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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 ]
전라북도 남부에 자리잡은 井邑市는 동쪽은 임실,완주군, 서쪽은 부안,고창군, 남쪽은 순창군과
전남 장성군과 접하며, 북쪽은 김제시와 경계를이룬다.
묵방산(538m) - 성옥산(389m) - 왕자산(444m) - 고당산(640m) - 내장산(763m) - 백암산(741m) 으로
이어지는 호남정맥이 동남쪽의 산지를 이루며 섬진강과 동진강의 분수계가 된다.
서쪽은 해발 고도 약 100m 미만의 구릉이 넓게 분포하며, 이 사이에 동진강, 고부천 등이 흘러서
신태인읍과 태인, 고부, 영원, 이평면 등지에 넓은 충적평야가 펼쳐진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54개 부족국가 중 '초산도비리국'이 있었던 지역이다.
백제때는 고부군의 시산현과 안의현으로 나뉘어 있다가, 통일신라시대인 757년 (경덕왕16)에
정읍이라 개칭되어 태산군(태인면)에 속하게 되었고, 고려시대 다시 고부군에 속하였다.
조선시대인 1409년(태종9) 태산군과 인의현이 합하여 태안군이 되었고, 정읍현이 정읍군이 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읍군 8개면, 고부군 15개면, 태안군18개면이 정읍군으로 통합되어
19개 면으로 변경되었다.
1931년에 정주면이 정주 읍으로 승격하였고, 1940년에는 신태인면이 신태안읍으로 승격되었다.
1981년 정주읍이 시로 승격하여 정주시와 정읍군으로 나우었다가 1995년 정읍시로 통합되었다.
신태안읍 북, 입암, 소성, 고부, 영원, 덕천, 이평, 정우, 태인, 감곡, 옹동, 칠보, 산내, 산외면,
수성, 장명, 내자앙, 시기, 시기3, 연지, 농소 상교동등 1읍 14면 8동의 행정구역을 이룬다.
동남부의 호남정맥지대는 겨울에 눈이 많고, 여름에는 서늘하여 고랭지 기후를 나타낸다.
산간 지역이라 고추, 숙지황등 특용작물이 재배된다.
서북 지역은 동진강과 정읍천이 흘러 토지가 비옥하여 시설원예와 수도작이 많다.
1월 평균 기온은 1.2도, 7월평균 기온은 26도, 연강수량은 1246mm내외.
*동진강
전북 남부를 북서류하는 東津江 은 정읍시와 김제시, 부안군을 관통한다.
길이 44km, 정읍시 산외면 호남정맥의 묵방산에서 발원하여 산외, 칠보, 태인면과 신태인면을
적시며 북서류 하면서 황해로 흘러든다.
유역변경식 섬진강댐에서 섬진강의 물을 받아들임으로써, 용수의 혜택을 크게 받고 있다.
정읍천, 고부천, 원평천은 동진강의 주요 지류를 이룬다.
특히 정읍 태인을 빠져나와 평야지대를 곡류하던 동진강은 이평면과 신태인읍의 경계 지점에서
북진해 온 정읍천을 받아들여 유량이 불어나고 하천폭도 넓어져 비로소 강의 체면을 이룬다
河運에는 별로 이용되지 않으나 이평면 까지 배가 들어올수 있었다고 한다.
*옥정호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와 임실군 강진면 용수리의 섬진강 상류에 위치한 섬진강다목적댐을 세우면서
생긴 호수 '운암호'라고도 한다.
섬진강 다목적 댐은 1925년 11월부터 1928년 12월에 지은 운암제 자리에 건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이다.
1940년 4월에 착공하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과 6_25전쟁으로 두 번씩이나 공사가 중단되었고,
1961년 8월 재착공을 시작해 1965년 12월 준공하였다.
중력식 콘크리트 댐으로서 높이 64m, 길이 344.2m, 저폭53.3m, 총저수량4억6600만톤,
댐건설 당시 전북 임실, 정읍의 2개군, 5개면, 28개리가 수몰되었다.
