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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27 주일 ** 수고의 열매 (잠언 14:1-4)
어떤 선교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친절하게 서비스하는 스튜어디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물었습니다.
“Do you know Jesus Christ?”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그러자 스튜어디스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가서, 조금 있다 다른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선교사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그 분을 아신대요.”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은 구원을 얻는 길이기에 귀하고,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니기에 놀라운 일입니다.
전도해 보면 어떤 결과를 낳든지 은혜가 넘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으면 기쁘고 감사합니다.
반면 거부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만나면 내가 믿는 것이 감사할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데는 많은 수고와 희생이 따릅니다.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갈라디아서 4:19)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고린도전서 4:15)
사도 바울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세우는 일을 해산하는 수고라고 하였습니다.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겪는 해산의 고통은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없다면 그런 해산의 수고를 겪지 않아도 됩니다.
열 달 동안 뱃속에서 기르는 일부터, 갖난 아이를 기르는 일, 돌보고 교육시키고 양육하는 일에는
얼마나 큰 수고와 희생이 따르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아이를 갖지 않거나, 최소한으로 적게 가집니다.
그러나 아이가 있음으로 해서 얻는 기쁨과 유익은 그런 수고와 희생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아이의 부모가 되는 것은 수고와 희생, 귀찮음과 고생을 감당하기로 각오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지혜로운 사람은 소의 유익을 알고, 소를 기르는 수고를 감당한다고 말씀합니다.
“소가 없으면 구유는 깨끗하려니와 소의 힘으로 얻는 것이 많으니라.” (4절)
소를 기르고 구유를 관리하는 일들이 귀찮아서 없애버리면 소로 인해 얻는 유익도 사라집니다.
독일 바이에른 주의 농장의 암소 룰루(Lulu)는 케이블카에 매달려 산을 오르내립니다.
먹이와 젖 짜는 시설은 산 정상에 있고, 축사는 산 아래쪽에 있기 때문인데
다른 소와 달리 룰루는 겁이 많아 산을 잘 오르내리지 못하였습니다.
주인은 고민 끝에 룰루를 케이블카에 매달아 오르내리기로 하였답니다.
(독립영화 워낭소리의 한 부분을 동영상으로 봄)
소로 인해 감당해야 할 수고와 번거러움도 있으나 소가 주는 유익이 더 큽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증거하고자 할 때 여러 가지 수고와 희생, 고난도 있습니다.
베스트를 작정하고, 기도하며 관계맺기를 하는 것이 그렇습니다.
베스트를 정하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시간과 물질, 노력의 희생이 반드시 따릅니다.
아예 베스트를 작정하지 않으면 그런 수고와 희생은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냥 베스트를 작정하여 그 이름을 적는 것 같지만, 누가복음 16장의 관점에서 보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지옥의 부자가 세상에 있는 자기 형제 다섯에게 복음이 전해지기를 요청했던 것처럼
우리가 베스트의 이름을 적을 때 자기의 형제와 친구도 적어 주기를 애원하는 요청들이 있습니다.
먼저 지옥에 간 영혼들이 자기의 형제들과 친구들을 구해 달라고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오은선 등반대장이 며칠 후 히말라야 8000m 이상 고봉 14좌 완등을 위해 안나푸르나에 오릅니다.
같이 선의의 경쟁을 펼치던 고미영 대장은 11번 째인 낭가파르밧 (8,125m) 등정 후 하산하다 실족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고봉 하나 하나를 오르는 데는 많은 준비와 노력, 그리고 생명을 건 도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8,000m 이상의 고봉 14좌의 이름이라도 외워 보려고 합니다.
실제로 등반하는 그들의 노력과 수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의 의미는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에베레스트 (8,848m) - K2 (8,611m) - 칸첸중가 (8,586m) - 로체 (8,516m) - 마칼루 (8,463m) - 초오유 (8,201m)
- 다울라기리 (8,167m) - 마나슬루 (8,163m) - 낭가파르밧 (8,126m) - 안나푸르나 (8,091m)
- 가셔브룸 1봉 (8,068m) - 브로드피크 (8,047m) - 가셔브룸 2봉 (8,035m) - 시샤팡마 (8,027m)
우리가 비록 선교사들처럼, 혹은 전도왕들처럼 하지는 못할지라도 내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을 품고
기도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며 의미있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수고하며 복음을 전할 때 반드시 열매의 기쁨이 돌아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시편 126:5-6)
형제와 이웃들에게 복음 전하는 수고를 기쁘게 감당하여 생명의 열매를 거두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9/20 주일 ** 복된 초청 (누가복음 14:15-24)
어떤 선교사님이 비행기를 타고 가다가 친절하게 서비스하는 스튜어디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어서 물었습니다.
