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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심고 - 해은고택
순심고 문화재지킴이들이 해은고택 봉사활동에 앞서....
해은고택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매원2리 광주이씨 이수영님과 경청하고 있는 순심고 문화재지킴이들...
해은고택 (문화재자료 제275호)
○ 소재지 : 칠곡군 왜관읍 매원리 341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275호
○ 지정일 : 1993년 2월 25일
○ 소유자 : 사유
○ 관리자 : 이수전
■ 문화재 설명
이 건물은 이동유(李束裕, 1768, 1836)가 정조 12년(1788)에 정침을 건립한 가옥이다. 사랑채는 순조 16년(1816)에 건립되었다. 상매(上梅)마을의 산자락 아 래에 남행하여 자리 잡고 있다. 3칸 규모의 평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이 나타난다. 사랑채, 고간채, 정침이 아(亞)형을 이루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는 사당(祠堂)을 설치하였다. 사랑채는 정면7칸. 측면1칸 반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자연석 쌓기하여 기단을 다소 높게 조성한 후 덤벙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기둥은 전면 좌측의 4본만 원주를 사용하였다. 평면은 좌로부터 2통칸 대청, 2칸의 사랑방, 문간방, 중문간이 연접되어 있는데, 대청과 사랑방사이에는 4분합 들문을 달고, 2칸의 사랑방 사이에는 4짝미 서기문을 달아 필요에 따라 4칸을 전통간으로 사용할 수 있게 꾸몄다.
사랑방 배면 에는 출입문을 두어 정침과 연락을 도모케 하였으며, 사랑방과 사랑마루 사이의 뒤로는 가림담장을 설치하여 내외의 공간구분을 확연케 하였다. 3량가로 대량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게한 간결한 결구법을 보이고 있다. 온돌방의 상부의 보는 내진주위에서 합보시켰다.
정침은 정면6칸반, 측면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다. 자연석으로 2자가량 높이 의 기단을 조성한 후 덤벙주초 위에 각주를 세웠는데, 대청을 중심으로 좌로는 안방과 부엌을, 우로는 건넌방을 두었다. 대청 우측의 건넌방은 안사랑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전면에 퇴를 두고 측면으로도 3자반 정도의 넓은 퇴를 설치하고 배면에는 2자 정도의 벽장을 설치하였다. 3량가인데 대량 위에는 제형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는 간결한 구조를 하고 있다.
곳간채는 일반적으로 수장공간으로 꾸미는 것이 상례이나 여기서는 좌측부분에 온돌방을 들여 아래채의 기능을 겸하고 있다. 좌측간은 원래 우물마루를 깔았으나 현재는 정침에서 사당으로 출입하는 통로로 사용하고 있다. 온돌방 우측으로는 우물마루를 깐 고방과 토상의 고간을 연접시켜 곳간채를 구성하였다. 사당은 정침의 우측에 토석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구성하였다. 전면에 퇴간을 둔 3칸 규모의 맞배집인데 전면의 기둥은 원주를 사용하였으며, 2익공으로 장식하였다
■ 찾아가는 길
(버스 이용시) 왜관읍 버스정류장(매원리행)→매원2리 상매마을→해은고택
(자가용 이용시) 경부고속도로(왜관 IC)→왜관읍 삼청리→매원리→해은고택
순심여고-동산재
동산재에 대해 열심히 경청하고 있는 순심여고 문화재지킴이들...
동산재 해설을 해주신 이택 칠곡문화원 부원장님과
동산재 (문화재자료 제503호 )
○ 소재지 : 칠곡군 왜관읍 석전리 661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503호
○ 지정일 : 2006월 2월 16일
○ 소유자 : 광주이씨종중
○ 관리자 : 광주이씨종중
■ 문화재 설명
동산재는 광주이씨 석전문중의 대표적인 건물로서 낙촌(各村) 이도장(李道長) 의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13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 목조 와가(瓦家)의 낙촌정, 장자(長子) 귀암(歸巖) 이원정(李元禎)의 유덕과 공적을 알리기 위해 1903년에 세운 정면 4칸 측면2칸 홑처마 팔작지붕의 목조와가(木造瓦家) 경 암재, 장손(툿孫) 정제(靜齋) 이담명(李聃命)의 별사봉향을 위해 세운 정면4칸 측. 면1칸 홑처마 맞배지붕 목조와가(木造瓦家)의 소암재와 묘실, 대문채, 관리사를 일 괄하여 이름을 붙인 것이다.
