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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수필작가
이명선
전라북도 전주출생․전주여자고등학교, 전북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순천 매산고등학교 교사 역임․『월간 에세이』 천료 등단. 국제PEN클럽, 한국수필가협회, 무등수필, 시누대 회원. 에세이스트클럽 동인․『샘터』 동화 당선․작품집 『북쪽이 아니라 위쪽으로』, 『우리 집 마당엔 연못이 두 개 있다』(공저) 등․현 여성인력개발센터, 현암복지관 강사
│대표 작품│
심혈을 기울인 쓰레기 외4편
언감생심, 밤을 밝혀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거나 머리맡에 놓아두고서 늘 애독하고 싶다거나 무엇보다 운명처럼 다가온 책이었다는, 그런 평(評)은 애시당초 기대하지도 않았다. 다만 보내 준 책을 잘 읽었다며 차 한잔 마시러 오라는 한산 스님의 전화에 일순 마음이 놓이기는 했었다. 스님이 잘 읽었다고 하시기에. 스님은 요즈음엔 글을 쓰지 않지만 나야말로 스님의 책을 애독하는지라 기회를 보아 찾아뵙고 말씀을 들으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마침맞게 전화를 받고 보니 스님이 무슨 평을 하실지 궁금하여 서둘러 집을 나섰다.
절로 들어서는 길목은 오동꽃이 한창이었고 오동꽃은 자신의 존재를 자축(自祝)하는 양 그날따라 보랏빛이 선연하였다. 게다가 바람조차 초록으로 불어올 듯한, 막연한 기대에 가슴이 물드는 오월이었다. 스님은 눈 속에서 움튼 찻잎을 모아 손수 만들었다며 차를 우려 주셨다. 귀한 차를 내주심에 기꺼워하며 서너 모금이나 차를 삼켰을까?
“유란(幽蘭) 보살은 쓰레기를 잘 만들었더군!”
순간 목을 타고 넘어가던 액체가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뭐라고 한마디쯤 해야겠는데 머리 속은 불이 나간 전구(電球)처럼 먹먹해져 있었다.
“세상 모든 일은 의미가 없다며 방에서 나오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를 답답하게 여긴 누군가가 ‘그렇다면 지금 당신 곁에 누워 있는 아이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 질문을 던졌다고 들었습니다. 정말 사람들은 왜 끊임없이 아이를 낳는 겁니까? 그 중에 위대한 인물이라야 고작 몇 명에 불과한데요.”
어찌 정신을 차려 그같이 말한 후 ‘쓰레기’란 말이 생각할수록 억울하여서 나는 점점 변명의 늪 속으로 빠져들었다.
아이를 어디에 쓰려고 낳는 건 아니지 않느냐. 어떤 행위에 꼭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존재가 곧 의미의 전부일 수 있다. 괴테나 톨스토이가 되어야만 가치가 있다고 보는가. 이 같은 책을 내는 건 내 존재 방식이면서 존재 의미이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인 것도 같다.
“제 나름대로 십 년이 넘게 생각하고 쌓아 올린 쓰레기입니다. 스님 말씀은 다음 번 쓰레기일랑은 고통을 느끼며, 더욱 심혈을 기울여 보라는 말씀으로 새겨듣겠습니다.”
변명이란 게 기를 쓸수록 저녁나절 그림자처럼 길어질 뿐 실속이 없는 법. 중언부언(重言復言)과 횡설수설(橫說竪說)로 차린 야단법석을 혼자서 치르고 절 문을 나섰다. 오동꽃은 여전히 피어 있지만 조금 전 환희에 겨운 보랏빛은 이미 허공(虛空)으로 사라져 버린 뒤였다.
작년 봄은 그렇듯 무참히 스러졌다. 올 봄 다시 핀 오동꽃을 보면서 나는 한참을 혼자 미친 듯 웃었다. ‘쓰레기’란 말이 어찌 그리도 통쾌한지. 쓰레기는 버려야 할 것이고 그처럼 미련 두지 말아야 할 것임을 이 봄에 다시 들었다.
끝나지 않은 세뱃길
이철수의 판화 한 점을 보았다. 파란 새가 사각형에 갇혀 있다. 아무리 그림이지만 네모난 도장에 새긴 듯 인정머리없이 가두어 놓았다. 의도적인 표현이겠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지나치게 답답하게 만들고 있다. 이 화가의 작품은 그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물음표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좋아하지만 새는 날아가고 대신 내가 갇힌 기분이다. 그는 무엇을 묻고 있는 걸까? 지금 나는 기억 저 편에 있는 질문 하나를 어설피 끄집어내고 있다.
설날 아침을 쇠고 나면 진외가에 꼬박꼬박 세배를 가곤 했다. 우리 집에서 진외가까지는 꽤 먼 거리였는데 그 당시만 해도 정월은 매섭게 추워서 얼마쯤 가다 보면 발가락 다섯 개가 한데 붙어 버린 듯 얼얼했다. 지금은 고드름 보기가 쉽지 않지만 그때는 집집이 고드름이 일부러 꾸민 듯 발처럼 걸려 있었다. 추녀 끝에서 아침 햇살에 빛나는 고드름이 볼 만하여서 잠시 발이 시린 걸 잊기도 했지만 세뱃길은 늘 춥고 멀어서 지루하였다. 나는 먼 거리를 잊어 볼 요량으로 서둘러 진외가의 돌담을 그려도 보고 어른들 발뒤꿈치만 따라가며 ‘하나 둘 셋……’ 속으로 숫자를 세며 걷기도 했었다. 이윽고 고대하던 돌담이 보이고, 돌담을 돌면 조그만 태극무늬가 그려진 대문이 나왔다. 대문에 들어서 조금 어둡고 좁은 마루를 지나면 바로 큰방으로 들어가게 되어있는데 그 방에는 우리 집처럼 천장에 약 봉다리(봉지)가 촘촘히 매달려 있었고 방 한가운데 양단 마고자를 입은 할아버지가 앉아 계셨다. 아버지와 같은 한의사였지만 쓰고 계신 갓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할아버지가 한 급수 위인 양반으로 보였다.
