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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오늘 4월 6일 목요일날 염화실 인터넷 방송법문 시작하겠습니다. 대승찬 어제에 이어서 43번부터 할 차례입니다.
강의 들어가기 전에 내일은 매달 첫 금요일 청림회 법회가 있어가지고 시간이 마침 염화실 법회하고 같은 시간이라서 염화실 법회는 내일은 휴강이 되겠습니다.
내일하고 모레 글피 3일간 주말 휴강이 연달아 있겠네요.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그 대신에 사경 좀 많이 하시고 예습 복습 좀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뭐 제 나름대로 그동안에 공부와 경험을 동원을 해서 이해한 것을 가지고 설명은 하느라고 하지만은 제가 또 뭐 얼마나 이해했겠으며 또 설명을 한들 또 이해한 데서 얼마나 제대로 설명을 하겠습니까 늘 설명하다보면 이해가 부족하고 설명이 거기 이해한 것도 설명을 제대로 못하고 한 것이 자신에게 늘 남아있는 유감입니다. 그래서 이건 참 깨달음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이게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구요, 또 남에게 전달한다고 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게 됩니다.
스스로 자꾸 이제 읽고 깊이 사유하고 또 사경도 이렇게 하면서 그러면서 더욱 더 깊이 이해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합니다.
어제, 대도大道는 불유행득不由行得이라 설행 說行은 권위범우權爲凡愚라 그랬어요.
대도大道 큰 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수행을 말미암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늘 이제 있어온 이야기죠.
불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현재 있는 모습 그대로 세상이나 우리들 인생이나 그대로에서 완전함을 깨닫자는 것이고 그대로에서 완전함을 발견하는 데 뜻이 있습니다.
뭘 세상을 바꾼다든지 자기 인생을 바꾼다든지 팔자를 고친다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특별한 수행을 쌓아가지고 아주 뭐 우리가 바라는 어떤 그 이상한 그런 그 능력이라든지 그런 것이 이뤄진 뒤에사 비로소 그 얻어지는 그런 그 목적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 자기 처지가 어떻든 자기의 성품이라든지 복력이라든지 덕이라든지 자비라든지 지혜라든지 뭐 이런 것이 어떤 입장이 됐든간에 현재 있는 그대로에서 완전한 것을 발견해내는 것, 또 사실 완전한데 우리가 완전하다고 못보는 것이고 선각자들의 말씀에 의하면 그것이 이제 그대로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각자들이 깨달으신 그것 그대로 우리가 이해하는 것 또 그것을 나아가서 이제 확연히 깨닫는 것 이것이 이제 불교의 궁극의 가르침이고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뭐 세월이 흘러가서 사람이 달라지고 어떤 덕과 복이 어느만치 쌓여가지고 내 상황이 어느만치 내가 바라는 대로 진보가 있고 한 그런 그 입장에서 불교에서 추구하는 그런 내 삶을 염두에 두고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현재에서 완전함을 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깨달은 분들은 한결같이 그렇게 말해요. 그래서 대도大道라고 하는 것은 어떤 수행을 말미암아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수행을 설명하는 게 왜 그리 많으냐 그런 설명은 전부 방편으로 그런 근기에 맞는 어리석은 범부들을 위해서 그런 이야기가 있게 된다.
아주 이거 꼭 염두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이래야 삿되지가 않아요. 잘못 가지가 않습니다. 뭐 불교공부해서 아무것도 못 깨달아도 좋은데 제발 삿되지만 않으면 참 큰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불교 공부해서 삿되게 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뭐 이상한 것을 염두에 두고 자기나름대로 불교를 그렇게 만들어오고 그려 옵니다. 불교 설계를 다 해가지고 불교에 들어와요. 불교공부해도 자기 설계대로 받아들이고 그렇게 하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은 다 삿된거지요.
이렇게 투철하게 깨달으신 분들의 이런 말들을 통해서 그동안 우리가 상상했던 내가 설계해 놓은 그런 불교를 다 비워버리고 아 불교라고 하는 것은 뭐 아무것도 없는 것이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이구나 무언가 있으면은 그것은 오히려 삿된 것이고 잘못된 것이구나 이렇게 아는 게 사실은 바로 아는 것이고 그게 최고로 앎입니다. 불교 안에서는 그게 제일 높은 수준 높은 앎이예요. 첨단 불교라고도 할 수 있겠죠. 중요한 말입니다.
