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심법요 제 8 강]
2. 무심이 도
전심법요 마음의 도리를 전하게 되는 요점을 가르치는 내용입니다. 오늘은 마침 많은 분들이 오셨어요. 근래는 인터넷이라고 하는 특별한 기술이 개발되어 그런 인연들이 많습니다. 염화실 운영에 큰 힘을 보태고 염화실이라고 하는 신문을 발행하는 미륵골님이 오셨습니다. 염화실에 미리 오셔서 제 모습을 그리고 법문 시간에 여러분들과 동참하고 싶어 서울 화랑에서나 친견할 수 있는 분을 부처님의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습니다. 카페나 신문에 빛을 더 내어 주시기 위해 유명하신 남선생님이 오셨습니다.
또 분당에서 명불행님이 오셨고, 또 우리 법회를 완전 무공해로 청소해 주시는 무공해님도 김천에서 세 분의 도리사 신도님들과 함께 오셨고, 대구에서 자운행님은 형님하고 어려운 걸음 하셨고, 진주 울산 창원 마산은 늘 오시는 분들이니까. 따로 소개하지 않겠습니다. 먼 길 날씨도 궂은데 오셔서 고맙습니다.
이게 다 부처님 공덕과 인연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가 좀더 현명하고 지혜롭게 살자고 하는 것이고,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깨달아서 살자는 그런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불교에서는 그러한 이치를 마음의 열쇠에서 찾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전심법요도 그러한 이치를 깨우쳐 주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공부할 내용이 “무심이 도다.” 그랬습니다. 마음 마음하는데 마음의 문제가 쉬운 것이 아니죠. 불교의 경전이나 조사스님들의 가르침이나 어디를 봐도 마음 설명을 하지 않은 데가 없지만, 그러면서도 손에 쉽게 잡히지 않는 것이 역시 마음의 이치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끊임없이 정진을 해서 이 마음의 문제를 확실하게 깨달아야 되겠죠.
그러기 전에 이런 가르침을 통해서 잘 이해하고 느끼고 이렇게만 해도 사실은 어떤 다른 종교이나 철학을 공부하는 것보다도 깨달으신 분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이것이야말로 인생을 살아가는 지름길이고 지혜를 얻을 수 있는 일이죠. 불교를 믿되 결코 삿되지 않고, 다른 길로 들어서지 않는 좋은 길잡이 역할도 하고 그렇습니다. 이걸 아셔야 됩니다.
조사스님들이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정진과 투자한 시간과 기울였던 그 큰 노력을 모르고, 어디서나 듣고 접하고 가르치는 법문인줄 알고 쉽게 흘려버리는데, 사실은 한 말씀 한 말씀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루고 토해낸 가르침인지 모릅니다. 내용을 알면요.
우리가 잘 알듯이 열반경에서 설산동자라고 하는 젊은 청년이 한 구절의 진리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피 끓는 젊음을 던져서 한 구절의 가르침을 구하기도 하는 기록도 있지 않습니까. 진리에 목말라하고 소중함을 아는 사람들은 그렇습니다. 우리는 거기까지는 설사 따라가지 못한다고 치더라도 이러한 인연에 함께한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고맙게 생각해야하지 않나하는 마음도 새삼 듭니다.
供養十方諸佛이 不如供養一個無心道人이니
공양시방제불 불여공양일개무심도인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한 사람의 무심도인에게 올리는 공양만 같지 못하다.
공양시방제불이 - 동서남북 사유 상하에 가득 차 있는 여러 부처님을 공양 올리는 것이 불공. 불공은 우리 불자들의 제일 덕목이죠. 닦아야하는 제일 덕목 중에 하나가 불공입니다. 공양시방제불이 바로 그 말이죠. 줄이면 불공 아닙니까.
불여공양일개무심도인이니 - 시방제불에게 공양하는 것이 일개무심도인에게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그랬어요. 수억만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 무심도인에게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그랬어요. 참 무섭고 대단한 소리입니다. 어찌 황벽선사 아니면 이런 말 못합니다. 우리는 겁이 나서도 못해요.
무심도인이 어떤 경지기에 어찌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느냐. 마음의 도리 마음의 문제를 높이 드러내고 가슴 깊이 각인시키자고 하는 그런 의도가 많이 깔려 있고, 사실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부처님 부처님해서 공양 올리면 복을 많이 받는다. 고 알며 생각하지요. 또 절에서 불사를 하는데도 보면 불상을 조성한다든지 부처님을 모시는 법당을 건립하는 데는 시주가 잘 되는데, 후원채 짓는데 라든지 스님들이 사는 요사채를 짓는다든지 도량을 정비하는 곳엔 시주를 잘 안하거든요.