어른들의 세배가 끝나고 우리들이 할아버지 앞에 일렬로 늘어서면 할아버지는 먼저 수(數)가 많음에 짐짓 겁난다는 표정을 짓고는 해마다 이렇게 물으셨다.
“어따가 쓰는 물건들인고?”
작은집과 우리 집을 합하여 한 열은 넘는 어린 세배꾼은 눈을 내리깔고 서로의 눈치를 보며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생소한 말투가 어색해서 그랬고 질문의 뜻을 몰라서라도 대답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른 집보다 후한 세뱃돈에 정신이 팔려서 할아버지 말씀을 건성으로 흘려 들은 이유가 컸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할아버지가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하신 말씀은 아니었다. 우선 말끝을 올리지 않고 길게 끌었고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어도 재차 묻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랬다. 그저 ‘이 녀석들 많이 컸구나’ 정도의 인사말이었던 듯하다.
어느 해부턴가 나는 할아버지 말씀에 대답을 하고 싶어 조바심이 나기 시작하였다. 누구를 지목하지 않은 줄 그간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다른 집보다 많은 세뱃돈을 주는 데 대한 보답으로 나라도 한 말씀 드리고 싶었다.
막상 입을 열려고 하면 가슴이 떨리고 아교로 입을 붙인 듯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중에도 머릿속은 바쁘게 움직여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럴싸한 답이 한꺼번에 떠올랐지만 중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이렇다고 하자니 그건 아닌 듯하고 저렇다고 하자니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가슴이 답답하였다. 그렇게 번번이 해를 넘긴 채 언제부턴가 세뱃길이 캄캄해졌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는 세배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파란 새는 여전히 갇혀 있다. 내 안에서 할아버지의 질문이 수십 년 동안 갇혀 있었던 것처럼.
‘어따가 쓰는 물건인고?’
세월이 웬만히 흘렀으니 이젠 입을 열어 보겠느냐고 눈으로 묻고 계신 듯하다. 아무리 재촉을 한들 아직도 그럴듯한 답을 낼 수가 없다. 예전엔 생각이 많아서였지만 지금이라고 달라진 건 아니다. 생각은 가지를 쳐서 가시덤불처럼 수선스럽고 혼란은 그간 걸어온 길만큼 깊어졌다. 여전히 이 물음 앞에서는 곤혹스럽다.
나 혼자 끝났다 여기고 그간 홀가분하게 살아왔는데 세뱃길은 발 밑에 그대로 있다. 유적을 발굴하면 없어졌다고 여긴 마을의 자취가 사람들이 걸어 다니는 길 밑에 그대로 숨쉬고 있듯……. 한눈 팔며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느라 잊고 있었지만 여전히 그 길 위에 나는 서 있다.
고양이 복이로소이다
남편이 병원에서 한 일주일 있다 나온 뒤끝이어서 정말로 한우만 취급한다는 정육점을 찾았다. 좋은 사골 하나 달라는 내 말에 정육점 아주머니는 사골보다 좋은 것이 있다며 정육점 바닥의 한 쪽 구석을 가리켰다. 크막한 것이 검은 비닐에 덮여 있다. 왠지 찜찜해 보여서 고개를 흔들었더니, 정육점 아주머니가 구석에 있는 물건을 불끈 들어 내 앞에 처억 올려 놓음과 동시 비닐을 휘익 젖혔다.
“어이, 새댁! 인연이 있어야 이런 물건 만나는 빕여(법이여), 봐, 을매나 싱싱헌가!”
내가 질겁하여 ‘새댁’이란 황감한 소리에 반색할 겨를도 없이 ‘징그러워’ 소리를 얼결에 뱉었더니 이 아주머니 이번에는 냅다 불호령이다.
사람이 먹는 것을 보고 그리 숭한 소리를 하느냐며 환자 속을 다스리는 데는 소머리만한 것이 없다고 소머리 예찬이 대단하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하도 의심을 해서 한우임을 증명하는 증표로 남겨 놓았다며 황색 터럭이 몇 가닥 붙어 있는 귀를 쭈욱 잡아당겨 내 눈에 들이대니 없던 정까지 떨어질 판이었다.
내가 하도 완강히 거절을 하자 이제는 소머리에 정육점의 명예가 걸린 양 결사적으로 나를 설득하고 나섰다.
아직 나이 어려서 물건 보는 눈이 없으니 그저 경험 많은 자기를 믿고 소를 믿고(예의 누런 터럭을 가리키며) 여기서 하늘이 왜 등장했는지 모르지만 하늘까지 믿고 소머리를 가져 가란다.
결국 나는, 그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나이 어리고 경험 없는 새댁이 어쩌다 남편까지 아픈 짠한(불쌍한) 신세가 되어서, 무거운 소머리를 겨울바람 맞으며 질질 끌고서 집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 일이 잘 풀렸으면 나는 내 인생을 복 받은 인생이라 여기며 끝나 가는 겨울을 아쉬워도 했으리라. 그러나 능력 밖의 일을 단호히 거절하지 못한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했다. 정육점 아주머니 말대로 큰 함지박에 소머리를 풀어놓았을 때 그 역한 냄새와 괴기한 모습에 어떻게 해야 좋을지 난감했다. 형체를 알 수 없다면 어찌 해보겠는데 소머리를 대강 잘라 놓았으니 비위가 틀어 오르는 데다 우선 솥에 넣을 수가 없었다. 궁리 끝에 색안경을 꺼내 쓰고 칼을 들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남편은 좀 나을까 싶어 부탁을 했더니 자기 속은 일없으니 다른 사람 속이나 다스리게 남에게 주어 버리라 한다.
