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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수세식 변기 (1596년) |
<거리가 곧 화장실이던 시대 창밖으로 버려지는 물을 조심하라> 만약에 화장실이 없다면? 아마도 요강을 이용했거나 흙 구덩이를 파고 용변을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형태의 수세식 변기가 발명되기 이전인 1596년까지, 실제로 사람들을 집에서 가까운 땅에 구멍을 파거나 나무 밑둥치, 혹은 강가에서 용변을 보았다. 일반 서민 계급은 물론이고 우아함의 대명사인 귀족 계급조차도 말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걸상식의 수세식 변소를 사용했던 사실이 홈페이 및 그 밖의 로마 유적들에서 확인되고 있지만, 단지 발달한 수도 시설을 활용하여 좌식 변기 밑으로 물이 흐르도록 한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도 성벽 속에, 또는 걸상식의 변기를 성벽에 매달고 배설물이 성벽 밑으로 흐르는 하수와 함께 성벽 밖으로 흘러나가게 했다. 근세인 18세기 초에 이르러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걸상식의 수세변소를 설치하였으나, 주로 사용된 것은 역시 걸상식 변기였다. 걸상식 변기의 설치와 제작이 아주 까다로워서, 그나마 일반 서민이 체면치레를 하면서 집안에서 용변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요강을 이용하는 방법뿐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배설물이 담긴 요강을 처리하는 방법이다. 당시에는 쓰레기 폐기에 관한 시민 의식이 없었던지,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요강 속의 배설물을 자기 집 창밖으로 비웠다. 상상해 보라. 마치 화병에 담겨 있는 물을 버리듯, 창문을 통해 거리로 유유히 요강을 비우는 모습을. 집집마다 그랬다. 그래서 프랑스의 경우에는 'Garw l`eau(창밖으로 버려지는 오물을 조심하라)'라는 경고의 말까지 나돌 지경이었다. 아마도 갑자기 쏟아지는 배설물에 봉변을 당한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어딘가 파티에라도 가는 중이었다면?….. 18세기에는 우리 현대인들로서는 거의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악취가 도시를 지배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똥 냄새가, 뒷 마당에는 오줌 냄새가, 건물 계단에는 썩어가는 나무와 쥐똥 냄새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 침실에는 땀에 젖은 시트와 눅눅해진 이불 냄새와 함께 요강에서 나는 지린내가 배어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의 소설 <향수>의 첫 페이지에 적힌 글이다. 물론 소설 중에 쓰여진 표현이지만, 많은 현대 학자들의 의견도 이와 같다. 르네상스 시대의 땅을 다 덮을 듯한 그 넓은 치마폭의 화려한 의상도 사실은 들이나 거리에서 용변을 보게 될 때, 그것을 좀 가려보자는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당시의 용변과 배설물 처리 문제는 실로 심각한 사회 문제였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악취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면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품위를 지킬 수 있도록 기여한 것이 바로 수세식 변기이다. <물이 있는 작은 방 ? W.C> 화장실만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장소도 없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배설 행위 자체를 부끄러운 일로 여겨 배설과 관계된 장소인 화장실을 표현할 때조차 완곡어법을 즐겨 쓰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변기의 영어식 명칭에도 Throne, Thunder Box, Loo, Royal Flush 등등 많은 이름들이 사용된다. 그러나 유럽을 포함한 다른 여타의 나라들도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명칭은 W.C. 요즘은 여성과 남성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표시하거나 Restroom, Toliet 등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굳이 화장실을 표시해야 하는 곳에는 대부분이 W.C 라는 영문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이 W.C가 무엇의 약자인지 아는 사람도 많지 않겠지만 그 유래를 아는 사람도 더욱 드물 것이다. Water Closet가 W.C의 전문이다. 물이 있는 작고 사적인 공간쯤으로 해석이 가능할까? 여기서 Water가 나타내는 의미는 곧 '수세식'이다. 1956년, 영국의 소설가 존 해링턴이 '물탱크와 물을 뿜어내는 배수 밸브가 있는 나무걸상'을 고안해 냄으로써 근대적 의미의 수세식 변기가 탄생하였고, 이때 해링턴이 명명한 이름이 바로 Water Closet인 것이다. 당시 해링턴이 발명한 Water Closet은 리치몬드 궁전 곳곳에서 설치되었고, 궁전 내에서 비교적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그 해부터 다시 265년이 지난 후에야 영국의 배관공 토마스 크래퍼가 조금 더 발전된 최근과 같은 형태의 수세식 변기를 개발해 냈지만, 근대적 수세식 변기가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급배수 시설을 도시 지역에 완비시키고 부터이다. 즉. 1920년 무렵부터 발전된 국가들의 새로 짓는 빌딩이나 집에 수세식 변기들이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아직도 절반에 가까운 세계 인구가 수세식 변기와는 무관한 채로 생활하고 있다. <변소의 민속> 대표적인 것으로 변소귀신을 들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나라를 포함하여 중국, 일본 등 주로 동양에 널리 있는 관습으로, 농사와의 관련성에 의해 일찍부터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굳어진 것이다. 흔히 측신(厠神)이라고 부르는 변소귀신은 칙신, 측간신 등으로도 부르며, 대개 젊은 여신으로 간주하여 칙시부인, 칙도부인이라고도 한다. 측신은 6이 들어 있는 날짜에 나타난다 하여 이날은 변소에 가지 않는 의미에서 간단한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신발을 빠뜨렸거나 사람이 빠졌을 때도 제사를 지내며, 밤에 측신을 놀라게 하면 화를 크게 당한다 하여 예로부터 헛기침을 함으로써 측신을 놀라지 않게 하는 관습이 있었다. 동지 때 쑨 팥죽, 고사 지낼 때 만든 떡 등을 집안 곳곳에 올릴 경우 변소를 절대로 빠뜨리지 않는 등, 변소에 관한 민속은 건드리지 않는게 좋다는 경원(敬遠)의 성격을 띠는 것이 대부분이다. 변소가 집밖에 멀리 떨어져 있고 등불도 없던 어두운 시절 변소는 위험한 장소이지만 불가피하게 들러야 하는 불결한 장소였다. 이것은 생활 공간을 신성시함으로써, 사고를 예방하고자 하는 실리적인 측면과 자연의 힘을 순리처럼 따르고자 했던 종교적인 믿음의 측면이 결합된 우리 민속의 한 예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