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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남인 세력의 명문가(2)...의성 김씨(1)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갈라지는 경상북도 북부, 안동 영주 예천 봉화지역을 ‘양백지간’ 또는 ‘영중지방’이라고도 부른다. 영남지방이지만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즉 양백산맥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지역이란 뜻이리라.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중지방은 전통 유교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유교적 가치를 고집스럽게 지켜나가는 독특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종가와 문중을 중심으로 씨족 단위로 결속하면서도 통혼과 사우관계를 통하여 다른 문중과 화합하는 등 숭조돈목의 정신과 봉제사 접빈객의 삶을 숭상하는 가장 조선다운 고장이 바로 이 영중지방이라고 할 수 있다.
영중지방에 집성 세거하는 씨족 집단 중 향촌단위로는 가장 많은 집성촌을 가진 거족이 의성 김씨라고 할 수 있다. 임하 천전, 임동지례, 임하 신덕, 서후 검제, 봉화 법전, 소천, 예천 구계에 세거하는 김진의 후예 청계공파를 비롯하여, 의성 사촌, 군위 노행, 청송 진보, 풍천 광덕, 일직 구미, 길안 송사, 예안 태곡, 녹전 둔번, 봉화 황전, 봉화 해저, 영주 지천, 예천 신당 등 영중지방 곳곳에 문호를 차리고 세거하고 있다.
의성 김씨는 고려 태조 왕건의 외손자이자 신라 경순왕의 제4子로 義城君에 봉해진 金錫을 시조로, 9세 龍庇․ 龍弼 ․龍珠 대에 3파로 갈린다. 龍庇는 벼슬이 고려 금자광록대부 태자첨사이며 의성군에 봉해졌다. 의성군민에게 크게 공덕이 있어 군민들이 鎭民祠를 세워 제향하였는데 후손들이 의성 오토산 묘하에 오토제와 진민사를 이건하고 춘추로 제향하는 의성김씨의 中祖이다. 역사에 이름이 있는 인물로는 龍庇의 후손으로 학봉 金誠一과 동강 金宇옹이 유명하고, 일송 金東三과 심산 金昌淑 등 애국지사와 건국유공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 또한 의성 김씨이다. 인종때 석학. 문장가였던 慕齊 金安國, 思齊 金正國 형제는 龍弼의 10대손이 된다.
義城 金氏 上系圖
錫―逸―弘術―國―景珍―彦美―襲光―公瑀―龍庇 (첨사공파)
-龍弼 (수사공공파)
-龍珠 (충의공파)
龍庇-宜-瑞芝-台權-居斗-洊-永命-漢啓-萬謹-禮範-璡 (안동천전)
-萬慎
-萬欽 (일직구미)
-漢哲 (청송,군위)
-漢碩 (순흥,의성,길안)
-漢仝 (청송,의성사촌)
-居翼 (부여,정읍)
- 椿-玉-玄柱-乙邦-軸-自江-琬-永鈞-麟 (녹전둔번,영주지천)
-永權-麒 (상운운계,봉화황전)
-鸞
-龍
-琰-元貞-彦鵬 (녹전둔번)
-衍-懷寶-篤-春-孝友-崇祖-夢石-楊震-澤龍 (예안태곡)
-欽祖-潤石-瀁
-麒芝 (고령김씨로 분관)
-紘 (장성 충주 선산)
-英-之銳-修德-用超-00-00-季孫-00-00-希參-宇宏 (성주 봉화해저)
-宇顒 (성주)
-世勒 (전주 정읍)
龍弼-允寬-00-00-00-00-00-統-翼齡-璉-安國 (괴산,장단,용강)
-正國
龍珠-允之 (충청도 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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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중지방에 세거하는 의성 김씨는 모두 9세 金龍庇의 후예들이다. 金龍庇는 네 아들( 宜․ 紘․ 英․ 世勒)이 있었는데, 宜의 후손들은 영중지방에, 紘의 후손들은 장성․충주․선산에, 英의 후손들은 성주에, 世勒의 후손은 전주․정읍지방에 세거한다.
의성 김씨 후예들의 영중지방 입향은 크게 세 갈래가 있었으니,고려 충렬왕때 예안 사천에 입향한 평장사 金椿 ( 宜의 3남, 11세), 고려 공민왕때 안동 풍산에 입향한 공조전서 金居斗 (宜의 증손자, 13세), 성주에 세거하는 英의 후손으로 병자호란 이후 봉화 해저로 입향한 金聲久(개암 김우굉의 고손자, 24세)가 그들이다. 나머지 집성촌은 모두 이들의 후예들이 인근으로 이거해 나가서 형성된 문중이다.
① 의성 김씨 예안 평장사공파
녹전면 신평리 속칭 듬버리에 세거하는 의성 김씨 입향조는 용비의 손자 문하시중 평장사 金椿( 宜의 3남, 11세 )으로 충렬왕때 예안 비봉산 아래 沙川에 정착한 후 아들 金玉, 金瑜, 金衍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좌사간, 봉익대부, 평장사 벼슬을 지냈고, 金玉의 아들 金玄柱, 金瑜의 아들 金用堅, 金衍의 아들 金懷寶 등 입향조의 손자들이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고, 증손자인 김현주의 두 아들 김을방․을보 형제가 문과에 급제하는 등 입향이래 대대로 과환이 이어졌다. (宣城誌 참조)
듬버리 마을은 둔번 金乙邦이 문과에 급제, 교찬의 벼슬을 지내다가 고려가 망하자 녹전 요성산 아래에 ‘遁煩草堂’을 짓고 ‘遁煩’으로 자호하며 숨어 살게 되니 신평리의 의성 김씨 세거지 마을을 ‘듬버리’ 라고 부르고 있다. 듬버리 마을은 600여년간 종자 종손으로 대를 잇고 다른 성씨가 단 한차례도 함께 살지 않았던, 독성 마을로 안동 일대에서는 가장 긴 역사를 자랑하는 터전이다.
둔번의 손자 훈도 김완은 농암의 구로회에 참여하였으며, 김완의 큰 아들 김영균의 후손은 듬버리와 영주 지천에 세거한다.
영주 지천에 세거하는 의성 김씨는 숙종때 김영균의 후손 恥恥齊 金秀三(25세)이 이거한 후, 손자 김직이 영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도사를 지냈다.
