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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제록(경전연구회) 녹취7
스님들이 일상생활에서 많이 바쁘신 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공부하는 시간을 갖는 것. 이것 참 필요한 일인데 대다수의 스님들이 그렇지 못한 게 좀 안타깝죠. 우리가 늘 이야기 하듯이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대승적인 삶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내 정진, 내 발전을 위한 그런 정진을 한편으로 하면서 그러면서 사찰 운영도 하고, 전법활동도 하고 또 인연 닿는 대로 이리저리 소임도 살기도 하고 그렇게 살아야 그게 이상적인 승려 생활이 아닐까하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각 지방에서 먼 여기까지 이렇게 올라오셔서 공부하는 스님들이 많이 계셔서 저도 참 책임도 무겁게 느끼고, 또 감사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저도, 아시다시피 몸이 상당히 불편한데도 이렇게 스님들의 청에 응한 것은 부족한대로지만 내 소신, 내가 그동안 공부하고, 이 절집 안에 몸담고, 내 인생전체를 다 쏟아서 알고 깨우친 이 불법을 비록《임제록》이라는 경전을 통해 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나름의 불법을 스님들께 전해진다고 하는 그런 소신과 의무감으로 하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이렇게 동참하시고 또 먼데서 오시고 또 뜻 밖에 감동하시는 분들도 계셔서 아주 보람을 느낍니다. 오늘, 이어지는 강의는 석실행자의 이야기인데 제목을 “우물 속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바람직한 불교의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이것을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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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우물 속에 빠져버렸다
問 祇如石室行者가 踏碓忘却移脚은
문 지여석실행자 답대망각이각
向什麽處去오 師云 沒溺深泉이니라
향십마처거 사운 몰익심천
한 스님이 물었다. “저 석실 행자가 방아를 찧다가 다리 옮기는 것을 잊어버렸다하니 어느 곳으로 간 것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하였다. “깊은 우물 속에 빠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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問 祇如石室行者가 踏碓忘却移脚은
문 지여석실행자 답대망각이각
석실행자, 석실선도(善道)스님이라고 하는 분인데 이 분이 “답대망각이각(踏碓忘却移脚)이라”디딜방아를 찧다가, 그것은 계속 이렇게 밟아주고 놓아주고, 밟아주고 놓아줘야 방아가 찧어질 것 아닙니까? 그런데 발 옮기는 걸 잊어버린 거야. 발을 옮겨야 되는데 디뎠으면 내려주고, 내렸으면 다시 디뎌주고 이렇게 해야 되는데 그만 무심선정(無心禪定)에 든 거야. 그래서 그걸 잊어 버렸어.
向什麽處去오 師云 沒溺深泉이니라
향십마처거 사운 몰익심천
“향십마처거(向什麽處去)오” 그랬는데 그 분이 어디로 갔느냐? “몰익심천(沒溺深泉)이니라” “깊은 못에 빠져버렸다” 깊은 못이라고 하는 것은 무심경지에 빠졌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이 되기 전에는 온갖 잡다한 망상이 많은 때는 사실, 그런 것이 다 사라진 무심(無心)도 정말 얻기 어려운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무심이 최고의 경지는 아니다.
사람은 뭡니까? 이렇게 보고 듣고, 와!~ 그저 좋아하고 미워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는 이런 작용이 있는 이게 사람이야! 이것이 사람의 본 모습이라고. 상황에 따라서 끊임없이 이렇게 흘러가야 돼. “수처작주(隨處作主)”해야 된다고. 흘러가면서도 놓치지 않아야 되고, 또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이라고. 어디 머물면 안돼. 머물게 되어 있지 않다고! 그런데 대개 우리는 그 알량한 자기의 가치관과, 자기 욕심과, 자기 집착 때문에 또 머문다고! 머물면 병이 생기잖아요. 병이 생기고 고통이 생기는 거라. 끊임없이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무소주(無所住)라!’머물지 않게 되어 있는 것이 사람의 본모습이라 구요.
여기도 망상이 다 떨어진 무심경지에 도달했는데, 심천(深泉)에 빠지면 죽은 거지. 깊은 못에 빠졌으면 죽었잖아요. 죽은 거지. 죽은 목석과 같은 삶은 불교의 이상이 아니다 이거야. 동안상찰(同安常察)스님의 십현시(十玄詩)라고 하는 게 있죠. 십현담(十玄談)이라고도 하는데 우리 선시 중에 “증도가”“신심명” 그 다음에 지공화상의“대승찬”그 다음에 동안상찰스님의“십현시”이것은 빼어놓을 수 없는 아주 유명한 선시인데 거기에“막도무심운시도(莫道無心云是道)무심유격일중관(無心猶隔一重關)” “무심을 가지고 도라고 말하지 말라. 무심도 오히려 아직도 한 겹의 관문이 막혀있다.” 이런 글이 있어요.