“Do you know Jesus Christ?”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그러자 스튜어디스는 잠깐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가서, 조금 있다 돌아왔습니다.
그 스튜어디스는 선교사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손님, 아무리 찾아봐도 이 비행기에 그런 분은 탑승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예수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연히 구원받지 못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기에, 예수님의 이름을 전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 베푼 큰 잔치와 초청받은 사람들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본문의 잔치에 초청받는 것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로 보입니다.
아마도 초청하는 사람이 유력한 사람인 것 같기 때문입니다.
유력한 사람의 경우 그의 잔치에 아무나 초청하지 않고, 초청받는 사람은 영광입니다.
15절에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동기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가 복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잔치 자리에 앉는 것은 구원받았다는 뜻이며, 지극히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은 것입니다.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요한계시록 19:9)
마태복음 22장에서도 천국은 마치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유대의 풍습으로, 잔치를 베풀기 전 미리 초청을 하고 잔치를 준비합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예약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준비를 다 마치고 잔치에 참석하라고 연락을 하니,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오지 않았습니다.
천국의 잔치에도 아무나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0:15, 21:27)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명부보다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것이 중요하고 귀합니다.
자녀들에게 원하는 학교의 합격자 명단에 드는 것이 기쁜 일입니다.
젊은이들에게 원하는 직장의 취업자 명단에 드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린양의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것은 그런 것들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20)
오직 예수님을 믿는 자들만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오직 예수님의 초청에 응답하는 자들만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요즘은 의식주 문제에 있어 상당한 수준의 발전하여, 웬만한 잔치에는 잘 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천국 잔치에 들어가지 않는 자는 지옥 불못에 떨어집니다. (마태복음 22:13, 25:30 등)
우리는 예수님의 천국 잔치를 알리고, 사람들을 초청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초청한다고 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경우처럼 갖가지 핑계로 거절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사람들에게, 누구에게나 예수님의 초청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초청은 영원하고 복된 잔치를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명을 구하는 길이고, 또 영원을 결정짓는 일이기에 강권하여서라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23절)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것은 관계를 통한 초청입니다.
요한복음 1장과 4장 등에서 안드레는 형제 베드로를,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을, 수가성 여자는 동네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관계는 복음이 건너가는 다리다.” 말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전해야 하겠지만, 먼저 가족들과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한 영광입니다.
우리는 그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의 잔치를 전하며, 초청하는 종들입니다.
내 주변에 예수님을 모르고, 믿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의 초청을 전합시다.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기록하고, 가슴에 품고 기도하며, 관계맺기를 통해 초청하는 것은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마시고, 천국 잔치의 영광스러움을 전하며 초청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 9/6 주일 ** 일어나 올라가라 (창세기 35:1-5)
추석 때가 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말을 합니다.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고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명절이기 때문에 그런 표현을 합니다.
남녀가 처음 만나 연애하고 신혼 때처럼만 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사랑이 식고, 싸우고, 헤어지고, 심지어 자는 남편의 얼굴에 끓는 기름을 붓기까지 합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고 기쁨과 열심히 신앙생활할 때가 있었고, 그때를 추억합니다.
야곱에게 있어 벧엘이 그런 신앙의 추억이 있는 곳입니다.
창세기 28장에서 외삼촌 집으로 도망하던 야곱, 빈 손에 불안한 현재와 장래를 안고 가던 그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벧엘은 야곱에게 신앙의 전환점이요, 목적지이며, 승리의 힘을 공급하는 원천이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고향으로 돌아올 때 돌베개를 세우며 서원했던 벧엘까지 오지 않고, 세겜에 주저앉았습니다.
물질주의, 정욕주의, 우상의 도시였던 세겜에 눌러 앉아 살면서 그런 환경에 동화되어 갔습니다.
맹모삼천(孟母三遷)이란 말이 있습니다.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 이사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어떤 환경과 기준 속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부모가 기도하지 않으면 자녀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성경을 읽지 않고, 말씀대로 살지 않는데 자녀가 그렇게 살겠습니까?
부모가 예배를 소홀히 하고, 주일 낮예배만 겨우 나간다면 자녀도 그렇게 자라갑니다.
머지 않아 수요일예배는 없어질 가능성이 큽니다.
믿음의 조상 야곱이 세상적인 환경의 세겜에 눌러 앉으니, 자식들도 그런 환경에 물들어 갔습니다.
