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꽃양귀비 모종과 벌개미취 모종을 옮겨 심었다.
이른 봄, 작년의 실패를 교훈삼아 고운 흙에 모래를 섞고 재를 뿌린 다음, 햇볕 가리개를 하였더니 수많은 새싹이 탄생한 것이다. 꽃 양귀비는 씨를 너무 많이 뿌리면 잘 자라지 못해서 꽃으로 관상하기가 어렵다. 양귀비 싹과 풀을 구분하는 좋은 방법은 잎이 톱날같고 그 잎에 물방울을 머금고 있는 것인데 보면 볼수록 아름다운 꽃이다. 햇볕만 잘 들면 박토에서도 잘 자라고 성장력도 좋다.
어릴 적 내가 살던 집에는 일본풍으로 잘 정리된 정원이 있었다. 그곳에 해마다 양귀비가 무리져 피어났다. 물론 지금 양귀비와는 다른 종이다. 초여름, 평상에 앉아 할아버지와 양귀비 꽃을 감상하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는 내게는 무서운 호랑이였지만 유독 꽃을 좋아하셨다. 그래서 마당에는 항상 화초가 만발하였다. 청포도 넝쿨아래 할아버지와 일하다가 쉬면서 담소하던 그 날이 그립다.
이 모든 것은 시간과 함께 사라져 갔다. 토건업으로 크게 성공하셨던 할아버지는 시내에서 제일가는 갑부였지만 그의 말년은 너무나 초라했다. 60대 초반부터 후두암으로 고생하셨고 재산은 자손들의 법정다툼으로 탕진되고 20 칸이 넘던 기와집과 주변 부속건물은 장남의 도박자금으로, 정원의 아름다운 소나무와 골동품은 도박 빚의 이자로 사라졌다. 내가 30 년만에 그곳을 찾았을 때 기와집 본채만 아파트 숲에 고립된 채 덩그라니 남아 있었다. 어릴 때 그토록 크고 당당했던 팔작집이 너무 초라하다는 데 놀랐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면서 나를 찾았는데 그때 나는 절에 살아서 마지막 가시는 길을 배웅하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나를 키워주셨으며 무엇보다 노동의 가치를 알려주신 분이시다. 늘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살아야 성공한다고 강조하셨다. 주변 광대한 토지와 30 채가 넘는 별채의 주인였지만 그는 이른 아침부터 해가 저물 때까지 쉬지않고 일만 하셨다.
초등학교 5학년부터 후두암수술로 말씀을 못하시는 할아버지 시봉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유독 나만 그 말씀을 토씨하나 빼지 않고 또렸하게 알아차렸다. 참 희한한 일이다. 그러니 할아버지는 더욱 나에게 집착하였다. 그 분은 아무도 돌보지 않는 나를 키워주셨고 대신 나는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하는 그 분의 말씀을 통역하였으니 참으로 멋진 인연였던 셈이다. 병원의 얘기로는 할아버님은 장파열로 들아가셨다고 한다. 이것이 나와 할아버지의 슬픈 내력이다.
이 일이 오늘 하루 명상의 실마리가 되었다.
사람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이 유한한 수명을 가지고 있다. 그 수명은 다시 까르마의 힘에 의해 새 인연을 받는다. 그것이 이른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다. 살아있는 존재는 언젠가 멸한다는 법칙은 이 세상 모든 앎 중에 가장 최고의 앎이다. 나에게 ‘앞으로 죽음이 있다’는 자각보다 앞서는 자각은 없다.
부처님은 이 세상에 파견된 3 천사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첫번 째 천사는 병든 사람으로, 병든 사람을 보고서 나에게 ‘앞으로 병이 있다’는 자각을 가진다면 그는 천사의 인도를 받는다. 두번 째 천사는 늙는 사람이다. 늙는 사람을 보고서 나에게 ‘앞으로 늙음이 있다’는 자각을 가진다면 그 역시 천사의 인도를 받는다. 세번 째 천사는 죽는 사람이다. 죽는 사람을 보고서 나에게 ‘앞으로 죽음이 있다’는 자각을 가진다면 그역시 천사의 인도를 받는다.
누구나 나이가 들면 병들고 늙고 죽음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지만, 그러나 일상사의 환영에 빠져 착각의 망(網)에 걸리면 천사의 인도를 받지 못한다. 여기에서 천사란 어떤 영적 신비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오염되지 않고 통찰된 눈이다.
이렇듯 교훈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 그러나 교훈은 우리의 끝없는 갈망에 무시 당하고 있다. 실로 갈망이야말로 우리를 오염시키는 주범이 아닌가?
어느날 스승에게 제자가 물었다. 갈망을 완전히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스승은 마시던 물 잔을 왼쪽에다 놓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 잔이 보이는가? 나에게 이 잔은 이미 깨진 것이다. 나는 깨진 잔(이미지)을 즐긴다. 만일 이 잔을 선반에 놓았을 때 바람이 불어 그것을 쓰러뜨리거나 팔꿈치로 툭 쳐서 산산조각 나면 우리는 ‘아! 깨졌구나’ 하고 안타까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잔은 이미 깨진 것이라고 생각하면 잔이 있는 한 순간, 한 순간 소중할 뿐이다.