*황토현 전적지
황토현은 덕천면 하학리와 도계리 사이에 있는 해발 35.5m의 황토 언덕으로 1894년 4월 7일
동학농민군이 전라감영과 싸워 승전한 곳이다.
1894년 4월 6일 농민군 4,000여명이 도교산(도계리 도화초등학교 뒷산) 에 집결하자 백산으로
출동했던 감영군 약 2,000여명이 추격해왔다.
감영군을 유인한 농민군이 해질 무렵 사시봉에 진을 치자 감영군은 황토재에 진을 치고 일전을
치를 준비를 하였다.
전봉준은 이날 밤 감영군의 기습공격을 예상하여 진지를 비워 병력을 주위에 매복시키고, 허수아비와
나뭇가지에 흰 옷가지를 걸쳐 위장토록 하였다.
7일 새벽 농민군을 과소 평가한 감영군은 농민군 진지를 향해 거침없이 공격해 들어왔다.
순간 주위에 매복해 있던 농민군이 삼면에서 공격하자 많은 사상자를 내고 도망치는 감영군을
추격하여 황토현 본진을 오히려 역습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동학사>에 의하면 전봉준군은 농민군 40명을 뽑아 무장보부상으로 가장시켜 관군에 잠입,
선봉을 서게하여 유인토록 하였다고 한다.
황토현 마루에는 농민군이 내걸었던 '제폭구민' '보국안민' 이란 구호를 새겨놓은 최초의 기념탑인
갑오혁명기념탑(1963)이 있다.
뒷면에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와 '가보세 가보세 을미적 을미적 병신되면 모사보리' 하는 구전민요가
새겨져 있다.
황토현 주변에는 전봉준 장군 부인의 묘가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그자취를 알수가 없다
*전봉준 고택
이평면 장내리 조소 마을(당시 고부군 궁동면)에 있다.
전봉준의 유일한 유적지인 이 초가집은 전봉준이 구보농민봉기 5~6년 전에 이사와 훈장생활을
하다 고부농민봉기를 일으킬 때까지 거주 하던 곳이다.
1894년 고부농민봉기 이후 안핵사 이용태에 의해 불타 버렸으나 다시 보수하여 사적(제293호)으로
지정되여 보존하고 있다.
죽창문의 방3개와 부엌이 딸린 본채가 있고, 마당 한쪽에 변소와 헛간으로 쓰이는 아래채가 따로
있는 전형적인 한국의 시골집이다.
전봉준 고택에서 500m 쯤 떨어져 있는 소나무 숲엔 1954년에 천안전씨 문중에서 세운
'전봉준장군단비'가 있다
비문 앞면에는 태극문양과 '갑오민주창의통수 천안전공 봉준지단'이라 새겨져 있다.
*동학 혁명 모의탑
고부면 신중리 주산 마을 입구 언덕에 서있다.
사발통문 서명자 후손들이 1969년 4월 사발통문 거사 계획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이 모의탑에는 사발통문 서명자 20여명의 생몰연대와 그 후손들의 거주지 등이 기록되어 있다.
1893년 11월 고부군 서부면 죽산리(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 송두호 집에서 전봉준 등 20명이
모여 고부 농민항쟁을 계획하고 그 결의내용과 아룰러 사발으 엎어놓은 모양으로 서명하여
각 리의 집강에게 돌렸다 하여 이명 사발통문 이라 한다.
본문과 뒷부분이 떨어져 나가 그 전부를 밝힐수는 없지만 1968년 12월 세상에 공개 되면서 고부농민
항쟁이 우발적 감정의 폭발이 아닌 철저한 거사 계획에서 치밀하게 진행되었음을 말해준다.
*정읍사 공원
6만7000여 평의 규모의 정읍사 공원엔 '정읍사'의 주인공인 망부상, 정읍사 사우, 정읍사노래비
등이 있다.
1986년 화강암으로 건립한 망부상은 긴 저고리에 옷깃을 따라서 저고리 아래쪽 까지 단이 있으며
머리는 양쪽으로 쪽을 짓고서 두손을 마주잡고 있다.