딸 디나가 세겜 여자들과 사귀고 보러 나갔다가 강간을 당했고, 이방 족속들과 혼사를 맺어야 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들 둘이 잔인한 복수를 하여 세겜 남자들을 죽이고, 주변 가나안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결국 야곱의 집에 세겜에서의 죄악들이 자라다가 곪아 터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위기 가운데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제단을 쌓으라.”
이 말씀이 야곱의 현재 상황을 보여 주며,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를 일러줍니다.
야곱은 그때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기와 가정을 정리합니다.
지금 한시가 급하게 도망을, 그것도 주변 가나안 사람들 모르게 도망해야 하는데 그의 준비는 특별합니다.
모든 이방 신상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야곱과 그의 집안의 현재 모습이었습니다.
야곱의 집에 이방 신상들이 있었습니다.
라헬이 훔쳐 나온 드라빔을 비롯하여 각종 우상과 점 치는 도구들이 있었습니다.
삶의 모습과 의복까지도 하나님 앞에 경건하지 못하고, 이방 사람들의 유행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방 신상들과 귀고리들을 모아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세겜을 떠났습니다.
우리의 삶과 신앙에도 주기적인 대청소가 필요한 것은, 이런 세상의 것들이 들어와 눌러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는 속담처럼, 어려움을 만날 때 새로운 출발을 하는 기회가 있습니다.
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지면 구조 조정을 하듯이, 성도도 어려움을 만날 때 신앙생활을 점검할 기회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잘못된 것을 버리고 정리해야 합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곪아 터진 상처를 보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일어나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를 회복하고, 은혜와 긍휼하심을 간구할 때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세상에서 만나는 실패와 고난이 성도에게는 새롭게 일어나는 기회가 됩니다.
요나는 하나님 말씀을 떠나 도망하며 자다가, 고기 뱃속에서야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불 앞에서 믿음이 칠 배가 강해지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들은 다 어려움과 문제 끝에 일어났습니다.
어려움과 문제가 없었다면 그런 기적도 없을 것입니다.
양식이 떨어지면 금식 기도하면 되고, 병들어 자리에 누우면 기도하는 시간으로 만들고,
광야에서 외로움 가운데 있다면 (요한의 경우 밧모섬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으로 채우고,
직장이나 사업이 실패하여 할 일이 없으면 교회를 찾아 기도하며 섬기는 시간으로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어려움을 만날 때 떠나야 할 세겜을 떠나고, 잘못된 것들을 정리하는 기회로 삼으면 오히려 복입니다.
김진홍 목사님은 감옥 속에서 성경을 많이 읽고 기도하였답니다.
이때가 아니면 언제 그렇게 정리하고 청소하고 마음껏 주님을 찾을 기회가 있겠습니까?
성도가 벧엘을 회복할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십니다.
현재의 세겜에서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 8/30 주일 ** 성도의 싸움 (사사기 16:13-17)
힘 센 사람의 대명사인 삼손은 하나님의 나실인으로 택함을 받은 인물입니다.
성경이 인물을 소개할 때 출생과 사망의 기사가 다 있는 사람은 드문데, 삼손이 그렇습니다.
삼손은 힘의 은사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받았으나, 그것을 자신의 정욕을 위해 썼습니다.
마크 애터베리는 삼손 같은 강한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을 삼손 신드롬이라고 하고
삼손 같은 사람들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경계선을 무시한다. * 정욕과 씨름한다. * 훌륭한 조언을 무시한다. * 규칙을 깨뜨린다.
* 자신의 총명을 과대 평가한다. * 분노를 도구로 사용한다. * 똑같은 실수들을 반복한다. * 자아가 강하다.
* 어리석은 모험을 한다. * 큰 그림을 보지 못한다.
삼손은 힘으로 남을 죽이고 사자도 이겼으나, 자신과의 정욕의 싸움에 패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낚시터에 가서 고기를 잡는데 작은 붕어가 걸려서 놓아 주었습니다.
조금 있다 다시 그 붕어가 걸렸는데, 이번엔 다른 쪽 주둥이에 낚시가 걸려 있었습니다.
다시 낚시를 빼고 그 붕어를 놓아 주었는데, 얼마 후 다시 그 붕어가 걸렸습니다.
그래서 참 어리석은 붕어 때문에 재수가 없다고 이번엔 땅바닥에 던져버렸습니다.
어리석은 붕어는 같은 미끼를 계속 뭅니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많습니다.
어리석은 성도는 마귀의 유혹에 끊임없이 넘어가고 같은 죄를 반복합니다.