여기의 임제 스님 법문하고 똑 같은데 심천(深川)에 빠진 것 까지는 좋지만 빠졌으면 다시 올라 와야죠. 물위로 올라와야 그게 정말 활발발한 그런 삶을 표현할 수가 있는데 무심이 된 것 까지는 좋은데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 자유인이 되어야 된다. 이런 것을 이 대목에서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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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모두가 착각이다
師乃云 但有來者하면 不虧欠伊하야 總識伊來處로라
사내운 단유래자 불휴흠이 총식이래처
若與麽來하면 恰似失却이요 不與麽來하면 無繩自縛이니
약여마래 흡사실각 불여마래 무승자박
一切時中에 莫亂斟酌하라 會與不會에 都來是錯이라
일체시중 막란짐작 회여불회 도래시착
分明與麽道하야 一任天下人貶剝하노라 久立珍重하라
분명여마도 일임천하인폄박 구립진중
임제 스님이 이어서 말씀하였다. “나에게 찾아오는 사람을 나는 조금도 잘못 보지 않는다. 그가 온 곳[견해. 공부의 수준]을 모두 안다. 만약 그와 같이[석실행자처럼 되어]온다면 마치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과 같고, 그와 같지 않게 온다면 그것은 밧줄도 없이 스스로를 묶은 것이다. 언제든지 함부로 이리저리 짐작하지 마라.‘안다, 모른다.’하는 것은 모두 착각이다. 나는 분명히 이와 같이 말하거니와, 천하 사람들이 헐뜯고 비방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 오래 서 있었으니 돌아가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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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乃云 但有來者하면 不虧欠伊하야 總識伊來處로라
사내운 단유래자 불휴흠이 총식이래처
스님이 말씀 하시기를, 어떤 사람이든지 다만 나에게 오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은‘휴흠(虧欠)’한 것이 없다. 모자람이 전혀 없다. 라고 본다 이거지. “총식이래처(總識伊來處)로라” 그들이 어디에서 왔나? 나는 안다. 어디에서 왔겠어요? 한곳에서 왔어. 누구든지 그 한 곳에서 온 거야. 뭐 사방팔방, 남쪽 동쪽 서쪽 할 것 없이 어디에서 왔던지 간에 한 곳에서 온 거야. 그걸 안다는 거지. 그 근본을 안다는 것입니다.
若與麽來하면 恰似失却이요 不與麽來하면 無繩自縛이니
약여마래 흡사실각 불여마래 무승자박
만약 그런 모습으로 여기서‘여마래(與麽來)’라고 하는 것은 저 앞에서 있었던 석실행자처럼 무심(無心), 무심의 어떤 모습으로 올 것 같으면 “흡사실각(恰似失却)”마치 실각 한 것과 같고, 이것은 “자기를 잃어버린 것과 같다” 그렇게 오지 아니할 것 같으면 “무승자박(無繩自縛)이니”이것은 또 흔들리고, 집착하면 결국은 노끈도 없는데, 밧줄도 없는데 저절로 속박되는 거와 같다. “무승자박(無繩自縛)” 이게 참 제일 큰 문제죠. 누가 묶어두지 않았잖아요? 묶어두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많이 속박되어 있습니다. 여기저기 끊임없이 속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천(深泉)에 빠진 것처럼 무심의 경지도 문제고 그렇다고 경계에 휘둘려서 끌려 다니고 쫓아다니는 것도 보통 문제가 아니다.
一切時中에 莫亂斟酌하라 會與不會에 都來是錯이라
일체시중 막란짐작 회여불회 도래시착
그러니까 그걸 뭐라고 할까요? 중도라고나 할까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것. 우리가 어디에도 머물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또 끊임없이 흘러 다녀도 곤란한 것이고 그 흐름과 머무는 것! 이것이 조화를 이루어야 되는 거죠. “일체시중(一切時中)에 막란짐작( 莫亂斟酌)하라” 그런데 대해서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자기 나름대로 어지럽게 짐작하지 말라. “회여불회(會與不會) 도래시착(都來是錯)이라” 안다 모른다하는 그런 알음알이 그것은 모두가 착각이고 그르친 것이다.