한편 김완의 차자 김영권은 상운면 운계로 이거하였는데, 운계에 살던 김영권의 증손자 중 훈련원 봉사 金欽이 봉화 황전에 거주하는 생원 南龜壽의 사위가 되어 황전마을을 열게 되었다.
봉화읍 가장자리에 있는 황전마을은 정자와 고택이 즐비한 의성 김씨 예안파의 지파 마을이다. 그 때 남구수가 지어 살던 경암헌 고택은 사위에게 물려져 지금까지도 황전 의성 김씨 종택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김흠의 손자로 黃坡 金宗傑은 당대에 학식과 덕망이 뛰어나 나중에 이조참판에 추증 되고, 이곳 봉산리사에 배향되었다. 동네 입구에 있는 도암정은 1650년에 황파가 세운 정자이다. 김흠의 황전 마을 입향과 관련된 구전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김흠이 시종을 데리고 이 마을에 있는 구봉산에 올라 매를 날리며 꿩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산에서 가만히 바라보니 매에게 쫓긴 꿩이 황전의 생원 남구수의 집으로 날아들어 갔는데, 그의 딸이 꿩을 감추어 두었다가 매가 가고 난 뒤에 그 꿩을 살려 보내는 광경을 보고 아주 후덕한 규수라 여기고 청혼을 했고, 마침내 이 남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황전에 와서 처가살이를 하게 되었는데, 그 때부터 남씨가 한 집 두 집 이곳을 떠나 20년이 채 못 가서 남씨는 한 집도 남지 않고 의성 김씨 마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황전에서는 지금도 외손이 들어오면 본손이 망한다고 해서 외손은 물론 타성도 큰마에 살지 못하도록 한다고 전해온다.
예안파 입향조 김춘의 또 다른 아들 김연의 후손에서도 문과 급제자가 쏟아졌으니, 김회보를 비롯, 김효우, 김흠조, 김윤석, 김 양, 김택룡(1547-1627) 등이 문과에 급제하는 등 과환이 이어졌다. 예안 태곡(한실) 마을 의성 김씨는 김연의 고손자 첨정 김효우(16세)가 정착한 이래 조성당 김택룡의 후손들이 예안 태곡(한실)에 계거하고 있다.
김효우의 아들 김흠조는 연산군때 문과에 급제, 장례원판결사를 지냈다. 戊午士禍때 화를 당한 金宗直․金馹孫 등을 伸寃케 하고, 李克墩의 관직을 추탈하고, 柳子光을 유배케 하는 등 士林派의 성향을 지녀 己卯士禍 이후 탄핵을 받았고, 뒤에 榮州로 이거하였는데 그 세거지는 분명하지 않다. 1997년 영주 안동 간 국도확장건설공사 중 그의 묘가 발견되었는데 그가 예안 김씨 참판공파냐, 의성 김씨 예안파냐를 놓고 설왕설래가 있었으나, 결론은 의성 김씨가 분명하다고 보여 진다.
따라서 의성김씨 예안파는 평장사 김춘이 예안 사천에 입향한 이래 증손자 을방이 듬버리로, 또 다른 현손자 효우가 태곡(한실)로 이거하였고, 을방의 후손이 다시 영주 지천, 상운 운계로 분가하고, 상운 운계에서 다시 봉화 황전으로 분파된 마을이다.
② 의성 김씨 안동 전서공파
의성 김씨 전서공파가 안동에 정착한 것은 공민왕때 공조전서를 지낸 김용비의 고손자 金居斗가 흥왕사의 변란때 아버지 金台權이 화를 당하자, 안동 풍산으로 입향한 후 아들 도만호 洊(천)이 안동시내로 이거하였다. 김거두가 안동으로 낙향하게 된 배경은 아버지 김태권이 상락군 김방경의 증손서가 되며(方慶-忻-承固-女 金台權), 김거두 역시 안동 권씨 좌정승 權漢功의 외손서(權漢功-女 柳總-女 金居斗)가 될 뿐 아니라 앞서 정착한 예안파 입향조 金椿은 김거두의 종조부가 된다. 따라서 이런 배경이 작용하여 안동으로 피란하게 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김거두는 가선대부로 경주부사에 부임하여 조선 태조 3년 1394년 삼국사기3차 판각본을 발간하고 그 발문을 썼으니 조선조에도 계속 사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만호 벼슬을 지낸 천(洊)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자 영수는 사직이며 그 후손은 풍천, 남후, 풍산면 일원에 산거하고, 차자 영명은 세종때 사마시에 합격 신령현감을 지냈다.
신령현감 金永命은 3번 장가(광주 이씨 李之柔의 딸, 광산 김씨 제용 소감 金務의 딸, 안동 권씨 부정공파 權專의 딸)를 들었는데 외내 마을 광산 김씨 안동 낙남조 김무의 사위이자, 文宗의 국구 권전의 사위가 되었으니, 문종과는 동서지간이 된다. 4자를 두었는데 漢啓․漢哲․漢碩․漢仝이다.
