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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제 4권
제 20 장 8장의 개요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로마서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장은 5장이며 가장 감동적인 장은 8장이다. 8장은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한다. 사람들이 성경을 잘못 해석하는 것은 그들이 문맥에 주의를 기우리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말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정확하게 발견해야 한다. 저는 바울이 여기서 로마서 5장에서 말해왔던 바를 거론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로마서 5장이 가르치고 가장 강조하는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모든 자들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것이었음을 강조한 바 있다. 바울은 5:12-21에서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연합교리를 통해서 같은 주제를 더욱 상세하게 다루어 나가고 있는데, 여기 8:1에서 바울은 바로 그 지점으로 돌아간 것이다.
6장과 7장은 하나의 삽입구와 같은 장으로 바울은 자기의 가르침을 향한 반론과 비난들을 해명하고 특별한 난점들을 다루기 위해서 잠깐 길을 벗어난 것이다.
6장은 우리의 성화가 우리와 그리스도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보증된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리스도께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말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
7장은 동일한 요점을 다른 방법으로 증명하고 있다.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매었으며 그와 결혼하였기 때문에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데 관심이 있다.
7:14-25 율법의 영성은 알고 있으나 율법으로부터 벗어나는 방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전적인 절망을 보여준다. 율법에 의하여서는 전적으로 구원받을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안 사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진 사람이다. 만일 그가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지지 않았다면 율법을 신령한 것으로 알 수가 없다. 그 생명이 우리 속에 있음을 암시하는 첫 번째 징조는 회개이며 바로 영적 생활의 초기증상이다. 그것은 죄책감을 느끼긴 하지만 아직도 회심하지 않은 단계이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죄와 실패에 관해서 말할 때 먼저 율법의 차원에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율법 아래 있고 정죄아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는 그것을 사랑의 차원에서 말하고 자기를 위하여 죽은 자를 기쁘게 하지 못하고 그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못한 차원에서 말해야 한다.
이 위대한 8장의 전체 목표는 “...정죄함이 없나니...끊을 수 없나니”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로마서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8장 처음 쓰는 “그러므로”란 말 자체가 5장에서 말해왔던 것을 다시 거론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여기 8장에서는 5장에서 광범위한 원리로 말씀드린 것을 거론하고 있으며 그것을 보다 상세하게 풀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저는 8장의 대주제가 성화가 아님을 담대히 역설한다. 5장에서와 같이 8장에서 대주제는 그리스도인의 안전성, 성도의 최종적 보전에 관한 절대적 확신성이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의 궁극적이고 완전하고 철저한 구원에 관한 절대적 확실성이다.
1절에서 주제를 진술하고 나머지 38절은 초두에 있는 그 역설에 관한 강해에 불과하다.
첫 번째 논증, 2-4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우리는 율법과 더 이상 관계가 없다고 선포하고 그는 율법이 할 수 없었던 일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해간다.
두 번째 논증, 5-13 -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두 가지 일을 한다. 첫째, 우리를 거룩하게 하여 죄의 모든 흔적에서 구원하는 것이며, 둘째는 그것에서 몸까지 구원한다.
세 번째 논증, 14-17 - 우리 안에 성령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아들들임을 증거 하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네 번째 논증, 18-25 -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영광을 물려받을 후사들임을 역설하고 있다.
다섯 번째 논증, 26-27 - 보다 실제적인 문제로 내려가서 우리가 고난과 어려움과 여러 갈등이 가득 찬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을 확약하셨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한다.
여섯 번째 논증, 28-34 -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우리들에게 자신이 구원의 위대한 기획과 계획을 가지셨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위대한 계획을 이행하기 위해서 자기의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해서 내어 주셨다” 바울은 이것이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계획들에 대한 절대적인 보증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곱 번째 논증, 35-39 -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그 모든 것을 요약한다. 결론적으로 최종적인 논증은 하나님의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바울은 5장의 위대한 주제를 다시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궁극적인 영화를 절대적으로 보증 받으며 온전하고 완벽한 구원과 해방과 건져냄을 받는다는 것이다. 칭의 만으로 멈추고 그 다음에야 성화를 거론하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로마서의 중심 주제를 부인하는 사람이다. 만일 의롭다함을 받았으면 최종적 ‘영화’는 보증된 것이다.
제 21 장 더 이상 정죄 받지 아니함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 이것은 세상이 타락한 이래에 인간을 위한 가장 위대한 가능성을 제시해 주는 진술이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의 정신과 진수와 핵심이다. 이것은 로마서 8장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새로운 차원에서의 이신칭의의 위대한 교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정죄의 반대는 언제나 ‘칭의“이지 성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서 8장의 처음 네 구절을 성화의 차원에서 해석하는 자들은 바울이 전제해 나온 모든 것을 거스릴 뿐만 아니라 로마 카토릭적 이단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결코 없다’ - 그 말은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완벽하다는 뜻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어떤 정죄의 영역에서도 벗어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는‘ 그리스도인에게 정죄가 없다. 결코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이것이 사실인 까닭에 그는 정죄함을 느껴서는 안된다. 그러나 마귀는 그렇게 느끼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쓸 것이다. 성경을 가지고 대적하라. 그러면 마귀는 ’여러분을 피할 것이다‘ 우리들의 고통의 대부분은 이 구절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데 있다. 어떠한 것도 그리스도인을 정죄 받는 위치로 끌러갈 수 없다. 우리는 그 말씀의 가치를 격하시켜서는 안 된다. 이것이 ’성도의 최종적인 견인‘의 교리를 가르치는 바울의 방식이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가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히 청산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죄를 지어도 무방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바로 사람들이 바울에게 퍼부은 비난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6:1). 바울은 이미 6장과 7장에서 결코 그렇지 않으며 오히려 정반대라고 답변을 한 바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다. 그리스도인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
5장에서 보았듯이 하나님께서는 ‘경건치 않은 자들을 의롭다’하신다. 또한 의롭다 하실 뿐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넣는다. 하나님께서는 일단 하나의 일을 착수하시면 그 일을 완성시켜 나간다.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가 다시는 정죄 받을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심으로 ‘점이나 티 혹은 그러한 것들이 없는’ 완벽한 영화의 지점에 이르기까지 일해 나가실 것이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근거가 되고 또한 우리의 최종적인 확신에 대한 기초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라는 구절은 많은 경우에서 신약의 위대한 주제요, 특별히 사도 바울의 서신의 위대한 주제이다.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고전1:30)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5:1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12:27)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은 우리가 아담에게 연합되었던 것과 같이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었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정죄함을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있기 때문이다.
6장에서 그 증거를 상세하게 밝혀 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나도 죽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나도 부활하였다. 그리스도께서 승천 하셨을 때 나도 그리스도와 함께 지금 이 순간에 하는 보좌에 앉힌 바 된 것이다.
7:1-4에서 동일한 진리를 결혼 관계의 차원에서 남편이 죽으면 여자는 자유케 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서 결합될 수 있다. 그처럼 우리도 매었던 율법에 대해서 죽었으므로 우리는 주었다가 다시 사신 이에게 시집갈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신랑에 속한 모든 것은 신부에게 속해 있다.
말씀들은 우리들이 그리스도와 너무나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나머지 그리스도의 것은 무엇이든지 다 우리의 것일 뿐 아니라 아무것도 그것에서 우리를 떨어지게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정죄함이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여러분이 죄짓게 될 때 정죄 아래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또한 그리스도 밖으로 내던져지지도 않는다. 여러분이 죄지었을 때 여러분은 율법에 대하여 죄지은 것이 아니라 사랑에 대해서 범죄한 것이다. 여러분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하지만 정죄함을 느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정죄함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 율법아래 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죄를 짓는 불신자와 죄를 짓는 그리스도인 사이의 차이는 전자는 사람이 국가에 대하여 죄를 지어 하나의 법을 어긴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자기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인 인격적인 문제요, 사랑의 관계이다. 어느 의미에서는 법적인 정죄보다 더 나쁜 것이다.
내가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지위와 관계에 있기 때문에 나는 더 높은 기준을 가지게 된 것이고 죄를 지으면 더 많은 범죄를 나에게 한 것이며 또한 더 밉고 가증스러운 것이 되게 한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보다도 더욱더 죄와 싸우고 죄를 미워하고 죄를 피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신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죄 아래로’ 들어가지 말라. 그렇게 하여 죄짓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여러분은 이 위대한 진술을 꽉 붙잡고 있어야 한다.
제 22 장 성령의 법과 은혜의 왕노릇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
바울은 1절의 그 주제를 2,3,4,절에서 강해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는’이라는 말로 시작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2절은 1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한 것임을 알려 주고 있다.
이 2절 말씀은 성화 문제에 관한 한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그들의 주장은
“우리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법” - 구절이 7:23에서 사용된 표현과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역사는 ‘우리 지체 속에 역사하고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구원한다고 역설한다. 그래서 7장의 곤고한 사람은 8장의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성령이 이제 임하고 그 사람은 두 번째 또는 제2의 축복, 즉 제2의 체험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전에 자기를 괴롭게 짓이김으로써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울부짖게 했던 것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이 구절이 성화만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런 해석을 고집하는 학파를 두 부류로 분류할 수 있다.
‘완전 성화’를 가르치는 사람들과 ‘완전 성화’는 아니지만 ‘두 번째 체험’이 그로 하여금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게 한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한’ 성령께서는 매순간 승리를 줄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즉 8:2절은 우리가 “해방되는 것은 우리가 성화된 결과이며 사실상 정죄 받지 않는 것은 우리의 거룩하게 됨에 달려 있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들의 가르침이 잘못되었음을 밝혀내려 한다.
첫째, 로마서 초두에서부터 끊임없이 강조하였듯이 그리스도인이 정죄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거룩하게 됨’의 결과가 아니라 그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결과에 기인하는 것이다. 정죄에 대한 반대는 ‘성화’가 아니라 오직 ‘칭의’일 따름이다.
둘째, 바울은 여기서 그리스도인에게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날지도 모르는 어떤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제2의 축복을 추구하며 받는 그리스도인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을 묘사하고 있는 것은 더욱더 아니다.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과거에 일어난 어떤 일이라고 말한다.
셋째, 여기서 처음으로 성령이 소개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5:5, 7:6에서 성령의 사역을 이미 언급하고 있다.
넷째, 이 구절을 그릇되게 해석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완전 성화’의 교리를 믿게끔 한다. 바울은 8:12-13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해 나가고 있다. 결국 바울은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망의법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율법이나 하나님의 도덕법을 의미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십계명 가운데 있는 법이다.
그 이유는 첫째 바울이 여기서 정죄를 다루고 있는데 정죄를 내리는 율법은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법’이 아닌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이다.(3:31) 우리에게 정죄를 가져오고 우리의 정죄됨을 선언하는 것은 율법이다.(3:18-20) 율법은 언제나 정죄의 큰 요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더 이상 정죄 아래 있지 않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우리는 우리에게 사망의 선고를 내린 율법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죄와 사망의 법’이 ‘하나님의 율법’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두 번째 이유는 7:7-25에서 바울은 율법이 죄와 사망을 낳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여기 8:2에서 그 율법을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는 율법은 ‘죄와 사망의 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 번째 이유는 8:2의 해석은 8:1로부터 나와야 하고 결론적으로 3절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다. 3절에서 바울은 율법이 할 수 없는 일을 말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율법에서 나를 해방시킨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바울은 내 안에 있는 성령의 역사 때문에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우리를 의롭게 하며 또 하나님의 율법에서 구원한다고 가르치고 있지 않다.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에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카도릭의 교훈이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완전히 거룩하게 되기까지는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았기“ 때문에 정죄 아래 더 이상 있지 않다.
우리는 본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나 직분이나 언약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하였음이라”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바울은 우리가 이제 새 언약, 새로운 약속 아래 있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은 우리를 해방시켰다. 우리는 ‘자유케 하는 법’ 아래 있다. 그것을, ‘믿음의 법’(3:27), ‘은혜의 왕노릇’(5:20-21), 여기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새로운 생명이 있다. 그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우리는 새로운 체제 안에 있다. 우리는 법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 결코 정죄함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구원의 입장에서 율법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메인 바 되었던’ 것은 제거되었으며 죽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역과 왕노릇 안에 있다. 또한 성령의 왕노릇과 체제 안에 있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구원이 절대적으로 확실하다는 사실을 알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가 우리를 정죄하였고 우리에게 대해서 ‘죄와 사망의 법’이 되었던 율법으로부터 영원토록 해방되었음을 확신 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의 직분’, ‘성령의 직분’, ‘영광의 직분’ 이라 불리우는 이 새로운 직분에 의해서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이다.
제 23 장 율법이 할 수 없는 일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은 죄 있는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8:3-4)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복되신 성령의 영역아래 있다. 이것을 이해할 때만이 우리는 우리의 구원에 대한 확신과 확실성을 마땅히 즐거워할 것이다. 우리가 율법에서 구원받아 지금은 성령에 의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야 하는 삶을 영위하고 있음을 깨달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그런 위치에 이르게 된다. 이제 바울은 더 나아가 왜 우리들이 율법에서 해방될 필요가 있었는가를, 그 결과 우리에게 어떤 체험이 올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잘못된 해석으로 그들은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셨을 때 그가 완전한 삶을 사심으로 말미암아 육신 안에 죄를 정죄하셨다는 식으로 진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속한 자들과 그 안에 있는 자들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동일한 승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 우리는 그러한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는가?
첫째, ‘죄를 정하다’란 말을 ‘...로부터 건져내다’ ‘멸하다’라는 말로 취급하는데 그 말은 1절의‘정죄함이 없다’라는 말과 같이 ‘판결하다’라는 의미이다.
둘째, 율법이 육신 안에 죄를 정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일을 하라고 율법을 보내신 것이다. 율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육신 안에서 죄를 정하는 일밖에 없다.
셋째, “죄를 인하여“라는 의미는 단순히 ‘죄에 관하여’라는 의미가 아니고 ‘죄를 위한 희생으로’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중추적인 가르침이다.
바울은 율법이 할 수가 없었던 것은 육신이 약하여 그렇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할 수 없었던 것은 율법이 요구하는 의가 우리 속에서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었다.
율법의 목적은 첫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는 의가 어떠한 것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둘째,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이다. 율법 자체는 선하고 생명의 길을 지시한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생명을 가져다 주는데 완전히 실패한다. 사실 우리의 정죄는 우리가 율법대로 살지 못하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똑같은 방법으로 구원에 이르는 두 방면이 있다.
첫째 국면은 정죄와 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고 둘째 요소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 ‘그리스도 안에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남을 강조하고 있다. 율법은 그 두 가지 일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못한다. 율법은 죄책에서 나를 건져낼 수없으며 의롭게 할 수도 없다.
“안에” - 라는 말의 의미를 그 뒤에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라는 말로 덧붙여 설명하고 있다. 그는 계속해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장래를 다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사실상 8:29에서 명확하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바로 그것이 ‘의 이며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죄책에서의 구원만이 아니고 적극적으로 ‘의에게 종’이 되는 것이고 율법의 의를 규정한 방식대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의미한다.
어느 곳에서나 바울의 주장은 그러하다.
고전1: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전3:13-14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라” 그것은 여기 로마서 8:3에서 “곧 죄를 인하여 육신에 죄를 정하사”라는 말과 같다는 것이다.
갈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적극적인 국면으로 우리는 더 이상 저주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후사요 기업을 물려받을 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갈3:21“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즉 율법은 죄책과 나에게 내려진 문제로부터 나를 구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더욱더 중요한 것은 적극적인 ‘의’와 ‘생명’을 나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에게 그것을 주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 때문에 나는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좇아 행한다. 나는 은혜 아래 있다.
바울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서 가능케한 모든 것을 보여 준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들에게 확신과 기쁨을 주려 하는 것이다.
제 24 장 구원의 보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라”(롬8:3-4)
은혜는 율법이 할 수 없는 것을 이루는 것이다. 왜 율법이 그런 일을 할 수 없는가? 바울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율법이 약해서가 아니고 율법의 실패는 그 율법이 우리 육신을 통해서 일해야 된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요구하는 의를 이룰 수 없었던 것이다. 오히려 우리의 문제를 더욱더 심각하게 만들 뿐이다.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죄로부터 구원받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율법에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우리도 율법도 할 수 없는 것을 행하신 것이다.(롬1:16-17) 바울이 기뻐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복음의 핵심 때문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원은 이미 창세전에 계획된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구원을 자기 자신들의 차원에서 생각한다는 데 있다.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깨닫기 전에는 구원을 확신할 수
없으며 최종적인 영화를 확신할 수 없다.
“자기 아들을 ...보내어” - 기독교는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또한 그로 말미암아 이루신 것에 관한 것이다. 바울는 단순히 ‘하나님은 아들을 보내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보내어”라고 하는가? 그리스도는 ‘자기 아들’이다. 창조된 것이 아니라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아버지의 독생자요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토록 아들이셨고 영원한 아들이시며 또한 사람이 되셨다. 그는 여러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그의 오직 유일하신 독생자를 여러분을 위해서 보내신 것이다.
그는 단순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지 않는다. 하나님 스스로 우리의 구원에 개입하셨다. 그래서 우리가 첫 사람 아담의 경우와 같은 일들이 결코 있지 않을 것이며 그런 실패도 없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이 보증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기 아들’이 계신 것과 하나님의 성품과 영광에 의해서 보증이 되는 것이다. 보증은 이중적이다.
우리 자신들과 인간들과 ‘세상과 육체와 마귀’ 그리고 지옥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다. 스스로 인성을 취하시고 지금도 그 인성을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 면전에서 중재하고 있는 육체 안에 계신 하나님. 신인이신 ‘자기 아들’로 말미암아 구원이 확실하며 그것은 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된다.
제 25 장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 성육신은 하나의 사실이요, 실제 하였던 일이다. 성육신의 실제를 부인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자들이 아니라 적그리스도들이다.(요일4:1-3)
바울은 “죄 있는 육신으로”가 아닌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분명히 바울은 우리들이 우리 주님의 인성에 죄가 없음을 깨닫기를 바라고 있다. 그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은 가지고 있으나 죄는 없다는 의미이다. 성경의 동정녀 탄생의 교리가 이 점을 말하고 있고, 고후 5:21에서“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그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구약에서 제물로 바치는 어린 양은 흠이 없어야 된다.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셨다. 성육신하실 때 우리 주님은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던 인성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카톨릭 교도들은 과장하여 동정녀 마리아의 인성도 죄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나 성경은 조금도 없다.
왜 그들은 주님의 인성에 죄가 있다고 주장하는가?
주님의 인성에 죄가 없다면 어떻게 그가 시험을 받을 수 있는가? 이것이 그들의 대답이다. 아담과 하와는 완전한 상태에서 시험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확실한 것은 시험받는 자의 본성이 악하지 않다 할지라도 시험은 강력하게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아담 안에서 지은 바 되는 첫 번째 인성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는 새로운 인성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고전15:)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머리이시며 두 번째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에 죄가 있다고 말한다면 어떤 의미에서는 그리스도를 첫 사람보다 못한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고 덜 완벽하고 덜 완전한 인물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아담은 죄와 타락의 결과로 인해서 본성이 죄가 있게 되었고 어떤 연약한 것이 생명 안에 들어 왔다. 연약한 것들은 그의 자손들에게도 전승되었다. 신약성경은 우리 주님께서 피곤과 고통과 지침과 눈물을 흘리는 주님의 지상 생활을 보여 준다. 주님께서 진정한 인간이 되지 않으셨다면 시험을 당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시험을 당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들을 인간으로 보내셔야 했다.(히2:9-18)
왜 그리스도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셔야만 했는가?
첫째, 율법을 지키고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화해하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 율법의 심판을 받고 순종해야 하므로 그러한 일들을 하기 위해서 우리의 대표자로서 세상에 오신 것이다.
둘째, 우리의 죄가 처리되어야만 한다.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같은 모양이 아니고서 그 죄를 담당하실 수 있겠는가? 그는 우리의 죄와 우리의 죄책을 담당하시고 또 우리들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으시기 위해서는 인성을 취해야만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육신 안에서 정죄한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전에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가능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그가 스스로 인성을 취하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는 것이다. 만일 그가 성육신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벧후1:4)가 될 수 없었으며 “하나님의 아들들”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넷째, 그가 “긍휼이 풍성한 대제사장”(히4: 5:)이 되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만일 그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기도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누군데 “소멸하는 불이신” 그분의 면전에 나갈 수 있겠는가? 그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오셨기 때문에 지치고 목마르고 배고픈 것이 무엇인지, 슬픔과 애통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는 것이 무엇인지 아신다. 그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것으로 인하여 그가 우리의 “긍휼이 풍성하신 대제사장”이 되기 때문이다.
다섯째, 이 교리가 마귀를 영원토록 침묵시키는 유일한 길임을 주장한다. 마귀 앞에 오직 인간으로만 간주되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러나 마귀는 그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었다. 마귀는 완전히 실패했다. 마귀는 영원히 침묵하게 되었다.
모든 것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변호되고, 하나님의 영예와 공의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확증되고, 영원토록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아들이 사람으로서, 사람을 위해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는 역사를 행하셨고, 완벽히 이루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게 된 것이다. 할렐루야!
제 26 장 그리스도의 죽음과 분여된 의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기를 바랄 수 있는 것은 이러한 교리들을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교리와 생활 사이에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거룩하게 되는 데는 지름길이 없다. 거룩은 주로 이 위대한 진리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결과로서 우리 안에서 발전되어 나가는 것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17:17)
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는가?