잠언 29:1이 경고합니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삼손은 정욕의 문제, 특히 여자 때문에 계속하여 실패하면서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딤나의 여자 - 기생 - 들릴라로 계속하여 여자들 때문에 그의 인생은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바다의 어류 가운데 불빛을 보고 모여드는 것들이 있는데, 오징어, 고등어, 갈치 등이 그렇습니다.
이런 어류를 잡는 고깃배들은 밤에 출항하여 환한 집어등을 밝히고 조업을 합니다.
고기들은 불빛을 보고 모여들어 낚시와 그물에 걸립니다.
마귀가 밝힌 죄악을 불빛을 보고, 그 잠시 동안의 죄악의 낙을 따라가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삼손은 안목의 정욕을 따라 여자들을 선택했고, 나실인의 구별됨을 버리고 정욕과 화풀이로 살았으며,
사명을 잊고 여자의 무릎을 베고 정욕과 죄악의 잠에 빠졌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무릎에 누이고 그의 힘의 비밀을 알기 위해 속삭였습니다.
삼손이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있을 때부터 삼손이 비밀을 토하고 최후를 맞는 것은 시간 문제였습니다.
미국이 9‧11 테러를 당했을 때 대비하지 못한 것은 그 수법이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객기를 납치하여 건물에 들이받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마귀는 성도를 유혹하고 무너뜨리기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삼손은 사명을 잊고 정욕의 싸움에 빠져,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죄악의 잠을 자다가 실패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싸움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무슨 싸움을 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와 복을 어디에 쓰고 있습니까?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디모데전서 6:12)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한번뿐인 인생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과 시간, 물질과 은사를 어디에 쓰며,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까?
성도는 마귀와 죄악에 대해 싸우며 살아야 합니다.
함부로 드나들고, 정욕에 빠지고, 유혹의 베개를 베고 자면 망하고 맙니다.
마귀는 우리로 하여금 쓸데없는 일과 정욕의 싸움에 빠져 살고, 사명을 잊고 살도록 유혹합니다.
술, 담배를 못 끊어 애를 먹고, ‘이거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면서 죄의 수렁에 빠져 살게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소설가 이병주의 행복어사전에 “파사데나의 청년들은 우주 정복의 꿈을 꾸는데…”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루기 위해,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가는 성도들이 됩시다.
** 8/2 주일 ** 하나님을 의지하라 (예레미야 17:5-8)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만나거나 소송을 할 때 변호사를 선임합니다.
복잡한 문제에 대한 법률 지식이 없기 때문에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돈 많은 사람은 이름있고 유능한 변호사를 선임하고, 없는 사람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차이가 많이 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有錢無罪 無錢有罪)란 말이 그래서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변호사가 되십니다.
그래서 어떤 정죄도 우리에게 내려지지 않고,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예수님이 그의 변호사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의뢰(의지)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를 믿고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물가에 심어진 나무로 비유합니다. (시편 1편도 그렇습니다.)
다윗은 시편 23편에서 목자를 따라가는 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물가에 심어진 나무와 목자를 따라가는 양의 경우, 잘 되는 데 있어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나무나 양 자신의 자질과 능력보다 나무가 어디에 심겼으며, 양의 목자가 누구냐가 훨씬 중요합니다.
(영상 - 물가에 심겨진 나무와 사막의 나무 비교)
사막 지역에 심겨진 나무는 수분의 보존을 위해 잎이 가시처럼 되고, 그래야 적응합니다.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가 그렇게 기량을 발휘하는 데는 브라이언 오셔 코치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최근 세계선수권에서 부진한 박태환 선수의 경우 코치진의 문제가 부각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나의 자질과 능력, 노력과 성실도 중요하지만 누구의 도움과 인도를 받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물가에 심어지고, 목자를 따르는 것은 일시적인 행동을 말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한번 심어지면 끝까지 거기 그대로 있고, 양도 이 목자 저 목자를 바꾸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어디에 심어지느냐, 어떤 목자를 따르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하나님의 손보다 나의 노력이나 세상의 원리, 우연한 흐름에 더 좌우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이 중요하고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도우시고 복을 주셔야 된다는 것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9)
성경 안에 있는 모든 사건들,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손에 있고 그 타이밍까지도 하나님께서 주장하십니다.