한계(1414-1460)는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사가 되었으나 세조찬탈에 사임하고 은거했으며, 한철은 예종 1년에 문과에 급제 예조정랑이 되었고, 그 후손은 군위, 청송지방에, 한석의 후손은 영주 순흥, 남후 신석, 길안 묵계 등지에, 한동의 후손은 의성 사촌, 진보 등지에 산거한다. 승문원사 한계는 萬謹․萬慎․萬欽 세 아들이 있는데, 장자 만근은 임하 거주 해주 오씨 오계동의 사위가 되어 임하 내앞으로 이거하고, 만신은 퇴계의 조부 진성 이씨 이계양의 사위가 되어 그 후손은 노림에 거주하고, 3자 만흠은 연산군때 생원이 되어 그 후손은 예천 신당과 일직 구미에 정착하였다. 의성 김씨가 임하 천전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은 김만근이 처향따라 이거하여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만근의 장자 仁範의 후손은 선산으로 이거하고, 차자 禮範은 임하 천전에 계거하며 크게 번성하게 된다. 풍천면 갈전동 못골에 500년을 세거하는 순흥 안씨 입향조는 安建이다. 안건의 장자 安繼宗은 김만근의 사위가 되었는데 안계종의 처 의성 김씨가 1535년 자녀들에게 분재한 분금문기가 1993년 순흥 안씨 종가에서 발견(한국정신문화연구원 고문서집성 권43 수록 )되었다. 여기에는 전래별 재산항목이 열기되고 있는데, 이 분재기에서 의성 김씨의 동생 김예범(1479-1570)과 친정 조카 성균 생원 김진(1500-1580)이 증인으로 서명을 했고, 재주 김씨의 시동생 安承宗이 필집 서명을 하고 있는데, 분재기에는 노비의 출처별로 그 전래를 정확히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35년 안계종 처 의성 김씨 분금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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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장자 洵
(봉사위) |
말녀
류의 처 |
망여부
장응필 |
가옹얼녀 애을 |
계 |
노비 |
가옹별득신노비 |
5 |
1 |
|
|
6 |
가옹양모변신노비 |
1 |
1 |
|
|
2 |
가옹양부변신노비 |
2 |
1 |
|
|
3 |
가옹별득신노비 |
4 |
|
|
|
4 |
의모변신노비 |
|
1 |
|
|
1 |
가옹별득노비 |
3(1) |
1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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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가옹부변노비 |
1(1) |
4 |
|
1 |
7 |
가옹모변노비 |
|
4 |
|
|
4 |
가옹양모변노비 |
2 |
3 |
2 |
|
7 |
가옹양부변노비 |
|
1 |
|
|
1 |
의부변노비 |
7(1) |
1 |
|
|
9 |
의모변노비 |
|
1 |
|
|
1 |
망녀기상노비 |
6 |
1 |
|
|
7 |
가옹결득노비 |
|
|
1 |
|
1 |
계 |
31 |
20 |
4 |
1 |
59 |
전답와가 |
전 |
214두락
(35두락) |
189두락 |
15두락 |
15두락 |
468두락 |
대전 |
(13두락) |
4두락 |
|
|
17두락 |
답 |
152두락
(30두락) |
75두락 |
|
|
227두락 |
와가 |
1좌 |
1좌 |
|
|
2좌 |
가옹별득신노비 : 남편인 안계종이 그 부모로부터 별급 받은 신노비
가옹양모변신노비 : 남편이 시양모 풍산류씨(석인의 딸)에게서 받은 신노비
의모변신노비: 재주 김씨가 어머니 해주오씨(오계동의 딸)로부터 받은 신노비
가옹부변노비 : 남편 안계종의 생부 안건(1444-?)으로부터 받은 노비
가옹모변노비 : 남편 안계종의 생모로부터 받은 노비
의부변노비 : 아버지 김만근으로부터 받은 노비
망녀기상노비: 김씨의 죽은 딸(장응필의 처)이 분재 받은 노비를 친정으로 되돌려준 노비
가옹결득노비 : 남편 안계종이 재판에서 승소 획득한 노비
예범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 璡은 1525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생원이 되었는데, 벼슬을 하기보다는 부모를 봉양하고 자제의 교육과 가사경영에 힘을 써서 다섯 아들을 퇴계 선생에게 수학하게 하여 세 아들은 문과에 급제하고, 두 아들은 사마에 합격하여 이때 이후로 조선말까지 청계의 후손에서 문과 급제 34명, 사마 64명, 문집발간 43명으로 학문과 과환이 대대로 이어지고 자손이 번성하여 영중지방의 명문벌족으로 등장한다.
청계 김진의 후예들의 성취에 대하여는 후에 별도 기술하기로 한다. 예범의 차자 珽과 3자 璲는 참봉이 되었는데 그 후손들은 천전에 거주하나 가세는 미미하다.
③ 의성 김씨 봉화 개암공파
봉화 해저에 집성 세거하는 의성 김씨는 성주 일원에서 세거하던 開巖 金宇宏(1524-1590)의 고손자 팔오헌 金聲久(1641-1707)가 병자호란 이후 정착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따라서 예안 일원에 세거하던 평장사공파와 안동 일대의 전서공파와는 그 뿌리가 좀 다르다. 평장사공파와 전서공파는 9세 金龍庇의 장자 宜의 후손이고, 해저 마을 개암공파는 9세 용비의 제3자 英의 후손이다.
英의 9대손 金希參은 문과에 급제하고 翰林. 檢詳. 舍人을 거쳐 三陟府使를 지냈는데, 아들 넷 중 宇弘, 宇宏, 宇옹 3형제가 문과에 올라, 4부자가 대과에 오른 집안이 되었다.
해저마을 입향조 팔오헌 金聲久는 持平. 正言. 大司成을 거쳐 江原道관찰사를 지냈는데, 그의 후손에서 아들 김여건을 바롯하여 김한동 김희락 김희주 등 문과급제자가 17명을 배출했으니 해저마을 또한 늦게 형성된 마을이지만 명문으로 등장했다. 전국회의원 金重緯는 이 마을 출신이다.