43.이치를 깨닫고 돌이켜 수행을 살펴본다면
잘못 공부한 것을 비로소 알리라
得理返觀於行하면은 始知枉用工夫리라
득 리 반 관 어 행 시 지 왕 용 공 부
득리반관어행得理返觀於行하면은 그랬어요. 이치를 깨닫고 나서 이치를 얻고 나서 돌이켜 수행을 살펴본다면 수행을 얼마나 했든지 간에 뭐 육바라밀과 참선 뭐 기도 염불 할 것 없이 그것을 삼아승지겁동안 수행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을 돌이켜서 살펴 볼 것 같으면
시지왕용공부始知枉用工夫리라 비로소 그릇 공부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산골에 그 눈이 많이 쌓여가지고 오두막에 사는 사람이 이제 피난을 갔어요. 그래서 피난을 이제 가서 한참 가다보니까 발자국이 나왔습니다. 그래 밤은 됐고 눈은 계속 내리고 있고 어둡고 그래서 이제 앞서 간 사람의 발자국이 있어서 그 발자국을 계속 이제 따라간 거예요. 밤이 이슥하도록 따라가고 그래서 이제 그래도 계속 눈은 퍼붓고 그래도 이제 흐미한 발자국을 계속 따라갔는데 마침내 날이 밝아서 그 주변을 살펴볼 수가 있게 됐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 발자국은 자기가 걸어간 발자국이었고 자기 집을 밤새도록 뺑뺑 돌고 있었더라는 것이죠. 마치 그와 같이 이치를 얻고나서 그 수행이라는 것을 돌이켜서 살펴볼 것 같으면은 그릇 공부한 것을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밤새도록 헛걸음 헛걸음 한 거죠. 그 눈오는 데 가본들 어떻게 하겠습니까. 방안에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잘못하면 눈길 가다가 몸이 식어서 싸느랗게 참 일생을 마칠 수도 있는 그런 상황이 벌어지거든요. 그 오대산에 겨울에 살아보면은 그런 일들이 아주 종종 있습니다. 뭐 이건 뭐 하나의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 한 것이구요.
그 수행이라는 것을 우리가 하긴 합니다. 뭘 해도 하지요. 하는 데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 올 것이다 라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 결과를 머리 속에 그리면서 참선을 하든지 뭘 하든지 하면 그건 백발백중 삿되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 이 주의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불교공부 해서 깨닫지 못해도 좋으니까 제발 삿되게만 되지말라 하는 것이 내 주의입니다.
44.원만하게 통하는 큰이치를 아직 깨닫지 못했다면
요컨대 말과 행동이 서로 돕게 해야 한다.
未悟圓通大理하면은 要須言行相扶니
미오 원통 대리 요 수 언 행 상 부
미오원통대리未悟圓通大理하면은 원통대리圓通大理를 깨닫지 못할 것 같으면 이 큰 이치라고 하는 것은 뭐 대리大理나 대도 大道나 지도至道나 똑같은 말인데 큰 이치 원만하게 통해 있는 큰 이치를 깨닫지 못할 것 같으면 원만하게 통해 있다는 게 뭡니까. 달리 수행을 필요로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그대로라야 모든 사람이 다 해당되는 거죠. 그게 원통대리圓通大理죠. 만약에 어떤 조건에 의해서 깨달음을 이루고 예를 들어서 어떤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면 그건 아주 소수일 것입니다. 현재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인정이 돼야 그게 원통대리 圓通大理죠. 그런 이치를 깨닫지 못할 것 같으면은
요수언행상부要須言行相扶니 요컨대 모름지기 언言과 행行을 서로 도울지니 그랬습니다. 그런 이치를 이제 깨닫지 못할 것 같으면은 뭐 툭 한마디에 깨달아버리면 끝이지만은 그렇지 못하다면은 말과 행동, 말과 행동이 서로 돕게 해야 된다. 보조를 맞추어야 된다. 하는 것입니다. 아주 필요한 거죠, 언행이 상부해야 되고 언행 일치가 돼야 된다. 일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입니다.
뭐 깨닫기 전에야 여설수행如說修行이라고 법공양을 이야기 할 때 여설수행如說修行 그런 말이 있죠. 말한 대로 부처님 말씀대로 수행하는 것 일단은 이제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되죠.
또 깨닫고 나서도 결국은 여설수행如說修行이고 언행상부言行相扶입니다. 언행이 서로 돕는 것, 그거지 뭐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후나 똑같애요 사실은.
여기서 뭐 요수언행상부要須言行相扶라고 이렇게 요구를 하고 있지만 깨달은 뒤에는 그럼 어떻게 사느냐 마찬가지예요. 언행상부言行相扶입니다. 말과 행이 서로 돕도록 서로 도와주도록 그렇게 일치가 되는 것 그런 삶 이것을 이제 말하는 거죠.
45. 알음알이에 집착하지 말라.
