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0년전에 전국검정고시 동문회[전검련]에서 어렵게 공부하고, 힘들게 노력하는 후배들에게 격려를 주기 위해 수기집을 발간하였었습니다.
이 글은 제가 [청량고등학교]에 재직할 때, 고생하는 후배들에게 조금이나마 힘이될 것 같아서 수기집에 원고로 넘겨주었던 것입니다.
혹, 도움이 되신다면 읽어보시고 ......
더욱 노력하여 성공하는 후배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지식나이테]에서 발간한
<<<<< 내안의 힘을 발견하는 자력엔진학습법 >>>이라는 책에보시면
제가 학습한 공부법 그리고 저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도 크게 성공한 다른 분들의 성공담이 많이 담겨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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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한 교실에서 옛날 초등학교 친구들을 모두 만났다. 병석이, 병엽이, 성기, 순덕이, 수자 모두들 고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야! 네가 왜 이곳에 왔니? 넌 초등학교밖에 못 나왔잖니! 이곳은 못 배우고 무식한 바보들이 오는 곳이 아니란 말이야. 빨리 꺼져!”
“너희들 왜 그러니? 난 너희들의 친구잖아. 초등학교를 졸업한 땐 일등도 했잖니! 비록 열 한 명 중에서지만.....성기야, 넌 나와 가장 친하던 친구였잖아. 제발 나도 끼워줘라. 순덕아, 난 네가 제일 좋아하던 애였잖아! 날 따돌리지 말아줘! 나도 배울 수 있어! 난 바보가 아니라고. 바보가 아니야!”
악을 쓰며 깜짝 놀라 깨어났다. 악몽! 기억에도 생생한 악몽이었다. 밤마다 찾아와 나를 괴롭히는 이 악몽,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젖고 있으면 어둡고 구석진 방의 찢어진 문창호지 틈 사이로 뿌옇게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ꡐ그렇다. 배워야 한다. 못 배운 것이 그렇게도 바보스런 짓이란 말인가? 좋다. 너희들이 도대체 무엇을 배웠기에 못 배운 사람들을 멸시하는지 꼭 알아봐야겠다. 꼭 배우고 말거다. 꼭!ꡑ
그즈음 내 머리속은 온통 이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고향은 강원도 인제. 몇구의 화전민들이 돌밭을 일구며 모여 사는 산골이었다.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싼 산봉우리와 그것들을 기둥삼아 드리워진 높푸른 하늘 뿐이었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여느 화전민들처럼 산비탈의 땅을 일구고, 옥수수와 콩, 감자 등을 심어 연명해나가고 있었다. 보고 듣는 것이라곤 산새와 여러 가지 풀벌레 소리, 그리고 가끔 지나가는 군용트럭과 비행기뿐이어서 그런지 별다른 희망, 꿈, 야망 같은 것도 없이 그냥그냥 하루를 살아갔던 것 같다.(아버지는 인제에서 재제소와 정미소 등을 운영하던 나름대로 ‘한가닥’ 하셨던 분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사업에 실패하여 산골짜기에서 화전민 생활을 해서 가족을 부양하고 있었다.)
초등하교 6학년쯤엔가 처음으로 전깃불을 구경했고, 또 그 무렵이나 돼서 운동화를 처음 신어보았으니까 난 아주 옹골찬 산촌놈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비록 가난하고 처절한 산골 살림이었지만 땀흘리는 보람은 있어서 굶어죽는 상황만은 피할 수 있었다. 오남매 중 둘째였던 나는 형과 함께 집에서 30리 정도 떨어진(정확히는 모르지만 그렇게 느껴졌다), 전교생이 오륙십명도 채 못되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높은 산을 두 개 넘으면 신작로가 나오고 거기에서 학교까지 버스(합승)가 있었지만 나는 한번도 타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버스 요금 15원이란 우리들에게 너무 큰 돈이기도 하였지만 그 정도 길은 으레 걸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지냈으니까.