보통 우리의 상식이 그렇게 돼 있습니다. 불교는 물론 부처님이 교주이시고 부처님을 통해서 불교가 존재하게 되었으니까. 더 말할 나위 없이 이해는 할 수 있어요. 그러나 우리가 폭탄선언 같은 충격적인 말씀도 가슴 깊이 잘 새겨야할 일입니다. 그래서 치우칠 필요가 없는 거죠. 이게 일개무심도인에게 공양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何故오 無心者는 無一切心也라
하고 무심자 무일체심야
왜냐하면 무심자에게는 일체 마음이 없기 때문이니라.
하고오 - 왜냐, 무심자는 - 무심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무일체심야라 - 일체 마음이 없다. 일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망상심 분별심 온갖 선악 시비의 마음 차별하는 마음 옳다 그러다 좋다 나쁘다 하는 그러한 마음들을 일체심이라고 그래. 그러한 마음이 없다. 그대로 존재의 원리에 부합돼 버렸어.
우리는 보는 대로 내 깜냥의 알량한 잣대로 재고 거기에 맞다 안 맞고 옳다 그러다 계산하죠. 그게 믿을 수 있는 잣대의 평가와 기준도 아니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기준과 잣대에 자꾸 맞추어 옳다 그러다 시비 분별을 일으켜서, 지나치면 고통이 생기곤 하는 그런 마음들이 하나도 없다.
如如之體가
여여지체
여여한 본체 그대로가
여여지체가 - 여기가 여여선당인데 바로 여여의 도리. 마음이 한결같은 여여한 아무 변화가 없고, 물결이 바람에 의해 여러 모양으로 소리를 내면서 출렁이지만, 그 젖는 성품은 여여합니다. 흐린 물이나 맑은 물이 됐던 출렁거리나 고요한 물이 되었던, 심지어 얼어있던 물이라도 녹이면 그 역시 젖는 성품은 여여해요. 그걸 보라는 겁니다. 우리 마음도 그래요. 온갖 선악 시비, 좋고 나쁘고 기쁘고 슬프고 그런 마음 씀씀이를 우리는 활용하고 있지만, 그 실체 본체는 전혀 선악 기쁘고 슬프고 좋고 나쁘고 전혀 없는 거죠. 그게 여여한 본체야.
內如木石하야 不動不搖하야
내여목석 부동불요
안으로 나무와 돌과 같아 동요함이 없으며
外如虛空하야 不塞不礙하며
외여허공 불색불애
밖으로는 드넓은 허공과 같아서 막히거나 걸리지 아니하며
내여목석하야 - 안으로 목석과 같아서, 부동불요하야 - 움직이지도 아니하고 흔들리지도 아니하며, 외여허공하야 - 밖으로는 허공과 같아서, 불색불애하며 - 막히지도 아니하고 걸리지도 아니하며,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마음의 여여한 본체를 가지고 있으면서, 인생은 움직이고 흔들리면서 살아가고, 흔들리면서 성숙해가고 이게 우리의 삶이죠. 그러면서 여여한 본체를 지킬 줄도 알아야 되는데, 너무 흔들리는 쪽에만 치우쳐 있으니, 그게 문제죠. 그리고 왜 그렇게 꽁 막혀 살며 마음에 걸리는 것이 그리도 많은지, 본래는 막혀 있을 것도 아니고 걸려 있을 것도 아니야.
그런 소질 재능 능력의 심성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곳곳에 막히고 걸려. 멀리서 기대를 잔득하고 왔는데, 딴 것은 다 좋은데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만 걸리는 거야. 그래서 오늘 실망했다. 그건 트진 곳으로만 생각을 해야 할 것을 사람들은 걸리고 막힌 것을 눈여겨본다고요. 열 가지 트진 것은 생각을 안 하고, 한 가지 걸리고 막힌 것만 생각해가지고 기분나빠하고 속상해하고 하는 것이 업이 돼 그래. 하여튼 그러니, 가능하면 긍정적으로 낙천적으로 살아야한다는 겁니다.
만원밖에 없다고 할 게 아니라 아직도 만원이나 남았네. 하는 이런 세속에 흘러 다니는 말이 좋은 진리예요. 사실 우리는 걸리지도 막히지도 않는 좋은 길들이 너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걸리고 막힌다. 네가 좋아하는 글 중에 도시통류라.
