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언제나 의미를 담고서
정각스님 · 원각사 주지
I. 다차원의 공간 속에 지혜의 끈을
불가사의한 나라 인도(印度)는 인간 총체적 지식의 샘물, 그 원천(源泉)이다. 그럼에도 뜨거운 햇볕 속의 인도는 사막의 오아시스, 그 신기루(蜃氣樓)에 비유할 수 있기도 하다.
사막을 걷는 여행자는 그곳에 이르러 한껏 지혜의 샘물 퍼마시고자 할 것이나, 이미 손을 뻗자마자 실 아지랑이처럼 사라진 사막의 샘물은 '탄탈로스의 갈증'이거나 '영원한 것의 환상적 이변' 때문만은 아니다. 오직 그곳에 이르는 길이 어긋났을 뿐임을 말해 주는 것이다.
한번 어긋난 길을 찾아든 여행자는 다시금 출발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럼에도 지식의 샘물, 그 원천에 이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 교만한 콜롬부스는 사잇길 속에서조차 근원에의 향수를 즐긴다. 아, 그러한 그는 끝없는 집착에 탐닉해 버릴 지 모를 일이다.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스피노자(B. Spinoza)는 말했던 것일까? "인간은 순간 속에 안주코자 하는 형이상학적 욕구를 지니고 있다"고....
다차원의 위상적(位相的) 공간들. 그 옛날 깊은 신비의 동굴을 찾아 헤메이던 오딧세이 그 테세우스(Theseus)의 예지(豫知)처럼, 아 우리는 이 공간 속에 길 잃지 않기 위해 '운명의 끈', 지혜의 털실을 몸에 지녀야 한다.
언제나 갸날퍼 보이는 한 가닥 실[絲]이 여인의 숙명을 대신할 수 있었다면, 아 지혜의 샘물 그 근원점을 찾아 헤메이는 자는 그 전환점을 돌이키게 될 한 가닥 실[絲]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있어야 한다. 마음 조이게 할 만큼이나 유연한, 내면의 부드러움을 항상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도 된다.
II. '나아감'이란 순간의 침묵을 말함인가
더운 땅 인도의 더위를 이기는 길은 그에 대한 항거도 피신도 아니다. 그저 묵묵히 순간을 지켜 바라보면 되는 것이다. 탄생 이전으로부터의 숙명인 양 우리에게 미소 보내는 어두운 죽음의 메시지에도 우리는 묵묵함만으로서 그에 대처할 수 있기도 하다. 이렇듯 '묵묵히 지켜 바라본다는 것'. 아, 이것은 지혜의 샘물을 탐하고자 하는 자의 태도에도 적용된다. 그리하여 그는 적당한 우회로를 만들어 갖기도 할 것인데, 그 우회로 속에서나마 그 여행자는 자신 나아감의 의미를 알게 되는 것이다.
아, 그렇다면 그 '나아감' 자체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 옛날 오딧세이는 왜 그처럼 끝없는 항해를 계속해야 했으며, 왜 우리는 오늘도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가. 제약된 시간 속에 무수히 소멸되어야 할 존재. 아, 무한한 소멸 자체가 우리의 목적일 것인가? 그럼에도 왜 그토록 많은 이들은 갠지스강 물줄기 따라 죽음의 길, 삶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그저 '걷고 있음' 자체만이 우리 존재의 의미를 대변해 주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겠는가.
III. 영(靈)에 대한 의무와 대답
며칠 전, 릭샤(Rickshaw: 인력거) 타고 길을 가는 나에게 옆자리의 소녀가 물었던 적이 있었다. 우리에게 있어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이며, 그 속에서 우리 인간존재의 목적이며 의미는 무엇인가.
아, 언제나 한밤중의 시간을 무한정 보내기도 했던 나는 그에 대한 나의 대답을 찾아 갖는다. 삶이란 죽음의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하며, 죽음도 삶도 아닌 무한성의 시간을 살아가는 채 우리는 죽음과 더불어 동질성의 삶을 몽상(夢想)하고 있음을.... 그렇다면 그 몽상의 지향점, 그곳은 어디인가. 그 궁극의 장소에 우뚝 선 인간은 무엇을 알아갈 것인가.
아, 그리하여 나는 알아간다. 그 무한한 몽상(夢想)의 근원에는 하나의 의무감이 내재(內在)해 있다라는 사실을. 그리하여 나는 하나의 등식(等式)을 정립하여 갖는다. 우리 인간 전존재, 삶의 의미며 목적이란 '영(靈) 혼(魂)에 대한 우리의 의무이며, 그에 대한 끝없는 대답'이란 사실을.
그렇다. 우주에 만유(萬有)한 모든 존재는 각각 그에 걸맞는 영(靈), 혼(魂)을 스스로에 지닌다. 온갖 운동체(運動體) 속에는 생혼(生魂)이 깃들며, 그 밖의 여타 생명체에도 혼이 있어 우리는 그것을 각혼(覺魂)이라 부른다. 또한 우리 인간의 영혼(靈魂)과 그 밖의 성스러운 영체(靈體)들.... 그러므로 불교는 말한다. 일체의 유정(有情) 무정(無情) 모두가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음을. 또한 우리 앞을 굴러다니는 돌멩이 속에조차도 하나의 성품이 있어, 그들 모두가 마침내 '최종의 목적'을 달성해 갖기를 염원하고 있음을.
그럼에도 그 '최종의 목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불교적 의미의 열반(涅槃; Nirvana)을 지칭하게 될 것인가?