김흠조(金欽祖)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경숙(敬叔). 호는 낙금당(樂琴堂). 예안(禮安) 출생. 효우(孝友)의 자. 1501년(연산군 7) 문과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1507년 봉교(奉敎)로서 정충량(鄭忠樑)․이희증(李希曾)․윤인경(尹仁鏡) 등과 함께 상소하여,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화를 당한 김종직(金宗直)․김일손(金馹孫) 등을 신원(伸寃)케 하고, 이극돈(李克墩)의 관직을 추탈(追奪)하고, 유자광(柳子光)을 유배케 하였다. 1509년 언양현감(彦陽縣監)으로 시폐칠조(時弊七條)를 개진하였고, 이어 상주(尙州)․제주(濟州)의 목사(牧使)․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했다. 사림파(士林派)의 성향을 지녀 기묘사화(己卯士禍) 이후 여러 차례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았다. 뒤에 영주(榮州)로 이거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宣城誌
김택룡(金澤龍) 1547(명종 2, 정미) ~ 1627(인조 5, 정묘)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시보(施普). 호는 와운자(臥雲子)․조성당(操省堂). 의성김씨(義城金氏) 예안(禮安) 입향조(入鄕祖) 효우(孝友)의 현손. 승지(承旨) 양진(楊震)의 아들로 한실(寒室 : 現 禮安面 台谷里)에서 출생했다. 조목(趙穆)의 문인으로 남치리(南致利)․권우(權宇) 등과 교유했다. 1576년(선조 9) 생원시에 합격하고, 1588년(선조 21)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을 역임한 뒤, 1595년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고 이어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지냈다. 1596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세자시강원겸사서(世子侍講院兼司書)를 지내고 전라도 광양(光陽)․운봉(雲峰)에서 왜적을 무찔러 공적이 널리 알려졌으며, 1600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강원도․전라도의 도사(都事)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시종관(侍從官)으로 선조(宣祖)를 호가(扈駕)했으며, 시문(詩文)에 능하여 임란시 명 나라 장수들도 그의 시를 즐겨 애송(愛誦)했으며, 학문적으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학문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예안(禮安) 한천정사(寒泉精舍)에 제향되었으며, 저서에『조성당집(操省堂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宣城誌․陶山及門諸賢錄․安東鄕土誌(宋志香)
김한계(金漢啓) 1414(태종 14, 갑오) ~ 1460(세조 6, 경진)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형운(亨運). 호는 휴계(休溪). 현감(縣監) 영명(永命)의 자. 생원으로 1438년(세종 20)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1451년(문종 1)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 경연(經筵)에서 활동하여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높았다. 이어 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1454년(단종 2)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를 겸하였으며, 또 기주관(記注官)이 되어 『세종실록(世宗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부승지(副承旨)․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냈으며,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승문원부지사(承文院副知事)에 임명되나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향리인 안동(安東) 방적동(邦適洞)으로 돌아왔다. 그해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사육신(死六臣)인 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之)와는 동방(同榜)이며 함께 집현전에서 학문을 닦은 인연으로 이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 비록 생육신(生六臣)의 반열에는 들지 못하였으나 종신토록 벼슬을 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安東鄕校誌
김우굉(金宇宏) 1524(중종 19, 갑신) ~ 1590(선조 23, 경인)
조선 중기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경부(敬夫). 호는 개암(開巖). 성주(星州) 출생. 삼척부사(三陟府使) 희삼(希參)의 자로 동강(東岡) 우옹(宇顒)의 형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52년(명종 7) 진사시에 장원을 하고,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禮文館檢閱)․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수찬(修撰)․교리(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 청환직(淸宦職)을 역임하고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1582년(선조 15)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 승(僧) 보우(普雨)를 축출해야 한다는 상소를 수 차례 올린 바 있고, 대사간(大司諫) 재임시는 임금에게 직간(直諫)을 자주 해 미움을 받기도 했다. 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광주목사(光州牧使) 등을 지냈다. 만년에 상주로 이거했으며, 상주(尙州)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집에 『개암집(開巖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國朝人物考․陶山及門諸賢錄․星州郡誌
김성구(金聲久) 1641(인조 19, 신사) ~ 1707(숙종 33, 정해)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덕휴(德休). 호는 팔오헌(八吾軒). 대사성(大司成) 우굉(宇宏)의 현손. 진사(進士) 추길(秋吉)의 자로 봉화(奉化) 해저(海低)에서 출생했다. 1662년(현종 3) 생원시를 거쳐 1669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급제했다. 관은 무안현감(務安縣監)․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등을 거쳐, 1693년(숙종 19)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내고 은퇴하여 향리에서 학문을 탐구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봉화읍(奉化邑) 석평리(石坪里)에 살았으나 만년에 해저리(海底里)로 이거했다. 봉화(奉化) 백록리사(栢麓社祠)에 배향(配享)되었으며, 문집에 『팔오헌문집(八吾軒文集』이 있다. ■참고문헌 : 嶺南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奉化郡誌
김여건(金汝鍵) 1660(현종 1, 경자) ~ 1697(숙종 23, 정축)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 자는 천개(天開). 봉화(奉化) 출생. 대사성(大司成) 우굉(宇宏)의 후손. 대사성(大司成) 성구(聲久)의 자. 1687년(숙종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동년에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1693년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에 올랐다. 1690년 정언(正言) 때 세자책봉하례(世子冊封賀禮)에 참석하지 않은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 조사석(趙師錫)의 불손함을 탄핵․유배시켰다. 1694년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소론(少論)이 득세하자 조사석 일당에 의하여 파직되어 함경도 명천(明川)에 유배되었다.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저서에 『북천록(北遷錄)』『수찬공유고(修撰公遺稿)』가 있다. ■참고문헌 : 奉化郡誌․安東鄕土誌(宋志香)