반 코트식에 아래까지 단이 있는 것은 고구려벽화에 흔히 나타나고 있는 고구려 복식인데,
고구려 유민이 백제를 건국했기 때문이다.
1994년 정면3칸, 측면3칸 규모의 정읍사 사우를 세워 행상 나간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상이 되어버린
벽제여인의 덕을 기리는 제를올렸다.
*무성서원
칠보면 무성리에 있는 무성서원은 고운 최치원과 조선 중종때 태인현감을 지낸 신잠을 향사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1968년 사적 제 166호로 지정되었다.
원래는 최치원을 제향하던 태신사 였으나 1696년(숙종22) 무성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을 함께 모시고 있다.
문루인 현가루는 두리기둥을 쓴 정면3칸 측면2칸 기와집이고, 그안에 정면5칸 측면2칸의 단층
기와집인 강당인 명륜당이 있으며 오른쪽에 4칸의 강수재, 왼쪽에 3칸의 흥학제 가 있어
동_서제를 이룬다.
3칸인 신문을 지나면 사우인 단층 3칸의 태산사가 있는데 그 안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현재의 건물은 1844년(현종10) 중수한 것이며 명륜당은 1825년(순조25)에 불탄것을 1828년에
중건하였다.
특히 여기에는 1486년 이후의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새록, 윤규 등 서원 연구자료가 있다
(사적 제 166호)
*송우암 수명유허비
조선 후기 노론의 영수였던 우암 송시열(1607-1689)의 유허비,
우암은 1689년 (조선숙종15) 2월에 제주로로 귀양갔다가 같은해 5월 28일 다시 서울로 압송하는
도중에 6월 7일밤 정읍에 도착하여 객관에서 사약을 받고 이틑날 아침에 83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6년후 우암의 무고함이 밝혀져 명예가 회복되었고, 1695년(숙종21) 5월에 지금의 정읍시 하모리
고암서원이 세워졌다.
또 1731년(영조7) 그가 사약을 마신 자리인 수성동에 '수명 유허비'를 세웠다.
*피향정
신라시대 최치원이 태인 현감으로 재임할 당시 세웠다는 披香亭은 최지원이 연꽃 방죽을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원래 상연지와 하연지라는 두개의 蓮池가 있었는데, 여름이 되면 두개의 연지에 연꽃이 만발하여
향기가 누정 주위에 가득 차 피향정이라 했다.
<태인현지>엔 동북면의 상면지는 원래 부터 있었으나 하연지(지금연지)는 1740년경(영조20)
현감 오언부가 새로 판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광해군 때인 1615~1618년 사이 현감 이지광이 중건 하고,
현종때 현감 박숭고가 또 초라한 건물을 확장하여 중건하고, 현재의 건물은 1715년(숙종42) 현감
유근 이 전라 관찰사와 호조에 교섭하여 정부의 보조로 부안 변산에서 재목을 베어다 세웠다 한다.
그리고 1856년(철종7) 현감 이승경이 인부 2,692명 장인 577명, 엽전1,600냥을 들여서 동량은 그대로
두고 모두 갈았다.
피향정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단층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는데, 원래 30개의 기둥이 있어야 하는데
피향정에는 중앙에 2개가 빠진 28개의 기둥밖에 없다.
이것은 우주의 28 숙(宿-별)에 따른 것이라 한다.
뒷면 현판에는 '호남제일정'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한옆에 늘어선 선정비들 중에는 군수 조병갑이
농민들에게 강제로 돈을 걷어 세웠다는 '태인 현감 조규순 영세불망비'가 있다 (보물제 289호)
*용흥리 석불입상
구부면 용흥리 해정사에 있는 석불 입상은 아미타여래상으로 왼손은 가슴에 들어 올렸으며 오른손은
절단되어 手印을 알 수 없다.
무릎 아래는 땅에 묻혀있고 목에는 세개의 줄이 있고, 머리는 절단된 것을 시멘트로 봉합 했으며
내려 뜨린 왼쪽손은 떨어져 나가고 없다.
옷 주름은 형식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마모가 심하지만 조각 등의 양식으로 볼때
고려 때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석불의 높이는 땅위에서 170cm에 이른다.
