회의를 하는데, 10명이나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어떤 문제를 가지고 뭐 난상토론을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거기에 그 끼어들지 않고, 어느 한 곳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정말 텅 빈 그런 치우침이 없는 그런 마음상태가 되면, 다 이해하지요. 이 사람말도 일리가 있고, 저 사람말도 일리가 있고, 그래서 無處不通(무처불통)이지요.
다 이해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뭐 예를 들어서, 마음에 어떤 바르지 못한 생각을 가지고 끼어든 사람이 있으면, 그것마저 눈에 들어와요.
환히 明鏡之水(명경지수)같이 그런 것이, 파악이 됩니다. 그것마저도 통 하게 된다.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서로의 주장도 알게 되고, 그 주장의 저의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絶言絶慮(절언절려)하면 無處不通(무처불통)이라. 참 이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아주 그 쓰임새가 많을 그런 말씀 같습니다.
물론 이제 지극한 도! 정말 툭 터진 그런 그 진정한 가치의 인생을 누리는 데야 뭐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歸根得旨(귀근득지)요. 隨照失宗(수조실종)이니 그랬습니다. 歸根得旨 이야기하기 전에, 絶言絶慮(절언절려)하면 無處不通(무처불통)이라. 고 하는 대목을 우리가 살펴보니까, 금강경의 제일분 법회인유분에 보면은, 걸식 이야기가 있어요.
부처님께서 때가 돼 가지고 걸식을 나서고, 그래서 걸식을 해서 돌아와서 식사를 다 하고, 그리고는 순서가 洗足(세족)! 발을 씻는다. 라고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에 敷座而坐(부좌이좌)라고 해서, 자리를 펴고 앉으시다. 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금강경에서는 뭡니까? 나 자신을 비우고, 나 자신을 비운다는 것은 無相(무상)으로 爲宗(위종)이라 해서, 첫째 나에 대한 相. 남에 대한 相. 또 어떤 그 중생이라고 하는, 자기의 부족함. 또는 잘남. 이런데 대한 그런 열등의식. 이것도 衆生相(중생상) 이라고 해서, 相 이지요.
그 다음에 한계의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시간의 제약을 받는 존재다. 그것이 壽者相(수자상). 어떤 시간의 제약을 받는 그런 존재다. 라고 하는 그런 의식. 이것이 한계의식으로 壽者相이라고 그러는데, 그런 相들이 없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이 금강경의 주된 가르침인데, 그 이야기를 정말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서론에 해당되는 법회인유분에서, 매일 하시는 걸식 이야기를 뜬금없이 떡 등장시킵니다.
부처님은 다른 경전 설하시던 날도 뭐 굶으신 것이 아니지요. 늘 걸식은 하셨는데, 딴 경전에는 왜 그런 걸식 이야기가 안 나오는가? 또 발을 씻고 자리에 앉으시다. 라는 말이 안 나오는가? 그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지요. 그래서 여기에서 제1분에서 금강경에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다 담겨있는 세 가지 용어가 있다.
첫째는 걸식 이라는 것이지요. 걸식은 이것은 자기 자신을 철저히 비우지 아니하면 못하는 일입니다.
옛날에 우리도 탁발을 해 봤는데요. 이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니예요. 탁발 이라는 것이...
이 정말 그 자신을 철저히 비우지 아니하면 탁발이 제대로 아니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한 탁발은 그저 뭐 부끄러움과, 무슨 뭐 자기 체면과 온갖 그런 마음들이 뒤섞여있는, 그런 것이지요.
그래 걸식이라는 말이 자기를 철저히 비운 것. 相을 다 없앤 것이고, 그 다음에 이제 洗足(세족)이라는 것이 있는데, 뭐 매일 발을 씻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굳이 세족하셨다. 라는 말을 등장 시킨 것은, 정말 이것도 자기를 비우는 것이고, 아울러 모든 상을 다 비우는 것을 발을 씻은, 발의 때를 씻은 그런 일로서 그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금강경에 그 이야기를 등장 시킨 것이지요. 매일 하는 일인데, 다른 경전에는 아니 나오지요.
그 다음에 敷座而坐(부좌이좌)라고 그랬습니다. 자리를 펴고 앉다. 이것이 오늘 無處不通(무처불통) 絶言絶慮(절언절려)하면 無處不通(무처불통)이라. 고 하는 이 말과 이 걸식과 세족과 자리를 펴고 앉다. 라고 하는 이 말이 다 매우 상통하는 그런 그 말씀이기 때문에, 연관시켜서 생각 해 봅니다.