’죄를 인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 의미는 ”곧 죄를 위하여 속하는 제물로“(개정역) ‘속죄제물’(70인역)로 라는 것이다. 신약은 우리 주님께서 이렇게 오신 주요 목적은 속제제물이 되심으로써 우리를 정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의 주요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죄로 인하여’라는 간단한 두 마디의 말은 우리로 하여금 그가 이제까지 말해 왔던 구원의 방식에 관한 모든 것을 요약해 주며 상기시켜 준다. 율법은 할 수 없었으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모양으로 죄를 위하여 보내사 육신에 죄를 정하심으로써 하셨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은 이 세상에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계셨던 자기 아들 안에서 우리의 죄를 정죄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었다.
왜 하나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삼으셨는가? 그것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하심이니라”라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순종으로 율법의 요구를 완벽하게 이행했고, 심판을 당하셨으므로 율법의 의로운 요구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이루어진 것이다.
첫째, 이것은 우리의 칭의를 의미하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단순히 칭의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어야 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속죄제물’이 되셔야만 하셨던 것은 우리가 율법에서 구원받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이러한 새로운 방식으로 살 수 있게 되며 ‘하나님께 대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죄에게 권능을 주는 율법을 제거하는 방법은 죄를 위하여 ‘자기 아들’이 죽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채용하신 방법이다. 또한 율법이 죄의 권능이기 때문에 율법이 힘을 상실할 때 죄도 그 권능을 상실한다. 그래서 바울은 서슴없이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6:2)라고 말하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죄의 영역과 통치와 지배와 권능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내 지체 속에서 죄의 충동’을 심화시키고 자극하도록 내 안에서 역사하고 있었던 그것이 제거되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죄를 위하여’ 보내어지지 않았다면 율법이 아직 존재할 것이고, 율법이 존재하는 동안에는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다. 그의 능력은 구원이 되고 또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할’ 수 있는 능력이다.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는 길은 오직 한길,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의 보좌를 떠나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태어나 이 세상에서 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의 영혼은 ‘속제제물’이 되셔야만 하셨다. 그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라는 아버지의 명에 복종하셔야만 하셨다. 그것은 죄가 ‘그 안에서’ 정죄받기 위해서이다. 주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와 그의 생명의 능력에 연합될 수 있다. 그래서 그 안에 있던 성령이 우리 안에 있으며, 그래서 율법의 의가 우리 안에서 충족되는 것이다.
제 27 장 거룩과 확신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8:3-4)
하나님께서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셨다. 그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는’ 데 있다. 이런 일이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행하는’ - 이 말은 그리스도인의 보편적인 삶의 방식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어떤 실제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것은 그의 사상과 욕망과 그 밖의 모든 것을 묘사하는 말이다. 그 사람의 그의 삶, 생각, 판단, 느낌들, 그가 관심을 두는 목적, 목표와 모든 것을 통제하는 어떤 원리들이 있음을 의미한다.
‘육신’ - 일반적으로 ‘인류’를 가르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하고, ‘몸’을 가르키기도 하며, 또한 ‘새로워지지 않은 인간 본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이 말은 타락의 결과로 온 인간 본성을 대표하는 말이다. 여기서 바울은 일반적으로 ‘새롭게 되지 않은 인간본성’을 묘사 하고 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선한 도덕적인 사람이든 매우 비열하고 야비한 쓸모 없는 죄인이든 간에 중생하지 못한 사람의 전형적인 사고 방식이요 태도이다.
‘영’ - 성령의 영역 안에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삶과 삶의 방식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도되고 안내된다.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으며 의문의 묵은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지 않고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나님을 섬기려 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견해가 있는데 그들은 ‘육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영적인’ 그리스도인들로 구분한다. 확실히 구원을 받았으나 아직도 육신을 따라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은 더 이상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입장으로 그를 인도해 줄 또 다른 체험을 가질 수 있다. ‘또 다른 두 번째 체험’, ‘제2의 축복’을 가지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육신을 따라 행하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여러분의 결정과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바울이 8:1-4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1절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말하고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사람들이다. 성령을 소유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9) 그들의 실제적인 행동과 행실이 어떠하든, 아무리 무가치한 삶을 살고 있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전적으로 다른 영역, 즉 성령의 영역 속에 있는 것이다.
오직 의롭다함만을 받고, 단순히 사죄와 지옥으로 부터의 구원을 위해서 주님을 믿기만 하며, 계속해서 ‘육신 안에“서 삶을 영위해 나가는 일이란 그리스도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중생한 사람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 성령이 여러분 안에 있는 것이다. 단순히 거룩함을 아직 입지 않고 거저 의롭다함만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있을 수 없다,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1:30).
요한일서 3:9-10에서 요한은”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 속하나니“이런 자들은 죄 가운데 살며 계속 행하며 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으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라고 말하며 이들은 ‘죄 안에서 살아가지 않으며 그 안에서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죄 안에서 자기의 삶을 허비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죄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 거주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시 그 죄의 영역으로 되돌아가지는 않으며 다시 마귀의 자녀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죄의 지배도 받지 않으며 죄와 육신을 따라 행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은혜의 영역과 통치 아래 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이다.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려 함이라” - 우리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우리 안에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또한 그것의 확신과 확실성을 보여주려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여러분은 “점이나 티나 그러한 것이 없는” 완벽한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먼저 거룩해져야 한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 할 것이다. 성령께서 그것을 확실케 하실 것이다. 그리고 바울은 어떤 사람도 이 교훈을 지적인 방면에서만 파악해서는 안됨을 확실히 하고 싶어 한다. 만일 여러분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었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영역 안에 있으며 ‘성령 안에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여러분의 전체 마음과 사고방식과 욕망과 행실이 달라지게 된다. 바울은 끊임없이 그 점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교리들을 지적으로 믿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런 가치가 없다. 우리가 진실로 믿는 다면 우리 자신 속에 가질 것이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타나 보일 것이다.
우리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 안에 역사하고 있고, 우리가 ‘그 영을 따라’ 행하고 있으며, ‘육신을 따라’ 행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가 전혀 없는 하나의 신념으로 만족해서는 않된다. 거룩하게 하는 역사가 동시에 시작됨이 없이 여러분은 의롭다함을 받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영’은 거룩하게 하는 영이다.
“자기 아들을 육신의 모양으로 죄를 위해서” 보내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과 육신의 죄를 정하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좇지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육신을 따라 행하고’ 있다면 율법의 요구는 여러분 속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여전히 여러분은 죄 속에 있으며 정죄 아래 있는 것이다.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 제 5권
제 1 장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만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8장의 전체 목적은 1절의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의 의도를 입증하는 것이다. 여기 5-13절은 4절 구원의 목적이 “율법의 요구가 우리에게 이루어지게 하는 것”의 의도를 입증하는 것이다. 그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는 것은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자들에게만 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5-8,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사이의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9-11, 그것을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시킨다.
12-13, 그들에게 진리인 모든 것 때문에 하나의 실천적인 권면을 하고 있다.
그리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대조하여 비교하고 있는데 먼저 비그리스도인에 관하여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비그리스도인을 ‘육신을 좇는 자’ 라고 하고 있다.
‘육신을 좇는다’ - ‘육신’은 하나님의 성령이 그 사람 인격 안에서 역사하기 전의 인간 본성을 말한다. 그래서 비그리스도인은 습관적으로 태어난 본성의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그들은 육신의 일을 생각하며 세상의 것들을 생각한다. 그들은 타락한 인간성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육체의 것들’에 흥미를 가지고 관심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이다.
‘육신’은 포괄적인 것으로 한마디로 세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령의 ‘생각’과 ‘생명’에 반대되는 모든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육신의 일들은’ 하나님이 없는 삶의 모든 국면들을 의미한다. 그 말은 가시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시키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는 아무 상관을 하지 않는다. 신령한 요소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사람의 가장 고차원적인 추구들, 사람의 예술, 사람의 문화, 사람의 음악등 그러나 거기에는 영혼이 없고 하나님도 성령도 없다. 바로 그것이 모두 ‘육신을 좇는’ 것이다. 선하고 깨끗하고 말 잘하는 도덕적인 사람도 방탕한 죄인처럼 영에 대한 의식이 없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듣기를 싫어한다. 바리새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소위 분명히 드러난 죄인과 매우 교양 있는 선한 도덕적인 사람과의 차이는 순전히 사회적인 차이요, 피상적인 차이에 불과하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 바울은 육신의 일만을 생각하는 자들의 본질과 마음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그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즉 자연인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었으며 그들은 마치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살아간다. 영적인 사망은 하나님의 생명 밖에 있는 것이며 그 점이 그가 죽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에는 그런 사람이 많이 있다. 그들은 오락, 사교를 원하고 사회적으로 서로 만나기를 원한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영적인 것에 대하여 그리고 자기들의 영혼과 영원한 관심에 대하여 죽어 있기 때문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 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인일 수는 없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그가 자기와 하나님 사이를 바르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지만 하나님은 믿는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사랑이실 뿐만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신 것을 말하면 그들은 그러한 하나님은 믿지 않노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믿는 것은 그들 스스로가 지어낸 하나의 신이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지식을 성경에서 발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에게 나타내 보이셔야 했는데 성경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렇게 하셨다. 오늘날 기독교 강단이나 교회에서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원수이며 참 하나님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기만과 유혹에 밀리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의 법에 복종치 않고 할 수도 없음이라” - 본성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원수이다. 그는 하나님께 대하여 반역적인 존재이며 하나님의 계명들을 거역한다. 그것들은 영적으로라야 분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인기있는 대중적인 교훈은 자연인 사람에게 복음을 전파해야하며 그런 사람은 그런 상태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정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가 믿기 때문에 새로운 생명을 받게 되며 중생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한 주장은 사도가 여기서 가르치는 바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느니라” - “육신을 좇는”사람이요, “육신의 생각”에 의하여 지배를 받고 있는 사람들의 결과를 말하고 있다. 이것이 불신자들의 상태이다.
우리는 스스로 신자들이 된 것이 아니다. ‘새로 지음을’ 받은 것이며 거듭남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영적인 영역에 속해 있으며 그리로 옮겨졌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하나님의 성령에 우리를 연합시킨 것이다. 그 일은 모두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가 전에 비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닫기 전에는 그리스도인들로서의 우리 자신의 상태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다.
제 2 장 그리스도인의 성격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들을 깨우치사, 확신을 갖게 하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대한 기쁨과 모든 것에 대한 경이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대한 놀라움을 깨닫게 하신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예전에 습관적으로 행했던 바를 더 이상 하지 않는 사람만이 아니다. 그것은 입문이며 더 본질적으로 적극적인 것이고, 영광스러운 적극적인 것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성령의 지배를 받는’자라는 것이다. ‘영’은 ‘성령’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는 ‘영’(Spirit)이라는 말을 대문자 ‘S'를 쓴다. 단순히 인간의 영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몸과 대치되는 것으로 이해하여 의지와 지성, 시나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으로 추측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14)
둘째,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은 성령의 일들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말은 어떤 일에 마음을 두고 의도적으로 그 행위가 자발적이라는 것이다. 성령에 의해 지배를 받는 사람은 어떤 방향으로 자기의 마음을 고정시킨다. 그 말은 사람의 전인적 관심을 지적하고 있다. 종교에 관심을 갖는 사람과 영의 일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다르다. 종교적인 사람들인 바리세인들은 주님을 핍박했고 종교 개혁자들을 핍박했다. 여러분은 교회 교인으로서 종교적인 조직, 활동, 역사, 혹은 개교회의 활동들에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을 수 있고 영적인 일들에 가장 큰 원수일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신학자체를 목적으로 신학에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또한 체험들의 이단은 초감각적인 현상들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신비주의는 기독교 신앙과 진리의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을 시험하는 시금석은 무엇인가?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고전2:11)
“오직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이니 곧 감추인 바 된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고전2:7)
‘영의 일’은 감추진 비밀들이요, 감추어진 지혜요, 전적으로 세상 사람 밖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에게 밝혀주신 어떤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것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들을 소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영혼들’로서의 자신의 영혼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의 자신이다. 이것이 삶의 중심이고, 그리스도인의 전존재와 실존의 진정한 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 밖의 모든 것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말을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확증하는 하나의 요점이다.(마10:37)
그리스도인은 영혼에 기울이는 관심이 최상의 관심이기 때문에 자기의 죄성을 깨닫고 그 점에 관심을 가진다. 그가 옛 사람이었을 때는 기계적으로 자기의 축복과 도움을 위해 기도하고 간구를 한다. 그러나 그는 죄가 자기 영혼에 얼마나 큰 고통을 주는지 알고 이런 일들을 생각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한다. 만일 여러분이 전에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써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여러분을 인도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두드러진 현상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보여 준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의 존재와 마음과 심정의 깊은 곳에서 그리스도를 ‘영광의 주’로 밝히 보이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 인성과 신성에 대하여 문제 삼지 않고 믿는다. 그의 사역이나 특별히 그의 속죄사역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명백하다. 세상의 관원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므로 그들은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은 것으로 여긴다. 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알지 못했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과 영광과 자기들이 구원받을 필요성을 알지 못한다.
성경에 의해 하나님 앞에 있는 자신의 영혼을 아는 사람들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게 되는가를 알기 원한다. 무엇보다도 그가 진정 기뻐하는 것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그처럼 놀랍고 감격적인 일은 없는 것이다. 그가 성령의 조명을 받는 순간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화와 기타 영광스러운 용어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견딜 수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진리들은 그가 즐기는 것이요, 그의 생명이요, 그의 세계요, 그의 전부가 되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하늘과 지옥의 전투장임을 알고 세상 전체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진다. 세상이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를 이해한다. 곧 영적인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의 책이다. 다시 한번 되풀이 하지만 바른 방식으로 이해하고 알기를 원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나타나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것을 찿아내야만 한다.(고전2:14-16) 우리는 지금 거울을 통해 희미하게 보고 있다. 강조할 것은 우리가 지금 보고 있다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는 것들’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지 못하는 일‘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준비해 놓으신 것들‘을 보고 있는 것이다. 저는 여러분이 진리를 그 모든 영광과 절대적인 완전함 속에서 보고 있지 않음을 안다. 아무도 그럴 수 없다. 그러나 제가 묻고 있는 것은 여러분이 이러한 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믿음이 아무리 작고 연약하다 할지라도 또한 여러분이 모르는 것이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은 ’영을 좇아‘ 행하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자녀이며, 그러므로 영광의 상속자라고...
제 3 장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새 생명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근본적이고 철저하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살아 있으며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약성경의 주요한 주제이며. 거듭남의 교리는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도 타락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전적으로 중생과 생명에 대한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거듭나며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된다.(요4:14,6:35)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고전15:45)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살리셨고 우리에게 사도가 말하고 있는 이 생명을 주신다. 참된 그리스도인과 사이비 그리스도인을 구별 짓는 방식은 이 생명의 시금석을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죽은 사람이 아니며 그는 아무리 못해도 더 이상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나쁜 상태에 있고 저주받은 상태에 있다 할지라도 언제나 이 생명의 증거가 나타나게 된다. 베드로전서 2:2에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아이가 젖을 사모하는 것은 갓난아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다. 많은 종교인들은 종교적이고 도덕적이고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매우 선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거듭나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행실은 ‘죽은 행실’로 그 속에 아무런 생명이 없다.(히9:14) 또한 그 행실은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을 불어 넣지 못한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선물을 메달아 놓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열매가 열린 살아있는 나무 사이의 차이와 같다. 거의 완벽하게 만들어진 것과 자연적으로 살아있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인의 활동들은 결코 가식이 없으며 덧붙이는 것이 없다는 것이다. 열매는 더 이상 밖에서 첨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며 살아 있는 나무속에 있는 진액과 능력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의무감에서가 아닌 자발적인 표현인 것이다.(마7:15, 12:33) 만일 그 속에 생명이 없으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가식이요, 기만이요, 갖다 붙인 것이다. 그것에는 언제나 생명을 가르키는 진실성이 결핍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샘에 비유할 수 있다. 물을 퍼내어도 여전히 계속해서 흘러넘쳐 난다. 또한 거기에는 따스함이 있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기도를 특징짓는 자발적인 따스함과 기계적인 기도 사이의 차이점이 얼마나 큰가?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이 이런 방식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이다.
생명의 정도가 아무리 작다 할지라도 그것이 존재하기만 하면 그 생명은 드러난다. 그가 영의 일들을 계속 생각함으로 그 생명이 갈수록 자라난다. 그리고 성숙하고 발전하게 된다. 우리는 은혜 안에서 자라며 주를 아는 지식에 있어서 자라난다. 이 진리는 역시 낙심자라고 불리 우는 사람의 위치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낙심자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지 않아야 하는 일들을 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자녀요, 생명의 씨앗을 그 속에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죽은 자가 아니며 언제나 돌아와 경건한 회개를 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에 대한 결정은 그가 행하는 일로 내릴 수 없다.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은 스스로 증거 하게 되고 자신을 재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요17:3)
생명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기 마련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실제적인 존재이다. 그 지식에 있어서 무한하고 다양성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들에 매달리지 않는다. 그리고 더 큰 지식을 갈망하며 더 깊은 지식에 목말라한다.
우리는 이 생명을 얻었으며 이 생명을 누리고 있는가? 또한 하나님을 향해서 주리고 목마르며 사모하는가? 영의 일들을 생각하는 것에 대한 확증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은 자기가 어떤 것에 대하여 붙잡혀 있다고 느낀다. 그 어떤 것이 그에게 주입되었다. 문제는 그 속에 이 생명을, 이 능력을 인식하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다. 또한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나누어 받은 자들이다. 영원토록 우리는 그것을 마시고 그것에 의하여 살아갈 것이다. 유대인들이 생각하였듯이 기계적이고 물질적인 의미에서 먹는 것이 아니고 영적으로 먹고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요, ‘생명의 떡’이다. 세상이나 세상의 것들을 힘입고 살아가지 않고 세상이 행하는 것과 세상이 공급하는 것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힘입고 살아가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우리 생명의 원천이시다.
제 4 장 평안과 의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5-8)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영의 일들을 생각하는 사람이며 그것은 살아 있기 때문임을 알았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살아 있으며 자기 속에 새 생명을 가지고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요, 새 창조물이다. 전에 지니지 못했던 권능과 능력들을 가지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생명은 사망과 대조되는 것 같으나 사도는 ‘생명과 평안’이라고 말한다. 왜 특별히 평안이라는 말을 택했을까? 사도가 ‘이신칭의’의 차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할 때마다 그의 마음에 첫 번째로 떠오르는 것은 평안이다. 평강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의의 결과로 체험하는 첫째 되는 것이다. 또한 ‘평안’이라는 말에 대해서 발견하는 바는 다시 한번 그리스도의 백성들로서의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상태나 조건을 점검하는 철저한 방편이 된다는 점이다.
불신자는 영적으로 죽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원수 되어’ 있으며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과 멀어져감에 따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혼동과 무법과 무질서가 오게 되고 무서운 혼란과 혼돈에 빠져들고야 만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은 ‘생명과 평안’을 가지고 있으며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평안’을 누리는 사람이다.
첫째, 하나님에 관한 참된 개념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장 악한 죄는 하나님에 관한 거짓된 생각을 가지는 것이다. 아무도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닫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곧 자기 창조주에게 반역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에 빠진 자신의 부패와 어리석음과 오염에도 불구하고, 지옥 형벌밖에는 받지 못할 자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시되 독생자를 보내셔서 자기를 구원하시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을 깨닫는 순간 적의가 사라지고 그는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보며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있으며 옛 적대 감정은 사라졌다. 우리에게 가로놓였던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휘장이 걷혔고 우리는 생명과 평안을 주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둘째, 그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법에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요일5:3) 계명에 반대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설교가 당연히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으로 알고 모든 사람이 어떻게 삶을 영위해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라고 느낀다. 그 계명들은 하나님의 성품들의 한 표현이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한다. 그 율법의 영광과 탁월성을 알고 그것을 지키기를 간절히 사모한다. 그것이 이 평안의 표현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화평하기 때문에 그에게는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질 놀라운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밖에 계신 하나님과 화평할 뿐아니라 그 자신 속에도 평안을 가지고 있다.
소극적 측면 - 첫째, 평안을 가졌다는 것은 예전의 불안감의 끝을 의미한다. 불안감은 언제나 죄악된 삶이 가지는 주요한 특징이다.(사57:20)
둘째, 죄된 삶은 불만족의 삶이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삶은 결코 그들에게 만족을 줄 수가 없다. 그 삶은 무엇인가를 약탈해가기 때문에 언제나 지치고 피곤해지고 고통스럽고 끝없이 고민을 하게 된다.
셋째, 찾을 수 없는 것을 위해서 쓸데없이 찾고 추구하였던 일을 끝내게 된다는 것이다.
적극적 측면 - 첫째, 그는 진리 안에서 안식을 느낀다. 그리스도인은 진리를 찾는 사람이 아니다. 진리를 찾은 사람이요 그것에 의해 발견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통달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평화를 얻은 사람이다. 즉 생명의 철학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성경에서 발견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다. 신자들이 여기서 순례자요 나그네라는 것과 이생에서 우리는 약속된 땅의 하나님의 자녀들이요 하나님의 본향을 향해 순례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상태에 대해 고민하고 불평하는가? 여러분은 “세상은 죄와 악과 마귀가 다스리는 곳이니 그럴 구 밖에 없다“라고 판단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삶을 이해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세상의 삶을 이해하는 비결을 발견 하였다. 그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으며 죽음 너머에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무엇이 있음을 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내적인 평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태풍의 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빌4:6)라고 말할 수 있었다.