요즈음 도시의 초등학교에 비하면 단조롭기 짝이 없는 생활이었지만 그 시절에 관한 기억들이 많다. 여름에 약간만 비가와도 개울물이 불고 겨울엔 또 조금만 눈이 와도 산길이 미끄러워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방학 때 받아보는 가정통지표에 결석일이 출석일보다 훨씬 많았다. 머나먼 등하교길에 발이 아프고 배가 고파오면 돌을 집어 푸른 하늘로 날려 산새들을 쫓아보기도 하고, 길섶에 숨은 머루, 다래, 딸기 등을 따먹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시절이 나에겐 가장 낭만적인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일시에 바뀔 수도 있음을 알았다.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정부의 자연보호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된 화전민 정리사업 여파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정들었던 산골을 떠나야만 했다. 아무런 생활대책도 없이 산을 내려온 우리 가족이 정착한 곳은 화천댐 상류의 작은 읍소재지인 양구였다. 거기서 우리는 다시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며 열심히 땀을 흘렸다. 나는 우리 가족이 처음으로 논농사를, 그것도 수천 평씩이나 짓는다는 것이 기뻤으며 농사만 잘되면 중학교에 보내주겠다던 부모님들이 무척이나 고마웠다. 그래서 어린 몸이지만 부모님을 도와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비참한 결과를 맞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순박한 화전민인 우리 가족이 쉽게 발을 불일 수 있었던 곳이니 어떤 땅이었겠는가. 그곳은 조금만 비가 많이 와도 화천댐이 범람하며, 알곡이 익어갈 무렵에 비가 내리면 일년내내 지은 농작물이 물속에 잠기게 되는 땅이었다.
약초를 캐거나 품을 팔아 끼니는 이어갔지만 이삼년간의 농사를 고스란히 수마에 빼앗기고 나니 우리 가족은 더 이상 생활을 꾸려갈 수 없었다. 마침내 우리는 각자가 살기 위해서라도 뿔뿔이 헤어져야 했다. 물론 돈을 벌면 다시 모이자는 막연한 기약은 있었지만 그것은 헤어지는 가족들의 불투명한 희망에 불과했다.
초등학교밖에 안 나왔지만 그래도 밥벌이는 할 수 있다는 생각에 형과 나는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가 1977년 10월, 나는 화천댐에 낚시하러 왔던 어떤 서울분이 소개해준 상봉동의 조그만 가내공장에 취직했다. 쇼핑백을 만드는 곳이었는데 주인과 나, 단 둘이서만 일을 했다. 그것은 신식 머슴살이나 다름 아닌 그런 생활이었다. 15살 어린 몸에 월급도 없고 용돈도 없는 춥고 배고프고 서러운 생활이었지만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기대 속에 열심히 일했다.
난 그곳에서 또 한번을 울어야 했다. 세 번째였다. 정들었던 화전민촌을 떠날 때, 양구에서 하나밖에 없던 누이동생이 죽었을 때, 그리고……. 밤마다 부모형제가 그리웠다. 달이 밝은 날이면 주인집 옥상에 올라가 북쪽하늘을 바라보면 가족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짓곤 했다.
(어릴 적에 양구 동면이라는 곳에서 몇 개월 동안 양치기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젖을 뗄 무렵인 새끼 양을 어미에게서 분리해서 우리에 가두고 어미만 풀을 뜯기러 산으로 데리고 간 적이 있는데, 그러면 그 새끼 양은 온 마을이 떠나갈 듯이 울어대며 겅중겅중 뛰었었다. 그렇게 발광을 하다가 가끔 밧줄이 목에 감겨 죽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마치 그 새끼 양과 비슷한 심정이었던 것 같았다.)
하늘에 둥실 밝은 달이 금방이라도 엄마의 얼굴을 보여줄 것만 같았다.(어미 양도 하루 종일 새끼를 찾느라고 풀도 듣지 않고 목을 길게 배서 마을만 바라보고 있었었다.)
고되고 외로운 공장생활이었을망정 밥은 굶지 않고 있었는데 주인 아줌마가 가줄한 뒤로는 밥마저 굶는 일이 빈번해졌다. 돈도 기술도 바라보기 힘들게 되자 나는 직장을 옮겼다. 시흥동에 있는 플라스틱 성형 공장이었다. 힘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었기 때문에 거기서도 숙식만 제공받기로 했다. 한달에 용돈은 7,600원을 받기로 했다. 기술만 있으면 누구나 사장이 될 수 있다는 공장장의 말에 나는 엄마 아빠 생각을 덜할 수 있었다. 열심히 일을 배워 사장이 되면 큰 집을 짓고 모든 가족이 영원히 함께 살아야지 하면서 나는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일년, 이년이 지나도 기술은 가르쳐주지 않았고 월급도 그대로였다.