재사(齋舍) 와 정사(亭舍) 가 하나의 일곽(一廓) 을 이루 면서 건립(建立) 순서와 세계(世系) 가 역순(逆順l) 이면서도 건축구성상 정연한 위계(位階) 성을 갖는 특이성을 가지고 있고, 대부분의 건물이 초창(初創) 이후 큰 변형 이 없이 유지되어 건립당시의 건축사 연구의 기초(基礎) 자료(資料)로 보존 할 가치가 있어 경상북도에서 기념물적 성격의 문화재자료(文化財資料)로 지정되었다.
약목고-신유장군유적지
더운 날씨에도 열심히 신유장군 유적지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약목고 문화유산지키미들...
더운날씨에도 문화재주변 청결활동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
봉사활동을 마친 학생들이 신유장군유적지 앞에서
내고장 문화재는 내손으로 지켜나갈 것을 다짐하면서...
신유장군 유적 (지방기념물 제38호)
○ 소재지 : 칠곡군 약목면 남계리 산21-1번지외 16필지
○ 지정번호 : 지방기념물 제38호
○ 지정일 : 1982년 8월 4일
○ 소유자 : 평산신씨 종중
○ 관리자 : 새마을문화과
■ 문화재 설명
조선 중기의 무신 신유(1619∼1680)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신유는 인조 24년(1646)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함경북도 병마우후로 있을 때 중국 청나라의 부탁으로 효종 9년(1658) 군대를 이끌고 흑룡강 부근에서 러시아 군대의 배 10척과 270여 명의 군사를 무찌르는 큰 공을 세웠다. 이를 나선정벌이라 하며 장군은 이 원정의 내용을 『북정일기』라는 기록으로 후세에 남겼다. 『북정일기』는 우리나라와 러시아간에 최초의 접촉으로 현지 사령관이 쓴 기록이란 점에서 세계사적인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북삼고 -선봉사 대각국사비
선봉사 대각국사비를 둘러보고 있는 북삼고 문화유산지킴이들...
김영구 칠곡군문화재 해설사님의 해설을 열심히 듣고 있는 학생들...
봉사활동이 끝나고...힘은 들지만 뿌듯한 보람이 느껴진다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 (보물 251호)
○ 소재지 :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산1
○ 지정번호 : 보물 251호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소유자 : 국유(산림청)
○ 관리자 : 칠곡군
○ 수량(면적) : 높이 1.97m, 너비 1.82m
■ 문화재 설명
천태종의 시조로 불려진 고려11대 문종의 넷째왕자인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공적을 찬양하기 위하여 인종10년(1132)에 건립한 석비이다.
고려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귀부(龜趺 : 거북이 모양으로 만든 비석받침대), 이수(이首 : 비석의 몸돌위에 얹은 덮개돌로 이무기나 용의 모습을 새겨 넣음)가 없으나 대석(臺石 : 받침돌)과 비신(碑身 : 비문을 새긴 돌), 개석(蓋石 : 뚜껑 돌)이 아름답게 조형된 것으로 유명하다.
비신을 받친 대석은 아름다운 연꽃무늬가 여러형태로 새겨져 있으며 비신의 위에는 당초문(唐草紋 : 여러가지의 덩굴풀이 꼬이고 뻗은 모양)이 새겨진 개석을 얹었다. 비신은 폭 1.2m, 두께 0.15m, 높이 2.34m이고 개석과 지대석의 높이는 각각 0.6m, 0.56m로 전체높이 3.5m의 큰 규모로 만들어진 비석이다.
비신상단에는 "천태시조 대각국사비명"이란 전서체로 새겨진 제액(비문에 새긴 글씨) 양 옆에는 봉황새 한 마리씩 날고 있으며, 비신둘레는 폭 8㎝가량으로 당초문이 새겨져 있다. 비신의 우측 비면에는 "남숭산 선봉사 해동천태시조 대각국사비명"이라고 쓰여 있고 옆으로 비문이 시작되고 있는데 이 비문은 당대의 문장가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 임존(林存)이 짓고 인(麟)이라는 스님이 글씨를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10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흘렀어도 비문과 문양이 뚜렷하고 선명하게 남아있어 누구나 그 보존상태가 양호함에 놀란다. 그것은 비석의 재료가 백령도 부근에서 나는 바다돌 때문이라고 한다. 바다돌은 육지돌과는 달리 철분이 적어 갈라짐과 부서짐이 없다고 한다. 그래서 대각국사비에는 6.25전쟁시 총에 맞아 부서진 자국을 제외하고는 말끔하다.