김한동 1740(영조 16, 경신) ~ 1811(순조 11, 신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한지(翰之). 호는 와은(臥隱). 봉화(奉化) 출생. 대사성(大司成) 우굉(宇宏)의 후손. 좌랑(佐郞) 경필(景泌)의 자. 1763년(영조 39) 진사시에 합격하고,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언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1791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이 되어 수해를 당한 영남지방 재해민의 기곤(饑困)함을 들어 환곡의 환수를 연기해 줄 것을 진언했다. 이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동부승지(同副承旨)․순천부사(順天府使)․대사간(大司諫)․승지(承旨)를 거쳐 1797년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를 지냈다. 1802년(순조 2) 천주교를 신봉하여 각종 제례에 참석하지 않아 지평(持平) 정언인(鄭彦仁)의 탄핵을 받아 함경도 명천(明川)에 유배되어, 뒤에 흡곡(歙谷)으로 이배되었다가 1805년 풀려났으며, 저서에 『와은집(臥隱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奉化郡誌․安東鄕土誌(宋志香)
김희락(金熙洛) 1761(영조 37, 신사) ~ 1803(순조 3, 계해)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숙명(叔明). 호는 고식헌(故寔軒). 봉화(奉化) 출생. 대사성(大司成) 우굉(宇宏)의 후손. 두동(斗東)의 자. 이상정(李象靖)의 문인. 1792년(정조 16) 생원시에 합격하고, 몇 달 뒤 도산서원에서 실시된 도산응제(陶山應製)에서 장원했다. 1794년 규장각초계문신(奎章閣抄啓文臣)으로 뽑혀 족형(族兄) 희주熙周)와 함께 궁중을 출입하며 여러 가지 과제(課製)와 사서조대(史書條對)에서 자주 장원을 하였다. 이후 1780년 사이에 삼조(三曹)의 낭관(郎官)과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내는 동안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겸하였고, 말년에는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흥양현감(興陽縣監)을 자원하였다. 관직에 있으면서 문장과 학색으로 정조(正祖)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고 많은 강제문(講製文)과 웅제문(應製文)을 지어올렸으며, 편수관(編修官)으로서 『해동인물고(海東人物考)』『영남명신록(嶺南名臣錄)』『홍재전서(洪齋全書)』등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저서로 『고식헌집(故寔軒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奉化郡誌
김희주(金熙周) 1760(영조 36, 경진) ~1830(순조 30, 경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공목(公穆)․성사(聖思). 호는 갈천(葛川). 봉화(奉化) 출생. 대사성(大司成) 우굉(宇宏)의 후손. 시동(始東)의 자. 권사민(權思敏)․이상정(李象靖)의 문인. 1789년(정조 13)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795년 식년친시(.式年親試)에 급제하였다. 병조(兵曹)․예조(禮曹)의 좌랑(佐郞)․정랑(正郞)을 지냈다. 영해부사(寧海府使)․안주목사(安州牧使)․우승지(右承旨)를 거쳐 형조참판(刑曹參判)․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함길도관찰사(咸吉道觀察使) 등을 지냈으며, 1800년에는 『정조실록(正祖實錄)』편찬에 참여하였다. 만년에 봉화(奉化) 재산(才山) 갈산리(葛山里)에 갈천정(葛川亭)을 짓고, 또한 덕봉(德峰) 아래에 덕봉정사(德峰精舍)를 지어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문집에 『갈천집((葛川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國朝榜目․奉化郡誌
김우수(金禹銖) 1804(순조 4, 갑자) ~ 1874(고종 11, 갑술)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내석(乃惜). 호는 학포(鶴浦). 봉화(奉化) 출생. 대사성(大司成) 우굉(宇宏)의 후손. 재선(在善)의 자. 유치명(柳致明)의 문인. 1834년(순조 34) 문과에 급제하여, 관은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이르렀다. 저서에 『학포집(鶴浦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安東鄕校誌․奉化誌․義城金氏譜
안동 남인세력의 명문가(2)...의성 김씨(2)
영남의 명문가는 안동에 몰려 있고 안동에서 유명한 명문가는 진성 이씨, 풍산 류씨, 의성 김씨 집안을 꼽는다. 진성 이씨는 글잘하는 선비가 많고, 풍산 류씨는 벼슬이 많고, 의성 김씨 집안은 대대로 입바른 선비가 많다고 한다.
의성 김씨를 안동의 명문벌족으로 발신시킨 인물은 靑溪 金璡(1500-1580)이다. 청계의 후손에서만 문과급제 24인, 생원·진사 64인, 문집과 유고를 남긴자 239인, 獨立運動으로 건국훈장 수훈자 58인을 배출했다.
청계는 청송에 거주하던 고모부 權幹(김만근의 사위)에게 수학하게 되고 후에 그곳 거주 여흥 민씨 태종의 국구 閔霽의 증손자 閔世卿의 사위가 된다. 민세경의 아우 민세정은 기묘명현으로 학덕이 있었다. 청계는 처삼촌 민세정에게 수학하여 152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퇴계․하서 등과 교분을 맺었다. 아들 5형제를 퇴계 문하에 수학하게 하여 5형제 모두 소과에 등과하고 그 중 3형제는 문과에 급제하는 등 소위 ‘5자 등과댁’, ‘천전 오룡’ 으로 인구에 회자되게 된다.
또한 청계는 임하일대에 많은 田庄을 마련, 아들과 사위에게 분거하게 하고, 영양 청기농장과 강릉 금광평 개척 사업을 추진하는 등 경세와 이재에 뛰어 났다. 특히 뛰어난 후손에게 文章畓과 文章劍 玉笛 등 가보를 물려주는 제도를 마련하여 학문에 힘쓰게 하니, 과환과 학문이 이어지게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義城 金氏 (청계공파) 系圖
璡-克一-澈-是榲-邦烈-呂重-之鐸 (임하 천전)
-泰重-聖鐸-樂行
-邦杰 (임동 지례)
-女 趙靖
-守一-涌-是柱-薰-學基-世鉀-用河-始弘-虎運 (임하 천전)
-是楗-임-泰基-世欽
-履基-昌錫
-益基-世鎬
-是楨-烋
-女 黃汝一
-女 柳城-復起
-明一-淪-是檄-黯-學培 (임하 신덕)
-誠一-潗-是樞-煃-世基 -以鈺-淑濂-柱國-光燦-宗壽-鎭華-興洛
-以鏡-夢海-柱勳-驥燦
-以鋿-夢渭-柱亢-九燦-尙壽-鎭國-鴻洛
-是權 -구-啓基-以鍵-友濂-柱震-龍燦-泰壽-鎭洛-達淵
-麟燦-恒壽-鎭國-龍洛
-柱碩-琮燦-驥壽-鎭右
-瑛燦-平壽-鎭懿
-浤 - 是태-수-年基-以鍍-應濂 (서후 검제)
-女 金延祖
-女 權泰一
-女 金榮祖
-復一-潪-是振 (예천 구계)
-是桶-賓
-女 李逢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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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전에 계거한 장자 藥峰 金克一(1522~1585)은 명종때 문과에 급제, 內資寺正을 지냈는데 무남하여 아우 守一의 둘째 澈을 입양한다. 大朴 金澈은 임란창의로 공훈을 세우고 진사시에 합격한다.
大朴의 아들 瓢隱 金是榲(1598-1669)은 병자호란 후 陶淵에 은거하여 臥龍草堂을 짓고 崇禎處士를 자처하였는데, 아들 8형제를 두어 후손이 매우 번창하게 된다.
이중 넷째 지촌 김방걸(1623-1695)은 1660년 문과에 급제하여 弘文館 修撰으로 있을 때 服制문제를 거론한 '己巳疏'를 올려 尤庵 宋時烈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承旨. 大司成. 大司諫등을 지냈으나 西人이 집권하게 되자, 宋時烈을 탄핵했던 죄로 전라도 동복으로 귀양 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표은의 증손자 제산 金聖鐸(1684-1747)은 1737년 스승 李玄逸의 억울함을 아뢰는 伸寃疏를 올린 일로 인하여 제주도 旌義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전라도 光陽으로 옮겨져 배소에서 죽었다.
제산의 아들 구사당 金樂行은 鄕試에 합격했으나, 아버지가 귀양가게 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귀양지로 따라가 10여 년간 모신 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효자로 이름이 있었다.
그 외 약봉의 후손에서 적암 김태중, 와계 김성흠, 수산 김병종 등 과환과 문학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약봉의 후손은 천전, 지례, 구수, 오대 등지에 계거한다. 포항공대를 설립한 세계적 물리학자 김호길 박사,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형제도 지촌의 후예로 지례마을 출신이다.
