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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용하는 예화들은 반드시 설명을 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지나치게 훌륭하거나 현명하게 보이려고 애는 것을 피해야 한다. 따라야 할 규칙은 다음과 같다. 예화는 설교자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설명해야 한다. - 해돈 로빈슨
“강단에 여러분 자신을 끌어들이라”
설교가 초연한, 권위 있는 강의였던 시절은 가버렸다. 오늘날에는 비인격적인 설교자라는 말 자체가 거의 모순적인 말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사람들은 인격적인 설교자- 약점이 있고 자신을 드러내는- 를 기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내 설교에 대한 의견을 말할 때, 설교의 논리나 구조, 또는 설득력- 내가 각각의 요소들을 포함시키려고 애씀에도 불구하고- 에 대해서는 드물게 언급한다. 보다 전형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 “그 메시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목사님의 약점이었습니다. 목사님은 정말로 제게 목사님을 이해시키셨습니다. 목사님은 우리로 하여금 목사님을 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오늘날의 청중들은 설교자가 인격적이고 매력적이기를 기대한다. 이것은 설교자가 사람들의 개인적인 필요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 아니라 설교자의 삶의 체험에서 뽑은 예화들을 사용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는 내용인 동시에 설교를 판단하는 척도인 것이다. 강단에 여러분 자신을 끌어들이는 데에는 특별한 기술이 요구된다. 그렇게 하는데 잠재적인 위험이 따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몇 가지 함정들과 그것들을 피하는 방법이 있다.
@개인적인 예화에 따르는 위험 나는 얼마 전에 한 교회에 앉아 한 설교자가 사탄의 책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었다.“여러분은 보통 아침 여섯 시쯤 일어나 여덟시쯤 출근하십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주일 날 아홉시 반까지 교회에 가시면 됩니다. 한 시간 반쯤의 시간이 여분으로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이 잘못 되어갑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 점을 개인적으로 표현했다.“오늘 아침 아내와 저는 끔찍스러운 말다툼을 벌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아직 화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오늘 낮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스케줄의 와해와 사탄의 영향력에 대한 그의 논점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설교자와 그의 아내가 십 라운드의 싸움 중 삼 라운드를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들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개인적인 설교를 원하는 청중들조차 그 정도까지 개인적인 설교를 원하는 청중들조차 그 정도까지 개인적인 설교에 대해서는 잘 반응하지 않았던 것이다. 만일 그가“지난 주일 날 우리는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우리는 주일날 오후에야 비로소 화해했습니다.”라고 말했다면, 회중이 그 예화를 높이 평가하고 유익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싸움 후에 승리가 임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러분이 지고 있는 싸움을 구경하기를 특별히 원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우리가 완전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어떤 개인적인 예화들은 설교자와 청중들 간의 미묘한 관계를 압도한다. 일반적인 법칙은, 성경적인 해결책에 따라 상황을 해결해오지 않았다면, 그것이 예화로 사용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곧 이 문제를 해결할 겁니다”라고 단순히 말하는 것은 여러분의 논점을 부각시켜 주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문제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해결되지 않은 상황을 가지고 청중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어수선하게 만드는 것이 개인적인 예화를 사용하는 데 따르는 한 가지 위험이다. 그러나 그 밖의 위험들도 있다.