철저히 앉으면요. 자리를 척 펴고 철저히 앉으면, 우리는 뭐 몸은 앉아 있지만, 생각은 뭐 오만 사람 다 만나고, 온갖 곳 다 돌아다니고, 할일 다 하지요.
오히려 뭐 몸뚱이가 가서 하는 것 보다, 앉아서 하는 일이 더 많습니다.
참선 하려고 앉았을 때, 더 많은 생각하고 기도 한다고 할 때 생각 더 많이 하지요.
여기 이제 敷座而坐(부좌이좌)자리를 펴고 앉는다는 말은 몸도 마음도 철저히 앉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그것이 모든 상을 다 비우는 것! 자기를 비우고, 나가서 我相(아상). 人相(인상). 衆生相(중생상). 壽者相(수자상). 이것까지 다 비우는 그런 모습을 이렇게 형식으로서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그래요. 그것이 말하자면 말도 끊어지고, 생각도 끊어지면 다 통한다.
말하자면 걸식이 다 통할 수 있고, 진정한 걸식은 정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다 없어져 통할 수 있고, 발을 씻는다는 의미가 그렇고, 철저히 자리를 펴고 앉는다는 뜻이 그렇다. 이렇게 연관시켜서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歸根得旨(귀근득지) 隨照失宗(수조실종) 그렇게 했어요. 근본으로 돌아가면 정말 종지를 얻고, 뜻을 얻는다. 뜻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대도를 우리가 성취한다.
지극한 도. 맨 처음에 至道無難(지도무난)이라고, 하는 그 뭐라고 할까요? 가장 이상적인 삶을 우리가 누리게 된다. 그런 표현하고 같아요. 至道 를 얻는다. 至(지)자는 지극한 도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隨照(수조)하면 失宗(실종) 이라 그랬어요. 비침을 따라가면 종지를, 근본을 잃어버린다. 그랬습니다.
여기서도 상대적인 말이 하나 나왔어요. 여기서 상대적인 말은 무엇인가 하니 根과 照입니다. 歸根得旨(귀근득지) 할 때 根과, 隨照失宗(수조실종)할 때 照 하고, 이것이 상대적인 말입니다. 根(근)의 일반적인 상대는 경계가 되겠고, 또 照(조)의 일반적인 용어로서의 상대는 고요할 寂(적)자, 寂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고요할 寂(적)자가 근본이 되고, 비칠 照(조)자가 境界(경계)가 되는 거예요. 비치는 곳을 따라 간다. 이 말입니다. 여기서는...
비치는 곳은 境界가 되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경계만 우리가 자꾸 쫓아가면, 경계는 차별하니까 모든 것이, 차별한 모습이기 때문에, 그거는 照(조)를 따라가는, 우리 마음이 가는 곳을 照 라고 합니다. 가는 곳이 어디 입니까? 경계지요. 경계를 따라가면 종지를 잃어버린다. 종지를 잃어버린다. 근본을 잃어버린다. 그래요. 뭐 말은 비슷합니다마는, 종지를 잃어버린다. 그랬어요.
그러니까 근본은, 어떤 중도적인 삶이라고 할 수가 있고, 照(조)는 어떤 차별된 현상을 쫓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것도 根(근)과 照(조)가 상대다. 익은 표현으로서의 근의 상대는 境(경)이고, 照(조)의 상대는 고요할 寂(적).寂照(적조)라는 말을 잘 쓰지요?
적은 우리 마음의 寂滅(적멸)한, 텅 빈 그런 입장이라면, 조는 우리 마음이 작용하는 것. 어디든지 가서 비치는 것이지요. 비친다는 표현을 잘 씁니다.
그 마음이 가며는, 말하자면 우리가 불을 이렇게 비추면 사물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 우리의 마음이 거기에 가며는 그것이, 파악이 되잖아요. 그것이 뭐 바로 파악 했던지, 잘못 파악 했던지 간에 우리 마음이 갈 때, 어떤 경계 어떤 사람 어떤 사물 어떤 사건이, 전부 거기에 눈에 들어오지요. 그래서 照(조)라고 합니다.
마음이 그 어떤 작용하는 모습을 비칠 照(조)자를 그렇게 쓰지요.
