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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으로 거북 등처럼 갈라진 중국 윈난성의 저수지 바닥을 살펴보고 있는 원자바오 총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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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의 대세를 말하자면 나뉜 지 오래면 합쳐지고, 합친 지 오래면 나눠지기 마련이다(話說天下大勢 分久必合 合久必分).’ 삼국지 첫머리의 말처럼 중국의 3000년 역사는 분열과 통합의 반복이었다. 문제는 분열의 원심력이 통합의 구심력을 능가할 때 중국 사회는 종종 발전의 동력을 잃고 혼돈에 빠져 신음했다는 점이다. 그래서인지 통합에 대한 중국인의 바람은 집요하고 또 강하다. 이 같은 통합에 대한 갈구를 배경으로 광활한 대륙엔 수많은 리더가 나타났다 스러지고 또 나타나기를 계속하고 있다.
그 리더들을 역사의 무대 전면으로 밀어 올린 동력으로서의 리더십은 과연 어떤 모습,
어떤 색깔로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현재 중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정치인은? 중국인들에게 이 같은 질문을 던지면 십중팔구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라는 답이 돌아오지 않을까 싶다. 비결이 무엇일까.
경제를 잘 챙겨서? 중국 경제가 순항 중이긴 하지만 글쎄다. 그의 ‘경제운영 능력은 과대 포장돼 있다’는 말이 나온다. 미국이 중국 경제와 관련해 주목하는 인물도 그가 아닌 왕치산(王岐山) 부총리다. 그렇다면 남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는 것일까. 이 또한 글쎄다.
그의 풍채 어딜 뜯어봐도 카리스마와는 거리가 멀다. 전임 총리 주룽지(朱鎔基)와 비교하면 천양지차다. 주룽지 총리 재임 시절 그의 호통에 혼이 나간 장관들이 나가는 방문을 찾지 못해 쩔쩔맸다는 이야기가 중난하이(中南海)에서 곧잘 흘러나오곤 했다. 그러나 원자바오가 총리가 된 이후 호통은커녕 오히려 장관들의 만만찮은 반론 목소리가 더 많이 들린다.
그럼에도 중국은 원자바오에게 열광한다. ‘서민의 총리’로 불리던 그에게 이젠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나 붙여지던 ‘인민의 총리’ 칭호가 거론된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게 실감이 나지 않게 인터넷엔 그의 팬 카페마저 생겼다. 인터넷에서 68세의 그는 ‘바오바오(寶寶)’란 애칭으로, 또 그를 추종하는 네티즌에게선 ‘빠바오판(八寶飯)’으로 불린다. 빠바오란 여덟 가지 진귀한 재료로 요리한다는 ‘팔보채(八寶菜)’의 그 ‘팔보’다. 판(飯)은 ‘fan’의 중국식 음역이다.
13억 사람을 움직이는 원자바오의 리더십은 과연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현장의 리더십’이다. 지도자들이 현장을 찾는 경우는 대개 생색을 내기 위해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때 한국은 장쩌민(江澤民) 당시 국가주석의 한국 초청을 추진했지만 실패했다. 왜 그랬을까. 중국 축구대표팀이 참패할 경우 현장에 있는 국가주석의 체면이 말이 아닐 것을 두려워한 관계 당국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원자바오가 찾는 현장은 재난의 현장, 고통의 현장이다. 망신당할 것이란 계산은 아예 하지 않는다. 아니, 전혀 겁내지 않는 듯하다.
원자바오는 1998년 부총리에 취임한 그해 여름 100년 만의 홍수와 맞닥뜨렸다. 8월 중순 창장(長江)의 여섯 번째 물마루가 후베이(湖北)성 징저우(荊州)를 위협했다. 제방을 폭파해 방류하느냐, 아니면 지켜내느냐. 그 ‘핵단추’가 재해대책 총책임자가 된 원자바오에게 주어졌다. 1954년 홍수 때는 방류로 인해 무려 100만 명이 고향을 등져야 했다. 그만큼 방류의 피해와 후유증은 크다.
