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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례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라! 2
124군 부대를 능가하라! 5
낙오 없는 훈련을 향해…… 8
남한 최초의 인민재판식 처형 12
해골 물과 양귀비 15
체포되면 자폭하라! 19
혈서로 쓴 “충성” 두 글자 21
혁띠를 잘못 끼우다 23
북파 공작 명령만을 기다리다 25
2부. 실미도의 혈기
“김일성이가 내 모가지를 딴다 했단 말이야, 임자들 그 말을 어케 생각하나?”
그 나이에 김일성은 무엇이고 충성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이미 길들여진 군인이었다.
대학을 가고 싶고 유학을 가고 싶어 입대한 공군이지만 이미 3년여 세월동안 세뇌되고 조직적인 시스템에 길들여진 충성군인 그 자체였다.
이윽고 최고의 권력자는 김방일 중사의 계급장을 떼어버리고 소위 계급장으로 부착시켰다.
공군 제2426전대에서 모든 과정을 수료한 김방일은 목적부여 만을 기다려왔었다.
켈로 부대 출신 교육대장 김준철 준위의 호출이 왔고 부대장실에 달려갔다.
이미 국가에 충성을 다집하고 국가관이 확고히 확립된 하사관이었다.
김준철 준위의 지프차를 타고 서울 외곽으로 빠져서 인천2426전대로 돌아가 군장과 개인사물을 꾸려 다시 차에 올랐다.
침묵이 흘렀고 김방일 소대장은 모든 교육 훈련과정이 뇌리를 스쳐갔다
어느덧 하인천 부둣가에 이르렀고 파견초소에서 잠시 머문 뒤 공작선에 올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평화로운 바다는 오후의 석양을 받아 붉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선실에서 나와 갑판대에서 멀리 바다를 하염 없이 바라보았다.
원래 이름은 김상진, 실미도 부대로 파견명령이 부여되면서 원일로 바뀌었고, 실미도 사건이후 지금의 김방일로 이름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때는 1968년 7월 1일. 3개월 동안 공작원들에게 북파공작능력을 배양시켜야한다.
1.21 사태 때 남파공작요원들의 산악 행군 주파속도는 시속 11.7 킬로미터 였다.
과연 이를 능가하는 공작원을 배양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한참 망망대해를 항해 한 듯 했으나 곧바로 무의도 우측으로 길쭉이 늘어선 실미도에 다다랐다.
산 정상에 보이는 망루에만 보초병이 서있고 막사가 눈에 띄었다.
이곳이 정녕 김일성 주석궁을 폭파해야할 공작원의 훈련장소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모든 것이 장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손으로 직접 만들고 다듬은 어색하고 미흡한 시설이었다.
서울 경기 충청권에서 여러 경로를 통해 북파공작원으로 차출된 훈련병들은 처음엔 오합지졸이었다.
처음에 두세 명씩 입대되던 공작원들은 그럭 저럭 지시에도 잘 따르고 고분고분 하였으나 십여 명이 넘어서고 파주 쪽 안성찬 일행이 오면서부터는 거 칠어지기 시작했다.
소대장 중 가장 엄격하고 빈톰없는 권 소대장이 시범 케이스로 한명의 머리위로 권총 한방을 쐈다.
안성찬은 순간 아무 기록도 없이, 호적도 버리고, 근거도 없는 입대를 자청한 것이 생각났다.
여기서 순응하지 않으면 개죽음 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a조 b조 c조를 이루고 a조 소대장은 권용세 소위, b조 소대장은 하수용 소위, c조 소대장은 김방일 소위가 맡았다.
조장은 a조 구봉성 조장, b조 강봉구 조장, c조 조장은 안성찬이 맡았다.
그중 c조 조장은 해병대 출신이고 나이도 있고 리더십이 있어 보여서 수뇌조장을 맡았다.
조원을 잘 통솔하기위해선 조장과 일체감을 가져야만 했다.