남을 주자니 정육점에 지불한 돈이 눈앞에서 왔다갔다하기에 나는 소머리를 싸 짊어지고 하필 진눈깨비 내리는 날, 정육점 골목을 또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저녁내 궁리한 대로 아줌마에게 사정 이야기를 한 뒤, 이 소머리 가져 가고 제일 조그만 사골 하나만 주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이 강철 같은 아줌마에게 그게 어디 당키나 할 소리일까.
먹을 것을 가지고 자꾸 그러면 있는 복도 달아나는 법이라며 아주머니는 새댁이란 칭호는 어디다 팽개쳐 버리고 철이 들어도 한참 들었을 나이 같건만 나잇값을 못한다고 호령이다.
“아, 신랑 생각하면 이 세상에 못 할 일이 뭐 있당가. 부지런히 고아 먹이소.”
한마디 위안이랍시고 으둥그려진 내 뒤통수에 던져 주었다. 이왕지사 이렇게 된 것, 내가 깨방정을 떨어 부정을 타면 어쩔까 싶어 정말로 이번에는 무겁다 소리 한 번 하지 않고 들고 와 자못 비장미를 담아 일을 처리했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디 뜻한 바대로 되어 주던가. 느닷없이 양처(良妻)가 되어 보겠다는 내 의도를 시샘하듯 소머리가 고아질수록 역한 냄새가 진동을 하는 것이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국물이 잿빛인 데다 누르딩딩한 기름이 둥둥 떠 있는 모양이 도저히 먹을 음식으로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옆집 아주머니를 모셔다가 고견을 들었더니 소 이빨을 칫솔로 깨끗이 닦아내지 않았을 경우도 그렇고 병든 소는 고면 고을수록 이렇게 역한 냄새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소머리는 그런 것을 잘 다루는 사람이 사는 법이지 나 같은 어린(?) 사람이 덜컥 사는 법이 아니라 한다.
낭패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어쩌랴. 혹 병든 소를 남편에게 먹였다가 무슨 일을 당한다면 더 큰일이다 싶어 솥째 들어서 밖에다 팽개치듯 부려 놓았다. 그리고 저녁 내내 소머리의 ‘ㅅ’자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다음날 아침, 바깥이 하도 시끄럽기에 부엌문을 여니 기가 막힐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사택 단지에 야생 고양이들이 많은 줄은 알고 있지만 십 년 넘게 살아오는 동안 고양이들이 그처럼 몰려든 꼴은 이때껏 보지를 못했다. 어디서들 몰려왔는지 고양이들이 아예 큰 솥단지를 끼고 잔치, 잔치를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갑작스럽게 문을 여니 고양이들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그 와중에도 젤라틴같이 웅글어진 뼛국을 얼굴에 뭉텅 묻히고 나를 빤히 쳐다보는 놈, 뼈를 입에 물고 튀는 녀석, 고개도 들지 않고 아예 솥 속에 들어가 코를 박고 있는 녀석, 가히 가관이었다.
“그래 좋게 너희들이나 먹어라.”
부엌문을 도로 닫으며 중얼거렸다.
짐승들도 복(福)을 지을 때가 되면 죽는다고 한다. 자신의 몸뚱이로 사람들에게 약이 되어 복을 짓기도 하고 음식이 되어서 복을 짓기도 한다고 한다. 그 덕(德)으로 후생에 복덕(福德)을 누리게 되는데 복을 짓고자 하여도 지어 놓은 인연이 없으면 사람이나 다른 짐승의 눈에 띄지 않아 몸보시를 할 기회를 잃는다고 어느 스님이 그렇게 법문을 하셨다. 그리고 덧붙인 말씀 중에 “며느리가 시아버지 상을 들고 가다 엎어 버리면 며느리 잘못입니까? 시아버지 허물입니까?” 하고 물어서 설왕설래하였는데 스님 말씀이 시아버지의 복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서 밥을 얻어먹지 못한 것이지 며느리의 발꿈치에 하나도 잘못이 없다고 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고 보면 이번 일에서 남편은 나와 고양이와 소를 연결시키는 전원(電源) 스위치 구실을 맡았고 나는? 고양이들의 복 그릇을 채워 주고 소가 복을 지을 기회를 주기 위하여 진눈깨비 날리는 겨울, 시장바닥을 쓸고 다닐 수밖에 없었던 나는, 그들에게 적잖은 빚이 있었을까?
멋진 사람은 꿈에서도 멋지다
한 여자가 괴한에게 끌려가면서 나를 보고 구해 달라고 소리쳤으나 나는 냉정하게 따져 보았다. 지금 연약한 내가 저 괴한에게 덤벼든들 나까지 끌려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 경찰에 신고하는 편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면서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친구가 당장 얼마의 돈이 없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며 매달렸을 때도 수중에 돈이 없다는 핑계로 일언지하에 거절을 했다. 남에게 빌려서 친구를 살릴 생각을 해 보기도 했지만 변제능력이 없는 처지임을 알기에 고개를 돌렸다. 설마 죽기야 하겠으며 걸핏하면 손을 벌리는 버릇을 고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이번 기회에 알도록 해야 한다며 자신의 인정머리없음을 합리화시켰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시험지를 받았는데 전부가 모르는 문제뿐이었다. 아득한 절망감에 떨다가 나는 결국 커닝을 했고 돌아가는 내 눈동자를 스스로 역겹게 여기면서도 답안지를 끝까지 커닝으로 채웠던 적도 있다.
언젠가는 전우(戰友)들이 사력을 다해 싸우는데도 시체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나만 살아 남은 적도 있다. 물론 이는 모두 꿈속의 일이지만 꿈속의 일만은 아닐 것이다. 만일 나에게 위와 같은 일이 눈뜨고 있는 지금 일어난다고 해도 꿈과 다르게 행동할 것 같지는 않다.