이 같은 절체절명의 순간에 원은 외쳤다. “죽을 각오로 제방을 지킨다.” 결국 사투 끝에 제방을 지켰고, 그의 삶 또한 지킬 수 있었다. 왜냐고. 그는 방류를 결정할 경우 자신의 몸 또한 장강에 던질 각오를 이미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자신을 중앙으로 발탁한 쑨다광(孫大光) 전 지질부 부장에게 훗날 고백한 이야기다.
죽기를 겁내지 않기에 재난의 현장을 지킬 수 있는 것일까. 2003년 중국을 덮친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사스·SARS)에 맞서 그는 마스크도 끼지 않고 현장을 뛰어다녔다.
2008년 5월 쓰촨(四川)성 대지진 때는 여진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93시간 동안 현장에 머물며 구조작업을 앞장서 지휘했다. 2004년 탄광 사고 현장을 찾아 유가족들에게 “내가 너무 늦게 왔다”고 한 그의 울먹임은 전 중국을 울렸다.
그는 왜 현장에 집착하는가. 실제 현장에 가서 제 눈으로 보고 제 귀로 듣지 않고선 민생의 고단함을 털끝만치도 이해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 중국의 한 여성 지도자가 서부 시찰에 나섰다. 그는 중국이 이제는 어느 정도 발전해 서부도 살림이 좀 나아졌겠지 하는 기대를 했었다.
그가 서부 오지의 한 주민에게 물었다. 아침엔 무얼 드십니까. 감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점심은요. 역시 감자지요. 그럼 저녁은 무얼 먹습니까. 감자밖에 먹을 게 있나요. 이 여성 지도자가 베이징으로 돌아와 이 이야기를 전할 때 중국 지도부 전체가 울음바다가 됐다고 한다.
우리 지도자가 해외 출장을 갈 때 그곳에 거주하는 우리 교민의 살림이 어떤지 얼마나 챙겨보는지 궁금하다. 그저 잘나가는 교민 몇 명 초청해 이야기 듣는 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까. 기업 총수도 마찬가지다. 자기가 내보낸 주재원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직접 집으로 찾아가 본 이들이 얼마나 될까.
2003년 총리 취임 직전 이미 중국의 2500개 현 중 1800개를 방문했다는 그의 현장 중시정책은 총리 취임 뒤에도 바뀌지 않았다. 2004년 말 그가 쓰촨성의 한 농촌을 찾았을 때였다. “아무 걱정 없다”는 농민의 말을 그는 곧이듣지 않았다. 계속 문제가 없느냐고 채근했다. 마침내 그의 부인이 입을 열었다.
밀린 임금 2200위안을 받지 못했다고. 수행했던 현지 지도자가 사색이 된 건 불문가지다. 산시(山西)성의 한 공장을 찾았을 때 그는 여공들과의 식사를 요구했다. 공장 지도자는 “공장엔 식당이 없다”고 둘러댔다. 총리를 좋은 요릿집으로 초대해 점수를 따려는 생각이었지만 끝내는 들통이 났다. 원자바오는 여공들과 거친 음식을 먹으며 공장 상황을 파악했다.
현장의 리더십을 고수하던 원자바오가 중국의 국민적 스타로 떠오른 건 2006년 2월의 산둥(山東)성 농가 방문 때였다. 11년 전 입었던 주름지고 해진 녹색 겨울점퍼를 입고 산둥성을 다시 찾은 모습의 사진 두 장이 한 네티즌에 의해 인터넷에 오르면서다. 그로부터 다섯 달 뒤 허난(河南)성을 시찰할 때는 2년 전 수선한 적이 있는 운동화를 다시 기워 신은 게 화제가 됐다. “이런 총리가 있는 한 중국엔 희망이 있다”는 글이 중국 온라인을 뒤덮었다.