빛을 돌려 근본에 돌아오면 본래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不得執他知解하라 廻光返本全無니라
부 득 집 타 지 해 회 광 반 본 전무
부득집타지해不得執他知解하라 알음알이 저 다른 사람의 다른 알음알이를 집착하지 마라.
회광반본전무廻光返本全無 빛을 돌이켜서 근본에 돌아오면은 온전히 없다. 그러니까 수행이라고 하는 것이 그야말로 밤새도록 앞서간 사람의 발자국을 쫓아 갔는데 결국은 그것은 자기 발자국이었고 아무것도 없더라 그런 입장과 같더라는 것입니다.
46.누가 이러한 말을 이해하겠는가.
그대에게 권하노니 자기에게서 미루어 찾아라.
誰有解會此說가 勸君向己推求하라
수 유 해 회 차 설 교 군 향 기 추 구
수유해회차설誰有解會此說가 누가 있어서 누가 이런 말을 이해하겠는가 이해할 해解자나 회會도 모일 회가 아니고 알 회라고 하지요. 해회解會하겠는가 누가 이런 이야기를 알겠는가 아 참 이 지공스님께서도 이렇게 뛰어난 가르침을 설명하시다가 이 참 알 사람이 누가 있겠나 하는 그런 그 말씀을 하시고
권군향기추구勸君向己推求하라 그대들에게 권하노니 자기를향해서 추구하라 그랬습니다 자기에게서 찾아보라 미루어서 찾아보라. 그랬어요. 이 자기에서 찾을 일이지 다른 사람 다른 설명 다른 노력 어떤 다른 그 특별한 수행 이런 데서 찾을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기에게서 찾는 거죠.
47. 스스로 지난날의 허물을 보아서
오욕의 부스럼을 없애야 하리라.
自見昔時罪過하야 除却五欲瘡疣니라
자 견 석시 죄 과 제 각 오 욕 창 우
자견석시죄과自見昔時罪過하야 스스로 옛날의 죄과를 잘 살펴 보아서 제각오욕창우除却五欲瘡疣니라 오욕의 창우를 제할 지니라 부스럼이죠. 오욕의 부스럼, 오욕이라는게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안이비설신의를 통해서 온갖 하고 싶어 하는 것들이 많죠. 그런 하고 싶은 것들 이것이 부스러기입니다.
그게 이제 이치를 알면 서서히 아주 그 봄날에 눈 녹듯이 녹아가죠. 이치를 모르면은 그 녹이기가 녹긴 녹지만은 아주 힘듭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서 이제 녹일려고 하면 아주 힘들죠
48. 해탈하면 소요 자재하여
곳곳에서 풍류를 값싸게 파나니
解脫逍遙自在하면은 隨方賤賣風流니라
해 탈 소 요 자 재 수 방 천 매 풍 류
해탈소요자재解脫逍遙自在하면은 해탈해서 소요자재 하게 될 것 같으면 그러니까 어떤 그 오욕의 문제라든지 수행의 문제라든지 어떤 상대적인 변견, 또는 편견 각각 다른 어떤 그 견해 그런 그 문제들로부터 해탈해서 소요자재한다 할 것 같으면은
수방천매풍류隨方賤賣風流니라 어디에 가든지 간에 어느 곳에 가든지 간에 풍류를 아주 값싸게 판다 천매賤賣 천하게 판다 이거야 풍류를. 그 뭐 도인들이 설법하는데 뭐 어디 돈받고 설법하고 아주 빼고 설법하고 뭐 비싸게 놀고 그런 게 있을 까닭이 있겠습니까. 만약에 누구에게라도 그런 것이 있으면 그건 이제 덜 떨어진 사람이고 모자란 사람이죠 부처님이 언제 뭐 값 받고 무슨 뭐 설법한 적이 있습니까 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은 그건 뭐 틀림없이 도가 아니죠
대개 이제 그러잖습니까. 도가 어느 정도 있는지 도를 이루지 못한, 이룬 사람이야 다 잘 알아보겠지만 설명이 필요 없이 알아보겠지만, 이루지 못한 사람은 그러면 도道 있는 사람을 어떻게 아느냐
8풍八風 여덟가지 바람을 이-렇게 쏘여 보면 안다는 거예요 바람을 쓰윽 이렇게 불어보는 거라 여덟가지 바람 이利 쇠衰 훼毁 예譽 칭稱 기譏 고苦 락樂이라고 해서 뭐 그 전에도 그 설명드린 것 같은데 뭐 이익과 손해 뭐 두가지만 가지고도 됩니다. 뭐 굳이 여덟가지 바람까지도 필요치가 않아요 두가지 바람만 가지고도 이익에 뜻밖에 아주 횡재를 했을 때 그 사람의 마음에 동요가 있는가 또 손해를 크게 이제 봤을 때 전혀 이건 뭐 손해 볼 일이 아닌데 손해를 본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의 마음에 어떤 동요가 있는가 흔들리는가 이익의 바람 손해의 바람에 흔들리는가 뭐 칭찬과 비방, 칭찬해 보고 비방해 보고 어떤 고통스러운 일이 있고 또 즐거운 일이 있고 이런 등등 해서 마음이 흔들리는가 이런 것을 가지고 도를 가름할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해탈해서 소요자재할 것 같으면 어느 곳에 가든지 풍류를 아주 값싸게 판다. 풍류를 값싸게 판다는 표현이 아주 재미가 있죠.