1981년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 97호로 지정되었다.
*보화리 석불입상
소성면 보화리 속칭 부처댕이에 있는 2기의 백제 석불입상.
오른쪽 어깨에 법의를 거치지 않고 맨살을 내놓은 모습을 '우견편단'이라 하는데 신라통일 이전에는
금동불이나 마애불에 이같은 수법이 사용되었으나, 화강암의 완전한 입상석불에 사용된 것이
발견된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통일 신라 후에 이 수법을 사용한것은 경주 석굴암의 본존불이 대표적이다.
2기의 불상 가운데 오른쪽 불상은 머리 위에 육계가 놓여있고, 두눈은 깊이 패여 있으며 코는 떨어져
나갔다. 오른손은 아래로 늘어뜨려 왼손은 부처의 대자대비 큰 덕을 표시하는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다.
불상의 크기는 우불은 전체높이 2.56m, 좌불은 전체 높이 2.27m다.
2기의 불상은 원래 따로 떨어저있었는데 주민들이 하나를 옮겨와 나란히 세운 것이라 한다.
1987년 보물 제 914호로 지정 되었다.
*천곡사지 7층석탑
정읍시 농소동 망제봉 서쪽 기슭 천곡리 골짜기에 있어 천곡사지 7층석탑이라 한다.
주변에 원래는 5층 석탑이 또 하나 있었는데, 1925년경 일본인들이 옮겨갔다.
이때 해체한 탑속에서 고려 태조 21년(938)이라는 명문이나와 이탑 또한 그렇게 보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현존하는 7층석탑은 남승의 탑이요, 옮겨간 5층석탑은 여승의 탑이라 한다.
탑의 형태는 신라의 형태를 벗어난 고려 시대 탑의 형태로서 그 구조는 탑의 규모에 비하여
기단의 규모가 작은 편이며, 1층의 탑신은 네개의 판석을 서로 엇물려 세웠으며, 제2층 탑신은
높이가 제1층보다 훨씬 낮은 동시에 크기가 다른 두개의 판석으로 구성되었다.
3층 이상의 탑신은 모두 장방형체로 다듬어진 한덩이의 돌로 세워져 있는데 옥개석이 좁은 편이며
두꺼워서 둔중한 감을 주기도 한다.
1963년 보물 제 309호로 지정되었다.
*은선리 3층석탑
영원면 은선리 언덕에 자리한 은선리3층석탑은 백제계 양식의 고려시대 석탑이다.
탑의 높이는 720cm, 기단은 270cm 장방형에 높이가 27cm이며, 제1층 높이는 228cm에 넓이
138cm되는 판석 두장을 양측에 세우고 앞뒤에 또 면석 두장 모두 4매의 판석으로 세워졌다.
제2층 탑신은 높이가 아주 낮아져서 85cm에 넓이 90cm정도이며, 또 제3층 탑신은 높이 55cm에
넓이60cm 가량이다.
그리고 각 층의 옥개는 두장의 판석을 방형으로 맞추었는데 제1층이 탑이 장신인 동시에
제2층에 감실을 만들고 두 개의 석비를 달아 붙였다.
익산의 왕궁 오층석탑과 비슷하나 감실에 석비를 달아 붙인 점이 다르다
탑신이 기울어져서 1973년에 보수공사를 한 바 있다.
1963년 보물 167호로 지정되었다.
*장문리 5층석탑
정읍시 장문리 양지마을 석우저수지 부근에 있는 이 석탑은 백제 양식의 고려탑이다.
탑은 고려 초기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作風이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과 서로 통하고
백제탑 양식의 흐름을 따르고 있는 지방적 특색을 보이고 있다.
이중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1층 탑신은 높고 2층 이상의 탑신은 하나의 돌로 조성되었다.
옥개석은 5단의 층급 받침이 조각되었으며 낙수면은 경사가 급하고 네 귀의 추녀 끝이 위로 약간
쳐들려 있어 날씬한 아름다움이 있다.
전체적으로 1층 부터 5층까지 체감율이 작아서 밋밋한 감을 주고 있다.
