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한국동남아연구소> 홈페이지 2006. 5. 10.
동남아인들의 가치관과 윤리의식: “게으름”과 “느슨함”
신 윤 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남포럼 운영위원)
열한 개 나라나 되는 동남아의 지리, 역사, 사회, 경제, 정치와 같이 다채롭고, 실질적이고, 재미 있는 이야기 거리를 가득 두고, 잔잔한 것만 꼬치꼬치 따지고 있는 필자의 횡포를 못마땅해 할까 두렵다. 그러나 국가별 각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지금까지 총론으로 전개해 온 ‘미시적’ 문화 편을 마무리 짓게 해 주었으면 고맙겠다. 마지막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미시적 영역은 가치, 도덕, 윤리의 영역이다.
유교 문화나 기독교 문화가 몸이 밴 외국인들이 동남아 인들을 향해 흔히 해대는 비판이나 비난을 들어 보자. 많은 것들이 편견, 우월의식, “오리엔탈리즘”에 젖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받았든 받지 못했든 대다수 외국인들은 내심으로는 동의하고 있는 것들이다. 가장 많이 듣는 비난을 압축하여 열거해 보면 아마도 “게으르다”, “신뢰할 수가 없다”, “느슨하다”는 세가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첫째로 “동남아인들은 게으르다”. 과거 오른손의 손톱을 길게 길러 지체 높은 신분임을 나타냈던 귀족들이 노동을 전혀 하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고, 경작지를 가졌던 대다수 농민(평민)들도 아침 저녁 나절 무덥지 않을 때 두세 시간 논에 나가 일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남은 시간은 일상적인 오수, 한담, 놀이로 보내고 종종 마을 단위의 축제에 쓰여졌다. 재산을 축적하는 것조차 경원시 하였으니, 그야말로 놀기 위해 일을 하는 셈이었다. 노동에 대한 저주나 원망, 두려움 따위는 옛날 문학이나 예술 작품의 주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영국이나 네덜란드 식민주의자들이 동남아 각지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대농장을 경작하고 광산을 개발하면서, 중국과 인도에서 가난한 농민들을 꼬드기고 인신구매하고 납치하여, 동남아에 데려다 노동자로 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바타비아(자카르타)나 마닐라와 같은 식민 도시가 생겼고, 심지어는 한 번도 식민통치를 받았던 적이 없는 샴(타일란드)도 18세기 말 새 수도 방콕을 건설하면서 서양인들을 흉내내어 수십만의 노동자들을 광동성 조주(潮州)에서 “수입”해 왔다. 그 극치는 총인구의 75%를 차지하는 중국인들이 아예 말레이족의 땅을 차지하고 주인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싱가포르다.
근대화 과정 속에 그 의미도 바뀌게 되었지만, 말레이어에서 게으르다는 의미로 사용되는 말라스(malas)는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았다. 지금도 “어제 왜 약속을 지키지 않았어?”라고 물으면 간단히 “Saya Malas”라고 대답해 버리고 만다. 그 뜻은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라 “그냥 하기 싫어서” 정도이고, 그러면 그만이다. 하루에 두세시간 일을 하면 먹고 살고, 한 일주일 혼자서 뚝딱거리면 신혼집을 짓고, 집 짓고 농사 지을 땅이 지천에 늘려 있던 곳이 과거의 동남아다. 옷은 몇 조각 걸치면 그만이요, 음식은 그야말로 누워 있어도 나무에서 떨어지고, 집은 비바람만 막으면 되는 환경 속에서 부지런함은 수선을 떠는 것과 진배 없었다. 게으름은 여유의 표출이지 성격의 결함이 아니었다. 물질주의를 배척하는 힌두불교와 교묘하게 결합하기는 했지만, 부를 축적하는 것도 미덕이 아니었다. 죄를 지어 어디로 도망을 가려 하거나, 무슨 나쁜 야심이 있거나, 사람을 사서 전쟁을 하려 하거나 이런 사람만 재산을 모았다. 훗날 동남아 토착인들이 중국인(화인)들을 싫어하게 되는 근저에는 이런 까닭들이 있었다.