49 누가살 마음을 낸 사람인가.
사게 되면 나와 같이 근심 없으리라.
誰是發心買者 亦得似我無憂리라
수 시 발 심 매 자 역 득 사 아 무 우
수시발심매자誰是發心買者 누가 살 마음을 내서 살 사람인가. 이 풍류를 이 도에 관한 이것을 누가 살 사람인가 누가 살 사람인가 참 이 풍류를 값싸게 파는 데 이거 살 사람 있으면 참 좋죠 사게 될 것 같으면
역득사아무우亦得似我無憂리라 이 풍류를 만약에 사게 될 것 같으면 나와 같이 정말 아무런 근심 없이 무희역무라 물론 근심도 없고 기쁨도 없는 그런 그 삶을 살게 될 것이리라
50. 안팎의 견해가 모두 나쁘고
불도와 마도가 모두 잘못이네.
內見外見總惡하면은 佛道魔道俱錯이라
내 견 외 견 총 악 불 도 마 도 구 착
내견외견총악內見外見總惡하면은 내견도 악하고 나쁘고, 외견도 나쁘다 그러니까 어떤 그 내면을 보는 그런 안목 또 외면을 보는 안목 이것이 다 바르지 못하고 삿되다 이거죠 그럴
것 같으면
불도마도구착佛道魔道俱錯이라 불도佛道도 모르고 마도魔道도 모른다 이거예요. 그래 함께 그릇친다 그러니
51. 이두 가지 커다란 악마에게 사로잡히면
즉시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하리라.
被此二大波旬이면 便卽厭苦求樂하리라
피 차 이 대 파 순 갱 즉 염 고 구 락
피차이대파순被此二大波旬이면 이 두 가지 이대파순二大波旬 두가지 큰 파순波旬 파순이라는 마왕 파순이래서 마도 무리가 많은 데 그중에 이제 대장을 파순이라 그래요 그래 마왕 마구니 중에서 대장을 파순이다. 그러니까 부처는 말하자면 이 성인 쪽으로 대장이고 마는 말하자면 나쁜 것 쪽으로 대장이다 그런 뜻이죠. 이대二大 파순波旬을 있게 될 것 같으면
변즉염고구락便卽厭苦求樂하리라, 곧 괴로움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하리라. 팔풍八風 이야기에 고苦 락樂이 들어 있죠. 고통을 싫어하고 즐거움을 구하면은 그대로 파순에 휘말리는 것이고 부처도 모르고 마구니도 모르게 되는 것이죠.
부처라고 굳이 이제 말한다면은 양변兩邊에 치우치지 않는 것 늘 이제 중도中道를 말씀드려 왔습니다만은 양변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것.
우리가 세상사를 사는 데 비록 큰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사량분별을 통해서 설사 삶을 가꿔간다 하더라도 그 요령이 내가 상대적인 그 무엇에 치우쳐 있지 않는가 이걸 살필 줄 아는 것 이게 이제 중도적中道的인 삶을 사는 요령입니다.
뭐 툭 터져가지고 저절로 맞아 떨어져야 맞겠지만은 우리로서야 당연히 그렇지 못하니까 그러면은 우리가 어떤 사고를 통해서 그것을 가려내고 알아내야 되는데 사고思考를 통해서 가려내고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령이라는 게 바로 내가 어디 치우쳐있지 않은가
나하고 가까이 지내는 사람에게 치우쳐 가지고 그 사람의 말은 거의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옳다고 생각이 드는 것은 아닌가 나하고 모르는 사람의 생각이라고 해서 그 사람의 그 주장은 무조건 잘못됐다고 내가 생각하지는 않는가.
