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 <한국동남아연구소> 홈페이지 동향분석 란 2005. 11. 28.
캄보디아의 국왕 교체와 왕실의 역할
조흥국
(부산대학교 국제대학원 교수)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국왕은 신병 치료차 베이징에 체류하던 중 2004년 10월 6일 갑자기 자신의 퇴위를 발표했다. 암치료를 오래 전부터 받아온 81세의 시하누크는 국영 TV를 통해 자신의 건강 문제로 퇴위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 9개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베이징에 머무른 그가 퇴임을 결심하게 된 실질적인 이유는 정당들 간 끊임없이 분쟁하는 캄보디아의 현 정치적 상황에 대한 실망과 좌절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그는 지난 수 년간 종종 불만을 토로해왔다. 또 다른 배경으로 추측되는 점은 캄보디아 왕실의 영향이 갈수록 약화되고 있는 현실이다.
시하누크가 별안간 퇴위를 발표하자 당장 왕위계승의 법적 문제가 생겼다. 1993년 헌법에는 퇴위시 왕위계승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캄보디아 하원은 이에 “국왕이 사망하거나 퇴임하거나 사임할 때” 9명으로 구성된 왕위위원회가 7일 이내에 회합을 가져 새 국왕을 선출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새로운 법안을 급조했다. 이 법안은 이후 상원의 재가를 거쳐 헌법위원회의 심사를 통과했다.
새로운 국왕으로 노로돔 시하모니(Sihamoni)가 선출되었다. 그는 시하누크 왕과 그의 여섯 번째 왕비인 모니니엣(Monineath)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부모의 이름에서 첫 두 음절씩을 따서 만든 것이다. 1953년에 출생한 시하모니는 생애 대부분을 외국에서 보냈다. 어린 나이에 체코슬로바키아로 가서 프라하 고등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그 곳의 국립예술학교(National Conservatory)에서 음악과 무용을 전공했다. 1975년에는 북한에 가서 잠시 영화촬영술을 배웠는데, 시하누크도 이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75년 크메르루즈가 정권을 장악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한 연구에 따르면, 그는 부친의 서명이 위조된 편지를 받고 북한을 떠났다고 한다. 약 4년간의 크메르루즈 학정 기간 그는 왕실의 대부분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프놈펜의 왕궁에서 연금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 기간 왕실 사람들도 적지 않게 희생되어, 시하누크 국왕의 14명 자식들 중 5명이 죽었다. 1979년 베트남 군대에 의해 크메르루즈가 쫓겨난 후, 그는 캄보디아를 떠나 프랑스로 갔다. 그는 파리의 한 예술학교에서 고전발레를 계속 공부했다. 1992년에는 캄보디아의 유네스코 대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1980년대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유럽에서 무용수 및 발레 안무가와 고전예술 교수로 활동하면서 보냈다.
시하모니가 왕위계승의 유력 후보자로 처음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2002년 그가 캄보디아 독립기념일에 시하누크 국왕의 대리인으로 참석할 때였다. 이 사건으로 캄보디아 정부 관계자들과 외교관들은 시하누크가 그의 아들 중 누구를 가장 선호하는지에 대한 감을 잡기 시작했다.
시하모니는 처음에는 왕위를 물려 받는 것을 주저했지만, 뒤에 왕위위원회가 요청할 때는 왕위를 수락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10월 20일 부친과 함께 베이징에서 프놈펜으로 귀국했다. 캄보디아 정부는 새 국왕의 귀국을 기념하기 위해 이 날을 국경일로 선언했다. 공항에는 그를 영접하기 위해 훈 센과 라나리드 등 정부의 최고위 인사들이 대거 출두했다. 새 국왕의 이복 형이자 푼신펙 당의 당수이며 국회의장인 라나리드는 이미 사전에 왕위 계승을 거절한 바 있다.
시하모니의 대관식은 10월 29일 거행되었다. 이미 프놈펜의 주요 거리들은 캄보디아 국가와 새 국왕의 대형 포스터로 장식되어 있었다. 시하모니 국왕은 황색 승려복을 입은 스님들과 검은 제복을 입은 보디가드들에 둘러 싸인 채 왕궁을 걸어 나왔다. 대관식에서 그의 부왕인 시하누크는 그의 통치를 축복하는 상징적인 행위로 9개 항아리에 담긴 성수(聖水)를 그의 머리에 부었다. 이어서 새 국왕은 정부 고위 인사들과 불교승려들과 왕족과 외교관들 앞에서 자신의 재위의 공식적인 출범을 알리는 서약을 세 번 반복했다.
시하모니는 비교적 온순한 인물로 인식되어 있다. 언론의 일각에서는 이 점 때문에 훈 센 총리가 그의 왕위계승에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훈 센은 그동안 시하누크와 불편한 관계에 있었다. 그것은 시하누크가 종종 훈 센 정부에 대해 비판을 하는 등 캄보디아의 정치에 영향을 행사하거나 개입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하모니가 앞으로 정말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고분고분하게만 머물러 있을 것인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는 아직 젊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지난 60년간 그의 부친 시하누크 옹이 국왕으로서 캄보디아 사회의 통합과 국민의 구심적으로 작용해 온 전통을 등에 업고 있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캄보디아 정부는 퇴위하는 시하누크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그에게 “영웅적인 시하누크 대왕”(The Great Heroic King Sihanouk)의 칭호를 붙이기로 했다. 일부 서방 언론은 시하누크가 종종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고 추측한다. 훈 센으로서는 그가 왕실인물들에 대해 어떠한 부정적인 입장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로서는 캄보디아에서의 국왕의 역사적 및 사회적 의미를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시하모니의 대관식에서 새 국왕과 전대 왕에게 경배를 드리고, “입헌군주제의 지속은 캄보디아 왕국의 안정의 열쇠이다”라고 말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이해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