分明與麽道하야 一任天下人貶剝하노라 久立珍重하라
분명여마도 일임천하인폄박 구립진중
분명히 말하거니와 천하 사람들이 비난하는데‘폄박(貶剝)’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폄하해서 힐난하는 것. 긁어내리는 거죠. 비난하는데 일임하노라. 맡겨둔다 이거야. 나의 이러한 설법에 천하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 쌌든지 거기에 대해서 나는 관계치 않노라 하고 맡겨둔다 이런 말입니다. “구립진중(久立珍重)하라” 오래 서있었으니까 모두 편히 쉬어라. 한 단락이 끝이 난 내용입니다. 그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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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고봉정상과 네거리
上堂云 一人은 在孤峯頂上하야 無出身之路요
상당운 일인 재고봉정상 무출신지로
一人은 在十字街頭하야 亦無向背니 那箇在前이며
일인 재십자가두 역무향배 나개재전
那箇在後오 不作維摩詰하며 不作傅大士하노니 珍重하라
나개재후 부작유마힐 부작부대사 진중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한 사람은 고봉정상에 있어서 몸이 더 나아갈 길이 없고, 한 사람은 네거리에 있으면서 또한 앞뒤 어디든 갈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이 앞에 있고 어떤 사람이 뒤에 있는가[누가 더 나은가]? 유마힐도 되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말라. 편히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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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堂云 一人은 在孤峯頂上하야 無出身之路요
상당운 일인 재고봉정상 무출신지로
한사람은 고봉정상, 가장 높은 정상에 있고, 그래서 “무출신지로(無出身之路)요”어디에 나아갈 수가 없어. 한 걸음도 앞으로 내 디딜 수가 없다 이거지. 그런 정도로 뾰족한 봉우리에 있고, 이게 뭐겠습니까? 그야말로 전후제단(前後際斷)하고, 무심의 경지를 넘어서서 그야말로 은산철벽(銀山鐵壁)과 같은 그런 마음자세! 그것을 화두를 들고 있다. 라고 하면 파정이라고 하죠. 화두를 딱 잡고 있어서 거기에서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더 이상 나아가고 나아가서 더 이상 나아갈 데 없는 그야말로 칡넝쿨이 높은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 가다가 나무의 키가 다하고 칡은 계속 자라는데 더 이상 어떻게 부여잡을 때가 없는 그런 정도의 정신 상태! 그런 경우가 하나 있고.
一人은 在十字街頭하야 亦無向背니 那箇在前이며
일인 재십자가두 역무향배 나개재전
한 사람은 십자가두, 네거리에 있다 이거야. 정반대죠. 고봉정상과 십자가두는. “역무향배(亦無向背)니”여기도 또한 어디에 나아 갈수가 없다.‘향배(向背)’향하거나 등질 곳이 없다. 고봉정상에서도 무출신지로(無出身之路), 어디에 몸을 내놓을, 몸을 뺄 그런 길이 없고, 십자가두에서도 어디 나아갈 곳이 없어.‘무향배(無向背)’라고 하는 말이 그 말입니다. 또 역(亦)자가 그걸 표현해요. 향하거나 뒤로 물러 설 곳이 없다 그 말입니다.
那箇在後오 不作維摩詰하며 不作傅大士하노니 珍重하라
나개재후 부작유마힐 부작부대사 진중
이것은 무엇이 좋고 무엇이 못하냐? 이런 뜻이 예요.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못하냐? 그게 그거죠 뭐. 시내에 살면서도 산중에 사는 것 이상으로 문 닫고 아무 거래 없이 딱 거래 끊고 사는 것이나 저 깊은 산중에서 아무도 만나는 사람 없고 자기 혼자 사는 거나 역시 외롭기는 마찬가지야. 거래가 없기는 마찬가지야“부작유마힐(不作維摩詰)부작부대사(不作傅大士)진중(珍重)하라” 그랬어요. 유마힐은 거사로서 말하자면 유마거사의 법을 한마디로 표현할 때 ‘두구입 비아리’ 그렇게 말하죠. 입을 비아리성에서 막고 있었다. 그게 불이법문(不二法門)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문수보살이 “당신이 그럼 불이법문을 한번 해보시오!” 하니까 유마거사가 입을 딱 다물고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잖아요. 이것이 고봉정상이야! 그 다음에
여기 부대사의 법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부대사의 법 중에서 제일 유명한 게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라” 그런 말 있죠? “밤마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난다.”“욕식불거처(欲識佛居處)기좌진상수(起坐鎭相隨)라”부처 간 곳을 알고 싶은가? 지금 우리가 앉고 눕고 서고하는 여기에 항상 따라 다닌다. 늘 함께 하고 있다. 얼마나 편안하게 불교를 가르쳤습니까? 너무 쉽고 그리고 천지에 어디든지 다 널려있어 이것은! 나하고 같이 자고 항상 같이 일어나고 앉고 서고야 늘 하고 있으니까! 여기 유마힐은 어떻습니까? 불이법문을 이야기하는 것이나 부처를 이야기하는 것이나 결국은 같은 뜻인데 유마거사는 아무 말 한마디 표현도 없이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이거야. 정반대잖아요. 정반대의 입장이라! 그런데
임제 스님은 그 어느 것도 취할 바 아니다. 다 근사해! 아, 정말! 유마거사같이 입 딱 다물고 둘이 아닌 도리를 나타냈는데 얼마나 근사합니까? “불이법문(不二法門)!” 그래서 그것이 좋아서 절마다 불이문을 다 세워갖고 그 불이의 이치를 설명하잖아요. 불교 안에서 불이법문이라고 하는 것. 불이의 이치! 둘이 아닌 이치라는 것은 대단하거든요. 그렇게 숭상한다고요. 그러면 여기서 부대사가 말한 “야야포불면(夜夜抱佛眠)조조환공기(朝朝還共起)라” 그런 말 있죠? “밤마다 밤마다 부처를 안고 자고, 아침마다 아침마다 부처와 함께 일어난다.”참으로 쉽잖아요. 쉽고 편안한 가르침이라. 그런데 임제 스님은 이것도 저것도 마음에 안 들어. 다 부정하고 싶어. 치우치지 마라 이거지.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마라.” 그래서 여기서 유마힐도 짓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마라! 그렇게 했습니다. 더 이상의 깊은 뜻은 스님들의 몫입니다.