@부적절한 자기 노출 여러 수준의 자기 노출이 있다. 어떤 관계에 있어서든 기본적인 요인 중 하나는 얼만큼 자신을 드러내야 하는가를 아는 것이다. 친구들이 신뢰를 쌓아 왔을 때, 그들의 자기 계시는 더 깊어질 수 있다. 그러나 물의 깊이를 알아보지도 않고 수영장에 뛰어드는 것은 바보 밖에 없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배우자가 여러분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그녀에게 사실상 모든 것을 말해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래 다양한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영적 성숙도 또한 다양한 회중은 그 정도 수준의 계시를 감당할 수 없다. 열 단계의 자기 노출이 있다고 상상해보자. 대부분의 회중들은 1단계, 2단계 또는 어쩌면 3단계까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런 단계에서는 여러분이 정직하고 솔직하다는 것을 건전한 방법으로 알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여러분은 모든 세부 사항을 밝히지 않을 수 있기에 충분한 좋은 감식력과 감각, 그리고 분별력을 소유해야 한다. 정욕의 문제에 대해 설교하던 한 목사가 이렇게 고백했다.“저는 성적인 유혹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도 여자들에게 정욕을 품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상, 저는 오늘 아침 여기 서서 여러분을 바라보는 중에도 여러분 중 누군가에게 정욕을 품었습니다.” 그 말은 정직한 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설교의 효과를 파괴했다. 그가 첫 번째 한 말로도 충분했을 것이다.“저는 성적인 욕구의 힘을 알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는 바로 그 순간 청중에게 그 사실을 개인화함으로써 철저하게 청중을 잃었다. 모든 사람들은 정욕의 힘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이 무엇인지를 숙고하는 대신에 그 목사가 누구를 바라보고 있었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던 것이다.‘저 여잔가? 난가?’그의 논점의 효과는 청중들의 반응에 의해 여지없이 파괴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목사의 자기 노출이 과거의 사건일 경우에 더 쉽게 그것을 다룰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었다.“말씀드리기가 부끄럽지만, 과거에 하나님 앞에서 기도를 드릴 때조차 비도덕적인 생각들이 제 마음을 지배했던 대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가 정욕과 씨름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것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어떤 것이든 간에 해결되지 않은 개인적인 갈등을 제시하는 것은 사람들의 주의를 그들 자신의 상황보다는 여러분, 즉 설교자에게로 집중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여러분이 상담자에게 여러분의 갈등을 이야기할 때, 단지 상담자로 하여금“당신에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아침 제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말씀드릴 때까지 기다리십시오.”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될 경우에 여러분은 상담자의 문제만을 떠맡은 채로 스스로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위안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그렇게 한다면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제공되었다는 인식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그 화살은 한 바퀴 돌아와 박힌다. 설교자가 스스로의 치료를 위해 청중을 사용한 것이다. 이것은 설교자의 삶의 모든 것이 순수하고, 현명하고, 성경적인 결론에 이른다는 의미는 아니다. 지상에서의 삶이 언제나 성공적이고 행복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예화를 이야기하는 설교자의 과업은 한 가지 요점만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이런 내용을 전달한다.“저도 그런 상황에 처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상아탑 안에만 살고 있지 않습니다. 제 아이들은 동정녀에게서 탄생되지 않습니다. 제가 시도한 모든 것이 영적인 성공을 초래한 것은 아닙니다.”
@감정의 영향 하에 빠진다. 개인적인 설교에 따르는 또 한 가지 위험은 여러분의 현재의 감정적인 상태가 여러분의 설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교회를 방문해서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동안, 나는 그가 사람들에게 성이 나있음을 느꼈다. 그의 목소리는 분노에 젖어 있었다. 그가 말한 예화가 모두 부정적이었다. 그는 사랑하지 않고, 섬기지 않고,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험담하고 비방하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후에 나는 그 교회의 지도자인 한 친구에게“목사와 당회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나?”라고 물었다. 그는 “그래”라고 대답했다.“나는 당회가 목사에게 떠나달라고 말할 것이라고 생각하네.”그 목사는 강단에서 자기 감정을 쏟아 놓았다. 그는 예화들을 통해서 자기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경험한 것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편화시켰다. 그는 상처를 입고 있었다. 그는 앞에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이 설교에 그대로 나타난 것이다. 분노가 설교자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유일한 감정은 아니다. 내가 가장 자주 느끼는 것은 피로감이다. 나는 내가 피로감을 알 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1. 청중의 반응에 대한 나의 인식이 왜곡될 것이다. 나의 안테나가 잘못된 신호들을 포착하게 될 것이다. 피로할 때, 나는 더 쉽게 사람들이 흥미가 없고, 적대적이고, 주의가 산만하다고 느끼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나 자신의 감정을 그들의 감정으로 해석하게 된다. 나는 그 해석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법을 배워왔다.