예를 들어 어디 가다가 서로 잘못해서 차사고를 일으켰다, 그랬을 때 누가 정말 잘못했는가를 이게 이제 편협심 없이 치우치지 않고 그 판단해내고 그것을 이제 가려낼 줄 아는 것 뭐 한 예로써 이제 그렇게 내가 치우쳐있지는 않는가 하는 것 이걸 잘 점검해 보면은 내가 이제 비록 사변으로써 중도中道를 생각하고 있지만은 그래도 거의 중도에 가까운 삶을 사는 그런 그 하나의 열쇠가 되지 않을까 뭐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스스로 그것을 이제 점검해 보면은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52. 삶과 죽음의 본바탕이 공임을 깨닫게 되면
부처와 마군이가 어느 곳에 붙어 있겠는가.
生死悟本體空이면은 佛魔何處安著이리요
생 사 오 본 체 공 불 마 하 처 안 착
생사오본체공生死悟本體空이면은 생사에서 근본이 체가 본래 공空한 줄을 깨달을 것 같으면은 불마하처안착佛魔何處安著이리요 부처니 마구니니 하는 것이 어느 곳에 안착하겠는가 뭐 어디 붙을 때가 없죠.
공한데, 생사의 근본이 본래 공한데 생사가 공한 줄을 우리가 안다면은 나라는 것도 역시 공하다는 거죠. 내가 공해야 생사가 공하죠. 나 위에 건립된 것이 생사니까. 그렇다면은 뭐 부처니 마구니니 하는 것이 붙을 자리가 없잖습니까.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53.다만 망령된 생각으로 분별하기 때문에
전신도 후신도 외롭고 보잘 것 없어
只由妄情分別하야 前身後身孤薄이라
지 유 망 정 분 별 전 신 후 신 고 박
지유망정분별只由妄情分別하야 전신후신고박前身後身孤薄이라 다만 망정妄情을 말미암아서 분별分別해서 망령된 생각을 말미암아 분별했기 때문에 전신前身이니 후신後身이니 다 고루하고 박복하다 이말이죠. 그러니까 전신 후신 하는 것은 과거 내가 살아온 어떤 그 삶이라든지 또 오늘 이후의 그 나의 삶이라든지 이런 것이 전부 뭔가 고박하다면 고루하고 박복하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망정妄情으로 분별分別해서 그렇다 그 말입니다.
어떤 삶을 살았어도 뭐 고루하게 살았다 박복하게 살았다 그것도 아무런 평가 기준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 그 느낄 줄 아는 것은 느끼는 것은 뭡니까 중도적인 안목으로 사느냐 하는 것이죠
어떤 사람은 많이 있는 것을 진정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없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많죠, 그러나 있는 것을 또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분명히. 그러니까 있다고 해서 고루하고 박복한 것이 아니고 없다고 해서 고루하고 박복한 것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예요. 요는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사는가 그거지요
가끔 우리가 한 번 돌이켜 생각해 보면은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에 뭐 천만불 수출했다고 야단법석을 떨 때가 있었죠 천만불, 천억불도 아니고 천만불입니다. 그때 그 삶의 어떤 그 물질적 풍요로움과 지금하고 그러니까 한 3, 40년 그러니까 한 40년? 40년 내지 45년 쯤 전하고 지금하고 비교를 해보면은, 뭐 이런 비교가 다 이제 노인들이나 하는 소리고 나이먹은 사람들이 맨날 옛날 소리나 한다 이렇게 이제 젊은 사람들에게는 참 듣기 싫은 소리로 취급받지만은, 그런 걸 비교해 보면은 정말 그 아, 지금이 너무나도 풍요롭게 사는구나 또 사람 사는 것이 많이 있다고 결코 행복한 것이 아니구나
행복은 절대 많이 있는 것 하고 관계가 없는 것이구나 알 수 있습니다. 대개 아무리 못사는 사람들도요 그당시 50년대 말이나 60년대 초하고 비교를 해보면은 100배 살아요. 100배 이상 가지고 살아요. 거의 100배 이상 가지고 삽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으로 행복을 느끼고 사는 것은 전혀 이제 그렇지 않죠. 그 수치하고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여기 이제 전신후신이 고박하다는 것도 결국은 내가 얼마를 누리느냐 하는 것을 두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내가 내 처지가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하는 것 내 평가고 내 느낌이죠. 그건 뭐겠습니까 결국은 망정으로 분별하는 거죠 뭐.쓸 데 없는 가치기준, 쓸 데 없는 잣대, 쓸 데 없는 틀 가지고 맞추고 재고 따지고 계산하는 거죠 그게 망정분별妄情分別입니다.
54.육도에 윤회함을 쉬지 못하고
맺은 업을 없애지 못하는구나.