청계의 차자 龜峰 金守一(1528~1583)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일직 구미에 거주하던 만석장자 조효종의 사위가 되는데, 조효종이 무남하여 처향따라 일직 구미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임하 천전으로 환거한다.
아들 雲川 金涌(1557-1620)은 퇴계의 손서가 되고 1590년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을 규합하여 안동수성장이 되고, 이어 의주 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는데 그 때의 일기『雲川扈從日記』는 보물 484호로 지정되어 있다. 1598년 領議政 柳成龍이 削職되자 함께 배척을 받아 散官. 善山府使 등 外職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 太常寺正으로 編修官이 되어 '宣祖實錄' 修撰에 참여했다.
귀봉의 후손에서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는 아들 雲川 金涌을 비롯 손자 開湖 金是柱(1575-1656)가 병조좌랑에, 5대손 七灘 金世欽(1649-1720)이 교리에, 月灘 金昌錫(1652-1720)이 정언에, 龜洲 金世鎬(1652-1722)가 병조정랑에 올랐는데, 특히 숙종때 활약한 이들 셋 종형제(김세흠,김창석,김세호)는 의성 김씨 3학사로 불린다.
龜峰의 증손 경와 金烋는 栢巖 金玏의 외손자로 162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海東文獻錄』을 편찬하여 당시까지 발간된 문헌을 고찰할 수 있는 자료가 되게 했다.
백하 金大洛, 일송 金東三은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 李始榮. 李東寧 등과 耕學社를 조직했고, 李儁. 呂準 등과는 扶民團을 결성 하였다. 일송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臨政 노동국 총판이 되기도 하고, 또 여러 애국단체들의 통합체인 統義府를 조직, 총장이 되었다. 1925년 正義府를 조직, 행정위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1929년 日警에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고 麻浦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귀봉의 후손은 천전, 임하 추월, 서후 태장, 길안 길곡 등지에 산거한다.
청계의 장녀는 전주 류씨 柳城(1533-1560)에게 출가하여 영주 迂川에서 친정따라 무실에 정착하였으나, 남편이 25세에 요절하자, 3년후 부군을 따라 단식하여 자결하니 정려가 내려진다. 청계는 고아가 된 외손자 형제를 키워 숲당 상류 임동면 무실 일대에 터전을 마련하여 주니, 오늘날 무실 류씨 정착의 기반을 만들었다. 임동면 일대의 무실 류씨들은 모두 청계의 외손이 된다.
청계의 3자 雲巖 金明一(1534~1570)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임하 신덕으로 분가하여 37세에 요절한다. 운암의 고손자 拙巖 金學逵, 錦翁 金學培 형제가 갈암 이현일, 목재 홍여하와 교류하는 등 이름이 있었다.
청계의 4자 鶴峰 金誠一(1538~1593)은 西厓 柳成龍, 月川 趙穆과 함께 溪門領袖로 退溪 李滉의 道統을 이어받은 嫡傳이다. 일찍이 文科에 급제하여 湖堂에 뽑히기도 했고 大司成, 副提學등에 오르기도 했으며 日本通信副使로서는 王命을 받든 신하로서 체모와 언행이 당당하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학봉은 안동 권씨 권덕황의 사위가 되어 처향인 검제로 이거하여 정착하게 되고 그 후손은 검제를 비롯 봉화 법전, 소천 등지에 산거한다.
학봉의 후손에서 문과에 급제한 이는 아들 시권을 비롯 6대손 응렴, 8대손 기찬, 10대손 진형, 진우, 진의, 11대손 홍락, 용락, 달연 등이 있다.
와룡 가구에 세거하는 안동 권씨 별장공파의 현조 藏谷 權泰一(형조 참판)과 봉화 오록에 세거하는 풍산 김씨 현조 忘窩 金榮祖(이조 참판)는 학봉의 사위가 되고, 망와의 아우 廣麓 金延祖는 학봉의 손서가 되니, 부인들 입장에서는 친가로는 숙질간이지만 시댁에서는 동서간이 되는 묘한 혼인관계라고 보여진다.
14대까지 이어져 온 학봉 종가 胄孫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 金潗 (1558~1631) : 애경당, 세마, 정묘호란 백미 100석 의병활동희사
· 是樞 (1580~1640) : 단곡, 풍뢰헌 당호 게첨, 1621 청참 이이첨소
소수 정묘호란―안동의병장, 병자호란―안동유진장
· 煃 (1602~1685) : 여사헌 건립, 후학양성, 학봉집 발간, 신도비 건립
· 世基 (1622~1686) : 변곡 권창업 문인, 여사헌 면학
· 以鈺 (1646~1683) : 목재 홍여하, 존재 이휘일, 갈암 이현일의 문인
· 淑濂 (1689~1765) : 字 師善
· 柱國 (1710~1771) : 밀암 이재의 손서, 퇴계학 정수수학
· 光燦 (1736~1765) : 大山 이상정의 문인
· 宗壽 (1761~1805) : 이상정의 문인, 생원시, 목사, 형조좌랑, 서예조예
· 鎭華 (1793~1850) : 청송부사, 원주판관, 능주목사, 통정대부 당상관
· 興洛 (1827~1899) : 西山, 嶺南學脈의 儒宗, 建國勳章 愛族章
· 應模 (1853~1929) : 통덕랑
· 龍煥 (1887~1946) : 여헌, 참봉, 파락호, 종가전답 18만평 처분 만주
독립군자금 희사, 내앞협동학교설립 지원, 서후
광동학교 설립, 종택대청서 서후공립보통학교
개교, 獨立運動家, 建國勳章 愛族章
· 時寅 (1917~2008) : 號 소운, 지례출생, 1945 양자입적, 학봉종가 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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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싸운 지사.열사.의사는 단일성씨 중에서 의성 김씨가 가장 많다.
鶴峯의 11代 胄孫 西山 金興洛(1827-1899)은 韓末의 대학자로서 退溪學의 연원을 이은 당대의 儒宗이다. 나라에서 右副承旨 영해부사 등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후학양성에 전념하여 수많은 門人을 배출했다. 또 日帝의 침략에 항거하여 安東 甲午義兵, 乙未義兵, 丙申義兵을 총지휘한 애국지사였으니 뒷날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제자들 중에서도 독립유공훈장을 받은 이가 60여명이나 되었다.