그러나 교관과 훈련병 사이였기에 인간적인 접근을 시도하는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친구를 구하기 위해 격투 끝에 교도소 신세를 지게 될 것 같았는데, 징역살이를 면죄해주고 연좌제의 사슬에서 풀어주고 평생을 보장해준다는 약속 때문에 왔습니다.”
“나도 공군에 입대할 때는 대학 보내주고 유학까지 보장해준다는 특전 때문에 청춘의 꿈을 안고 입대했는데….”
“그렇지, 하지만 국가와 조국의 꿈은 통일 아닌가? 세부적으로는 주석궁을 폭파하는 김일성 제거의 꿈을 이루기 위해 우리 개개인의 꿈이 모인 것 아닌가?”
“어찌 했든 우리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목적 달성을 이루어 내자.”
빈틈없고 엄격하며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소대장, 인간적인 교감을 통한 카리스마로 통솔하는 소대장,
이중 김방일 소대장은 인간적인 배려로 훈련의 성과를 높이려는 통솔 쪽으로 기울어졌다. ˙
제식훈련 (군가제창), 독도법, 각종 화기학, 습격, 매복, 장애물 돌파, 유격훈련, 총검술, 호신술, 폭파임무, 체력단련, 수영훈련, 생환법, 사격 등등이었다.
럭키세븐의 날짜에 맞췄다. 작전 성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였다.
이젠 어느 정도 공작원들의 길들이기는 끝이 났고 머리를 삭발시키고 군복을 입히고 나니 질서 있는 군인들이 되었다.
UDT 과정, 낙하산 훈련, 특수전의 교육경험과 정신력과 신체가 뛰어난 군인들로 선발된 교관요원들에게 순종하는 군인들이 되었다.
부대창설식에서 소대장에게는 4, 5구경 권총, 북한 떼떼(T.T) 권총이 지급되고 공작원들에게는 칼빈 M2소총과 기관단총 적화기인 PPS기관단총 2정씩 소유하게 되었다.
“우리 특수목적 684군부대 북파공작원은 124군부대를 능가하는 최고의 대원이 되어야 한다. 알았나!“
68년 1.21 사태 이후 정부정보기관에서는 보복조치의 강력한 선언을 하였다.
그 결과로 니콜라우스 KELO 부대 출신들로 구성된 공군 정보대가 별동대 처럼 창설되었다.
중앙정보부만이 직통으로 연결된 공군특수 목적부대 김일성 주석 궁폭파부대인 것이다.
교관요원들은 이미 첩 보대에서 UDT훈련, 낙하산 특수전의 훈련을 받아왔고 군인정신이 투철하고 신체가 강한 공군들로 차출되었다.
소대장들은 목적 달성 시 장교임관의 특혜가 약속되었다.
그리고 각 소대장은 투철한 국가안보의 의식 전환을 위해 국가 최고 통솔자인 대통령 앞에서 현재의 계급장을 떼고 소위 계급장을 붙여주는 특명식이 있었다.
김방일 소대장은 최고의 통솔자 각하가 눈에 아른거렸다.
124군부대를 능가하여 주석궁을 폭파하고 돌아와야 한다.
훈련은 가히 짐작하고 남을 만큼 혹독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느 부대이든 고문관이 한, 두 명은 있는 법 …발 틀린 공작원이 나왔다.
B조 소대장 하수용 소위가 발 틀린 공작원을 호출하였다.
서있는 김종수를 깎아 만든 몽둥이로 그 자리에서 대가리를 후려쳤다.
김종수는 기절할 듯 휘청거렸으나, 곧바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모두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완벽한 제식 훈련이 이루어졌다.
김종수공작원은 다른 대원에 비해 체력이 다소 떨어졌다.
무장구보를 비롯한 기타훈련에서도 낙오를 밥 먹듯 했다.
어느 날 하수용 소대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김종수 이래 가지고 주석궁을 폭파하고 돌아 올수 있겠는가?”
“살아서 돌아오려면 강인한 정신과 강력한 체력이 있어야 한다.”
실미도 북쪽 끝 선녀바위 사이 2미터 깊이의 바닷물에 집어넣고 10여분 이상을 밟고 있었다.
