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29:29,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우리는 교리에 대해 별로 많이 들어보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으며, 심지어 어리석게도 자기들은 교리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딱하고도 유감스러운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단순하게 듣고 아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려고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특별한 진리를 교리라고 합니다. 성경 교리에 대해 말할 때 성경은 특정한 진리들을 가르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의 관심을 파악하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성경은 성경의 교리들, 성경이 강조하며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에 새기기를 원하는 특별한 진리들을 제시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Ⅰ그렇다면 성경 교리란 무엇입니까?
먼저 부정적인 방식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성경은 일반 세계사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어떻게 창세기에서는 단 일곱 장에 2천년을 밀어 넣을 수 있겠는가라는 지적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세계사에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은 다른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2 성경은 하나님이 행하신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역사도 아닙니다
성경의 목적과 계획을 드러내는 데 도움 되는 특정한 사실들만 골라서 기록합니다. 사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전기라고 지칭하지 않습니다. 사복음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특정한 진리를 제시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복음서는 예수의 생애 중 삼 년 만을 다룹니다. 예수님의 탄생도 기록되어 있지만 사복음서는 예수님의 공적 사역입니다. 즉 나이 삼십이 되신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이 점을 우리에게 매우 명확하게 나타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31). 요한은 우리 주님의 생애의 정확하고 자세한 전말을 밝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는 계획하고 있는 하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요 21:25)
그렇다면 성경은 무엇에 대한 것이냐?
3 성경은 거대한 구속 이야기입니다
본질적으로 성경은 구속의 웅대한 역사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죄를 지은 결과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하신 일의 역사이며, 성경에 나오는 다른 모든 것은 사실상 이에 부수적으로 수반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의한,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구속의 메시지를 우리가 이해하고 보고 믿을 수 있는 방식으로 제시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Ⅱ 성경의 교리들의 분류
1 성경론-성경책 자체에 대한 교리 성경이 무엇이며, 성경이 성경에 대하여 스스로 무엇이라고 하는지를 다룹니다.
2 신론(theology)-하나님에 대한 교리 우리가 성경의 우리의 연구에 대한 권위 있는 기준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언제나 모든 다른 교리에 선행하는 중대한 교리, 바로 하나님에 대한 성경 교리 연구를 시작해야 합니다. 성경은 맨 먼저 “태초에 하나님”(창1:1)을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배웁니다.
3 인간론(anthropology)-인간에 대한 교리 성경의 임무는 우리의 구속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며, 구속은 하나님이 인간에 대해 하시는 일입니다.
4 그리스도론(Christology)-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 그 다음은 기독론에 이릅니다. 왜냐하면 결국 모든 구속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든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며, 예수는 그 절정입니다.
5 구원론(stoeriology) 그러나 어떻게 구속이 우리에게 주어졌는지를 발견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문제가 있습니다. 이 교리가 어떻게 적용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적용의 교리로 구원론입니다.
6 교회론(ecclesiology) 그러면 우리가 구속받았을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는 교회로 인도되어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의 지체가 됩니다. 성경은 교회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이를 교회에 관한 교리라고 합니다.
7 종말론(eschatology) 구속을 받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가 된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와 교회와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교리. 모든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를 웅대한 절정과 완성으로 이끌고 있습니다. 몇 가지 결정적인 일들, 마지막에 될 일들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교리들을 찾아볼 것이며, 우리의 임무는 그 교리들을 뽑아내어 연구하는 것입니다.
Ⅲ 어떻게 성경 교리를 공부할 것인가?
1 교리 공부는 신학 공부가 아니다
신학을 다루지 않으면서 어떻게 성경 교리를 연구할 수 있느냐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학에 대한 강의와 성경 교리에 대한 강의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드립니다. 그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반드시 성경의 말씀, 오직 성경의 말씀에만 자신을 국한시켜야 합니다. 신학은 더 넓은 분야를 다룹니다.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을 계시하셨을 뿐 아니라 역사에도 계시하셨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신학은 당연히 성경을 포함하지만 성경과 다른 것들도 포함합니다. 신학은 인간의 생각과 철학도 끌어들임으로 교리의 명예를 손상시킵니다. 이러한 과정과 성찰의 결과가 바로 신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려고 하는 일은 신학이 아니라고 확신합니다. 신학을 나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학을 좋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 교리에 대한 강의를 한다고 말할 때, 우리가 의도하는 바는 신학에 대한 강의를 하려고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미국의 유명한 성경 강연자이며 주석자가 쓴 [성경의 중대한 교리들]이라는 소책자를 있습니다. 이 책의 첫 번째 표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들”입니다. 표제를 본 순간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책제목이 잘못되었네. 성경에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들을 발견할 수 없으니까, 차라리 기독교 신학에 대한 책이라고 했으면 좋았을 걸.”
이 책은 양심과 자연과 도덕적 논증들과 그 밖의 다른 논증들을 나름대로 철저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논증들은 전혀 성경이 말하는 바가 아닙니다. 그는 성경의 중대한 교리들에 대해 책을 썼다고 말하지만 그는 신학자로서 행동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하려고 한다고 말한 일의 범위를 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의 교리들을 다룰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선포합니다. 성경은 단지 우리에게 하나님에 대해 말할 뿐입니다. 신학을 나쁘게 생각하지 않지만 신학과 관련된 위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철학과 사색, 개인적인 생각들과 인간 이성을 끌어들이는 순간, 우리는 위험할 수도 있는 어떤 일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피하고자 합니다.
