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산은 이름이 말하는 것처럼 아홉개의 암봉으로 이뤄진 산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구봉은 구봉산의 한 능선일 뿐이다. 구봉산은 더 크게 더 높게 구봉옆에 솟아있고 자체의 단애, 자체의 암릉을 거느리고 있다.
구봉산 산행은 한마디로 굉장한 산행이다. 왜 그러냐 하면 우선 절리가 별로 없는 아홉개의 바위봉우리를 연이어 타고 가면 산행의 삼매경에 빠지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고 봉우리들은 평탄한 안부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깊은 협곡으로 오르락 내리락 해야하기에 작은 산을 몇개 타는 기분이 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것은 주흘산의 부봉 6봉이나 지리산 써레봉보다 한술 더 뜬 암봉군이다 . 둘째 9봉을 섭렵한 뒤 안부로 내려서서 구봉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의 기상천외의 경관 때문이다. 길옆 단애 아래를 지날 때 높이를 가늠할 수 없는 단애로부터는 비오듯 물이 떨어지고 가만히 서 있어도 미끄러지는 된비알을 조금 더 가면 하늘 한구석에서 떨어지는 듯한 폭포수 뒤로 들어가 수렴을 사이에 두고 구봉중 맨 마지막 봉우리며 주위를 둘러보면 뭐 이런 곳이 다 있나 하는 경탄은 목안으로 기어들고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위기상황에 빠진듯한 느낌이 든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세번째는 암봉과 폭포지대를 지나면 이제는 목가적인 상황이 될듯하지만 그것은 기대뿐 구봉산 정상부근도 단애와 암릉이 점철되어 있고 경사가 급하여 거의 온산에 로프가 걸려있다시피하다는 점, 그리고 정상에 올라 양명일대의 마을과 전답, 진안에서 주천으로 빠지는 산곡 사이를 타고 가는 긴 도로, 급준한 산록에서 평지로 변하는 산자락 곡선의 유연함과 구봉산 산곡사이에서 보석처럼 푸르게 빛나는 양명저수지가 끼인 시원한 조망, 정상에서 남릉으로 내려가는 길 아래의 주봉과 이어진 깊은 단애의 연속 등등이 구봉산 산행을 굉장한 것이라고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다. 이밖에도 정상에 올라오면 복두산을 거쳐 운장산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능선이 석양에 실루엣을 이루어 파도치듯 하늘가를 주름잡고 있는 가슴 뛰는 파노라마가 기다리고 있고,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진안 마이산의 기암들을 비롯 운장산-구봉산의 맥에서 정천으로 빠지는 긴 능선과 계곡(운장산 산행 때에도 두드러진 현상으로 눈에 띄었던)이 시야에 들어온다. 동남쪽으로 진안분지를 사이에 두고 덕유산-남덕유의 길고 높은 능선이 확연하다. 900미터를 넘는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조망은 시원하기 이를 데가 없다.
구봉산을 오르자면 상양명이라는 주천-진안도로 옆의 마을로 와야한다. 이 마을은 10여호되는 구봉산 자락의 작은 마을로 구봉산 산행의 깃점이다. 마을에서는 두 갈래 길로 구봉산을 오를 수 있다. 하나는 마을에 들어서서 오른쪽길로 올라가 마을뒤로 빠져 산록으로 접근하는 길이고 하나는 마을에서 개울을 따라 서쪽 계곡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저수지옆으로 돌아가 산으로 접근하는 방법이다. 전자는 9봉을 전부 섭렵한 뒤 정상까지 올라가 능선이나 계곡으로 내려서서 원래의 깃점으로 회귀할 수 있고 두번째 코스는 정상으로 가든지, 구봉을 타든지 두가지 중 하나밖에 할 수 없는 코스이다.
먼저 말한 코스로 마을 뒤로 돌아들어가 산모롱이를 하나 넘으면 목장이 나오고 곧 길은 숲속으로 이어진다. 구봉으로 접근하기에 이상적인 이 길은 구봉2봉(동네쪽에서 가까운 봉우리부터 치면)으로 접근하는 능선으로 연결된다. 그나마 산꾼들에게 가장 편리한 구봉접근로를 점지해준 능선이 이 능선이다. 구봉암봉에 비해 흙길인 이 능선은 걷기가 좋으나 주변의 수림이 시야를 가린다. 20분쯤 올라가면 두번째의 묘가 나오고 다시 15분쯤 올라가면 이번엔 왼쪽 풍경이 보이기 시작한다. 정상인 구봉산과 구봉산자락 아래 꼭대기부분만 조금 보이는 야트막한 8,9봉과 2봉아래의 단애가 매우 위압적이다. 암봉 아래의 골짜기도 깊고 암봉의 험상궂게 형성된 울퉁불퉁한 단애가 경관을 압도한다. 2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바윗길이지만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다. 구봉산 9봉의 암질은 절리현상이 활발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암봉이 뭉툭해보인다. 진행되고 있는 현상도 큼지막한 바윗덩이가 빠져나가는 게 아니라 작은 돌맹이 같은 미세한 돌이 떨어져나가는 박리현상만이 눈에 띌 뿐이다. 그래서 봉우리 사이의 골짜기에 떨어진 돌을 보면 큰 돌이나 바위는 하나도 없고 작은 돌멩이만 널려있는 너덜지대가 보인다. 2봉에 올라선 다음 계곡쪽으로 바싹 붙어서서 주위를 바라보면 조망이 더할 데 없이 시원하다. 1봉 뒤쪽으로 보이는 도로와 전답은 1봉옆 단애의 눈부신 고도감을 반영하고 있고 1봉위의 소나무가 정겹다. 3봉은 조금 더 높게 조금 더 험하게 다가서 있다.