“진중(珍重)하라” 편히 쉬어라. 그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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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집안과 길거리
上堂云 有一人은 論劫在途中호대 不離家舍하고 有一人은
상당운 유일인 논겁재도중 불리가사 유일인
離家舍호대 不在途中하니 那箇合受人天供養고 便下座하다
이가사 부재도중 나개합수인천공양 편하좌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올라 말씀하셨다.
“한 사람은 영원히 길에 있으면서도 집을 떠나지 않고, 한 사람은 집을 떠나 있으나 길에도 있지 않다. 어느 쪽이 최상의 공양[人天供養]을 받을 만한가?” 하시고는 곧바로 법상에서 내려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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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堂云 有一人은 論劫在途中호대
상당운 유일인 논겁재도중
한 사람은‘논겁(論劫)’이라고 하는 말은 영원히, 겁이라고 하는 세월에 갈 때까지 길에 있어. 길에 있으면서 가사를 떠나지 않고 있어. 집을 떠나지 않고 길에 있다 이거야.
不離家舍하고 有一人은 離家舍호대 不在途中하니
불리가사 유일인은 이가사 부재도중
또 한 사람은 집을 떠나 있는데 “부재도중(不在途中)”길에 없어. 집을 떠나 있으면 길에 있어야 할 텐데, 저 앞에서는 도중(途中)에 있으면 집에 없어야 할 텐데, 도중에 있으면서 집에 있고, 집에 있으면서 도중에 있다 이거야. 문수와 보현을 이렇게 표현하잖습니까? 보현은 밖에 나가서 활동하는 사람의 대표적인 실천행을 표현한 것이고, 문수는 집안에서 지혜의 상징으로서 집안일을 담당하는 사람이죠. 우리가 세상사로 말할 것 같으면 문수는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어머니의 입장이고, 보현은 밖에서 돈벌어오는 아버지의 입장이라.
아버지가 돈 벌어 온다고 해서 집안 사정 돌아가는 것 모르면 안돼. 또 집안 살림만 한다고 해서 사업하는 것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서도 안 된다고. 그런 것은 바람직한 주부가 아니고 바람직한 바깥사람이 아니라 구요. 밖에서 열심히 활동을 하지마는 집안 사정을 잘 알아야 돼. 그러니까 우리가 앞에 나가서 교화활동 많이 하고, 사판으로서 아주 명사판으로서 생활한다하지마는 이치와 불교교리, 불법에 대해서 모르면 안 된다고. 이와 사를 겸해야 돼. 그 얘기입니다.
이판이라고 해서 경이나 보고 참선이나 하고, 절집 돌아가는 것 세상 돌아가는 것 아무것도 모르고, 집이 새는지 기왓장이 떨어지는지 담이 흐르는지 이것을 모르고 그리 사는 스님들 많아! 그래도 이건 맹꽁이야! 또 너무 사회만 밝아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든지 불교의 이치를 몰라도 이것도 맹꽁이고. 자기 본분을 망각한거지. 이것이 조화를 잘 이루기가 어려운데 조화를 이루어야 되는 거야. 그런 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떻습니까? 사실은 무식한 선사가 되어도 안 되고 소견이 꽉 막힌 강사가 되어도 안 되는 거지. 강사는 소견이 툭 트여야 되고 선사는 박식해야 돼요. 자고로 박식하지 아니한 선사는 아무도 없어. 또 소견 어두운 강사는 그건 강사로서 역사에 안 남아! 소견이 밝고서 강사가 되어야지. 소견이! 지견이 있고서 강사가 되어야 돼. 선사라고 해서 무식하면 그건 반쪽이야! 반쪽짜리야! 아무 쓸모없어요. 이것이 조화를 잘 이루어야 돼. 여기에 교훈이 아주 많은데 도중에 있지마는 가사를 떠나지 않고, 가사를 떠나있지마는 도중에도 있지 않다. 다 겸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那箇合受人天供養고 便下座하다
나개합수인천공양 편하좌
누가 합당히 인천의 공양을 받을 만 한가? 라고 던져 놓고 “편하좌(便下座)라” 그리고는 내려왔습니다. 이렇게 법상에서 내려올 줄 아는 그가 인천의 공양을 받을 만 하다. 뭐 굳이 주석을, 엉터리 주석을 달자면 그런 뜻입니다. 그 다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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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삼구(三句)
上堂에 僧問 如何是第一句오
상당 승문 여하시제일구
師云 三要印開朱點窄[側]하고 未容擬議主賓分이로다
사운 삼요인개주점 [측] 미용의의주빈분
問 如何是第二句오 師云 妙解豈容無著問이며