탑의 높이는 6.5m인데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3호.
*정읍 김동수 가옥
산외면 오광리 에 있는 古家. 1971년 중요민속자료 제 26호로 지정되었다.
흔히 아흔아홉칸 집이라 부르는 전형적인 상류층 가옥으로, 김동수의 6대조인 김명관이 1784년(정조8)
에 건립하였다.
창하산을 뒤로 하고 앞에는 동진강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의 터전에 세워졌다.
한양에서 내려온 김명관이 청하산 아래 명당을 골라 10여 년에 걸쳐 이 집을 완공한 것이라 하며,
대문 앞쪽으로 30여 평의 연못을 파 놓았다.
대지 중앙에 ㄷ자집 형태의 안채와 중문간채가 튼 ㅁ자집 형태로 자리잡고 있으며,
안채 남쪽에 -자형 별당채, 북쪽에 작은 사당이 있다.
중문간채 동쪽에는 사랑채가 있고 그 남동쪽으로 문간채가 있다.
사랑채는 이 집에서 가장 화려한데 부엌이 독립되어 특이하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좁은 마당이 나오고 중문을 거치면 바깥 행랑채가 나온다.
다시 바깥행랑채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아담한 사랑채가 보이고, 안행랑채의 안대문을 들어서면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으로 된 방들이 있으며, 좌우 앞쪽으로 돌출된 부분에 부엌을
날개처럼 배치한 특이한 평면의 한채가 있다.
안채의 서남쪽에는 안사랑채가 있는데, 본채를 지을때 김명관이 목수들과 임시로 거처하기 위한
거물로 지은 것이다.
마당의 크기와 위치, 대문간에서 안채에 이르는 동선의 관계가 뛰어나다.
특히 안마당의 ㄷ자집 형태의 안채내부 마당과 안행랑채 사이의 긴 가로마당이 만나서 아늑함이
느껴진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생활양식을 엿볼수 있으며, 비교적 섬약한 부재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 중류 이상의 가옥에 나타나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또한 소박한 구조로 되어 있으나 대문간에서 안채까지의 공간이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후세에 보수 또는 개조되지 않아 거의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주위 환경이 잘 정돈되어 있어
가옥과 조화를 이룬다.
주위에는 원래 8채의 노비집이 있었으나 지금은 2채만 남았다.
*원백암 마을 남근석
칠보면 백암리 원백암 마을 입구의 남근석은 세심하게 잘 다듬어진 1m쯤 높이의 네모진 대석위에
1.3m가량의 원통형의 남근 형태로 당산나무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다.
이는 300여년 전인 조선 숙종때 정삼품 통훈대부를 지내고 빈민구제에 힘쓴 '모은 박잉걸'이 건너편
여근곡과 여근암으 음기를 누르고 마을이 번영하도록 하귀 위해 장승과 함께 세웠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후에 마을 사람들의 자손이 번창했다고 한다.
효자로 소문났던 그는 칠보에서 산내면으로 넘어가는 구절재에 길도 만들었고, 태인에 대각교(거산교)
를 가설하는 등 자선사업을 많이 했다고 전한다.
남근석 옆 당산나무 둥치의 같은 높이쯤에는 길게 갈라진 틈이 있는데 이것은 남근석과 더불어
음양을 상징한다.
큰절을 네번하고 주위를 돌며 절한 후 남근석을 안아주면 아이를 갖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어서
예전에 자식 없는 부인들이 밤에 몰래 와서 제사를 지내며 아들 갖기를 빌었다고 한다.
이 남근석에 해를 끼치면 눈이 멀게 된다는 믿음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신성시 하고 있다.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13호.
남근석 바로 옆에는 1.92m 높이의 미륵 형태의 장성 堂山이 있다.
한편 원백암 마을은 음력 정월 초사흘날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비는 당산제를 지내고 있다.
또 이마을엔 원래 24방위에 맞추어 세운 24개의 당산이 있었다고 전하는데
아직도 마을 주변에 여려개의 당산이 남아있다.