이런 꿈을 꾼 날이면 씁쓰레하다. 현실에서는 온갖 이유를 달아 좀스럽게 굴지만 꿈에서 만큼은 시원한 사람이 되고 싶다. 행여나 죽을세라 벌벌 떨고 남의 고통보다 내가 당할 손해를 계산하기 바쁘고 선뜻 선심 한 번을 쓰는 법이 없다. 설령 누군가에게 몽땅 주어 버렸다고 해도 내 것이 나간 흔적이 없을 텐데 풀 한 포기조차 움켜쥐려고 아등바등대는 나를 꿈에서까지 보고 산다.
‘다음 번 에는 멋진 사람이 되어 봐야지’ 내심 기대를 하지만 아직도 꿈에서는 현실의 내가 판박이로 찍혀 나온다. 그러는 나에게 눈을 감은 꿈이 말하는 듯하다.
‘여보게, 눈떴을 때 멋진 사람이 꿈에서도 멋진 법이라네.’
기차에서 내리지 않는 인생
여수에서 전주로 가는 무궁화호 객실 안. ‘이스탄불의 특급열차’ 같은 추리소설을 쓸 건 아니니 날짜까지 쓸 필요는 없으리라. 그러나 이 날 겪은 일은 초특급 미스터리는 아니어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일이었음에는 틀림이 없다.
전주에 사는 지인(知人)이 부모상(喪)을 당해서 그날 기차를 탔는데 기차가 곡성에 닿았을 때였다. 한 군인이 군인다움을 한걸음이라도 흘릴세라 절도 있게 객실로 들어섰다. 그 군인을 보고 있자니 구령이 절로 붙여지면서 내 턱이 덩달아 군인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려고 까닥거리는 통에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충성!’ 하는 요란한 외침과 함께 누군가 벌떡 일어섰다. 놀라서 돌아보니 그 곳에도 군인 한 명이 꼿꼿이 서 있는 게 아닌가. 그 군인 역시 누가 보아도 의심할 수 없는 군인 그 자체였다. 야전 사령관이 쓸 법한 초록색의 동그란 선글라스에 검은 베레모 그리고 얼룩덜룩한 전투복 차림과 무엇보다 영원할 것만 같은 완벽한 부동 자세.
아! 처음에 등장한 군인의 손에 지휘봉이 들려 있다는 말을 했던가? 걸음걸이에 치우치다 보니 중요한 소품을 챙기지 못했다. 처음 군인은 예의 지휘봉을 가볍게 올리는 것으로 경례를 대신했는데 예전 ‘대한 뉴스’에서 국군을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만큼이나 오랜 세월 익힌 노련하고 위엄 있는 몸짓이었다. 경례를 붙인 군인은 옆으로 비켜서서 자기 옆자리를 정중하게 권했고 그들은 끈끈한 연대감을 풍기며 나란히 앉았다.
그들이 유난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곧 창 밖에 펼쳐지는 가을 들판에 눈을 주었다. 그런데 뒤에서 들려 오는 군인 말투의 고성(高聲)이 여간 신경을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그들은 서로가 무슨 병과(兵科)인지를 확인하더니 둘 다 같은 보병 소속임을 알고 새삼스레 다시 악수를 나누는 모양이었다. 그러더니 확실한 교집합(交集合) 관계임을 확인하려는 듯 자기들이 알고 있는 보병 출신의 이름을 대며 ‘이 사람을 아느냐?’고 묻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탁구공 주고받듯 한 열 명의 이름을 주고받았으나 서로가 아는 이름은 좀체 나와 주지 않았다.
듣고 있는 나는 무척 지루했지만 그들은 대한민국 군인답게 참을성이 있고 모르면 모른다고 하는 걸로 보아 솔직하기는 엄청 솔직한 것 같았다. 하기야 도망가지 않고 군인이 된 걸 보면 키 179센티미터에 몸무게 49킬로그램이라는, 미라식 거짓말은 하지 못하는 게 증명된 셈이다.
얼마 있다가는 그들도 지쳤는지 잠시 입을 닫는 듯하더니 처음 경례를 붙였던 군인이 ‘이 사람을 아느냐’며 다시 누군가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나는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제발 서로가 아는 이름이 빨리 나와서 조속한 해결을 보기를 바랄 뿐이었다.
대한민국 군인에 대한 남다른 신뢰와 감사의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사실 참기 힘든 고역이었지만 다행히 객실 안 사람들 모두가 남다른 정신을 가진 모양이었다. 이름을 먼저 댄 군인은 그 사람이 특전사에 있었는데 자기가 특전사 교관을 할 당시 가르쳤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러자 지휘봉을 들었던 군인도 자기도 특전사에 있었다며(아마 또 악수를 했지 싶다) 지독한 훈련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고 둘은 비로소 하나 된 양 입을 맞추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 때까지 내 옆자리는 비어 있었는데 ‘남원역’에서 이번에는 휴가병으로 보이는 어린 군인이 올라와 내 옆에 앉게 되었다. 올해는 태풍 피해로 흉년이라는데 이 객실은 군인 풍년이 든 셈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풍년을 불러온 어린 군인은 뒤에 앉은 고참들에게 경례도 붙이지 않고 버릇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어찌 되었거나 내 주위 삼면이 군인으로 둘러싸였으니 내 생전에 이처럼 철통 같은 안전을 보장받아 본 적은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것도 잠깐, 뒤에 앉아 있던 지휘봉을 든 군인이 그만 자기 자리로 간다고 일어섰고 선글라스를 낀 군인은 다시 화끈한 경례 의식을 치르고 자리에 앉는 듯하더니 일어나 내 옆의 군인에게 다가왔다.
그제야 정면으로 그 사람의 얼굴을 보게 되었는데 특전사 교관을 할 정도로 야무져 보이지는 않아 보였다. 그는 분명치 않은 발음으로 군인 운운하며 손을 쑥 내밀었다. 그가 내민 손에는 나도 언젠가 본 적이 있는 영관(領官)급이 낀다는 반지가 끼여 있었다. 짐작컨대 왜 경례를 하지 않느냐는 뜻으로 보였다.