내 생활은 의미 없이 흔들거리는 시계추처럼 공장에서 기숙사로, 기숙사에서 공장으로 왔다갔다 했다. 말이 12시간 맞교대이지 16시간은 꼼짝없이 일을 해야 했다. 한달에 두 번은 쉬기로 했지만 두 달에 두 번 쉬면 다행이었다. 그렇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무식하고 못 배웠다고 받아야만 하는 조롱과 멸시는 정말 참을 수가 없었다. 못 배웠다는 이유로 내 잘못도 아닌데 내 탓으로 당해야 했던 일들, 결국은 내 의견대로 해나갈 것을 가지고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진행되던 모임들, 1년이나 늦게 들어온 애가 고졸 출신이라는 이유로 나보다 몇 배의 월급을 받던 일.
추위도 배고픔도 외로움도 다 참을 만했으나 나의 마지막 지주인 자존심까지 묵살당하는 처우에는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그렇다고 기숙사 구석에서 책이라도 읽을라치면 함께 있는 동료들이 비웃을까 두려워 그럴 수도 없었다. 그저 부끄럽고 서럽고 원망스럽고 창피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80년 11월 세계적 불황이 여파로 다니던 공장이 문을 닫게 되었다. 그때 품이라도 팔려고 서울로 올라오신 부모님이 석촌동에다 보증금 20만원에 3만원을 주고 방 한 칸을 얻어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살고 있었다. 나는 가족들과 합류했다. 헤어질 때의 꿈 중, 한 가지는 이루어진 셈이었다. 비록 여전히 가난하고 궁핍한 우리들이었지만 나에게는 이 세상의 그 어느 곳보다도 포근한 곳이었다. 그냥 한곳에서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다시는 헤어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난생 처음 기도를 했다.
이제는 무엇을 할까?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나이 스물의 청년이었지만 뚜렷한 기술도 없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돈이 많은 형편도 아니었으니 어찌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멀쩡한 청년이 집에서 빈둥대자니 자꾸 막막해지기만 했다. 그때 나는 기가 막힐 정도로 멋진 생각을 해냈다. 돈과 명예를 한꺼번에 움커 쥘 수 있는 길, 프로권투 선수가 되는 것 바로 그것이었다. ꡐ챔피언만 된다면…….ꡑ
나는 궁여지책으로 만든 몇 만원을 모아서 당장 권투장에 나갔다. 이제 그것이 나의 일과가 되었다. 낮에는 집 앞 골목에서 풀빵장사를 했고 밤에는 권투도장에 나갔다. 나는 정상을 향해서 몸이 부서지도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러나 풀빵 몇 개로 주린 배를 채우고서는 그 과격한 운동을 해나갈 수 없었다. 나는 어지러움을 느끼며 쓰러지는 횟수가 늘어갔고 그렇게 2년여를 보내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챔피언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그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1세기 권투는 저렇게 하는거야! 큰 재목감이야'라며 격려하던 관장, 트레이너들의 말소리는 내 마음속에 메아리치며 상실의 아픔을 증폭시켰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우연히 어느 분식점엘 들렀다가 그곳에 있는 잡지를 보게 되었다. 그 잡지엔 배움의 기회를 놓쳤던 어떤 학생이 검정고시로 명문대학에 진학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고 그것을 본 순간 내 가슴은 설레이기 시작했다. 그 즈음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어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던 나였던 터라 그것은 어둠 속의 한줄기 빛이였고 갈증 속의 시원한 샘물이었다. 내 눈은 번쩍 뜨였다. ‘그렇다. 나도 배우자. 배워야한다. 기회를 놓쳤다고 낙담만 할 것이 아니라 의지를 갖고 길을 찾아보자’ 난 마음속으로 크게 소리쳤다.
풀빵장사로는 학원 등록금이 되질 않아 난 가락아파트 공사장을 찾아갔고, 사정사정 끝에 겨우 잡부일을 할 수 있었다. 그때 가 82년 1월, 배울 수 있다는 일념에 혹한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2개월만에 6만8천원이란 돈을 손에 쥘 수 있었고 그 즉시 검정고시 학원 달음박질쳤다. 82년 3월 3일, 나는 그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검정고시 학원을 보는 순간 내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내 삶의 새로운 출발장소가 될 그 학원의 계단을 하나씩 오르며 나는 무수히 많은 생각을 했다. ‘나이 스무살에 중학과정의 공부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을까?’ 계단을 다시 내려 온 나는 손에 땀을 쥐고 학원 밖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왠지 모를 수치심이 밀려왔다. 내 나이 또래 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가 상담실에 앉아있지만 않았어도 덜 창피할텐데........그러나 그 순간 이곳에 오기 바로 전까지 끊임없이 느껴야 했던 멸시와 동정의 눈빛들이 내 앞에 떠올랐다. 다리가 휘청거려 한걸음도 내딛기 어려울 것 같던 내가 용기를 내서 상담실의 문을 열 수 있었던 것은 그 견디기 어려웠던 시선들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것이 부끄러울 것도 없고 두려울 것은 더욱 없는 일인데, 학교 다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에게 늘 열등감을 느껴왔던 당시의 나에게는 디시 공부를 한다는 것이 무척 부끄럽고 두려운 일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도둑질이라도 하다가 들킨 사람처럼 영 부끄럽고 거북했던 내가 한번 상담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부터 새 삶은 시작되었다.