문 여하시제이구 사운 묘해기용무착문
漚和爭負截流機리오 問 如何是第三句오
구화쟁부절유기 문 여하시제삼구
師云 看取棚頭弄傀儡하라 抽牽都來裏有人이로다
사운 간취붕두농괴뢰 추견도래이유인
임제 스님이 법상에 오르자,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일구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삼요(三要)의 도장(印)을 찍었으나 붉은 글씨는 그 간격이 좁아서 숨어 있으니, 주객이 나누어지려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제이구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묘해(문수)가 어찌 무착선사의 물음을 용납하겠는가마는 방편상 어찌 뛰어난 근기(무착)를 저버릴 수 있으랴.” 그 스님이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제삼구입니까?”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무대 위에 꼭두각시 조종하는 것을 잘 보아라. 밀었다 당겼다 하는 것이 모두 그 속에 사람이 있어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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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구(三句)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건 임제록에서, 지금 하는 상당(上堂)은요, 전부 어려운 내용입니다. 전부 어려운 내용인데 그래도 어지간히 짐작은 가지요? 그 중에서도 이 삼구가 제일 난해한 그런 부분입니다. “삼구(三句)” 그 밑에 “삼현삼요(三玄三要)” 이것이 난해한 임제 스님의 법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뭐 엉터리 설명이니까 그냥 짐작만 하고 들으세요. 자!~ 제일구(第一句), 제이구(第二句), 제삼구(第三句), 이렇게 일, 이, 삼이 있는데
제일구(第一句)라는 것은 예를 들어서 최상의 경지, 조사선의 경지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제이구(第二句)는 여래선의 경지 그 다음의 경지다. 그 다음의 제삼구(第三句)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보통 의리선이다 이렇게 말해요. 조사선(祖師禪). 여래선(如來禪). 의리선(義理禪)이라고도 말하고, 제일구(第一句)에 천득(踐得), 일구에 눈이 밝아지면 “불조의 위사(佛祖 爲師)라!” 부처나 조사의 스승이 돼. 그런데 제이구(第二句)에 이치를 알아들으면 보통사람들의 스승이 됩니다. “인사위사(人師爲師)라!”인천(人天)의 스승이 된다. 그 다음에 삼구(三句)로서 뭔가 주거니 받거니 이렇게 돼가지고는 “자구(自求)도 불요(不要)라” 자기 구제도 안돼. 남의 스승 노릇하는 것은 그만두고 자기 자신도 구제를 못한다. 그래서 일. 이. 삼, 이걸 우선 머리에 기억하세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제일구와 제이구와 제삼구(第三句)를 이해하기 쉬운 것 중에 하나가
제일구(第一句)는 “여인인공(如印印空)이라!”도장을 허공에다 찍는 거와 같다 그랬어요. 허공에다가 도장을 찍으면 흔적이 있나요? 그런데 이구(二句)는 “여인인수(如印印水)라!”도장을 물에다 찍는 거와 같다. 허공에다 찍는 것 하고는 다르죠. 허공에다가는 아예 흔적이 없는데 물에는 찍을 때는 있습니다. 떼어버리면 없어요. 왜냐하면 도장이 움푹움푹하게 요철로 되어 있으니까, 찍으면 보이지는 않지만 나온 데는 물이 들어갔을 것이고, 도장이 들어간 데는 물이 들어갔을 테니까! 찍고 있는 동안에는 그게 흔적이 있다고. 거기서 물자체에서 그럼 떼어버리면 없는 거야. 법이라는 것이 그런 차원이 있어요.
그 다음에 삼구(三句), 제3등가는 것. “여인인(如印印)이라”진흙에다 도장 찍는 거와 같다. 진흙에다가 도장을 찍어놓으면 잘 나타나 아주! 흔적이 아주 뚜렷해! 그래서 우리 불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흔적이 뚜렷하고 뭐가 이러구 저러구 하는 게 있고 뭐 기억도 되고 뭐 감동적이고 메모할 것도 있고 이렇게 되면 이건 삼구야. 그것 가지고는 자기 자신도 구제가 잘 안돼! 그러니까 부처님이 최종적으로 뭐라고? “나는 한 글자도 설한 바가 없다. 그랬잖아요. 그게 부처님께서 제일구(第一句)의 경지를 보여 주는 거라. 그게 부처님의 본 마음이야. 그런데 우리 중생들은 부처님이 설해 놓으신 그 경전에만 눈이 어두워 있는 거야. 부처님은 설하신 바가 없는데 부처님은 일구에서 노는데 우리는 삼구에서 놀고 있어. 자!~ 이렇게 좀 우선 일구, 이구, 삼구를 이해하고 여기 임제 스님에게 물었어요.