일제 때 파락호로 소문난 西山의 손자 여헌 金龍煥(1887-1946)은 문중 전답 18만평을 노름으로 탕진한 것처럼 위장 처분하여 독립군 자금으로 보낸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게 되어 건국훈장을 받았다.
청계의 5자 남악 金復一(1541~1591)은 1570년 문과에 급제하여 창원부사, 사성, 풍기군수 등을 역임하고 처향인 예천 용문면 구계리로 이거하였다. 증손자 갈천 金賓(1621-1694)은 문과에 급제한 후 내외요직을 두루 거친 명신이다. 외직으로는 경주부사, 광주, 나주목사, 한성부 좌우윤을, 내직으로는 도승지, 예조참판을 비롯 4조의 참판을 지냈고 기로연에도 참여한 의성김씨의 대표적 관료이다.
청계의 차녀는 와룡 주촌에 세거하는 진성 이씨 慶流亭 李演의 손자 鶴川 李逢春에게 출가하였는데, 학천의 큰어머니가 의성 김씨 김예범의 딸이니, 학천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친가로 따지면 고모이나, 시댁으로 보면 시숙모 관계가 된다.
영남 남인의 핵심 중추 세력 의성 김씨 청계공파.... 비록 판서 벼슬 한자리도 못했지만 500년 세월 동안에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 지 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지 않는다”는 정신과 “선비 집안에는 3년에 한 번씩 금부도사가 체포영장을 가지고 찾아와야 한다”는 각오로 살아온 명문 강골 집안이다. 학봉과 운천, 지촌과 금옹, 제산과 서산, 일송과 백하는 모두 청계의 후예들로 입바른 선비, 지사형 인물들이다.
김시온(金是榲) 1598(선조 31, 무술) ~ 1669(현종 10, 기유)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의성(義城). 자는 이승(以承). 호는 표은(瓢隱). 극일(克一)의 손자. 진사 철(澈)의 자로 임하(臨河) 천전(川前)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행(才行)이 경상좌도(慶尙左道)에서 이름 높았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으며 비분강개하여 출세를 단념했다.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자처하며 길안(吉安) 도연(陶淵)에 와룡초당(臥龍草堂)을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힘쓰며 일생을 마쳤다.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경학(經學)․예학(禮學)에 두루 통달했으며, 인근 수령과 관찰사가 문학기덕(文學耆德)으로 조정에 천거했으나 응하지 않앗다. 증손 성탁(聖鐸)으로 인하여 그 절의가 알려져, 1735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으며, 길안(吉安) 도연서원(陶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표은집(瓢隱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김방걸(金邦杰) 1623(인조 1, 계해) ~ 1695(숙종 21, 을해)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사흥(士興). 호는 지촌(芝村). 극일(克一)의 증손. 숭정처사(崇禎處士) 시온(是榲)의 제4자.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었다. 1665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이듬해 옥구현감(沃溝縣監)에 임명되었다. 1675년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잠시 역임한 후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등을 지냈다. 1689년(숙종 15)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이해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간관(諫官)으로서 왕의 과오를 막지 못한 자책감에서 사직, 낙향하였다. 이듬해 승지(承旨)가 되었으며, 1692년 대사간(大司諫), 이듬해 대사성(大司成)․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1694년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참지(參知)에 있을 때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西人)에 득세하자 지난날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을 탄핵했던 죄목으로 인하여 전라도(全羅道) 동복현(同福縣)으로 귀양가서 이듬해 그 곳 배소(配所)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 :『芝村集』이 있다. ■참고문헌 : 肅宗實錄․國朝榜目․嶺南人物考
김성탁(金聖鐸) 1684(숙종 10, 갑자) ~ 1747(영조 23, 정묘)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霽山). 극일(克一)의 후손. 통덕랑(通德郞) 태중(泰重)의 자로 영양(英陽) 청기(靑杞)에서 태어났다. 김태중(金台重)․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의 문인으로 1711년(숙종 37) 진사시에 합격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유승현(柳升鉉)․권만(權萬) 등과 창의하여 토역문(討逆文)을 지어 각지 유문(儒門)에 보내 의병 가담을 적극 권하였다. 그 공로로 안핵사(按覈使)의 천거로 참봉이 되었으며, 감진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白)의 추천에 의하여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道)를 영조(英祖)에게 건의하였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737년 스승 이현일(李玄逸)의 억울함을 아뢰는 신원소(伸寃疏)를 올린 일로 인하여 제주도 정의(旌義)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전라도 광양(光陽)으로 옮겨져 배소에서 죽었다. 문장가로 알려졌으며,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임하(臨河) 금양서원(錦陽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제산집(霽山集)』(16권)이 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
김용(金涌) 1557(명종 12, 정사) ~ 1620(광해군 12, 경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수일(守一)의 장자.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로 등용되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역임 중 신병으로 사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으로 향군(鄕軍)을 일으켜 고장을 지키다가 그해 가을에 왕이 파천해 있는 의주(義州)로 올라가서 예문관의 검열(檢閱)․대교(待敎)․봉교(奉敎)를 역임했다. 환도 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간(司諫)․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며 과연 학봉(鶴峯)의 조카답다는 칭찬을 들었다. 1594년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인사를 처리함에 극히 공정했으며,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올라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했다. 1597년 정유왜란(丁酉倭亂)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독운어사(督運御史)를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으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모함을 받아 삭직당하자 함께 북인(北人)의 배척을 받고 선산부사(善山府使)․예천군수(醴泉郡守) 등 외직(外職)으로 전전하다가, 1609년(광해군 1) 태상시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수찬(修撰)에 참여하였다. 이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냈고, 1615년(광해 7)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이르러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하(臨河) 임호서원(臨湖書院 : 舊 德峯書院) 제향되고, 저서에 『운천집(雲川集)』․『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國朝人物考․國朝榜目․安東鄕土誌(宋志香)
김시주(金是柱) 1575(선조 8, 을해) ~ 1656(효종 7, 병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이립(而立). 호는 개호(開湖). 수일(守一)의 손자. 목사(牧使) 용(涌) 의 자. 1609년(광해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3년 중광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安東鄕土誌(宋志香)