IV. 참다운 존재의 연기론적 설명을
오래 전부터 나는 믿고 있었다. 우리 눈앞의 한 포기 풀이파리, 한 송이의 꽃에도 조차 혼(魂)이 깃들어 있음을. 또한 그 혼(魂)들은 주변세계에 끝없는 대화의 창구를 열어 놓고 있기도 하다. 곧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 순간으로부터 무한한 상호대화의 가능성을 제시해 보이고 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꽃을 꽃이라 불러주지 않을 때 꽃은 꽃일 수 없다. 마찬가지 원리이다. 눈앞에 놓여진 백지(白紙)가 백지임을 스스로 주장해 온다 할지라도 내가 그것을 백지라고 불러주지 않는 한, 적어도 나와의 관계에 있어 그 백지는 존재감을 상실한 채 무화(無化) 되어질 뿐인 것이다.
세상 모든 존재는 자신을 무한정 드러내고 있다. 높은 하늘 창공을 바라보아도 그 창공 가득한 무수한 존재들은 끊임없이 나에게 말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존재자체(Esse) 역시도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성질, '비은폐성(非隱蔽性; Aaleteia)'을 지니고 있음은 하이데거(M. Heidegger) 역시도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렇듯 상호관계의 원리가 자못 주장하고 있는 바 그 참다운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오래 전 카톨릭의 신부 떼이야르 드 샤르뎅(T. de Sardin)은 그의 논지를 진행시키는 가운데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란 말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모든 영적(靈的) 창조물들은 모두가 스스로의 완성적 실체에로 자신을 이끌어야 하며, 그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그 자신의 존재감은 설명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라는.
이렇듯 스스로의 완성적 실체를 향한 움직임. 그럼에도 오직 개체만으로 서가 아닌 상호관계의 원리를 통하여 이 모두는 가능해진다. 이것은 만유(萬有)의 생명체가 살아 숨쉬는 우주적 실체 그 불가사의에 대한 해답이며, 참으로 많은 구성적 생명체에 대한 존재감의 적절한 설명이 되기도 한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또 다른 하나인 둘이 되고, 하나에서 하나를 빼면 존재의 블랙 홀(Black Hall),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존재, 영(零)이 되는 신비한 우주적 질서 속에서 그 '완성된 하나'를 찾는 존재적 탐구에는 '또 다른 하나'와의 상호관계를 전제해 가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참다운 존재의 연기론적(緣起論的) 설명이 되어지기도 한다.
V. 관계성의 정겨운 설명들
그리하여 나는 깨닫게 된다. 허공에 되뇌는 무수한 새들의 지저귐의 의미를, 세상 가득 피어진 많은 초목들의 '살아있음'의 의미를 말이다. 그리고 피어진 한 송이 장미의 의미를 알게도 된다. 또한 혹성에 피어진 한 송이의 장미가 어린 왕자에게 했던 "너는 나를 보살필 책임이 있는 거야"라는 말의 의미 역시 알 수 있게도 된다. 이 모두가 관계성(關係性)의 의미를 뜻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관계성과 더불어 인간의 의식은 향상되어진다. 관계성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이 진정 인간임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며, 그 관계성 속에서 인간은 나를 알고 남을 알며, 그것은 결국 동시에 나[我]가 되어짐을 알게도 되는 것이다.
이처럼 관계성의 의미를 전제한 채 우리는 또다시 삶의 의미며 목적을 이야기한다. 아 영(靈), 혼(魂)에 대한 우리의 의무며, 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은 무엇인가. 그리하여 나는 다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말할 수 있게도 된다.
아, 더운 땅 인도에서 아다모(Adamo)의 [눈이 내리네(Tombe la Neige)]를 듣고 있노라니, 창문의 적막함을 통해 다가오는 한밤의 어둠 속에 마치도 눈이 내릴 것만도 같은 생각이 든다.
정말 눈이라도 한번 내렸으면 좋겠다. 그러나 눈은 내릴 지라도 오늘도 길거리에 누운 채 한밤을 지새우게 될 가난한 서민들, 그 시린 가슴에 나려 그들의 단잠을 깨우지는 말아야 한다
VI.
남쪽 바다로부터 불어온 습기 찬 공기는 히말라야 산맥을 넘지 못하고 이내 인도 땅으로 뒤돌아 쳐, 한껏 덥혀진 가난한 대륙에 비를 뿌리기 시작한다. 어느덧 혹독한 더위가 한풀 가신 인도 땅에 푸릇푸릇 새싹이 돋고 뭇 생명들 활기를 찾는 때, 다름 아닌 석 달간의 우기(雨期)가 시작되는 것이다. 바라나시(Varanasi)를 유유히 흐르는 죽은 이들을 위한 강(江), 갠지스(Ganga:강가강) 역시 범람하여 화장장(火葬場)의 시체들 마저 빗속에 잠들면, 이제 인도 땅 전역에는 천둥과 번개의 파노라마가 펼쳐진 채 서부 벵갈만 유역에서는 수만 명의 수재민들이 생겨나기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더위는 채 가시지 않는다.
인도의 슈라바나月(5월) 여덟째날,
'91년 8월 17일.
Varanasi에서 正覺.
- 인도에 머물던 때의 글 ----
** 1991년 월간지 <현대불교>에 실었던 글임.
** 1993년부터 대학 교양국어 교과서 <문학과 인생>에 실림.
첫댓글 최종의 목적을 열반이라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한 때 삶을 오아시스를 향한 신기루 쯤으로 여기며 산 적은 있습니다. 사이사이 부분... 대학생이 이해하기에는 좀 어려웠겠습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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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관계속에 정겨움 또는 슬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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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꽃이라 불러주지 않을 때 꽃은 꽃일 수 없다. 관계속에서의 존재감!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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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