上堂에 僧問 如何是第一句오
상당 승문 여하시제일구
삼요(三要)라고 하는 도장, 제일요(第一要), 제이요(第二要), 제삼요(第三要) 이렇게만 하지. 뭐가 어떻다 그런 것 없습니다.
師云 三要印開朱點窄[側]하고 未容擬議主賓分이로다
사운 삼요인개주점 [측] 미용의의주빈분
그런 삼요인(三要印)의 도장이 열리나 주점(朱點)이 숨었다. 측(側)자는 숨었다 이런 뜻입니다. 예를 들어서 찍었다 이거야. 찍어서 아직 도장을 안 뗐어. “미용의의주빈분(未容擬議主賓分)이로다” 주인도 객도 용납하지를 못해. 아직도 거기는 안 나눠졌어. 도장을 딱 찍어서 이걸 도장을 찍었는데 떼기 전이라면 그게 어디가 찍히는 것이고, 어디가 찍은 도장이고 그게 분별이 없잖습니까? 그와 같이 여인인공(如印印空)을 생각하면 좋아요. 흔적이 없다 이거야. 그게 주와 빈이 혼연일체고 스승과 제자가 혼연일체고 주관과 객관이 혼연일체야! 승속. 남여노소, 동서남북 온갖 것이 혼연히 한 덩어리인 그런 경지! 그런 세계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다 있어요. 그런데 거기에만 우리가 매여 있을 수가 없죠.
問 如何是第二句오 師云 妙解豈容無著問이며漚和爭負截流機리오
문 여하시제이구 사운 묘해기용무착문 구화쟁부절유기
묘유는 문수보살이죠. 무착은 무착선사인데 무착선사가 오대산에 문수보살이 계신다는 소리를 듣고서 일보일배(一步一拜)하면서 문수보살을 친견 하려고 몇 년을 걸려 정성을 다해서 그렇게 오대산을 갑니다. 오대산 입구에서 날이 저물었는데 마침 소를 먹이는 노인을 만나잖아요. 저 입구에서 그 노인하고 대담이 그렇잖아요. 노인이 묻기를 문수보살의 화현이죠. “어디에서 왔습니까?” “예! 남방에서 왔습니다.” “남방불법이 어떻습니까?”하니까 “말세비구들이 계율이나 좀 지키고 그저 그렇게 삽니다.”그랬어요. 무착선사가 살던 곳의 사정이죠. “그럼 대중이 몇 명이나 됩니까?” 무착이 말하기를, “총림에 한 300명도 되고 500명도 되고 뭐 이렇게 모여 삽니다.” 그랬어요. 무착이 이제 문수보살에게 묻는 거야. “여기의 오대산에는 불법이 어떤 모습입니까?” 하니까
문수보살이 있다가 “범성(凡聖)이 동거(同居)하고 용사(龍巳)가 혼잡이다” 범부와 성인이 함께 어울려 살고, 용과 뱀이 혼잡해있다. 막 뒤섞여 있다. 그게 본래의 모습이지. 무착이 또 묻기를 “대중은 몇 명이나 됩니까?”하니까 그 유명한“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니라”이렇게 대답을 한 그런 사례가 있죠. 무착선사가 문수보살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뒤에 또 나옵니다마는 무착선사가 문수보살에게 대중은 몇 명이나 되느냐? 그것 참! 대답을 하기는 했지만 무착선사가 알아들을 정도는 못돼. 그러나 그 정성을 들이는 무착선사!
그 장안에서부터 오대산까지 일보일배 하면서 몇 년을 걸려서 오는, 요즘도 저 청해성에서 티벳 라샤까지... 일보일배(一步一拜)하면서 라샤의 포탈라궁을 참배하려고 가는 그런 사람들! 몇 년이 걸리거든요. 그것도 지방이 먼데는 그렇게 걸립니다. 그런 식으로 옛날부터 그것 다 그런 풍속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그 정성이 보통이 아니거든. 대단한 근기라고. 그래서 뭐라고? “구화쟁부절유기(漚和爭負截流機)리오”방편상!‘절류기(截流機)!이 대단한 근기를 어찌 저버릴 수가 있겠느냐? 뭔가 못 알아들어도 대답은 해 줄 필요가 있다 이런 뜻입니다, 방편이 조금 개재가 된다 이거야.
방편이 좀 개재가 된다. 이게 제이구(第二句) 소식입니다. 아까 제일구(第一句) 소식하고는 영 다르죠. 일구(一句) 는 스승과 제자가 만났어. 만났는데 이게 혼연일체야! 도장을 찍기는 찍었는데 떼지를 않았어. 도장 찍은 놈이, 들고 있는 놈이 주인(主人)이고 찍히는 놈이 객(客)인지? 누가 주(主)인지 객(客)인지도 모르겠어요. 그게 제일구(第一句) 소식이라. 여인인공(如印印空)이야! 허공에다 도장을 찍는 거와 같애. 그 다음에 이구는 여인인수(如印印水)야! 도장을 물에다 찍은 거와 같애. 찍었을 때는 물에 흔적이 있는데 떼면 없어. 방편상 “전삼삼(前三三) 후삼삼(後三三)”이라고 하는 대답을 안 할 수가 없다. 이런 말입니다.