김세흠(金世欽) 1649(인조 27, 기축) ~ 1720(숙종 46, 경자)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천계(天啓). 호는 칠탄(七灘). 수일(守一)의 후손. 태기(泰基)의 자. 이현일(李玄逸)의 문인.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7년(숙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사헌부지평 (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고, 1698년 홍문관교리(弘文館郊理)가 되어 붕당(朋黨)․기강(紀綱)․기근(飢饉) 등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1707년 다시 수찬(修撰)이 되어 상소가 지나쳐 장벌(杖罰)을 받아 죽게 된 이잠(李潛)의 구명을 간하다 삭탈관직되어 호남(湖南) 흥양(興陽)에 유배되었다가 배소(配所)를 진보(眞寶)로 옮겼다. 1712년 유배에서 풀린 후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와 독서로 여생을 마쳤다. ‘의성김씨 삼학사(義城金氏 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필법(筆法)도 뛰어났다. ■참고문헌 : 嶺南人物考․國朝榜目
김창석(金昌錫) 1652(효종 3, 임진) ~ 1720(숙종 46, 경자)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천여(天與). 호는 월탄(月灘)․ 몽선도객(夢仙道客). 용(涌)의 현손. 생원(生員) 이기(履基)의 자. 1687년(숙종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90년 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제원찰방(濟原察訪)을 거쳐, 1692년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전적(典籍)․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역임했다. 이 때는 당쟁으로 시국이 어지러운 때라 벼슬을 버리고 임하(臨河) 망천(輞川)에 은거하여 10여 년을 보냈다. 1707년 다시 관직에 나아가 전라도사(全羅都事)․충청도사(忠淸都事)․강원도사(江原都事)를 역임했다. 시문, 글씨, 그림이 모두 뛰어나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로 일컬어졌고, 특히 글씨는 장욱(長旭)․조송설(趙松雪)의 묘경(妙境)에 이르렀다고 하나 없어지고, 약간의 유고(遺稿)가 『장고세고(長皐世稿)』에 전한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義城金氏譜
김세호(金世鎬) 1652(효종 3, 임진) ~ 1722(경종 2, 임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경백(京伯). 호는 구주(龜洲). 수일(守一)의 후손. 익기(益基)의 자. 1681년(숙종 7) 생원시 합격하고, 1690년(숙종 16) 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 검열(藝文舘檢閱)․봉교(奉敎)․경상좌도암행어사(慶尙左道暗行御史)를 거쳐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했으며, 종형(從兄) 세흠(世欽)․창석(昌錫) 등과 동시에 이름을 날려 ‘의성 김씨 삼학사(義城金氏三學士)’로 칭해졌다. 경사(經史) 및 음양(陰陽)․복서(卜筮)에 정통했으며, 숙종이 경연 때 주역의 뜻을 묻자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는데 그가 정연하게 풀이했다. 문장은 격조가 높고 건실하여, 당대의 명사들이 모두 ‘금석문(金石文)의 일인(一人)’이라고 추중(推重)했다. 저서에 『장고세고(長皐世稿)』가 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김성일(金誠一) 1538(중종 33, 무술) ~ 1593(선조 26, 계사)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청계(靑溪) 진(璡)의 제4자. 임하(臨河) 천전(川前)에서 출생했다. 이황(李滉)의 문인. 1564년 진사시를 합격하고, 1567년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대교(待敎)․봉교(奉敎)를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 사육신(死六臣) 복관 상소를 올렸다. 1573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병조좌랑(兵曹佐郞)․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의 요직을 거치고, 157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7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1579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되어 시사(時事)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또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使)와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일본에 건너가 실정을 살피고 귀국했다. 이 때 일본 유학의 원조(元祖)인 등원성와(藤原惺窩)에게 퇴계학(退溪學)의 진수를 처음 가르쳤다. 귀국 후의 발언 때문에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파직되었으나, 왜란 초 경상도 일대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경상도초유사(慶尙道招諭使)에 임명되어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의 의병 활동을 도왔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미를 모집하기도 하는 등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고제(高弟)로 정치적으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다. 저서에 『해사록(海槎錄)』『상례고증(喪禮考證)』『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등을 남겼고, 후손들에 의하여 문집 『학봉집』이 간행되었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과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었다. 중년(中年)에 처향(妻鄕)을 따라 서후(西後) 금계(金溪)로 이거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海東名臣錄․安東鄕校誌․陶山及門諸賢錄
김시추(金是樞) 1580(선조 13, 경진) ~ 1640(인조 18, 경진)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의성(義城). 자는 자첨(子瞻). 호는 단곡(端谷). 성일(誠一)의 손자. 집(潗)의 자.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의 문인. 1607(선조 40)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1년(광해군 13) 영남 유생들이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을 극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올릴 때 소두(疏頭)로 추대되었다. 1524년 유일(遺逸)로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으로 천거되었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활약하였으며, 1630년에는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을 역임하고, 병자호란 때는 유진장(留鎭將)으로 활약하였다. 문집에 『단곡집(端谷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안동금계마을(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김빈(金빈:賓+灬) 1621(광해군 13, 신유) ~ 1694(숙종 20, 갑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빈여(賓如). 호는 갈천(葛川). 복일(復一)의 증손자. 시진(是桭)의 자로 숙부 시통(是桶)에게 출계. 김응조(金應祖)의 문인. 1657년(효종 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문경현감(聞慶縣監)등을 역임했다. 이어 병조좌랑(兵曹佐郞)․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을 역임했다. 1676년 밀양부사(密陽府使)․경주부윤(慶州府尹)을 제수받고, 1680년 승정원좌․우부승지(承政院左右副承旨)를 역임한 후 귀향하여, 8년간을 향리에 있었다. 뒤에 다시 관직에 나가 남원부사(南原府使)․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내며, 1691년에는 기로연(耆老宴)에 참여했다. 이어 도승지(都承旨)․한성부윤(漢城府尹)․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하다가 당쟁이 극심하여 체직(遞職) 귀향했다. 항상 공손하고 청렴했으며 검소하면서도 어려운 일가를 도움에는 아낌이 없었고, 늘 주자서(朱子書)를 즐겨 읽었다. 만년에 낙향하여 예천(醴泉) 갈평(葛坪)에 정사(精舍)를 지어 거쳐하면서 스스로 갈천산인(葛川山人)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醴泉郡誌․安東鄕土誌(宋志香)
<출처>http://cafe.daum.net/youngjumoonhoa 영주문화유산해설사 쉼터 / 글쓴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