중학교 과정의 고입검정고시를 준비하면서부터 밤마다 나타나던 악몽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세상 모든 것이 즐겁게만 보였다. 늦었다고 생각한 것도 기우였다. 나와 같이 고입검정 고시반에서 공부하는 학생 중에는 50살이 넘은 아주머니, 아저씨도 계셨고, 그런 분들을 보면서 부끄웠던 자신이 오히려 부끄러워졌다. 내 마음은 오랜만에 밝은 빛으로 가득찼고 가로수를 넘나드는 도시의 회색빛 새들마저 나를 위해 지저귀는 것만 같았다.
물론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께는 어떻게 말씀드릴까? 한푼이라도 집에다 보태야 할텐데……. 어렵게 찾은 배움의 계단을 어떻게 해야 오를 수 있을까?’ 사실 마땅한 일자리도 없는 아버지와 여자의 몸으로 공사판에 나가시는 어머니의 좌절과 슬픔은 어떠하시겠는가. 이런 생각을 할 때는 공부를 하고 싶어하는 나의 욕심이 죄스럽기조차 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에게 쏟는 애정은 자녀가 부모님을 생각하는 것에 비할 바 아니라는 것을 나는 그때 또 다시 깨달았다.
'그래 열심히 해봐라. 이 엄마의 뼈가 가루가 되더라도 우리 가족은 내가 먹여 살릴테니 넌 공부나 해라.' 너무나 고맙고 감격스런 격려의 말씀에 나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그렇게 격려해주시는 것만 해도 나에겐 큰 힘이 되니 더 이상 부모님께 부담을 드려서는 안된다고 생가했다. 적어도 학원비는 내 스스로 마련하여야겠다는 생각에서 다음날부터 일자리를 찾아나섰다. 우선 집 가까이에 있는 성수동 공장지대를 헤맸다. 그러나 일을 시키면서 저녁에 학원에 다닐 시간까지 배려해주는 곳은 찾을 수는 없었고, 배움에 목마른 젊은이의 갈증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 하기는 내가 너무 무리한 요구를 했는지도 모른다. 누가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자리를 선뜻 내준단 말인가. 자탄 속에서 지친 다리와 허기진 배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을 모든 것이 다 끝난 것만 같아서 한없이 슬프고 절망스러웠다.
'우선 돈을 좀 모으기 위해서 공부를 미뤄야 하지 않을까?'
배우고자 하는 열망과 당장 눈앞에 펼쳐진 현실이 서로 힘을 겨루며 타협하지 못하고 있을 때 신문배달을 하고 있는 초등학교 6학년짜리 동생이 함께 신문배달을 하자고 용기를 복돋아주었다.
이튿날부터 난 가로등불이 아직 꺼지지 않은 새벽 3시쯤에 일어나 조간신문 돌리는 일을 시작했다. 아파트 5층 계단을 오르내리다보면 한겨울임에도 두툼한 파카에서 땀이 배어나왔지만 저녁이면 학원에 간다는 즐거움으로 힘드는 줄도 몰랐다. 그러나 신문배달로 벌 수 있는 돈은 많은 것이 아니었고, 때때로 신문대금을 내지 않고 이사를 가버린 독자의 구독료까지 공제해야 했기 때문에 매일 새벽잠을 설치고 애써 보았자 학원비 외에 교통비를 대기에도 부족했다. 그러던 어느날 우연히 길을 지나다 주당 5만6천원 정도를 벌 수 있다는 아르바이트 광고를 보았다. 난 당장 그곳을 찾았다. 아르바이트란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보리차를 파는 일이었다. 7백원을 주고 사서 천원에 필기 때문에 하루에(2~3시간 동안) 20봉만 팔아도 6천원을 벌 수 있다는 주인의 그럴듯한 말에 나는 당장 큰 돈을 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일을 시작하기로 하고 물건을 인수받았다.