우연하게 보이는 것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주인의 며느리감을 구하는 내용(창세기 24장), 홍해와 요단강이 갈라지는 타이밍,
룻이 보아스의 밭을 찾아가는 장면(룻기 2장), 아합이 활에 맞아 죽는 장면(역대하 18장), 하만의 손길에서의 구원,
요나가 폭풍을 만나고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사건 등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레미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강대국을 의지하고, 우상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자기들의 뜻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는 다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가 동전을 던져서 앞면이나 뒷면이 나올 확률은 1/2입니다.
10번만 던져 보면 1/2이 아니라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질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의 수를 수백, 수천, 수만으로 늘려가면 결국 보편적으로 1/2의 확률이 됩니다.
한 가지만 보고, 단기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고, 주님을 의지(의뢰)하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면 결코 실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물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가뭄이 와도 청청하고 열매가 풍성합니다.
자신을 믿고, 사람을 의지하고, 세상을 따라 살면 광야의 가시떨기처럼 마르고 열매도 없습니다. (시편 92:12-15 참조)
악인들이 한때 잘 되는 것 같으나 결국은 다 시들고 무너집니다. (시편 37:1-2, 73편 등)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의 물가에 심어져, 날마다 생명의 생수를 공급받으며 살아갑시다.
오직 하나님을 의뢰(의지)하고 사는 성도는 결코 시들지 않고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주께 의뢰하고 의뢰하였으므로 그들을 건지셨나이다.” (시편 22:4)
주 안에 있는 성도, 주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복된 길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시편 55:22)
** 7/26 주일 ** 믿음의 세계 (마태복음 14:22-33)
법률이나 운동경기의 규칙 등을 보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를 다 언급하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별별 일들이 다 일어나기 때문인데, 그렇게 모든 경우를 대비한다는 사람들이
정작 중요한 영원의 문제,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람에게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고, 그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으므로 예수님을 믿고
구원얻는 것이 시급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불황, 침체, 염려, 스트레스, 시련, 어려움 등이 많고, 그런 말들을 많이 쓰는 요즘 그것을 이기기 위해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강조합니다.
1952년 노먼 빈센트 필 박사가 적극적 사고방식이란 책을 쓴 이후, 생각과 자세의 변화를 강조하는 경향이 두드러집니다.
이는 로버트 슐러 목사를 거쳐, 최근에는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사실 가장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내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죄인들이 구원을 받고, 약한 자가 능력을 얻고, 하나님의 기적과 은혜의 손길로 인도함을 받는 것이 성경에 가득합니다.
그래서 가장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의 태도는 말씀으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앞선 오병이어의 이적에 이어 일어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것이 불가능하고, 제자들이 믿지 못할 일이 아닙니다.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신 예수님이라면 당연히 바다 위로 걸어오실 수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은 바다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소리 지르며 두려워하였습니다.
중미의 콜로라도 강 주변에 사는 바실리스크 도마뱀은 물 위로 뛰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도마뱀의 별명이 예수 그리스도 도마뱀입니다. (동영상 보기)
제자들이 보기에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그들의 배로 가셔야 되겠습니까?
헤엄쳐서?, 물속을 잠수하여?, 결국 예수님께서는 물 위로 걸어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께 가능한 일이고, 베드로를 물 위로 걸어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신줄 알고, 그의 믿음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28절)
만일 주님이시라면 오병이어의 이적뿐 아니라 물 위로 오라 하심도 가능합니다.
만일 주님이시라면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이적들을 능히 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 주님이시라면 오늘도 내게 이런 믿음의 역사, 말씀의 역사를 이루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님이시기에 믿음 안에는 믿음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기만 하였으나, 베드로는 체험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자기에게도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요구됩니다.
1969년 7월 20일, 아폴로 11호의 우주인 세 사람은 인류 최초로 달에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이들을 포함하여 모두 12명이 달에 착륙하였고, 이들을 문 워커(moon walker)라 부릅니다.
아폴로 11호의 우주선을 조종했던 마이클 콜린즈는 다시 달에 가고 싶지는 않지만, 달을 보면서 생각한답니다.
“저기 갔다 왔지. 아름다웠어.”
사람들도 능력을 발휘하여 달에도 갔다 오고, 터널도 뚫고, 광안대교 같은 다리도 만들어 새로운 길을 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걷듯이 물 위를 걸을 수 있고, 홍해와 요단강을 갈라 길을 내기도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다 위에, 혹은 바다를 갈라서 길을 내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공부 9단, 오기 10단’이란 책을 쓴 박원희 양은 민족사관고를 2년만에 졸업하고, 미국 10개 명문대학의 입학허가를 받았습니다.
하버드대학에 진학하여 학사와 석사를 2년만에 우등으로 졸업하였습니다.