2 교리 공부는 변증학과 다르다
우리가 피하려고 하는 일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이 교리들을 변호하려는 시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교리를 변호하는 일은 변증학(apologetics)이라고 칭하는 매우 훌륭하고 필요한 학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교리를 변호하는 데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특별한 교리에 집착할 때 문제가 성경 전체가 제시하는 주제에 균형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창조의 교리를 다룰 때 진화론의 질문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진화론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우리의 주된 목적이 아닙니다. 성경 교리는 진화론을 철저하게 규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진화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로 성경 자체가 말하는 바를 긍정적으로 해석할 것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마음 속에 있는 은밀한 일들이 아닌 계시된 일들에만 우리 자신을 국한시켜야 합니다. 죄의 교리를 다룰 때, “악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해서는 답해 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의 입장은 신명기 29장29절의 입장입니다. “감추어진 일(궁극적인 설명)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Ⅳ 왜 우리는 성경 교리를 공부해야 하는가?
1 성경이 교리를 우리 앞에 제시하고 있다
성경이 일을 하니까 우리는 이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경은 특정하고 특별한 진리들을 우리앞에 제시하는 것에 관심이 있고 그 진리들이 교리입니다. 성경을 올바르게 읽는다는 말은 교리에 대해 숙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성경의 교리를 깨닫기 원합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교리를 이해하고-특별히 율법의 교리-그 교리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백성들이여! 너희들에게 율법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는 율법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율법을 행하지 않는다. 너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 사실을 이해하고 깨달아야만 한다.”
이것은 정확하게 우리 주님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까? 주님은 율법을 취하사 그것을 교리의 형태로 해설하셨습니다. 주님은 원리들을 뽑아내서는 그것을 적용하고 시행하셨습니다.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 5:27-28). 주님이 산상설교에서 정말로 하신 일이 바로 이 일이었다.
또한 분명히 사도들도 교리를 설교했습니다. 사도행전을 읽고 초대 그리스도인 설교자들의 설교를 관찰해 보십시오. 본문 원어를 분석하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설교하는 방식은 교리를 선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메시지가 있었고, 그것을 백성에게 제시했습니다. 그들은 이것이 교리라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성경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이 설교의 의미이고 목적이고 기능입니다. 설교는 단순히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기회가 아닙니다. 설교의 목적은 진리를 회중에게 전해 주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설교의 본질적인 역할, 그것을 행했습니다.
이번에는 신약서신서를 봅시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은 무엇입니까? 이 서신서들에는 특정한 교리들이 택하여서 강조되고 강력하게 주장됩니다. 특별한 교회들이 그 교리를 필요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서신서 저자들은 교리를 취해 그것을 실제적인 방식으로 적용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교리를 상고하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성경이 그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면합니다.
2 교리를 공부하지 않고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해 말합니다! 주님 당시 유대인들의 진짜 문제는 그들이 문자에만 얽매여서 그 정신은 결코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혀 교리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말을 안다는 데 만족하여 말씀은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이런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문자에만 얽매인다면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 유익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를 잘못된 길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자는 우리 영혼을 지옥에 떨어뜨리는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가 매우 지적일지 모르지만 시간을 낭비하는 방법일 수 있습니다. 교리에 도달하지 못한 성경 연구는 아무 가치가 없고 유익이 없습니다.
3 오랜 세월에 걸쳐 교회가 언제나 성경의 교리를 강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교회는 맨 처음부터 어떤 희생도 무릅쓰고 예수께서 주님이시라는 고백(교리적 진술)을 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교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교리적 진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 얼마 후에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세례 신조를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세례 지망자들은 교리 문답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일정한 질문들을 받고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교회 내에서 이단이 발생함으로 초대 교회는 우리가 보통 신조 또는 신경이라고 칭하는 것-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다나시우스 신조-를 작성하게 되었습니다. 교리들이 정의된 것을 신조라고 칭합니다.
그 다음에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새 생명, 새로운 활력, 새로운 이해가 들어왔고 교회는 다시 교리를 정리하는 것과 그것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진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17세기 웨스트민스터에서 작성되어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라고 불리우는 위대한 신앙고백이 있습니다. 이것은 전 세계 모든 곳의 장로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신앙고백들과 그에 수반되는 교리 문답들은 교회 안의 사람들로 하여금 무엇을 믿어야 하고 무엇을 믿지 말아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게 하고, 그 믿음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도록 하기 위해 성경 교리를 진술한 것일 뿐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우리를 믿음 안에서 든든히 세우기 위해, 그리고 우리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회의 초기 시절과 종교개혁 시절과 17세기에 이것이 필요했다면, 분명 그것은 지금 현재 이 순간에도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오늘날 교회는 사이비 이단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들도 “성경을 가지고” 말합니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끼지만, 그들에게 제대로 대답을 하지는 못합니다. 성경 교리를 연구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가 그런 가르침들에서 잘못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도 심각한 혼란이 있습니다. 교리가 존재하지 않고, 분명한 정의가 없으며, 누구든 자기 좋은 대로 말합니다. 이는 성경 교리 공부의 긴급성과 필요성을 말해줍니다. 우리의 영혼을 멸망시키기 위해 오는 ‘광명의 천사’ 의 계략을 모두 알아야 합니다.
4 진정으로 교리를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 속으로 들어가서 우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방법을 배우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는 계속 우리의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엽적이고 사소한 일들에 몰두하지 맙시다. 성경 교리의 산 정상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누구이시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는 성자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파악합시다.
성경의 교리는 연구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간절히 교리를 알고 싶어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리를 알아서 우쭐대기 위한 것이 아니라 경배와 찬양을 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교리를 알고 싶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을 과거에 알았던 것보다 더 온전하게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이 일을 하게 하시고 이 교리들을 허락하심으로 우리 모두가 유일하게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있게 하시고, 그 결과로 우리 모두를 소생시켜주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또한 우리와 같은 다른 사람들을 통해 교회 전체를 소생시키시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권능을 다시 증거하시기를 소망하며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