問 如何是第三句오師云 看取棚頭弄傀儡하라抽牽都來裏有人이로다
문 여하시제삼구 사운 간취붕두농괴뢰 추견도래이유인
이건 허수아비나 꼭두각시 인형놀이 할 때‘괴뢰(傀儡)’인형이잖아요. 저 탁자너머에 있는, 괴뢰를 움직이는 그 주인공을 잘 살펴라. 누가 뒤에서 끈을 가지고 조종하잖아요. 끈으로 조종하거나 나무 막대기를 조종하면 그 인형이 움직이잖아요.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 이게 누가 움직여. 조종하는 사람이 있다고. 조종하는 사람이 있어갖고 내가 막 떠들고 야단하는 거야. 인형처럼! 그런데 그 조종한 놈을 잘 살피라. “이유인(裏有人)이 있다”속에 사람이 있다.‘추견(抽牽)’ 밀고 당기고, 인형을 밀고 당기고 하는 것이 모두가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렇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누가 일어나서 “질문 있습니다!” 라고 뜬금없이 나오면 내가 당황한다고. 당장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게 전부 왜? 당황할 때는 당황하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때는 이야기 하느냐? 뒤에 조종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데 요런 말 알아듣기 쉽잖아요. 우리 주인공이 있어가지고 뭐... 그야 우리 불교인리라면 상식이니까! 그런데 이거는 제삼구(第三句) 소식이야. 이렇게 알아가지고는 “자구도 불요(自求 不要)라”자기 자신을 구제하는 것도 제대로 안 된다. 그랬어요. 지금 우리는 거의 삼구적(三句的) 불교에 떨어져 있고 삼구적 불교를 가지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야 되겠죠? 그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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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삼현삼요(三玄三要)
師又云 一句語에 須具三玄門이요
사우운 일구어 수구삼현문
一玄門에 須具三要니 有權有用이라
일현문 수구삼요 유권유용
汝等諸人은 作麽生會오 下座하다
여등제인 자마생회 하좌
임제 스님이 또 말씀하셨다.
“한 구절의 말에 반드시 삼현문이 갖춰져 있고, 일현문에 반드시 삼요가 갖춰져 있어서 방편도 있고 작용도 있다. 그대들 모든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시고는 법상에서 내려 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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師又云 一句語에 須具三玄門이요
사우운 일구어 수구삼현문
한 말속에, 한 마디 말! 뭐라고 해도 좋습니다. 욕하는 소리도 좋고, 농담소리도 좋고, 법문하는 소리도 좋고, 다 그래요. 어떤 말이든지 한 마디 말 속에 삼현문(三玄門)이 갖추어져 있고
一玄門에 須具三要니 有權有用이라
일현문 수구삼요 유권유용
또 일현문에는 모름지기 삼요가 갖추어져 있다. 권(權)도 있고‘유용(有用)’ 방편도 있고 활용도 있다.
汝等諸人은 作麽生會오 下座하다
여등제인 자마생회 하좌
어떻게 이해하느냐? 이렇게 하고 자리에서 내려왔어. 이것은 아무도 알 사람이 없어요. 한 마디 말 속에 삼현문(三玄門)이 있고 일현문(一玄門)에는 삼요가 있으니까, 일구(一句)에 구요(九要)가 있네요. 일구에 구요가 있고, 일구에 삼현이 있고, 뭐 이렇게 계산은 가능하나 이것은 이제 무슨 뜻인 고 하면 일구니 삼현이니 삼요라는 이것은 어떤 근기를 나타낸 것이 아니고 법문의 얕고 깊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고, 말하자면 법문을 활용할 때 활용하는 형식을 나타내는 것이다. 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제일로 까다로운 대목이기 때문에 저도 사실은 자신이 없어요. 뭐 이렇게 끊임없이 설명하고 내가 이해한 만치만 설명하기는 하는데 이게 제대로 된 것은 아니죠. 어쨌든 제일 어려운 상당 법어는 이제 끝났고 지금부터 시중(示衆)에 들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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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示衆)
10-1 사료간(四料揀)
師晩參에 示衆云 有時奪人不奪境이요
사만참 시중운 유시탈인불탈경
有時奪境不奪人이요 柔時人境俱奪이요
유시탈경불탈인 유시인경구탈이요
有時人境俱不奪이니라
유시인경구불탈
임제 스님이 저녁 법문(晩參)에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느 때는 사람[주관]을 빼앗고(부정함), 경계[객관]으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경계를 빼앗고 사람을 빼앗지 않으며,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고, 어느 때는 사람과 경계를 모두 빼앗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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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중(示衆)은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소참법문에 해당되고 성철스님께서 하신 걸로 비추어본다면 그래도 제일 격식에 맞추어서 하신 분이니까 근래 스님으로서는! 책으로서는 상당법어만 모아 놓은 책이 있어. 그건 봐도 뭔 소리인지 잘 몰라요. 그런데 “백일법문”같은 것은 소참법문이니까 그런대로 이해가 가죠. 뭐 이런저런 별별 이야기 많이 있지. 무슨 물리학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무슨 심명학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체면술에 대한 이야기도 있고 별별 그런 잡다한 방편 설을 많이 활용을 합니다.
