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니다.
퀴즈에 대한 정답은 아래 글들을 읽어가시면 맞추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청의 대전 이전은 이제 불가항력이고 공주의 경제적 폐해와 쇠퇴를 막기 위해 공주시민들은 도청 이전에 대한 대상물 즉 보상을 요구합니다. 동아일보 31년 7월 14일자 기사입니다.
보시기 나쁘시죠? 이 내용을 홍성신문에서 다루고 있기에 현대어로 풀어 쓴 내옹을 올려드립니다. 홍성신문 2013.01.07 기사입니다.
1932년 7월 10일 공주읍사무소 앞뜰에서 개최된 공주시민회 총회에서 시민회 대표들은 ‘도 및 총독부 예산으로 처리해야 할 13가지’와 ‘국비로 시설해 주어야 할 7가지’, ‘당장 해결해야 할 보상요구 3가지’를 결의했다.
지수걸 교수에 따르면 ‘도 및 총독부 예산으로 처리해야 할 13가지’는 △5년제 농업학교 설치 △공주-신상 온천간 도로 개수 △공주-예산간 도로 중 웅진 도강장 폐지 및 연미산 돌아 신관리로 연결하는 도로 개설 △공주-예산 간 도로 중 동천진에 교량 가설 △공주시장을 읍 경영으로 해줄 것 △산성공원 내 도로 개설 △공주신사 직통 참배도로 개설 △백제박물관 지방비로 설치 △읍채 8만 원, 학교조합비 1000원 국비 부담 △시내 하수구 및 교량 신축 △공주-조치원간 승합차 경영 철도 국영 전환 △우편국 옆 도로 신설 △금강대교 건설 촉진이었다.
‘국비로 시설해 줄 것’의 내용은 △철도부설 △의학전문학교 신설 △고등농림학교 또는 고등상업학교 설치 △관립 사범학교 설치 △공병대 주둔 △전매지국 설치 △국립공원 설치 등이다. ‘당장 해결해 줄 것’은 △중선철도(영월-조치원-공주-장항)의 건설 △관립 사범학교 설치 △궁민구제자금의 융통 등이었다.
이는 지역발전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거의 모든 요구였는데, 총독부에 의해 부분적으로 받아들여진 요구사항은 △금강교 가설 △농업학교 개교 △사범학교 설립 △재판소·잠종시험소 등 각종 부속기관의 대전이전 보류 등에 불과했다.
기사의 내용대로 공주시민들의 요구사항 중 일부만이 받아들여집니다. 그 중 가장 상징적인 시설은 금강교입니다. 원래 금강에는 다음의 사진과 은 다리(목교)가 있었다고 합니다.
의관을 갖추어 입고 뒷짐 진 양반님네와 바지가랑이를 걷고 지게 진 서민의 모습이 대조를 이루네요.
사진 밑의 설명대로 목교는 홍수만 나면 고립상태 이었기에 도청 이전 전부터 공주시민의 염원이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히 설치되어야 할 다리가 도청이전의 보상물로 둔갑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금강철교 가설도 순조롭지 않았나 봅니다. 홍성신문 관련 기사입니다.
이중 가장 큰 사업인 금강대교 건설에는 10만 원의 예산이 책정되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공주읍민들은 냉담했다. 교통이 불편해 도청을 옮긴다고 해놓고 금강대교를 건설한다는 데에 대한 반발이었다. 1932년 1월 10일 금강대교 기공식이 있었다. 그런데 이날 기공식에서 뜻하지 않은 시위가 벌어졌다고 한다. 변평섭의 저서에 따르면, 나룻배로 사람들을 나르던 뱃사공들이 오랜 삶의 터전을 잃게 되자 다리 건설 반대시위를 벌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당시 오카사키 지사는 즉석에서 뱃사공들에 대한 생계대책을 세워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금일봉을 주어 회유했다고 한다. 사태는 일단 진정되었지만 며칠 후 늙은 뱃사공 한명이 “평생 지켜온 나룻배를 잃을 수 없다”며 결국 자신의 나룻배에서 음독자살을 했다.
우여곡절 끝에 시작된 공사인 때문인지 공사도중 인부가 물에 빠져 숨지기도 했고, 그해 초가을 많은 비가 내려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뱃사공의 넋이 구천을 맴돌며 공사를 방해한다”고 하기도 하고 “곰나루의 곰이 노했다”고 하기도 했으며, “도청을 빼앗아가고 시작한 공사인데, 잘 될 턱이 있겠느냐”며 빈정대기도 했다.
이런 여러 우여곡절을 겪고서 금강철교는 완공이 됩니다.
공주시민들의 보상요구에 대한 또 한가지가 공주 박물관입니다. 박물관 개관에 대한 내용의 신문기사입니다.
지금은 박물관이 원래의 자리에서 이전했지만 원래의 자리른 충남도지사 공간 자리라고 합니다. 도청 이전 전 충남도지사 공관 모습입니다.