넷째, 그리스도인의 성품에는 내적 조화가 있다. 불신자는 악과 죄의 영향에 있어 인격의 중심에서 분열이 있고 혼란이 있어 불안정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롬7:24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에 해당되지 않는다. 이 진술은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을 묘사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구원받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죄와 싸우고 있지만 그의 인격 속에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육신 속에, 죽을 몸에 남아 있는 죄의 잔여분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인격 중심에서는 화평과 안식을 얻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바 된 자이며 그 싸움이 멀지 않아 끝날 것을 안다.
다섯째, 그리스도인은 다른 이들과 평화를 누린다. 로마서 14장 전체가 이 문제의 주석이다. 강한 자는 마땅히 연약한 자의 연약을 담당해야 한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성령에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지배를 받는 자들, 따라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난 자들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이며 거룩해져 가고 있는 자이다. 그리고 끝내 거룩해지게 될 것이다. 율법의 요구가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아 행하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제 5 장 성령과 모든 그리스도인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9-11)
- 어느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이 필연적으로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육신에 있지 않으며 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것을 단순히 그리스도의 사고방식이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불과하지 우리 속에 성령이 계시다고 하는 의미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있지 않은’ 사람이며 더 이상 타락한 본성에 의해서 지배를 받지 않는다. ‘육신’이란 의미는 타락과 죄의 결과로 그에게 어떤 성령의 감화가 전혀 없는 사람과 그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육신 안에’ 있는 동안은 하나님의 영을 받을 수 없다.
‘너희가 영에 있나니’ - 우리의 조건과 지위를 묘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육신에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죄에 빠진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무리 많이 죄를 짓는다 할지라도 그가 다시 ‘육신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결코 없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영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 풍속을 좇아’ 행하고 있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영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성령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거한다’는 것은 어떤 집처럼 어떤 특별한 곳에서 산다는 것을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진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자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3) ‘거처를 삼는다’는 말은 그와 함께 ‘가정을 이루리라’는 말이다. 이것은 궁극적인 교리이며 기독교 구원 교리의 최고봉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우리 속사람 안에서 ‘강건케 하는’ 이러한 기능을 행하신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마음에 오셔서 거처를 정하시고 사시게 하기 위해서이다.(엡3:16-17) 또한 그리스도는 ‘아버지 안에’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아버지께서 오신다. 복되신 성삼위 곧 성부, 성자, 성령이 일체이기 때문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아버지 하나님, 성자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고 포함되신 것이다.
저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임을 끊임없이 되풀이함으로써 강조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특권, 그 어떤 것이 그보다 높고 크다고 상상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 피조세계 속에는 없다. 세상이 여러분을 비웃을지 모른다. 그들은 "네가 포기한 것을 보라. 네가 잃은 것을 보라 네 생활의 손해를 보라“고 말한다. 비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비극은 우리가 누리는 특권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마귀가 여러분을 공격하고 침체시키려할 때 해결책은 여러분 안에 살고 있는 이가 누구인지를 기억하라. 여러분이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여러분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을 기억하라. 여러분은 단순히 구원해 달라고 기도만 해서는 않된다. 누가 여러분의 몸에 살고 계신가를 기억하라.
그것이 확신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즐기는 참된 비밀이요, ‘넉넉히 이기며’ 하나님계서 우리들을 사용하시어 다른 사람들을 유사한 지식과 유사한 특권에 이끌어 갈 수 있는 비결이다.
-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해 있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아버지 앞에서 믿는 자들을 대신하여 중재하는 대제사장이시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과 은혜들은 우리가 그리스도께 속해 있기 때문에 온 것이다. 또한 우리가 그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우리를 그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시금석은 ‘믿는다’고 고백 했느냐, 신념을 가지고 지적인 찬동을 했느냐, 그의 행위나 공덕이 시금석이 아니고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졌다는 것을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는 것으로 의미하는 것으로 주장하며 그리스도인들임을 스스로 부인하는 자들을 그리스도인들로 추앙하며 추켜세우는 세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간디, 알버트 슈바이처가 그리스도인인가? 그들은 공개적으로 자기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고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교리를 부인하는 사람들 이었다. 사도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영을 붙잡으라’는 것이 아니고 또한 ‘그리스도처럼 사는 삶’이라 부르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 속에 계시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오직 성령으로 중생한 자들에게 있으며 중생하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며 그의 속죄 사역과 사도의 메시지 전부를 믿는 이들 속에서만 거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을 믿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의 속죄 사역과 그의 다른 모든 일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전혀 그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지 못한 사람이다.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배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과 그리스도께서 자기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 자기를 구원한 것임을 깨닫는 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분의 관계, 여러분의 관점, 여러분의 태도가 궁극적인 시금석이다.
제 6 장 겉사람과 속사람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0-11)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로되” - ‘몸’이란 말은 ’육신‘(flesh)이 아닌 여기서는 문자 그대로 ’몸‘(body)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살과 피, 뼈, 뇌의 기능을 포함한 몸을 말한다. 그것은 사망의 씨앗이 우리 몸에 있다는 의미이다. 몸은 사망의 처소이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몸에는 사망과 부패의 본질이 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 살아가기 시작하는 순간에 우리는 역시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타락의 결과 사람의 위치는 그러하다. 사람의 몸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할 때는 생명과 탄력으로 충만한 몸이었다. 타락하고 나서부터 우리는 질병과 연약과 부패와 죽음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들에게 해당되는 이 모든 진리뿐만 아니라 몸은 도덕적인 의미에서 역시 죽어있다. 몸은 죄가 가장 용이하게 사용하는 도구이다. 몸은 죄와 싸우는 전장이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신자에게 고통의 중요 원인이 된다. 죄가 피고자이다.
바울은 죽음과 대조하여 우리에게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사람의 몸은 죽었으나 반면에 그의 영은 살았다“고 하는 것이다. 몸의 대조로 영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살게 될 것이다“가 아닌 ”살아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의 그리스도인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죽었다’는 말이 ‘죽음의 씨앗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듯이 ‘산다’는 말은 ‘생명의 씨앗을 가졌다’는 의미이다. 그의 영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받아 거듭났다는 것이다. 사람의 영은 타락의 결과로 죽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속에서 그 영은 다시 생명을 얻었다. ‘옛 사람’은 죽었고 ‘새 사람’은 살아있다.(롬6:11)
더 나아가 로마서 6:23에서는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속에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이미 영생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니라”(롬6: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요5:24)
그는 영생을 소유하였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영이 살아있기 때문에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몸은 육신적으로 죽을 것이나 영은 두 번째 사망을 당하지 않는다.(계20:6) 그의 영은 그리스도의 의를 인해서 살았다. ‘의’는 그 사람에게 주어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이다.
바울이 여기 8:10에서 말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의 현재 내 몸은 여전히 ‘죄로 인하여 죽어 있다’ 나는 내 몸 속에 있는 죄와 관계를 끊지 못했다. 몸이 여전히 죄의 처소이며 죄가 몸속에 남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죄는 여러분의 죽을 몸에서 왕 노릇 하려고 애쓰고 있다. 죄가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 ‘여러분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기’ 때문이며 죄에 대하여 관계를 끊었으며 이제 다른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죽기까지 그 몸속에서 있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죄가 몸속에 왕 노릇하지 못하도록 하라. 몸도 구속될 날이 올 것이다.
고린도후서 4:7-18 말씀은 로마서 8:10에 대한 가장 훌륭한 주석이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리스도인이 ‘깨어 기도해야 되는 것은’ 바로 이 진리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 자신은 구원받았다. 그러나 그 몸속에 죄가 기회를 노리며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것에 대한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는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죄가 그리스도인을 다시 사망의 영역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에게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절망적일 필요는 없다. 그는 자기가 영으로는 살아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충만한 확신과 자신감으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구원을 받은 반면에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있는 동안 이 싸움을 감당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고 그 싸움이 끝날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현재 위치는 그러하다.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영은 의를 인하여 사는 것이다” 자기 영이 살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라고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 로마서 7:24은 최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묘사가 아니다. 이것은 성령의 작용으로 인하여 죄책감에 빠져있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서 해놓으신 일이 무엇인지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리스도인의 위치는 ’몸은 죄로 인하여 죽었으되 영은 의를 인하여 살았다는 것이다‘ 곧 나는 죄로 인하여 죽을 몸을 입고 살고 있지만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고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다‘는 것이다.
제 7 장 영화로운 몸의 본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8:11)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 많은 사람들이 그 구절을 잘못 해석하고 있다.
첫째, 사람들은 사도가 여기서 일종의 ‘새 생명에 대한 도덕적 부활’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저 위대한 칼빈마저도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바울의 논증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행하신 것을 우리 자신에게 행하실 것이라는 점이다. 주님의 경우에 있어서는 도덕적 죽음이란 도무지 없었기 때문에 ‘도덕적 부활’이라는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일종의 ‘도덕적 부활’을 가르키는 것일 수가 없다.
둘째, 또 다른 그들은 이 구절이 ‘신유’의 완벽한 진술이라고 믿는다. 너희의 연약한 몸을 치료할 것이고 완전한 건강을 되찾게 해줄 것이라는 말씀으로 그 구절을 이해한다는 것이다. 이 진술은 실제적으로 우리 주님에게 일어난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을 ‘몸을 치료하는’ 구절로 해석할 만한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영적으로는 모든 것을 부여 받았고 그러나 몸에 있어서는 이 지상에서 완벽한 구원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질병을 가질 뿐 아니라 여전히 죽는 것이다.
이 진술은 우리 몸의 부활과 영화를 가르치고 있다.
첫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우리 주님에 관한 바로 그 구절이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도가 마치 우리가 그 말씀을 오해할 수 없도록 확실히 할 양으로 두 번 그 사실을 진술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이중적 진술이다.
둘째,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에 관한 두 문구들이 우리 육체적 몸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몸에 내주하고 계신다. 우리 몸에 일어날 어떤 일이다.
셋째, 부활은 사도가 하나의 최고 결정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오직 유일한 해석이다. 사도는 우리들에게 위로와 확신을 주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영으로는 구원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역시 몸의 영역에서 구원받을 것이다.
이 진술은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다시 한번 복되신 삼위일체 교리를 주목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여기서 이 일을 행하실 분이 성부 하나님이라는 사실과 마지막 문구에 그 일을 성령에 의해서 되어 질 것임을 말하고 있다. 성자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성령께서도 우리를 살리신다.(요6:40) 우리 그리스도인은 삼위일체론 자들임을 영광스럽게 생각해야한다. 그 삼위일체 교리로부터 성삼위의 각위가 우리와 우리 구원에 관련되어 있음을 연역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성부께서 그 모든 것을 계획하셨고 성자께서 그것을 집행하기 위해서 오셨으며 성령께서 그것을 적용시키신다.
내가 죽을 몸의 부활과 궁극적인 영화를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그리스도인인 내 속에 거하기 때문이다.
첫째,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성령 자신이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구속을 보증한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이 위대한 구원과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를 염두에 두고 우리에게 보내신 보증이다.(엡1:13)
둘째,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기까지 실제로 나아가셨다면 하나님께서는 중도에 그만두실 리가 없다.(빌1:6)
셋째, 성령께서 실제적으로 우리의 죽을 몸에 거하고 계신다.
넷째,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인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신 영과 같은 영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그와 함께 죽었고 또한 그와 함께 부활할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다섯째, 몸의 부활을 떠나서는 죄와 타락과 그 모든 귀추들로부터의 완벽한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사람은 총체적으로 영과 혼과 몸이 완전히 타락하였다. 우리의 몸이 ‘죽을’ 몸인 것은 타락 때문인 것이다. 나는 내 몸이 구원받기까지는 완전히 구원받은 것이 아님을 확신한다. 그 일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일어날 것이다.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그 몸이 영화롭게 될 것이다’ 내 몸이 부활할 것이고 내 몸이 인식될 수 있을 것이다.
기이한 진리는 우리 몸이 그의 영광의 몸과 같이 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기업이다.
어떻게 우리가 낙담할 수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이 세상을 지나면서 비참한 비 그리스도인들처럼 탄식할 수 있겠는가?
다소 사람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것에 대한 희미한 영상을 보았다. 내 영은 자유롭다(롬6:18) 그러나 몸도 역시 죄로부터 연약과 질병으로부터 해방될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 몸은 그 속에 있는 신적 생명에 합당하게 그리고 영에 합당하게 영광스러워질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죽을 연약한 몸에 그의 영을 두신 것이다. 그 사실로 인해서 나는 내가 부활하여 변화되고 새롭게 되리라고 하는 것이다.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 완전한 구원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은 몸이나 영화롭게 된 몸을 입고 영원을 살게 될 것이다.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게 될 것이다.
제 8 장 성화의 실제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2-13)
사도는 언제나 먼저 교리를 설정해 놓고 ‘그러므로’라는 이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것을 적용해 나간다. 이 진술은 중요한 두 가지 이유로 중요하다.
첫째, 사도의 실제적 교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의 논증을 따라갈 수 있게 하고 그것을 적용하게 한다. 단순히 지적이고 이론적인 관심만을 가지고 기독교 진리를 소유하는 것보다 더 위험한 일은 없다. 우리는 ‘그러므로’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려야 한다.
둘째, 이 두절 말씀은 신약적인 성화교리 입장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리스도의 성격과 지위를 알아보았는데 이제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실제적으로 거룩하게 되는가를 듣게 된다. 특별히 죄가 그리스도인에게 와서 그의 몸을 통하여 그를 넘어뜨리려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성화에 대한 인기 있는 오류이론들이 있다.
첫째, ‘완전주의자’ - 만일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다면’ 죄가 완전히 제거되고 곧 몸과 영과 혼에 완전히 죄가 떠난다는 것이다. 그것을 체험으로 가질 수 있고 추구하기만 하면 ‘믿음으로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롬 8:2이 바로 ‘제2 의 체험’, ‘성령세례’ 라는 것이다. 이 잘못된 교훈은 ‘두 번째 축복’을 받은 사람들만이 ‘영광중에 있는 성도의 기업’을 차지할 것이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그 기업을 누리게 하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성화가 아니라 칭의이다.
둘째, ‘반작용의 원리’ - 죄가 우리에게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지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바른 방법과 그 안에서 ‘거하는’ 법을 배우기만 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승리를 얻게 할 것이며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첫 번째 관점은 발람에 대한 설교에서 취해진 것이요, 두 번째 관점은 ‘귀신들린’ 여인에 관한 기적적인 역사를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두 교훈들은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사도가 어느 방식으로든지 우리에게 ‘항복하라’고 권면하지 않음을 주목하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 ‘내 맡긴다’는 말이 없다. 사도는 6:11-13에서 말한 것을 여기에서 더 실제적으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노릇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1-13)
사도의 방식은 첫째로 반복과 논증과 추론이다. 그는 우리에게 해방을 주기 위한 새로운 교리를 소개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일차적으로 사람의 의지에 호소하는 것도 아니다. 잘못된 교훈은 언제나 사람의 의지를 향하게 하고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에 있다고 단정해 버린다.
그 다음 둘째로 이러한 이해를 기초한 우리 측의 행동에 대한 요구가 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바울은 ‘성령세례로 말미암아 그 모든 것이 너희에게 이루어진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또한 ‘부활하신 주님께 그것을 넘겨주기만 하면’ 우리를 위해서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도 않는다. 그는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현재 시제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라. 계속적이고 반복적이고 습관적인 어떤 행동을 지시한다. 우리는 몸의 행실을 계속해서 죽이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늘 하고 있어야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라는 말로 비추어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나에게 해당되는 진리, 곧 내 몸이 ‘죄로 인해 죽은’ 채로 있으나 나의 영이 의를 인해서 산 것임을 깨닫는 것이고 하나님의 성령이 내 안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사도는 ‘우리는 육신에 빚진 자가 아니요, 더 이상 육신에 대하여 어떠한 의무도 가지고 있지 않다. 육신은 모든 우리의 고통의 원인이다. 육신은 우리로 죄짓게 하였고 비참하게 하였고 사망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사도가 우리에게 강권하는 것은 우리가 육신에 매여 있지 않다는 것이다. 육신이 우리에게 해놓았던 일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라는 것이다. 지금 여러분은 그것에 대해 채무가 없으니 육신에게 충성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한 복종하지도 말라고 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나는 너무 오랫동안 그것을 섬겨 왔다. 나의 빚과 채무와 의무는 다른 곳에 있다. 나는 내 빚을 갚아야 한다. 그 은혜를 갚으며 나의 채무를 자랑한다”고 하라.
사도가 이 위대한 성화교리를 일반적으로 소개하는 방식은 이미 우리에게 해당되는 진리로부터 추론하는 방식이다. 그것은 추구해야 할 어떤 체험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계속해서 행해야 되는 어떤 것이다. “은혜와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되는 것이다. 사도는 두 절 말씀 속에서 이 결정적인 방법으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실천적 교훈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제 9 장 죄의 본성과 우리의 새 지위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2-13)
사도의 교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올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첫째, 우리가 육신에 빚진 자들이 아니요 따라서 육신을 따라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신약이 언제나 성화에 관하여 이런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생소한 체험을 제시하지 않는다. 우리의 이해와 논리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성령의 영역으로 옮겨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에 합당하게 살라는 것이다.
둘째, 더 이상 ‘육신’이 우리에게 권리를 주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으며 ‘죄 아래’ 있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으며 은혜의 왕노릇 아래 있다. 사도는 우리가 어두움의 나라에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고 말함으로써 이 근본적인 변화를 묘사하고 있다.(골1:13)
셋째,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고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보좌에 앉힌 바 되었다. 그것이 너희의 현재 위치이다. 다만 죄가 너희 ‘죽을 몸’ 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몸을 위해 살지 말라. 육신을 위해서 살지 말라.
넷째, ‘육신’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너희가 다시 사망의 영역으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다섯째,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을 슬프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치적으로 생각해 보고 스스로 모순을 범하지 않도록 하라고 말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우리는 주어진 이유들 때문에 ‘육신을 따라서’ 살지 말아야 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 관한 기본적인 진리는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죄인이었음을 깨닫게 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모든 의가 ‘분토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 죄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인식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중생한 사람이요 새로운 생명을 받은 사람이요 새 본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가정에 양자가 되었고 새 나라로 옮겨진 것이다. 그는 은혜의 새 영역에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모든 것을 알고 그가 죽을 때, 영광중에서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을 것임을 믿는다. 이것에 대한 증거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 속에 ‘그리스도의 영’ ‘하나님의 영’ ‘성령’을 두신 것이다. 그는 거룩하고 흠이 없이 의롭고 영화로운 몸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을 안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바울은 사실상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 만일 너희가 이러한 일들을 믿는다면 어떻게 육신을 따라 살 수 있겠느냐?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은 고통과 번민과 상실과 영원한 위험으로 너희를 끌고 간다. 너희는 계속해서 그런 식으로 살아나가려 하는가? 너희가 참으로 믿는다면 여전히 여러분 몸에 남아 있는 그 요소로 하여금 이 세상에 사는 잠깐 동안에 여러분의 삶의 방식을 통제하도록 내버려두겠는가? 여러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여러분은 오히려 나는 이 어리석고 모순되는 일을 끝내려한다. 나는 지금 이 몸의 행실을 죽이려한다. 그것을 쳐서 복종시키려 한다. 나는 ‘이 죽을 몸’이 나를 주관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이치를 따지는 논증으로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성화에 관한 사도의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해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다음과 같은 보편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사도는 분명하게 성화의 방식은 그리스도인들인 우리 자신에 관한 진리를 깨닫고 그것을 실제화하는 방식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것은 계속되어야 하는 우리 측에서의 의지의 행동을 유발하는 하나의 논증이요 추론이다. 이것은 여기서만 아니고 바울의 모든 서신들 가운데 나타나는 교훈이기도 하다. 그는 보통 “그러므로”라는 말로 시작하여 이치적으로 논증하고 권면 호소함으로 서신 전반부에 말했던 것을 실제 행동으로 옮기게 한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고린도 전서 9:26-27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
고린도후서 6:14, 7:1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게 하자”
에베소서 4:1, 17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11 장 몸을 죽이는 일
“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2-13)
그리스도인은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소명을 받았다. ‘몸’이라는 말은 ‘육신’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죄가 머물고 있는 육체적인 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새로 탄생한 사람은 영은 이미 구원받았으나 몸은 아직 구원받지 못했다. 왜냐하면 몸은 죄와 오염의 도구요 처소가 되어 죄가 아직도 우리 죽을 몸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죽이다’라는 말은 죽게하다, 끊어지게 하다라는 것으로 우리가 ‘몸의 행실을’ 죽게 하고 ‘몸의 행실’에 대해서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성화와 관계된 위대한 신약의 교훈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권면이다.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거짓된 방식을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카톨릭의 수도원 제도적인 방식이다. 이 세상의 직업에 종사하는 동안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투쟁을 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것이라 불리 우는 것의 상태에 이르고 싶다면 세상에서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 확실한 맹세를 하고 매여 있었던 세상과 고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일과 돈을 포기해야 하고 음식을 절제하고 자주 금식생활을 해야만 몸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마틴 루터가 발견한 기만이 바로 그것이다.