다시 나오라고 해서 모래밭에 구덩이를 파서 목만 내놓고 묻은 후 밤을 새웠으나 살아있었다.
훈련에 차질이 예상되었으나 하 소대장은 할 수없이 보조공작원의 일환으로 야구부 선수의 후보 선수처럼 데리고 다녔다.
일과 시간표는 6시 기상해서 점호, 6KM산악구보, 조식, 조회, PT체조, 오전일과, 중식, 오후 일과, 석식, 휴식, 점호, 취침으로 이어진다.˙
김방일 소대장은 석식 후 김 종수를 불러내어 평행봉에서 잠시 면담을 나누었다.
“신념을 가져라! 신념만 있으면 못해 낼 것이 없다.”
그러면서 김방일 소대장은 새벽엔 신문배달, 낮에는 공장일, 밤에는 야학을 하면서, 끼니로 교회에서 죽을 타 먹으며 지내왔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김방일 소대장은 친근한 소리로 안성찬을 앉게 하고 같은 공작원 입장에서 동지애로 김종수를 잘 돌봐주도록 배려했다.
김방일 소대장은 훈련병들을 다루는 소대장이기 이전에 지극히 인간적인 정 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김방일 소대장이 주의사항을 들려주고 하수용 소대장이 시범을 보였다.
특수훈련 교육만 주로 받아왔던 하 소대장은 노련하게 외줄타기를 끝냈다.
3개 조장들이 건너고 나머지 조원들은 무리 없이 잘 통과를 했다.
몇 명만이 남아 있을 때 우장민 공작원이 건너갈 차례였다
아니나 다를까. 중간쯤 건너다가 중심을 못 잡고 한바퀴 돌더니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공포의 높이인 지상 11미터에서 화강암으로 된 큰 바위와 돌덩이들이 널 부러져 있는 바닥 아래로 떨어진 것이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당장 다친 우장민 공작원이 불쌍했다.
“응급처치 하고 내무반으로 데려가라! 심각하면 후송조치를 취해라.”
이찬주 공작원이 중간쯤 잘 건너 왔을 때 또 우장민 대원처럼 중심을 잃고 휙 돌아 매달리게 되었다.
조장들과 함께 가마니로 밑에서 받을 준비를 하고 있는 동안 이찬주 공작원은 팔에 힘이 빠져 줄을 놓았다.
우장민, 이찬주 대원을 하인천 병원으로 긴급 후송하였다.
두 대원의 부러진 다리가 정상적으로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라 공작훈련을 지속하기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었다.
보안상 민간인으로 되돌릴 수도 없어서 내무반으로 돌아온 두 대원은 모두 취사병으로 내정 되었다.
낙오된 공작원을 북파 침투시킬 수도 또한 고향으로 되돌려 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이것은 곧 보안의 이유로 참혹한 상황을 예견할 수 있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이 두고두고 엉켰다.
아군의 제식훈련이 어느 정도 기틀이 잡히고 체계 있게 훈련이 이루어지자, 곧 북한군 제식훈련을 하였다.
양팔과 다리의 높이가 많이 올라가 어색하긴 했지만 최대한 적응을 시켜야했다.
제식 훈련 시 부르는 군가는 처음엔 우리군가를 부르고 다음에는 북한 군가를 불렀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욱, 압록강 굽이굽이 피어린 자욱, 오늘도 자유 조선 꽃다발위에 역력히 비쳐주는 거룩한 자욱, 아, 그 이름도 그리운 김 일성장군….”
지도와 나침판을 가지고 방향감각 그리고 산 능선과 달과 별의 위치. 그리고 지형, 지물 등을 기억해내고 판단하는 훈련이다.
낮에 기본 독도법 이론교육을 마치고 실습으로는 지도와 나침반을 가지고 지시된 각 지점을 2인1조씩 조별로 찾아가는 훈련이었다.
야간 19:00 시에 출발 이튿날 06;00 까지 집결지에 전원 집결해야 했다.
야간 독도법훈련을 마치고 아침 6시가 되어 부대로 돌아오려고 인원 점검을 하는데 5조인 최공수, 최장석이 보이지 않았다.