둘째로 “동남아인들은 믿을 수가 없다”. 개인은 신뢰할 수 없고, 인간관계에는 의리나 정 같은 ‘깊고 끈끈한’ 연결고리가 없다. 그래서 친구를 오래 사귈 수가 없고, 애인은 바람을 피우고 배신을 하며, 부부는 쉽게 이혼을 한다. 동남아에 가서 사는 외국인들은 거래처나 사업파트너로 현지인 대신 중국인을 선호하며, “바가지를 씌우는” 시장 대신 정찰제 가격이 붙은 수퍼마켓에 가고, 현지인 운전수나 가정부에게 속지 않기 위해 신경을 곤두 세우고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로마에 가더라도 로만인들처럼 살지 않고 시칠리아인으로 산다.’ 외국인들이 진심을 얘기할 때에는 이렇게 늘어 놓는다.
사실은 동남아인들은 우리처럼 무슨 ‘원칙’이나 ‘이념’에 목을 매고, ‘의리’나 ‘소신’을 자기 생명보다 더 중시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무슨 종교든 이념이든 동남아의 토양에 뿌리를 내리면 현지화하고 토착화한다. 그래서 수까르노도, 호치민도, 심지어는 폴폿조차도 “정통” 맑스주의자가 아닌 것은 물론이요, 맑스주의자라기보다 민족주의자로 규정되는 것이다. 일본인들처럼 주인이나 보스와 의리를 지키기 위해 할복을 하거나,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소신을 지키기 위해 자살을 하는 일도 없다. 원칙적이거나 소신이 있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가르침도 믿음도 없다. 말하자면, 추상적인 것에 현혹되지 않고 말 그대로 인간적인 것에 따르는 것이다. 훌륭한 사람이란 ‘군자’처럼 고매하고 원칙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가진 것을 남과 나눠 갖는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말레이어에서는 “좋은 사람”(orang baik)이란 말은 많이 써도, 다른 말로 사람을 칭찬하는 말은 듣기 힘들다.
마지막으로, “동남아인들은 느슨하다”. 일본을 주로 연구했던 인류학자 엠브레이(John F. Embree)는 50여 년전 타이 사회를 한번 훑어 보고는 “느슨하게 짜여진 사회”(loosely structured society)라고 단정지었다. 사람들이 일을 대충대충 하고, 약속은 지키는 둥 마는 둥하고, 가족 간에는 유대가 약하며, 조직과 사회에는 규율이 없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개인에게 적용된 엄격한 도덕률이 존재하지 않고, 사회 전반에는 윤리의식이 희박하다고 보았다. 여자들은 성모럴이 없어 “헤프다”고 했다.
Loose하다는 말은 느슨하다, 늘어져있다, 헤프다는 뜻이고, 그 반대말은 “[꽉] 조여있다, 짜여있다, 엄격하다, 답답하다” 등일 것이다. 그렇다면 느슨하지 않는 사회란 신분이나 계급이 고착화되어 사회적 유동성이 없고, 사회에는 확고한 제도가 지배하여 개성이 발휘될 여지가 없으며, 국가의 법질서가 엄격하여 개인의 행동과 자유가 구속되고, 전통적 윤리의식이 여성을 차별하고 억압하는 그런 사회일 것이다. 우리나 일본, 동북아 사회가 그렇지 않은가?
세계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이 사는 동남아에는 클래식 음악이 없다. 동남아에 오면 라디오에서든 고급 호텔에서든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가 없다. 중국인들의 나라 이곳 싱가포르에는 겨우 한 방송국(92.4FM)이 클래식 음악을 들려 주는데, 주로 바하나 모짜르트와 같은 경쾌하고 산뜻한 음악을 틀기는 해도, 우리가 깊은 의미를 새기며 듣는 베토벤이나 차이코프스키 곡을 들려 주는 걸 본 적이 없다. 그 이유를 물으면, 동남아인들은 왜 음악을 머리를 쥐어 짜고 고통을 받으며 듣느냐고 반문한다. 하기 싫은 것을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 동남아의 게으름이요, 자유로움이요, 휴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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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참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3년을 살면서 늘 궁금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군요. 이제는 좀 더 이 나라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네요.
목수 님, 앞으로 느끼시는 바에 대해 천천히 좀 조언 좀 부탁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