2봉에서 3봉으로 가는 길과 3봉에서 4봉으로 가는 길은 쉬운 편이다. 로프도 한두군데 있지만 5봉은 9봉가운데 제일 높은 봉우리라 4봉에서 올라가는 경삿길이 조금 길다. 5봉에 올라서면 9봉중 제일 높은 봉우리도 올랐겠다, 앞으로 별다른 난관이 없어보이고 남은 봉우리들은 5봉이나 3봉처럼 높지 않고 야트막한 게 이젠 9봉을 타는 일은 곧 끝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노트에도 이렇게 적었다. "야트막한 봉우리들만 남았다"고.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평탄한 테라스형 정상을 지나 내리막길에 도달하자 급경사에 긴 로프가 걸려 있고 길은 깊은 협곡속으로 나 있었다. 몇초만에 노트의 기록을 수정해야 할 판이었다. 이렇게 되자 깊은 골짜기로 내려가 보니 별거 아닐 것 같은 봉우리는 오히려 5봉보다 더 확실하고 더 험한 미봉으로 눈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것이었다. 5봉을 내려갈 때와 6봉을 올라갈 때는 로프가 확실한 안전도우미가 되어준다. 6봉에서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역시 나머지 봉우리는 야트막했고 별 어려움은 없어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6봉을 내려서는 데와 7봉을 올라가는 데는 조금전과 다르지 않는 급경사 내리막길과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속으로 시간이 빨리 지나는 것 같아 낭패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예기치않은 암봉정수리로의 급경사 오르막 내리막의 반복은 지리산 써레봉의 경험이후 가경이 연이어 펼쳐지는 경관미와 함께 산행의 재미를 만끽하기에 충분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의무적으로 사진을 찍어야 하는 일이 없다면, 그리고 메모를 할 필요가 없이 오로지 산을 타는 기쁨만으로 이 코스를 횡단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굉장한 기쁨의 원천이 되는 산행코스의 최적의 조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7봉에 올라서서는 나머지 봉우리가 야트막하다고 쓰지는 않고 속으로는 그렇게 느끼면서 조용히 사진만 찍었다. 이젠 정말 두개의 봉우리만 지나면 너무나 재미있는 9봉횡단도 끝나는구나 하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말을 노트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또 노트를 수정해야 했을 터였으니까. 이번엔 산꾼으로서의 자존심도 건드렸다. 8봉은 야트막한 봉우리도 아니고 올라가기에도 까다로운 봉우리였기 때문이었다. 로프줄을 의지해 7봉을 내려 서니 8봉도 6봉이나 7봉과 같은 미끈하면서도 험준한 봉우리였다. 8봉오름길로 보이는 측면의 꽤는 완만한 암사면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그곳을 오르자면 신발이 암벽화라든지 짐이 가볍다든지 해도 확보가 필요할 것 같았다. 물론 리본이 나풀거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올라간 흔적은 보여주고 있었지만 확보자가 없을 땐 무리였고 설사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8봉에서 9봉으로 갈 수 없을 경우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안전설비가 없다는 것은 그곳이 코스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그때 9봉쪽에서 "야호"라고 외치는 소리가 났다. 외치는 곳을 바라보니 등산배낭을 지지않은 두 사람이 "9봉쪽에서 8봉으로 가는 길을 아느냐"고 물어온다. 길이 없을 것 같다고 얘기해주고 암릉우회로로 내려와 기가 꺾인 채 8봉아래를 패잔병처럼 슬슬 걸어 지나갔다. 새로 사 신은 신발의 안전성에 대한 회의와 카메라장비의 무게가 자꾸 위험의식을 피어올린다. 9봉과 8봉사이엔 개구멍이 하나 뚫려있어서 두 봉우리는 그 위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8봉을 지나 9봉 뒤통수에서 나마 9봉으로 올라가보기로 한다. 역시 8봉을 올라가지 않은 쪽이 현명했다는 생각이 든다. 초보자는 경험자의 인도없이 8봉을 오르려고 시도해서는 곤란할 듯하다.
9봉에서 구봉산 정상을 보면 마치 삼각형의 거대한 벽을 보는 듯하다. 기울어진 햇살이 비끼는 산록은 아침나절에 보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산록에 있었던 암릉과 바위들이 릴리프를 뜬듯 살아나고 입체적인 산의 굴곡이 회복되어 있다. 그렇게 보이는 산록은 대단한 급경사이고 군데군데 단애가 있는 험준한 모습이다. 그 산록 깊숙한 복부에서 물소리가 들려온다. 자세히 보니 폭포 같은데 보이기는 하지만 뚜렷하지는 않다.