일각에선 이를 두고 고도로 연출된 ‘쇼’라고 비난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한데 문제는 중국인들이 총리가 ‘쇼를 하는 것이냐 아니냐’에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평소 그가 그렇게 현장을 누비며 살아온 것을 알기에 ‘쇼’라는 지적에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지질부 차관으로 승진해 베이징에 있을 때의 그는 새해가 되면 모교인 베이징 지질학원에 가 스승을 찾아뵙곤 했다. 그때마다 승용차를 제쳐 두고 자전거를 타고 갔다. 사실 그의 현장 방문 중시 정책이 지질학원에 다닐 때 배양됐는지 모르겠다. ‘조국의 지질사업을 위해 무쇠다리를 만들자’라는 구호 아래 ‘무거운 짐 들고 10㎞ 행군하기’는 지질학원의 전통적 행사였다.
이제 그의 ‘민중 속으로의’ 현장 방문은 비단 중국에 그치지 않고 있다. 2007년 4월과 2010년 5월 두 차례 한국을 찾았을 때 그는 한강 시민공원을 찾아 조깅을 하며 서울시민과 어울렸다. “이렇게 안 하면 일반 시민을 만날 수 없다”고 그는 말했다. 두 차례 모두 나는 그와 함께 조깅을 하며 취재할 기회가 있었다. 두 번째 조깅은 내게 상처를 안겼다. 그의 빠른 뜀을 쫓아가다 땅바닥에 엎어져 무릎이 까지는 일을 당했으니 말이다. 그가 지질학원 재학 시절 국가대표급 등산 선수의 칭호를 얻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고 있긴 하지만….
나는 중국에서 그를 만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를 직접 보고 싶으면 현재 재난을 맞거나 고통을 받고 있는 중국의 한 현장을 찾으면 된다. 올해 여름 그는 필시 홍수 피해를 본 지역에서 이재민들과 함께 밤을 지새우고 있을 것이다. 2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까지 14년 동안 간쑤(甘肅)성의 오지를 누비며 광산을 찾아 헤매 다닌 터라 풍찬노숙에는 이골이 나 있는 그다.
그런 그를 쑨다광은 ‘간쑤의 살아있는 지도(甘肅活地圖)’라고 극찬한 바 있다. 총리 8년째로 중국 곳곳을 누비고 있는 그는 이젠 ‘중국의 살아있는 지도(中國活地圖)’가 되어 가고 있다. 그는 결코 앉아서 문제 해결 방안을 찾지 않는다. 언제나 현장이 답을 준다고 믿는다. 이게 바로 그로 하여금 늘 고통받는 현장을 찾아 현장의 리더십을 발휘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원자바오의 저우언라이 따라하기?
원자바오의 저우언라이 따라 하기가 만만치 않다. 44년 세월의 차이가 있지만 원자바오는 저우와 마찬가지로 15세 때 톈진(天津)의 난카이(南開) 중학교에 입학했다. 저우는 성적이 우수해 입학 2년 만에 학교에서 유일한 학비 면제 학생이 됐다.
원도 뒤질세라 눈에 불을 밝히고 공부한 끝에 반의 학습위원이 됐다. 체육을 좋아해 새벽마다 조깅에 나섰던 저우를 본받아 원도 조깅을 즐겼다. 원은 농구와 야구에도 열심이었다. ‘신중하고 상대를 배려하며 매사에 열심이라는’ 저우의 성격 또한 원은 쏙 닮았다.
저우가 모교에 ‘나는 난카이를 사랑한다(我是愛南開的)’는 글을 남기자 원은 ‘난카이는 영원히 젊다(南開永遠年輕)’는 글을 학교에 보냈다. 그런 원에게 이제는 저우에게나 붙여졌던 ‘인민의 총리’라는 칭호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원이 저우를 영원히 따라 하지 못할 게 한 가지 있다.
무려 스물여섯 해를 총리로 지낸 저우의 기록만큼은 깨기 어려울 것이란 게 중론이다. 중국은 1949년 건국 이래 저우언라이→화궈펑→자오쯔양→리펑→주룽지→원자바오 등 불과 여섯 명의 총리만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