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신문 2007-3-19
캄보디아 왕립법경대학 강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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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종록 변호사 (법무법인 신우) |
2년 전 나는 관광차 홀로 캄보디아 씨엠립을 방문했다. 당시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몸과 맘이 다 지쳐 있었기에 휴식을 취하면서 내 삶을 돌아볼 시간을 가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씨엠립이냐? 그것은 왕가위 감독의 영화 ‘화양연화’의 마지막 장면 때문이었다. 남자주인공 양조위가 앙코르 와트에 가서 자신의 사랑을 묻는 마지막 장면은 내게 큰 여운을 주었다. 그다지 묻을만한 감정의 찌끼도 없는 나조차도, 그 곳에 가면 뭔가 묻을 것들이 생겨날 것만 같았다. 이처럼 나의 씨엠립 방문은 다소 유치한 환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는 씨엠립에서 캄보디아인들의 생활상을 보고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씨엠립 여행기간동안 나 자신의 문제는 제쳐두고 이들이 어떻게 하면 하루 속히 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쥐어주는 한, 두 푼으로는 내 속에 똬리를 틀기 시작한 죄의식을 지워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문득 호찌민의 예가 생각났다. 베트남의 호찌민은 미국과의 전쟁 중에서도 수백 명의 유능한 인재를 선발해 전 세계로 유학을 보내었는데, 이들 유학생들이 오늘날의 베트남의 중흥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비해 캄보디아의 ‘폴 포트(Paul Pot)’는 너무나 많은 인재를 살해했기에 지금 이 나라를 이끌어갈 동력이 전무한 상태라고 한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온 뒤 캄보디아를 교육으로 도와줄 기회를 찾기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에 Advocates Korea란 변호사단체가 한동대 로스쿨과 함께 캄보디아 등 아시아의 학생을 장학생으로 초빙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이 단체에 가입하여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올해 1월 말, 나는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에 있는 왕립법경대학(Royal University of Law and Economics)에서 개최된 한동대-왕립법경대학간의 학술세미나에서 ‘한국의 저작권법 및 엔터테인먼트법’을 강의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법지식이나 영어실력만 놓고 보면 내가 감히 참여할 수 없었겠지만, 항공기 값을 포함한 모든 경비를 강사들이 각자 부담해야 했기에 가진 게 돈 밖에 없는(?) 나에게도 기회가 주어진 것 같다.
왕립법경대학은 캄보디아 최고의 대학임에도 불구하고 건물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재정도 넉넉지 못해 이번 강의 중간에 제공되는 간식비용도 우리가 반을 부담해야 했다. 폴 포트의 치하에서 1,000명의 법조인 중 10명 정도가 살아남았기에, 현재 이 대학의 교수들도 80%이상이 학사자격을 가진 사람이 교수를 하고 있다고 한다.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다. 더 충격적인 것은 초·중고등학교 선생님의 77%가 중학교 졸업생이고, 대학졸업생이 전체 인구의 2%밖에 안 된다고 한다.
우리의 강의는 6일 동안 진행되었다. 미국의 Novik 변호사님은 미국의 특허법에 대해, Enlow 한동대 교수님은 미국 상표법에 대해, 이상기 한동대 명예교수님은 기술이전의 문제에 대해, 나는 한국의 저작권법 및 엔터테인먼트 법을 강의했다. 영어로 강의를 하면 교수들이 캄보디아어로 통역하는 식으로 진행을 하였다.
드디어 나의 강의시간이 왔다. 캄보디아 교수들은 영어가 서툰데다가 엔터테인먼트법이라는 단어조차도 처음 들어봐서 퍼블리시티권 등 몇 가지 법률용어 등을 제대로 통역할 줄을 몰라 서로 진땀을 흘렸다. 결국 준비했던 강의안의 1/3도 못하고 끝내고 말았다. 다만, 강의도중에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와 ‘비’의 콘서트 장면의 일부를 틀어줬는데, 반응이 매우 좋았다. 특히, 비는 캄보디아에서 가장 유명한 한류스타였는데, 내가 비의 법률대리를 하고 있다고 했더니 다들 열광했다. 캄보디아는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법들이 구비되어 있기는 했지만, 자국인이 창작해내는 지적재산이 거의 없다보니 이에 대한 집행(enforcement)이 전혀 안 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교수들과 학생들도 미국의 법제도보다도 오히려 한국의 법제도에 더 관심이 있었다. 이들은 한국이 자기 나라의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쨌든 우리가 왕립법경대학에서 한 강의는 꽤 좋은 파급효과가 있었다. 우리가 체류하는 동안에 프놈펜의 다른 대학으로부터 다시 한번 더 캄보디아로 와서 지적재산권과 관련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평소 한국 변호사란, 의사 등과는 달리, 한국이란 지역만 벗어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기에 나에겐 법조인이란 너무나도 답답한 직업이었고, 내 꿈은 언제나 이 ‘우물’을 하루속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 캄보디아에서의 강의와 지난해 인도 IIT에서의 강의 기회를 통해, ‘변호사’이기 때문에 아시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이 참으로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변호사라는 사실을 감사하게 되었다. 특히 이번 강의를 주관한 한동대 이상기 명예교수님을 통해 이런 사실을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다. 이상기 교수님은, 6·25이후 미국인의 도움으로 미국변호사가 될 수 있었던 그 은혜를 이제 이곳 캄보디아에서 되갚기 위해, 73세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미국, 한국, 캄보디아를 오가면서 캄보디아에 국제학교를 설립하는 일에 전념하고 계셨는데, 이분을 지켜보면서 참 많은 도전을 받았다. 내 말년이 저분의 삶과 같기를….
한국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나는 Evan Gottesman이 쓴 ‘Cambodia, After the Khmer Rouge’란 책을 샀다. 이 책은 Evan Gottesman란 미국변호사가 미국변호사협회의 지원으로 1년 반 동안 캄보디아에서 체류하면서 캄보디아의 법제도를 정비해주면서 체험한 것들을 정리한 책이다. 우리나라 변협도 이제는 이런 일을 시도해보는 것은 어떨까. 당장은 별 실익이 없어보여도 지금 우리가 이들을 도와주면, 5년, 10년 뒤 우리 변호사들이 이들 나라로 인해 풍요롭게 먹고 살 날이 오지 않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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