박 양이 토플을 처음 공부할 때 그랬답니다. “토플아, 기다려라. 원희가 간다.”
우리도 문제를 만날 때 그렇게 도전해야 합니다. “문제야, 기다려라. 내가 간다.”
믿고 기도하며, 말씀대로 순종하고 나아가면 길이 열립니다. 하나님이 열어 주십니다.
갈릴리 바다 한복판, 밤새 고생하게 만든 역조류, 한밤중, 부는 바람과 물결... 이런 것이 현실이고 자연세계입니다.
무엇보다 사람은 물 위를 걸을 수 없음이 자연법칙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이 있고 능력의 역사가 개입한다면 물 위를 걸을 수 있음이 믿음의 세계이며, 초자연적인 세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세계뿐 아니라 초자연세계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초자연세계야말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더 분명히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마가복음 9:2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조엘 오스틴 목사의 레이크우드 교회는 설교 전에 이런 고백을 합니다.
“이것은 나의 성경책입니다.
나는 이 성경이 말하는 사람이고
이 성경이 말하는 것을 가지고 있으며
이 성경이 할 수 있다는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도 자연적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자연적인 일들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믿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대로 믿고, 믿고 기도하는 성도에게는 믿음의 세계가 열립니다. 동화 같은 세계가 펼쳐집니다.
오직 주님을 믿고 나아가면서 믿음의 세계를 경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7/19 주일 ** 말씀으로 사는 성도 (마태복음 4:1-4)
흔히 식당에 갔더니 불친절하고 맛도 형편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음에 갔더니 완전히 달라져서, 종업원들이 친절하고 맛도 좋아서 이유를 알아 보았더니
주인이 바뀌어서 그렇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주인이 바뀌어야 좋아집니다.
내 인생의 주인도 주님이 되셔야 삶이 제대로 되고, 아름다운 사람이 됩니다.
또 주인과 주방장이 다른 경우를 봅니다.
이럴 경우 주방장이 고집을 부리고 제멋대로이면 주인이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면 대개 주방장을 내쫒고 새로운 사람을 들이거나, 주인이 직접 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의 주인이 주님이신데, 못된 주방장처럼 살지는 않습니까?
지난 주일에 이어 말씀으로 사는 성도, 성도는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의 시작을 40일간 광야에서 기도함으로 시작하셨습니다.
40일 후 주리신 예수님께 마귀가 찾아와 시험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주리신 예수님께 떡이 가장 필요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셨습니다.
여기서 마귀의 주된 수법을 하나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사실도 의심하게 만들며, 믿음을 흔들어대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3절)
감히 예수님 앞에서도 그런 소리를 할 정도로, 모든 사실을 부정하고 의심하게 만듭니다.
구워ㄴㅍㅏ ㅇㅣ단들이 구원의 확신 문제로 접근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 받은 증거를 대라고 하면서 (주로 구원받은 날짜와 사건을 말함), 그걸 분명히 모르면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고 흔듭니다.
또 시험은 말씀으로 이깁니다.
예수님께서 ‘기록되었으되’ 하는 말씀으로 마귀의 모든 시험을 이기셨습니다.
말씀은 성령의 검으로 (에베소서 6:17), 대적자들을 이기는 중요한 영적 무기입니다.
왜 성도들이 약하고 세상과 시험에 넘어지는가?
말씀이 없고, 말씀으로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말씀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지만 다음의 말씀들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잠언 1:7, 요한계시록 1:3, 시편 119:105, 욥기 23:12, 시편 1:1-2, 디모데후서 3:15-17 등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세상의 책들과 다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고, 지혜가 있고, 용기가 있고, 성공의 비결이 있고, 행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들어야 합니다. 암송하고, 묵상하고, 그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내게 복이고 능력이고 성공입니다.
“성경책이 깨끗한 사람은 삶이 더럽고, 성경책이 낡은 사람은 삶이 깨끗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왜 성경을 읽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가?
거기에는 성경을 가치없고 낮게 여기는 생각들이 깔려 있습니다.
글을 가르치고, 일찍 유치원에 보내고, 심지어 조기 영어 교육도 하지만 성경은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은 수준 낮은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모든 문학과 예술, 정치와 경제, 모든 분야에 성경은 가장 수준 높은 진리를 가르칩니다.
성경으로부터 세상의 모든 문화와 예술이 나왔습니다.