그러나 내 옆에 앉은 군인은 대꾸도 하지 않고 들고 있던 책을 펼치고 읽는 시늉을 하였다. 자꾸 반지를 들이밀던 군인은 혼자말로 웅얼거리더니 싱겁게 다른 객실로 가버렸다.
“저 사람 군인 아니예요? 보병도 하고 특전사도 했다는데…….”
그들이 이상하다는 걸 그제야 눈치를 챘지만 확인할 겸하여 물었더니 군인 복장을 했을 뿐 군인이 아니라며 군인 행세를 하는 모양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자기도 잘은 모르지만 특전사도 크게 보면 보병이지만 병과를 특전사라고 하지 보병이면서 특전사라고 하지는 않을 거라고 한다. 어린 군인의 자세한 설명이 기특해서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는데
‘군인병에 걸린 사람 아닐까요?’
오히려 나에게 묻는다. 군인병, 듣고 보니 그럴듯한 말이다. 군인 복장을 하고 이 기차에서 저 기차로 다니는 사람은 어쩌면 군인이었던 시절을 가장 좋게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사회에 나와 되는 일은 없고 큰기침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살다 보니 고생이야 죽어라 했지만 남자답고 혈기에 넘쳤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데 길은 없고 아마 그래서 군인 흉내를 내며 과거라는 시간에 빠져 있는 건 아닌지. 그리고 기차야말로 예전의 군인에겐 향수를 자아내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는 생각이 드니 자꾸 반지를 내보이던 남자가 안쓰러워진다.
나 역시 요즘은 과거를 더듬어 보는 시간이 잦아졌다. 부모가 바람막이가 되어 주던 시름없던 시절이며 나름의 고민이 있었을지라도 그리움과 꿈이 있어서 가슴이 부풀던 시절을 그리곤 한다. ‘그 시절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 볼 수 있으면…….’ 이생(生)에서는 불가능한 ‘만약’이란 가정을 놓고 ‘파우스트’만큼 절실하게 갈망하기도 한다.
군인 행세를 하며 아직도 그 시절을 서성이고 있는 그들도 그런 가정법 속으로 자주 잠기었다가 끝내 가라앉고 만 건 아닌지. 과거라는 기차로 곧잘 침잠하는 나에게도 자신도 모르게 그런 증세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순간 두려워졌다.
‘치매 노인이 뭐야, 미래는 없고 오직 과거만이 있는 거 아냐?’
한없이 비약을 하는데 어느새 ‘전주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온다. 나는 한달음에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기차는 지체하지 않고 위쪽으로 내달렸고, 나는 멀어지는 기차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이명선 작품론│
기차에서 내린 로버트 알트만
박 구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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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과 로버트 알트만은 닮았다. 혹은 전혀 다르다. 이명선과 로버트 알트만은 인생의 자질구레한 일상에서 진실을 발견하려 한다는 점에서 닮았고 진실이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에 대한 견해에서 다르다.
두 사람은 인생의 외연적 모습에 비밀이 숨어 있다고 믿는 점에서 쌍둥이이며 그래서 어쩌자는 것이냐, 하고 되묻는 방식이 다르다. 두 작가는 인생의 순간 순간마다 불필요할 정도로 고민하는 점에서 같은 인간이고 그러나 나는 이렇게 살겠다, 라고 결심하는 태도에서 서로 다른 행성에서 온 것만큼이나 다르다. 이명선과 로버트 알트만은 완고하게 보수적이지만 1950년대생 한국의 여성이라는 점과 1930년대생 아메리칸이라는 점만큼이나 다르다. 이 닮은 점과 다른 점은 매우 흥미롭다. 이명선의 대학 동창인 나는 이 흥미가 이끄는 대로 이명선 수필에 대한 소감을 적어 보기로 한다.
이명선은 한국의 무명 수필가이고 로버트 알트만은 아카데미와 깐느가 존경을 바치는 저명한 영화감독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다. 한 사람은 세계적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고 다른 한 사람은 그저 주부작가일 따름이지만 그런 경력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수는 없다. 두 사람은 똑같이 커피 한잔에 진한 감상을 느끼고 무연히 지나치는 취객에게서 쓸쓸함과 향수를 느낀다. 알트만이 미모의 여배우와 사진을 찍는 순간에도 허무와 냉소를 숨기지 않을 때 이명선은 딸아이와 신경전을 벌이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조건에 적개심과 나르시즘을 드러낸다. 이런 적나라한 신경증세의 결과가 알트만의 「숏컷」이며 이명선의 수필집 『북쪽이 아니라 위쪽으로』이다. 나는 이명선의 수필집을 읽으며 알트만의 「숏컷」을 떠올렸다.
두 사람은 틀림없이 같은 줄기세포로 구성된 작가일 텐데 왜 또 이다지도 달라져 버린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이명선의 수필에 수줍게 숨겨져 있다. 이명선은 기차에서 내렸으며 알트만은 기차를 타고 어디까지든지 겁도 없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기차는 창세기적 금기와 인간의 악마성, 나약함, 구원에의 의지를 향해 하염없이 달리고 있는 공포열차다. 나는 알트만의 무모함에 경의를 표하지만 이명선의 절제된 인생관에도 애정을 느낀다.