2. 나는 변명하고 싶어질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피로할 때“어제 늦께까지 잠을 자지 못했습니다. 아내가 아파서 하고 싶었던 만큼 준비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만일 설교자로서 지쳐 있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그 사실을 발견하게 하라. 그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말라. 만일 여러분의 목구멍이 간질간질하다면, 그들에게 그것을 결정하게 하라. 그들에게 신호를 주지 말라. 여러분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변명하고 싶어한다. 회중에게 여러분을 동정해 줄 것을 요청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여러분을 동정하고 있는 회중은 설득을 당할 수 없다. 그들은 메시지보다 전달자(메신저)에 관해 더 생각하게 될 것이다.
3. 나는 열정을 잃게 될 것이다. 나는 활기 있게 강단에 서는 대신에 보다 수동적인 경향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그 결과로, 내 설교는 김이 빠지게 될 것이다. 나는 강단에 서기 전에 사람들이 도움을 받기 위해 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강단에 서게 될 때, 나의 할 일은 그들을 돕는 것이다. 설교는 계속 되어야 한다. 그것은 예배가 시작될 때, 회중이 성가대가 찬양하고, 올겐 연주자가 연주를 하고, 설교자가 설교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교회에 나온다. 그들은 우리에게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를 기대한다. 때때로 우리의 최상의 상태는 우리의 가능한 상태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께서 나머지 일을 하시도록 그 분을 신뢰해야 한다. 여러분은 마음이 산란할 때, 설교하는 동안 울고 싶은 경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무거운 짐에 눌려 있는 목사는 눈물을 흘릴 수 있다. 그리고 그의 감정을 이해할 경우에 회중이 그 감정을 잘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 자주 우는 설교자는 자신의 영향력을 희생시키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여러분이 깊은 감정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지만, 그와 동시에 여러분의 자제력을 보고 싶어한다. 만일 여러분이 화를 내는 중이든 아니면 눈물을 흘리는 중이든 간에 너무 자주 감정을 발산한다면, 여러분의 사역이 피해를 입게 될 것이다. 공적 연설의 기본 원칙은 능력 있는 연사는 자신과 청중에 대한 좋은 태도를 가지고 좋은 감정적 상태를 유지하는, 능력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목사들에게도 해당된다.
@유머의 능력 강단에서 웃을 수 있는 설교자는 엄청난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유머는 위험할 수 도 있다. 찰스 스윈돌 목사의 매력적인 요소 중 하나는 그가 설교 중에 고개를 제기고 웃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 그의 타고난 휼륭한 유머- 을 강단에 끌어들인다. 사람들이 스윈돌 목사의 스타일에 관해서 가장 많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의 웃음이다. 사람들은 그가 그 체험을 즐기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 역시도 그 체험을 즐기게 된다. 유머의 이득 한 가지를 더 들어보자. 회중들의 감정을 사로잡는 것은 힘드는 일이지만, 일단이지만, 일단 여러분이 어떤 감정(유머, 긴장감, 슬픔)을 사로잡는다면, 다른 감정들을 포함시키는 것은 비교적 쉬운 일이다. 일단 웃은 사람들은 그 후에 슬픔을 느끼기가 더 쉽다. 또한 슬픔을 느낀 사람들은 웃기가 더 쉬울 것이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들을 보면, 그는 웃음을 도입함으로써 긴장감을 증가시키고자 하였다. 히치콕은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린 다음에 긴장의 나사를 더 타이트하게 조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머는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 수도 있다. 어떤 유머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든다. 그 유머가 재미있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린다고 할지라도, 설교자는 잠재의식의 차원에서 다소 몰인정하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그럴 경우에 그 유머는 설교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자신을 희생하는 유머는 너무 자주 사용되지만 않는다면, 사람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을 유머의 대상을 삼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들이 이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아주 심각한거야. 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지나치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아.”
