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괴 정 ***
갓디,갓뒤,지북(枝北) : 숲의 뒤쪽에 자리잡은 마을이라고 하여 갓디라 한다. 여러 姓氏가 살고 있는 산재 부락으로 주민들의 협동심이 강하여 1974년도에 자립마을로 선정되었으며 1974년도 대통령 하사금을 받았다.
개상골,채상곡(採相谷),개쌍곡(介雙谷) : 약 1500년 경 마을 뒤에 있는 平山 甲氏 基가 개의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산골의 지형이 채상[개상]처럼 생겼다.
까칠개,작평(鵲坪) : 1600年 경 安東 權氏가 개발한 마을로 마을 앞 넓은 들에 두 내가 합하되 비가 오면 들이 水浸되어 듬벙('웅덩이'의 사투리)이 되었는데 그 때 들옆에 있는 野山에 늘 까치떼가 모여 살아서 까칠개라 하였다.
바래미,발산(鉢山) : 1600년 경에 마을이 생길 때 서향집을 짓고 보니 바람이 심하게 불어 바래미라고도 하고, 마을 뒷산 모양이 바릿대(鉢) 같다해서 바래미라 했다 한다.
절디,절뒤,사후(寺後) : 1500년 경에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 흔적이 없으나 절 뒤에 마을이 있었다고 하여 절뒤하고 한다.
솟절,솥절,소사(小寺),송사(松寺),정사동(鼎寺洞) : 갓뒤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조그마한 절이 있었다하여 솟절이라고 하며, 1500년 경 甲始生(上將公)이라는 선비가 尙州에서 이주 개척하면서 鼎寺洞이라고도 했다 한다.
수박골,수박곡(水?谷) : 1600년경 약수가 있어 그 물을 마시면 어떤 병이든 고쳤다고 하나 현재는 그 흔적이 없다. 마을 앞에 수박과 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수박골이라고 한다.
영배이 : 갓디 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朴氏가 대부분이며 밭농사를 주로하고 있다. 마을 뒤에 영배이 골이라는 골짜기가 있다
*** 매날 . 번걸 ***
매날,매산(梅山) : 새터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梅花落地形의 명당이 있다고 한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梅谷에 속했다 하며, 벼 農事를 주업으로 하고 있다.
미곡(美谷),미질 : 막곡(幕谷),막골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733년 경에 형성되었다. 좁은 농토에서 벼 농사와 밭농사로 생홀하고 있다.
번곡,번거곡촌(番居谷村) : 매날 북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벼 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마을에 明泉이란 샘이 있는데 수십척 깊이로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새절골,신사곡(新寺谷),신사동(新寺洞) : 밤실 북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1683년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옛날 이 마을의 북서족 산밑에 조그만한 절이 있어서 이 골짜기 일대를 새절골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眞城 李氏 집단 부락이다.
*** 새터 . 밤실 ***
새터,신기(新基) : 梅谷洞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朝鮮 孝宗 때 南氏가 살면서 新安東이라 하였다.
앞에는 봉황산이 자리잡고 있으며 응고개가 洪水 때 터져 도로가 되었다.
응고개 새터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를 응고개라 하는데 원님 행차가 드나들었다하여 원고개라고도 한다. 고개 안쪽이 늪지대였는데 수해를 당했을 때 枝谷宅이란 女人이 自己밭에 물이 드는 것을 막기 위해 응고개를 호미로 파서 물이 흘러 나가게 하니 차차 파여서 고개가 없어지고 평평한 도로가 되었다고 한다.
밤실,율리(栗里) : 새터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며 아랫밤실과 윗밤시롤 나뉜다. 밤나무가 많아서 밤실로 불리었다고 전한다.
*** 오 미 ***
오미골,오릉(五陵),오묘(五畝),미동(美洞),오미(五美) : 마을의 地形이 다섯 가닥의 산줄기가 뻗어 있어 五陵이라 부르다가 후에 五畝로 고쳤다.
五美는, 조선 시대 중기에 이 곳 豊山 金氏의 가족 8형제 중,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한 사실을 크게 칭찬한 말로서 인조 대왕께서 지어준 이름이다.
豊山 金氏의 집성촌으로 동녘골(東村)과 서녘골(西村)로 나뉘어 있다.