알트만은 왜 기차에서 내리지 않았으며 이명선은 왜 기차에서 내려 어둠 속으로 흩어지는 기적에 소외감으로 흔들리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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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이 기차에서 내린 이유는 너무도 자명하다. 그에게는 돌아가야만 하는 집이 있는 것이다. 그에게는 남편과 아이들과 아파트와 옆집 아주머니와 설거지와 가계부와 신용카드가 소중하다. 친구들과의 잡담과 가족들이 집을 나간 후에 혼자서 마시는 커피 한잔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하다. 이것이 그가 기차에서 내린 이유이며 존재감의 대부분이다. 반복해서 얘기하자면 그는 오갈 데 없는 주부인 것이다. 그런데 그는 불행히도 작가이기도 하다. 저주받은 일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그는 기차에서 내려 하염없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기차를 연모해 마지않으며 고통스럽게 후회한다. 아마도 그는 이런 순간에 글을 쓸 것이다. 그래서 순진하게도 자신의 수필 제목으로 「기차에서 내리지 않는 인생」이라고 썼다. 그는 수필의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한달음에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기차는 지체하지 않고 위쪽으로 내달렸고, 나는 멀어지는 기차를 한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기차에서 내린 이명선에게 연민을 느끼며 지체하지 않고 위쪽으로 내달리는 기차를 보면서 비애에 빠진 그에게서 동류의식을 느낀다. 대저 인간이란 이따위인 것이다. 이런 불완전성과 구원에의 의지가 이명선을 교회에 나가게 하고 깊은 산속에 있는 암자를 찾아가게 한다. 그는 이 지구상 어딘가에 기차에서 내리지 않는 인생이 있을 것으로 믿는다. 그 인생의 이름은 신(神)이거나 한산(閑散) 스님이거나 심지어는 플로베르이거나 알 카에다일 수 있다. 혹은 매트릭스이거나 매트릭스 속의 네오(neo : one 유일신이라니?)일지도 모른다.
알트만은 자신이 기차에서 내리지 않는 이유를 인간의 위선에 대한 적개심 때문이라고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작품 속에서 시나리오 작가가 시놉시스를 열 단어 이하로 설명하지 못한다고 힐난하는 영화기획자를 살해하고, 평온하게 살고 있는 마을 사람들 전체를 비열한 범죄자들이며 너희들 모두가 저주받은 카인의 후예들일 뿐이라고 증거한다.
로버트 알트만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다. 물론 그에게도 아내와 자식들과 따뜻한 식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요소들을 자신의 존재 이유로 믿지 않는다. 그는 기차를 타고 정처 없이 방황함으로써 위로받기를 원한다. 싸늘한 냉소와 조롱이 그의 무기이다. 그의 기차는 인간부정으로 가득 차서 구토를 요구한다. 사르트르가 아우슈비츠 이후의 세계에 대해 구토만이 실존의 이유라고 외쳤던 것처럼.
한편, 이명선의 기차는 다소 우화적이다. 그는 기차에서 자신들을 용감무쌍한 공수부대 요원이라고 믿는 군인병자들을 만난다. 이 짝퉁 군인들은 열심히 자신들의 무용담을 떠벌리고 충성! 구호를 외치며 민간인들에게 존경을 요구한다. 물론 이명선은 그들을 존경하는 대신 연민과 정체 모를 애정을 느낀다. 아마도 전쟁 혹은 철권정권의 비인간적 희생자일 짝퉁들에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명선은 처음에는 그들을 어처구니가 없다는 정도로 바라본다. 그렇지만 기차에서 내리고 난 후에는 그들을 미화하고 성스러움을 부여한다. 일상에 마모되어 가는 자신에게 군인병자들이 계시를 주기 위해 본색을 감추고 나타난 영웅이 아닐까, 하고 느와르적인 상상에 빠지고 싶어한다. 마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지옥의 묵시록」에서 베트남 인민들을 살육하는 장면을 찍으며 바그너를 삽입하듯이. 황석영이 「손님」을 쓰면서 통일을 귀신처럼 몸서리치듯이.
이명선의 미덕은 자신이 방금 내린 기차가 사실은 군인병자들을 싣고 가는 너절한 고철덩이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무의미하게 스러지는 자신에게 소중한 상징이기를 원한다는 점이다. 알트만처럼 인정사정 볼 것 없이 치부를 발가벗기기보다는 순결하게 기도하고픈 욕망을 숨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기차는 이창동이 「박하사탕」에서 참회의 양식으로 사용한 인서트처럼 따뜻하게 그리움을 던져 준다. 그는 구토 대신 거의 무의미할 게 뻔한 자신과 이웃의 덧없는 인생을 애무하고자 한다. 이 장면은 마이크 피기스의 「라스베이거스를 떠나며」의 라스트 신을 연상시킨다. 주인공인 창녀 엘리자베스 휴는 알코올 중독자인 너절한 애인 니콜라스 케이지를 위해 마지막 남은 육신을 선물하고 바리데기가 된다. 이명선은 군인병자들을 하염없는 모성으로 끌어안고 싶어한다. 그렇다. 사랑은 구토보다 아름답다. 모성애보다 위대한 건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이명선이 기차에 다시 올라타기를 기대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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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명선의 타인에 대한 시선은 자기애의 소산이며 상상력이나 해몽에서 출발한다는 혐의가 없지 않다. 무슨 얘기냐 하면, 그는 기차에서 만난 군인병자들을 연모할 뿐이지 결코 손을 내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또 다른 인상적인 수필 「택도 없는 에스프레소」를 보면 작가가 얼마나 겁쟁이이며 이기적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는 어느날 은행에 갔다가 현금 입출기에서 앞사람이 남기고 간 영수증을 발견한다. 그 영수증에는 잔액이 2,320원 남아 있다. 마침 설날 하루 전이어서 2,320원이라는 잔액은 그를 곤혹스럽게 한다. 잔액 2,320원의 주인인 중년남자는 황급히 자리를 떴고 이명선은 간절한 심정이 되어 중년남자를 찾아 나선다. 설날에 2,320원이 남았다니 대체 어쩔 셈이냐고 동정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중년남자는 수많은 인파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허망해진 작가는 그때부터 하릴없이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를 배회한다. 2,320이라는 글씨가 명치끝에 박힌 채로. 그는 커피도 마시고 서점에 들러 소일처럼 책도 보고 영화도 본다. 백화점에서는 적선을 요구하는 처녀와 비굴하게 웃는 남자도 만난다. 마침 영화는 시시해서 화도 난다. 그러면서 이명선은 “아니지, 이건 뭐 택도 없는 에스프레소 같은 거야.” 하고 중얼거린다. 새로 산 옷이 틀림없이 자기에게 어울리지 않을 거라고 자조하면서. 이게 중년남자의 잔액 2,320원을 조우한 이명선의 전부다.