@전환점 예화들의 위험 개인적인 예화들 가운데 내재하는 또 다른 유혹은 너무 자주 여러분의 영적인 전환점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이런 말들을 듣게 되는가? 내가 군에 있을 때, 어머니 무릎에 앉아 있을 때, 수술을 받았을 때........ 여기서 위험한 것은 여러분의 청중이 이미 들은 적이 있는 이야기를 촌스럽게 다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위험은 현실적으로 삶이 하나의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설교가 위기에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극적인 전환점 예화들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때마다 항상 전격적인 영향력과 함께 역사하신다는 인상을 주게 된다. 그럴 경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갖는 체험은 세속적이고, 점강적이며 매력이 없고, 진실이 아닌 것처럼 여기게 된다. 그 결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일련의 영적 전환점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예상하게 된다. 그러나 삶의 진정한 기술은 평범한 것들을 성실하게 다루는 데 있다는 것이다.
@교묘한 자기 자랑의 위험 강단에서 의식적으로 자기를 자랑하는 목사들은 많지 않다. 자신의 이야기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영웅으로 묘사하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개인적인 사건들을 회상하는 몇 가지 방법이 교묘한 자기 자랑의 형태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청중에게 끼치는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는다. 때로는 설교자가“비신자와 가진 대화”에 관해서 이야기함으로써 그런 일이 이루어진다. 그 설교자는 비신자가 어떤 질문을 했을 때, 현명한 대답으로 그를 능가했다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실제 대화와 설교 사이에 그 이야기가 몇 번에 걸쳐 다듬어질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설교자가 자기가 읽은 책이나 만만 중요 인사들의 이름을 과시하는 경우도 있다. 설교자가 무심코 과장하는 경우도 있다. 마이너 리그 야구팀을 위한 예배를 인도했다고 해서, 내가 정말로“우리나라의 운동 선수들을 위한 영적인 상담자”인 것은 아니다. 몇 해 전에 나는 한 설교에서 우리 가족이 가정 예배를 어떻게 다뤘는지를 묘사했다. 내 아들, 토리(Torry)가 그 자리에 나와 함께 있었다. 그런데 집으로 오는 차 안에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그 설교에 관해서 한 가지 여쭤 봐도 돼요?” “물론이지.” 나는 어린아이에 불과한 아들이 설교를 듣고 있었다는데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아들이 이렇게 말했다.“설교하실 때, 실제로 그렇지 않은 사실을 말씀하셔도 되는건가요?”나는 더 많은 정보를 얻기 위해서 부드럽게 물어보았다. “아버지, 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한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한 두 번 밖에 그렇게 하지를 않았어요. 아버지는 우리가 매주 그렇게 한 것처럼 들리게 말씀하셨어요.” 그는 무례한 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지나치게 좋게 보이고 지나치게 현명하게 들리기 위해 애썼던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은 어떤 것을 말할 때 도덕적으로 면목을 잃게 된다. 나는 의식적으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단지 몬지를 완전히 이해시키고자 시도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이 제가 한 일입니다(한번)”로부터 “저는 그 일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정기적으로)”로 발전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정기적으로 설교를 하는 모든 사람은 얼마나 빨리 그 선을 넘을 수 있는가를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의도적으로가 아니라 암암리에 회중에게 거짓말을 했다. 진실을 알고 있는 누군가(이 경우에는 토리)가 회중 가운데 앉아있을 때, 그 설교는 거룩한 허구가 되고 만다. 우리는 강단 안팍에서 거짓 증거를 하지 말아야 한다. 내 예화들은 설명을 해야 한다. 나는 나 자신을 지나치게 좋게 보이거나 현명하게 들리게 만드는 다른 의제들을 피해야 한다. 사랑은 설교 상의 허다한 죄를 덮어준다. 그러나 일단 사람들이 여러분의 정직함에 대한 확신을 잃게 된다면, 여러분의 사역은 호된 손상을 입게 된다. 사람들은 잘 모르는 설교자의 설교를 들을 때, 이렇게 묻는 경향이 있다.‘그가 말하는 것이 진실일까?’그러나 더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알면 알수록, 그들은 더 이렇게 묻게 된다. ‘그가 자기가 말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을까? 그 예화 속에 인물이 내가 아는 그 사람일까?’ 우리 자신을 거룩하거나 현명하게 만들 때마다, 다음과 같은 어려운 질문으로 우리의 동기를 시험해 보는 것이 좋다.