조교들에게 물어보니 중간 통과지점은 거쳐 갔다 하니 안개가 자욱해 길을 잃어버린 것으로 판단 안개가 걷히면 찾아올 것으로 기대하고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오전 8시가 되어 안개가 걷혀도 도착하지 않았다.
김방일 소대장은 전 대원을 시켜 “최장석, 최공수 이름을 부르며 섬 전체를 다 찾아다녔으나 찾질 못했다.
아무래도 김방일 소대장은 결론을 내려야 될 것 같았다.
이때 마을 부녀자가 달려와 총을 무장한 군인 2명이 자기 집에 들어와 난동을 부리며 소주를 들이키고 있다고 했다.
전 대원과 기간병은 국사봉에서 내려와 실탄을 장전하고 민첩한 동작으로 돌격, 방문을 열어 제쳤으나 아무도 없었다.
부엌으로 들어가 아궁이를 들여다보니 아궁이 속으로 들어간 흔적이 보였다.
총을 겨누고 구들을 몇 장 드러내니 그 속에서 최공수 대원과 최장석 대원이 기어 나왔다.
하 소대장움 화가 나서 참지 못하고 칼빈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통을 찍었다.
그리고는 와이어 줄(통신선)로 결박하여 부대로 연행했다.
포박하여 오는 길에 무의도 주민 아주머니가 울면서 따라와
“내동생도 군대에 가있는데 용서해주세요” 하고 부탁하는 것이다.
“부대에서 알아서 처리하니 걱정 말고 돌아가세요.”하고 하 소대장이 돌려보냈다.
부대로 돌아와 훈련도중 이탈한 이유를 물었더니 훈련이 너무 힘이 들어 탈출하고 싶었다 한다.
하 소대장은 국가의 특수목적인 주석궁 폭파 작전에 차질이 우려되어 묵과할 수가 없었다.
처음 창설식에서도 명령하였듯이 배신자는 군법에 의하지 아니 하고 처단하기로 되어 있으니 도리 없었다.
다른 공작원들까지 동요될 수 있는 계기점이 된다는 생각에 동료 공작원들에게 맡겨졌다.
아니면, 인민재판의 형태로 전 대원들의 손에 몽둥이가 들려져있고 잠시 후 처참한 비명소리와 함께 그들은 습을 거두고 실미도 산등성이 한 켠에 소리 없이 묻혔다.
아무도 그들을 보며 울어 줄 수 없었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떠져 물울 수 조차 없었다.
아마 그들은 사람의 대접을 받을 수 없는 공작원의 신분이었다.
그는 국가의 존재를 인정하고 국가라는 포괄성에 개인의 비애는 도사려 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처럼 분단이라는 미명아래 파생된 아픔을 실제 므껴보기는 처음이었다.
낮에 죽어가던 두 탈주범의 얼굴이 떠올라 밤새 뒤척이다 애국과 충성만을 되뇌였다.
부정한 힘 앞에 저항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를 모두가 알기 때문이 었다.
실미도 북파공작원 부대는 정부정보기관으로부터 목적 달성을 위해 부여된 기간은 훈련기간 3개월 뿐이었다.
김방일 소대장은 명령을 하달 받은 군인으로서 이 목적 달성을 위하여 한시라도 고삐를 늦출 수가 없었다.
산악행군은 김신조 124군부대가 시속 11.7킬로미터 행군속도 였는데, 실미도 북파공작부대는 산악행군 중 7부 능선을 선택해서도 시속 13킬로미터 행군속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레이하운드는 질주속도가 시속 65킬로미터로 네발 달린 동물 중 치타 다음으로 빠른 경주견이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레이하운드는 사냥견의 표본으로 받아들여질만큼 뛰어난 사냥기술을 발휘 하였다.
그레이하운드는 후각이 아니라 시각을 사용하여 사냥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바람처럼 질주하는 회색빛 털 색깔의 그레이하운드는 오늘날 유럽, 호주, 미국 등지에서 스피드를 겨루는 스포츠로 각광을 받고 있다.