둘째, ‘율법주의’ 이지만 카돌릭 교도들이 아닌 사람들로 ‘거짓된 청교도’로 묘사될 수 있다. 청교도주의의 교훈은 부정하고 일종의 청교도적인 실천을 가르친 것이다. 19세기 말엽부터 20세기 초엽까지 비 국교들의 특징으로 ‘기쁨을 비난하고 고된 나날을’ 살아가는 그런 유의 생활방식 이었다. 그것은 공포의 종교였고 율법주의에 불과했고 도덕적인 조항에 불과했다.
이러한 것들이 비참한 기독교를 만들며, 참된 것에 대한 단순한 기만에 불과하다. 이러한 속임수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적인 것보다 심리적인 방면으로 기울인 또 다른 그릇된 교훈을 유발하게끔 충동하게 되었다.
참된 방식은 무엇인가? “만일 너희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영으로써! 도덕, 율법주의, 거짓된 청교도주의에서 기독교를 구별시키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다. 그는 우리를 능하게 하시며 힘과 능력을 주신다. 그리스도인이 “나는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다. “너희 안에 계시는 이가 세상에 있는 이 보다 더 큼이라”(요일4:4)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속해 있고’ 악한 자가 그를 만질 수도 없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인식할 때 우리는 그 능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 권면은 영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능력을 행사하라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는가?
첫째, 먼저 영적으로 우리의 지위를 이해해야만 된다. 우리들의 많은 고통들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며 그리스도인들인 우리가 누구인가를 인식하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에 기인한다.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벧후1:2-4) 그런데도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아무런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신음하며 불평한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너희에게 주어졌다. 일어서서 너희 속에 있는 것을 사용하라.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나는 실패자“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 대해서만 말하고 자신과 성령과의 관계를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또 생각할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언제나 궁극적인 목표를 잃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치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벧후1:10-11) 사망이 올 때 염려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에 간신히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넉넉히 들어간다는 것이다.
셋째, 우리의 주요한 고통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데 있다. 만일 우리 자신을 영원한 곳을 향하여 가는 순례자로 더욱 더 생각했다면 우리의 전체 사고방식은 달라졌을 것이다.
넷째, 여러분이 실족치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성령을 쫓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우리가 그렇게 할 때 모든 것은 ‘영으로 말미암아’되는 것임을 우리 스스로 명심하여 성령의 조명된 마음을 가지고서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여러분은 죄를 삼가야하고 그러한 일을 행하고 그러한 삶의 방식을 택하는 사람들과 교제를 가지지 말아야 된다. 오히려 그것을 피해서 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있어야 한다. 또한 몸은 ‘쳐서 복종시켜야’하는 것이다. 과음 과식과 다른 어떤 것으로 몸을 탐닉시킨다면 몸의 행실을 죽이기가 더욱 힘들게 된다. 몸과 마음과 영 사이에는 친밀한 관련이 있어 몸을 쓰면 영적 싸움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여러분을 죄로 이끌어가기 쉬운 어떤 것도 바라보지 말라.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가 차표를 예매하여 열차의 좌석표를 받아 고통 없이 하늘나라로 가볍게 보내진다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여러분 속에서 일어나는 죄의 첫 번째 동기와 첫 번째 충동과 유혹을 처리 하라.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넘어질 것이다.(롬1:13-15) 만일 여러분이 그것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그것을 대접하기 시작하면, 그리고 상상으로 즐기기 시작하게 되면 여러분은 패배한 것이다. 첫 번째 죄의 충동을 느낄 때 그것을 끌어 잡아당겨서 폭로하고 분석하고 그런 다음에 그것이 미워질 때까지 그것을 주목하라.
만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이 죄에 넘어 진다면 스스로 너무 쉽고 빠르게 치료하지 말라. 그것을 미워하며 스스로 다짐하라. 그러나 여러분 자신을 절망과 침체의 깊은 수렁으로 밀어 넣기까지 해서는 안된다. 두 극단은 피해야 한다.
참된 기독교는 말한다. “깨어서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다음에 “성령으로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5:16)
여러분은 지식을 더해야만 한다. 자신을 깨우쳐야하고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만하며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는 책들을 읽어야만 한다. 적극적으로 살라. 더 성장하기를 사모하라.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임을 인식하며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런 일들을 하도록 지으셨다는 사실을 인식하기만 하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제 12 장 양자로 받아들임과 중생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8장의 메시지는 구원의 확신이다. 이 주제는 5:1에서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알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5:12-21에서 이 권리를 가지게 된 기초는 신자와 그리스도 사이의 연합의 교리를 소개한다. “아담 안에 있었듯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있다. 그것이 확신과 확실성에 관한 궁극적 원천이요 근거이다. 그런 다음에 난제들을 다루기 위해 6장 7장에서 논제를 벗어나야만 했다.
다음 8장에서 그 위대한 주제로 되돌아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우리가 전적으로 율법에서 구원받아 성령으로 그리스도께 연합되었다는 차원에서 확실성과 확신의 주제를 더 풀어가고 있다. 5-11에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내주하심과 우리의 거룩함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그의 역사하심과 우리의 궁극적인 몸 자체를 포함하고 있는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라는 차원에서 그 구원의 확신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고 있다. 12-13절에 실제적인 권면이 나온다. “이 모든 것을 비추어 볼 때 너희는 육신에 대하여 빚진 자들이 아니다. 육신을 좇아서 살아야 할 자들이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너희의 신분과 전적으로 상충되는 것이다. 우리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
이제 이 14절에서 17절까지 새로운 주제로 우리가 가진 신적자권의 입장에서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과 확신을 말한다. 우리는 사도가 이 문단에서 양자교리를 다루고 있는 방식이 성화가 아니라 구원의 확신에 관한 것임을 명백히 증거한다. 8장의 근본주제가 성화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다. 성화를 그 자체의 목적으로 삼을 때 참으로 큰 실수를 범하게 된다. 그들은 자기 자신과 자기들이 가진 문제들로부터 출발하여 “내가 그리스도인인데 나는 실패만을 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승리의 삶을 살 수가 있을까?”라고 말한다. 그래서 성화가 모든 문제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사도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며 하나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아바 아버지”라 불러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의 바램은 우리들이 이 점에 대해서 확신한 나머지 외부로부터 어떠한 것이 우리에게 올지라도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들이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어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인내한다면 우리는 또한 그와 함께 영화롭게 될 것이다. 성화는 영화로 인도되는 과정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사도의 관심은 언제나 영화에 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그것이 성취되는 것을 막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보증들 가운데 하나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사실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첫째, 모든 사람이 전부 하나님의 아들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보편적 구원론을 주장하는 그들은 인간 전체가 구원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구원에 관한 전체 교리에 깊고 궁극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분명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순전히 철학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격이 된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든지 진노와 마귀의 자녀들이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말씀 한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강조한다.
어떤 이들은 14절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16절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불과한 사람들보다 더 특권적인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둘 사이에 어떠한 구별이나 차이를 강조하고 있지 않는다. 그 차이는 관계 속에서의 차이가 아니라 우리의 지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차이이다.(갈4:1-7)
셋째, 아들됨의 의미 이다. 우리는 아담의 혈통에 속해있어 본질상 하나님의 자녀나 아들이 아니라는 전제를 해 놓아야 한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이다. 한 사람이 법적 조치로 인하여 양자로 인정되면 그에게는 한 아들의 특권과 지위가 주어지며 아들로서 행동하게 된다. 양자로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법적 조치이다. 그것은 의롭다하심을 받는 것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법정적으로 의롭다 인정하시고 자기 가정의 양자로 맞아들인 것이다. 양자됨의 의미하는 바는 우리를 법적인 방식을 통해서 양자로 받아들이는 분이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그 행동은 번복될 수 없는 조치라는 것이다.(엡1:3-6) 이 교훈을 포착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영화를 확신할 것이고 그는 핍박과 시련과 이 세상에서 그를 향해서 오는 다른 모든 것을 대처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가족으로 양자로 받아들인 사람만이 아니다. 그는 새로 태어났다. 그는 영으로 났다. 그의 성품에 변화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즉시 붙잡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양자로 받아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와 연합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의 지체들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양자에서만 멈추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중생한 결과로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며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이다.
“기독교는 사람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헨리 스코우칼-
사도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강조해야만 했던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는 단순히 죄를 용서받은 사람만이 아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진리요 진정한 구원의 확신에 대한 근거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러분은 세상을 바라보되 하나님의 가정에 속한 하나님의 한 자녀라는 입장에서 바라본다는 것을 잊지 말라. 그러면 여러분은 결코 절망하지 않을 것이며 여러분은 당황과 공포와 놀람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의미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 믿음이다.
제 13 장 우리의 아들됨에 대한 확신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양자의 의미는
첫째, 유사성과 닮음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다. 부자에게는 유사성이 있고 서로 닮았다. 사고방식과 마음에 있어서 유사성과 닮음이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모든 일을 하나님 입장에서 살펴본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5-16)
또한 행동에 있어서의 유사성과 닮음을 내포하고 있다. 주님은 산상설교에서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를 그렇게 대우하시며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대우하시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마5:44-48) 이것이야말로 거룩한 삶을 위한 장엄한 동기이다. 우리가 우리 아버지의 자녀답게 행동해야 된다는 것이다.(엡5:1-2) 그 유사성과 닮음은 우리의 존재 전체와 우리의 행동 전체에 확산되어 있어야 한다. 사고방식, 이해, 행실과 행동들 그 모든 것에서 그 유사성과 닮음이 나타나야 된다.
둘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 수 있으나, 중대한 구분은 모든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태도와 그의 아들 그의 자녀들에 대한 특별한 태도 사이에 차이이다. ‘아들들’ 이란 말은 인간처럼 육신의 아버지처럼 그는 우리의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가진 애정어린 관심과 특별한 배려가 어느 정도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그는 아버지로서 우리를 위해서 아들들을 영광 그 궁극적인 영광에 이르게 하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인도하고 우리를 지도하심으로써 그 목표에 이르도록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개별적인 관심을 가지시고 우리가 방종으로 우리 자신을 망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때때로 책망하시고 징계하시고 벌하시고 고난도 받게 하신다. 우리는 징계를 당하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본다. 그것은 매우 힘든 수업이나 매우 영광스러운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돌보시고 보호도 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 함축하고 있는 개념의 부요한 어떤 것이다.
셋째,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받으실 준비가 되어있고 우리말을 듣고 축복을 해주실 차비를 차리고 있다. 더 나아가 그는 우리가 받기를 희망하는 것보다 더 주실 준비가 되어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때 이것을 깨닫는 것은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만일 우리가 의심하고 확신하지 못하면 진정으로 기도하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를 받아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완전한 신뢰심을 가지고 어린아이들처럼 나아가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영원한 심판자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곧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 갑시다” 우리는 ‘보좌’와 동시에 ‘은혜’를 강조해야 한다. 우리가 거룩한 경외심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겁쟁이의 공포는 버려야 한다.
어떻게 우리의 이 아들됨을 확신할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는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된다고 단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자기가 순례길을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다. 세상은 황량한 광야이다. 그러나 하나님계서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우리가 바라는 가나안 땅까지 인도하고 계신다. 바울은 우리를 안락의자에 앉힌 채 옮겨진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우리의 발과 무릎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저 모든 것을 하나님께 넘겨 드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라고 가르치는 교훈은 비성경적이고 잘못된 것이다. 여러분은 인도와 지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걸어가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수동태이면서 현재 진행형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의지를 거역하여서 어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의지를 설득시켜 우리의 확신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일들을 사모하게 한다. 기독교에 있어서 강제란 없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계명이 무거운 것이 아니다.(요일5:3)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희는 무지한 말이나 노새같이 되지 말지어다 그것들은 재갈과 굴레로 단속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가까이 오지 아니하리로다”(시32:8-8)
그러나 아무리 자연인이 최선을 다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는 자연인에겐 해당이 되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의 욕망 이외의 어떤 것에도 인도를 받지 않는다. 자연인은 자신보다 조금 높은 수준의 세상의 사고방식(이성)에 의해 지도를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다. 그들은 미디어(MEDIA) 곧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기타 미디어를 통제하는 권세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는다. 즉 자기 자신의 이해와 의지력과 결정을 사용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전적으로 다른 위치와 범주에 속해있다. 그리스도인은 그와 그의 삶이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와 지시를 받아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완전하다고 하는 의미는 추호도 아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주요 경향성이 성령에 의해서 지도되는 것이라고 말해질 수 있다. 여러분 스스로 “나의 모든 결정과 실수와 그런 모든 것들이 나에게 사실이지만 내 삶에 있어서의 주도적이고 충추적인 힘은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말할 수 있다”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최대의 바램인가? 바울은 그렇게 말할 수 있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제 14 장 특별계시와 성경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근거를 알아보는 첫 번째 이유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에 의해서 ‘운전당하지’않는다. 우리는 성령이 감수성이 강하신 분으로 근심하실 수 있고 소멸될 수 있으며 상함을 받을 수 있다. 그는 일반적으로 비둘기에 비유된다. 그 충동이 매우 강할 수 있다. 그러나 ‘몰아냄’ 은 없고 강제성도 없다.
‘인도함을 받는’ 이라는 말을 해석하는 방식은 성화의 교리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인도하시는가에 대한 두 종류의 학파가 있다. 두 학파는 서로 대립적으로 주장하여 한 학파는 다만 인도의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를 어떻게 아는가? 내가 목회 소명을 받았는가? 다른 학파는 직접 인도를 받는다는 사람들의 과열을 두려워한 나머지 그러한 인도를 전혀 배제시킨다. 우리는 두 국면들을 생각해 보아야한다.
14절 말씀이 13절 말씀의 후속적인 말씀이다. 13절의 말씀은 ‘인도’와는 아무런 관계를 가지지 아니한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실제적인 일상 생활과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즉 첫 번째 의미는 성령이 우리를 보편적으로 인도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진리의 영이시다. 성령은 이 성화의 문제와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에 있어서 성경 안에서 또한 성경을 통해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그 성경에는 더 이상 첨가할 것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계시의 첨가를 주장하는 어떤 주장도 거부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 그 자체가 우리에게 필요한 진리의 전체이다. 우리가 로마 카돌릭 교회의 교훈에 대해 단연코 반대 입장에 서는 곳이 바로 이 부분이기 때문이다. 복음적인 교파에서도 재림에 관한 인기 있는 교훈으로 ‘성도의 우선적 휴거’ 로 알려진 교훈이다. 그 교훈은 어떤 사람에게 일종의 환상으로 주어진 것임을 발견한다.(1831년) 사람이 자기가 받은 환상이나 체험에 대해서 어떠한 것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 교훈이 성경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이라면 또 성경과 조화를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면 거짓된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어떻게 해서 성령께서 진리와 관련하여 우리를 인도하시는가?
그는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심으로써 그렇게 하신다. 고린도전서 2장 10절에서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곳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2:20-27에서 “너희가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안다”고 하셨다. 그 기름 부음은 계속되며 여러분을 진리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와 적그리스도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성령께서 우리를 진리의 지식과 이해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성령에 의한 인도를 말할 때 어떤 사람들은 환상이나 환각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장 중대한 문제는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조명시키고 있느냐, 무엇에 관해서였느냐이다.
첫째, 하나님 자신에 관해서이다. 하나님을 그의 아들 안에서 그리고 아들을 통해서 계시하시면서 우리들에게 하나님 아버지에 관한 진리를 가르치고 그 진리로 인도하시는 것은 성령의 의무이다. 그와 아울러 영혼과 영혼의 필요성에 관해서도 우리를 조명시켜준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우리의 죄됨과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사실을 알게 하는 것은 성령의 특별한 사역이다.
둘째, 성령께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식 곧 그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한다. 만일 그가 여러분을 인도하셨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그는 계속해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되 더욱더 깊은 데로 인도하여 가신다.
셋째, 성령께서는 우리를 또한 이 세상에 관한 하나님의 전체 목적을 이해하도록 하신다. 나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지 아들인지를 스스로 판단하기 위해서 적용할 수 있는 그보다 더 훌륭한 시금석이 있는줄을 알지 못한다. 여러분은 세상의 상황에 대해서 놀라는가? 그것을 보고 놀라고 절망하는가? 여러분은 세상에 유도피아가 건설될 것이라고 믿고 기도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께서 돌아보심을 오직 유일한 소망으로 기대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의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런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22-23)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위해서 위대한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계심을 믿으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원한 생각 속에 있음을 믿는다면 또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녀임을 확신할 수 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조명하심으로써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다.
넷째,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욕구에 있어서도 역사하심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니” 우리의 마음들이 그렇게 되도록 하시는 이가 성령이시다. 그는 우리의 욕구에 대한 설득 작용을 통해서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통제하고 지배하신다. 그는 적극적으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으심으로써” 그 일을 행하신다.
다섯째, 성령께서는 설득 받을 필요가 있는 의지에 대해서 역사하신다.
“속사람이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강건하여”(엡 3:16) 성령께서 우리의 속사람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한 우리의 의지와 결심을 강화시킨다.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확신해야 되고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알아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제 15 장 영적 사고방식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는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장 17절에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함이니라” 성령이 육체를 거스려 우리 속에서 욕심을 내고 있다. 그의 바램은 우리가 육체의 영향에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 야고보 4장에서는 성령께서 우리의 성화를 갈망하시고 우리의 성결을 갈망하시며 우리가 참다운 하나님의 자녀들일 수 있기를 간절히 사모하며, 심지어 질투하여 시기하기까지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작정된 목표로 인도하기 위해서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 쓰신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의 이지와 마음과 의지에 역사한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이 사모하심에 무릎을 끓는 사람들이다.
내가 실제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내가 하나님이 영의 인도를 받는다면 그는 삶에 대한 나의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방식을 주장하신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인생에 대하여 영적인 사고방식을 가진다. 그는 신령한 일에 맛을 느끼는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함께 성경 공부하는 모임을 즐거워한다. 영적인 생각을 가진 동료를 즐거워하고 그리스도인의 모임과 교제를 좋아한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일이다. 이 세상의 삶이 하나의 순례 길이요, 나그네 길이요,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또한 여러분이 갈수록 여러분의 속에서 다른 영역, 참된 영역에 속해있음을 의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으로 받는 사람은 규정상 하나님이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중생한 사람에게만 그런 일이 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온전히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사셨다.
셋째,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 속에 하나님을 아는 더 지식을 소원하게 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 크게 바라게 된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성경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진정한 동기가 내가 세워 놓은 규칙 때문이면 그것은 진정으로 주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에서도 최고의 소망은 이러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다.
넷째,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언제나 하나님을 위한 자기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염려하고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성령은 구원을 통해서 주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보내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전체를 드려서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고 성령을 사랑하고 성자를 사랑하고 사모하고 있어야 함을 느낀다.
다섯째, 좀더 실제적인 시금석들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더욱더 깨닫게 된다. 그것은 빛에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수록 더욱더 어두움을 잘 알아차리는 것과 같다. 더욱더 완전해지고 순결해지고 순결해지면 순결해 질수록 모든 더러운 것이 더 나타나게 마련이다.
여섯째, 죄를 짓는 것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반응은 육에 속한 사람들과는 달리 괴로워하지 않고 그는 슬픔을 느낀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율법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보다 비참해지는 것은 없다.(고후7:9-11)
일곱째,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점점 더 죄와 악과 유혹이 접근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예민해지고, 더욱더 조심하게 된다. 또한 시험에 대하여 그처럼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넘어지지 않는다.
여덟째,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자기 속에서 의와 거룩을 사모하며 갈망하고 있는 것을 의식한다. 오직 그를 넘어뜨리는 어떠한 특별한 죄에서 구원받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매우 어린 그리스도인이요, 갓난아이들이다. 성령에 의해 확고하게 인도 받는 사람은 거룩과 의를 적극적으로 사모하며 갈급해 한다.
아홉째, 진정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은 그러한 느낌을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롬8:13) 몸의 행실을 죽이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육체에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는 눈과 귀를 조심스럽게 지킨다. 만일 그들이 자기에게 해를 끼치고 있음을 알면 그는 그들을 피할 것이다. 그것이 몸의 행실을 죽이는 방법이다. 다른 말로하면 그것을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를 받는다면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사고방식은 하나님께 원수가 되며 그 방식과 야심에 있어서 그러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열 번째,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시금석들을 우리 자신의 삶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우리들 자신에게서 시금석들 중 어떠한 것들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저는 여러분이 이러한 질문 중 어느 것에 대하여도 완전한가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 여러분이 그런 일들에 대한 어떤 증거라도 있으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다. 작은 흔적에 지나지 않다 할지라도 여러분은 매우 어린 아이며 아마도 갓 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그것이 시초이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머무르지 말라. 여러분은 은혜 속에서 자라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야 된다. 만일 여러분 속에 성령에 대한 가냘픈 빛밖에는 없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령은 여러분을 인도하기에 갈망해 하신다. 그는 질투심을 가지고 여러분을 갈망하고 계신다. 그 바람은 하나님께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를 이 끝없는 영광으로 날마다 인도하사 우리로 하여금 더욱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읽힐 수 있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들”이 되기를 바란다.
제 16 장 ‘영’ 이냐, ‘성령’ 이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4-15)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 이 구절로 우리 삶의 세부적인 항목에 이르기까지 직접적인 지시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성령에 의해서 직접적으로 인도를 받고 있다는 것을 주관적으로 인식하기는 너무 쉽다. 교회 역사상 가장 큰 비극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자기들이 성령에 의해서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인도를 받고 있음을 매우 확신했던 환상적인 사람들의 행동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전적으로 배제되었다고 말하는 데까지는 갈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직접적인 방식으로 인도하고 지시한 실례와 예증들을 사도행전에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행 13:2, 16:6-7) 성령께서 안내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등의 문제될 바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그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13절에서 성화의 문제를 몸의 행실을 죽이는 차원에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에 의한 인도는 13절로부터 계속되어 나오는 주제이며 연관되어 있다.
