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속으로 1) 역자 서문 샌드라 윌슨(Sandra Wilson)은 수치심과 열등감 속에서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이다. 저자처럼 나 역시 역기능 가정에서 수치심 때문에 많은 고통을 안고 성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둘 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예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수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우리 두 사람은 크리스천 심리학자 게리 콜린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나는 친자매의 글을 옮기는 마음으로 이 책을 즐겁게 번역할 수 있었다. 샌드라 윌슨은 이미 두란노서원에서 번역 출간한 ‘기독교상담 시리즈’ 중에서 「알코올 중독 상담」을 집필한 저자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우리는 경험한 것만큼 다른 이들을 이해한다. 우리의 상함(brokenness)이 바로 우리의 사명(mission)이 된다는 말이 있다. 저자는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알코올 중독 가정을 비롯해 모든 역기능 가정에 대해 특별한 연민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우리는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난 성인아이들에 대한 저자의 사랑을 읽을 수 있다. 윌슨은 좋은 남편을 만났지만 자신의 ‘미완성과업(unfinished business)’ 때문에 이혼의 위기가 있었다.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상담학을 공부하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은 물론 부부관계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면서, 점차 성숙한 부부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남편 가스(Garth)에게 헌정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성경과 심리학, 학문적 이론과 실제적 적용이 멋지게 어우러져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과 심리학자로서의 훈련과 통찰에 근거해 어린 시절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진단하고 치유받을 수 있는지 단계적으로 자상하게 안내하고 있다. 이 책의 번역을 처음 주선한 분은 세계적인 중독분석학자 다브 스미스(Darv Smith) 박사였다. 스미스는 아내 캐롤(Carol)과 함께 2002년 12월부터 2003년 2월까지 3개월 간 제주도 열방대학에서 중독 상담학교를 지도하였는데, 우리 내외는 방학을 이용해 이 학교에서 강의도 하고 통역도 하면서 이분들과 교제하는 특권을 누렸다. 이 책은 원래 예수전도단 중독 상담학교 학생들을 위한 교재로 번역되었다. 샌드라 윌슨은 건강상의 이유로 그 당시 방한이 좌절되었는데, 2005년 벽두에 중독상담학교와 온누리 회복세미나 강사로 초빙되어 한국 방문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의 방한과 때를 맞추어 이 책을 출간해 준 두란노서원에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수치심 지양적 문화권이다. 최근 수치심과 수줍음에 대한 책이 몇 가지 소개되고 있지만, 이 주제를 이와 같이 복음주의적인 관점에서 깊이 있게 다룬 것은 이 책이 처음일 것이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선물하여 많은 이들이 마음의 아픔을 치유받고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2005년 벽두에 가족관계 연구소 소장 정동섭
2) 저자 서문 10년 전, 필자는 이 책의 초판 서문에서 이 책을 ‘역기능 가정에서 자라난 성인 아이들을 위한 책’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지금도 그 뜻에는 변함이 없다. ‘역기능적’이라는 말은 본래 기능을 잃어버린 가족이나 인간 공동체를 묘사하는 말이다. ‘상처 입은’, ‘건강하지 못한’이라는 뜻이다. 이런 가족들은 아담의 타락 이후 언제나 있었으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기 전까지 계속 존재할 것이다. 이름이야 어찌됐든, 이런 가정에서 자라난 이들은 살아가는 동안 내면세계에 무언가 결핍된 상태라는 느낌을 내내 떨쳐버리지 못한다. 가정이 건강하지 않거나 문제가 생겨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 중 한 명, 혹은 양쪽 모두에게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장애’란 알코올 중독, 약물 중독, 만성적인 분노나 우울증과 같은 정신적, 정서적 문제들을 포함한다. 이런 장애가 있는 부모들은 자녀를 방치하거나 학대하여 자녀의 삶 전반에 걸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나 성인이 되면 십중팔구 ‘나비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애벌레 같은 존재’로 자신을 인식하는 증상을 나타낸다.
‘나비들 틈에서 살아가는 애벌레’의 이미지야말로 수치감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그림이다. 수많은 성인들이 바로 그 수치감 때문에 과거에 대한 고통스러운 기억과 더불어 희망 없는 미래의 공포 속에 갇혀 지낸다. 수치심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결정적인 결함투성이라고 느끼게 하며, 스스로 무가치한 존재로 여기게 만든다. 수치심은 죄책감과 다르다. 죄책감은 ‘실수했다’고 스스로를 지적하지만, 수치심은 ‘내 존재 자체가 실수’라고 떠벌인다. 잘못된 행동이야 고치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존재 자체에 결함이 있다면 변화될 희망조차 없다. 앞으로 역기능 가정에서 성장한 사람들 사이에서 대물림되는 내적 장애와 수치심에 대해 다룰 것이다. 아울러 삶을 변화시키는 말씀의 능력과 변화에 대해서도 설명할 것이다. 명심하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완전한 나비들만의 세상이 아니다. 이 책에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공식 따위는 없다. 인간은 누구나 애벌레다. 나도 마찬가지다. 불완전한 애벌레가 완전한 나비로 변해 가는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우리 역시 변화의 과정에 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시 그렇게 만들어졌으며, 앞으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변화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하고 온전한 존재로 보신다. 인간들이 완벽한 모습으로 살지 않는다고 해서 놀라거나 실망하시지도 않는다. 그분은 우리를 무척이나 사랑하셔서 지금 모습 그대로 받아 주신다. 뿐만 아니라, 지금 모습 그대로 살게 내버려두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애벌레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계획을 갖고 계시는데, 그것을 일반적으로 변화라고 부른다. 로마서 12장 2절에 따르면, 변화는 평생 동안 마음을 새롭게 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변화를 개인적으로 경험하도록 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물론 나 역시 변화의 대상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전체적인 윤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서론에서는 내가 왜 수치심에 관심을 갖게 됐는지 내 경험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1-5장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역기능 가정들을 살펴보면서 수치심의 의미와 기원을 설명한다. 6장에서는 수치심을 유발하는 요인들을 살펴보고, 변화의 가능성에 대하여 다룰 것이다.나머지 부분에서는 수치심에 사로잡힌 이들이 개인적인 삶이나 대인관계에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설명하고,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제시할 것이다. 