성경을 가르치고,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이 유치한 일이 아닙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성경을 등한히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세상의 공부는 밤낮으로, 사교육까지 하면서 시키지만, 성경은 몰라도 된다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링컨을 비롯한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오직 성경으로 성공하고 복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민족도 세계가 놀라는 대단한 민족이지만, 어려서부터 성경을 가르치는 유대인을 따르지 못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희귀본 수집가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자기 집 다락에서 발견한 아주 오래된 성경책을 버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버린 그 성경은 구텐베르그라는 사람이 인쇄를 했더군요.” 하고 말했습니다.
“구텐베르그라구요!” 수집가가 입을 딱 벌렸습니다.
“당신은 이제까지 인쇄된 책 중 가장 비싼 책 한 권을 버린 거예요.
최근에 그 책 한권이 400만 달러 이상에 경매됐다구요!”
그러자 그 사람은 “하지만 내가 버린 그 책은 10센트도 안될 거요.” 라고 말했습니다.
“마틴 루터라는 사람이 그 책에 온통 낙서를 해놨던데, 그런 책을 누가 사겠습니까?”
성경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2007년 8월 12일, 이라크 주둔 미군 일병 브랜든 쉬에이가트가 초병 근무 중에 적의 저격병이 쏜 총을 가슴에 맞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슴에 있던 성경책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총알은 성경책 절반을 뚫고 들어가 박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생명을 얻고, 놀라운 일을 경험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삽니다.
육신을 위해 밥을 먹듯, 영혼을 위해 성경을 읽고 그 속에 있는 온갖 보화들을 얻는 성도들이 됩시다.
** 7/12 주일 ** 말씀에 의지하여 (누가복음 5:1-11)
지난 주간에 디도스(DDoS)란 해킹 프로그램에 의한 사이버 공격이 있었습니다.
누군가 나쁜 프로그램을 만들어 다른 컴퓨터와 사이트들을 망가뜨리고 정보를 빼가는 것입니다.
막강한 능력을 가진 컴퓨터도 심어진 프로그램에 따라 움직이고 지배를 받습니다.
자동차를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려면 핸들을 사용합니다.
군대나 경찰 등의 조직은 명령에 따라 움직입니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이 움직입니까?
사람은 자기의 생각과 경험을 따라 움직입니다.
자기의 생각과 경험을 고수하는 사람은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또 세상의 환경과 상황에 따라 생각이 변하는 사람은 왔다 갔다 합니다.
열왕기하 5장에서 나아만 장군이 나병을 고치러 엘리사를 찾아왔다 요단강에 일곱 번 씻으라는 말을 들고
“내 생각에는…” 하면서 화를 내었습니다.
자기 생각이나 경험과 맞지 않으면 화를 내고, 따르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동의하기 어려웠습니다.
갈릴리 바다와 고기잡이에 대해서는 그가 예수님보다 훨씬 잘 알고 경험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의 생각과 지난 밤의 경험을 따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다른 이들의 말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와 아담은 각각 뱀과 사람의 말을 듣고 범죄하였습니다.
열왕기상 22장에서 아합 왕은 거짓 선지자 사백 명의 말을 듣고 움직이다 죽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입니다.
물론 사람의 말도 들어야 하지만, 그럴 경우 영적 지도자인 목사의 말을 먼저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 가르치고 인도하는 목사의 말을 듣지 않으면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이익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무엇이 내게 이익이 되는가를 따라 움직이고 결정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저주하려 했던 발람 선지가 그런 사람입니다.
가룟 유다도 예수님을 팔았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을 그런 관점에서 소돔 쪽을 선택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사람들이 결정하고 움직이는 이런 요소들과 달리,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였습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성도는 세상의 어떤 것을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입니다.
우리 교회 황은재 아기는 부모들에게 안겨서 가고 싶은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부모들이 데려갑니다.
성도의 삶의 원리는 말씀을 따라 살고, 말씀에 의지하여 행동합니다.
말씀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고, 말씀이 인도하는 대로 순종합니다.
내 생각과 경험, 상황과 여건, 심지어 이익과 거리가 멀어도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복된 길입니다.
말씀을 따라 살면 결코 후회하지 않으며, 실패하지 않습니다.
(여호수아 1:7-8, 열왕기상 2:2-3 참조)
나의 생각과 경험을 따라 살면 실패하고, 빈 배로 돌아옵니다.
실패에서 일어서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온전한 순종으로 다시 시작합시다.
내가 선장인 배는 빈 배이지만, 주님이 선장이신 배는 만선(滿船)입니다.
** 7/5 주일 ** 깨어 기도하라 (마태복음 26:36-46)
성수대교 붕괴사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재난 영화의 원조격인 타워링, 최근(6/27) 중국 상해에서 발생한
아파트 붕괴사고 등은 부실공사가 그 원인입니다.