15절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자녀들임을 확신하는 또 다른 시금석을 대하게 된다. 구원을 확신한다는 것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 그리스도인의 가장 높은 특권이다. 15절은 구원의 확신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구절이다. 14절로부터 우리가 얻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어떤 것을 제시한다. 주석가가 영적인 사람이면 사람일수록 그는 15-16절에 있는 부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 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사용된다. 여기에 비교와 대조가 나타나 있다.
잘못된 해석을 하는 첫 번째 학파는 첫 번째 말이 정서나 감정을 나타내는 말이고 두 번째는 성령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학파는 성령께서 ‘종의 영’이라는 말로 묘사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여기서 회심전의 사람과 회심 상태에 있는 사람 사이의 대조라는 것이다.
우리는 두 경우에 있어서 ‘영’ 이라는 말이 모두 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첫째, 여기서 전체 문맥이 성령 자신을 가르킨다. 사도는 8장이 시작되면서부터 거의 성령에 관해서 다루어왔다.
둘째, 사도 자신이 그런 식으로 행한다는 어떤 암시도 주지 않고 같은 말의 의미를 바꾸어 버린다는 것이 분명히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점이다.
셋째, 회심하지 못한 사람이 성령이 아니고도 ‘종의 영’과 ‘두려움의 영’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 매우 비성경적이라는 것이다. 불신자는 죄와 허물로 죽어 있지만 자기는 전혀 안전하다고 느끼는 안전과 만족의 영이다.
넷째, ‘받았다’는 말을 강조하려는 것이고 특히 ‘다시’라는 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한때는 종의 영을 받았던 사람들이 지금은 양자의 영을 받은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다. 병행적 진술로 너희는 전에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었지만 ‘다시’ 그것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산출하는 것은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율법을 방편으로 해서 율법을 통해서, 말미암아서 그 일을 행하신다. 롬7:7-25에서 그가 “법을 깨닫지 못하여 살아있을 때”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에게 율법을 적용시켰을 때 깊이 죄책감에 빠지게 되었다 그 결과 무서운 종의 상태에 있음을 발견했던 것이다. 성령만이 죄책감을 깨닫게 할 수 있다. 성령께서 우리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역사를 하기 시작할 때 그는 정확히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산출하는 것이다. 율법 외에도 때로는 환경들이 우리를 위협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잠시 동안 죄짓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죄를 깨닫게 하는 종의 영이 아니다. 사람들은 전쟁이나 죽음을 직면해서도 더 선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죄에 대한 깨달음을 전혀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오순절 날에 죄인들에게 설교를 하였을 때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라고 하였다. 그들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존 번연은 그의 - 죄인 괴수에게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 라는 책 속에서 18개월 동안이나 그런 상태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자유를 주시는 성령께서는 먼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산출 하신다. 위대한 부흥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영이 부흥을 일으키려 하실 때 그의 첫 번째 역사는 예외없이 사람들을 낮추어 죄를 깊이 깨닫게 하고 전적으로 무능하다고 절망적으로 느끼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종의 영이요, 두려움의 영이다. 이것이 성령을 부어주신 결과이다. 성령은 우리를 낮추시고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자유를 주시는 성령께서는 먼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산출하신다.
이 영에 대한 표증들은
첫째, 정죄 의식이다. 자기가 죄인이며 하나님께 대해 전적으로 잘못된 관계에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느니라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뇨”(롬 7:10-11)
둘째, 자기 속이 부패했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다.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4, 17, 18)
셋째, 자기의 전적인 무능력을 깨닫게 된다.(롬 7:15-21)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는 매여 있으며 무능하며 절망적이다. 내가 묘사해 나오고 있는 ‘종의 영’은 언제나 ‘양자의 영’에 앞서는 것이다. 이 15절 두 번째 부분에서 뿐만 아니라 두 번째 부분에서도 구원의 확신을 주는 근거들을 발견한다. 로마서 7장의 사람은 완전히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그는 ‘율법 아래’서 죄를 깨닫는 상태에 있는 사람이다. 그는 죄에 대한 책임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음과 죄의 권능에서 자신을 스스로 구원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처럼 두려워하는 종의 상태에 있게 된다. 우리는 무서워하는 종과 두려움의 영을 받는다. 우리가 그것을 ‘받을 때’ 그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제 17 장 증가하는 죄의식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무서워하는 종의 영은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성령의 제1차적인 사역이다. 그것은 단순히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마귀는 육신적인 평안에 빠뜨려 더 이상 구원에 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게 하려 한다. 그러므로 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이 하나의 시금석으로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나는 종과 두려움의 영이 언제나 양자의 영을 선행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위대한 청교도 존 프리스톤은 “만일 종의 영을 가진 적이 없으면 양자의 영도 받지 못한 것이 틀림없다....나는 모든 사람이 이 종의 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몽학선생인 율법이 아니고서는 그리스도께 올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이 종의 영을 체험하는 정도는 그 세기(강도)에 있어서 상당히 다양할 수가 있다. 우리는 그 점에 있어서 잘못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다만 누구나 성령에 의해서 산출되는 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 관해서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의 반대 이론이 제기되기도 하는데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난 경우에 그들까지도 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고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그들은 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은 죄를 지은 양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눅 7:47 의 우리 주님의 말씀을 그 여자가 그만큼 많은 죄를 짓고 그만큼 많은 용서를 받았으니 그 여자는 더 사랑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주님의 교훈은 우리가 지은 죄의 양이 아니라 우리 죄됨을 깨닫는 데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복음은 죄에 대한 촉진제가 아니다.
둘째, 신앙주의란 단순히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죽었다고 하는 것을 믿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지적이요 관념적인 것일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두려워하는 종의 영’의 특징들로 알았던 것과 분명히 일치하지 않는다. 사도는 고후 13:5에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는 회심자들을 얻기에 급급한 나머지 또한 그들이 불안해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너무 지나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셋째, 진리의 영이요 성결의 영인 성령께서는 언제나 죄의식과 죄책감을 산출한다. 성령께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매우 필연적이다.
넷째, 모든 성도들에 대한 하나님의 역사가 크면 클수록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그들의 이해가 더 컸음을 발견한다. 또한 그뿐만 아니라 자기들의 죄됨과 무가치함에 대한 앎에 있어서도 그러하였다.
다섯째, 위대한 신앙부흥을 경험한 사람들은 성령이 그들에게 퍼부어 졌을 때, 첫째 죄의 대한 체험으로 무서워하게 되고, 그런 다음, 그전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역사에 대해서 더 분명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게 하는 것은 우리의 지은 죄의 수량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알게 됨으로 인해서 오는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것은 빛이다.
여섯째, 자기들은 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전혀 알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또한 자기들은 일반적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실상은 알지 못한다고 정직하게 말해야 할 사람임을 발견했다. 그들은 진정한 구원의 확신이 부족하다. 진리의 영이시오 성결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죄의 권능을 밝혀주며 궁극적으로 사람으로 하여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 라고 울부짖게 만드는 죄의 권능을 밝혀주는 것이다.
내가 역설하고 있는 것은
첫째, 다만 어느 정도로 이 종의 영이 있어야 되며, 우리가 죄인이며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되고, 우리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으며 구원받을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 것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뿐이다.
둘째, 구원의 확신이 부족하다는데 대한 염려나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는 데 대한 근심은 그 자체로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중생치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부족하다고 염려하거나 근심하지 않는다.
셋째, 그러므로 분명한 것은 우리가 이 진술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분의 생애에서 중요한 일들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이 두려워하는 영을 아는 사람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서 그가 주의 영광을 대하게 되었을 때 그는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 두려움의 영을 산출하는 것은 여러분이 자라난 환경이나 여러분이 지었던 죄의 숫자나 또한 여러분이 보호받으며 살아온 삶이 그런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내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분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진 관계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 그것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것이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추구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라. 그 밖에 모든 것은 잃어버리라. 하나님에 대하여 무엇인가 안다는 것은 여러분 속에 있는 죄의 깊이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특별히 그의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만 해결될 것에 대한 절대적인 필요성을 아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제 18 장 경건한 두려움과 무서운 두려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시내산을 거치지 않고 시온산에 가려 해서는 안된다....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에게 오라는 구원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율법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 훳필드 -
종의 영은 양자의 영을 언제나 선행한다.
이제 사도가 이 시점에서 강조하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들, 곧 적어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성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들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그들이 더 이상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다시 받지 아니하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끝나 버렸고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에 의해서 그 자리가 채워졌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잃어버려야 한다.
사도는 5장 초두에서부터 말해왔다.(롬5:1-2) 여러분이 하나님과 더불은 화평을 누리며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더 이상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가질 수 없고 그 아래 있지 않는다. 우리 안에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산출하도록 제1차적으로 역사하신 성령께서는 더 나아가 그 영에서 우리를 건져서 다른 곳으로 옮겨준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진정으로 아는 것, 또한 성령으로 우리에게 그것을 적용시키는 것은, 필연적으로 우리를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서 벗어나게 한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는 순간 두려워하는 종의 영은 사라지는 것이다.
‘두려워하는 종의 영’과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경외심과 경건한 두려움은 무서워 떠는 두려움이 아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종의 영 가운데 있는 두려움은 묶여있는 가공할 두려움이다. 그래서 절망적으로 그 사람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고뇌에 찬 말을 하게 된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로 하여금 그 두려움의 고뇌에 처해있으라고 권고하지 않는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첫째, 어떻게 우리가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나아가면서 동시에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소멸하는 불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언제나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그에게 접근해야 된다. 경외심은 궁극적으로 사랑에 기초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도록 허락받은 특권이 얼마나 큰가를 인식하는 것이다. 거기에 무서워 떠는 것은 없다. 어떤 사람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다시는’ 받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데 급급한 나머지 기도할 때 ‘친애하는 아버지, 사랑스런 아버지’ 라는 식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두려움과 경건함’의 개념을 너무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그것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이 되도록 하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깨닫고 늘 조심해야 하고, 동시에 나는 하나님께 대하여 가진 관계를 결코 의심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나의 경외심은 무지를 기초한 것이 아니라 앎을 기초한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들이 더 이상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한다고 교리적으로 역설하고 있는데, 만일 낙심과 불확실함을 느낀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것을 자동적으로 나타내는 것인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서 건짐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결코 다시는 어떤 낙담과 낙심을 맛보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 침체의 원인은 기질의 문제일 수도 있고 심리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체질의 차원에서 다른 사람들보다도 두려움과 이러한 침체의 상태에 더 잘 넘어가는 사람들이 있다. 진정으로, 침체되어 있는 사람에게 나아가서 성경 구절들을 인용해 주면, 그들은 위안이 되는 성경 구절을 듣게 될 때 언제나 환호하고 침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 아래로 들어가 있지 않다는 절대적인 증거이다. 기질은 회심으로써도 처리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될 때 동시에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기질을 조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무리 그가 죄로 악한 상태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그는 다시 두려워하는 종 아래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죄의식을 가지나 율법에 대해서 죄를 지었다고 의식하기보다는 사랑에 대해서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을 용서할 용의가 있음을 안다는 그 사실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러분 자신을 미워하고 여러분 자신을 더욱 힐책하게 만드는 것이다. 다웟처럼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라고 하나님을 바라게 된다. 비록 그가 죄를 지었지만 그는 궁극적인 정죄의식은 갖지 않는다.
셋째, 사단의 공격을 받고 또한 그의 원수들이 그를 목표로 하고 괴로움을 주어 고통을 받는 그리스도인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그는 최고의 무기로 너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입증하기 위해 무척 노력한다. 마귀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마귀는 그런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내려고 무척 애를 쓸 것이나 성령께서만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마귀를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로 입증된다.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하는 순간 그는 사라진다.(약4:7) 여러분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과 실족하여 넘어진 사람이 가진 영 사이의 차이를 분별하는 방식은 성경을 적용시켜 보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성경에 반응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단의 공격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넷째,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하나님이 자신에게서 얼굴을 돌린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실로 이것은 우리를 징계하시는 국면들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그들이 그러한 조건에 빠져있을 때 그것이 종의 영이 아니냐고 말하나 그렇지 않다. 그는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말하지 않고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할 것을 알꼬”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어딘가 계시다는 것을 안다. 우리는 이런저런 모양으로 그 사랑하는 자가 우리에게서 얼굴을 돌리게 하는 범죄를 했던 것이다. 버림을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부르짖는 부르짖음은 어둠 속에서 하는 부르짖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서 단번에 구원을 받은 것이다. 주님을 찬양하자.
제 19 장 우리가 양자라는 의식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
우리로 하여금 무서워하는 종의 영에서 벗어났음을 상기케 하는 두 번째 부분이며 하나님의 아들됨의 세 번째 증거이다.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가지는 적극적인 축복을 받았다. 그것은 그 어떤 것 보다 하나님의 아들됨을 강하게 증거하고 있다.
첫째, 성령께서 친히 우리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우리가 양자라고 하는 지식을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갈 4:6)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산출하는 이는 성령이셨다. 다른 측면에 있어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고 싶은 욕망과 느낌을 가지도록 인도하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둘째, 많은 주석가들은 14절의 차원에서 ‘양자의 영’은 다만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결과일 따름이며, 일종의 추론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를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확신하는 열가지 시금석에서부터 끌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주관적인 어떤 것이고, 본질적으로 느낌과 정서와 직감의 영역에 속해 있는 어떠한 것이다. 그것은 지적 차원보다 더 깊은 우리 안에 있는 어떠한 것이다. 이것은 설득시키는 어떤 것이 아니고 휠씬 더 확실한 증거들을 하나님께서는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증거의 본질은 철저하게 주관적인 것이고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산출되는 것이다.
‘양자의 영’은 그것을 느끼는 것이지 그 사실을 믿는 것만이 아니다. 사도가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점은 우리가 반드시 교리를 믿어야 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느껴야 되고 의식해야 된다는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양자의 영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갈4:6에서는 ‘성령’이라고 말하지 않고 자기 아들의 영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를 양자로 받아들이시는 이 행동의 결과로 인해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그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였다. 저는 ‘양자의 영’이라는 말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옆에 우리를 두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 곧 양자의 영은 ‘하나님 자신의 영’이다. 아들이 중보자로서 성부를 향해서 누리고 계셨던 느낌들은 모든 신자들을 움직여야 하는 느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셨듯이 우리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요 우리 아버지라고 불러야한다.
셋째, ‘양자의 영’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느낌의 문제임을 강조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라는 증거의 일부로 그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고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의식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여러분 속에서 들고 일어나는 하나님을 향한 감정을 말하고 있다. 요일 4: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의식하고, 이제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그 축복을 깨닫고 우리가 반응을 나타내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가진 관계에 대한 성경의 진술을 읽을 때 그 진술들이 여러분을 감동시키고 또 감동이 되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나타내는 애정을 깨닫고 감동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여러분을 흐느끼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이 나타날 때 여러분은 겸손하게 되고 감동하게 되고 녹아진다. 더 이상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 보편적인 느낌이 아닌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누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아는 것이다. 그는 안식과 평안과 자기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기의 아버지이며 아무것도 자기를 해칠 수 없음을 느끼게 된다. 그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진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 - ’아바‘라는 말은 아람어로 어린아이들이 자기 아버지를 부를 때 친근하게 사용하였던 본능적인 말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유대인 가운데 자유인의 자녀들에게만 허락되었고 노예 자녀들에게는 그런 칭호들이 허락 되지 않았다. 우리가 이 노예와 노예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이제 ’아바‘라는 칭호를 사용할 자격을 얻게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복되신 주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라고 가장 큰 고뇌의 순간에 사용하셨던 말씀이다. 그것은 바로 사도가 우리들에게 말하는바 하나님의 자녀로 수양되었음을 깨닫는 사람의 마음속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부르짖음 바로 그것이다.
‘부르짖음’ -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큰 고함소리’ ‘열심을 내어 소리지름’ ‘뜨거움’ ‘끈질긴 재촉’을 의미한다. 우리가 양자의 영을 가질 때 우리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이것은 지적으로 신학적으로 이론적으로 교리적으로만 믿는 하나님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다. 가까이 계시고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의 자녀로서 그를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다. ‘아바’라는 말은 품위보다 오히려 친근감이다.
사람들이 살아있는 영적 체험에 관해서 점점 알지 못하게 될 때 그 예배가 더욱더 형식적이 되어 간다는 것을 주목한다는 것은 매우 흥미있다. 이것은 20세기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사실은 예배에 의식적인 요소를 도입해 왔다. ‘양자의 영’을 가진 사람은 예배나 기도하는 것이 형식적이고 기계적이거나 냉냉하지 않고 자발적이며 확신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논리와 이해의 문제가 아닌 본능이요, 말보다 더 깊은 것을 알고 있는 천성적인 확신이다.
위기와 난관과 역경가운데 처할 때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는 것과 같이 깊은 곳에서 바로 이 부르짖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도 ‘경건함과 두려움’에 있어서 감소를 함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양자된 자녀는 언제나 그의 하늘 아버지가 전능하신 하나님임을 안다. 냉냉한 신학자에게는 모순되어 보일 수 있으나 자녀에게는 모순이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느끼고 말할 수 있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들과 자기들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아는 사람들 뿐이다.
구원의 궁극적 목적은 지옥에 가지 않고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만 아니다. 우리가 ‘양자’의 특권을 누릴 수 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가 되게 하는 것이다. 최고의 선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로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이 최고의 선이다. 그것이 가능함을 아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하고 엄청난 단계이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으로 만족해하고 그것을 알고 어떤 괴로움들에서 벗어나 있기만 하면 된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것은 우리가 전에 숙고했던 어떤 것보다도 우리가 아들됨을 증거하는 가장 영광스럽고 높은 증거이다.
제 20 장 양자의 영을 받는 방식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긴급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다시 한번, 양자의 영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아님을 상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의 대부분은 나의 진술에 동조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 그들은 구원 자체와 구원의 확신 사이를 구별 짓는 것에 실패했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구원의 확신을 구원의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으로 가르치는 그 교훈이 전혀 타당하지 않음을 밝혀 드린다.
그 첫번째 이유는 웨스트미스터 신앙고백 제18장에서 구원받는 것과 자기가 구원받은 그 사실을 아는 것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그들은 사람이 구원받았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에 대한 부족이 있을 수 있으며, 그 확신은 구원의 절대적인 필수 요건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이유는 자기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확신하며 말할 수 있으면서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하는 ‘양자의 영’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한 단계들이다.
둘째, 양자의 영이 어떻게 주어지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주관적인 느낌으로 스스로를 설득시키는 문제도 아니고 성경에 의해서 이끌어내는 추론도 아니다. 성령에 의해서 부어지는 어떤 것이며 그리하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는 어떤 것이다.
복음적 교단에서 크게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그것을 믿음으로 받으라” 는 명목 하에서 가르치고 있는 대중적인 교훈에 기인하는 것이다. 믿음으로 우리에게 제공된 것을 붙잡으면, 그것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이 교훈만큼 15절에서 묘사되는 체험을 하지 못하도록 많은 사람에게 막는 것이 없다. 비극은 어떤 것이 우리로 하여금 체험을 얻도록 도와 준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은
“이 축복을 받는 방법은 행위로나 율법으로나 흥분으로나 시끄러운 의사 표시에 의한 것이 아니다.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만이다.(갈 3:2, 5, 14) 이 선물은 갈급해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또 중요한 사실은 이 은사를 주시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중심이다. 어떤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라는 진리를 벗어나서 그릇되게 가지 말아야 된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말씀하셨다. 마시는 것은 사람이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쉽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입을 벌리고 먹으면 되기 때문이다.“
마이어는 그의 책 -자기의 삶을 위한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는 하나님께서 주시기를 원하는 것을 취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나는 그저 취하기만 하면 되었다” 그 교훈은 받는 것이 우리의 취하는 행동의 차원에서 해석되고 있다. 그들은 갈라디아서 3:2, 5, 14과 같은 성경 구절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문제는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취하는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사실상 여러분이 이 위대한 충만함 속에서 성령을 취하면서도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순전한 믿음의 행사라는 것이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 3:2)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하려 함이니라”(갈 3:14)
갈라디아서에서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전체 지위가 믿음에서 나온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행위를 의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사도는 사실상 그 이상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는 다만 우리가 성령을 선물로 받는 것은 우리가 믿음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요 율법 아래 더 이상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뿐이다. 이런 가르침은 성령이 인격임을 상기시켜 주기는 하지만, 그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은 그를 마치 마실 수 있는 공기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령은 인격이며 그는 하나님이요, 복되신 삼위일체의 제3위되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성령께 굴복해야하고, 슬프게 해서도, 소멸하지도 않아야 한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처럼 단순하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그를 취하라는 암시가 전혀 없다.
‘받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 그들은 ‘받는 것’을 우리 편에서의 행동과 취함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헬라어 신약성경을 보면, ‘받다’라는 단어들이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능동적인 의미로도 번역되고 있다. 그 말들은 우리의 행동에 강조점을 두고 있으며, 우리가 취한다는 행위에 치중하고 있다.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니 이날에 제자의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행2:41) 능동적으로 그의 말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세례를 받았다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고전2:14) 매우 능동적인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 편에서 취하는 행동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여기 로마서 8:15에서 사용하는 그 말은 어떠한가?