그동안 긴 설명을 했던 것은 새로운 선택을 하려면 보다 깊은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현재 상태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쳇바퀴만 계속 돌릴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이런 내적 고통이 존재한다는 걸 인식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을 때 반드시 하나님께 통찰력과 이해력을 주실 것을 간구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야고보서 1장 5절에서 하나님은 구하는 이에게 지혜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사람이 진실하기를 원하시며, 우리에게 지혜도 주신다고 말씀한다(시 51:6).분명히 말하지만,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있다. 주님과 손잡고 대처한다면 해결하지 못할 문제가 없다. 내 삶은 물론이고, 그동안 만나서 상담했던 수많은 이들의 삶을 보더라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기억하라. 어린 시절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자원들을 지금은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내 속 얘기를 들어 주고, 믿어 주고, 위로해 주며, 진실을 직시하도록 권면해 줄 친구나 목회자, 상담자, 모임 등 수많은 도움의 손길들을 찾을 수 있다.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생각이나 느낌을 기록하라.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서 일지에 기록하는 이들이 있다. 말씀을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기록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나누고 싶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일지에 적기도 한다. ‘쉬어가기’와 ‘깊은 묵상을 위한 디딤돌’에 제공된 자기 검증 과정을 따라가며 기록을 남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설사 쓸 것이 없다 하더라도, 최소한 각 장에 제시된 질문과 문제들을 고민해 보라고 부탁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상담서를 읽는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죄책감을 느끼는 이들을 위해 몇 가지 짚고 넘어 가려고 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는 모든 원리가 성경 말씀에 담겨 있다는 데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그 원리를 삶에 적용하게 하시기 위해 주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을 제한해서는 안 된다.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후에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그를 풀어놓아 다니게 도와 달라고 요청하셨다. 예수님은 누군가의 도움이 전혀 필요 없는 분인데도 말이다. 몸에 난 상처를 치료할 때 하나님은 의사나 사람이 만든 기구들을 사용하신다. 마찬가지로, 성경적 진리를 적용하는 상담자들이나 책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상한 감정을 치유하실 수 있지 않겠는가! 이 책은 “인간이란 본래 불완전하며, 실수투성이인 ‘죄 많은 애벌레’라는 성경적 진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과정에 있다고 선언한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다. 그리고 주님은 스스로 시작하신 선한 일을 완성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롬 8:29; 빌 1:6을 보라). 하나님께서 나와 똑같은 애벌레 친구들을 끊임없이 변화시켜 가는 과정에 이 책을 소중한 도구로 사용해 주시길 기도한다. ▒ 본문 중에서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초자연적인 능력이 필요하다. 마샤(Marcia) 역시 스스로 용서하지 못해서 갈등하던 여성이었다. “선생님은 이해를 못하실 거예요.” 마샤는 얼굴을 감싼 채 흐느꼈다. 한동안 눈물을 쏟고 나서야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런 짓을 했거든요.” 건강하지 못한 가정에서 성장한 마샤는 ‘아버지에 대한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 해 동안 지나치리만큼 문란한 생활을 했다. 얻고 싶었던 정서적인 만족 대신 돌아온 것이라고는 지독한 혐오감뿐이었다. 하나님마저도 기다리다 지쳐서 등을 돌리셨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샤의 반응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역기능 가정에서 자란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괴롭히는 요인은 구원받은 뒤에도 똑같은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낙담하고 돌아서시지 않는다. 그저 슬퍼하실 뿐이다. 그분의 기대는 언제나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주님이 슬퍼하는 이유도 우리의 통념과 전혀 다르다. 하나님은 죄가 인간의 삶에 얼마나 파괴적인지 알기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것이다. 자녀들이 그토록 하나님 아버지를 슬프게 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사랑을 거두지 않으신다. 인간이 가진 힘만으로는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음을 아시면서도 한결같은 사랑을 베푸신다. 마샤는 은혜가 넘치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웠다. 죄를 고백하는 것만으로 청산의 절차가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건강한 관계를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우선 성가대부터 다시 들어갔다. 늘 찬양하는 걸 좋아했지만, 그동안은 하나님의 벌을 달게 받겠다는 심정으로 성가대를 비롯한 모든 봉사 활동을 중단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스스로에게 벌을 주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과거의 죄를 회개하고 행동을 돌이켰는가? 그렇다면 완전히 용서받았음을 고백해야 한다. ‘고백한다’는 건 문자 그대로 ‘동의한다, 똑같이 말한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는 요한일서 1장 9절 말씀을 기억하라. 진심으로 이 말씀을 믿는가? 다른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이 말씀이 진리라고 생각하는가? 용서에 대해 하나님과 똑같은 입장을 취하는가? 주님은 이미 “네 죄가 사함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모든 빚을 탕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벌주려는 욕망에서도 해방시켜 주셨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힌다면 그건 십자가를 모독하고 고백하는 자녀들을 용서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모독하는 처사다. 나로서는 독자들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는 잘 안다. 또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실”(요일 1:7) 것임도 분명히 알고 있다.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분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죄’에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죄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를 더 깊이 경험할수록, 상처를 입히고 수치심을 심어 주었던 사람을 조금 더 잘 용서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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