장판재(將板嶺) 五美洞의 바로 북쪽에 있으며, ?山 金氏가 처음 이 마을에 정착하던 시기에, 이웃 마을의 박씨와 친선을 도모하여 이 재에서 장기를 두고 놀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죽암정(竹巖亭) 이 곳 金氏가 조선 중기에 건립한 것으로, 동녘골(東村)의 북쪽 뒷산에 위치한다. 무성한 소나무와 대나무 사이의 바위를 헐어 그 위에 지었으며 일족의 친목 행사 장소는 물론, 주로 서실로 활용되었다.
화수당(花樹堂) 동녘골에 위치하여, 이 곳 金氏 일족의 모임 장소로 쓰였으며, 또 서실로 활용되었다.
일제 초기에는 동민 자체로 五陵學術講習會를 열어, 신식 교육을 실시, 항일 사상 등을 일깨웠던 곳으로 현재 豊北初等學校의 전신이다.
보푸래미,보림(甫林) : 五美洞의 서녁골에서 서북쪽과 서쪽으로 좀 떨어진 마을로, 아랫보푸래미(下甫林)와 웃보푸래미(上甫林)로 나뉜다.
아랫보푸래미는 농사를 짓고 살며, 웃보푸래미는 豊山 金氏의 世德祠가 있다.
지방문화재로 지정된 道林追遠祠와 道楊講堂은 조선조 중기의 건물로 유명하며, 이 강당은 김씨 일족의 행사 장소로, 또 서실로 활용되었다.
미내미,미나미,미남리(美南里) : 五美洞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논농사와 밭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뱅개미,반가미,방감(方鑑) : 옛날에는 白楊으로 불렀다고 하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方鑑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安東 權氏들이 살고 있었으나 지금은 名姓들이 살고 있다.
솔가실, 솔갖,송지(松枝) : 오미골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주위에 소나무가 많은 데서 유래되었으며, 高靈 朴氏의 집성촌이다.
개거리,개골,개곡(開谷),용흥(龍興) : 용이 올라 갔다는 데서 유래하여 龍興이라 했다하여 솔갖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벼농사를 주로 하고 있다.
산골(山谷) : 개거리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천수답이던 농토가 수리 시설로 인하여 전천후 옥토로 변한 마을이다.
수릉골,수렁골(水蓉谷),수용리(水龍里) : 마을 앞의 들 이름이 수용(水蓉)들인 데서 연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구한말까지는 60여 가구의 대부락이 형성 되었고, 수리 시설로 주변 농토가 옥토로 되었다.
새랄,사라(仕羅),위라 : 개거리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도랑의 중앙을 중심으로 해서 예천군 호명면 본동과 접경이 되며 호명면 구소재지가 이 곳에 있었다.
절터(仕羅寺) : 新羅時代 마을 뒷산에 仕羅寺라는 절이 있었으며 지금도 절터에는 기왓장이 발견된다.
*** 현 애 ***
감애(甘厓),가매,현애(玄厓) : 본래 豊山縣의 지역으로서 높은 산 밑이 되므로 가매,甘厓,또는 玄厓라 하였는데 高宗 32년(1895) 地方官制 개정때 安東郡 豊北面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양동 新村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玄厓里라고 하였다.
장역골,장여곡(長餘谷) : 玄厓마을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 長餘 골짜기에 있다 하여 장역골이라 했다.
뱁제,백아현(百我峴),백인현(百人峴) : 玄厓마을 서쪽에 있는 고개 밑의 마을로서 옛날 醴泉縣으로 넘어갈 때 고개에 호랑이가 나타나므로 百人이 모여 고개를 넘었다 하여 百我峴,百人峴,뱀재라고 한다.
선바우,입암(立岩) : 마을 앞에 큰 바위가 서 있어 선바우라고 했다고 한 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바위가 벼락을 맞아 땅 속으로 들어가 지금은 옛날 보다 작은 바위가 서 있다.
첫댓글 반가운 지명들이 그런 유래가 있었구나 우리 선조들이 참 지혜로웠다는 생각이 든다.특히 매날
매날..... 나두 1표 꽉!!!!!!
해덕이 참 고생 많다... 나도 1표 꽉......
그이름도 유명한 오미동,,,인조대왕께서 지어준 이름이라네,,,내가 오미동출신아닌가 ㅎㅎ 해덕아 연구도 골고루한다,,수고많으이~~~
수지침 도사님 -소산1,2(엿골포함-김현진-고향)동은 없네-빨랑연구하여 올려라
어떻게? 어디서? 열심이구나 ! 수고했다.. 유익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