그는 터미널을 빠져 나오며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왜 이리도 많고 복잡한지 잠시 어지럽다. 그런 후에는 서둘러 기차에서 내린다. 그날따라 과소비를 한 덕에 이명선에게도 잔액이 2,320원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그제서야 그는 겨우 원인 모를 비애와 죄의식에서 벗어난다.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기차를 바라보며 쓸쓸해진다.
작가의 이런 태도는 그의 수필 거의 전편에 소롯이 담겨 있다. 마치 전쟁 불개입을 선언한 작전 통수권자의 회고록처럼. 사실 미필적 고의는 중산층의 세련된 교양이며 무한투쟁적 생존게임에 매일같이 임해야 하는 자본주의에 충실한 자세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작가란 일종의 파산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나는 지난 80년대에 수많은 시인과 묵객이 있었건만 박노해와 김남주, 「장산곶매」, 김민기 외에는 값을 쳐주지 않는다. 이런 나의 편견은 무임승차자로서의 부끄러움 때문이다. 내가 만난 박노해 등은 인간적으로야 허점도 수다하고 유치한 구석도 없지 않았으나 그들은 군인병자와 잔액 2,320원의 중년남자에게 악수를 청할 손이 있었다.
나는 이런 손의 임자를 작가라 부른다. 박노해 등은 당대의 작가가 된 대신에 육신은 망가지고 정신은 고독과 분노로 일그러졌으며 아내와 애인, 자식들은 파산자의 멍에를 뒤집어쓰는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시인이 대관절 무엇이기에 사랑하는 여자로 하여금 군홧발에 척추가 부러지게 하고 어머니 동지는 망령이 든 것처럼 세상을 저주했을까? 불효자 시인이자 페스트보다도 몹쓸 남편은 참으로 미욱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 손으로 군인병자라고 할 수 있는 우리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이다.
나의 편견이 맞다면 이명선의 손은 너무 곱고 매끈하며 세련된 것이다. 나는 마치 철 지난 군밤장수처럼 화사한 봄날에 생뚱맞게도 ‘군밤 사려’를 외치고 있는 중이다. 지금은 지난 세기의 악몽 따위는 잊은 지 오래인 2006년이 아니던가? 오늘은 마치 벚꽃놀이라도 나가야 할 지경으로 화창해서 신형 작가들은 무라카미 하루끼를 신사처럼 참배하며 디지털화된 감수성을 뽐내기에 바쁘거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동기인 이명선에게 억지투정을 부리듯 기차에 다시 올라타라고 권유하는 이유는, 그의 세밀하고 따뜻한 시선이 이제는 용광로처럼 시뻘겋게 지글거리거나 무지막지하게 성능이 좋은 굴착기처럼 지반을 뚫고 인생의 비밀을 퍼 올리거나 마우스를 현란하게 작동시키는 마르께스적 판타지까지 수용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명선이 촌평을 부탁한다며 보내 준 수필을 죄 읽어 본 소감은 재미있으며 유머러스하고 우아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외계인을 만나면 우선 밥은 먹었니? 하고 인사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돌아가신 어머님의 영전에 흑산도 홍어찌개를 올리지 못하고 국적불명의 가오리찌개로 대신한 한스러움을 마음 깊은 곳에 새겨 꽃상여를 떠올리며 명복을 비는 기품이 있다. 나는 거기에 치열한 작가정신을 더하고 싶은 욕심을 품은 것이다. 이게 이명선 수필의 독자로서 감히 청구하는 독촉장이다. 아마도 나는 이명선에게 로버트 알트만을 만나라고 강요하고 싶은가 보다.
둘은 DNA가 닮았으니 못 할 것도 없지 않은가? 악취미대로 말한다면 나는 이명선에게서 돌아갈 집을 몰수하고 서영은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낙타나 한 마리 선물하고 싶다. 아 참, 낙타가 아파트보다 더 비싸다고 했던가? 낙타는 다분히 소녀 취향에다가 호사스러우니 이명선은 급한 대로 맨발로 사막에서 헤매는 건 어떨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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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선은 깊은 산속 암자에서 면벽수행하고 있는 한산(閑散) 스님으로부터 쓰레기를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런 부당하고 교만하기 짝이 없는 비난을 받은 이명선은 출가인이니까 봐주자는 심산이었는지 너그럽게 수용해 버린다. 출가인들 중에는 이렇게 가당치 않은 위인들이 심심찮게 끼어 있다. 하여튼 이명선은 속으로 끙끙 앓다가 이런 결론에 이른다. 나에게도 충실한 가정부가 있다면 플로베르처럼 「보바리부인」도 쓸 자신이 있다고. 참으로 깜찍한 저항이다. 플로베르에게 유능한 가정부가 있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이명선은 서둘러 변명을 해대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불후의 명작은 충실하고 유능한 가정부로부터 출생하는 것일까? 이건 어딘지 수상하지 않은가?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천사 같은 타자수 출신 아내와 재혼한 후에야 불멸의 작품들을 수도 없이 쏟아내기는 했다. 그는 악덕 출판업자로부터 기한 엄수라는 처형을 받고서 거의 구술만으로 「악령」과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백치」 등등 인류의 문화유산이라 할 만한 걸작들을 토해 냈다. 그렇다고 진짜로 불후의 명작들이 충실한 아내 덕분이라고 말할 수야 없지 않은가? 그렇게 말한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문명은 차라리 악덕 출판업자 덕이라고 말하는 게 타당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나는 이명선에게 다시 한 번 권유한다. 기차를 바라만 보지 말고 쫓아가서 올라타라고. 잔액이 2,320원 남은 중년남자를 동정하지 말고 스스로 빚 독촉과 파산을 당해 보라고. 월남 파병 용사인 오빠의 불운을 감상만 하지 말고 총을 들고 베트남의 정글에 파병되어 보라고. 그리하여 로버트 알트만을 섭취해 보라고. 알트만은 이명선에게 꼭 필요한 비타민인지도 모른다.