‘주어진 것을 받는다’, ‘얻다’ 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보다 수동적인 의미를 가지게 된다. 주어진 것을 내가 ‘받는다’ 라는 의미이다.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행10“43) 신자들은 죄사함을 ‘취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전체 분위기와 문맥이 능동성과는 차이가 난다.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고전 3:14)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사랑과 선하심 속에서 그 상이 그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롬13:2) 분명히 그것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의미이다.
“우리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 양자의 영은 내가 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취할 수 있는 것인가? 내가 그것을 취하고 느낌을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그것을 가졌노라고 말하면 되는 것인가? 믿음으로 그것을 취하면 되는 것인가? 여러분은 이 문제에 관해서 ‘받다’는 말이 ‘취한다’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피할 수 없는 추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제 21 장 성령의 주권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롬 8:15 )
성령받는 문제를 다시 전체로 다루기를 원한다. ‘받다’로 번역된 말의 어원에 관해서 권위자들은 그 말이 능동적으로도 수동적으로도 사용되는 말이라고 한다. 그리고 수동적 의미로 쓰여질 때 그 말은 “주어진 것을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주어진 것을 얻고 획득하고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다.
로마서 8:15에는 두 의미 중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
렉시콘에서도 이 구절에 대한 언급이 없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문제들은 순전히 언어학적인 차원에서 결정돨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해결함에 있어서 다른 것들을 숙고할 수밖에는 없다. 이 로마서 8:15만으로도 분명히 그 문제를 해결한다.
8:15의 전반부에서 “너희는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첫째, 용법에서 그 말이 어떠한 능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어야 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취하거나 마신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아무도 자발적으로 그러한 영을 ‘취했던’ 사람이 없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나타내는 무엇이다. 15절 전반부에서 그 말이 분명히 수동적인 말이듯이 후반부에서도 역시 수동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전반부에서 능동적인 의미가 전적으로 불가능한 것같이 그 구절의 균형을 유지하고 병행을 유지하기 위해서 후반부에서도 그 말은 명백히 같은 말로 쓰여져야 한다.
둘째, 성령을 ‘받는것’에 관한 교훈을 살펴보게 될 때 예외없이 이 동일한 수동적인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누가복음 3:16에서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그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요” 그 능동성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우리가 사도행전 2장에 이르게 될 때 2장 전체를 꿰뚫고 흐르는 동일한 강조점을 발견하게 된다. 성령은 그들에게 보내졌고 그들은 충만을 입었다. 그들은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들 편에서의 어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행동의 암시가 전혀 없다. 사도행전 19:2에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특히 33절에서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시느니라” 성령은 주님에게 주어지셨으며 그래서 주님은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모든 말씀들을 통해서 결론은 첫번째로 언제나 ‘취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심’에 있음을 알게 되고 그것은 명백히 수동적인 것이다. 두 번째로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성령을 취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교훈이 전혀 없다. 언제나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은 수동적인 의미에서 받는다.
셋째, 안수가 존재하였다는 바로 그 사실 자체가 이 체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는 ‘취함’이 아니라 선물을 ‘주심’이라는 점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만일 그것이 취함의 문제라면 안수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받는다’는 이 문제는 우리가 소포를 받을 때에 말하는 방식과 비교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소포를 받을 때 “나는 당신의 소포를 받기로 결정했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선물을 보낸 사람에게 능동성이 주어져 있지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어째서 이것이 그처럼 중요하게 거론해야 하는가?
첫째, 반대하는 교훈은 하나님의 주권을 마땅한 바대로 감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즐거워할 때만 그런 식으로 성령을 취할 수 없다. 성령은 인격이시오, 주권적인 주님이시다. 고린도전서 12장은 은사 문제를 다루고 있다.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다.(11절) 그는 복되신 삼위일체 가운데 제삼위되시는 분이며, 우리는 결코 그를 마치 하나의 인격이 아닌 양 우리가 좋아할 때는 언제나 들이 마실 수 있는 공기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둘째, 다른 교훈이 일반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여러분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듯이 믿음으로 또 다른 축복을 취하라” 그러나 ‘칭의’는 사람이 원할 때는 언제나 취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칭의마저도 주어지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무엇이다. 믿음은 통로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롬10:9) 곧 너희 존재 전체를 드려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인격의 중심이다. 이 진리를 믿으면 그의 전체 삶은 그것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저 믿음만’이라는 말에 관해서 매우 주의해야 한다. 참된 믿음은 느낌을 수반해야 하며 이지뿐만 아니라 의지까지를 수반해야 한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셋째,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선물로 받은 사람들의 각 경우에서 언제나 강한 느낌을 수반하고 있으며 그들이 그것을 받았음을 의식하게 된다는 사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것을 그 사람이 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것을 안다. 오순절날 그들은 전혀 어떤 느낌이 없이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는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들과 그 사람들이 새 술에 취했다고 생각했다. 온 도시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 고넬료의 가정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어떤 다른 교훈은 “믿음으로 취하라. 느낌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말라. 당신은 전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이 말씀의 교훈을 믿으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어떤 느낌과는 관계없이 성령을 받을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 전체가 가르치는 바는 그 정반대이다.
그 이후에 오는 기독교 역사 곧 부흥시대에서나 개인적인 경우에서 보편적으로 그러하였다. 훳필드도 그러하였고 요한 웨슬러에게 일어났을 때에도 그는 “자신의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진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다른 사람들도 곧 그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성령 세례의 차원에서 ‘받았다’는 말에 대한 논증해 보았고 그러나 그 모든 것은 15절에서 사용되는 바의 확신과 양자의 영을 받는 것에 대해서도 해당되는 진리이다.
제 23 장 성령의 인격성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 )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임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의 마지막 단계를 밝히고 있다. 이것은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곳에서나 발견되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에 관한 진술 중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진술 가운데 하나이다. 이 구절만큼 개신교와 로마 카돌릭의 교리를 가장 분명하게 구별시켜주는 다른 구절은 없다. 로마 카돌릭의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이 결코 자기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보기도를 필요를 하는 연옥이라는 것을 통과해야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교회와 사제들의 손에 자신을 일임해야한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바르트의 교훈에는 확신이나 확실성이 전혀 없다.
이 세상에서 구원에 대한 확실성과 확실한 지식을 부정하는 교훈은 자동적으로 전통적인 개혁주의적 복음에 들어맞지 않는다. 복음적 대각성기에 있어서 위대한 강조점은 ‘구원의 확신’에 주어지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서 자기들의 구원을 추론해 내었으나 갑자기 부흥이 찾아와서 그들 삶 전체를 변화시키는 성령의 내적 확신을 갖게 된다. 성령의 인격성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령이 하나의 감화력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성경의 모든 곳에서 성령을 하나의 인격으로 말하고 있고 복되신 삼위일체의 제삼위 되시는 분으로 말하고 있다.
‘증거하시나니’ - ‘한 쌍의 증인의 증거’라는 의미로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성령의 인격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격으로서의 우리와 함께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곧 그 증거는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 우리 영의 증거이다. 우리는 그러한 자식으로서의 영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것을 증거한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더불어 행하시고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자녀들’ - 14-15절에서 ‘아들들’ 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16절에서는 ‘자녀들’ 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아들은 다소 법정적인 용어이다. 반면에 ‘자녀들’이라는 말은 우리가 즐기는 자식 관계의 내적 실재성을 표현한다. 우리가 ‘자녀’ 라는 느낌의 입장에서 살펴볼 때가 있고 또한 ‘아들들’ 이라는 법적 위치에서 우리의 관계를 살펴볼 때가 있다. 그러나 그 두 말 사이에 본질적인 차이가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최근에 인기 있는 교훈은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라고 한다. 싸워 승리하는 믿음의 행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 교훈은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아들들뿐이라고 한다. 또한 그들만이 하늘에서 그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한다. 분명히 사도는 14-16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다. 17절에서 실제로 “자녀이면 또한 후사니” 라고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서 3:26절에서 동일한 개념이 발견된다. “너희가 다 믿음으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나니” - 여기서 주의해야 한다. 잘못된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이 구절의 가장 진수가 되는 영광을 놓치고 말 것이다.
제임스 데니(스코틀랜드 신학자)는 우리는 하나님의 영으로 고무되고 촉진되어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된다. 우리 자신의 영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그것이 말하는 소리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고무되고 촉진되는 것이다“ 그는 실제적으로 우리가 우리 영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나 거기에 첨가해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은 성령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데니에 따르면 16절은 단순히 15절에 대한 설명이다. 저는 그러한 해석이 필연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사도는 단순히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되는 방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실제적으로 우리가 우리 영으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으나 첨가해서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 하신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 영에 덧붙여서 소위 성령의 증거가 있다는 것이다.
헨리 몰 감독(복음주의 주석가)은 거의 같은 것을 말한다. 그는 16절은 14절에 대한 단순한 반복으로 진술한다. 사도의 진술은 그것이 아니다. 16절은 단순히 성령의 조명이나 회심시키는 사역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또한 중생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를 나타내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더 나아간 무엇이요, 선행하는 것에 대한 부가적인 무엇이다.
이 모든 해석들이 어떠한 새로운 것을 전혀 나타내주지 못하고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에 대하여 증거 하신다는 중대한 요점을 밝혀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해서 그 해석들은 단순히 우리로 하여금 믿어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게 하실 수 있는 분이 성령이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도의 진술은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로버트 할데인의 진술은 이 위대한 진술을 이해하는 입구로 우리를 인도한다. 할데인은 성령께서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 하신다는 이 진술은 단순히 이 간증을 말하는 신자들의 삶에 있어서의 성령의 열매들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히려 성령께서 자녀 되었다는 확신을 나눠줌으로써 마음속에서 그것을 고취 시킨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새로워진 상태에 대한 참된 특징들을 의식하고 또한 우리 자신들 속에서 그것을 발견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자녀된 것을 우리로 확신 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성령의 증거에 의해서 알려진 모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에서 확증하고 있는 것에 미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서는 성령은 양심으로 하여금 증거 하도록 도와줄 뿐이요 성령 자신이 증거자가 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로버트 할데인은 성령의 인침은 언제나 믿음과 중생과 신앙 다음에 오는 것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신자의 믿음을 인치는 것은 성령의 부차적인 역사이다. 그래서 할데인은 로마서 8:16에서 ‘성령의 인침’에 대한 교리를 다른 방식으로 진술하고 있다는 데 주장을 확증한다.
우리는 여기까지 길을 준비하고 이 영광스러운 진술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
제 24 장 성령의 세례 혹은 인침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 )
본문을 두 가지 중요한 노선에 비추어 강해를 해나가야 한다.
첫째,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해야 한다. 건전하고 중요한 성경 해석 원리로 어떤 진술의 의미에 대해서 명확하지 못하면 병행적인 진술을 찾아보아야 한다.
“...곧 큰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께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거기서 성령이 오실 것에 대한 예언을 발견하고 또한 신자들에게 하시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예언을 보게 된다.
또 로마서 5:5에서 ‘넘치도록 부어주심’을 강조하였다. 그것은 우리에 대하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식하는 것이 너무나 흘러넘치게 된 사람에 대한 묘사이다. 오순절날 에 일어났던 일에 대한 기사 속에서, 사도행전 4장 23-33절,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외 그 가정의 이야기, 사도행전 19장 바울이 안수했던 에배소에 있는 제자의 경우이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여기 로마서 8:16에서 다루고 있는 것에 대한 실례들이다.
요한계시록 2:17, 2:28에서도 같은 개념이 발견된다. 이 말씀이 사도 바울이 여기 16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을 다르게 말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님을 순종하며 기쁘게 했던 사람들이 ‘감추인 만나’, ‘흰돌’, ‘새벽별’이라는 말로 표현된 주님이 기뻐하시는 표징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
신약성경을 선입관 없이 읽을 때 누구든지 일반적으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대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다른 두드러진 방식으로 그들을 뛰어나게 하는 어떤 통찰력과 이해력이 있었음을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벧전 1:8)
둘째, 기독교회의 다음 역사로 이 본문을 비추어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은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의심이 간다면 여러분 자신이 체험한 바 있을 수 있는 일로 그것을 국한시키고 격하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성도들의 전기나 하나님의 교회를 섬겼던 어떤 비상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그들이 말하는 바를 들어보라는 것이다. 그들은 믿었고 상당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나 부흥이 일어났을 때 그들에게 일어난 일이 너무나 놀라워서 그들이 “전에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전에는 결코 가지지 못했던 절대적 확실성과 확신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성령의 특별한 사역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성경 진술 외에도 우리는 성도들의 생애에 있어서 이 특별한 확증과 부흥시대의 교회사에 나타난 이 특징적인 확증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떠한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인가?
첫째, 이것이 분명히 성령 자신에 의해서 행해지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도는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친히 증거하시나니”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14절에서 성령의 역사는 ‘증거’임을 알았고 또한 15절에서 결정적으로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들어오실 때 우리는 우리 영 안에서 양자의 영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 16절에서 바울은 성령 자신이 친히 직접적으로 행하시는 일을 다루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영과 함께 증거하시는 성령 자신의 증거요, 증언이다. 저는 이것이 ‘성령세례’의 일부라고 주장한다. 15절을 다룰 때 ‘양자의 영’이 성령세례의 일부라고 말했었다. 그것은 사실상 성령세례의 제1차적인 부분에 불과하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가지지 않고서는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양자의 영을 가지고도 이 더 나아간 부가적인 체험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세례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이고 진수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 대한 이 특별한 확신 형태를 가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인침’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신약성경에는 ‘인침’이라는 말이 세 번 언급된다.(고후1:22, 엡1:13, 4:30) 이러한 진술들은 이 16절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성령의 인침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후사라는 확신을 주는 것이며, 성령의 보증은 내 기업에 대한 일차적인 계약금으로 나머지를 지불하겠다는 보증금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이지와 마음과 영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여 우리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한다. 이 특별한 성령 자신의 행동을 성화와 관련하여 혼돈해서는 안된다. 이것은 우리의 성화를 돕고 촉진시키지만 성화 자체는 아니다.
성령 자신의 증거는 ‘양자의 영’과 다를 뿐 아니라 그것을 초월한 부가적인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인 것이고 은밀한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서 받은 자밖에는 아무도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요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감추어진 만나’며 ‘흰돌’이고 ‘새벽별’이다. 더 나아가서 이것은 가능한 가장 고차원적인 확신의 형태이다. 명백하게 명시된 성경의 진술들을 통한 추론으로 구원의 확신을 갖는 것은 옳은 일이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의 체험에 적용시키는 성경 진술로부터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연역해내고 있다. 두 번째 단계이다. 세 번째 단계는 15절에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것을 발견한다. 더 높은 단계로 전적으로 성령 자신의 행동으로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들어 올려서 그에게 입을 맞추는 행동(토마스 구드윈)이 16절을 설명한다. 그것은 모든 일에 있어서 그를 기쁘시게 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어느 것에서든지 그에게 범죄하지 않으려는 크고 위대한 사모하는 열정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오순절 이후에 사도들에게 나타났던 하나님에 대한 증인이 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 차게 한다. 또한 그렇게 할 권능과 능력을 수반하게 한다. 이 체험은 여러 은사를 동반할 수도 있다.
이러한 체험은 성령의 절대적인 주권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성령께서는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을 다루신다. 그래서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하며 어떤 방식으로 조정될 수 없으며 마음대로 받을 수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축복이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일반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그것이 들리는 소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영의 귀에 들리는 소리만큼 분명하다. 그것은 때때로 성경을 고요히 읽을 때 오기도 하고 설교하는 때에도 일어날 수 있다. 확신이 언제나 성경을 통해서 오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씀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문제가 되는 것은 ‘내적 조명’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분명 비성경적이다. 정상적으로 이러한 간증은 말씀을 통해서 주어진다. 그러나 말씀 없이도 주어질 수 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계획된 일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한 일이다.
제 25 장 사도행전에 있는 믿음과 체험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 하시나니” (롬 8:16 )
가능한 최고의 확신 형태인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 하시는 이 성령의 증거는 그것이 언제 주어지는 것인가?
이것을 성령의 평범한 사역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중생할 때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들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으며 또한 성령에 의해서 인침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너무나 큰 억지를 부리고 있다.
첫째, 전적으로 로마서 8:16에서 대하는 진술에 대한 합당한 설명이 될 수 없다. 이 ‘아바 아버지’라는 부르짖음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우리 주님의 기도에 사용된 어휘이다. 그 말은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울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이 아니다.
둘째, 이 해석은 분명히 사도행전 2장에 나타나는 말씀에 대해서 무리를 가하는 것이다. 그들은 성령세례가 ‘체험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는데 오순절날 사도들에게 일어났던 일, 고넬료 가정에서 일어난 일이 체험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해야 된다. 그것은 지나칠까봐 두려워하는 데서 나오는 결과이다. 저는 그렇게 함으로써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도들은 오순절날이 이르기까지 중생치 않았다고 말해야 한다. 분명히 그들은 신자들이었고 오순절에 이르기 전에 이미 중생하였다. 그들은 사도행전 1:8에 기록된 약속의 성취로 ‘성령의 세례’를 받은 것은 비로소 오순절날에 이르러서였다.
셋째, 그러한 주장은 빌립이 이미 전도한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로 내려갔다는 사도행전 8장에 대해서 공정치 못하다는 것이다. 빌립의 전도로 그들은 믿었고 세례도 베풀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고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고 안수한 이후에야 성령을 받게 되었다.
넷째, 에베소서 1:13-14의 진술을 숙고해 보라. 찰스 핫지가 지적하였듯이 요점은 “너희가 믿었고 그 다음에 너희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분명히 믿는 것과 인침을 받은 것이 별개임을 지시하고 있다. 흔히 사도행전 11:17의 말씀을 들어서 반대 의견을 제시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에 주셨던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구절이 말하는 바는 다만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다음에 이 선물을 받았고 역시 고넬료와 그의 가정도 이 선물을 받았다는 것이다.
우리가 성도들의 생애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크게 쓰임을 받았던 사람들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보면 성령의 세례는 사람이 믿게 되거나 또는 중생하는 순간에 필연적으로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300년전 청교도였던 존 플레블 - 인간 영혼에 관한 소고-에서 그는 그 체험의 결과로 “전에 읽었던 모든 책들이나 하늘에 대해서 들었던 수많은 강론에 의해서보다도 그 체험에 의해서 하늘의 빛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
18세기 영국의 호웰 해리스 - 1735년 부활주일에는 로마서 8:15 전반부의 체험을 했고(두려워하는 종의 영), 또 1735년 강림주일에는 로마서 8:15 후반부의 체험을 했고(양자의 영), 그 다음 3주 후에 로마서 8:16의 “그의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체험하게 되었다.
드와이트 무디 - 예배에 참석했던 두 부인들이 예배가 끝나고 나서 그의 사역에는 무엇인가 부족한 것이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무디를 위해서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약 6개월 뒤의 어느날 오후 뉴욕시의 월 스트리트를 걷고 있을 때 성령께서 강하게 임하였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그의 영에게 증거하였다. 그는 사랑과 능력으로 가득 채워졌다. 그 사건은 그로 하여금 전 세계적인 복음전도자가 되게 하였다.
휫필드, 웨슬리, 조나단 에드워즈, 에드워드 페이슨, 찰스 피니의 생애에도 정확히 같은 체험이 발견된다.
그 모든 실례들 가운데 언제나 함축되어 있는 요점은 우리가 이미 성경들 속에서 발견했던 바 로마서 8:15과 16절 사이에는 이러한 간격이 있다는 것이다. 신자가 아니고서는 ‘우리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가질 수 없다. 믿는 것이 성령의 증거보다 앞서야 되는 것이다.
청교도들 중에 이 관점을 주장하는 이가 없다는 것은 종종 교리처럼 말해지고 있다. 그래서 증거를 살펴보게 한다.
존 프리스턴 - 제임스 1세와 찰스 1세의 황실 목사였으며 지성적인 심오한 사상가였다. -새 언약 또는 성도의 분깃-에서 “예배소서 1장에 보면 하난주에 특별하게 묘사되어 있는 하나님의 성령의 증거가 있다. 믿은 후에 주님은 혼자서 굴레를 씻도록 잠시 내버려둔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지난 후 사람이 하나님은 진리라는 것에 인을 치게 될 때 주님은 다시 약속의 성령으로 그를 인친다.”
존 오웬 - 성부. 성자. 성령과의 교제에 관하여 -에서 “로마서 8:16, 영혼은 자신의 양심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서게 된다. 그는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권속에 속해있는 탄원을 제기한다. 잠시 동안 사단은 있는 힘을 다해서 반대하고 죄와 율법이 그에게 맞선다. 영혼은 문제에 대해서 빠지고 탄원과 송사가 오가는 가운데 보혜사가 오셔서 약속의 말씀으로 그의 탄원이 선하며 그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도록 마음에 힘을 넘치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 영으로 더불어 그가 증거하신다’고 성령에 대해서 말할 수 있다.
토마스 브룩스 - 그리스도의 말할 수 없는 부요-에서 “그리스도인들이여, 평안에 이르는 첩경은 평안은 적게 생각하고 의무를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다. 에배소서 1:13에서 보는 바와 같다. 믿음이 그리스도와 그 안에 있는 다양성과 탁월함들에 대하여 바쁘게 역사되고 있는 동안에 주님은 오셔서 성령으로 그들의 생명과 사랑과 영광을 인친다.