보리차 행상을 시작하던 첫날 보리차 한봉지쯤은 사줄 법한 어느 커다란 집 앞에 멈추어섰다. 그러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은 쾅 닫guE고, 나는 눈앞이 아찔해지는 절망감을 맛보았다. 이렇게 큰집에 사는 사람들이 보리차 한 봉지 사주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큰돈이 쉽게 벌리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이내 알게 돠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어서 그 일을 계속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리차를 들고 이집저집을 다니는 동안 웃지 못할 일들도 많았다. 아파트 관리인이나 방범대원에게 도둑으로 몰려 하루종일 장사를 망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는가 하면 컴퓨터조회다, 지문조사다 해서 온종일 끌려 다니기도 했다.
아무리 가난에 익숙한 나였지만 그럴 땐 정말 가난히 증오스럽기조차 했다. 거리에서 깨끗한 교복차림의 학생들을 볼 때면 '나도 저렇게 하루 종일 공부만 할 수 있다면…….' 하고 무척이나 부러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거기서 굴복할 수는 없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가장 평범한 진리를 믿으며 악착같이 삶에 매달렸다. 버스 속에서나 골목길을 다니면서나 늘 외우고 소리내어 연습하며 ....배움에 모든 것을 투자했다. 다 큰 놈이 중학생들이 보는 단어장을 들고 다닌다고 사람들이 나만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것 같아 괜히 온몸에 식은땀이 흘러내리곤 했으나, 내 처지에 창피함을 느낀다는 것은 사치라고 생각하며 어느 곳이든지 가리지 않고 책을 펼쳐보았다.
83년 5월 16일, 그날은 고입검정고시 합격자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내가 고입검정고시를 시작한 지 만 1년이 조금 넘은 때이다. 그날 따라 좀 늦게 집에서 나온 나는 학원 앞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보았다.
"축 수석합격 김진환!"
난 이것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 얼른 빰을 꼬집어보았다. 분명 꿈은 아니었다. 나는 합격했다. 그것도 사상 최고의 점수로 수석합격을 했다. 두 눈에선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공사판에서 일하고 계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주름진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정말 감사합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도와주신 선생님 모두.
합격의 소식이 여기저기 알려지면서 많은 분들이 나를 도와주셨다. 모그룹 회장님, 멀리는 외국에 살고 있는 교포, 외항선을 타고 있는 선원들 모든 분들이 내 소식을 듣고 격려의 편지를 보내주었다. 참으로 감사드린다. 난 그분들이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했다. 밤 10시에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온 가족이 한방에서 잠자는 윗목에 밥상을 펴놓고 새벽 2시까지 공부를 했다. 배가 고프면 밖에 나가 찬 냉수를 몇 사발 마시고 다시 시작했다. 처음엔 배가 아팠지만 며칠 지나니 허기를 이기는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나 때문에 두평 짜리 셋방이 더욱 좁아졌는데도 불평하나 하지 않은 부모님과 두 동생을 봐서라도 난 이겨내야 했다.
그 후 일년 만인 84년 4월, 나는 대입검정고시를 치러 합격했고 다시 수개월의 노력 끝에 12월에는 학력고사를 치러 서울대 사회교육학과에 합격하게 되었다. 고입검정고시를 시작한 지 2년 7개월이 만이었다.
세상에는 일말의 공평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노력한 만큼 이룰 수있다는 r서도 깨달았다. 그리고 노력해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록 국제 변호사가 되고자 하는 내 꿈은 달라졌지만, 난 만족하기로 했다. 대학 공부를 하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배고픔과 자유와 평등에 ‘대해서’ 많은 글을 쓰고 많은 말을 할 수 있는 것과 배고픔과 자유와 평등을 잘 아는 것은 별 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개인들의 어깨 너머에서 개인들로 하여금 특정한 방향으로 내몰고 있는 음습한 사회 구조도 깨달았다.