그래 그 반대의 본체적인 텅 빈 입장으로서는 고요할 寂(적)자, 그래 寂照(적조). 根境(근경). 이렇게 나눠서 이야기를 하지요.
그 다음에 이제 須臾返照(수유반조)하면 勝却前空(승각전공)이라. 그랬습니다. 須臾에 返照하면 勝却前空 이라.
수유는 짧은 시간입니다. 아주 짧은 사이에도 돌이켜서 비춘다. 이것은 돌이켜 비춘 것이 中道(중도)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모든 존재의 中道性(중도성)! 이것을 返照(반조 )한다는 것입니다. 짧은 순간이라도 그것을 반조할 줄 알 며는, 그것을 비춰볼 줄 알 며는, 모든 존재의 중도성을 비춰볼 줄을 알 며는, 勝却前空(승각전공)이라. 그랬습니다.
여기의 勝却은 뛰어나다. 수승하다. 却(각)자가 勝(승)자에 붙어서 같이 해석을 하고, 前空(전공)이라고 하는 것은, 앞의 경계가 空(공)하다. 境界(경계)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空觀(공관)을 하거든요. 초기 불교에서는 그 어떤 觀法(관법)이, 공관을 많이 하게 되지요. 공관 이라는 것이 눈에 보이는 현상을 空(공)하게 보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가 능엄경 二十五願(25원)통에 자주 등장을 하지요. 거기에 뭐 水觀(수관)을 하고, 火觀(화관)을 하고 그래요. 물을 관찰하는 공부도 있고, 불을 관찰하는 공부도 있고, 또 그 다음에 白骨觀(백골관)을 하는 공부도 있고, 또 뭐 공으로 텅 빈 공으로 관하는 공부도 있고, 여러 가지 관법. 初期觀法(초기관법)이. 우리나라에 근래에 뭐 비파사나 라고 하는 것이 들어와서 數息觀(수식관). 우리 숨 들락날락 쉬는 것을 관찰하는 그런 공부가 이제 많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초기불교에는 이 관법! 어떤 대상을 하나 설정 해 놓고, 그것을 관하는 관법 이야기가 가끔 있어요. 경전에 보면...
그래서 여기에서 前空(전공)이라고 하는 것은, 경계를 관해 가지고, 내 앞에 있는 대상들을 관해 가지고, 공하다고 이렇게 자꾸 생각하는 것입니다.
공하다고 이렇게 생각을 해서, 그래서 어느 정도 이것이 익숙해지면, 공하게 보여요. 그것이 前空(전공)입니다. 경계가, 앞에 있는 경계가 공하게 된 것 보다도 훨씬 수승하다. 勝覺(승각)! 그 노력이 상당이 들였지요.
그리고 그것도 어느 정도의 경지라고는 할 수가 있지만, 그렇게 해서 이 현상이 완전히 공한 것으로 이해가 되고, 공한 것으로 자기가 수용 한다면, 그것도 상당한 경지 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중간 과정이고, 須臾(수유)에 返照(반조) 모든 존재의 중도적 그런 이치를 비춰보는 것. 그것을 안다. 이겁니다.
비춰 본다는 말은, 중도적인 그런 존재의 원리를 깨달아 아는 것! 그렇게 하며는, 경계를 공하게 이렇게 아주 오랫동안 정신 집중을 해서, 경계를 공하게 하는 것 보다 훨씬 뛰어나다. 그렇습니다. 그 경계를 공하게 볼 줄 아는 것, 이것이 공부의 목적이 아니거든요.
있는 것은 있는 데로 보고, 없는 것은 없는 데로 보고, 그러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그 功能(공능)과 그 가치를 아주 조금도 부족함 없이, 그것이 갖고 있는 그것을 완전하게 다 이해하고 파악해서, 활용하게 하는 것이지요.
그것이 중도 아닙니까? 그런데 뭐 있는 것을 없게 한다던지 없는 것을 있게 한다던지, 이렇게 하며는 그것은 잘못된 공부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스님 당시 때나, 또 뭐 과거 불교의 그 어떤 일면에 있어서 이런 수행이, 지금도 물론 있지만 늘 있어 왔지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뭐 아주 수행을 많이 해서, 경계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그런 이제...
그거는 물론 혼자만의 어떤 정신세계지만, 그런 공부도 있고 하니까 그것 보다는, 모든 존재의 중도성을 제대로 파악해서 알기만 하며는, 앞의 경계가 텅 비어서 공해진 것 보다는 훨씬 뛰어나다. 이런 뜻입니다.