道是通流 - 도(道)란 툭 터져 흐르는 것이다.
塞막힐 새 礙걸릴 애하고는 정 반대야. 통류 - 모든 것이 툭 터져 흘러내리는 그런 마음 씀씀이. 전에 종정을 세 번이나 지내신 고암 큰스님이 계셨는데, 스님은 아무리 젊은 사람이 와도 일어나 서서 인사하고 악수하고, 나가면 문 앞까지 전송하는 그런 자비로운 스님이셨어요. 그리고 어떤 일도 잘 됐다고 그래요. 어떤 일도 잘 됐다고 그래서 한번은 실수 한 적이 있어요.
어느 신도가 자식을 잃고 펑펑 울며 스님께 위로를 받으려고 왔는데 잘됐다고 그러는 거야. 어쩌면 그게 잘 된 일인지도 궁극적으론 사실은 아무도 몰라. 어떻든 모든 것을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생각하셨던 스님이셨어요.
無能所無方所하며
무능소무방소
주관과 객관도 없고 방향과 장소도 없으며
무능소무방소하며 - 능소가 없다. 능能은 주관적인 것이고, 소所는 객관적인 것이예요. 사실 마음의 도리를 꿰뚫어 보면 주관도 객관도 없는 한 덩어리야. 덩어리고 하니 어패가 있는데, 툭 터진 그냥 하나야. 저 무한한 수억만 광년을 걸려서 가서 닿는 거리에도 우리 마음은 가 닿지 않는 데가 없는 거야. 그 먼 곳에도 우리 마음은 순식간에 빛보다도 수억 만 배 빠른 속도로 닿을 수 있는 속도라.
우리 마음의 속도가 그래요. 마음의 문제를 크게 깨달으면 좋지만 그냥 이론적으로라도 이해하면 우린 큰 재산과 행복과 능력을 얻는 거죠. 그걸 부처라 하고 깨달음의 도라 하지 않습니까. 어떤 스님하고 무슨 인연으로 해서 한 달 치료를 같이 봤는데, 몸 상태가 여러 가지로 나보다 훨씬 좋아요. 그런데 고칠 의지가 내가 보기엔 1할밖엔 없어. 9할은 고칠 의지가 없어. 그냥 내버려둬서 너무 안타까워서 이렇게 달래고 저렇게 꼬지고 뭐 별별 유혹을 다해 운동을 시키고 해도 도대체 안돼는 거라.
그래서 거기서 내가 정신 불교 공부하면서 부처님이나 도인스님들이 평생 힘을 바쳐서 마음의 이치 하나 깨달았다고 불교를 그래 말하는데, 마음이야 말로 참으로 주인공이구나. 마음한번 잘 먹고 관리 잘 하면 얼마든지 건강해질 수 있고 한데, 자기 마음이 그렇게 들어가지 않으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지라. 고집도 완전히 황소고집이고, 고집 붙는 것도 역시 마음의 이치거든. 그것도 마음이 들어서 고집 부리는 거야. 살면 살수록 마음의 이치같이 위대한 것이 없어.
그래서 황벽스님 같이 3천년의 불교의 역사에 히말라야 산 처럼 우뚝 서신 봉우리인데, 이런 분들은 타고난 근기가 보통이 아니예요. 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서 도를 이루고 나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예요. 능소도 없다. 방소도 없다. 방소方所라고 하는 것은 어느 장소, 우리 집 우리 동네라고 해서 다 거기에 내 마음을 잡아 두는 것이 아니죠. 마음의 방소가 있습니까. 잡혀있지 않죠. 몸은 법회 하는 곳에 와 있어도 마음은 천리만리 가 있으면 어쩔 수 없는 거라.
부처님도 어쩔 수 없는데, 내가 어떻게 해요. 마음의 이치인 방소가 없어서 그래. 몸은 구속하지만 마음은 구속이 안돼. 참 마음의 이치 이게 대단한 거죠. 몸 여기 있다고 마음이 어디 있나요. 그러니 이게 대단한 겁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철저히 그것만 하라 이거야. 그것만 하면 그게 무심이야.
조주스님이 喫茶去라 했지요. 누구든지 와서 도가 무엇입니까. 불교가 무엇입니까. 불법이 무엇입니까. 하면 무조건 차 한 잔 마셔라. 어떤 때는 아침 먹었느냐. 먹었습니다. 그럼 가서 그릇이나 씻어라. 그런 모든 일상사에 다른 잡념 없이 거기에 자신이 통째로 함께하고 있을 때는 아무 문제가 없는 거라.
