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
세상사람 어느 누가 멋스럽지 않기를 바라랴. 그리고 그들은 모두 신체의 어느 부위나 행동, 표정이나 언어습관 한 가지에라도 자기만이 가진 독특한 멋스러움이 있다고 內心 믿고 있다. 사실 그렇기도 하다.
사전에 보면 멋의 뜻을 ① 세련되고 풍채 있는 몸매 ② 아주 말쑥하고 풍치 있는 맛, ③ 온갖 사물의 진미 등으로 정의했다. 이를 보면 멋의 개념이 아주 넓게 쓰여서 그 언어의 뉘앙스도 다양하다. 우선 멋의 두 가지 측면, 즉 외형적 측면과 내면적 측면을 들 수 있겠다. 외형적인 것은 우리의 시각으로 바로 느껴지는 부분이다. 사전 ①의 개념처럼 몸이 잘 생긴 사람을 지칭한다. 이목구비가 뚜렷이 반듯하고, 적당한 밀도의 잘 생긴 눈썹, 산만하지 않은 이마와 마춤한 인중(人中), 도톰한 입술과 가지런히 놓인 치아, 알맞게 살이 오른 윤곽에 건강한 피부색을 말한다. 하지만 이 모두가 한결같이 잘 생겼다고 해서 멋스럽다고 할 수는 없다. 혹자는 왕조현의 눈에, 임청하의 코, 장만옥의 입술을 말하지만 그것보다는 이 여러 부분이 조화를 이루는 공리의 표정연기가 멋이 있다. 즉 멋이란 어느 작은 한 부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고, 여러 부위들이 어울려 해조(諧調)를 이룰 때 우러나는 자기만의 것이니, 절대 남의 것을 본받을 수 없고 같아질 수도 없어, 잘못 흉내내면 한단지보(邯鄲之步)가 되고 만다.
성형외과 의사의 큰 고민 중의 하나가 성형하려는 당사자가 유명 배우나 탤런트의 사진을 들고 와서 그 사진의 인물처럼 고쳐달라는 주문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사진처럼 똑같이 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그렇게 고친대도 그 사진의 주인공처럼 멋스럽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조화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멋이란 꾸밈없이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개성적 조화를 말한다. 물론 인공적 멋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인공이 인공을 넘어 자연에 닿을 때, 그곳에 멋이 생기고 맛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일본문화를 인공적인 멋의 예로 자주 거론한다. 그들의 정원은 어느 곳 하나 세련된 인공미를 연출하지 않는 것이 없다. 야트막한 굴곡진 연못엔 비단잉어가 놀고, 흰모래나 자갈을 곱게 깔아 써레로 골지게 밀어놓은 지변(池邊)의 풍경은 어딘지 간지러울 정도의 인공이 가해진 것들이다. 그러나 그 정원에는 자연이 축소된 소세계가 있고, 그들의 무쇠 주전자에서 끓는 물소리는 해풍을 받는 송림을 연상시키는 자연과의 결부가 있는 것이다.
미인을 말할 때 ‘구름 속에 뜬 밝은 달(如雲間之明月)이요, 물 속에 핀 연꽃 같다(若水中之蓮花)’라든가 초승달 같은 눈썹, 꾀꼬리 같은 목소리 등등 모두 자연과 어우러져야 멋을 부릴 수 있었다. 하필 얼굴뿐이랴. 학 같은 목에 섬섬옥수를 드리우고, 적당히 굴곡진 둔부며 쭉 빠진 각선미는 멋이 없을 수 없다. 이는 남성의 경우도 같다. 굳게 다문 입술과 타는 듯한 눈망울, 억센 팔다리에 떡 벌어진 어깨, 건강미 도는 피부에 조화로운 두발(頭髮)을 가졌다면 누가 멋스럽다고 않겠는가. 그렇다고 멋이 이처럼 잘 생긴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검게 탄 피부에 자그마한 키의 여인에게서도 멋을 찾을 수 있고, 가녀린 몸매에 깨끗한 인상의 男性에게도 멋은 있다. 그뿐이랴. 이 같은 천품(天稟)에 의상과 화장(化粧)을 더하면 이는 또 다른 멋이 연출된다. 이즈음은 코디라는 전문직이 있어, 그 때와 장소, 분위기 등을 고려해서 연출하니 기대 이상의 독특한 멋이 탄생된다. 청초함, 우아함, 화려함, 정숙함, 발랄함이 모두 화장과 의상 그리고 동작과 표정 및 언사에 따라 결정된다. 한편 이런 멋을 느끼는 사람 즉 보는 이 개개의 취향에 따라 달리 평가되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때때로 여인의 의상은 말할 것도 없고, 그녀의 산뜻한 화장에, 스카프 하나에, 브로치나 귀고리에, 에그소틱한 속눈썹 화장에, 아무렇게나 걸친 모자에, 어울리는 선글라스에, 적당한 크기와 무늬의 핸드백 하나에도 친근감 주는 멋과 영탄을 자아내게 된다. 그가 남자라면 옷과 어울리는 Y셔츠 색깔에, 보는 이의 눈을 밝게 하는 넥타이에, 커우스 보단에, 머리 모양에, 애연가라면 담배 피우는 모습에, 미소짓는 눈과 은은히 풍겨오는 체취에서 멋스러움을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멋이란 이런 외형적인 것 못지않게 내면적인 것이 중요하고, 그 내면에서 자연적으로 표출되는 멋이 돋보인다.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화술, 좌중을 압도하는 착상, 모두를 기쁘게 하는 유머감각, 몸에 밴 정중한 예절, 부드럽고 믿음직스런 표정 등등이 저절로 드러나는 멋스러움이야 멋 중의 멋이 아니랴. 참다운 멋이란 이 내면과 외면의 조화 속에서가 아니면 얕고 일시적인 것이 되고 만다.
무어라 해도 멋에서 개성을 빼면 앙꼬 없는 찐빵이요, 이몽룡 없는 성춘향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하는 멋은 특정한 배경과 시간 속에서 특정인의 순간적 행위나 표정, 언사에서 발견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크라크 케이블의 콧수염과 불가사의한 웃음, <런던 브릿지: 애수>에서 비비안 리의 애수적 표정, <크레오파트라>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뇌쇄적인 눈, 존 트라볼타의 춤, 박동진의 육두문자, 남인수의 직상승하는 고음, 현인의 바이브레이션, 오지명의 유치연기, 최진실의 눈웃음…… 이런 멋은 다른 사람이 흉내낼 수 없고 억지로 본받으면 귤화위지(橘化爲枳)일 수밖에 없다. 태생, 성장의 과정이 다른 사람이 같은 멋을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이클 조단의 공중 이단뛰기, 홀인 후 그린에서 포효하는 타이거 우즈의 폼, 도티페퍼의 성난 얼굴, 버버리코트에 마도로스 파이프를 문 로버트 테일러가 안개 낀 런던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에서 느끼는 멋은 바로 개성미다.
이처럼 멋이란 고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도식적으로 정제된 것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역설적 파격(逆說的 破格)에서 온다. 가지런한 치아 중에서 살짝 틀어진 이 하나, 한쪽 귀에만 매달린 귀고리, 오색의 메니큐어를 칠한 예쁜 발의 여인, 이 모두는 일상적 통념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일탈이다.
삼라만상에 미가 없는 것이 없고, 그 미는 곧 멋으로 자기화가 된다. 우리가 선입견을 버리고 다가서면 누구에게서나 멋을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