前空(전공) 轉變(전변)은 皆由妄見(개유망견)이라고 여기에 아주 못을 박아 놨지요?
前空轉變은 皆由妄見이다. 앞에 공한 것으로, 앞에 있는 경계가 공한 것으로 轉變(전변)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서, 버젓이 컴퓨터가 있고 책상이 있고, 사람이 있고 모든 뭐 집기가 다 있는데, 그것을 공하게 보는 것은, 그거는 상당한 경지이긴 하지만,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轉變(전변) 해 버리는 것. 변해 버리는 그것은 어떻습니까?
다 妄見(망견)을 말미암은 것이다. 망령된 소견을 말미암은 것이다. 그랬어요. 망령된 소견이지. 잘못된 소견이지, 왜? 있는 것을 없게 봅니까? 있는 것은 있는 대로 보되, 그 없는 면도 물론 알아야 되겠지요.
여기서는 있는 것을 없는 면으로도 볼 수 있고, 없는 것을 있는 면으로도 보는 그런 중도적인 이야기보다는, 그 어떤 공부의 한 모습이 경계를 공하게 보는, 그런 경향이 있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의 잘못된 공부다. 그래요.
그래서 前空(전공)으로, 앞에 경계가 공한 것으로 轉變(전변)되는 것은, 이거는 개인의 정신세계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 망령된 소견을 말미암은 것이다.
皆由妄見(개유망견)이다. 망령된 소견을 말미암은 것이다. 그런 것입니다.
不用求眞(불용구진)이요. 唯須息見(유수식견)이니라. 진리 구하는 것을 쓸 것이 아니요. 오직 모름지기 견해를 쉴 지니라 그랬습니다.
뭐 眞(진)이다. 妄(망)이다하는 그런 견해. 물론 妄見(망견)이다. 앞의 경계가 공하도록 그렇게 마음이 되어 버리면, 그거는 상당한 경지이긴 하지만, 그건 망령된 경지이다.
그래 또 망견 이라고 하니까, 이게 그러면 眞見(진견)은 또 필요하지 않느냐? 뭐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병을 또 대치하기 위해서, 眞(진) 구함을 쓰지 말라. 이랬어요. 진과 망에 대해서는 아주 곳곳에서, 많이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경전이나 어록에서도 상당히 많이 언급을 하고 있는데, 不求眞(불구진) 不斷妄(부단망). 그런 말도 있어요. 진도 구하지 말고, 망도 끊지 말라. 그런 말도 있고, 부제망상불구진 증도가에, 신심명 이것 끝나고 바로 증도가로 이어질 텐데, 증도가 첫 머리에 보면 絶學無爲閑道人(절학무위한도인)은 不除妄想不求眞(부제망상불구진)이라. 그렇게 돼있어요.
정말 바람직한 도인! 인생을 제대로 살줄 아는 사람은 不除妄想不求眞(부제망상불구진)이라 그랬어요. 망상을 제 하지도 아니하고, 그렇다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
眞(진)이니 妄(망)이니 하는 이 상대적인 것을 초월 해 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럼 진과 망이 실제적으로 있다 합시다. 있다하더라도 진은 진대로, 망은 망대로, 그 가치를 다 보아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에도 치우치거나 편중되지 아니하고, 끄달리지 않는 것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이제 不用求眞(불용구진). 진구함을 쓰지 말라. 괜히 진리. 진리. 참된 것. 참다운 것. 참다운 것. 자꾸 참다운 것. 그렇게 구하면 어느새 망념된 것. 잘못된 것. 거짓. 진짜 구하면 어느새 거짓이 나와 있다고요.
어디 외국 가서 진짜 찾아보십시오. 틀림없이 그것은 가짜를 갖다 줍니다. 틀림없이 그것은 가짜를 갖다 주게 되어 있어요.
진짜를 구하는 사람에겐 틀림없이 가짜를 갖다 줘야 그게 통한다고요. 그 자꾸 진짜 찾으면 가짜를 만날 수밖에 없게 되어 있어요. 세상 이치가 그렇다고요.