보통사람들이 한 가지 하면서 몇 천 만 가지 동시에 하는 거죠. 마음은 몇 가지를 하는지 몰라. 몸은 여기 있으면서 온갖 것을 동시에 하는 그것도 마음의 능력이라. 부정적으로만 해석할 것이 아니라. 그러고 보면 대단한 거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어.
無相貌無得失이라
무상모무득실
모양도 없고 얻음과 잃음도 없다.
무상모무득실이라 - 마음이 무슨 모양이 있습니까. 모양도 없어. 그런데 마음은 대단한 것이기 때문에 모양도 마음대로 만들어 냅니다. 아까 앞에서부터 동요가 없다고 했지만, 틀림없이 동요하는 게 우리 마음이고, 걸림과 막힘도 없다고 했지만, 끊임없이 걸리고 막히는 것도 마음이고, 능소가 없지만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주관과 객관이 뚜렷이 있기도 하고, 방소가 없다고 하지만 마음이 찾아갈 자리 잘 찾아가고, 모양이 없다고 하지만 별별 모양을 다 잘 그려내요.
모양 그리는 걸 이야기 하게 됩니다. 또 득실이 없다고 하지만 그저 얻은 게 아니면 잃는 것이고, 잃는 것이 아니면 얻은 것. 항상 득과 실이 있는 것인데, 이건 우리 살림살이고, 마음의 도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모든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실체와 본모습을 뜻하는 것이 그렇다는 겁니다. 사람의 일상생활은 사실은 득실로 엮어가지만 우리의 마음자리에는 득실도 사실은 없다.
趨者가 不敢入此法은
추자 불감입차법
수행하는 사람이 감히 이 마음의 법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추자가 불감입차법은 - 그것 마음을 우리가 쫓아가서 마음을 향해서 마음의 도리가 중요하다고 해서 이 뭣 꼬. 이 뭣 꼬. 하면서 마음을 찾는데 감히 이 법에 들어가질 못해. 공부를 한다고 하면서 감히 이 마음의 도리에 탁 다가서질 못해. 우리가 열정이 없어서 첫째는 그렇고, 발심이 되지 않아서 그렇고, 또 마음 도리의 이해가 깊질 못해서 그런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여기서 지적한 이유 중에 하나는
恐落空無棲泊處라
공낙공무서박처라
공에 떨어져서 짚힐 곳(쉴 곳)이 없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공낙공무서박처라 - 공에 떨어져서 서박처가 없을까 두려워한다 이거야. 마음 마음 하지만 텅 비어서 찾아보니까 없거든. 끊임없이 작용하고 활동하지만 그러나 실체를 찾아보면 텅 비어 공적해. 그러면 그런 공적한 것이 본심이다. 그 공적한 것이 본심이다 생각하고 그 공적한 곳에 떨어져 있을까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거라. 공에 떨어져서 짚힐 곳이 없을까 두려워한다.
故로 望崖而退하
고 망애이퇴
그러므로 벼랑을 바라보고 물러나서
고로 망애이퇴하 - 그래서 벼랑을 바라보고 물러선다 이거야. 높은 산이 있는데 올라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올라가나 겁이 나서 물러선다 이거야. 마음 공부하는 사람들이 발심이 안 되어서 그렇고 마음에 대한 이해와 가치관이 달라서 마음공부 하지 않기에 그렇다 손 칩시다. 그런데 어느 정도 발심이 돼 있고, 마음에 대한 이해가 있는데, 이해가 치우쳐 있어서, 텅 비고 공적한 것만 이해해서 저게 마음이라면 텅 비어 허전하고 재미가 없어서 어떻게 사느냐. 이러고 있는 거라. 그게 망애이퇴라. 언덕을 바라보고 물러서서.
例皆廣求知見하나니
예개광구지견
대개 모두들 널리 지견을 구하나니
예개광구지견하나니 - 대개 모두들 다 지견만을 널리 구한다. 지견이 뭔고 하니 이게 사상입니다. 알음알이 지식 현재 우리들 수준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 뭐 많이 기억하고 많이 알고 좋은 사상 무슨 자비사상 여래장 사상이다. 불교 안에도 좋다는 사상이 많잖아요. 그런데 궁극의 불교는 사상이 없습니다. 무사상으로 무심입니다.
