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최근 지자체들의 콘텐츠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는 하드웨어에서 소프트웨어적 요소로 그 중요성이 옮겨갔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지역의 홍보를 위해 커다란 상징물을 세우는 등 보여주기에 급급했다면 이제는 지역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역만이 가지고 있는 콘텐츠는 지역의 이미지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고 이는 지역 경제 발전에도 보탬이 된다.
두 번째는 골목이나 작은 마을의 새로운 발견이다. 사람들은 이제는 일상이 된 스마트폰을 활용해 정보만 있다면 어디든 찾아간다. 접근성이 굉장히 떨어지는 곳일지라도 흥미로운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지역 콘텐츠는 더욱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고 있다.
우리 지역 역시 이러한 시류에 앞장서 논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에 따라 본지는 다뉴세문경, 은진미륵, 강경근대문화거리 등 논산만의 이야기들을 발굴해 논산만의 색깔을 만들고자 한다. 그 첫 번째 시리즈로 ‘역사의 그늘에 감춰진 논산의 승장 김수문 장군’을 재조명해본다.]
우리지역 학생들에게 논산의 역사인물로 기억나는 장수를 꼽으라면 대다수의 학생들이 계백장군을 연상한다.
계백장군은 지금부터 1,356년 전 660년 황산벌에서 5천의 결사대를 거느리고 김유신의 5만여 신라군과 싸우다 전사한 패장이다.
계백은 풍전등화에 놓인 백제의 장수로서 황산벌전투에 임하기 전에 처자(妻子)를 모두 자신의 손으로 죽였고 자신 또한 장렬하게 전사했다.
어쩌면 싸우기 전에 이미 승패가 결정된 자살과 다름없는 전투였음을 계백 장군 스스로 알고 있었다.
황산벌전투는 백제의 땅에서 치러진 전투이기에 지형지물을 잘 이용했고 죽기를 각오하고 잘 싸워 처음 네 차례의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소모성 전투였다. 그렇지만 계백은 백제의 충신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 논산에 명성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승장(勝將)이 있다. 바로 김수문(金秀文, 1506~1568) 장군이다. 장군은 현재 노성면 호암리 나지막한 양지바른 산기슭에 잠들어 있다.
▲ 논산의 낳은 승장 김수문…유비무환으로 제주의 안보를 지키다
논산이 낳은 김수문 장군은 조선 중종 때 무과에 급제했다. 1535년(중종30) 여진족이 함경도 종성을 침입하여 백성들을 납치해 갔을 때 김수문은 영달만호(永達萬戶)의 직책으로 전투에 참가해 많은 적을 사살하고 끌려갔던 조선의 백성들을 구해왔다.
김수문 장군이 용맹을 떨친 시기는 1555년 을묘왜변(乙卯倭變) 때다. 을묘왜변은 1555년(조선 명종 10년) 5월초에 왜구의 침략사건이다.
왜구들이 해적선 80여척을 거느리고 전라남도 해남군 달량포를 기습하여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 일대 10진을 함락시켰으나 조선은 곧 반격하여 왜구들을 몰아냈다. 그러나 왜구는 퇴각하는 길에 1,000여명이 40여척의 해적선을 거느리고 6월 27일 제주도를 공격했다.
당시 제주의 전체 인구는 2만여 명에 불과했으나 제주 목사(牧使, 고려·조선시대 지방의 행정단위인 목에 파견되었던 장관) 김수문은 평소에도 유비무환의 자세로 해적들의 침략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로써 왜구의 공격에도 민·관·군이 합동으로 철통같이 제주를 지킬 수 있었다. 김수문 장군은 3일 동안 왜구와 대치하며 기회를 엿보다 무술이 뛰어난 명사수 70여명을 이끌고 적의 지휘부를 기습해 적장을 죽이고 적진을 흐트러뜨려 무력화시킨 후 공격하여 다섯 척의 해적선을 빼앗고 왜구를 물리쳤다.
조선의 조정(朝廷)은 을묘왜변이 큰 충격이었다. 왜구를 토벌하러 간 장수들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등 국난으로 상처가 컸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비상설 기관이었던 비변사가 상설기관으로 격상되어 흥선대원군 집권 전까지 상시 운용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무신들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원군의 도움을 청할 수 없는 제주에서는 초전에 왜구를 물리쳤다. 이러한 결과 뒤에는 김수문 장군의 철저한 대비가 뒷받침 되었다. 1555년 9월에도 바다에서 해적과 전투가 있었지만 해적선을 화포와 총통으로 불사르고 해적 54명의 목을 베었다. 뿐만 아니라 해적의 포로가 된 중국인까지 구해냈다.
이듬해인 1556년 6월 해적의 침입에서도 역시 화포를 사용해 해적선 4척을 불태우고 1척을 나포 및 해적 97명의 목을 베었으며 한 달 후 또 다시 해적선 12척이 침입했지만 2척을 나포하는 한편 해적 75명의 목을 잘랐다.
김수문 장군이 2년 7개월 동안 제주목사(1555~1557)로 재임하는 동안 해적들은 제주도에서 섬멸되었다.
김수문 장군은 1557년(명종 12) 10월, 청렴하고 매사에 조심성과 재략(才略)이 있으며 변방을 맡아 명성과 치적을 쌓은 공을 인정받아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어 떠나니 사람들은 그를 훌륭한 목민관이라 불렀다.
장군은 1558년(명종 13) 지중추부사를 지냈으며 1565년(명종 23) 한성판윤에 특진되었고, 같은 해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만주인의 침입을 격퇴했다. 이후에도 두 차례나 평안부사로 보직되어 북변 방위에 많은 공을 세웠으나 전장에서 발생한 부종으로 인해 사망했다.
▲ 죽어서도 일제를 치를 떨게 했던 김수문 장군…그에 대한 우리지역의 기억은?
제주의 망경루(望京樓)는 1956년(명종 11) 당시 제주목사였던 김수문이 창건한 누각이다. 망경루는 북두성을 의지해 임금이 있는 서울을 바라보며 은덕을 기리던 곳이면서, 왜구 등 해적들의 침입을 경계하는 곳으로 활용했던 곳이다.
조선시대 지방의 20개 목(牧) 가운데 제주목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는 김수문 장군의 유비무환 정신과 용맹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현재 노성면 호암리 산기슭에는 김수문 장군의 신도비 귀부가 있다. 1980년경 귀부 앞에 세워진 기념비에 의하면, 왜구들이 비신(碑身,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을 없앴는데 당시 귀부(龜趺,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의 등 쪽이 갈라지면서 붉은 피가 나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이 일제는 외딴 산속에 홀로 있는 비석까지 훼손하며 우리의 역사적 사실까지 지우려했고 왜곡시켰다. 이는 김수문 장군의 기세가 왜구들에게 얼마나 무서웠는지를 반증하고 있다.
비석훼손도 모자라 일제는 강점기 36년 동안 전방위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철저하게 소멸 또는 왜곡시켰다. 이는 해방 이후에도 지금까지 우리 역사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한 번도 패한 기록이 없는 ‘백전무패’의 용사, 김수문 장군. 그는 결국 전장에서 사망하여 고향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죽어서도 일제에게 조선 호랑이의 기세를 보여준 자랑스러운 장군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천 년 전 황산벌에서 패한 계백 장군의 그늘에 김수문 장군의 노고는 오랜 시간 가리어져 있다. 이제 논산이 이러한 김수문 장군의 역사를 기억하고 누구보다 이를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 조성우 기자