그래서 不除妄想不求眞(부제망상불구진)이라. 정말 바람직한 인생을 사는 사람은 망상을 제 하지도 아니하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
또 眞不立(진불립) 妄本空(망본공). 그런 말도 있어요. 진도 세우지 아니하고, 사실 또한 알고 보면, 망도 또한 본래 공한 것이다. 이런 표현도 있고, 진과 망에 대해서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여기서도 나왔잖아요? “망견이다”라고 하니까 망견은 또 이제 진견을 거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입장이 되니까 진이니 망이니 하는 이것을, 굳이 분별하지 말라.
그러니까 진을 구하지 말라고 했으니까 뭐, 망은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예를 들어서, 옛날에 그런 말 있지요. 흔히 이제 떠도는 말인데, 예를 들어서 결혼해서 옛날에, 남의 집에 가면 어떻게 하며는, 가장 바람직한 시집 생활을 할 수 있느냐? 하니까 “착한일 하지 마라” 딱 한 마디를 그렇게 일러줬다는 겁니다.
그 무슨 말인고 하니, 착한일도 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쁜 일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하는 그런 뜻이듯이, 진구함을 쓰지 말라고 했으니까 망은 뭐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여기서, 사실은 그런 차이를 두고 하는 소리도 아닙니다.
이 신신명의 경지에서는, 뭐 진이니 망이니 똑 같은 치우친 소견이지요. 그래서 여기서 이제 진구함을 쓰지 말고, 오직 진이니 망이니 하는 그런 소견. 소견을 쉴[息식]지니라.
오직. 모름지기. 須(수)자는 모름지기 라고 경전에 많이 나오는데, 반드시. 필수적으로. 꼭. 이런 뜻입니다. 꼭 이제 소견을 쉬어 버려라.
옳다 그르다 쉬어 버리면 끝나는 것이지, 옳은 것 쫓아가면 거기에는 반드시 그른 것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상대적이니까요. 세상은 전부 상대적으로 되어 있으니까요.
쉬어 버리면 뭐, 진이니 망이니 진짜니 가짜니, 그러니까 어디 가서 뭐, 물건 진짜 내놓으라고 하는 것 보다, 아예 진짜든 가짜든 안 사버리면 진짜도 이 사람에겐 해당이 안 되고, 가짜도 이 사람에겐 해당이 안 되듯이, 우리가 진리니 뭐 망견이니 하는 것. 이것 소견쉬어 버리면 그런 것은 다 떠나게 돼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지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요. 다음 다시 또 한번 새겨 보겠습니다.
遣有沒有(견유몰유)요. 從空背空(종공배공)이라. 유를 보내려고 하면 유에 빠지고, 공을 쫓아 가며는 공을 등지게 되느니라.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상응하지 못하며,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아니한 곳이 없느니라.
근본으로 돌아가면 뜻을 얻고, 그 뜻을 잘 이해해야 됩니다. 中道(중도)의 境地(경지)! 大道(대도)의 境地(경지)! 至道(지도)! 지극한 도의 경지!
바람직한 삶! 행복한 삶이다. 제가 그렇게 표현을 했지요.
경계를 쫓아 가며는, 경계를 따르면, 照(조)자는 경계라고 해버리는 것이 차라리 좋지요. 마음이 가서 비칠 곳이니까 境界(경계)이지요. 비치는 곳을 따라 가며는, 宗旨(종지)! 근본을 잊어버리느니라.
須臾에 돌이켜 비춰 보며는, 무엇을? 모든 존재의 中道法則(중도법칙)을... 그런 말입니다.
존재의 中道法則(중도법칙)을 返照(반조)하면, 앞의 경계가 空(공)한 것 보다 훨씬 뛰어남이라. 앞의 경계로. 공한 것으로. 앞의 경계가 공한 것으로 轉變(전변)하는 것은, 다 망령된 소견을 말미암은 것이니, 眞(진)구함을 쓰지 말고, 오직. 모름지기 見解(견해)를 쉴[息식]지니라.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신심명 강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더욱더 상응하지 못하며, 말이 끊어지고 생각이 끊어지면, 통하지 아니한 곳이 없느니라. 고맙습니다._()()()_
遣有沒有(견유몰유)요. 從空背空(종공배공)이라...유를 보내려고 하면 유에 빠지고, 공을 쫓아 가며는 공을 등지게 되느니라.(중도법칙을 반조하라.) 고맙습니다. 법체 강령하시옵소서.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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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除妄想不求眞(부제망상불구진)이라 망상을 제 하지도 아니하고, 진리를 구하지도 않는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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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들었읍니다 감사합니다_()()()_
감사 감사합니다.
진실로 감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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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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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관세음보살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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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