난 내 기억 속에 있는 수 많은 좌절과 슬픔의 기억들- 예닐곱 살쯤인가 돈벌러 가신 아버지를 기다리며 3일을 굶은 뒤 까무러쳤던 일부터 14살쯤 군인들이 먹고 버린‘ 짬밥통’에서 어묵을 건져서 먹던 일, 15살이 되어서는 공장 기숙사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엄마, 아빠를 부르며 사경을 헤매던 일, 대학 시절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불법과외를 하여야 했었던 일-이 모두 내가 부족하고 못난 탓이라고만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회라는 구조를 어렴풋이 파악하게 되었을 때 나는 어떤 일도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리는 즉 ‘사사화(私事化)’시키는 음흉함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끼니를 벌기 위해 일을 해야 하고, 자투리 시간이라도 사용해서 책을 보려면 아랫목, 윗목에서 곤히 잠자는 식구들에게 눈치가 뵈는 그런 환경에서 50점을 얻은 학생이 에어컨, 스팀이 계절대로 준비된 공부방에서 독선생을 모시고 충분한 영양분을 섭취하며 공부하여 100점을 얻은 학생보다 우수하지 못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을 하면서 나는 능력주의사회, 학벌사회, 점수로 줄을 서는 사회가 갖는 포악한 모순을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노력하면, 그래서 실력을 갖추면,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얼핏 생각하면 공평하고 희망적인 말속에서 누구나 같은 조건에서 출발하는 것은 아니라는 너무나 큰 모순을 감추고 있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기회(배움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말도 순진하게 받아들여 '나도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 거두어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며 누구에 대해서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감사하고 희망에 부풀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누가 '이 사회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을 즐겨 외치는지, 그들이 왜 그것을 강조하는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을 때 내가 느낀 좌절은 더없이 컸다.
두려운 것은 나의 이 글마저도 지금 어려운 환경 속에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에게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는 마취제가 될 수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여러 가지 조건이 좋은 사람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더 많은 것을 이루어 낸 몇몇 사람의 사례가 자칫 누구나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그러므로 만약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그 사람 개인의 책임일 뿐이라는 주장의 근거로 이용되는 경우를 나는 너무나 많이 본다.
게으른 사람이 못사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못사는 사람이 모두 게으른 것은 아니다. 개인차를 무시하고 아주 특이한 하나의 예를 편리한 대로 모두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게으른 사람을 질책하는 좋은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환경을 극복하려는 노력마저 비웃는 냉소적인 사회의 거대한 힘에 짓눌려 쓰러진 사람에게는 포악한 짐승의 이발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좌절의 구렁텅이로 내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나의 수기보다는 오히려 손을 내밀어 붙잡아주는 실제적인 도움만이 그를 살리는 길이 아니겠는가? 생각해보면 나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갖게 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유혹을 받기도 했다. 명문대학 졸업이라는 조건을 내세워 나 한 사람 편하게 살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었으며 이 모든 것이 그 동안 내가 애쓴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여기며 스스로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탑의 높이보다는 탑을 쌓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낮은 곳에서 내처지대로 정직하게 살았다. 지금은 내가 그토록 어렵고 타락에 빠져들기 쉬었던 환경에서 용케도 견디어 낸 그날들을 고마워한다. 그리고 내가 그와 같은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고통과 어려움을 공감할 수 있고 이름 없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나는 교육현장에서 많은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내 작은 힘으로 이들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보도록, 바르게 살아가도록 도울 수 있기를 늘 바라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보여지는 사회는 이와 같은 나의 소망을 위축시키는 소식들로 가득하여 내가 선택한 길이 결코 쉽고 편안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나는 귀중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끝까지 지킬 수 있기를 기도한다. 내 작은 힘으로 세상을 사랑, 겸손, 인내 , 친절, 즐거움, 희생 그 자체로 바꿀 수 있다는 주제넘은 생각은 접어두고 다만 질투, 경쟁, 교만, 방탕, 술수들로 가득한 세속과 동화되기를 단호히 거부하며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결심해본다. 다행히 지금 내가 있는 이 교육의 장이 돈과 명예, 권력을 위해 각축하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만족해한다. 그러나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확인하게 될 때 그리고 내 힘이 미약함을 느낄 때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날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회색지대에서 살아가긴 싫다.
거짓이 일상생활에 만연한 이 사회에서 정직하라고 가르치는 아픔을 하늘은 알겠거니 하면서 하루를 보낸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모든 추한 모습들이 하느님의 힘으로 꼭 변화되리란 희망으로 내일을 맞는다.
이 글을 끝맺는 이 시간에도 군수사기관의 민간인 사찰 소식, 유전무죄로 풀려나 모병원장의 소식들이 귓가에 스쳐가며, 저쪽 교실에서 어느 선생님의 열강 하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리고 높고 푸른 중추의 하늘은 창문 밖에 드리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