대상(보상)시설의 하나로 오늘날 공주를 교육의 도시로 불리우게끔 한 공주농업학교(현 공주생명과학고 구 공주농고)와 공주여자사범학교(현 공주교대)도 설립됩니다.
공주 농고는 설립 당시 최초의 교사로 도청자리 (현 공주사대부고 자리)를 썼다고 합니다.
또한 김갑순씨 개인소유였던 공주시장을 공주읍경영으로 바꿔달라고 하는 요구도 관철됩니다.
이렇게 해서 파란만장했던 충남도청에서 대전으로의 이전은 마무리 됩니다. 하지만 그 도청도 80년이 지난 2013년 내포신도시라는 홍성 예산의 중간지대로 이전하게 됩니다. 대전의 도청이 이전계획이 나올 무렵 공주에서는 환청운동이 벌어졌었습니다. 그 의의에 대하여 홍성신문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나라를 일제에 빼앗기고 도청마저 빼앗겨버린 당시 공주읍민들의 마음의 상처는 무엇으로도 치유될 수 없었다. 따라서 도청 이전이 거론되던 시기에 공주에서는 이를 유치하려는 운동을 ‘환청운동’이라 했다. 도청을 원위치 시킨다는 의미였다.
역사는 돌고 도나 봅니다. 충남보다 먼저 도청 이전이 있었던 경남의 경우 부산으로 이전된 도청이 창원으로 이전 됐고, 충남의 경우 대전으로 갔다가 내포 신도시로 이전 되었습니다. 공주에서 대전으로 도청이 이전될 때 공주시민의 격렬한 저항이 있었지만 대전에서 내포 신도시로 이전 할 때 대전시민은 그저 약간의 서운한 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자족기능을 하고 사실 충남과는 공식적으로 관련이 없는 대전광역시이기에 그렇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1931년 당시의 공주시민들은 나라를 빼앗긴 마당에 도청마저 빼앗긴 설움의 역사였을 것입니다. 그 이전에 백제시대에 신라에 패망한 설움과 한도 그 때까지 남아있으리라 생각됩니다.
1931년 당시 도청이전을 둘러싼 공주 및 다른 도시들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발전하는 도시들 중에 하나입니다. 대전은 광역시 승격 후 국가 행정 및 과학기술의 도시로 거듭났습니다. 조치원은 국가 행정수도가 되어 세종시라는 이름으로 거듭났습니다. 천안은 현재 서울특별시 천안구라고 불리울 만큼 수도권 도시로 발전되었고 한국에서 제일 살기 좋은 말그대로 하늘 아래 편안한 고장이 되었습니다.
공주는 그에 비해서 발전이 늦는 것은 사실입니다. 일부가 세종으로 편입되었지만 원 공주는 조용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공주는 수천년을 이어온 역사의 도시입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이 공주시민과 공주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의 핏속에 흐르고 있습니다. 세상이 과학기술적으로는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지만 그에 반하여 정신적인 부분 심적인 부분은 쇠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점점 더 마음의 여유가 없어지고 분명 옛날보다 잘 살고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무엇인가에 쫓기든 물질적인 부분을 채우기에 열중합니다. 그래서 요즘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같고 정신적인 부분을 채우려고 노력하는 것 같습니다.
공주는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적인 부분, 정신적인 부분이 충만한 도시입니다. 예전 80년대 신문을 보자니 많은 소설가, 극작가, 영화감독들이 작품을 쓰기 위해 공주에 터를 잡았다고 합니다. 물질적인 발달이나 발전은 한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향후 공주는 인문학적인, 정신적인 면에서 대표성을 띄는 도시로 성장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개인적 생각입니다. 수천년을 이어온 정신적 우위의 바탕위에 인문학적,문학적, 예술적 도시로 키워갈 수 있다면 앞으로 수천년을 한국인의 정신적 수도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부족한 글임에도 많이 읽어주시고 댓글도 달아주시며 격려해주신 해월스님 이하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향후 공주는 인문학적인, 정신적인 면에서 대표성을 띄는 도시로 성장하는 것이 맞지 않나 하는 개인적 생각입니다. 수천년을 이어온 정신적 우위의 바탕위에 인문학적,문학적, 예술적 도시로 키워갈 수 있다면 앞으로 수천년을 한국인의 정신적 수도로 자리 잡을 수 있는 길이라 생각됩니다,
물질적 풍요와 번창하고 화려함 뒤에 잃어가는 것들이 있습니다.
공주는 인문학적, 문학적, 예술 등 정신적인 수도로 자리 잡아감이 잘 맞을듯합니다.
도청이전의 보상인 대상물에 관한 기사를 읽으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무어라 표현하기 힘든 느낌이 듭니다....
공주가 한국인의 정신적 수도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프로젝트가 세워지고 그 실천이 이루어지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기원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