이명선이 코방귀를 뀌면서 국문과 동기생의 촌평을 재수 없다고 무시하기를 기대한다. 20년 전쯤 방문했던 뻬쩨르부르그의 형장에서 도스토예프스키가 올라갔다는 처형대를 바라보며 나는 통곡할 것 같은 감명을 받았다. 작가란 모름지기 단두대에 올라가 목숨을 내밀어야 하는 사형수일 수밖에 없단 말인가? 이런 감상에 젖어 있을 때 국회의원 출마자로부터 단체로 관광 향응을 받고 왔다는 대한민국 아줌마들이 고래고래 지르는 최헌의 「오동잎」이 계시록처럼 울려 퍼지는 것이었다. 빅토르 최의 목소리처럼 우울하고 매혹적인 뻬쩨르부르그의 암회색 하늘은 화들짝 놀라서 어떻게 하면 체통을 지킬 수 있을까, 고민스럽게 시늉을 하고 있었다.
│문학적 자전│
해찰의 힘
이 명 선
‘너는 내 운명’이란 영화 제목을 보며 과연 내게도 운명이라 부를 대상이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명색이 글을 쓰고 있으니 글쓰는 일이 내 운명? 월간 에세이 원종성 선생님께서 전해 주신 등단 소식을 듣고 당시에는 구름 위에 올라탄 듯 마음이 들떴었다. 하지만 15년 동안 이런 저런 글을 쓰면서 한 번도 글이 내 운명이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무엇이 운명이 되려면 그러할 수밖에 없는 필연과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를 우연이 묘하게 얽힌 연장선이 있어야 한다. 아니면 한 대상에 몰입하여 그것이 운명이 되도록 만드는 뜨겁게 넘치는 열정을 지녔거나.
뷔페에 가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한꺼번에 이것저것 먹고 나면 배는 부르지만 무엇을 먹었는지 몰라서 기분이 나빠진다면서 최하위의 음식이라고 혹평하는 이가 있는 반면 나 같은 사람은 뷔페를 마다하지 않는다. 평소 대할 수 없는 여러 가지 음식도 그렇지만 선택의 즐거움까지 있는 데다 음식 가짓수만큼 각양각색인 사람 구경을 할 수 있으니 그것 또한 괜찮다. 글이 내 운명이 되지 않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을까 싶다. 글은 내 인생이란 뷔페에 차려진 한 메뉴로 존재한다. 다양함 속에 들어 있는 어느 한 가지로. 다만 그 중에 그런대로 기억에 남는 음식, 조금 더 욕심을 부린다면 다음에 다시 한 번 먹어 보고 싶은 음식, 그 정도가 내 인생에서 글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이다. 여기까지 읽으신 분 중에는 그래서 아마추어라고 할 분이 있으리라. 나 역시 부인할 생각은 없다. 글로 의식주를 해결한 적이 없고 치열하게 써 본 적이 없으니까. 글은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방편이지 목적지는 아니라는 생각에 일부러 만들어 가며 쓰지 않았다.
꼭 해야만 할 당위성이 있지도 않았고 기어이 하고 싶은 욕구도 없었으면서 그러면 왜 이제껏 이 일을 붙들고 있는가. 수행의 길을 묻는 제자에게 어느 스승이 사가이면면(斯可以綿綿) 불가이근근(不可以勤槿)하라고 일렀다고 한다. 너무 부지런 떨다 지쳐 떨어지지 말고 그저 아니 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내 지나온 길이 그 격이었다고 본다. 만일 글이 내 운명이라고 덤벼들었다면 진작 포기하고 말았으리라. 어떤 일은 밤을 꼬박 새우며 남보다 진한 무늬를 찍어 보려고 기를 써 본 적도 있지만 지금껏 계속되고 있는 일은 없다. 그나마 연속무늬를 그리고 있는 건 이 글쓰기뿐이다. 화려한 사방연속 무늬는 아닐지라도 단조로우면 변화를 주면서 멈추지 않고 그려 나가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콩은 거름이 부족하다 싶으면 자신의 성장에 필요한 거름을 스스로 만들며 자란다고 한다. 이 글쓰기가 오늘까지 실개천으로나마 흐르는 이유를 굳이 찾다 보니 콩까지 들먹이게 되었다. 콩처럼 거름을 만드는 자가발전의 힘을 나는 해찰에서 얻는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 적에도 혼자 다니며 이것저것 살펴보는 일을 좋아했다. 여럿이 다니면 정신을 딴 데다 팔고 다니면서 젖어들 수 있는 느슨한 즐거움을 맛볼 수 없다. 딴 데 정신을 팔고 다닌다고 했지만 이렇다 하고 정해 놓은 정신이 없으니 그래서 자유롭다. 혼자 다니면 때론 말벗이 그리울 때도 있으나 사람은 물론 거미줄 치는 거미에서부터 길가에 무심히 피어난 강아지풀까지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미 혼자가 아니다. 이제껏 써 온 글이란 해찰하다 집어 들었거나 주워들은 것들이다. 앞으로도 이런 해찰을 하며, 또 해찰하는 나를 해찰하면서 면면히 흘러 볼 작정이다.
이 글을 쓴 뒤 도착한 박구홍 씨의 소위 ‘이명선 작품론’을 보니 잔뜩 뉘만 골라 놓았다. 원래 수준급 독설가에게 글을 청할 때야 입에 발린 칭찬을 기대하지 않았으나 쌀 한 톨이라도 내놓지 않는 데 대한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이제 주부로서의 손은 손익분기점을 넘겼으니 맥없는 플로베르나 군인, 떠나는 기차에 자신을 찍어 바르지 말고 모셔 둔 작가의 손을 과감히 빼내어 오갈 데 없는 주부 작가의 신세를 벗어나라는 뜨끔한 글이었다.
아스라이 봄빛 언덕이 푸르른데 실눈 뜨고 가늠해 보니 갈 길이 솔찬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