임제 스님은 그렇게까지 펼쳐 놓지는 않았지마는 그래도 저 넘어가면 조금은 이해하기 쉬운 그런 부분들이 있습니다. 앞부분에는 또 조금 문제가 있는 내용이 예요. “사료간(四料揀)”이라고 해서 네 가지로 분류하고 구분한다. 그런 뜻입니다. 헤아릴 료(料)자죠. 분류하고 구분한다. 하나의 표준으로 삼는다. 네 가지로 분류하고 구분해서 표준으로 삼는다. 이런 뜻인데 시중이다 보니까
師晩參에 示衆云 有時奪人不奪境이요
사만참 시중운 유시탈인불탈경
‘만참’하면 저녁에 법상에도 오르지 않고 그냥 대중들을 모아놓고 편안히 앉아서 부담 없이 하는 법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중들을 보며 말하기를 “유시탈인불탈경(有時奪人不奪境)”내가 어떤 때에는‘탈인불탈(奪人不奪)’사람을 빼앗고 경계는 빼앗지 않는다. 그러니까 주인도 부정하고 탈을 부정한다는 뜻입니다.‘불탈경(不奪境)’ 경계를 빼앗지 않는다. 경계는 놓아두는 거야. 그러니까 어떤 학인이 질문을 한다 이거지. 어떤 수행자가 와서 질문을 하면 그 사람은 부정해버리고 나머지 세상은 그냥 둔다는 이런 뜻입니다.
有時奪境不奪人이요 柔時人境俱奪이요
유시탈경불탈인 유시인경구탈
“유시탈경불탈인(有時奪境不奪人)”어떤 때는 경계는 빼앗고 사람은 빼앗지 않고, “유시인경구탈(柔時人境俱奪)”또 어떤 때에는 사람과 경계를 다 부정해 버린다. 싹~ 쓸어버리는 그런 법문을 한다 이거야.
有時人境俱不奪이니라
유시인경구불탈
또 어떤 때에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부정하지 않는다. 빼앗지 않는다. 그렇게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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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에 有僧問 如何是奪人不奪境고
시 유승문 여하시탈인불탈경
그때 한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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時에 有僧問 如何是奪人不奪境고
시 유승문 여하시탈인불탈경
그렇게 떡 하니까, 그때 어떤 스님이 나와서 묻기를 “여하시탈인불탈경(如何是奪人不奪境)고”조목조목 묻고 대답하고, 묻고 대답하고 하는 그런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사람을 빼앗고 경계를 빼앗지 않는 것입니까?
첫댓글 _()()()_
무승자박(無繩自縛)이라,,,누가 묶어 두었는가. 툭툭털고 대자유인의 삶을 살아 가거라!
삭제된 댓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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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륜월님 수고하셨습니다._()()()_
'게재(揭載)' 글이나 그림따위를 신문이나 잡지 따위에 실음'을 뜻하는 말로 '그의 논문은 유명학회지에, 게재될 예정이다'처럼 씁니다. 한편 '개재'는 어떤 것들 사이에 끼여 있음'을 뜻하는 말로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선입견도 개재하지 않는다'처럼 씁니다.... 국어 평생교육 사이트(우리말 배움터)... 위의 내용에 쓰인 '개재'에 대해서 약간의 이견이 있었으므로 바로 정정하여 드립니다. 큰스님께서 하신 법문의 내용으로 보았을 때 관문님께서 제의하신'개재'가 맞습니다. 법우님들의 높으신 관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向什麽處去오 師云 沒溺深泉이니라... 그 분이 어디로 갔느냐? 깊은 못에 빠져버렸다...무심이 된 것 까지는 좋은데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어디에도 걸리지 않는, 대 자유인이 되어야 된다... 一輪月님! 고맙습니다... _()()()_
유마힐도 되지 말고 부대사도 되지 말라.. 一輪月님, 고맙습니다. _()()()_
三句法門(如印印空,如印印水,如印印)! 감사드립니다. _()()()_
第一句 소식---如印印空...허공에다 도장을 찍은 것과 같음... 第二句 소식--- 如印印水...도장을 물에다 찍은 것과 같음..第三句 소식---如印印...도장을 진흙에다 찍은 것과 같다...一輪月님! 수고하셨습니다.._()()()_
如印印空,如印印水,如印印....一輪月 님, 고맙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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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에 수고 하시는 인륜월님께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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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_ 고맙습니다.
_()()()_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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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