‘나는 왜 이 예화를 사용하고 있는가? 어떤 요점을 설명하기 위해서인가? 아니면 나의 입장을 높이기 위해서인가? 사람들과 동일시하기 위해서인가?’이러한 이유 중 어떤 것도 타당하고 필수적인 이유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자기 자랑은 대개 역효과를 초래한다. 회중의 칭찬을 받고자 노력하는 것이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싫어하게 만들 수도 있다. 사람들은 우리가 그들을 감동시키려고 애쓰고 있는지, 지배하려고 애쓰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 자신을 자기들보다 높이려고 애쓰고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우리가 따라야 할 원칙은 다음과 같다: 예화는 설교자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설명해야 한다.
@개인적인 체험의 능력 예화의 목적이 즉각적인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종종 있다. 오히려 그 목적은 이것이 여러분과 회중 모두가 알 수 있는 보편적인 인간적 갈등이라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한다.“그것이 인간의 상태입니다. 저도 겪어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딜레마를 해결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러분이 그들로부터 동떨어진 삶을 근거로 그들에게 설교하고 있지 않음을 알게 하고 있다. 그런 경우, 그 예화는 조심스럽게 표현되어야 한다. 나는 한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했다.“만일 여러분이 일반적으로 죄에 대해서 생각하고 계시다면, 그것은 국채가 얼마인지를 상상하려고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이해를 초월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죄로 가득 차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의 죄에 초점을 맞추고 죄가 어떤 것인가를 실제로 살펴보는 것입니다.” “제 아버지가 살아 계셨던 몇 해 전에, 아버지에게는 끊임없는 보살핌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동안 달라스에 있는 집에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그는 정신이 혼미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끊임없이 파티오(스페인식 집의 안뜰-역자주)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돌아다니다 다시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하기를 되풀이 했습니다. 십 분 또는 십오분 동안 이삼십번을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마침내 저는‘아버지, 공기 조절이 제대로 안됩니다. 안에 계시든가 밖에 계시든가 하실 수 없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계속 그렇게 했습니다. 저는 아버지에게 다가가서 어깨를 움켜잡고 눈을 쳐다보면서,‘아버지,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안에 계시든가 밖에 계시든가 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계속 들어왔다가 나갔다 할 뿐이었습니다.” “저는 어린 아이에게 하듯이 팔을 뒤로 빼어 찰싹 그를 때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저를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그를 때렸습니다. 그 때 저는 그를 죽일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정말로 화가 났던 것입니다.” “제게 생명을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저를 키우고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순간 화가 나서 그를 때렸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 거하고 있는 죄의 능력이 어떤 것입니까?” 나는 계속해서 죄의 실재와 죄악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나는 그 예화를 조심스럽게 다루었다. 회중은 그 예화가 문제를 소개하는 것인지 아니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두 가지 모두인지를 알 필요가 있다. 그 이야기를 한 그룹과 함께 나눈 후에, 한 남자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비판받기 쉽게 만들었다고- 최소한 나 자신을 위기에 처하게 만든다는 의미에서- 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나 자신을 드러내는 예화였지만, 나는 또한 그 예화가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넘치는 은혜를 설명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 때 또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어린 딸아이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그 아이는 울고, 울고ㅡ 또 웁니다. 