그레이하운드의 질주속도가 평지에서 1초에 16-17미터를 달리고 북파공작원이 48KG 완전군장으로 산악을 1초에 7-8미터를 달린다면 가히 놀랍지 않은가.
평지에서 군장 없이는 그레이하운드의 질주속도와 비슷하다고 보면 북파공작원의 행군속도를 보고 무의도 주민이 무섭다고 표현할만하다.
또한 이러한 북파공작원의 사격은 하루 1인당 450 발 정도로 소모했고 단검 던지기, 도끼던지기, 유격훈련, 독도법, 생환법 호든 훈련과정이 진척을 보이기 시작했다.
큰 지적사항은 없을 것 같고 정신 훈련만 더 강화시키고 마무리 하려는데 갑자기 대부분의 공작원들이 팬티를 자주 세탁하는 것을 보았다.
몇 명을 호출하여 점검해보니 사회에 있을 때 이미 성병이 걸려 들어온 공작원이 많았던 것이다.
어떤 공작원은 걸음걸이도 정상이 아니었고 심지어는 유격 시 로프를 탈 때 성병으로 인한 고통을 줄이기 위해 붕대로 칭칭 감고 훈련에 임할 정도로 증세가 심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 각조 소대장들과 상의를 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항생제를 복용하고 페니실린 주사를 투여해도 그때뿐이지 효과가 없었다.
그렇다고 병원에 나갈 수도 없었고 사안이 심각해졌을 때였다.
“단결! 안성찬! 소대장님께 드릴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성병에는 무덤을 파내 해골 고인 물을 마시면 낫는다고 합니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동네 어른들에게 옛날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김방일 소대장은 곧 하수용 소대장과 상의하여 실미도 섬 남쪽 끝에서부터 파헤쳤다.
“안 조장이 해골 물을 마시면 성병이 낫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후 성병이 심해 고통을 받는 대원부터 나누어 마셨다.
그때 하수용 소대장은 스치듯 좋은 아이디어가 며올랐다.
그렇지 이 해골로 신념을 갖게 하고 담력을 키워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뼈들은 갈아서 전 대원에게 복용시켜 조직력을 강화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곧 하산하여 해골과 대퇴부 뼈를 바닷물에 깨끗이 씻어 CP앞 암벽 바위에 X자로 걸어두고 “우리의 신조” 라고 글을 썼다.
그리고 군인의 길 대신 우리의 신조라는 구호를 만들어 외치게 했다.
내용은 “해골이 될 때까지 결사적으로 싸워 승리하자”였다.
나머지 뼈들은 절구에 찧어서 가루를 내어 결사항전의 단합을 위해 전 대원들에게 나누어 한 봉씩 무조건 복용시켰다.
또 성병 퇴치와 이질 장티푸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교육대장은 양귀비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양귀비는 마음대로 경작을 할 수 없는데 개인당 20그루 이하로 재배하면 적발대상에서 제외된다.
팔, 다리 뼈가 부러지는 것은 예사이고 하루에 한대원이 사격하는 탄약이 수백 발이 되고 하니, 총기사고나 유탄사고가 많았다.
칼빈 총탄이 어깨를 뚫고 지나가고 기관단총 총탄이 옆구리를 스친다.
또한 장애물 돌파장 같은 곳에서는 공작원이 출발하면 기관총 사격수가 50미터 후방에서 총구를 열어놓고 고정사격으로 시간이 되면 자동적으로 방아쇠를 당긴다.
주파통과기록이 조금만 늦어도 관통상을 입을 수밖에 없다.
공작대원들의 몸놀림은 가히 맹수, 비호 같이 빠르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바로 출발해서 첫 번째 관문은 외 통나무 다리 건너기.
통나무가 기우뚱 돌면 여지없이 진흙탕 물에 빠지고 시간이 초과된다.
수류탄투척은 제1, 2 안전핀을 뽑은 다음 시간이 3초정도 흐른 뒤에 던져야 바로 터진다.
수류탄 폭파직후 참호로 굴러서 들어간 둬 다시 낮은 포복으로 철조망까지 접근하여 철조망 통과를 마쳐야 한다.