輪廻六道不停하고 結業不能除却이라
윤 회 육 도 부 정 결 업 불 능 제 각
윤회육도부정輪廻六道不停 육도에 윤회하는 것이 머물지 아니하고 결업불능제각結業不能除却이라 맺은 업을 없애지 못하는구나. 그렇게 하면은 앞서 설명한 대로 그렇게 우리가 살기 살아 버릇하면은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할 수가 없고 늘 육도윤회하게 되는 것이고 맺은 업을 제하지 못하고 업에 끄달려 사는 것입니다.
업에 끄달려 사는 것이 말하자면 그 업을 기준으로 자기의 어떤 눈에 보이는 상황들을 기준삼아서 그것을 하나의 틀로 아니면 잣대로 자기의 기준으로 삼아서 그 기준에 맞출려고 하기 때문에 그게 맺은 업이예요. 맺은 업을 제하지 못하고 그 업에 끌려 사는것이다 이렇게 이제 설명 드릴 수 있습니다.
절대 뭐 눈에 보이고 하는 우리가 쌓아놓은 그 어떤 물질적인 것 가지고 얼마라야 된다 하는 그런 이야기는 절대 아니예요, 이건 순전히 주관적으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 거기에 달려있다 하는 것입니다.
55. 그런 까닭에 삶과 죽음에 떠다니나니
모두가 제멋대로 수단을 부리기 때문이다.
所以로 流浪生死하니 皆由橫生經略이로다
소 이 유 랑 생 사 개유횡상경략
소이所以로 유랑생사流浪生死하니 그래서 생사에 유랑하게 된다. 여기저기 자기 기준을 만들어 놓고 그 기준에 끌리고 치우치고 거기에 빠져들고 그것이 생사生死 아니겠습니까
뭐 전세방 살 때는 뭐 한 20평짜리 아파트라도 자기 이름으로 가졌으면 좋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갖고 싶어하다가 정작 이십평짜리 아파트를 떡 사놓고 한 일주일쯤 돼서 친구집에 갔는데 그 집에 30평이 있더라 이거지. 그러면 20평짜리 집에 들어오기 싫은 거예요 그때부터는. 그렇게 좋아했는데도 불구하고 집에 들어오기 싫을 정도로 그렇게 이제 그 생각이 달라지는 거죠.
그래 계속 자기 어떤 기준을 설정해놓고 그걸 가지고 비교하고 하다 보니까 거기에 갈등이 생기고 갈등은 고통을 낳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좋다 나쁘고 나쁘다가 좋고 이게 생사죠. 좋은 생각이 일어났다가 싫은 생각으로 금방 돌아가 버리고 그게 유랑생사流浪生死입니다.
개유횡생경략皆由橫生經略이로다 다 횡으로 낸다 무엇을 수단 경락이라고 하는 것은 수단을 부리는 거죠. 이래저래 따지고 헤아리고 뭐 이건 이제 전략, 경영, 전략 그럴 때 이제 쓰죠. 경영전략, 경영하고 전략하는 그거 이제 머리를 짜내가지고 그런 그 경영과 전략을 낸다고 해서 그래서 횡생橫生이라그럽니다. 횡생橫生 멋대로 비정상적으로 머리를 짜내서 어떤 수단을 부리기 때문이다.
그래 이치를 알아야 되죠. 모든 존재의 이치를 꿰뚫어보면 그렇게 허겁지겁 상황에 끄달려서 살 것이 아닌데 이치에 어둡다보니까 그렇게 이제 허겁지겁 상황에 끄달려 살게 되고 남이 그렇게 하니까 따라서 그것도 휩쓸려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고 이 참 지공스님의 대승찬은 구절구절이 우리들 보고 정신차려라 정신차려라 정신차리면은 정신차려서 이치에 눈을 돌릴 때 너가 바라는 그런 그 삶은 바로 코 앞에 있다. 그대는 이미 그런 삶을 살아오고 있었다. 뭐 이렇게 요약할 수가 있겠습니다.
56. 몸은 본래 허무하여 실답지 못하니
근본으로 돌아가면 누가 헤아리겠는가.
身本虛無不實이니 返本是誰斟酌가
신 본 허 무 부 실 반 본 시 수 짐 작
신본허무부실身本虛無不實이니 몸의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허무해 그래서 실답지 못하다 비었다 이거지 이런 것은 이제 이렇게 표현할 때는 이게 이제 무상하다 세월이 가면 이제 없어진다 또 앞서 내가 언젠가 말씀드렸던 연기이기 때문에 공이다. 인연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공이다. 그래서 세월이 흘러가면은 저절로 공으로 돌아간다 뭐 이런 의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몸의 근본은 허무해서 실답지 못함이니 반본시수짐작返本是誰斟酌가 근본으로 돌아가면 누가 그것을 헤아리겠는가 짐작하겠는가 망자짐작이라 그랬죠. 일체이변 一切二邊 망자짐작妄自斟酌이라고 신심명에서 모든 상대적인 것은 전부 망령되이 내가 스스로 저울질하고 잣대로 갖다 재고 틀에 맞추고 하는 이런 헤아림 때문이다 그런 말이죠.