*둔헌 임병찬 창의 유적지
1998년 전라북도가 기념물 제 92호로 지정된 산내면 종성리의 둔헌 임병찬 창의 유적지는
임병찬(1851-1916)이 의병을 훈련시킨 장소다.
1893년(고종30)에 임병찬이 산내면 영동마을에서 해발 400m 높이의 산간 지대인 이곳 종성리로
옮겨와서 의병을 모아 후일에 대비하고자 하였다.
후진 양성을 위해 '영소전' 학당을 지었고, 병기참과 탄약제작소, 숙영지 등을 함께 설치하였으며
의병들에게 활쏘기와 말타기를 가르쳤다.
후에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스승인 '최익현(1833-1906)'과 함께 1906년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백정기 의사 유적지
'구파 백정기(1896-1934)의사는 정읍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동냥으로 한문 공부를 한 그는 19세때 큰 뜻을 품고 상경했는데, 1919년 3_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문과 전단을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와 항일운동을 선도하였다.
그후 동지들과 京仁 간의 일본 군사시설 파괴를 공작하다가 경찰에 구금되었으나, 본적지와
행적을 속여 빠져나왔다.
그후 각지를 숨어다니며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여 중국 베이징으로 망명해 일본 군사시설의
파괴에 전력하였다.
1924년 일본 천황을 암살하려고 도쿄에 갔으나 실패했고, 1925년 상하이로 가서 무정부주의자 연맹을
조직해 이를 흑색공포단(BTP) 으로 개칭, 조직을 강화하여 대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3년 3월 상하이 虹ㅁ 에서 동지들과 주재 일본대사 '아리요시' 를 암살하려고 모의하다가
체포되어, 나가사키로 이송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옥사 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의안백 이화 개국공신녹권
조선의 개국과 관계된 공신녹권은 개국원종공신녹권(국보제 69호)을 비롯하여 7종이 전하지만,
이보다 상위인 '정공신녹권'으로는 이것이 최초로 발견된 유일의 실물이다.
개국원종공신녹권과 마찬가지로 조선개국 원년의 고문서로서뿐만 아니라 동신도감 연구와
이두문이 많이 사용되어 문체와 내용이 귀중한 사료가 된다.
이요정 李和(?-1407)는 조선 전기의 문신, 조선 태조의 異母弟로 고려말 공민왕 때 '방원'을 도와
정몽주를 죽이고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공신 1등으로 義安伯에 피봉되었다.
1398년(태조7) 제1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정사공신 1등이 되고, 1400년(정종2)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여 좌명공신 3등이 되었으며 1407년 영의정이 되고 대군에 진봉되었다.
이문서는 위화도 회군과 정몽주 등 반대파 제거에 기여하여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배극렴'
'조준'등 다른 16명의 건국공로자와 함께 '1등 순충분의좌명개국공신'에 올린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또 공신전 사급, 자손들의 음직, 범죄사면 등 그 특전이 본인은 물론 부모, 처자, 자손에 이르고,
아들이 없을경우 사위, 생질이 이를 계승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필사본이며 크기는 9절 1첩이고 길이 604.9cm, 너비 35.3cm, 재료는 닥지,
1975년 국보 제 232호로 지정되었다.
*갑오 동학 100주년 기념탑
내장산 써래봉이 올려다보이는 내장저수지 물가 언덕에 자리하고 있다.
갑오동학농민혁명 백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탑으로 1997년 5월 11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화강암, 대리석, 오석 등으로 만든 탑으로, 주탑과 부탑으로 되어있다.
居昌石으로 만든 주탑의 높이는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난 1894년을 기리기 위하여 1,894cm로 하였다.
4각 뿔은 갑오동학농민혁명의 이상을 상징하고, 흰 대리석은 민족봉기의 정신을 상징한다.
3단 금 태는 고부 농민봉기, 3월 백산봉기, 9월 삼례봉기 를 상징한다.
聞慶石으로 만든 부탑은 직경이 85cm이고 높이가 1100cm 인 원기둥이 네 개다
이는 士農工商 사민평등의 수평사회를 상징한다.
*정읍 별미
- 옥정호 붕어찜
- 정읍 동학농민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