쏜살같이 50미터를 달린 뒤 공중사다리 통과를 위해 5m높이를 기어 올라가야한다.
이때는 발에 사다리가 동물적 감각에 의해 닿아, 통과를 해야 다리가 빠지지 않는다.
내려와서 사격을 가한 뒤 다시 사다리를 기어올라 종착점까지 도달하면 된다.
이때 성적이 50프로이하는 몇 번이고 반복하여 도달치에 이르게 한다.
공작원들은 이러한 훈련의 성과를 올리기 위해서 평상시의 기초체력이 필요했다.
내무반 생활시 화장실과 세면실, 우물가를 오갈 때마다 턱걸이, 평행봉을 해야만 했다.
이번 주에 50번 턱걸이를 하면 다음주는 55번씩으로 늘려 나가야 했다.
테스트 결과 달성 못한 횟수만큼 몽둥이로 ‘빠따’ 를 맞았다.
이런 강제성의 결과 공작원의 체력은 날이 갈수록 강해졌고 사기 또한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아침 조회 때마다 훈시를 하고 말미에 “체포되면 자폭하라” 는 구호와 함께 끝을 냈다.
매일매일 세뇌를 시키다 보니 체포되면 자폭해야 된다는 것이 머리 속에 박혀 버렸다.
실미도 북파공작원들의 기본훈련이 거의 끝나가고 낙하산 훈련을 진행해오고 있었다.
김방일 소대장과 하수용소대장은 이미 낙하산 경력 1백회를 돌파한 백 전노장들이었다.
김방일 소대장은 늘 훈련받아 왔던 대로 모든 대원을 바닥에 붙게 했다.
어둠 속에서 고개를 들지 못하게 제지하고 누워있게 했다.
“낙학산 강하훈련을 받아야 되는데 정신없이 잠만 자고 있어” 교육 대장이 었다.
“부대장님! 사격 끝났습니까? 전 대원들 일어섭니다.”
즉시 소등했던 불을 켜고 훈련군장은 신속히 갖추고 출동정렬을 했다.
“출동을 앞둔 공작원들의 정신상태가 썩었다. 이 상태로는 임무수행을 할 수가 없다. 모두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맹세로 혈서를 써라!”
어리둥절해 있는 소대장들에게 교육대장은 29개의 면도칼과 백지를 나누어주었다.
막상 칼로 손을 썰려면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법이다.
한참을 끙끙대기만 하고 피가 혈서를 쓸 정도로 흐르는 대원이 없자 부대장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안성찬 공작원이 제일먼저 기관단총으로 왼손 약지를 찍었다.
하얀 백지에 선혈 흥건한 붉은 피로 “충성”이라는 두 글자를 명확히 썼다.
그리고 밑 부분에 자기 이름도 붉게 혈서로 써 넣었다.
그러자 이어서 각각의 공작원모두 자기 자신의 약지를 찍어대기 시작하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김방일 소대장 자신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경기도 과천 청계산에서 낙하산 훈련을 부대장의 정신강화 훈련 덕분에 무사히 마쳤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6시기상과 동시에 기상 점호를 마치고 훈련출동을 준비하는데 하수용 소대장 당번병이 소대장의 훈련복 바지에 혁띠를 반대로 끼웠다.
늘 실수없이 소대장의 관물이며 총기수입 등등을 빈틈없이 처리하는데 참으로 어이 없는 실수를 하였기에 화를 버럭 내었다.
오덕영은 총기가 있고 머리가 뛰어나서 당번병이 되었다.
훈련성적도 우수하고 판단 능력도 좋아 조교 역할을 해주어 비서처럼 옆에 늘 동반하여 다녔다.
이날도 서해바다의 수온이 내려가기 전 수영훈련을 도달치에 이르게 해야 하기 때문에 수영훈련 계획을 앞당겼다.
마침 하나깨 해수욕장도 폐쇄되어서 수영훈련하기에 적절했다.