현재 비석이 서있는 곳에서 남서쪽 약 200m 떨어진 곳에 선봉사가 창건되고 비는 지금 서 있는 곳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선봉사는 소실되고 이 비는 땅에 묻혀 있다가 1922년경 발견하게 되었다.
■ 찾아가는 길
(버스 이용시) 왜관읍버스정류장(구미행)→약목삼거리→보손리→숭오리→선봉사대각국사비
(자가용 이용시)
•경부고속도로(왜관IC)→왜관읍→왜관교→약목삼거리→보손리 평촌마을(우회전)→숭오리-선봉사대각국사비
•경부고속도로(남구미IC)→약목삼거리→보손리 평촌마을(우회전)→숭오리→선봉사대각국사비
칠곡고 - 신동입석, 사양서당
봉사활동에 들어가기전 잠시 사양서당 안내문을 보며 문화재를 공부하고 있는
칠곡고 문화유산지킴이들...
1. 사양서당 강당 (문화재자료 제117호)
○ 소재지 : 칠곡군 지천면 신리 43-1
○ 지정번호 : 문화재자료 제117호
○ 지정일 : 1977년 12월 22일
○ 소유자 : 광주이씨 종중관리자
■ 문화재 설명
이 건물은 조선 중기의 문인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학문연마와 강학 장소였던 사양서당의 강당이다. 당시 향인들이 현재 대구 북구 옛 칠곡면 사수동(泗水洞)에 한강을 기념하기 위해 효종 5년 (1651)에 창건하여 한강을 주벽(主壁)으로하여 석담(石潭) 이윤우(李潤雨)를 배향(配享)한 서원이다. 창건 당시에는 묘우 (廟宇)와 강당, 폄우제 (貶愚齋), 정완재 (訂頑齋), 봉하문 (鳳下門), 양현청 (養賢廳, ) 주고 (廚庫)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고종 5년 (1868)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지금의 강당인 경희당만 남게 되었다. 숙종 20년 (1694)에 현재의 장소로 이건하면서 송암 이원경 (李遠慶)을 별사 (別祠)에 함께 모시게 되었다. 경희당은 북향으로 정좌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어칸의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좌우로 온돌방을 두고 좌우 퇴칸의 전면에는 뒷마루를 두었다. 막돌기단 위에 자연 석주초를 놓고 기둥을 세웠는데 전면에만 원주를 사용하였고 나머지는 방주를 사용하여 주두 위에는 니익공으로 장식한 흩처마 맞배지붕이다.
■ 찾아가는 길
(버스 이용시) 왜관읍 버스정류장(지천행)→신동→신4리 윗갓마을→사양서당
(자가용 이용시) 경부고속도로(왜관IC)→대구방면(4번국도)→지천면소재지→923번지방도→신4리 윗갓마을→사양서당
사양서당을 청소하고 있는 칠곡고 문화유산지킴이들...
2. 신동입석 (경북기념물 제29호)
○ 소재지 :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 산103
○ 지정번호 : 경북기념물 제29호
○ 지정일 : 1972년 12월 29일
○ 소유자 : 사유
○ 관리자 : 칠곡군
○ 수량(면적) : 높이 4.5m, 밑둘레 2m, 면적 897㎡
■ 문화재 설명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창평리에 있는 선돌이다. 선돌은 선사시대 큰돌문화[巨石文化]의 한 형태로 무덤을 표시한 묘표(墓標), 마을 사이의 경계나 구분을 나타낸 경계표, 마을을 지켜주는 조상신이나 수호신, 마을의 액운을 막아주는 풍수비보신(風水裨補神)의 기능을 가진다.
이 선돌은 주위에 큰 돌무덤(支石墓)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상신이나 묘표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선돌의 재질(材質)은 사암(砂巖)으로 높이 약 4.5m, 둘레 약 2m로 규모가 큰 장방형 입석이다.