걸음마를 시켜주고, 무등을 태워주고, 노래를 불러주지만 계속 울어제끼는 겁니다. 마침내 저는 그 아이를 벽에 던져버리고 싶어하는 제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저는 절대로 저의 분노를 인정하지 않았을 겁니다.”그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새롭게 이해하고 평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개인적인 예화는 그로 하여금 자기가 체험한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삶에 적용하도록 해주었던 것입니다. 그 밖의 경우에는 예화가 청중으로 하여금 성경의 진리를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개인적인 예화는 효력을 더해 줄 수 있다. 조엘 에리즈네스 목사는 딸과 함께 외출한 추억을 말한 다음에 사람들을 계시록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 끌어들였다. “첫째 딸이 일곱 살이었을 때, 우리는 어느 날 오후를 쓰레기 버리는 곳에서 보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쓰레기를 내버리는 것이 아니라 버려진 물건들을 관찰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 올즈모빌 차를 쓰레기더미 옆에 세우고 딸아이를 차 지붕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저는 종이와 연필을 손에 들고, 딸에게 확인할 수 있는 물건 이름을 이야기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아기 인형, 자전거, 장난감 냉장고와 난로, 라디오와 텔레비전 따위- 어린 소녀가 꿈꾸는 모든 것,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 도 있었습니다.”
“차를 몰고 다시 시내로 들어오던 중에, 우리는 우연히 이중 트레일러 트럭 옆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각 트레일러에는 다섯 대의 고철이 되어 한데 묶여 있었습니다. 그 차들을 뒤집어 보았다면, 아마도 디트로이트에서 만든 차임으로 보여주는 상표가 붙어있었을 겁니다. 그 차들은 갓 만든 차들이 아니었습니다. 열대의 부서진 차의 모습은 바로 그 순간 ‘사물’의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던 아버지와 딸에게 엄청난 객관적인 교훈을 주었습니다. 저는어깨를 기대고 있었던 딸에게 우리가 타고 가는 아름다운 델타 로얄도 결국 고철더미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줬던 일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틴과 저는 결코 그 날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것이 어느 날 쓰레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일깨워 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어느 도시의 쓰레기 버리는 곳에서, 우리의 주의를 끌고 우리의 삶을 지배했던 것들이 썩어가는 쓰레기가 쌓인 냄새나는 무더기에 섞여, 타오르는 불길 아래 연기를 내며 타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우리와 우리 자녀들의 마지막을 묘사해 주는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 모습은 또한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인간 역사의 붕괴를 묘사해주고 있습니다. 역사는 영원히 계속되도록 예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역사는- 의식하든 못하든 간에- 하나님의 두렵고도 끔찍한 심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시록 17장과 18장 만큼 이 끔찍스러우 종국을 분명하게 묘사해주는 성경 구절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미국인들만큼 그 메시지를 들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도 거의 없습니다.” 성경을 기초로 설교하는 설교자들은 하나님께서 이야기를 좋아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다. 성경은 세계 최고의 이야기 책으로 선발되어 마땅하다. 성경의 이야기들과 비유들은 우리에게 죄와 믿음, 겁과 용기, 불신과 순종이 어떤 것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설교자들이 이야기하는 사람들로서 게리슨 케일러와 경쟁하도록 요청받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는“예를 들어”라는 표현의 효력을 이해해야 한다. 강단에서 막연한 이야기들만 늘어놓는 사람들은 만을 스쳐지나가면서도 아무 곳에도 착륙하지 않는 호버크크래트(고압 공기를 아래 쪽으로 분사하여 기체를 지상에 띄워서 나는 수륙 양용차-역자주)와 같다. 우리가 우연히 옳았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우리 청중들의 체험으로부터 초연한 채로 공중에 떠 있을 권리를 제공하지 않는다. 현실의 예화들은 우리에게 진리를 개인적으로-우리 자신들과 회중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물론 그것이 설교의 목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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