9봉에서 북쪽으로 보는 경관도 좋았다. 정상에서 운장산으로 향하여 뻗은 봉우리 중 첫번째 봉우리인 복두봉이 또렷하고 명도봉, 명덕봉등 주천면일대의 산들도 유난히 깔금한 대기를 통해 손짓하고 있다. 주천면은 운일암 반일암 비경이 있는 곳이다. 안부에 내려서니 구봉산의 북쪽 계곡 연화골에서 올라온 산길과 남쪽 계곡인 양명저수지에서 올라온 길이 만나 4거리를 이루고 있다. 부근엔 산죽이 무성하다. 이곳에서 단애가 보이고 물소리가 나는 쪽으로 올라가면 구봉산의 두번째 도전이 기다리고 있다.
높은 단애가 솟아 있는데 측면을 이룬 단애는 한번 꺾이면서 굴곡진 곳에 폭포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정상적인 폭포와 함께 또하나의 폭포가 한번 꺾이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단애위에서 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폭포는 마치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지듯이 물을 뿌리며 단애 아래의 급경사 산길과 산곡을 을씨년스럽게 만들고 있다. 단애측면으로 올라가니 단애 위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마치 봄비가 오는 것 같다. 설치된 나일론 로프도 축축이 젖어 있다. 측면으로 솟은 단애에 비해 비교적 정면을 향하고 있는 단애는 아래쪽이 패어들어가 있다. 중간 부분이 배흘림이 된 상태라 폭포 안쪽으로 들어가 패여들어간 부분을 이용하여 올라갈 수가 있다. 어제 내린 비에 수량이 불어 떨어지는 것인지 아닌지는 폭포가 떨어지는 자국이 검게 변색되어 있어서 짐작이 간다. 수량에 차이는 있겠지만 늘 떨어지는 폭포일 듯하다. 어쨌거나 장마철에 구봉산 이 골짜기에 들어오는 것은 상당히 위험한 일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문제는 이계곡이 아니면 9봉쪽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없다는데 있다. 비탈길에 왕모래보다 큰 잔돌층이 두터운 것이 눈에 띄는데 이것은 물에 휩쓸려 떨어진 토사일 것이다. 간혹 큰돌이라도 폭류에 섞여 떨어진다면 사고로 이어질 가능성은 많다. 폭포 뒤쪽에 들어가 물의 발(수렴)을 통해 9봉과 9봉의 단애, 폭포측면의 단애를 바라보면 구봉산의 웅장한 경관의 한 장면이 펼쳐진다. 한마디로 굉장하다는 수식어가 떠오른다. 폭포가 걸려있는 단애아래로 로프를 붇잡고 올라가면 지능선에 닿게 되고 겨우 한시름을 넘긴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산길은 계속 급경사이고 군데 군데 로프도 걸려 있다. 이곳에서도 정상까지는 꽤 시간이 걸린다.
단애아래 바위를 타고 횡단해야 하는 곳도 있고 로프를 붙잡고 바위 사이를 내려서야 하는 곳도 있다. 나타날 듯 나타날 듯한 정상은 나타나지 않고 거대한 암괴사이를 끝없이 방황하는 듯한 느낌이 강해지는 순간 키작은 활엽수림 사이로 길이 순탄해지면서 널찍한 공터가 나타난다. 정상이다. 정상에서는 조망은 난코스였던 9봉이 얼핏 보기에 한 덩어리의 암괴로 보이는 것이 심상하기만 하다. 그 높낮이 하나하나에 얽힌 놀람과 경탄, 땀과 충격은 잊혀진 채 진안-주천사이의 또렷한 도로옆으로 하나의 능선으로 뻗어 있을 뿐이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운장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커다란 파도처럼 밀려오고 주능선에서 남동으로 뻗은 지능선은 몹시 길다. 지능선 중 구봉산 능선과 계곡을 이루는 능선은 굴곡이 심하고 길어 한번쯤 밟아보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정상동쪽은 높은 단애를 형성하고 있어서 정상끝에 서면 독수리가 날며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감이 든다. 하산은 정상을 지나 남릉으로 진행된다. 남릉으로 가다가 뒤돌아 보면 정상은 첨봉처럼 뾰죽하고 정상의 동쪽은 함몰하여 벼랑을 이루고 있어서 산의 동쪽을 무우처럼 잘라낸 것처럼 되어 보인다. 남릉으로 가는 길은 상양명 마을을 내려다 보거나 저수지 위쪽 계곡을 바라보는 조망을 계속하여 즐길 수 있게 되어있어 구봉산의 아름다움을 뇌리에 새겨준다. 해가 기울어질수록 9봉암봉의 윤곽이 또렷해지는 것도 또하나의 즐거움이다.
하산길은 정상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안부에 도착, 계곡으로 내려서는 길과 암릉과 조망을 더 즐기면서 계곡전체를 감싸안으면서 상양명마을로 이어지는 동쪽 능선을 계속 타는 길 두 가지가 있다. 계곡 말미쯤 개울부근에서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