이 입석 동편에서 민무늬토기[無文土器]와 유구석부(有溝石斧)가 밭을 일구었을 때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청동기시대 유적으로 추정된다.
선돌의 밑부분에는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이라는 불경 한 구절이 새겨져 있어 후대에 마을사람들이 민중불교의 신체(神體)인 미륵님으로 신앙하였던 것 같다.
■ 전 설
지천면 창평리에서 남북으로 길게 뻗어내린 산기슭(강정듬)에, 선사시대의 선돌(지방기념물 제 29호)이 하나 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이 선돌(돛대 바위로 불림) 서쪽 마을(웃갓, 선돌과 800m 거리)에는, 조선 선조때 강씨라는 부호가 살고 있었다. 슬하의 5형제가 모두 등과하고, 토지와 재산이 많았다. 강씨 집에는 큰 바위 다섯 개가 울안에 있었는데, 집안에 큰 행사가 있을 때에는 5형제가 차고 있던 관인을 이 다섯 바위 위에 올려 놓았다 하여 오인석(또는 오방구)이라 불렀다.
강씨 문중에서는, '강정듬'에 [구슬정]이라는 정자를 지어놓고, 문중 모임이나 손님 접대 장소로 사용하였다. 정자와 강씨 본집 간에는 길게 설렁줄을 매어놓고 신호로 연락하였다.
그러나 강씨의 세도가 심하여, 이 정자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자주 잔치를 벌였다. 강씨의 하인들까지도 주인의 세도를 믿고, 지나가는 행인이나 걸인이 찾아와도 오만하게 굴면서 푸대접하기 일쑤였다.
어느날, 이 정자에 스님 한 분이 나타나 이들을 나무랐다. 그러나 오히려 하인들에게 끌려가 두들겨 맞고, 돛대바위에 묶여 있다가 석양이 되어서야 풀려났다. 스님은 말 없이 그 자리를 물러나, 마을에서 탁발하던 중 강씨 본집에 들어가게 되었다. 정자의 손님 접대에 하도 애를 먹어오던 강씨부인은 한탄조로, "시주는 얼마든지 드리겠지만, 제발 정자에 손님이 안 오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스님은 시주를 받은 후 마당에 있던 짚단에서 짚대 하나를 뽑아 들고, 다시 정자 뒤로 올라가 자기가 결박당하였던 돛대바위를 짚대로 후려쳤다. 그러자, 단번에 위 토막이 부러져 멀리 날아가고, 또 한 번을 치니 중간부분이 부러져 정자 쪽으로 떨어지면서 선혈이 흘러 나왔다. 잔치에 흥청거리던 사람들은 유혈이 낭자한 돛대바위를 보고, 그제야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쳤으나 이미 때는 늦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은 얼마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쳐들어오자 강씨 가문의 부인들은 바래덤(지금의 낙화암)으로 도망하여 투신자결하고,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과연 부인이 소원한 대로 손님은 오지 않게 되었으나, 후세에 새로운 강씨들이 문중을 일으켰다 한다.
원래 이 마을은, 그 모양이 배가 돛을 달고 가는 형상이어서 행주형 마을이라 하였는데, 돛대(선돌)가 부러졌으니, 배가 항해할 수 없게 되어 망하게 된 것이라 한다
신동입석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학생들
이날 봉사활동은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5개 고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참여하여 각자 자기 학교담당 문화재를 청소하고 답사도 병행하였다. 또한 문화재 보존실태를 모니터링하고 문화유산답사기를 까페에 올려 우리의 문화재를 알리는 등 온라인상의 홍보활동도 펼쳤다. 특히 학생들이 방문하는 문화재 주변에는 이미 깔끔하게 제초와 청소가 잘 되어있어 칠곡군의 문화재 보존노력이 돋보였으며 학생들의 눈에도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봉사는 그저 주는 것이 아니고 준것보다 더 많이 받는 것, 오늘 학생들의 가슴엔 새로운 추억하나가 보석처럼 들어앉았길 기대해본다
이날 문화재해설을 맏아주신 이택 칠곡문화원부원장님,매원 광주이씨 종친 이수영님, 김영구 칠곡군문화재 해설사님, 선봉사 주지스님과 차량봉사를 해주신 김미순,이윤영,신희정 청소년강사님과 자원봉사센터 문선경,김도연,김찬문샘도 모두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