무심의 心이라고 하는 것이 사상이라는 뜻이거든요. 고급스럽게 이야기하면 사상이죠. 저급하게 말하면 망상 분별심 시비선악에 대한 마음. 이런 것들을 소개했지만, 사실은 조금 차원을 달리해서 하면 마음이란 사상이죠. 사상이란 망상이지 결국은 뭡니까. 화엄사상 법화사상 금강사상 모두 사상이란 생각인데, 생각은 궁극적으로 마음이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은 모두 지견 이예요. 그래서 그런 것들을 구하는 거예요.
나는 무슨 사상이지. 인불사상人佛思想 “사람이 부처님이다.” 이것도 지견에 해당되는 거야. 망상에 해당되고 사상에 해당되는 거야. 버려야 될 사상이야. 그런데 일단은 고기 잡는 그물로써는 아주 상당히 괜찮은 사상이야.
所以로 求知見者는
소이 구지견자
그러므로 지견을 구하는 사람은
如毛하고 悟道者는 如角이니라
여모 오도자 여각
털처럼 많고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뿔같이 드물다.
소이로 구지견자는 - 그러므로 지견(알음알이)을 구하는 사람은, 여모하고 오도자는 여각이니라 - 털같이 많고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소뿔같이 드물다. 소뿔 많아봐야 두개잖아요. 그런데 소에 난 털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 숫자 헤아릴 수가 없죠. 수백 수 천 만개가 넘잖아요. 그와 같이 지견을 구하는 사람과 사상을 구하는 사람.
또 좋은 생각을 본 받고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소털같이 많은데, 진짜 사상 없는 무심의 경지를 구하려는 사람은 무사상 무주의. 주의주장도 없고 사상도 없는 그야말로 마음마저 텅 비어버린 그런 도를 깨달은 사람은 소뿔처럼 드물다. 그런 이야깁니다.
첫댓글 _()()()_
恐落空無棲泊處 라 故로 望崖而退 하야 例皆廣求知見하나니 所以 로 求知見者 는 如毛 하고 悟道者 는如角 이니라 공하여 머무를 곳이 없는데 떨어질가 두려워 함이다 그러므로언덕을 바라보기 만하고 물러나니 널리 지견을 구하니 지견을 구하는자는 털처름 많고 도를 깨닫는자는 뿔처름 적은대 비유한것이다,,,감사합니다,,,_()()()_
趨者가 不敢入此法은 恐落空無棲泊處라....수행하는 사람이 감히 이 마음의 법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공에 떨어져서 짚힐 곳(쉴 곳)이 없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그 공적한 것이 본심이다 생각하고 그 공적한 곳에 떨어져 있을까 겁을 내고 두려워하는.)... 청비님! 수고하셨습니다.._()()()_
스님께서는 사상과 이념을 초월하셨기 때문에 마음의 그 광활한 세계를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시고 계십니다._()()()_
궁극의 불교는 無思想으로 無心이다... 청비님! 감사드립니다... _()()()_
청비님! 새해에도 더욱 평안건강하시옵고 부처님 가피로 소원성취하시옵소서......_()()()_
求知見者는 如毛하고 悟道者는 如角이니라... 지견(알음알이)을 구하는 사람은 털처럼 많고 깨달음(무심)을 구하는 사람은 소뿔같이 드물다....감사합니다. _()()()_
道是通流... 도(道)란 툭 터져 흐르는 것이다. _()()()_청비님! 염화실의 지기이신 님께 늘 고마운 마음입니다. 나날이 행복한 시간되시길 기원합니다.^^*
_()()()_
所以로 求知見者는 如毛하고 悟道者는 如角이니라......지견을 구하는 사람은 털처럼 많고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뿔같이 드물다......_()()()_
無心이라,,,
_()_
求知見者는 如毛하고 悟道者는 如角이라. 지견을 구하는 사람, 좋은 생각을 본 받고 닮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소털같이 많은데, 진짜 사상 없는 무심의 경지를 구하려는 사람, 주의주장도 없고 사상도 없는 그야말로 마음마저 텅 비어버린 그런 도를 깨달은 사람은 소뿔처럼 드물다.
모셔 갑니다
*()()()*
마하반야바라밀()()()
道是通流 (도시통류) - 도(道)란 툭 터져 흐르는 것이다. _()()()_
삼배 올립니다
_()_
供養十方諸佛이 不如供養一個無心道人이니 .............
道是通流 ........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_()()()_
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