이처럼 우리가 자신과 사물을 자각하는 방식에 깊은 통찰력을 응용한다면 자신에게 닥치는 수많은 불행의 요소를 행복의 요소로 변화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수많은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너른 통찰력의 부족때문이다. 서로 간에 연결된 수많은 고리를 보지 못하고 눈앞에 놓인 천박한 자신을 절대화하기 때문에 갈등이 생기는 것이다. 자신을 특별시하고 고집하면 남이 적대 대상이 되고 그래서 부부지간 부자지간 친척 간에 불화가 생긴다. 민족을 고집하면 국가간의 분쟁이 생기고 종교를 절대화하면 종교전쟁이 생긴다. 물질과 감각에 목숨을 걸면 헐떡이는 불만이 하루종일 떠나지 않으며 가정에서 자기 고집만 앞세우면 화목한 가정이 될 수 없다. 사회가 불안한 것도 결국 서로 믿지 못하고 자기만 생각해서 화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자기 연고를 고집하면 이웃 지역과 갈등이 생긴다. 전라도 사람이 자기 지역과 사람을 절대화하면 다른 지역과 화합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경상도 사람이 자기 지역과 사람을 절대화하면 전라도 사람을 이유없이 미워하게 된다. 자기가 믿는 신을 절대화하면 이웃 종교가 모두 정복의 대상이 되고 만다. 절대화란 다른 말로 바꾸면 그 개념에 속박 당하는 것이다. 전라도 경상도라는 개념에 속박되는 것이고 자기라는 나르시시즘에 속박되는 것이고 종교라는 개념에 속박되는 것이다. 개념은 물론 전부 자기가 만든 것이다. 불가에서 중시하는 연기緣起의 법칙法則이란 한마디로 서로 다른 가치를 인정하라는 말이다. ‘나’ 없으면 ‘너’ 없고 그 역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일승법계一乘法界요, 세계일화世界一花이다. 이 이치를 깨달으면 덜 싸우게 되고 서로 화합하게 된다. 이치를 깨달으면 바른 반성과 바른 결단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끈질긴 전쟁에서 보듯이, 자기가 믿는 신과 종교를 절대화하니까 모두 수닭같이 분노의 화신이 된 것이다. 개념에 속박 당하고 이념에 속박당해서 사람이 스스로 노예를 자청한다는 것은 너무나 불행한 일이다. 사람이 개념의 노예가 되고서야 어찌 지혜로운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개화기 한국에서 천주교가 제사를 부정하고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도록 한 것이 박해의 큰 단초가 되었다. 기독교에서는 아직도 조상의 제사를 미신취급하는 실정이지만 이 모두가 개념과 사상에 속박 당한 노예 근성의 결과이다.
사막의 문화권에서 태동된 종교는 숲의 문화권 종교와는 달리, 강하고 전체의 끝없는 통합을 요구한다. 왜냐면 서로 간의 불화는 적의 침입에 대항할 단합력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사막에서는 아시다시피 후퇴할 곳이 없다. 온통 모래 천지속에서 양을 빼앗기거나 가진 재산을 강탈당하면 그대로 죽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강한 이념으로 무장한 단합을 전체에 요구한 것이다. 하나의 신, 하나의 이념은 그렇게 발생한 것이다.
그런데 수천 년이 지난 이 땅에서 ‘유목민의 생존을 위한 간절한 절규’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다. 당시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도록 한 결정은 파리의 외방 선교회의 지시에 따라 북경 주교에서 결정하였는데 그 외방 선교회가 조선에 대한 선교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고 뒤늦게 후회했다고 한다.
과연 행복의 씨앗은 무엇인가?
그것은 가진 것을 나누고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속에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싹틀 때 우리는 어느 상태에서건, 어느 위치에서건 행복 할 수 있다. 2천5백 년 전 싯달타 고따마가 몇 번이고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크게 용기를 내어 다섯 비구에게 말한 그 내용은 한마디로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말이요. 너와 나는 하나라는 메세지였다. 그 말은 너무 싱겁고 시시한 말처럼 들리지만 천만의 말씀, 노력 없이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길이다.
아름다운 오월이다. 굴참나무 숲 주변에서 휘파람새가 청초한 가락을 뽑내고 있다. 원츄리가 꽃대를 하늘높이 솟구치면 노란 꾀꼬리가 올 것이다. 여름새 가운데 휘파람새와 꾀꼬리처럼 청아한 목청을 내는 새는 그리 흔하지 않다.
싱그러운 오월이 오면 항상 떠오르는 노래가 있다. first of May 5월의 첫날.
무반주로 나오는 마지막 음절이 절절하다.
Don't ask me why. but time has passed us by Some one else moved in from far away
왜 그랬냐고는 묻지 마세요. 그러나 많은 시간들이 우리 곁을 흘러 지나가면
저 먼곳으로부터 또 누군가가 우리의 자리를 메꾸고 있겠지요.
이제 우리도 살만큼 살다 떠나면 누군가가 다시 이 산속에서 한가로이 계절의 기쁨과 새들의 향연을 만끽할 것이다. 그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