57. 있음과 없음은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니
망녕된 마음으로 애써 헤아리지 말라.
有無는 我自能爲니 不勞妄心卜度하라
유 무 아 자 능 위 불 노 망 심 복 탁
유무有無는 아자능위我自能爲니 있다 없다 하는 것 있음과 없음은 내가 스스로 만든 것이다 능위能爲한 것이다 능위能爲 내가 스스로 능위한 것이다
불로망심복탁不勞妄心卜度하라 수고로이 망령된 마음으로 복탁하지 말라. 복도라고 하지 않고 헤아릴 탁이라고 발음하죠. 헤아릴 복卜 헤아릴 탁度
어릴 때 저 이 도度자에 대한 그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통도사通度寺 할 때 이 도자를 썼는데 글쎄요 뭐 실지로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통도사 그 문에 이제 떡 들어오면서 통탁사通度寺라 이렇게 이제 읽었다고 하는 그 이야기가 사찰에 오랫동안 전해져서 저도 어릴 때 이제 그런 소리를 들었습니다. 탁이라고도 발음하고 도라고도 발음하죠.
있다 없다라고 하는 것 사실 우리가 지금 그동안 알고 있던 없는 것은 좀더 깊이 따져보면 없는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하는 것도 좀더 따져보면은 이건 뭐 깨달음의 안목이 아니라 하더라도 어떤 그 물리적인 그런 그 이치를 가지고 보더라도 정말 진정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진정으로 없는 것도 아니죠. 그게 이제 사실은 내가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고 내 망령된 마음이 복탁卜度 헤아리는 거죠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58. 중생의 몸은 허공과 같은 것이니
번뇌가 어느 곳에 붙겠는가.
衆生身同太虛니 煩惱何處安著이리요
중 생 신 동 태 허 번 뇌 하 처 안 착
중생신동태허衆生身同太虛니 중생의 몸은 태허와 같은 것이니 허공과 같은 것이니 번뇌하처煩惱何處가 안착安著이리요 번뇌라고 하는 것이 어디에 안착하겠는가 이 몸뚱이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 몸뚱이 근본 따지고 보면은 텅 빈 건데 이걸 우리가 참 얼른 그 뭐 다른 것 다 제쳐 놓고요 몸뚱이가 나니까 몸뚱이가 텅빈 것으로 아는 것 이거 하나 풀리면은 뭐 다 풀릴 것입니다.
그래 여기서도 우리가 번뇌라고 하는 것은 전부 이제 몸에 붙어 있는 것이니까 몸을 근거로 해서 삶을 영위하고 거기에 이제 번뇌가 있는 거죠 몸이 없다면은 번뇌가 어디 붙을 자리가 없죠.
59. 다만 아무 것도 바라거나 구하지 않으면
번뇌는 자연히 없어지리라.
但無一切希求하면 煩惱自然消落하리라
단 무 일 체 희구 번 뇌 자 연 소 락
단무일체희구但無一切希求하면 다만 일체 희구希求하는 것이 없을 것 같으면 번뇌자연소락煩惱自然消落하리라 번뇌가 저절로 소락消落 다 녹아서 없어지리라.
대개 중생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희구심希求心 때문에 구하는 것 때문에 시끄럽고 머리가 시끄럽고 고통이 많고 참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잠이 안오고 소화가 안되고 그렇죠.
그 구하는 게 뭐겠습니까 뭐든지 예를 들어서 뭐 아픈 사람은 낫고 싶어하죠. 건강하고 싶어하는데, 그 건강하고 싶어하는 것도 구하는 거예요 사실은. 그냥 아픈 것이 나려니 이렇게 생각하면은 번뇌가 없다는 것입니다. 뭐 극단적인 표현을 하자면 그래요. 근데 아픈데 낫고 싶어 안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낫고 싶어 한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도 아니예요. 모든 게 다 나을 때가 돼야 되고 나을 수 있는 조건이 돼야 되고 그 조건을 서서히 만들어 가다 보면은 낫게 되는 것이고 그런 것 같애요
유구개고有求皆苦 무구뇌락無求磊落 이런 말도 있습니다. 여기에 뭐 일체 희구심이 없을 것 같으면은 번뇌가 번뇌는 괴로움이라고 할 수가 있겠죠 이럴때는, 괴로운 것이 자연히 없어지리라 그랬는데 유구개고 무구뇌락 구하는 것이 있으면 다 괴롭고 괴로울 수밖에 없고 무구뇌락이라 구함이 없을 것 같으면 이에 즐겁다
그렇습니다. 대개 그 중생들의 고통이라는 것 무슨 뭐 불가피한 불가항력적인 그런 그 고통도 있지만은 스스로 만든 고통은 대개 구하는 마음 때문에 그렇죠.