찰스 시므온 - 캠브리지 대학에서 설교하고 가르쳤다. “에배소서 1:13, 우리가 이 세상에서 받는 것 중에 더 바랄 것 없이 가장 큰 것은 성령의 인침이다. 이 확신과 성화의 높은 상태는 믿고 나서 하나님과 계속 가까이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스펄전 - “요한복음 7:37-39, 16:7,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인 분들이여, 특별히 이 약속은 여러분에게 행해졌다. 왜냐하면 홍수 같은 은혜가 필요한 교회들이 수없이 많기 때문이다. 그 교회들은 습기가 거의 말라버린 마루장 같다. 오! 그들은 얼마나 홍수 같은 은혜가 필요합니까? 우리 모든 교회에서 샘물이 터져 흘러나오기를 바란다. 여러분 속에서 생명수 강수가 흘러나올 것을 바란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하여 이 일이 이루시길 바란다”
제 26 장 성령의 증거의 본질과 효능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나 청교도들은 구원과 확신을 가지는 것과는 차이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확립시켜 놓았다. 자기가 전적인 죄인임을 깨달으면 또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자랑하여 내세울 수 없는 것을 안다면, 우리를 위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순종하심으로 이루신 역사와 십자가에 달려 순종으로 징벌을 당하신 역사만을 의지한다면, 비록 구원의 확신이 없더라도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한다.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일은 분명히 중생을 가리키지 않는다. 이 일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신자로서 이미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자녀요,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신다. 성령께서 이러한 ‘인침’이라는 특이하고 특수한 방법으로 임하는 것은 주님 자신의 경우에서와 같이 그것에 대하여 부가적인 것이다. 그것의 주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지위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주님으로 말미암아 임한 은혜의 나라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능력을 갖게 하는 데 있다.
우리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본질은 무엇인가?
첫째, 분명히 체험적인 것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둘째, 반드시 큰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체험이다. 사도행전 2장에서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환경을 초월하게 하고 담대함을 가지게 하였다.(벧전1:8)
셋째, 성령의 증거는 은사나 현상을 동반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현상들이 이 체험의 본질적인 부분들이 아니다.
넷째, 매우 중요한 요점은 이 체험의 정도이다. 이 특별한 체험의 깊이를 부지불식간에 평준화시키려는 경향에 빠지기 쉽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깊이나 정도가 다를 수 있지만 그 체험 자체는 언제나 분명한 것이라는 점이다. 중요한 사실은 여러분이 살아있으며 생명을 가졌다는 증거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다섯째, 이 체험의 영속성의 문제로 그것을 한 번 받으면 언제나 그것을 지니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이 체험은 왔다가 가버리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한 번 받으면 그것에 대한 기억이 살아있는 동안 늘 떠나지 않아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가장 큰 기쁨으로 회상한다. 이 체험은 반복될 수도 있고 여러번 되풀이될 수도 있다.
이것이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니라”(행전2:39) 신약의 서신들은 그것이 그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반적인 체험이었다고 단정하는 것 같다.(벧전1:8)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고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서 먼저 그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하며 그 체험은 그 믿음을 확신케 한다.
토마스 홀톤 - “성령께서 먼저 쓰십니다.(고후3:3) 그는 우리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고, 우리 속에서 거룩케 하시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것이 쓰는 일입니다. 그 다음에 이미 쓴 것에다 도장을 찍습니다. 새로워진 영이 있기 전에는 확신의 영도 없습니다”
토마스 브룩스 - “위안에 이르는 첩경은 위안은 조금 생각하고 의무는 더 많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받을 것보다 여러분이 해야 할 것에다 많은 신경을 쓰십시오”
체험들에만 마음을 고정시키는 이들은 참된 체험을 받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팔복의 말씀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니라”고 하셨다. 만일 언제나 위안과 체험들과 어떤 느낌들만을 찾고 의에는 관심이 없다면 성령을 전혀 받지 못한다 하여도 놀라지 말라.(요14:21) 계명을 지키고 순종하는 자에게 오신다. 그래서 찰스 시므온은 이 체험이야말로 전생을 드려서 거룩하게 되려고 하고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였던 자들에게 오는 가장 높고 더 바랄 것이 없는 체험이라고 말한다.
어떤 조건들이 있는가?
이 체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를 부정하는 어떤 특별한 행위를 한 사람에게 일어나기 쉽다는 것이 문헌에서 보아 매우 분명히 나타난다. 그것은 흔히 시험 받아 어떤 격렬한 갈등을 통과하여 죄를 극복하고 승리할 때 얻는 것이었다. 그것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가지고 신음하고 탄식하는 이들에게 거의 예외 없이 일어난다.
또한 그 체험이 어떤 큰 시련에 직면하려는 이들에게 자주 주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휫필드는 그의 일기에서 그가 성령이 오셔서 이런 증거를 하실 때마다 어떤 심상치 않은 시련과 어려움이 찾아온다는 징조라고 느끼게 되었다.
이 일은 개인들에게뿐만 아니라 집합적으로 일어났다. 여러분은 여러 나라들이 전쟁과 큰 재난이 닥쳐오기 바로 전에 종교적 부흥을 만난다는 것을 자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콩고에서, 한국 땅에서 전쟁이 있기 바로 직전인 2차 대전 말기에도 그런 일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과 부성애적인 자비로써 그의 백성들이 시련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이런 특별한 확신을 주셨던 것이다.
그 체험이 죽기 바로 직전에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흔히 발견할 것이다. 휫필드의 일기에서 발견되는 휴 브라이언 부인의 경우이다. 그녀의 남편인 브라이언 씨는 그의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것이 너의 성화와 지식에 필요한 것 같아 편지로써 보낸다. 운명하였을 때 그녀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확신과 그의 공로와 중보로 영원히 구원받을 소망으로 충만하였었다. 내가 우리 주 예수께 기도하고 있을 때 네 숙모는 ”주님이 보이네요! 난 주님이 보여요! 지금 빛도 보이구요! 예수여. 오소서!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내가 가기 전에 여러분에게 말하게 하셨어요. 하나님은 자비로우실 뿐 아니라 의로운 하나님이세요. 여러분의 마음들을 부지런히 찾으세요. 아무게씨가 잘못을 행하고 있다고 말해줘요. 내 고통이 크지만 그리스도께서 내게 계시니 족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믿기지 않을 큰 일들을 보게 하셨어요. 휫필드를 따르세요. 하나님께서 그가 어디 가시든지 그를 축복하실 것입니다. 그에 대해 경솔하게 말하지 마세요. 그를 축복하고 축복하세요. 하나님이 당신들과 같이 계시기를 바랍니다. 안녕! 잘들 있어요.”
휫필드는 첨가하기를 “그렇게 멀리 브라이언 씨는 떠나갔다. 나는 다만 참 신자에게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무엇이냐? 오. 무덤아! 네 이김이 무엇이냐? 라고 덧붙일 뿐입니다. 자기들의 삶을 미친 것으로 여기는 자들은 얼마나 어리석은가?”라고 하였다.
제 27 장 또 다른 간증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
거짓된 체험들과 여기서 말하는 참된 체험을 어떻게 구별하는가에 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요일 4:1)
많은 사람들이 이 16절의 강해에서 말한 것이 생소하고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기독교회의 상태(특히 복음적인 교회)를 가져온 원인은 이 교훈을 무시했기 때문이며, ‘믿음으로 그것을 취하라’는 거짓된 교훈의 영향 때문이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중생할 때 성령의 세례를 받으며 그것은 비 체험적이라고 말하는 교훈도 마찬가지이다.
이 교훈에 대한 간증들(연대적으로)
17세기 로버트 브루스 - 로버트 브루스의 생애 - 존 녹스의 후계자
“그리스도의 부요한 보화들이 내게 열려졌네. 그의 성령이 참된 기쁨과 영적이고 고상한 빛으로뿐만 아니라 내 속에서 공공연하게 음성으로 내게 증거하셨네. 에딘버러가 나를 어떻게 쫒아내었든지 간에 에딘버러가 생각되지 않았고, 하늘문이 내게 열려졌네. 나는 엄위하신 그분이 어쩌면 그렇게 작은 일을 그렇게 크게 보시고 그렇게 작은 섬김을 그렇게 많이 보시는가 하는 데 감탄하였다네”
토마스 홀튼 - 로마서 8:16 설교에서
“그 증거가 실상으로 충만하게 나타나고 그것이 영혼에 머물러 있는 한 모든 유혹은 침묵하게 되며, 아무리 어떠한 의심과 회의가 있더라도 그 모든 것을 제거하며 마음을 완벽한 안식상태에 고정시켜 준다. 그것은 은밀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확실하고 틀림없는 것이다”
월리암 구드리 -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관심 -
“그것은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신적인 확신이요,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은 너무나 충만한 확신에 이르기 때문에 믿음은 전적으로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간다.”
리차드 십스 - 인봉된 샘 - 매우 지성적이며 ‘하늘나라 십스 박사’라는 칭호를 받음
“범죄에 대한 가책이 흔히 보혈의 증거를 넘어설 때가 있다. 그래서 성령의 즉각적인 증거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말씀(시35:3, 마9:2)이 증거가 되어 울리고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으로 마음이 격동되고 위안을 받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영과 양심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가 되어 은혜 안에 있는 우리의 지위 곧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력하게 증거한다”
토마스 구드윈 - 에배소서 1:13 강해에서
“인간의 영혼에 와서 부어지며, 그로 하여금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며, 그는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영원토록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케 하는 빛이 있다. 그것은 평범한 신앙이라는 빛을 초월하는 빛이다.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다. 여러분이 저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그보다 더한 것을 가질 수는 없다. 그것은 영혼에게 밝혀진 하나님의 선택적인 사랑이다”
18세기 조지 휫필드 - 그의 일기에서 -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얼마 되지 않아서 나는 그처럼 나를 짓누르고 있었던 짐을 벗어 버렸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탄식의 영이 나로부터 제거되고 나는 나의 구주이신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진정으로 무엇인지를 알았다. 어떤 때는 내가 어디 있든지 시와 찬미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의 기쁨은 점점 더 정착하게 되었고 그 기쁨은 내 영혼 속에서 거하면서 점점 더 증가하였다. 오! 모든 자들이 나와 같은 기쁨에 참여할 수 있었을 것을!”
조나단 에드워즈 - 간증에서
“경건한 묵상과 기도를 하면서 걸어갔다. 모든 생각과 상념을 삼키기에 충분히 위대한 탁월함을 가진 분으로 나타났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눈물이 범벅이 되어 큰소리로 울었다. 나는 영혼의 열심히 없어져 버리고 소멸된 것같이 느꼈다.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 있었고 거룩하고 순결한 사랑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을 느꼈다. 또한 내 영혼이 완전히 성화되고 신적이고 천상적인 순결로 깨끗해진 것같이 느꼈다”
조나단 에드워즈 부인 - 간증에서 -설교자나 뛰어난 인물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것이 얼마나 확실하게 나타났는지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나의 안전과 행복과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의 영원한 기쁨은 하나님 자신처럼 불변하고 영구한 것처럼 보였다.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나 가깝고 현실적으로 느껴진 나머지 나는 다른 아무것도 의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내 영혼은 하늘의 낙원에 머물러 있었다”
감리교도인 존 웨슬리 - 이 체험에 관련하여 쓴 글에서-
“이것이 직관적이고 직접적인 무엇이 아닌가? 미리 기쁨과 평화와 사랑에 대하여 맛보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기만적인 속임수가 아니고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오는 것이다”
침례교 설교가 그리스마스 에반즈 - 산데마니안 주의자 - 메마르고 냉냉한 영혼의 상태
“마음의 굳은 것이 녹고 이것은 내 영혼 속에 성령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불러일으켰다. 내 영혼에 그의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신 은혜를 감격하여 울었다”
19세기 무디 - “갈증으로 성령으로 충만케 해달라고 기도하며 울부짖었다. 나는 그것을 묘사해 넬 수 없다. 나는 그의 사랑의 체험을 어찌나 강하게 느꼈던지 하나님의 손을 그만 멈추어 달라고 간구해야 했다”
스펄전 - “그것은 우리가 선택받은 사실에 대한 틀림없는 확신과 같은 그러한 것이 이 세상에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그것을 얻게 되면 그 머리에 기름을 부을 것이고 흰옷을 입히고 그의 입에 천사의 노래를 둘 것이다. 바로 이날 그러한 사람들이 여기저기 있다”
저는 히브리서 기자처럼 “다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니...”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저는 여러 세기들, 여러 곳, 매우 다른 유형과 기질의 사람들 등 다양한 경우들 중에서 몇 가지만을 인용하였을 따름이다. 어떤 이들은 비상한 재능과 학식을 가진 자들이었고 자기들의 느낌에 대하여 엄격한 통제를 해오던 사람들이며 흥분과 피상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다른 이들은 보다 평범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자기들의 영과 더불어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실 때 그들에게 있었던 일에 대하여 간증하는 것을 보면 한결같이 일치하고 있다.
제 28 장 참된 선행과 거짓된 선행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롬 8:16 )
우리가 숙고해야할 다음 문제는 이 체험과 거짓된 체험사이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느냐하는 것이다. 신약은 우리로 하여금 영들을 “시험하고 검증하고 따져보라”고 권면하고 있다. 거짓된 영들은 초대교회들로부터 횡행했고, 종교개혁시대에도 볼 수 있었고, 17세기 청교도 부흥시대에 더욱더 현저히 나타났다. 그 후에 18세기의 복음적인 부흥운동은 체험과 구원의 확신에 큰 강조점을 두었고 19세기 미국에서는 ‘별난’ 신앙운동들이 일어났다.
성령의 증거를 사모하고 추구하기 시작하는 순간 마귀는 온 힘을 다해서 이 거짓된 체험을 그 사람에게 제시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가장 안전한 것은 체험에 관심을 두지 말고 그저 말씀만 붙들고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라고 어떤 사람은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 ‘성령을 소멸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기독교 신앙의 가장 영광스러운 국면들 가운데 하나를 놓치고 마는 것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기독교회가 부흥되는 것을 막는데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복음의 중차대한 역사를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첫째, 청교도들은 가르치기를 참된 체험과 거짓된 체험 사이를 소위 체험의 ‘선행사들’을 조사해 봄으로써 부분적으로 검증할 수 있다고 했다. 참된 선행사들은 죄의식이요, 실패의식이다. 만일 기진해지고 영적인 궁핍을 느꼈다면, 확신과 능력과 권능을 갈망하였다면 그것은 참된 체험이라는 일차적인 증거가 된다. 많은 기도가 선행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했다. 그들은 이 체험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대해서 일종의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것으로 임한다는 것을 알았다.
둘째, 거짓된 체험들을 경험한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동떨어져서 임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성경이 필요 없으며 성령께서 그들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내적인 빛’을 가지고 있다고 떠벌였다. 또 다른 특징은 환상이나 환각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며 언제나 현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언제나 과장하고 자랑하려고 한다.
참된 체험에 있어서는 거의 예외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또는 말씀을 통해서 온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서든지 그 체험은 언제나 성경의 가르침을 확증한다.
셋째, 또 하나의 중추적인 요점은 참된 체험의 표지는 외경스러운 느낌이요, 그것을 동반하는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느낌이다. 성령께서 큰 권능으로 임하실 때 그는 우리에게 영광과 위대함과 엄위와 거룩함을 인상깊게 나타내 주신다.(계1:17)
넷째, 필연적으로 오는 또 다른 요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된다는 점이다. 이것은 가장 철저한 시금석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임하셨다. 성령께서 더욱 강한 능력으로 임하면 임할수록 주 예수를 아는 지식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욕망이 높아지며 그를 더욱더 영화롭게 하고 싶어진다는 것이다. 부흥이란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이런 체험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때에 언제나 두드러진 사실은 성령을 많이 노래하기 보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한다는 점이다. 18세기 복음 부흥운동의 결과로 나온 찬송들의 위대한 특징이 바로 그 점이다. 찰스 웨슬리의 찬송들, 월리암 쿠퍼나 존 뉴턴의 찬송시들, 웨일즈에서의 부흥운동도 그러했다.
다섯째, 또 다른 시금석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위대한 느낌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여섯째,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과 나를 위해서 준비된 기업이 어떤 것인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증거하시나니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8:16-17) 여러분은 우리가 말해왔던 어떤 사람들과 같이 절망적인 자리에 빠질 수가 있다. 모든 것이 여러분을 반대하고 나설 수도 있다. 또한 여러분의 재산과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핍박을 받으며 죽어갈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바울처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라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은 환경과 조건의 굴레에서 독립하게 되며 여러분은 약속된 영광에 가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어느 의미에서 다른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일곱째, 거짓된 체험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 결과가 일반적으로 교만으로 나타난다. 거룩을 위해서 애쓰는 것 없이 이러한 체험을 가지게 될 때 그들은 ‘그것을 가졌고’ 그들에게 일어났으며 그들은 완벽하다. 그래서 겸손이란 없으며 온유한도 없고 체험 받을 때나 받은 후에도 언제나 완고하다. 다만 육신적인 자기만족과 기쁨으로 이러한 자기들에게 일어난 놀라운 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벌리기를 좋아한다.
참된 체험의 결과들은 그것이 너무 거룩한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은 다 같이 말로 묘사되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데 의견을 같이 한다. 그것은 ‘감추어진 만나’요, ‘흰돌’이다. 참된 체험은 은밀한 교통이다.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체험을 가진 사람은 그것을 떠벌리지 않는다.
여덟째, 참된 체험은 하나님께 대한 위대한 사랑과 그를 기쁘시게 하려고 열망하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으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를 사랑한다. 그것은 깊은 죄의식에로 인도하고 죄에 대한 커다란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삶에 있어서 더욱더 삼가 조심하고 진심으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고 싶어한다.
참된 체험은 기도에 있어서 전에는 전혀 알지 못하던 자유로움을 가져온다. 부흥의 시기에는 기도의 사람을 모으는 것이 어렵지 않다. 만일 그가 설교자라면 그는 전에 없었던 능력이 자기 설교 속에 있음을 알게 되고, 성령의 능력에 의해 자기가 사용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사람을 두려워하거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아홉째, 이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예민한 시금석 중의 하나는 이러한 참된 체험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더욱더 알고 싶어 하는 최상의 바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빌3:10-11) 이 체험에 대해서 알게 되면 그는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한다.
제 29 장 성령의 증거와 성화의 관계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이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롬 8:16 )
영적인 세계에 있어서 더 높이 올라갈수록, 어떤 교리가 특별히 중요하다면 원수의 공격은 비상하게 강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사활적으로 중요한 하나의 법칙이다. 특별히 그것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라는 이 문제에 해당되는 진리이다.
이 체험과 성화 사이의 차이에 대해서 일어나는 현대적인 혼란은 존 웨슬리에 의해서 가장 큰 영향을 입어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가능한 것이며 그것을 받고 난 뒤에 그는 죄로부터 완전히 깨끗함을 입는다는 것이다. 제시하는 성경적 증거는 사도행전 15:9과 26:17-18이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 하셨느니라” (행 15:9 )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행 26:17-18 )
이상한 구절이나 진술을 만나게 될 때 맨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것을 문맥과 상황 속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두 경우에서 문맥을 살펴볼 때 성화의 교리가 두 경우 어느 곳에서도 제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회에서의 초점은 교회와 관련하여 이방인들의 지위와 조건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였다. 그들은 베드로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들에게 세례를 줌으로써 잘못을 범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이 기독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더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더 이상 할례에 속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방식에 의해서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요점은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유대인이나 이방인의 차원에서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6장에서도 주님께서 다메섹으로 가는 바울에게 부여하신 사명에 있어서도 정확히 같은 요점이 성립되게 되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벧전 2:9-10)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된 이방사람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그 진술이 이제 그들에게 해당된다고 말한다. 두 구절의 “깨끗해졌다”는 말이나 “믿음으로 거룩함을 입었다”는 용어의 의미가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두 진술은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믿음으로 거룩한 족속의 일부가 되는 것이며, 믿음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되는 것임을 말하는 데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또한 이방인들은 이제까지 그들을 얽매고 있었던 것에서 믿음으로 깨끗함을 입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증거는 고린도 전서 6:9-11에서 ‘거룩함’이 ‘의롭다함’ 앞에 놓여있음을 주목하라. -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 - 사도가 ‘칭의’가 ‘성화’ 앞에 와야만 된다는 것을 잡자기 망각하였는가? 사도가 의도적으로 한 일이다. ‘거룩함’은 단순히 ‘불신앙의 악심’ 으로부터 분리해 내는 것과 건지는 것을 의미한다. 데살로니가후서 2:13절의 경우도 “성령의 거룩케하심”을 “진리를 믿음으로” 라는 말보다 앞에 놓고 있다. 그것을 정확히 해석하는 유일한 방식은 보편적인 신약적인 의미에서의 성화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내산이 구별되고 ‘거룩한 성산’으로 불리게 된 것과 같이 이들도 성령에 의해서 구별되었으며 진리를 믿는 믿음이 따라온 것이다.