구름이 낀 흐린 날이라 팬티 바람으로는 서늘했지만 그동안의 체력강화로 전 대원이 무장한 채 4KM 수영은 거뜩히 해낼 수 있는 날씨였다.
U D T 체조를 사 오 십분 실시하여 땀을 흘리게 한 뒤 바다로 들여 보냈다.
반환점에 모터보트를 정지시켜 놓고 중간에는 사고에 대비해 고무보트를 기간병이 타고 대기하고 있었다.
2명 1조로 수영훈련을 시키고 모래사장에 도착하면 다음 조를 보내는 형태로 훈련을 했다.
그런데 바닷물이 너무 차가워서 수영을 마치고 돌아온 대원들이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있어서 수영훈련을 중지하려다가 진행된 훈련이고 하니 하는 수없이 계속 강행을 했다,
당번병 오덕영 대원 차례가 되었다. 바다로 뛰어드는 오덕영에게 “괜찮아!” 하니까 “예! 괜찮습니다.” 하면서 출발했다.
모래사장에 서서 반환점을 돌아오는 오덕영 대원을 바라보니 지쳐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소대장님”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 쳐다보니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하 소대장은 황급히 바닷속으로 뛰어들었으나 오덕영 대원은 떠오르지 않았다.
전 대원들이 동원되어 잠수를 하고 뒤져보았지만 찾질 못했다.
수심은 9미더 정도. 2시간 뒤 썰물로 바닷물이 밀려난 뒤 수색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오덕영은 사고지점에서 1백 미터 떠내려가 바위틈에 끼여 숨져 있었다.
체온은 아직 남아있었으나, 물은 먹지 않은 것으로 보아 심장마비인 것 같았다.
다음날 엄숙히 장례식을 거행하여 실미도 남쪽 끝 지점 양지쪽에 묻었다.
작전이 개시되기도 전에 벌써 3명의 대원이 북파침투목적 달성도 못해보고 의미없는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김일성 주석궁 폭파목적을 위해 북파공작을 위한 훈련시한은 3개월이었다.
9월로 접어들자 계속되는 맑은 날씨가 매일 질식할 것 같던 무더위를 누그려 뜨렸다.
섬에서의 여름은 모두가 지치고 비참하고 슬픔마저 느끼게 했다.
나름대로 고안해낸 침투 탈출 방법으로 침투훈련까지 마쳤다.
우리의 신조와 “체포되면 자폭하라”, “김 일성 주석궁을 폭파하라”, “124군부대를 능가하라”등에 따라 세뇌되고 고정되었다.
정부 정보기관의 예산편성이 좋아서 매일 식단에는 고기가 급식되고 담배는 최고급인 파고다 아리랑이 지급되었다. 봉급은 소비할 데가 없어서 보관하기가 골치 아플 정도였다.
부대편성도 교육훈련을 총괄하는 실미도 684부대 최고책임자인 교육대장이 있고 교육훈련을 직접 지휘하고 공작원과 함께 내무반에서 기거하는 각조 소대장이 있다.
그리고 통신병 ,보급 ,행정, 의무 등의' 기간병과 공작원수와 동일한 경비병 이 파견되었다.
소대장은 하루의 모든 교육일정을 소화하고 교육일지를 작성, 공작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 감독했다.
취침 시에는 실탄이 장전된 권총을 베개 밑에 두고 잔다.
이렇게 철저하게 훈련을 해왔는데 교육대장으로부터 북파침투명령은 하달되지 않았다.
소대장은 소대장들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느냐에 따른 결과를 보고 싶었고 공작원은 공작원대로 충천된 사기만큼 김일성 목을 따오고 싶었다.
벌써 가을이 오고 있었다. 연녹색의 아름답던 숲들은 어느 사이 갈색 옷으로 갈아입고 섬 전체가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섬이라서 육지보다도 가을이 한 발짝 더 빨리 느껴지는지 바닷가의 남서풍은 서늘함을 감추지 못하고 세차게 불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계절이 바뀌어오는데 정녕 명령은 하달되지 않는 것인가?
김방일 소대장은 혼잣말로 중열거리며 북녘 하늘 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