60.우습구나 중생들의 꿈틀거림이
제각기 한 가지씩 다른 소견에 집착하는구나.
可笑衆生蠢蠢이 各執一般異見이라
가 소 중 생 준 준 각 집 일반 이 견
가소중생준준可笑衆生蠢蠢이 가소롭다 중생들의 꿈틀거림이 준동함령蠢動含靈이라고 해서 꿈틀 꿈틀하는 그 벌레같이 그렇게 이제 살아가고 있는 거죠.
뭡니까 서산스님이 그 묘향산에 올라가 가지고 저 밑에 있는마을을 이제 내려다 보면서 지은 시가 있죠
만국도성萬國都城이 여의질如蟻蛭이요
천가호걸千家豪傑이 사혜계似醯鷄라
만국도성 나라에 가득한 도성이 개미집과 같고 천가호걸이 사혜계라 그 호걸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은 저 잘났다고 떠들어쌌는 호걸들도 결국은 혜계醯鷄 음 구더기, 화장실에 있는 구더기와 같다. 이래 가지고 이제 그 서산스님을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그 시를 가지고 이제 모함을 했죠. 그래서 이제 감옥생활도 좀 한 그런 그 이유가 됐습니다만은
뭐 도닦는 사람이 한 번씩 그렇게 이제 큰 소리 치고 가슴에 있는 자신의 그 견해를 그렇게 이제 글로 표현할 수도 있고 한데 또 거기에 참 속좁은 중생들이 그 말을 이용을 해서 자신이 큰스님을 음해하고 싶어했던 것을 또 그것을 가지고 음해하게 된 그런 그 역사도 있습니다만은 참 중생들이 꾸물꾸물 하면서 사는데 모두 한가지씩 다른 소견을 가지고 있더라
각집일반이견各執一般異見이라 이게 참 무서운 거죠 전부 그나름의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같다고 하지만은 사실은 거의가 다릅니다. 세밀하게 따져보면은 거의가 다른 소견이예요. 아 꽃물들다님 아주 그 저기저 시를 잘 올리셨네요.
만국도성여의질萬國都城如蟻蛭이요 질蛭자가 아마 안타난 모양입니다.
천가호걸千家豪傑이 사혜계似醯鷄라
일창명월청허침一窓明月淸虛枕한데
무한송풍無限松風은 운부제韻不齊라
만국 도성들은 저마다 개미집 같고/ 수많은 호걸들도 초파리와 한가질세/ 창 가득 비쳐드는 밝은 달빛에 베개머리 시원하고/ 끝없이 불어오는 솔바람은 곡조도 갖가지
참 좋은 시죠, 저도 어릴 때 저 시를 접하고는 아주 가슴이 툭 터지고 아주 시원했었습니다. 모두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전부 이제 각자 자기의 소견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것 이게 이제 큰 병이죠. 자기 소견을 안가지고 있어야 이게 뭐가 좀 융화가 되고 조화를 이루고 할 텐데 그놈 소견을 가지고 있는 것 까지는 괜찮은데 계속 관철시킬려고 하니까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깨지고 관계가 깨지고 결국은 안 좋은 그런 그 어떤 상황이 벌어지고 이렇게 되지 않습니까
그 뭐 알량한 참 자기 아집이고 알량한 자기 개인의 소견이지 뭐 그렇게 잘난 소견이겠습니까 사실은. 내 소견이 옳다면 다른 사람도 옳을 수가 있는 거예요. 다른 사람이 그른 소견을 가지고 있으면 나도 그를 수가 있습니다. 아 그걸 고 간단한 걸 모른다는 말예요
가소중생준준可笑衆生蠢蠢이 각집일반이견各執一般異見이로다 참 꿈틀꿈틀하고 이 뭐 살았다고 꾸물거리고 살지만은 전부 자기 한 가지씩 소견을 가지고 그저 지 소견만 항상 옳다고 생각을 하고 자기 옳으면 남도 옳고 남이 그르면 자기도 그르다고 하는 이 사실 우리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오늘 대승찬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창에 들어오신 분이 쉰 한 분이 기록이 되어있어요. 창밖에서 또 듣는 분도 한 여남은 명 이상 또 되고 늘 한 오육십명은 그렇게 되나 봅니다.
많은 분들이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리:꽃물들다)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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