규격 미달의 재료를 사용하거나, 필요한 양만큼 제대로 사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믿음과 신앙생활에도 기도가 부족하면 부실공사처럼 되고 맙니다.
기도는 성도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고, 능력있게 하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도가 부족하면 믿음이 약해지고, 신앙생활이 무너지기 쉽습니다.
치과에 가면 이 닦는 법으로 3⋅3⋅3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9분 정도는 닦아야 한답니다.
그런데 성도들 중에는 이빨 닦는 시간보다 더 기도가 부족한 이들이 많습니다.
청년들이 군대 가면 총 쏘는 법을 배우는 것이 기본입니다.
학생들이 수학을 배울 때 구구단을 외워야 편리합니다.
결혼을 앞둔 신부라면 적어도 밥하는 것은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와 같이 기도는 성도에게 필수적인 기본이며, 기초입니다.
기도가 없거나 부족한 신앙생활은 앙꼬(팥소) 없는 찐빵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세 제자를 데리고 가서 같이 기도할 것을 부탁하셨으나, 그들은 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으나, 제자들은 계속 잤습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잠으로 연결되기 쉽고, 그것은 영적인 잠으로 연결됩니다.
기도는 거대한 산과 같습니다.
지리산은 3개 도에 5개 시군에 걸쳐 있는 엄청난 산입니다.
워낙 크기 때문에 등산 코스가 많고, 각 코스마다 볼 수 있는 경치가 다 다릅니다.
기도의 세계도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성도가 평생 기도하여도 다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크고 깊은 기도의 세계 안에는 놀라운 기적과 은혜와 복의 세계가 있습니다.
기도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는 기도에 대해 아는 것보다 실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현대인에게 있어 중요한 영적 질병은 기도의 결핍에서 옵니다.
그러면 왜 기도하는 않는가?
1) 피곤하기 때문입니다. (43절)
현대인들도 너무 바쁘고 피곤하다보니 기도하지 않습니다.
2) 육신의 지배를 받기 때문입니다. (41절)
이는 육신의 여건과 여러 가지 형편과 환경에 매여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들 합니다. “육신은 원이로되...” 기도하지 않는 핑계거리들이 많습니다.
3) 기도할 줄 몰라서입니다.
손가락의 법칙을 써서, ① 하나님 아버지 ② 감사합니다 ③ 용서해 주세요 (회개) ④ 도와 주세요 (간구)
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으로 하면 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할 이유는 요한복음 14:14 등과 “열려라 참깨!”를 이해하면 됩니다.
그리고 기도는 아름다운 표현보다 진실하고 간절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고,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기도합니다’는 말과, ‘기도하였습니다.’ 하는 과거형은 잘못입니다.
4) 영적인 상황을 몰라서입니다. (41절, 베드로전서 5:8 참조)
성도는 기도해야 능력이 있고, 성도를 미혹하고 시험에 빠뜨리려는 마귀가 있기에 기도해야 합니다.
북한의 김정일이 남한을 함부로 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는 유머가 있습니다.
남한에는 총알 택시, 부대찌개, 대포집(다대포, 왕대포), 폭탄주, 핵가족이 많아서 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마귀가 손대지 못합니다.
기도는 반드시 응답되고, 거절하시는 것도 응답입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세 사람이 간절히 기도했더니, 어느 날 한 가지씩 기도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였습니다.
첫째 사람은, 즉시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둘째 사람은, 예쁜 여자와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고 하여, 그렇게 되었습니다.
셋째 사람은, 앞의 두 사람이 없으니 심심하다고 그들을 다시 무인도로 불러달라고 하여 그렇게 되었답니다.
어떤 남자가 남편 노릇하기도 싫고, 여자는 집에서 편히 지내는 것 같아 여자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한 대로 여자가 되었더니, 며칠 안 가서 힘들어졌습니다.
집안 살림 아무리 해도 표도 안 나고, 하루만 쉬면 엉망이 되어 잔소리 듣고.
남자가 돈 벌어온다고 큰소리치고 거들먹거리는게 아니꼽고, 늘 시중 들기도 귀찮고.
그래서 다시 남자로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였더니 안 된다고 거절당했습니다.
기도하면 다 들어주신다더니 왜 그러냐고 따졌더니 이런 음성을 들었답니다.
“너 지금 임신 중이야.”
기도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며, 오늘 우리에게 엄청나게 부족합니다.
힘써 기도하고, 영적인 잠에서 깨어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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