두 구절(행 15:9, 26:18)을 해석하여 자기들은 완전히 거룩함을 입었다고 자신들을 설득시키는 정직하고 진지한 이 사람들 때문에, 그들이 후에 죄에 빠지게 될 때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옆에서 관망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조롱꺼리가 될 것이며, 그리스도인의 변명에 중대한 해를 끼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해석하여 성화의 교리에 대해서 아는 바로는 먼저 믿고, 그 다음에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 다음에 거룩하게 되는 일이 뒤따라 오며, 그 일이 점진적으로 된다고 알고 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이 어떠한 순간에 있어서 ‘믿음에 의한 완전 성화’의 가능성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 두 구절의 진술들 속에서 대하는 것은 다만 ‘구별시켰다’는 것을 말하는 것뿐이라고 결론을 맺는다.
잘못된 교훈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인은 믿음으로 거룩하게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거룩함은 제2의 특별한 축복으로 여겨졌고 가르쳐졌기 때문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의롭다함을 받았으나 “믿음으로 거룩함을 입은 사람들‘은 그 제2의 축복으로 들어간 사람들뿐이라는 것이다. 성령의 세례가 믿음으로 완전한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훈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 교린도 교회 사람들이 ‘완전한 거룩함을 입었다’고 누가 감히 말하겠는가? 만일 ‘완전한 성화’ 교훈이 진리라면 이 신약의 서신들은 아무런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산약에서 실제로 발견하는 것은 매우 다른 것이다. 롬8:13-14, 약4:8, 마15:17-20을 보라.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하며, 마음을 깨끗이 하며 우리 가운데 죄가 제거 되도록 싸움을 싸워 나가야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신약서신들이 같은 교훈으로 가득 차 있지 않는가?
체험과 성화 사이에 참된 관계는 무엇인가?
답변은 그것이 직접적인 연관이나 관련을 맺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간접적인 매우 중요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은 자기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알게 되고 다시는 죄짓지 않아야 되겠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그 순간에 그들의 마음이 완전히 죄에서 깨끗해졌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체질 자체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성령의 세례는 성화를 촉진시키고 자극시키는 것만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씨를 파종하고 싹이 트고 자라기를 기다리고 있으나 성장이 더디어 아무런 자람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비가 내리고 햇빛이 비치고 할 때 모든 것이 파랗게 된 것을 발견한다. 지난 몇 주간 동안에 일어났던 것보다 한 날 오후에 일어났던 것이 더 많게 된다. 씨앗 속에는 생명이 있었고, 햇빛과 비로 그 생명이 갑작스럽게 피어 오른 것이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성화의 과정이 시작된다. 생명과 거룩의 씨앗이 우리 속에 심겨져 있다. 이것이 성령의 증거와 우리의 성화 사이의 관계이다. 그것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고 간접적인 관계이다. 그것은 성와에 대한 최대의 자극을 준다. 그러나 그것이 성화 자체는 아닌 것이다.
제 30 장 성경적 보상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롬 8:16 )
이것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인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것은 추구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회에 있어서 가장 큰 고통은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만족에 빠져 살아간다는 것이다. 자기들은 구원받았으며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제공된바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한 부요’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서 언제나 열심히 사모해야 한다. 사랑은 확신을 요구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그것은 사랑의 관계요, 그러므로 다른 것은 제외하더라도 자녀가 자기 하늘 아버지의 사랑의 절대적 확실성과 확신을 사모하지 않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신약의 교훈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주장한다. 같은 주장으로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신약성경 어디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신약성경의 지면마다 묘사되어 있는 모든 것이 성령을 크게 부어주시는 시대에 일어났음을 기억한다. 에베소서 1:13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은 것”을 기정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이것은 그때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위대한 축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신자들에게 그러한 축복을 받으라는 권면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여러 가지의 지나친 결과들로 인해서 위험 속에 빠져있던 사람들을 권면하는 말씀들을 대하게 된다. 지적한 바와 같이 오늘날에는(1961) 고린도전서를 쓸 필요가 있는 교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구약 아가서 5장에는 사랑하는 주님을 사모하고 있는 신자의 체험에 대한 전형적인 진술이 있다. 신부가 어리석게도 신랑의 제안을 무시했으나 후에 신부는 깨달은 다음 문을 열었으나 신랑은 이미 가버렸다. 그녀는 밤에 밖으로 뛰어나가 그를 찾기 시작하지만 사람들로부터 푸대접을 받는다. 그녀는 순행하는 자들에게 그 신랑을 만나거든 자기가 “사랑함으로 병이 났다”고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이것이 이 축복을 찾는 신자의 전형적인 진술이다. 신약에서는 베드로후서 1:10, 누가복음 11:11-13의 말씀 속에 있는 진술 속에서 대하게 된다.
그들은 “그것은 오순절 전에 그러하였지 더 이상 그것은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오순절날에 성령께서 교회를 향해서 영 단번에 부어지셨다. 그러므로 당신은 이미 그리스도인으로서 성령을 받은 것이다.” 라고 말한다. 로마서 8:9이 “하나님의 영이 없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고 말하고 있지 않는가? 만일 여러분이 이 구절에 대해 그런 식의 세대주의적인 관점을 취급한다면 어째서 복음서에 있는 모든 구절들을 세대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지 않는가? 그들은 주장하기를 복음서들은 현재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런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복음서들은 주님이 죽으시기 전의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논리가 맞게 하자면 그들은 복음서 전체에 대해서 그렇게 말해야 될 것이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복음서의 교훈을 실생활에 적용시키려고 노력해서는 안된다고 말해야 한다. 요한복음 7:37-39의 진술은 성령께서 오순절날 오신 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설명하고 약속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생명강수가 그들의 속에서 흘러나올 것이라”라고 말하는 것은 확실한 진리가 아니다.
어떻게 그 축복을 추구해야 되느냐?
- 그것을 믿음으로 받으라“고 말하는 교훈에 대해서 경고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려 한다. 이것은 우리가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완전히 ‘주어지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사모하고 간구할 따름이다. 믿음은 축복 그 자체에 매달려 있지 않는 것이다. 믿음은 축복을 주시는 분에게 매달려 있는 것이며 그분에게 간청하는 것이다. 혼란은 궁극적으로 믿음에 관해서 오해를 한 데서 기인한 것이다. 믿음은 우리 속에 긴박성과 사모하는 마음을 산출하며 우리로 하여금 그 축복된 선물을 받기까지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도록 인도하는 바로 그것이 믿음이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이러한 은사를 받고도 아무런 느낌을 받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 일이 있을 때 여러분은 느낌에 의해서 압도당할 것이고 이제까지 있었던 경험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체험 속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모든 축복을 믿음으로 취할 수 있으니 느낌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능한 최고의 체험에 관한 성경의 교훈을 부정하는 것이고 그 사상을 혼란시키는 것에 불과하다.
- 단순히 집회에 참석하거나, 그 집회의 지도자들에게 안수를 받거나, 어떤 ‘분위’ 가운데 있음으로 해서만 성령의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카톨릭의 ‘견진성사’(안수례)에 관한 것을 제외하고는 이 점에 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 새로운 교훈은 주로 20세기에 대중화 되었다. 문제는 그러면 오랜 세기 동안 그리스도인들은 아무것도 몰랐다는 것인가? 그 권능은 분명히 특별한 목적과 의도를 위해서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행8:18-19) 왜냐하면 전도자 빌립마저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경우 특별히 아나니아에게 주어졌던 것 같다.(행 9:17) ‘사도적 계승’을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졌노라고 주장하는 것이며, 받기 까지 기다리라는 것은 사실상 자기가 그것이 오는 때를 결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축복은 어떻게 오는가?
첫째, 우리는 이 체험의 성격과 본질에 관하여 명심하도록 하자. 요한복음 7:37-39, 14장의 말씀에 대한 성취된 은혜로운 약속이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말로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즐길 수 있다고 믿으라.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고 말할 수 있음을 인식하라. 우리는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케” 될 수 있음을 인식하라.(엡3:18-19)
둘째, 단순히 어떤 체험만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추구하라. 여러분이 “그를 알기 원하며 그의 부활의 권능과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한다고 말하라. 거룩해지기를 추구하며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라.
셋째, 최선을 다해서 그를 기쁘시게 하라. 베드로후서 1:5-7에서 말한 바를 행하라. 말씀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묵상하라. 그런 다음에 모든 열심을 다하고 난 뒤 끊임없는 기도를 드려라. 여러분의 사모하는 바를 있는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에게 알리라. 만일 아직 받지 못했다 할지라도 계속 문을 두드리고 망치로 두드려 나가라.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62:7)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제 31장 약속을 따른 후사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7 )
성령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에게 ‘인쳐’ 주는 분으로 강조한 다음에 바울은 계속해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성령께서 역시 기업 자체에 보증자가 되심을 말하고 있다. 즉 ‘인침’ 과 ‘보증’ 의 이중적인 능력을 가진 성령을 말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의 목적은 우리에게 우리의 궁극적이고 완전하고 최종적인 구원에 관한 확신을 주려는 데 있다.
유대인의 법과 달리 로마법에 의하면 모든 자녀들은 그의 상속자들이요 그 상속자들은 동등하게 같은 권한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모든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요, 그들이 모두 자녀이기 때문에 그들 모두는 개개인이 후사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
“자녀이면 곧 후사요” -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자녀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우리의 지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가장 영광스럽고 감격적인 사실이다. 우리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요, “그 조물 중에 첫 열매”가 되었다.(약1:18) 우리는 단순히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 그보다 더한 우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들”(벧후 1:4) 이다. 우리는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 영혼 속에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다.
‘후사’ 라는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기다리고 있는 위대한 기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큰 주제가 경홀히 여김을 받고 있는 것에 놀라며, 이 주제보다 오늘날 교회에 있어서 더 중요한 주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 세상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수반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삶에 대한 인생관에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 이 점은 우리의 복음전도에 있어서도 지배적인 역할을 해야 함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는 한 우리는 거짓된 복음전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단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걱정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바로 이것을 믿기만 하면 모든 아픔과 고통이 사라질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이 세상에서 매우 많은 것을 약속하지 않고 성경이 약속하는 것은 주로 미래에 되어지는 일이다.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으며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 아래서 죽으면 그들은 지옥에 갈 것이고 그들의 영원한 미래가 비참과 수치의 미래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복음서의 중요한 핵심은 언제나 ‘임박한 진노’라는 차원에서 다루어진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아는 것에 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내가 후사요, 그 기업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위함인 것이다. 참된 복음전도는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삶에서의 모든 고통을 무마시키려 들지 않는다. 오히려 “세상에서 너희는 환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이겼음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약속’이요, ‘기업’이다. 그것은 장래일이다. 사도는 “우리가 그와 함께 고난을 받으면 우리도 역시 그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말할 수 있는 것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올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포기하고 끝까지 견디기를 계속하라.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여러분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 기업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성경의 중심적인 주제로, 성경 전체는 이 영광스러운 미래를 지적하고 이 ‘약속’을 가리키고 있다. 그 약속은 창세기 3;15에 나타나고, 아브라함에게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그 후손으로 땅이 모든 민족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하시고, 그 후손을 통해서 또한 그 안에서 이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이라는 위대한 축복을 보내실 것을 의도하셨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약속이다. 이제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을 따라 후사”가 되었다. (갈3:28-29)
구약의 메시지는 어느 의미에서 완벽하게 히브리서 11장에서 요약되어 있다. 믿음의 영웅들은 믿음으로 살았고 믿음 안에서 죽었다. 그들은 약속의 성취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멀리서 바라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세상에서 나그네와 순례자들”로 스스로 만족했다. 그들을 지탱해 주었던 것은 기업에 대한 약속이었고 그것으로 힘을 얻고 살며 그것을 고대하였다.
신약성경 마태복음 25:34에서 주님께서 친히 말씀 하셨다.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그것이 바로 약속이며 곧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이다. 바울은 이 세상의 삶에 관심을 집중시키지 않고 장차 올 생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행26:17-18, 엡1:15-18, 골1:12, 3:24) 베드로 역시 베드로 전서에서 말하고 있다.( 1:3-5, 13, 3:2-3 )
제가 성경적인 교훈에서 이러한 진술들을 뽑아내는 것은 이 ‘유업의 소망’ 이 성경 처음부터 끝까지 위대한 약속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 사람의 눈이 그 기업에 있다는 것은 그가 그리스도인인 표증이요,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는 것도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이다. 또한 그가 자녀이기 때문에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는 것을 깨닫는 것도 그리스도인의 표증이다. 우리는 ‘위대한 하나님과 우리 구주께서 오시는 것을 고대해야 한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는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런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2-13)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늘 이처럼 생각하십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기대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이 땅에서 다만 ‘우리의 기업의 보증’을 받았을 뿐이다. 위대한 기업 자체는 앞으로 장차 도래할 것이다. 우리는 다만 여기서 첫 열매를 맛보는 자들이다.
제 32 장 하나님의 후사들의 특권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 롬 8:17 )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 들이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덧붙여서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말한다. 그의 목적은 그리스도인의 ‘소망’이 절대적으로 확신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1) 하나님의 후사 - 고대 가정들에서는 장자만이 상속권을 가지고 있었다. 장자는 언제나 특수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고 특별한 관심과 대접을 받았다.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약속되고, 우리가 후사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오고 있는 그 일들이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그 일을 약속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시다. 빛의 아버지시오, 변함이 없으신 분이요,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다.
후사에게 기울이는 특별한 배려가 그에게 주어져 있으며 아버지는 언제나 그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다. 그를 자랑하고 상속자라는 것을 생각하면서 미래를 내다본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이 관계 때문에 “너희 머리칼 하나도 세신 바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기울이시는 배려의 정도이다. 비록 환난과 시련에 둘러싸인다 할지라도 고통스러워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운명이 결정되었고 그것을 주님께서 친히 확증해 주셨으니 그 기업을 위해서 우리가 준비하는 데 필요한 어떠한 것도 언제나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다.
후사인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아버지는 그 후사를 자기가 알고 있는 가장 훌륭한 학교에 보내서 가장 훌륭한 교육을 받게 하고 또 가장 훌륭하게 준비하도록 한다. 히브리서 12장에서 그는 때때로 우리를 고통의 학교에 보내시기까지 하신다고 한다. “주께서 그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6-7) 사도는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것이니라”라고 그 요점을 더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의 원리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여러분이 후사들로서 위대한 기업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지고 계시는 배려가 계속될 것임을 확신할 수 있다. 바울은 죽음을 직면하여 빌립보 교인에게 말한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한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르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 사도는 그들에게 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그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일단 어떤 일을 기작하시면 그는 그것을 끝내고야 만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의 사람됨에도 불구하고 그의 역사를 수행하실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 자신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에 달린 것이다.(엡 1:18)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 때문에 우리 밖에서 이 기업을 빼앗을 것이 전혀 없음을 확신할 수 있다.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대적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떠한 것도 붙잡을 수 없다. 좀과 동록이 슬게 된다. 그것은 먼지와 가루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의 본질이란 그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오직 우리를 위해서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그 기업이 우리를 위해서 보존되고 하나님 자신에 의해서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요 10:28-29, 롬 8:, 벧전 1:3-5) 우리는 하나님의 후사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동안마저도 하나님을 향유하는 특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후사들에게 그 자신의 비밀에 관한 어떤 것을 말씀하신다. 그것은 ‘흰돌과 감추인 만나’로 세상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의 지위가 가진 영광이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영광의 비밀스러운 국면들로 들어가게 해주신다. 후사들은 먼저 첫 열매를 맛보는 것이 허락되었고 보증을 받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 모든 것은 성령의 인침을 통해서 온다. 그것은 모두 우리로 하여금 그 기업을 확신케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에게 구속의 날까지 이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의도된 것이다.
2)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 - 어째서 바울은 구태여 이렇게 말해야만 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그와 연합하였기 때문에 모든 만물의 후사들이 되었다. 우리와 그리스도와 가진 관계 때문에 모든 축복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후사라는 사실을 넘어서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바울이 그의 서신에서 자주 표현하는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계서” 그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는가? 그는 하나님의 자녀들의 행렬의 선두에 계신다. 그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신다. 우리는 그를 따라서 진행하고 있다. 그는 들어가게 될 것이고 우리도 그를 따라서 들어가게 된다. 그는 이미 영광중에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러므로 함께 후사가 되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요점이다.
사도가 다만 “자녀이면 곧 후사”라고 말하는 데서만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성령의 감동으로 “곧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라고 말한 데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하자. 그의 이름이 우리 이름과 나라니 설립추지서 곧 그 문서 위에 적혀 있다. 그는 자기의 피로 그것을 인치시고 우리로부터 그것을 빼앗아 갈 모든 원수들을 이기셨다. 그는 이제 모든 영관과 권능을 가지시고 우편에 앉으셨다. 모든 권능이 그의 것이다. 그는 그것을 우리를 위해서 행사하실 것이다. 어떠한 것도 어떠한 이도 우리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들을 위해서 준비하신” 것 사이에 서서 방해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우리를 그 안에 두시고 그로 말미암아 이 말할 수 없는 영광의 후사들이 되게 하신 그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리로다.
제 33 장 영광을 위한 준비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롬 8:17 )
사도는 14절 전반절부터 우리가 가진 자격에 대해서 말해왔다. 그러나 어째서 갑자기 고난의 문제를 거론하는가?
첫째, 고난은 초대교회에 있어서 매우 긴박한 난제였다. 어느 의미에서 모든 신약서신들은 이 한 문제에 관심을 기울리고 있다고 봐야겠다. 그 문제는 사도시대로부터 지금까지 계속되었고 그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고 있는 문제이다. 문제는 어떻게 시련들과 환난과 고난을 이러한 지극히 위대하고 보배로운 약속들과 조화시킬 수 있으며 또한 사도가 방금 묘사하였던 이 영광의 환상과 어떻게 조화하느냐 하는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불행한 것은 그들이 결코 그 난제와 해결책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면 어째서 이 모든 일이 내게 일어나는가?”라고 말한다. 계시록을 보라 그 책은 모든 세대에 있어서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격려하기 위해서 쓰여졌다. 그것은 그런 유에서 언제나 최선의 책이다.
둘째, 그리스도의 나라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은 우리의 구원이 확실하고 분명한 것이라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고 논증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동시에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있으며, 부연하여 구원의 확신과 확실성에 관한 최종적인 논증을 첨가하고 있다.
여기에 중요한 두가지 교리가 있다.
첫 번째 교리는 고난은 의심이나 문제를 일으키기는커녕 오히려 약속들이 진리임을 증거하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그 약속들에 참여하고 있음을 확증해 준다는 것이다. 고난이 그러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는 머리요, 우리는 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에 속한 일들에 대하여 동참자들이다. 주님이 땅에 계실 때 일을 살펴보라. 그는 ‘슬픔과 질고를 아는 사람’ 이었다. 그는 경멸을 당했고 ‘사람들의 버린’바 되었다. 아무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고통당했던 만큼 고통을 당한 사람이 없다. 고난은 그의 몫이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그리고 주님은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받으신 것이다. 빛은 언제나 어두움에 감추어진 일들을 밝혀주는 것이며, 어두움은 그러한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두움은 그를 미워하였다.
이것은 이 세상에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어나는 그처럼 많은 일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요한복음 16:33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였노라” 그런 일이 그처럼 일어나야 되는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그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이 받은 대접을 받는 것이다. 여러분은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므로 몰라서 당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또한 염려하지 말고 당황하지 말라.
사도행전 4장에서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에 대한 말밖에는 한 것이 없고 그저 앉은뱅이를 치료했을 뿐인데 붙잡혀 법정에 끌려가는 것을 보게 된다. 사도행전 9장에서 주님은 다소 사람 사울에게 “어찌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을 주님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머리와 몸은 하나이다. 여기에 우대한 교리의 진수가 있다. 사도행전 14:22에서 바울은 주님의 메시지를 반복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즉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환난을 예기하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최종적인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많은 환난’이 있는 길을 쫒아가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서신서들을 보면 거의 어디서나 같은 교훈을 발견한다. 고린도후서 1:-7, 4:17-18, 11:23.빌립보서 1:12-13, 28-29, 2:17, 3:10. 골로세서 1:24. 이것이 위대한 사도 바울이 살았던 삶의 내용이었다. 그 상전의 그 종이다. 야고보서 1:2-3,12. 베드로전서 1:6-7. 요한계시록 1:9.
이 모든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다고 가르치는 교훈이다. 우리는 축복에 참여하였다. 역시 그의 고난에도 동참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고난을 받고 또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
두 번째 교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인들로서 당하는 고난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에 대한 준비의 일부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2장과 5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의 지도자요, 구속자로서의 모든 고난을 ‘다 이루셨다’고 말하고 있다. 같은 과정이 우리 속에서 이루어 나간다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자리에서 인터뷰를 하게 될 때 우리는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는데 신경을 쓴다. 우리의 기업의 영광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하여 우리를 준비하고 계신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빌3:10)
우리는 고난을 받을 때 고난을 받지 않았으면 몰랐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을 배우는 것이다. 여러분이 고통과 절망과 한난을 받을 때 여러분은 이 놀라운 약속의 영광을 깨닫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사랑의 가장 큰 영광에 관한 어떤 것을 맛보는 것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점이나 티도 주름잡힌 것이나 그러한 것이 없는” 완전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거룩한 존전 앞에서 거룩하고 책망할 것이 없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복음을 마땅히 들어야 할 바대로 듣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병상에 눕히거나 낙담케하고 좌절하게 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1:2)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고 있다면 기뻐하라. 그것이야말로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절대적인 증거가 된다. 이 예비 과정을 아는 사람은 복이 있도다! 곤경이 여러분의 성격을 두드려 부수고 있는가? 여러분은 이 정결케하는 과정에서 해를 입고 있는가?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벧전4:13)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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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김영희사모의 요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